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튼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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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Elton John
Elton John November 2015.jpg
엘튼 존 (2015년)
기본 정보
본명 엘튼 허큘리스 존
Elton Hercules John
출생 1947년 3월 25일(1947-03-25) (69세)
잉글랜드 런던
직업 음악가, 사회운동가
장르 , 팝 록, 피아노 록, 글램 록, 소프트 록, 리듬 앤 블루스
악기 보컬, 건반 악기, 기타
활동 시기 1960년 ~ 현재
* 솔로데뷔: 1969년
학력 왕립음악원(RAM) 5년 중퇴
레이블 필립스, 콩그레스, DJM, 유니, 파라마운트, MCA, 게펀, 로켓 레코드 컴퍼니, 아일랜드, 유니버설 뮤직 그룹, 인터스코프, 머큐리, 버진 EMI
소속 그룹 콜벳 (1960 ~ 1962)
블루솔로지 (1962 ~ 1968)
공동 작업자 버니 토핀 (1967 ~ )
: 작사가
게리 오스번 (1977 ~ 1982, 1986)
: 작사가
에릭 클랩턴 (1988 ~ 1992)
: 듀엣 및 합동 순회공연
빌리 조엘 (1994 ~ 2010)
: 합동 순회공연
리언 러셀 (2010 ~ 2011)
: 공동작곡 및 듀엣
관련 활동 티렉스, 존 레논, 비치 보이스, 닐 세다카, 키키 디, 팀 라이스, 스티비 원더, 디온 워릭, 글래디스 나이트, , 클리프 리처드, 셰어, 조지 마이클, 건스 앤 로지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리앤 라임스, 리 홀, 시저 시스터스, 레이디 가가, 게리 발로, 폴 아웃 보이
웹사이트 www.eltonjohn.com

엘튼 존 경(영어: Sir Elton John, CBE, 1947년 3월 25일 ~ )은 영국 · 가수작곡가, 사회운동가이다. 영화 · 뮤지컬 음악 작곡가로도 이름을 얻었다.

1975년 10월 21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으며,[1] 1979년 5월에는 서방국가 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2]소련[3][4] 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1992년 작사가 버니 토핀과 함께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데 이어[5] 1994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단독으로 입성[6]했으며, 1995년 폴라음악상을 받았다.[7]

1996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으며,[주 1][8] 1998년에는 음악과 자선활동에의 공헌이 인정되어 2월 24일 서훈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주 2][9][10]

또한 1999년에 그래미 레전드상(Grammy Legend Award)을,[11] 2004년에는 미국 존 F. 케네디 센터 주관 공연예술 평생공로상(Kennedy Center Honors)을 받았다.[12]

2002년에는 모교 왕립음악원(RAM)에서 명예 음악박사학위[주 3]를 받았다.[13] 왕립음악원 역사상 명예 박사학위는 이 해 엘튼 존과 지휘자 콜린 데이비스에게 주어진 것이 처음이다.

2006년에는 영화 · 뮤지컬 음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월트 디즈니 컴퍼니로부터 디즈니 레전드상을 받기도 했다.[14]

엘튼 존은 그외에 아카데미상(1995년), 그래미상 5회(1987, 1992, 1995, 1997, 2001년), 골든 글로브상(1995년), 토니상(2000년), 브릿 어워드 4회(1986, 1991, 1995, 1998년)[15], 아이버 노벨로 어워드 12회(1973~2000년)[16] 등의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국가별 판매량 인증 합산에 따르면 엘튼 존은 세계적으로 통산 약 1억67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역대 5위), 비공식 기록까지 합산한 추정 판매량은 2억5천만~3억 장에 이른다.

2008년 빌보드빌보드 싱글 차트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엘튼 존은 3위에 올랐다.[17]

생애[편집]

어린 시절과 음악에의 관심[편집]

엘튼 존은 1947년 3월 25일 잉글랜드 런던 근교의 피너(Pinner) 마을에 위치한 외조부모의 집에서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18][19] 1968년 3월부터 '엘튼 존(Elton John)'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4년 간 예명으로 사용하다가 1972년 1월 6일에 '엘튼 허큘리스 존(Elton Hercules John)'로 법적 개명 절차를 마쳤다.[20]

엘튼 존은 3살에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으며, 그 후 1년 만에 어머니는 그가 에밀 발퇴펠(Émile Waldteufel)의 〈스케이트 왈츠(Les Patineurs)〉를 외워서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7살 때부터는 정식적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에서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행사에서 제리 리 루이스의 곡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1958년, 엘튼 존은 영국 왕립음악원(RAM) 주니어 코스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후에 그를 지도했던 한 교사는 헨델 음악의 악보 네 장 분량(Four-page Piece)을 들려주자 그가 즉시 축음기 녹음을 재생하듯이 그대로 따라 연주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아버지 스탠리 드와이트(Stanley Dwight)와 어머니 쉬일라 아일린 드와이트(Sheila Eileen Dwight)는 둘 모두 음악적인 소양이 있었다. 아버지는 트럼펫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열광적인 음반 수집가였다.[주 4] 그 영향을 받아 엘튼 존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 스탠리는 아들을 은행원 등 안정적인 직업에 종사하도록 다그쳤다. 이후 엘튼 존은 그 특유의 파격적인 무대 의상과 연주가 어린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제약에 대한 반항의 산물이었다고 밝히기도 한다.

어머니 쉬일라는 다소 엄격하긴 했지만 쾌활하고 유연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관심했으며 종종 집을 비웠고, 엘튼 존은 주로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그가 15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결국 이혼을 했고, 어머니는 화가 프레드 페어브라더(Fred Farebrother)와 재혼했다. 엘튼 존은 양아버지의 이름 'Fred'의 철자를 거꾸로 바꾸어서 그를 '더프(Derf)'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곧 엘튼 존 가족은 당시 프롬 코트(Frome Court)라 불렸던 8가구 아파트 건물로 이사했다. 후에 아메리칸 탑 40(American Top 40) 차트에 4개 음반을 동시에 올릴 때까지, 엘튼 존은 그곳에서 살았다.[21]

경력[편집]

1960-68: 솔로데뷔 이전[편집]

1960년, 엘튼 존은 자신의 학교 친구들과 함께 '콜벳' (The Corvettes)를 결성했다. 콜벳은 피너의 교회나 각종 클럽에서 공연을 열어 주로 로큰롤과 블루스를 연주했지만 몇차례의 공연을 끝으로 1962년 봄에 해산했다.[22]

1961년, 엘튼 존은 어머니와 양아버지 더프의 도움으로 노스우드 힐스 선술집(Northwood Hills Hotel)의 주말 피아니스트가 되면서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밤에 연주를 했다. 엘튼 존은 짐 리브스의 컨트리 음악 〈He'll have to Go〉부터 〈Whem Irish Eyes Are Smiling〉, 〈Roll Out The Barrel〉같은 오래된 선술집 선호곡부터 그 당시 히트곡인 〈King of the Road〉, 그리고 자신이 직접 쓴 곡들까지 다양하게 연주했다.[23]

1962년 가을에 블루솔로지(Bluesology)를 결성했다. 콜벳이 해체되고 6개월 뒤에 다시 밴드를 결성한 것이었다. 낮에는 음반사의 잔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런던의 여러 호텔 바 에서 독주를 하거나 블루솔로지와 함께 연주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1965년 7월 23일, 블루솔로지는 첫 싱글 <Come Back Baby>를 발매했으며 1967년까지 2장의 싱글 <Mr Frantic>과 <Since I Found You Baby>를 발매했다. 1960년대 중반, 블루솔로지는 아이슬리 브라더스, 메이저 랜스, 도리스 트로이, 패티 라벨르, 블루벨르와 같은 미국의 소울, 리듬 앤 블루스 음악가들의 공연 뒷무대에 섰다. 1966년에, 블루솔로지는 당대를 풍미했던 블루스 음악가 롱 존 볼드리(Long John Baldry)를 돕는 보조 밴드 일을 하면서 영국에서 카바레 투어를 시작했다.

