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리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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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A. 카스트로(Lorenzo A. Castro)의 그림 《바르바리 해적과의 전투》(1681년 작품)
알제리 해적선에 상륙한 영국 선원들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피에르 프란체스코 몰라(Pier Francesco Mola)의 그림 《바르바리 해적》(1650년 작품)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Pirate)이나 사략(私掠, Corsair) 행위자들을 말한다. 사략(私掠)이란 민간인이지만 교전국의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자들이 무장한 민간 소유 선박을 이용하여 해상에서 강도행위를 하는것을 말한다.[1][2]

베르베르인이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지역을 유럽인들은 바르바리(Barbary)[3]라고 불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해적들을 바르바리 해적이라 하였다. 바르바리 해안을 거점으로 삼은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 행위는 지중해 전체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서아프리카 대서양 서부, 남아메리카, 대서양 북부 아이슬란드에도 확산되었지만 지중해 서부가 주요 활동 영역이었다.

바르바리 해적은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브리튼 제도,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해안에 위치한 마을을 습격해서 선박과 물자를 약탈했다. 이들은 북아프리카, 중동이슬람교 시장에 보낼 기독교 신자 출신 노예를 생포했다.

바르바리 해적의 습격은 무슬림의 정복을 계기로 시작되었지만 바르바리 해적이라는 용어는 16세기 이후부터 등장했다. 이 시기에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바르바리 국가"라고 부르는 직할 통치 지역, 자치권을 행사하는 독립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와 유사한 습격은 살레와 같은 모로코의 항만에서도 일어났지만 모로코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바르바리 국가에 해당하지 않는다.

바르바리 해적이 수많은 선박들을 포획하면서 스페인이탈리아의 해안선은 거의 모든 주민이 포기했고 19세기 초반까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은 대부분 포르투갈 남부, 스페인 남부와 동부, 발레아레스 제도, 카나리아 제도, 코르시카, 사르데냐, 엘바 섬, 이탈리아 반도(특히 리구리아주, 토스카나주, 라치오주, 캄파니아주, 칼라브리아주, 풀리아주 연안), 시칠리아, 몰타 섬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대서양 북서부 기슭에서도 전개되었다.

바르바리 해적은 15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80만 명에서 125만 명의 유럽인들을 노예로 만들었는데 몇몇 노예들 중에서는 유럽에서 버려진 사람,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을 역임한 바르바로스 하이렛딘 파샤는 16세기 초반에 알제를 지배한 해적이기도 하다.

1600년대에는 유럽의 해적들이 바르바리 해안에서 최신식 항해술, 조선술을 가져왔다. 바르바리 해적이 태평양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면서 17세기 초반과 중반에는 바르바리 해적의 최전성기로 여겨졌다. 17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서 등장한 강력한 해군이 바르바리 국가와의 경쟁 관계, 평화 관계를 수립하면서 선박에 대한 공격 행위를 중단시켰고 18세기 후반까지 해적 행위의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법률상으로 유효한 보호를 받지 못한 기독교 국가의 선박이나 해안은 19세기 초반까지 바르바리 해적의 피해를 받게 된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미국은 영국과 북아프리카 지역 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바르바리 해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1777년 모로코는 세계 최초로 미국을 독립 국가로 승인한 나라가 되었지만 1784년에는 독립 이후에 최초로 미국 선박을 최초로 포획한 북아프리카 국가가 되고 만다. 1794년 3월 미국은 바르바리 해적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 해군을 창설하게 된다.

1800년대와 1810년대에 일어난 2차례의 바르바리 전쟁(제1차 바르바리 전쟁(1801년 ~ 1805년), 제2차 바르바리 전쟁(1815년))을 계기로 바르바리 해적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 직후의 시기인 1814년부터 1815년 사이에 열린 빈 회의에서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은 바르바리 해안의 해적 행위 봉쇄에 대한 필요성에 합의했다.

바르바리 해적의 위협은 바르바리 전쟁을 계기로 유럽에서 완전히 소멸했지만 바르바리 해안의 해적 행위는 드물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1830년 프랑스가 바르바리 해적의 소굴로 여겨진 알제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바르바리 전쟁 이후 남아있던 바르바리 해적들의 잔당들도 이로써 완전히 소멸되었다.

각주[편집]

  1. 모모이 지로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p165
  2. [네이버 국어사전] 16~17세기에 유럽에서 성행하였으나 1907년에 제2차 헤이그 평화 회의 결과 금지되었다.
  3. [네이버 지식백과] 바르바리 [Barbary] (세계지명 유래 사전, 2006. 2. 1., 송호열) 아프리카 북서 해안 지역의 옛 이름.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서부가 여기에 속한다. 원주민인 베르베르 족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베르베르 인들은 자신들을 이마지겡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유인',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작은 아프리카' 또는 '아틀라스의 나라'라는 별칭이 있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