루이 필리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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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필리프 1세
Louis-Philippe I
루이 필리프 1세의 초상화, 프란츠 빈터할터 작, 1841년
루이 필리프 1세의 초상화, 프란츠 빈터할터 작, 1841년
프랑스인의 왕
재위 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즉위식 1830년 8월 9일
전임 샤를 10세
후임 (왕정 폐지)
총리
안도라 공동대공
재위 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전임 샤를 10세
후임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오를레앙 공작
재위 1793년 11월 6일-1830년 8월 9일
전임 루이 필리프 2세
후임 페르디낭 필리프
군주 루이 18세(1815년~1824년)
샤를 10세(1824년~1830년)
이름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
신상정보
출생일 1773년 10월 6일(1773-10-06)
출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파리 팔레 루아얄
사망일 1850년 8월 26일(1850-08-26)(76세)
사망지 영국 서리 클레어몬트
왕조 카페 왕조
가문 오를레앙가
부친 루이 필리프 2세 도를레앙 공작
모친 마리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도를레앙 공작부인
배우자 마리아 아말리아 테레사 디 시칠리아 왕녀
자녀 틀:일반목록
종교 천주교
묘소 드뢰 왕립성당
서명

루이 필리프 1세(프랑스어: Louis-Philippe Ier, 1773년 10월 6일 ~ 1850년 8월 26일)는 프랑스(재위: 1830년 ~ 1848년)이다. 본명은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Louis-Philippe d'Orléans)이다. 그의 아버지의 별명이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인 고로 프랑스 혁명 중에는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로 불렸으며 나중에 1830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지냈다.

그는 자신의 통치 모델로 선택한 영국의 정치 제도에 열광하였으며,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금융과 수공업 부르주아들이 빠르게 자본을 쌓아갔던 반면 노동자들은 극도로 비참했다. 그로 인한 끊임없는 민중 반란이 그의 통치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파리에서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은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이며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이라고 알려진 루이 필리프 조셉 도를레앙(1747년-1793년)과 루이즈 앙리에트 마리 아데라이드 드 부르봉(1753년-1821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5년 죽은 그의 할아버지의 발루아의 공작(duc de Valois)의 작위를 1774년 출생할 때 수여받았고 그리고 이어서 샤르트르의 공작(duc de Chartres)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프랑스 혁명에 참여하였다. 그는 사령관으로써 발미, 제마프, 네르빈덴 전투에 참전하였다.

1790년 자코뱅 당에 들어갔다가 1792년 아버지가 처형당하자 그의 상관인 뒤무리에 장군을 따라서 루이 필리프는 1793년을 오스트리아에서 보냈고 미국필라델피아에서 4년을 망명하는 등 인생의 방황기를 보냈다.[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았지만 그의 추방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1809년 루이 필리프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이고 페르난도 1세의 딸인 마리 아멜리 드 부르봉(1782년 - 1866년)과 결혼을 한다. [2] 그들은 열명의 자녀를 두었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사임을 한 후, 루이 필립은 프랑스로 돌아와서 살기 시작했고 자유사상을 보호하는 데 힘썼으며 팔레 루아얄과 오를레앙공작(duc d'Orléans)작위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 혁명 중 재산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보상법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본 사람이다.

루이 18세샤를 10세 치하의 부르봉 왕정복고기간 동안 루이 필리프의 인기는 커졌다. 그는 극단적인 왕권주의에 반대했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잊지 않았다. 루이 필리프는 자녀들을 일반고등학교에 보냈고 겸손하고 평범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았다. 루이 18세가 죽은 다음날, 그는 새로운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에 의해 왕위계승권을 얻었다.

프랑스인의 왕[편집]

즉위 과정[편집]

1830년 7월 혁명샤를 10세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났다. 샤를 10세는 '루이 필리프'를 왕실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루이 필리프는 금융 귀족들의 지지로 하원 의회에 의해 《프랑스인의 왕》으로 발표되었다.(《프랑스의 왕》이 아니다.) 이 새로운 직위[3]는 국민에 국민의 왕정정치를 나타내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러므로 루이 필리프의 왕정은 국민의 대표와 왕사이의 하나의 계약서가 기반이 되는 계약 왕정이었다.[4] 7월 왕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새로운 왕정의 다른 상징은 왕정복고때의 하얀 국기를 현재의 프랑스의 국기로 교체한 것이다. 국민들의 지지와 함께 루이 필리프가 권력에 오르는 것은 유럽 각국 왕궁의 적대감을 샀고 루이 필리프폭동왕 혹은 시민왕 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통치[편집]

루이 필리프의 왕권에 이의를 제기한 앙리 5세의 지지자들은 정통왕정파를 이루었다. 사실 《진짜》 왕정파들은 샤를 10세가 왕위에 있는 것처럼 여겼으며 그의 왕위 계승은 무효라고 여겼다.