1965년 3월 8일, 왕립음악원에 입학한 지 5년이 되어 졸업시험만을 앞두었지만, 엘튼 존은 그동안 쌓여 왔던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기로 결심했다.

젠틀 자이언트의 리드 보컬리스트 오디션에서 떨어진 뒤, 엘튼 존은 1967년 6월 17일 리버티 레코드(Liberty Records)의 A&R 매니저 레이 윌리엄스(Ray Williams)가 잡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에 낸 광고에 응했다. 첫 만남에서 윌리엄스는 같은 광고에 응했었던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 쓴 가사를 그에게 주었다. 그는 곧 그 가사로 음악을 만들었고, 버니 토핀에게 그것을 우편으로 부쳤다. 1967년 6월, 이렇게 '엘튼 존/버니 토핀' 이름의 첫 곡이 되는 〈Scarecrow〉가 녹음되었고, 둘의 작사 · 작곡 협업이 시작되었다. 1968년 3월, 엘튼 존은 자신의 원래 이름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 보다 발음하기 쉬운 가명을 쓰고자 했고, 블루솔로지의 색소폰 연주자였던 엘튼 딘(Elton Dean)과 롱 존 볼드리의 이름에서 각각 한 단어씩 따 와서 엘튼 존(Elton John)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23]

이후 버니 토핀과 함께 1967년 11월 17일, 딕 제임스 레코드(Dick James Records)로 합류해 많은 수많은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24] 하지만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레이블 사의 계약 상과 압력으로 '틴 팬 엘리'라는 가명으로 특징도 없는 전형적인 곡들을 억지로 만들었고, 커다란 부담감과 피로를 느끼면서 지내었다.[주 5] 1968년 3월 1일에 첫번째 싱글 〈I've Been Loving You〉, 이어서 1969년 1월 17일에 두번째 싱글 〈Lady Samantha〉, 1969년 6월 6일에 세번째 싱글 〈It's Me That You Need〉를 발매했다. 차트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평단으로부터는 호응이 있었다.[주 6]

1968년에 엘튼 존이 작사작곡한 〈I Can't Go On Living Without You〉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1969에 출품했다. 해당 곡은 룰루가 불렀으며, 영국 예선을 통과한 6곡 중에서 6위로 기록되었다. 또한 룰루가 부른 〈Boom-Bang-A-Bang〉이 당시 대회에서 영국 대표로 참가해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25]

1969년 2월, 엘튼 존은 딕 제임스 레코드의 동료 케일럽 퀘이, 로저 포프, 버니 캘버트와 함께 기악곡을 연주하는 밴드 "Bread Beer And Band"를 결성했다. 백밴드로 만들겠다는 본인들의 야심과 달리 당시 제작된 음반은 이전에 발매된 싱글 〈The Dick Barton Theme (The Devil's Gallop)〉의 부진한 판매로 인해 판매를 취소했다.[26]

엘튼 존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본인의 곡들을 작곡하면서 녹음하는 반면에 각종 음악가의 히트곡들을 커버하거나, 세션연주자로 참여해 피아노와 백보컬을 맡으며 활동하기도 했다.[27]

1969-71: 초기[편집]

Empty Sky부터 Madman Across the Water까지[편집]

1968년 12월, 딕 제임스 레코드 사의 출판업자 스티브 브라운는 전형적인 곡들을 써가며 힘든 시기를 보내던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을 도와주었다. 1969년 1월에 발매된 싱글 〈Lady Samantha〉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으나, 실제 판매에 비해 라디오에서 많이 방영되어 당시 음악 업계에서 인기를 끌었고, 이를 계기로 음반 작업을 하게 되었다. 1968년 12월부터 1969년 4월까지 작업되어 그 해 6월 6일에 솔로 첫 정규 음반 《Empty Sky》를 발매했다. 그러나 음반은 상업적으로 실패하였다.[주 7]

엘튼 존은 버니 토핀과 같이 엘튼 존의 부모님이 거주하던 런던 노스우드 힐의 아파트에서 지내면서 1969년 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곡들을 만들었다.[주 8] 1969년 11월에는 다음 작품을 작업하기 위해 프로듀서 거스 더전과 현악 편곡자 폴 벅마스터를 영입했으며, 1970년 1월에 2집 《Elton John》을 작업하여 그해 4월에 발매했다. 네덜란드 음반 차트 2위, 빌보드 음반 차트 4위, 영국 음반 차트 5위 등을 기록하며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 10월, 〈Your Song〉이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 8위, 영국 싱글 차트 7위를 기록했다.

2집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을뿐 아니라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그래미상 올해의 음반 부문과 최우수 남성 팝 보컬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리언 러셀, 퀸시 존스, 조지 해리슨 등 유명 음악가들이 엘튼 존에게 전보를 보내기도 해, 무명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웨스트할리우드에 위치한 유명 극장 "Troubadour"의 사장 더그 웨스톤(Doug Weston)이 영국에서 주목받던 신인 가수 엘튼 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아보고나서 그를 불러와 이 극장에서 공연을 진행시키라고 딕 제임스 측에게 요청했고, 이 편지를 읽으면 즉시 그를 데리고 오라고 보냈다. 엘튼 존을 미국에 진출시킬려고 하던 딕 제임스는 18개월 동안 미국에서 엘튼 존에 관심을 가진 레코드 사를 찾고 있었고, 마침내 뉴욕의 Uni 레코드와 라이센스 협정을 맺었고, 2집으로 미국에서 음반 계약을 얻었다. 그렇게 미국 진출을 앞두고 있던 엘튼 존은 그해 3월에 결성한 투어 밴드의 1기 멤버 나이절 올슨, 디 머리를 포함한 각종 동료들과 단체로 동행했고, 1970년 8월 25일부터 8월 31일까지 "Troubadour" 극장에서 일주일 동안 진행했다. 이 공연은 커다란 호평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28]

1970년 3월에 작업한 3집 《Tumbleeweed Connection》은 10월에 발매해 영국 음반 차트 2위, 빌보드 음반 차트 5위 등을 기록했고, 엘튼 존은 이 해 3월부터 유럽과 북미지역에서 순회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17일, 뉴욕의 A&R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공연이 1971년 4월에 라이브 앨범 《17-11-70》으로 발매되었고, 빌보드 팝 음반 차트 11위, 영국 20위, 캐나다 10위 등을 기록했다. 1971년 2월 27일, 8월 9-14일에 작업된 4집 《Madman Across the Water》는 1971년 11월에 발매해 빌보드 음반 차트 8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9위, 영국 음반 차트에선 41위 등을 기록했고, 싱글 〈Levon〉, 〈Tiny Dancer〉가 싱글 차트 50위 안에 진입했다.

1972-76: 전성기[편집]

Honky Château부터 Elton John's Greatest Hits까지[편집]

Madman Across the Water》에서 참여한 기타리스트 데이비 존스톤이 1972년부터 순회공연에 참여해 정식 멤버가 되었으며, 1972년 1월에 작업된 5집 《Honky Château》가 5월에 발매해 빌보드 음반 차트 1위, 영국 음반 차트 2위 등을 기록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1위를 기록한 음반이 되었으며, 5주간 1위를 기록했다. 싱글 〈Rocket Man〉, 〈Honky Cat〉이 싱글 차트 10위 진입에 성공했고, 〈Rocket Man〉은 영국에서 2위를 기록했다. 이 시기부터 엘튼 존은 본격적인 전성기를 몇년 간 보내었다.

Honky Château》가 차트에 오를때 쯤, 엘튼 존은 1972년 6월에 6집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를 작업했으며, 1973년 1월에 발매했다. 6집은 빌보드 음반 차트에서 1위, 영국 음반 차트 1위, 캐나다 음반 차트 1위 등을 기록해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에서 처음으로 1위를 기록했다. 동시에 1973년 영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를 거둔 음반이 되었다. 싱글 〈Crocodile Rock〉, 〈Daniel〉은 싱글 차트 10위 진입에 성공했고, 〈Crocodile Rock〉은 미국에서 1위를 기록한 첫 싱글이 되었다. 그리고 6집부터 미국의 레코드 사를 Uni에서 MCA로 옮겼다.

