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바이킹 리인액트
바이킹이 사용하던 배의 모델

바이킹(영어: Vikings; 노르웨이어: Vikinger; 덴마크어: Vikinger; 스웨덴어: Vikingar; 뉘노르스크: Vikingar; 아이슬란드어: Víkingar)은 노르드어 비킹그(고대 노르드어: víkingr)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혈통적으로는 게르만족 노르드인이고, 언어적으로는 노르드어를 구사하며, 스칸디나비아의 고향 땅으로부터 항행하여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의 북유럽과 중유럽을 약탈 및 교역하며 활보한 바닷사람들을 일컫는다.[1][2] 바이킹이 활동한 시기를 바이킹 시대라고 한다. 노르드인들의 군사적 상업적 성장과 인구 팽창은 중세 스칸디나비아 뿐 아니라 브리튼 제도, 아일랜드 섬, 프랑스, 키예프 루스, 시칠리아 등 광범한 지역에 중요한 요소로 영향을 미쳤다.[3]

롱쉽으로 대표되는 진보한 항해 기술로 인하여, 본거지인 스칸디나비아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까지 바이킹의 활동이 미친 적도 있었다. 바다와 강을 통한 탐험과 식민의 시기가 지난 뒤 바이킹들은 북서유럽, 러시아, 북대서양 도서, 멀리는 북아메리카 북동해안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정착했다. 이 시기 동안 노르드 문화가 다른 지역에 폭넓게 보급됨은 물론 역으로 외래 문화도 스칸디나비아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원본 편집]

어원[원본 편집]

"바이킹"의 어원은 확실치 않다. "작은 만"·"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의 "vík"에 접미사 "-ing"이 붙은 데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작은 만의 거주자",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가트 만 쪽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라는 뜻이다. "비킹르(vikingr)"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에 남겨진 룬 문자로 새겨진 금석문에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곳은 6세기 또는 7세기고대 영어(앵글로색슨어) 시 "위드시스(Widsith)"이다. 때문에 또 하나의 설은 고대 영어의 "wíc" 즉 "무역도시"("마을"을 뜻하는 라틴어의 "vic"에서 유래)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떠나다."라는 뜻의 "avvike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고향을 떠나 바다로 나간 이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작가 얀 기유(Jan Guillou)에 의하면 바이킹이라는 말을 긍정적 의미로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에리크 구스타프 예이예르(Erik Gustaf Geijer)가〈바이킹(The Viking)〉이라는 시를 쓰면서부터였다. 오늘날 바이킹을 용감하고 호전적인 해양 전사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와 관련이 깊다. 즉 1809년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600년간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를 잃자 이를 회복할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용감하고 영화로운 과거 역사를 창조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예이예르가 회원으로 있던 예타회(Geatish Society)라는 단체는 용맹스런 바이킹 역사 창조에 큰 역할을 했다. 역시 예타회 회원이었던 작가 에사이아스 텡네르(Esaias Tegnér)는 사가문학 작품〈프리티오프 사가(Frithiofs Saga)〉를 근대적으로 개작해 북유럽과 영국,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어 바이킹에 대한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 기록[원본 편집]

바이킹의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은 헤데뷔(Hedeby)와 같은 큰 무역 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헤데뷔는 프랑크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1050년경 노르웨이인들 사이의 내분으로 파괴될 때까지 문화의 십자로 역할을 했다.

최초의 바이킹 약탈에 대한 기록은 앵글로색슨 전기에 나오는데 789년 포틀랜드(Portland)가 습격당했다는 기록이다. 좀 더 확실한 기록은 793년 잉글랜드 동쪽 해안의 린디스판(Lindisfarne)에 있는 수도원이 약탈당했다는 기록이다(보통 이를 최초의 바이킹 약탈 기록으로 거론한다). 그 후 200년간 유럽사는 바이킹과 그들의 약탈에 대한 기록으로 점철되었다.

아일랜드스코틀랜드의 해안이 바이킹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잉글랜드 영토의 태반이 바이킹(데인족) 지배하에 들어갔다(데인로 참조). 바이킹들은 프랑스스페인의 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발트 해 연안,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을 장악하였다. 9세기 초, 바이킹은 대형 보트를 몰고 프랑스의 론 강이나 센 강을 비롯한 내륙 수로를 따라 공격을 감행했다. 샤를 3세(재위:898년 ~ 922년)의 통치 기간 동안에,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롤로덴마크 출신 베른하르트가 이끄는 노르만족이 파리로부터 흐르는 센 강 하류의 양안에 정착하였고, 그로 인해 그 지역의 이름이 노르망디가 되었다.(→중세 프랑스) 지중해와 동쪽 카스피 해에까지 바이킹 습격이 있었다.

바이킹 지역[원본 편집]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로는 잉글랜드의 요르비크(현 요크), 우크라이나키이우, 아일랜드더블린 등이 있다.

덴마크 출신 바이킹들은 프리슬란트, 프랑스, 잉글랜드 남쪽에 진출했다. 1013년-1016년에는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왕위에 있었다.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은 동쪽 발트족과 슬라브족의 땅(오늘날의 발트 해 연안,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진출해 루리크가 최초의 슬라브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 지역의 강을 따라 흑해,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 비잔티움 제국에까지 진출하였다.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은 주로 북서쪽과 서쪽으로 향해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아일랜드, 영국 북부와 아이슬란드에 진출하였다. 아일랜드와 영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인도거나 거주자가 거의 없는 상태였으며 노르웨이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다. 붉은 에이리크그린란드를 발견하여 정착이 이루어졌다.

1000년경에는 비아르니 헤리올프손(Bjarni Herjólfsson)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과 토르핀 칼세프니(Þórfinnur Karlsefni)가 그린란드로부터 정착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발견한 땅을 빈란드(Vinland)라고 불렀다. 뉴펀들랜드 섬 북쪽 반도에 있는 랑스 오 메도즈 근처에 소규모 정착촌이 시작되었지만 원주민들과의 마찰과 기후 변화로 몇 세대 이상은 지속되진 못하였다. 랑스 오 메도즈의 고고학 유적지는 현재 유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바이킹의 해외 진출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북반구가 수백 년 동안 유난히 추워지게 된 소(小)빙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린란드의 식민지는 몇백 년을 못가고 몰락했으며 바이킹의 서부 진출도 멈추었고 바이킹의 고향도 타격을 받았다.

각주[원본 편집]

  1. Viking (people), Encyclopædia Britannica.
  2. Roesdahl, pp. 9–22.
  3. Brink 2008

관련 항목[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