미국에서는 앤드루 잭슨1829년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는데,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선박들의 나포에 따른 약탈에 보상 요구가 긴장 관계를 야기하였다.[5] 프랑스 해군이 미국 선박들을 나포하고 어떤 보상이나 사법적 절차도 없이 강제 노역을 시키고서는 스페인의 항구로 그 배들을 끌고 갔었다. 미국의 국무장관 마틴 밴 뷰런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는 "희망이 없었다." [5] 그러나, 잭슨 정부의 주(駐)프랑스 공사 윌리엄 캐벨 리브스는 외교를 통하여, 배상금으로 2500만 프랑(500만달러)를 지급하는 배상금 조약에 프랑스가 서명(1831년 7월 4일)하도록 하였다.[6]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내부의 재정 결핍과 정치적 어려움으로 납부를 연체하였다. 루이 필리프 1세와 그의 내각은 프랑스 대의원(代議院)을 비난하였다.[5] 1834년까지도 프랑스 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자, 잭슨은 분노하였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1834년 12월 1일, 메시지를 통한 제6차 국정 연설에서 프랑스 정부의 납입 연체를 단호하게 질책하고, 미연방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단단히 실망했다는 점을 표명하고, 프랑스에 대한 무역 보복을 승인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하였다.[5] 잭슨의 성명에 모욕감을 느낀 프랑스인들은 사과를 요구하였다. 1835년 12월 7일자, 메시지를 통한 제7차 국정 연설에서 잭슨은 사과하기를 거절하면서, 그는 프랑스인들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의도는 평화적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는 조약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해서 길고도 자세하게 설명하였고, 또한 프랑스 정부가 의도적으로 지급을 지연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도 설명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잭슨의 교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836년 2월에 마침내 보상금을 지급하였다.[5]

프랑스영국이 협정을 맺으면서 루이 필리프는 1844년 윈저 성을 방문하지만 루이 필리프는 영국빅토리아 여왕을 그의 성에서 1843년1845년에 두 번 맞는다.

몇 년 동안, 루이 필리프는 그의 선임자들이 보여주었던 거만하고 막대한 지출을 하는 것을 피하며 겸손하게 국가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그는 시민왕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인기는 그의 내각이 점점 왕정주의보수주의로 변모하자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반 시민들의 삶의 질이 악화되었고 봉급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1846년부터 1848년사이의 경제위기는 공화당 당원들이 왕에 대항하는 새로운 혁명모임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산업 자본가·공화파의 소시민층·노동자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어, 1848년 2월 혁명 때 왕위를 잃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권력양위와 추방[편집]

드뢰(Dreux)의 생루이 성당

폭동의 전개 이전, 루이 필리프는 1848년 2월 24일 자신의 어린 손자 필리프 드 파리 백작에게 왕권을 양도했다.[7]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일을 겪을까봐 그는 변장을 하고 《Mr Smith》라는 평범한 마차를 타고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상원의회는 그의 손자를 왕으로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바꿔서 여론을 쫓아 프랑스 제2공화국의 발표를 결정한다.

루이 필리프와 그의 가족은 영국에서 그의 죽음(1850년 8월 26일)까지 클레어몬트에서 지낸다. 1876년 그의 시신과 그의 부인의 시신은 1816년 드뢰에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가 건설하고 1820년대 루이 필리프가 성장한 왕실 성당으로 옮겨졌다.

가족 관계[편집]

형제[편집]

자녀[편집]

사진 이름 생일 사망 기타
페르디낭 필리프 도를레앙 공작 1810년 9월 3일 1842년 7월 13일(31세) 오를레앙 공작, 도팽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와 결혼, 2남
| 루이즈 1812년 4월 3일 1850년 10월 11일(38세) 벨기에 레오폴 1세와 결혼, 3남 1녀
마리 1813년 4월 12일 1839년 1월 6일(25세) 알렉산더 폰 뷔르템베르크 공작과 결혼, 1남
루이 1814년 10월 25일 1896년 6월 26일(81세) 네무르 공작
빅토리아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녀와 결혼, 2남 2녀
프랑수아즈 1816년 3월 26일 1818년 5월 20일(2세) 요절
클레망틴 1817년 3월 6일 1907년 2월 16일(89세) 아우구스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과 결혼, 3남 2녀
불가리아 왕국의 차르 페르디난드 1세의 어머니
프랑수아 1818년 8월 14일 1900년 6월 16일(81세) 브라질 제국 페드루 1세의 4녀 프란시스카와 결혼, 1남 2녀
샤를 1820년 1월 1일 1828년 7월 25일(8세) 요절
앙리 1822년 1월 16일 1897년 5월 7일(75세) 양시칠리아 왕국 페르디난도 1세의 손녀 마리아 카롤리나와 결혼, 7남 1녀
앙투안 1824년 7월 31일 1890년 2월 4일(65세) 스페인 페르난도 7세의 차녀 루이사 페르난다와 결혼, 4남 5녀

각주[편집]

  1. 공화국 사령관과 샤를 10세의 사령관이라는 직위로 루이 필리프의 이름이 파리 개선문에 기록되어있다.
  2. 마리 아멜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이고 루이 17세의 사촌이다.
  3. 사실 루이 16세가 1789년부터 1792년까지 먼저 사용 똑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4. 계약서란 곧 헌법을 말한다.
  5. Latner 2002, 119–20쪽.
  6. Cunningham, Hugo S. (1999). “Gold and Silver Standards France”. 2016년 1월 5일에 확인함. 
  7. 그의 아들 페르디낭 필리프는 이 사건 이전에 죽었다.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전임
루이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
1793년 11월 6일~1830년 8월 9일
후임
페르디낭 필리프
전임
샤를 10세
프랑스 국왕
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후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인한 폐지
(나폴레옹 3세)
전임
샤를 10세
프랑스의 국가원수
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후임
자크 샤를 뒤퐁 드 뢰르
전임
신설
(프랑스 제3공화국 설립으로 인한)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
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오를레앙파 계열
후임
필리프 7세/루이 필리프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