1973년 1월, 엘튼 존은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다음 작품을 작업했지만, 열악한 스튜디오 환경과 치안으로 인해서 5월에 전작들을 작업했던 프랑스 에루빌로 옮겨 2주간 작업되었다. 1973년 10월에 발매된 7집 《Goodbye Yellow Brick Road》는 엘튼 존의 첫 더블 음반으로 평론가들의 혹평에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빌보드 음반 차트 1위, 영국 음반 차트 1위 등을 기록했고, 미국에선 1위를 2달 간 기록했으며 8백만장의 판매를 거두었다. 가장 많은 판매를 거둔 엘튼 존의 정규 음반이자 3번째로 많이 팔린 음반이다. 싱글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 〈Goodbye Yellow Brick Road〉, 〈Candle in the Wind〉, 〈Bennie and the Jets〉는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 〈Bennie and the Jets〉는 미국에서 1위를 기록한 두번째 싱글이 되었으며, 백만장의 판매를 거두었다. 7집에선 총 4장의 싱글이 발매되었음에도 싱글로 발매되지 않은 수록곡들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Funeral for a Friend/Love Lies Bleeding〉과 〈Harmony〉는 1973~74년 미국의 여러 주의 FM라디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29] 7집은 롤링 스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에서 91위로 기록하기도 했다.

1973년 11월 26일, 〈Step Into Christmas〉가 크리스마스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싱글 차트 24위, 빌보드 크리스마스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1974년 8집 《Caribou》의 1995년 리마스터판에서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고, 2009년에 영국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크리스마스 팝송 리스트에서 9위를 기록한 바 있다.[30]Madman Across the Water》부터 다음작들까지 꾸준히 참여한 타악기 연주자 레이 쿠퍼는 1973년 11월부터 순회공연에서 참여해 정식 멤버가 되었다.

1974년 1월, 엘튼 존은 8집 《Caribou》를 작업했으며, 6월에 발매되어 미국 빌보드 음반 차트 1위, 영국 음반 차트 1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위 등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싱글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The Bitch is Back〉은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했으며,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2위로 기록, 1975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레코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1973년 5월, 엘튼 존은 버니 토핀, 거스 더전, 매니저 존 리드 등과 함께 〈Rocket Man〉의 이름을 따와 로켓 레코드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레이블을 통해 닐 세다카가 재기작들을 발표했으며, 키키 디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8집 《Caribou》는 로켓으로 발매된 음반이지만, 엘튼 존은 당시 로켓 레코드에 소속된 상태가 아니었다. 엘튼 존은 1974년에 MCA 레코드에서 음반 다섯 장을 발매하는 조건으로 800만 달러에 계약했으며, 로켓 레코드 소속으로 옮기고 나서 발매한 첫 음반은 1976년 11집 《Blue Moves》이다.

1974년 11월에 발매된 첫 컴필레이션 음반Elton John's Greatest Hits》는 빌보드 음반 차트 1위, 영국 음반 차트 1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위 등을 기록했다. 미국에선 11주 동안 1위를 기록했고, 무려 16,00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2003년에는 플래티넘 16장을 기록, RIAA에 의해 공식적으로 다이아몬드를 기록했다. 전세계적으로 24,00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엘튼 존의 음반이 되었다.[주 9]

엘튼 존은 미국의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과 그녀의 소속 프로팀 필라델피아 프리덤스(Philadelphia Freedoms)에 헌정하는 노래 〈Philadelphia Freedom〉이 1975년 2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캐나다 RPM 차트 1위 등을 기록했다. 이 곡은 빌보드 R&B 차트에서 32위로 기록되었고, 엘튼 존은 1975년 5월 17일 흑인음악 전문 프로그램 《Soul Train》에 출연해서 이 곡과 1974년에 R&B 차트 15위에 오른 〈Bennie and the Jets〉를 불렀다. 엘튼 존은 《Soul Train》에 출연한 첫 백인 가수이기도 하다.[31]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부터 Here and There까지[편집]

엘튼 존은 1974년 6월부터 7월까지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를 작업했고, 이 음반은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1967~69년 무명 시절과 성공의 비화에 대한 내용을 담은 자서전 음반이다. 1975년 5월에 발매되어 빌보드 음반 차트 1위, 영국 음반 차트 2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2위 등을 기록했으며, 빌보드 음반 차트에서 역사상 최초로 데뷔 1위에 오른 음반이 되어 7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이 음반은 《Goodbye Yellow Brick Road》와 함께 커다란 호평을 받아 엘튼 존의 대표 음반으로 자리잡았다. 1976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음반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싱글은 〈Someone Saved My Life Tonight〉 한 곡만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 4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2위 등을 기록했다.

1975년 2월, 엘튼 존은 순회공연 밴드의 라인업을 바꾸었다. 1970년부터 함께하던 나이절 올슨디 머리가 해고되었으며, 《Empty Sky》부터 《Madman Across the Water》까지 참여하던 세션연주자 드러머 로저 포프(Roger Pope), 베이시스트 케니 파사렐리(Kenny Passarelli), 기타리스트 케일럽 퀘이(Caleb Quaye), 키보디스트 제임스 뉴턴 하워드가 합류했다. 더욱 강력하면서 새로운 밴드 사운드를 지향한 결정이었고, 데이비 존스톤과 레이 쿠퍼는 그대로 남았다. 이 라인업은 1975년 6월 21일,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1975년 6~7월에 작업된 10집 《Rock of the Westies》에 참여했다. 《Rock of the Westies》는 1975년 10월에 발매되어 빌보드 음반 차트 1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위, 영국 음반 차트 5위 등을 기록했으며, 빌보드에선 또 다시 데뷔 1위에 올랐다. 싱글 〈Island Girl〉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1976년 1월에 발매된 〈Grow Some Funk of Your Own〉과 〈I Feel Like a Bullet (In the Gun of Robert Ford)〉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4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8위로 동일한 성적을 기록했다.

엘튼 존은 1975년 10월 25일과 26일에 다저 스타디움에서 2회 공연했고, 비틀즈 이후로 다저 스타디움에서 10년 만에 공연을 진행한 가수가 되었다. 당시 공연에선 50,000명 이상의 관중들이 참석했으며,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1975-76년에 방영되었다.[32]

1976년 4월에는 1974년 5월 18일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 공연과 1974년 11월 28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음반 《Here and there》이 발매되었고, 빌보드 음반 차트 4위, 영국 음반 차트 6위 등을 기록했다. 싱글은 런던 공연에서 부른 〈Love Song〉이 발매되었으며, 캐나다 RPM 싱글 차트 85위,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 18위를 기록했다. 1976년 6월에 키키 디와 듀엣으로 부른 〈Don't Go Breaking My Heart〉가 싱글로 발매되었고,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영국 싱글 차트 1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위 등 다수의 국가에서 싱글 차트 1~5위로 기록해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에선 1위로 기록한 첫 엘튼 존의 노래가 되었고, 37년이 지난 2013년 6월에는 영국에서 백만장의 판매를 거두었다.[33]

1976-81: 침체기[편집]

Blue Moves부터 A Single Man까지[편집]

1972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발매된 7장의 음반들은 모두 미국에서 1위로 올랐으며, 5년 연속 골드 레코드 상, 솔로 데뷔 6년 만에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하는 등 막힘 없이 이어지던 성공으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1975년 전세계 음반 판매량의 2%가 엘튼 존의 몫이기도 했다.[34] 하지만 엘튼 존은 1975년부터 개인적인 어려움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지친 내색을 보였으며, 몇년간 멈추지 않고 이어왔던 음악 활동으로 인해서 흥미를 잃어 번아웃 증후군을 앓았다. 엘튼 존은 1976년 10월 7일, 롤링스톤 지에서 개인적인 얘기를 털어놓는 인터뷰 "엘튼의 솔직한 대화"(Elton's Frank Talk)에서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했다.[35]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으로 인해 화제를 일으켰고, 음반과 싱글의 판매량이 한동안 크게 줄어든 원인이 되었다.

