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드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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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1540년? ~ 1596년 1월 27일
별명 엘 드라코드래곤
유형 사략선
탄생지 잉글랜드 잉글랜드 데번 주
사망지 Flag of Cross of Burgundy.svg 스페인 왕국령 파나마 포르토벨로
소속 잉글랜드 왕국 사략선단
활동기간 1563년 ~ 1596년
계급 해군 중장
활동근거지 카리브 해
기함 골든 하인드 호
참여전투 칼레 해전
재산 현시가로 미화 1억 2천 4백 10만 불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해적기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 1540년경~1596년 1월 27일)은 영국해적, 군인, 탐험가이다. 라틴어 이름은 프란시스쿠스 드라코(Franciscus Draco), 스페인어 이름은 프란시스코 드라케(Francisco Draque)이며, 해적 때문에 골치를 앓던 스페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드라코' 혹은 '엘 드라케'라 불렀다.[1](다만 당시 해적 행위는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일주를 달성했다.

1581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생애[편집]

1543년의 2월(혹은 3월),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남부 잉글랜드 데본의 타비스톡(Tavistock)에서, 에드먼드 드레이크(Edmund Drake)와 메어리 밀 웨이(Mary Mylwaye)의 사이에 12명의 자식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민이었던 아버지 에드먼드 드레이크는 프로테스탄트로서 후에 목사가 되었다. 열 살을 넘겼을 무렵부터 이미 인근의 늙은 선장 밑에서 항해에 종사했다. 선장으로부터 근면함을 인정받고 그의 배를 물려받은 드레이크는 배를 팔아 새로운 여행을 떠났다.

친척 존 홉킨스 밑에서 노예 무역에 종사하던 그는 1568년 자신의 배를 가진 선장이 되었다. 그 후로도 존 홉킨스의 선단에 참가했는데, 베라크루스 부근에서 에스파냐 해군의 기습을 받고 선단은 거의 괴멸 상태가 되어, 드레이크는 목숨만 겨우 건져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 경험은 훗날 드레이크의 전 생애에 걸친 에스파냐에 대한 복수심을 품게 했다.

1569년에 메어리 뉴먼(Mary Newman)과 결혼했다(메어리는 12년 후에 죽었다). 1570년 이후부터 드레이크는 서인도 제도의 에스파냐 선박이나 식민지 마을을 습격하는 등의 해적 활동을 시작했다. 1573년에는 파나마에서부터 금ㆍ은을 운송하던 에스파냐 선박들을 습격해 막대한 재보를 손에 넣었다.

1577년 11월, 배수량 약 300t의 가레온선 골든 하인드 호를 중심으로 한 다섯 척의 함대를 이끌고 프리마스 항을 출항, 대서양에서 마젤란 해협을 거쳐 태평양까지 진출해, 칠레페루 연안의 에스파냐 식민지나 배를 덮쳐 다시 한 번 막대한 재보를 약탈했다.(그 중에는 에스파냐 왕의 재보를 실은 카카푸에고 호 등도 있었다.) 카카푸에고 호에는 은 26t, 금 80파운드, 화폐와 장식품 13상자 등 모두 20만 파운드 상당의 재물이 적재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며, 이 보물을 옮겨 싣는 데만 5일이 걸렸다고 한다. 도중의 산 프리언에서 원정 출항의 공로자로서 친교가 깊었던 토머스 도우티를 6월 30일에 스스로 재판장으로 나선 군사재판에서 반역죄로서 처형했다.(다만 시체는 정중하게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 후, 태평양을 가로질러 모루카 제도, 나아가 인도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귀국함으로써 페르디난도 마젤란에 이은 두 번째의 세계일주를 달성했다. 또한 이 도중인 1578년혼 곶드레이크 해협을 발견하고 있다.

1580년 9월, 유일하게 살아남은 골든 하인드 호가 프리마스 항에 귀항했고, 항해 중에 얻은 금은 재보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쳐졌다. 이는 30만 파운드를 넘는 것으로 당시 잉글랜드의 국고 세입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에스파냐 측에서는 드레이크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그를 영국 해군의 중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훈장을 수여(제독의 칭호)했다. 1581년에는 프리마스의 시장으로 선출되지만, 에스파냐와의 국교 악화로 다시 바다로 돌아와 에스파냐령에 대한 공격을 지휘했다. 이때 여왕은 영국 해군의 병력까지 직접 내주면서 드레이크의 해적질을 대놓고 도와줬고, 이것이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가 '무적함대' 아르마다 함대를 내세워 영국을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칼레 해전

1585년에 엘리자베스 시덴햄(Elizabeth Sydenham)과 재혼했다. 1587년에는 카디스 만에서 에스파냐 함대를 습격했고, 1588년아르마다 해전에서 찰스 하워드를 사령관으로 하는 영국 함대의 부사령관으로서 잉글랜드 함대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화약과 기름을 싣고 불을 붙인 배를 적의 함대로 보내는 해적식 전법을 통해 당시 '무적함대'라 불리던 에스파냐 함대를 궤멸시켰다. 그러나 하워드 제독과의 갈등으로 드레이크는 부제독 자리에서 해임된다. 드레이크는 하워드 제독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했으며, 약탈에 몰두하다가 자신의 함대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가 약탈한 금을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친 덕분에, 실질적으로 전쟁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파산 위기에 몰렸던 영국 왕실의 재정은 당시 징발된 상선과 군사에게 후한 급료를 줄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해졌고, 이때문에 드레이크를 실질적인 전쟁의 최고 공로자라고 보기도 한다.

드레이크의 뱃사람으로서의 경력은 그가 오십줄에 접어들 때까지 이어졌다. 1595년의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와의 싸움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뒤, 푸에르토리코의 산 후안의 싸움에서 패한다. 산 펠리페 델 모로 섬(Fort San Felipe del Morro)에서 에스파냐 출신의 포격수가 드레이크가 탄 배를 향해 대포를 쏘았지만, 드레이크는 살아남았다. 1596년, 에스파냐의 인디아스 함대가 피난처를 찾고 있던 파나마의 포르트베로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있던 중 그는 죽었다. 사인은 이질에 의한 병사였고 그때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죽기 직전에는 병상에서 갑옷을 입으려고 하는 등 정신착란 상태를 보였다고 한다(죽을 때 멋있게 죽고 싶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생에 자식은 없었으며, 시신은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포르트베로 부근의 바다에 수장되었다. 오늘날까지 다이버에 의한 수색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타[편집]

참고문헌[편집]

주석[편집]

  1. '드라코'나 '드라케' 모두 당시에는 악마의 화신이라 여겨졌던 용(드래곤)을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