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트 칙령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낭트 칙령 원본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은 앙리 4세1598년 4월 13일 선포한 칙령으로,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이외에도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였다.[1] 이로써 앙리 4세는 위그노 전쟁을 끝내고, 개신교가톨릭교도 사이에서 화합을 도모하였다.[2] 낭트 칙령은 위그노에게 광범위한 종교적 자유를 주었으며 개인의 종교적 믿음에 대하여 사상의 자유를 인정한 첫 사례로 꼽힌다.[3] 그러나 이 칙령은 1685년 10월 퐁텐블로 칙령으로 폐지되고 개신교는 다시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받게 된다.

배경[편집]

프랑스의 칼뱅주의 개신교도를 경멸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위그노(프랑스어: Huguenot)는[4] 동맹을 뜻하는 독일어 Eidgenossen에서 유래되었다.[5] 루터칼뱅종교 개혁 이후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성장한 위그노는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던 프랑스 왕정에 의해 계속하여 탄압받아왔다.[6] 1562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의해 위그노의 권리가 일부 인정된 상제르맹 칙령이 선포되었으나 양측 모두 불만이 가라앉지 않았고, 가톨릭 측이 위그노를 살해하기 시작하면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7][8]

위그노 전쟁은 이후 3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1570년 양측은 휴전을 맺고 화평의 증거로 위그노인 나바르 국왕 앙리와 가톨릭 진영인 앙리 2세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사이의 결혼식을 치르기로 합의하지만, 앙리 2세의 아내이자 신부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결혼식에 모여든 위그노를 한번에 없애기로 결심하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일으킨다. 신랑은 간신히 살아남아 억류되었고 양측은 다시 전쟁을 벌이게된다.[9]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당하자 위그노전쟁은 왕위계승전의 양상을 띄고 국제적인 사건이 되었다.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결별한 잉글랜드는 위그노 측을 지지하였고, 스페인은 가톨릭을 지지하였다.[10]

나바르의 앙리는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신,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기로 하고 낭트 칙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앙리 4세가 즉위함으로써 프랑스는 부르봉 왕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11]

칙령의 선포[편집]

앙리 4세

앙리 4세는 1598년 4월 13일 낭트에서 개신교의 "특정한" 권리를 인정하는 칙령을 선포하였다. 두 개의 공증된 문서로 작성된 이 칙령은 파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개신교도가 모여 예배를 할 수 있으며, 개신교도의 보호를 위해 라 로셰에 병력을 주둔하고 그 비용은 해마다 18만 에쿠를 국왕이 지불하고, 위그노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 150개의 요세를 건설한다는 것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낭트 칙령이 선포됨으로써 위그노 전쟁은 종결되었다. 개신교를 탄압하던 법률은 폐지되었으며,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12] 지난 프랑수아 1세 이래 가톨릭 이외의 신앙을 가진 자는 엄벌에 처해졌으며, 밀고자에게는 몰수재산의 4분의 1을 지급해왔었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폐지되었다.[13]

낭트 칙령이 선포되자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개신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이 칙령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것"이라며 즉각 비난하였다.[14]


폐지[편집]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가톨릭만을 국교로 인정함으로써 절대 왕정에 대한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고, 1685년 10월 18일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낭트 칙령을 폐지하였다.[12][15] 낭트 칙령이 폐지되자 위그노들은 신변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많은 수가 해외로 이주하였다. 1685년에서 1689년 사이에 해외로 이주한 위그노는 20만명에서 30만명에 달한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위그노들이 재산을 싸들고 해외로 이주하자 경제가 마비되는 지역이 속출하였다.[16] 이렇게 해외로 이주한 위그노의 상당수는 네덜란드, 영국프로이센을 비롯해 북아메리카까지 퍼져나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였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와 같은 수학자나 과학자들 역시 낭트 칙령이 폐지되자 프랑스 아카데미를 떠났다.[17]

루이 16세가 관용 칙령을 선포한 1787년 이후에야 프랑스에서는 개신교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18]

각주[편집]

  1.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p197
  2. 김정형, 역사 속의 오늘, 생각의 나무, 2005년, ISBN 89-8498-420-5, 230쪽
  3. 이양호, 프로테스탄티즘과 민주주의, 기독교사상 1992년 2월호(통권 제398호), 1992.2, page(s): 2-256
  4. [네이버 지식백과] 위그노 [Huguenots]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가스펠서브).....프랑스의 칼빈주의 신교도를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 어원적으로는 맹약자(盟約者)를 뜻하는 독일어 'Eidgenosse'의 스위스 계열 프랑스어로 본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위그노)를 가리켜 주로 〈개혁파〉(reforme)라고 부른다.
  5. 디트리히 슈바나츠, 인성기 외 역, 교양, 들녘, 2004년, ISBN 89-7527-420-9, 149쪽
  6. 김홍식, 세상의 모든 지식, 서해문집, 2007년, ISBN 89-7483-317-4, 260쪽
  7. 박경민, 세계사 이야기 2, 가람기획, 2003년, ISBN 89-8435-140-7, 146-147쪽
  8. [네이버 지식백과] 위그노 [Huguenots]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가스펠서브).....종교개혁 후 1559년 파리에서 칼빈주의 신앙고백인 〈개혁파신조〉가 작성되면서 많은 신교도가 생겨났다. 이때 교인 수가 약 40여 만 명이었으며 이는 당시 프랑스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 구성원들은 주로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던 중산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562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이유로 위그노 집회를 허락하는 칙령이 내려지자 집권당인 가톨릭 성향의 기즈 당(Guises)이 이에 반발하여 예배 중이던 위그노를 습격함으로써 내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9.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 김청환 역, 퍼플라인 2, 휴먼앤북스, 2005년, ISBN 89-90287-69-3, 314쪽
  10. 이창순, 프랑스 문화의 이해, 학문사, 2002년, ISBN 89-467-8173-4, 219쪽
  11. George A. Rothrock, Jr., "Some Aspects of Early Bourbon Policy toward the Huguenots" Church History 29.1 (March 1960:17-24) p. 17.
  12. 고종석, 히스토리아, 마음산책, 2003년, ISBN 89-89351-38-3, 310쪽
  13. [네이버 지식백과] 낭트칙령 (두산백과).....프랑수아 1세와 앙리 3세에 의하여 규정된 ‘구교 이외의 이단(異端)은 엄벌에 처하며, 이의 밀고자는 벌금 또는 몰수재산의 1/4을 양여한다’ 등의 조항을 삭제시켰다.
  14.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포이에마 P 544)
  15. [네이버 지식백과] 위그노 [Huguenot] (두산백과).....루이 14세는 절대군주제를 근간으로 하는 프랑스의 통일을 원하여 1685년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이후 프랑스 국내에서 지하운동을 계속한 신자도 있었으나 국외로 도피한 자도 많았는데, 프랑스혁명 때까지는 그들의 자유를 회복할 수 없었다.
  16. 기 리샤르, 전혜정 역, 사람들은 왜 옮겨 다니며 살았나, 에디터, 2004년, ISBN 89-85145-87-8, 65쪽
  17. 이와타 기이치, 김정환 역, 위대한 수학자들, 맑은소리, 2008년, ISBN 89-8050-200-1, 64쪽
  18. Encyclopedia of the Age of Political Ideals, Edict of Versailles (1787) Archived 2012년 7월 14일 - 웨이백 머신, downloaded 29 January 2012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