1976년 3월에 작업되어 10월에 발매된 11집 《Blue Moves》는 미국 빌보드 음반 차트 3위, 영국 음반 차트 3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4위 등을 기록해 전작들에 비해 상업적으로 부진했다. 빌보드 음반 차트에선 3위 밖에 오르지 못해 3년간 이어오던 연속 1위 행진에서 내려오게 되었고, 전세계에서 1위로 오른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 싱글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는 빌보드 싱글 차트 6위, 영국 싱글 차트 11위 등을 기록했고, 1977년 1~2월에 발매된 후속 싱글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와 〈Crazy Water〉는 싱글 차트 10위 진입에 실패했다.

엘튼 존은 1977년부터 음악 활동을 줄이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부터 화려한 복장 대신에 단색 코트와 베레모를 착용하면서 활동했다. 자신이 구단주로 있었던 왓포드 FC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1977년 4월에는 왓포드 FC를 헌정하는 노래이자 본인이 작사작곡한 〈The Goaldigger's Song〉을 싱글로 발매했다.[36] 이 시기 엘튼 존은 1977년 5월 1일부터 7일까지 런던에서 레이 쿠퍼와 함께 진행하는 2인조 구성의 순회공연을 열었으며, 1977년 10월에는 필라델피아와 시애틀에서 톰 벨(Thom Bell)을 포함한 전문적인 필라델피아 소울와 디스코 프로듀서들과 함께 EP 음반 《The Thom Bell Sessions》를 작업했으나, 엘튼 존은 사운드가 불만족스럽다고 여겨 1979년 6월에 발매되기 전까진 2년간 보류해 두었다.

1977년 11월 3일, 웸블리 아레나에서 불우 아동을 위한 축구 시설 건립에 힘쓰는 자선단체 클럽을 위한 자선 공연을 열었고, 키키 디와 듀엣으로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불렀고, 스티비 원더가 공연의 마지막 노래 〈Bite Your Lip (Get Up and Dance!)〉에 참여해 피아노, 탬버린을 연주하면서 노래도 불렀다. 엘튼 존은 이 날 공연에서 공연 활동을 중단하겠다며 은퇴 선언을 했으며, 이 공연을 끝으로 몇개월 동안 휴식기에 들어갔다.

엘튼 존은 1978년 3월 21일에 컴백 싱글 〈Ego〉를 발매했지만, 빌보드 싱글 차트 34위, 영국 싱글 차트 34위로 기록해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Ego〉가 발매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다시 정규 음반을 작업했으며, 1977년에 결별한 버니 토핀 대신에[주 10] 영국의 작사가 게리 오스번(Gary Osborne)과 협업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8년 3월부터 8월까지 작업된 12집 《A Single Man》은 10월에 발매되었고, 미국 빌보드 음반 차트 15위, 영국 음반 차트 7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2위, 프랑스 SNEP 음반 차트 2위 등을 기록했다. 빌보드 음반 차트에선 10위 진입에 실패한 첫 음반이 되었으며, 전작들에 비해 상업적으로 부진했다. 싱글 〈Part-Time Love〉는 빌보드 싱글 차트 22위, 영국 싱글 차트 15위 등을 기록했고, 6분 여의 연주곡 〈Song For Guy〉은 영국 싱글 차트 4위 등을 기록했다. 1979년 2월에 유럽에서만 발매된 〈Return to Paradise〉는 프랑스 싱글 차트 2위를 기록했다.[37]

1978년 10월 14일 뉴욕과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작은 공연을 진행하고나서 1979년 2월부터 다시 순회공연을 돌기 시작했다. 레이 쿠퍼와 함께 진행하는 2인조 구성으로 2년 만에 다시 선보였으며, 1979년 2월 스웨덴부터 1979년 12월 호주까지 10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5월에는 서방국가 록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소련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소련에선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공연 실황과 8일간 지내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A Single Man》이 《Elton John Sings' in Russian》로 제목이 수정되어 발매되기도 했다.[38]

The Thom Bell Sessions부터 The Fox까지[편집]

1979년 2월, 엘튼 존은 1968년부터 함께하던 사운드 엔지니어 클라이브 프랭크스(Clive Franks)와 함께 2년간 보류하고 있던 《The Thom Bell Sessions》의 프로듀싱을 맡아 리믹스했고, 그해 6월에 〈Mama Can't Buy You Love〉, 〈Are You Ready for Love〉, 〈Three Way Love Affair〉 총 3곡으로 수록한 12인치 EP 음반으로 발매했다. 〈Are You Ready for Love〉와 〈Mama Can't Buy You Love〉가 각각 4월, 7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Are You Ready for Love〉는 영국 싱글 차트 44위를 기록, 〈Mama Can't Buy You Love〉빌보드 싱글 차트 9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0위 등을 기록했다. 1977년 10월에 《The Thom Bell Sessions》를 작업하면서 총 6곡이 녹음되었는데, 여기서 3곡이 1979년에 발매되었고, 나머지 3곡 〈Nice and Slow〉, 〈Country Love Song〉, 〈Shine On Through〉는 1989년 2월에 확장판 《The Comeplete Thom Bell Sessions》로 발매되기 전까진 12년간 보류해두었다.

1979년 8월부터 다음 작품을 작업했는데, 독일 뮌헨에서는 디스코 음반이자 13집 《Victim of Love》를 작업했고, 프랑스 니스와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선 14집 《21 at 33》를 서로 같은 기간에 작업했다. 1979년 11월에 발매된 《Victim of Love》은 엘튼 존이 작곡과 건반 연주에 참여하지 않고, 보컬만 맡았으며, 수록곡은 독일의 디스코 프로듀서 피트 벨로트실베스터 르베이 등의 전문 작곡가들이 작사작곡을 맡았다. 그러나 음반은 빌보드 음반 차트 35위, 영국 음반 차트 41위 등을 기록하며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커다란 혹평을 받았다. 척 베리의 대표곡을 디스코로 편곡한 〈Johnny B. Goode〉가 싱글로 발매되었지만, 차트 진입에 실패했고, 타이틀 트랙 〈Victim Of Love〉는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31위 등을 기록했다.

1979년 8월에 작업된 14집 《21 at 33》은 버니 토핀이 다시 엘튼 존과 협업을 가지기 시작한 첫 앨범이 되었으며, 게리 오스번을 포함해 영국의 가수 톰 로빈슨쥬디 쥬크도 작사를 맡았다. 1980년 5월에 발매되어 미국 빌보드 음반 차트 13위, 영국 음반 차트 12위, 프랑스 SNEP 음반 차트 3위, 뉴질랜드 음반 차트 3위 등을 기록했다. 게리 오스번 작사의 〈Little Jeannie〉는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위, 빌보드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4년 만에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싱글이 되었다. 톰 로빈슨 작사의 〈Sartorial Eloquence (Don't Ya Wanna Play This Game No More?)〉는 영국 싱글 차트 44위, 빌보드 싱글 차트 39위 등을 기록했고, 게리 오스번 작사의 〈Dear God〉는 호주 싱글 차트 80위를 기록했다. 1980년 순회공연부터 디 머리와 나이절 올슨이 다시 합류했으며, 9월 13일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진행된 공연에선 400,000명의 관중이 참석했다.[39]

1980년 10월, 엘튼 존은 프랑스 갈과 듀엣으로 부른 〈Les Aveux〉가 A면으로, 〈Donner Pour Donner〉가 B면에 수록된 싱글이 프랑스에서만 발매되었고, 1981년 1월 프랑스 싱글 차트에서 1위로 기록해 600,000장이나 팔리는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40]

엘튼 존은 1980년 1월부터 6월까지 《21 at 33》와 동일한 라인업으로 15집 《The Fox》를 작업했다. 《21 at 33》 원래 더블 음반으로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게펀 레코드와 계약 건을 포함한 여러 이유로 인해서 더블 음반 작업은 무산되었으며, 《The Fox》로 따로 작업하게 되었다.[41] 《21 at 33》에 수록 예정이던 5곡을 《The Fox》에 수록했고, 6곡을 새로 녹음해 수록했다. 《The Fox》는 1981년 5월에 발매되었고, 빌보드 음반 차트 21위, 영국 음반 차트 12위, 호주 음반 차트 2위, 프랑스 음반 차트 5위 등을 기록했다.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선 준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미국에선 20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가장 적게 팔린 엘튼 존의 음반 중 하나가 되었다. 싱글 〈Nobody Wins〉, 〈Just Like Belgium〉, 〈Chloe〉 모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차트 진입에 실패한 〈Just Like Belgium〉를 제외한 두 싱글 〈Nobody Wins〉, 〈Chloe〉은 싱글 차트 30~50위 안에 진입했다. 1981년 5-6월에 《The Fox》의 전곡을 뮤직비디오로 제작해 1982년 초에 MTV에서 〈Visions〉라는 제목으로 방영했지만,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42]

1982-86: 재기[편집]

Jump Up!부터 Breaking Hearts까지[편집]

1981년 9월부터 10월까지 16집 《Jump Up!》을 작업했고, 1982년 4월에 발매했다. 빌보드 음반 차트 17위, 영국 음반 차트 13위, 호주 음반 차트 3위, 뉴질랜드 음반 차트 1위 등을 기록했고, 특히 오세아니아에서 큰 반응을 모았다. 근 몇년 만에 호의적인 평을 받은 음반이 되었으며, 싱글 〈Empty Garden (Hey Hey Johnny)〉, 〈Blue Eyes〉의 성공으로 인해 재기에 어느정도 성공했다. 존 레논을 추모하는 〈Empty Garden (Hey Hey Johnny)〉이 주목을 끌었으며, 〈Blue Eyes〉는 게리 오스번 작사의 곡들 중에서 최대 히트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 후속 싱글 〈Princess〉, 〈Ball and Chain〉,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중에서 빌보드 록 차트에서 14위를 기록한 〈Ball and Chain〉를 제외한 2곡은 싱글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1982년 순회공연에서 데이비 존스톤이 1979년 이후로 3년 만에 다시 합류했으며, 9년 만에 1972~73년 순회공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1982년 9월에는 17집 《Too Low for Zero》를 작업했다. 17집부터 게리 오스번과 작업을 그만 두었으며, 1976년 11집 《Blue Moves》 이후로 6년 만에 엘튼 존과 버니 토핀 작사작곡의 곡들로 수록되었다. 《Too Low for Zero》은 1983년 5월에 발매되었고, 영국 음반 차트 7위, 호주 음반 차트 2위, 뉴질랜드 음반 차트 2위 등을 기록했다. 빌보드 음반 차트에선 25위를 기록해 전작들보다 낮게 기록되었지만, 몇년 만에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음반이 되었다. 호주에선 420,000장이 판매를 거두어 플래티넘 6장을 기록했고, 영국에선 30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등 전작들에 비해 판매량이 높아졌으며, 수려하고 빼어난 구성의 음악성을 담았다는 호평을 받게 되어 성공적인 재기작이 되었다. 싱글은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I'm Still Standing〉, 〈Kiss The Bride〉, 〈Cold As Christmas (In the Middle of the Year〉, 〈Crystal〉, 〈Too Low for Zero〉 총 6장이 발매되었고,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 〈I'm Still Standing〉가 다수의 국가에서 싱글 차트 10위 진입에 성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3년 10월,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선 시티 슈퍼볼에서 로드 스튜어트와 같이 동행해 일주일간 공연을 진행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에 대한 유엔의 문화 보이콧 제재를 무시하고 진행한 공연이라서 논란이 있었다.[43]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날에 《Too Low for Zero》, 《Breaking Hearts》에 참여한 독일의 여성 사운드 엔지니어 레나테 블라우엘과 결혼했다가 4년 뒤인 1988년 11월 16일에 이혼했다.[44]

1983년 12월부터 1984년 1월까지 18집 《Breaking Hearts》를 작업했고, 1984년 6월에 발매되었다. 빌보드 음반 차트 20위, 영국 음반 차트 2위, 호주 음반 차트 1위, 뉴질랜드 음반 차트 2위 등을 기록해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에선 《Blue Moves》 이후로 8년 만에 음반 차트 5위 진입에 성공한 음반이고, 차트 성적만 보자면 근 몇년 만에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싱글은 〈Sad Songs (Say So Much)〉, 〈Passengers〉, 〈Who Wear These Shoes?〉 〈In Neon〉, 〈Breaking Hearts (Ain't What It Used to Be)〉 총 5장이 발매되었고, 〈Sad Songs (Say So Much)〉, 〈Passengers〉가 싱글 차트 10위 안에 진입했다.

Ice On Fire부터 Live in Australia까지[편집]

1985년 7월 13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라이브 에이드의 저녁 시간대에 출연해 히트곡 〈Bennie and the Jets〉, 〈Rocket Man〉, 키키 디와 듀엣 〈Don't Go Breaking My Heart〉, 마빈 게이의 〈Can I Get a Witness〉 총 5곡을 불렀고, 조지 마이클이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의 보컬을 맡았고, 엘튼 존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1985년 1월, 엘튼 존은 순회공연 밴드의 라인업을 다시 바꾸었다. 이는 10년 전인 1975년에 강행했던 것과 유사했는데, 1980년부터 다시 합류한 나이절 올슨과 디 머리를 다시 해고했으며, 드러머 찰리 모건(Charlie Morgan), 베이시스트 데이비드 페이턴(David Paton)가 합류했다. 1984년 순회공연 밴드부터 함께하던 키보디스트 프레드 만델(Fred Mandel)와 데이비 존스톤은 그대로 남았으며, 레이 쿠퍼는 1977년 이후로 8년 만에 밴드의 타악기 연주자로 재합류했다. 이 라인업으로 1985년 1월에 19집 《Ice on Fire》를 작업했고, 이후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다. 《Ice on Fire》에선 의 멤버 로저 테일러존 디콘이 참여해서 드럼과 베이스를 연주했고, 《Blue Moves》 이후로 프로듀서 거스 더전이 9년 만에 엘튼 존과 협업을 가져 20집 《Leather Jackets》까지 함께했다.

《Ice on Fire》는 작업되고 10개월 뒤인 1985년 11월에 발매되었고, 영국 음반 차트 3위, 독일 음반 차트 5위, 노르웨이 음반 차트 2위, 호주 음반 차트 6위 등을 기록해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선 큰 성공을 보인 반면, 빌보드 음반 차트에선 48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에선 49위로 기록해 북미에서 가장 실패한 엘튼 존의 음반 중 하나가 되었다. 음반이 발매되기 6개월 전인 1985년 5월에 리드 싱글로 밀리 잭슨과 듀엣 〈Act of War〉가 발매되었고, 영국 싱글 차트 32위, 호주 싱글 차트 50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94위 등을 기록해 저조하게 기록했다. 반면에 1985년 10월에 발매된 〈Nikita〉는 영국 싱글 차트 3위, 빌보드 싱글 차트 7위, 오세아니아와 유럽의 다수 국가에서 1위로 올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엘튼 존의 최대 히트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 1985년 10월과 1986년 2월에 발매된 후속 싱글 〈Wrap Her Up〉과 〈Cry to Heaven〉은 싱글 차트 10위 진입에 실패했다.

디온 워릭, 스티비 원더, 글래디스 나이트와 같이 부른 〈That's What Friends Are For〉가 1985년 11월에 싱글로 발매되었고, 1986년 1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4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엘튼 존이 작곡에 참여한 곡은 아니지만, 노래에 참여한 가수들의 각각 명의로도 발매되었기 때문에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10년 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경우이다. 1987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팝 협력상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이 싱글로 얻은 수익 전액을 에이즈 제단에 기부했다.

1986년 1월, 6~7월, 9월에 《Ice on Fire》와 동일한 라인업으로 20집 《Leather Jackets》를 작업했다. 《Ice on Fire》를 작업하면서 남겨진 6곡과 새로 녹음된 5곡을 수록한 음반으로 1986년 11월에 발매되었지만, 영국 음반 차트 24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38위, 빌보드 음반 차트 91위로 저조하게 기록되어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고, 커다란 혹평을 받았다. 클리프 리처드와 듀엣으로 부른 〈Slow Rivers〉는 영국 싱글 차트 44위 등을 기록했고, 〈Heartache All Over the World〉는 영국 싱글 차트 45위, 빌보드 싱글 차트 55위, 호주 싱글 차트 7위 등을 기록했다.

1986년 11월 5일 호주 브리스번부터 12월 14일 시드니까지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순회공연 〈Tour De Force〉를 진행했다. 이 시기부터 엘튼 존은 성대결절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목상태가 갈수록 악화되어 결국 병원에서 치료까지 받으며 공연을 진행했다.[45] 결국 성대가 완전히 악화되어 1987년 1월 5일, 호주 시드니의 성 빈센트 병원에서 성대수술을 하게 되었고, 1987년 미국에서 예약되어 있던 모든 공연을 취소시켰다.[46] 12월 14일 시드니 공연 실황이 1987년 7월에 라이브 음반 《Live in Australia with the Melbourne Symphony Orchestra》으로 발매되었으며, 라이브 버전의 〈Candle in the Wind〉, 〈Your Song〉,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가 1987년 12월과 1988년 1월에 싱글로 발매되었다. 빌보드 싱글 차트 6위, 영국 싱글 차트 5위로 기록된 〈Candle in the Wind〉와 달리 나머지 두 곡은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1987-91: 최악의 시기[편집]

더 선과 이혼[편집]

1987년 2월 25일, 영국의 일간 타블로이드 지 더 선에서 근거없는 주장으로 엘튼 존을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몇개월 동안 엘튼 존을 공격했다.[47] "엘튼 존이 1986년 2월, 뉴욕에서 십대 남창들과 섹스, 마약 파티를 즐겼다"는 제목의 기사 발행 다음 날 2월 26일에는 "엘튼 존이 100달러 지폐로 코카인을 흡입했다"라는 보도를 했으며, 엘튼 존은 이 두 건에 대해서 강력히 부정하고, 문서 비방죄 영장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다음 날 더 선에선 엘튼 존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면서 몇개월 동안 근거없는 악성 루머들로 엘튼 존을 공격해 엘튼 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48]

결국 엘튼 존은 1987년 9월 28일, 더 선을 명예훼손 죄로 고소했고, 1년 뒤인 1988년 10월에 엘튼 존이 승소하게 되면서 100만 파운드, 한화로 18억 3천만원 정도의 피해보상을 받았다.[49]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게 되면서 악성 기자와 파파라치를 더욱 혐오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 영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재판 승소 1개월 뒤인 1988년 11월 16일에는 아내 레나테 블라우엘과 4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했다.[50]

Reg Strikes Back부터 To Be Continued..까지[편집]

1987년 9월부터 1988년 봄까지 작업된 21집 《Reg Strikes Back》가 1988년 6월에 발매되면서 가수로서 컴백했고, 빌보드 음반 차트 16위, 영국 음반 차트 18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6위, 이탈리아 음반 차트 3위 등을 기록했다. 싱글 〈I Don't Wanna Go On with You Like That〉, 〈Mona Lisas and Mad Hatters Part 2〉, 〈Town of Plenty〉, 〈A Word in Spanish〉, 총 4곡이 발매되었다. 〈A Word in Spanish〉는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0위, 빌보드 싱글 차트 19위 등을 기록했고, 〈I Don't Wanna Go On with You Like That〉은 빌보드 싱글 차트 2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위 등을 기록했다. 《Reg Strikes Back》의 표지에는 1970~80년대 공연에서 착용했던 복장들이 수십개나 놓여있는데, 이는 그해 9월에 열릴 경매에 대해 예고한 것이다.

1988년 9월 5일 화요일 오후, 런던의 쇼더비 쇼룸에서 자신의 2,000여점의 물건들을 경매로 내놓았다.[51] 엘튼 존이 내놓은 물건들은 대부분 공연에서 자주 입었던 화려한 복장들과 다양한 종류의 선글라스, 도자기, 가구, 그림, 시계, 보석과 엘튼이라고 써져있는 자동차 번호판, 1970년부터 꾸준히 받던 골든 레코드 등이었다. 경매에선 거의 모든 물건들이 낙찰되는데 경쟁이 치열했고, 물건들이 각각 입찰자들에게 낙찰되는데 꽤 신속히 진행되었다. 모든 물건들이 낙찰된 후, 이 경매로 얻은 금액은 총 820만 파운드, 한화로 150억 정도 했었다. 경매 이후, 엘튼 존은 1988~89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수많은 물건들을 경매에 내놓은 것이 후회되지 않으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밝혔다.[52]

1988년 11월부터 12월까지 덴마크유틀란드 반도 동부의 항구도시 라네르스에서 22집 《Sleeping with the Past》를 작업했고, 1989년 8월에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빌보드 음반 차트와 캐나다 RPM 음반 차트에서 각각 23위로 기록해 전작들처럼 부진했지만, 영국 음반 차트 1위, 호주 음반 차트 2위, 뉴질랜드 음반 차트 1위, 프랑스 음반 차트 2위, 스위스 음반 차트 1위 등을 기록하여 오세아니아와 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에선 1974년 8집 《Caribou》 이후로 15년 만에 1위로 올랐고, 90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플래티넘 3장을 기록했으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를 거둔 엘튼 존의 정규 음반이 되었다. 싱글 〈Healing Hands〉, 〈Sacrifice〉, 〈Club At The End Of The Street〉, 〈Whispers〉, 〈Blue Avenue〉 5곡 중에서 〈Healing Hands〉와 〈Sacrifice〉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Healing Hands〉는 빌보드 싱글 차트 13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8위로 기록했고, 〈Sacrifice〉는 빌보드 싱글 차트 18위, 호주 싱글 차트 7위, 네덜란드 싱글 차트 3위, 프랑스 싱글 차트 1위, 아일랜드 싱글 차트 2위, 노르웨이 싱글 차트 2위 등을 기록했다. 두 싱글은 여러 국가에서 큰 성공을 보였지만, 영국에서만 40~50위 안에 진입해 저조하게 기록되었다. 북미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두던 음반과 달리, 싱글은 히트쳤으며, 반대로 영국에선 음반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 반면에 싱글은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1990년 5월에 영국에서 〈Healing Hands〉와 〈Sacrifice〉가 더블 A면으로 수록한 싱글로 재발매되었으며, 그 결과 영국 싱글 차트 1위로 기록되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14년 만에 영국에서 1위로 오른 노래가 되었고, 엘튼 존 솔로로서 처음으로 영국에서 1위로 오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Sleeping with the Past》와 싱글의 대성공으로 엘튼 존은 음악적으로 재기에 성공했으나, 15년간 이어오던 약물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서 삶이 크게 망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결국 1990년 7월 29일에 시카고의 파크사이드 루터 병원의 갱생 시설에 입원해 약물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결정을 내렸고, 가수 활동을 중단하고나서 몇개월 간 재활 치료에 크게 집념했다.[53] 엘튼 존은 파크사이드 루터 병원에 입원하기 몇주 전인 1990년 7월 초에 이기 팝과 협업을 가졌던 프로듀서 돈 워스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전적인 의미를 담은 12곡을 녹음했으며, 이때 녹음된 노래 〈You Gotta Loved Someone〉과 〈Easier to Walk Away〉가 싱글로 발매되었다. 〈You Gotta Loved Someone〉은 영국 싱글 차트 33위, 빌보드 음반 차트 43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위 등을 기록했고, 〈Easier to Walk Away〉는 영국 싱글 차트 63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59위 등 저조하게 기록했다.

1990년 10월 1일, 컴필레이션 음반 《The Very Best of Elton John》이 미국을 제외한 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발매되었으며, 다수의 국가에서 1위를 기록하고 수십만장부터 백만장까지의 판매를 거두는 등 세계적으로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 음반 차트에선 1위를 2주간 기록했고, 2위로도 9주간 기록했다. 영국에선 2,700,000장의 판매를 거두었고, 1995년 3월 1일에는 BPI에 의해 공식적으로 플래티넘 9장을 기록해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엘튼 존의 음반이 되었다.[54]

1990년 11월, 박스 세트 《To Be Continued..》가 발매되었고, 엘튼 존의 1965년부터 1990년까지의 경력을 담아 연대기로 정리한 곡들로 수록되었다. 영국에선 1년 뒤인 1991년 11월에 변경된 표지를 가지고 발매되었으며, 1991년 11월에 23집 《The One》을 작업하면서 녹음된 신곡 〈Understanding Women〉과 〈Suits of Wolves〉가 추가로 수록되었다.

1991년 3월 23일, 웸블리 아레나에서 열린 조지 마이클 공연에서 엘튼 존이 특별출연해 듀엣으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다. 이 버전은 1991년 11월에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영국 싱글 차트 1위 등 다수의 국가에서 1위로 오르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엘튼 존의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 1991년 BRIT 어워드에서 엘튼 존은 최우수 영국 남성 가수 부문에서 우승했다.[55] 1991년에 플루트 연주자 제임스 골웨이가 부른 연주곡 〈Basque〉[주 11]가 1992년 그래미어워드의 올해의 연주곡 부문에서 우승했다.

1992-99: 제2의 전성기[편집]

The One부터 Made In England까지[편집]

재활 치료를 마친 엘튼 존은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 사람이 되었으며, 머리 이식까지 하면서 젊어보이는 스타일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엘튼 존은 개인적인 친구를 둘을 잃었는데, 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가 1991년 11월 24일에 에이즈로 사망했고, 엘튼 존 순회공연 밴드의 1기 멤버 디 머리는 1992년 1월 15일에 피부암으로 사망했다. 엘튼 존은 1992년 3월 15일, 미국 내슈빌 주에서 디 머리를 추모하는 공연을 열었고, 4월 20일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에 참여해 〈The Show Must Go On〉과 액슬 로즈와 함께 Bohemian Rhapsody를 불렀다.[56]

1991년 11월부터 1992년 3월까지 23집 《The One》을 작업했으며, 1988년 11-12월에 작업한 《Sleeping with the Past》 이후로 3년 만에 정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The One》은 1992년 6월에 발매되었고, 영국 음반 차트 2위, 빌보드 음반 차트 8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7위, 프랑스 음반 차트 1위, 독일 음반 차트 1위, 오스트리아 음반 차트 1위 등을 기록했고, 다수의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에선 8위로 기록되었는데, 1976년 11집 《Blue Moves》 이후로 발매된 음반들 중에서 16년 만에 10위 진입에 성공한 음반이자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이후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엘튼 존의 정규 음반이기도 하다. 싱글 〈The One〉, 〈Runaway Train〉, 〈The Last Song〉, 〈Simple Life〉는 모두 10위 진입에 성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앨범과 싱글의 성공과 음악적으로도 좋은 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했고, 이 시점부터 제2의 전성기를 보내었다.

1992년 5월부터 순회공연을 2년 만에 다시 진행하기 시작했으며, 이 해 6월 웸블리 스타디움과 8월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선 에릭 클랩턴도 참여해 듀엣으로 〈Runaway Train〉을 불렀다. 1992년 9월 9일 MTV 어워드에서 액슬 로즈의 〈November Rain〉에 피쳐링해 건반을 연주하기도 했다.[57]

1993년 8월부터 9월까지 작업되어 11월에 발매된 24집 《Duets》은 리틀 리처드, 돈 헨리, 키키 디, 닉 커쇼, 글래디스 나이트, 폴 영, 보니 레잇, 스티비 원더, 레너드 코언 등의 음악가들이 참여한 합동 음반이고, 타이틀 트랙 〈Duets For One〉을 제외한 전곡이 듀엣이며, 리틀 리처드와 듀엣으로 부른 〈The Power〉와 태미 와이넷과 듀엣으로 부른 〈A Woman's Needs〉를 제외한 모든 곡들은 1940~80년대 유명 히트곡을 커버했다. 《Duets》는 빌보드 음반 차트 25위, 영국 음반 차트 5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14위, 오스트리아 음반 차트 1위 등을 기록했다. 키키 디와 듀엣으로 부른 〈True Love〉는 영국 싱글 차트 2위로 기록되었고, 1976년 〈Don't Go Breaking My Heart〉 이후로 17년 만에 큰 성공을 거둔 엘튼 존/키키 디의 듀엣 싱글이다. 루폴과 듀엣으로 불러 1990년대 방식으로 편곡된 〈Don't Go Breaking My Heart〉는 영국 싱글 차트 7위, 빌보드 댄스 차트 3위로 기록되었고, 마르셀라 디트로이트와 듀엣으로 부른 〈Ain't Noting Like the Real Thing〉은 영국에서 24위로 기록되었다. 돈 헨리와 부른 〈Shakey Ground〉는 캐나다 RPM 싱글 차트에서 64위로 오르는데 그쳤다.

1994년 7월부터 2010년 3월까지 빌리 조엘과 순회공연 〈Face to Face〉를 16년 간 전세계적으로 진행했다.

1994년 2월부터 4월까지 작업한 25집 《Made in England》를 1995년 3월에 발매했다. 빌보드 음반 차트 13위, 영국 음반 차트 3위, 스위스 음반 차트 1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3위, 오스트리아 음반 차트 1위, 프랑스 SNEP 음반 차트 2위 등을 기록했고, 싱글 〈Believe〉, 〈Made In England〉, 〈Blessed〉, 〈Please〉는 대부분 싱글 차트 10~20위 안에 진입했다. 〈Believe〉는 영국 싱글 차트 15위, 빌보드 싱글 차트 13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위 등을 기록했고, 〈Made In England〉는 빌보드 싱글 차트 52위, 영국 싱글 차트 18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5위 등을 기록했다.

1995년과 1996년에 발매된 컴필레이션 음반 《Love Songs》는 미국에서 플래티넘 3장, 영국에서 플래티넘 3장 등을 기록했고, 이 음반에 수록되기도 한 〈You Can Make History (Young Again)〉이 1996년 10월에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 70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9위를 기록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듀엣으로 부른 〈Live Like Horses〉가 1996년 12월 1일,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싱글 차트 9위 등을 기록했다.[58]

Candle in the Wind 1997부터 The Big Picture까지[편집]

1997년 1월 17일, 엘튼 존은 프랑스 파리의 샤이요 국립극장(Theatre National de Chaillot)에서 베자르 발레단(Bejart Ballet)의 퍼포먼스에 맞춰 퀸의 멤버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 존 디콘과 함께 프레디 머큐리, 조르주 돈을 기하는 공연을 진행했고, 엘튼 존은 여기서 〈The Show Must Go On〉를 불렀다.

1997년 7월 15일,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가 총격으로 사망했고, 그해 8월 31일에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해 엘튼 존은 순식간의 2명의 절친을 잃어 큰 슬픔에 잠겼었다. 1997년 9월 2일, 다이애나의 누이인 레이디 사라가 엘튼 존에게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연락했다.[59] 엘튼 존은 버니 토핀에게 연락해서 만약 장례식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면 부를 곡이 필요하다고 했고, 다이애나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Candle in the Wind〉를 개사 해야한다고 했다. 다이애나의 유족과 영국 왕실에서 허락을 받아 기존의 노래를 개사하기로 했고, 버니 토핀은 마릴린 먼로를 추모하는 원곡의 가사를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Candle in the Wind 1997》로 개사했다.[60] 1997년 9월 6일, 엘튼 존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참석해 개사된 가사로 노래를 불렀으며, 이는 전세계로 생중계되어 10억 명의 사람들이 시청했다.[61]

개사한 버전의 〈Candle in the Wind 1997〉는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끌게되어 9월 13일과 9월 23일에 〈Something About the Way You Look Tonight〉이 수록한 더블 A면 싱글로 발매되었고, 전세계 다수의 국가에서 1위로 기록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9월 13일 영국 발매 당시, 영국 싱글 차트 데뷔 1위로 올랐고, 발매 첫 날에 24시간도 안되어 658,000장이의 판매를 거두어 영국 역사상 가장 빠르게 발매된 싱글이 되었다.[62] 총 4,93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1984년 밴드 에이드Do They Know It's Christmas를 제치고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63] 미국에선 1997년에 8,111,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1950년대 이후로 싱글 차트가 생기고 나서 미국과 영국 역사상 최초로 단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 되었다. 35주 동안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진입하고 있었으며, 빌보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자 미국에서 유일하게 다이아몬드를 기록한 싱글이 되었고, 미국에서 총 11,000,000장의 판매를 거두었다.[64]

1999년 11월 10일에는 전세계적으로 33,00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빙 크로스비White Christmas에 이어서 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판매를 거둔 싱글이 되었다.[65] 1998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 최고의 남성 팝 보컬 부문 상으로 수상했고, 1998년 BRIT 어워드에선 올해 최고의 영국 싱글 후보에 올랐다. 엘튼 존은 이 노래로 얻은 수익금 전액을 다이애나 측에 기부했고, 이로 인해서 음악과 자선활동에의 공헌이 인정되어 1997년 말에 엘튼 존이 대영제국 서훈자 명단에 기사 작위 대상자로 이름이 올라 1998년 2월 24일 서훈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주 12][66][67] 다이애나의 장례식 이후로, 엘튼 존은 다이애나의 아들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에게 이 노래를 다시 부르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68] 뿐 만이 아니라 엘튼 존은 이 노래의 1973년판도 한동안 부르지 않다가 1999년 순회공연부터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1997년 9월 15일, 엘튼 존은 런던 로열 알버트 홀의 화산 폭발로 파괴된 몬트세랫을 구조하는 자선 공연(Music for Montserrat)에 참여하여 〈Your Song〉,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Live Like Horses〉를 불렀고, 폴 매카트니, 스팅, 필 콜린스, 에릭 클랩턴, 마크 노플러 등의 음악가들과 Hey Jude을 부르기도 했다.[69] 1997년 11월, BBC의 자선 싱글 Perfect Day에서 루 리드, 데이비드 보위, 태미 와이넷 등의 음악가들과 함께 참여했고, 이 곡은 영국 싱글 차트에서 1위로 올랐다.

2010-현재[편집]

The Union부터 Wonderful Crazy Night까지[편집]

2010년 10월, 엘튼 존은 어릴 적 우상 리언 러셀과 합작해 정규 30집 《The Union》을 발매했다. 2009년 11월 20일부터 2010년 3월까지 작업되어 《The Captain & the Kid》 이후로 3년 만에 다시 정규 음반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T 본 버넷이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브라이언 윌슨, 보노, 닐 영, 부커 T. 존스, 돈 워스, 로버트 랜돌프 등의 음악가들이 참여했다. 음반은 빌보드에서 빌보드 200 3위, 록 음반 차트 2위로 데뷔하였다. 수록곡 중 〈If It Wasn't for Bad〉가 2011년 그래미상 최우수 팝 협력상(Best Pop Collaboration With Vocals)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대중음악잡지 《롤링 스톤》은 〈2010년 최고의 음반 30〉 목록 에서 《The Union》을 3위로 꼽았다.[70]

엘튼 존은 2012년 1월에 정규 31집 《The Diving Board》 의 녹음을 마쳤으며, 2013년 2월에 발매된다고 발표했다. 데이비 존스톤, 나이절 올슨 등 기존의 밴드 구성원들은 빠지고 래피얼 서디크, 도일 브램홀 2세 등이 연주자로서 참여했다. 18곡 전곡을 엘튼 존이 작곡하고 버니 토핀이 가사를 썼으며, 프로듀서는 전작과 같이 T 본 버넷이 맡았다. 엘튼 존은 인터뷰에서 모든 곡을 2일 만에 썼으며, 오랜 시간을 되돌아봐도 이번 작업이 가장 즐거웠다("the most exciting solo record I've done in a long, long time.")고 밝히기도 했다.

2012년 11월 공연 도중, 엘튼 존은 《The Diving Board》의 발매가 2013년 5월로 연기됐음을 밝혔다. 이는 2013년 1월에 추가녹음 계획이 잡힘에 따른 것이다. 이후, 음반의 이름을 《Voyeur》로 바꿀 것을 검토하다가 취소했으며 발매가 2013년 9월로 다시 연기되었다.

《The Diving Board》는 2013년 9월 13일 발매가 시작되어 영국 음반 차트 3위, 빌보드 음반 차트 4위 등을 기록하였다.

엘튼 존은 2015년 10월에 정규 32집 《Wonderful Crazy Night》이 2016년 2월에 발매된다고 발표했다.[71] 14곡 전곡을 엘튼 존이 작곡하고 버니 토핀이 가사를 썼으며, 프로듀서는 전작들과 같이 T 본 버넷이 맡았다. 2006년 정규 29집 《The Captain & the Kid》 이후로 10년 만에 데이비 존스톤, 나이젤 올슨 등 기존의 밴드 구성원들이 참여한 음반이며, 밴드 구성원들 중에서 타악기 연주자 레이 쿠퍼가 엘튼 존의 1995년 정규 25집 《Made in England》 이후로 21년 만에 참여한 음반이다. 2015년 1월부터 4월까지 작업되었으며, 모든 곡을 17일 안에 작곡하고 녹음했다.

《Wonderful Crazy Night》는 2016년 2월 5일 발매가 시작되어 영국 음반 차트 6위, 빌보드 음반 차트 8위 등을 기록하였다.

그외 활동[편집]

영화 · 뮤지컬관련 음악활동[편집]

엘튼 존은 1970년 9월에는 영화 《Friends》 사운드트랙을 맡아 1971년 3월에 발매되었으며, 1972년 그래미상[72] 후보에 올랐다. 싱글로 〈Friends〉가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 30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3위를 기록했다.

1992년 말부터 1993년 초까지 팀 라이스 합작으로 라이언 킹의 음악을 작업했다.[73] 1993년 가을부터 1994년 5월까지 작업되어 그해 5월에 발매된 사운드트랙 《The Lion King》은 영화와 더불어서 전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수의 국가에서 10위 안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빌보드 음반 차트에선 1위를 9주동안 기록했다. 1995년 RIAA 기준으로 미국에선 1천만장의 판매를 거두어 그해 미국에서 4번째로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고, 1999년 11월 10일에는 15,000,000장의 판매를 거두어 다이아몬드를 기록해 미국에서 가장 많은 팔린 애니메이션 사운드트랙 음반이 되었다. 영화의 수록곡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은 1994년과 1995년 아카데미상, 그래미상, 골든글로브상에서 올해의 주제가상으로 세차례나 우승했고, Circle of Life와 〈Hakuna Matata〉는 후보로 오르는데 그쳤다.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과 〈Circle of Life〉는 엘튼 존이 부른 버전으로 싱글로 발매되었고, 〈Circle of Life〉는 빌보드 싱글 차트 18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3위, 영국 싱글 차트 11위 등을 기록했고,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은 빌보드 싱글 차트 4위, 영국 싱글 차트 14위, 캐나다 RPM 싱글 차트 1위 등을 기록했다. 라이온 킹의 대성공으로 엘튼 존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를 계기로 영화와 뮤지컬 사운드트랙 작업에도 매진하기 시작했다.

1996년 4월, 팀 라이스와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Aida》를 모티브한 아이다를 작업했고, 엘튼 존은 25곡을 2주 만에 작곡했다고 밝혔다.[74] 이후 1998년 7월에 브로드웨이 뮤지컬판 사운드트랙 음반의 컨셉트 앨범 형식으로 《Elton John And Tim Rice's Aida》를 작업해 1999년 3월에 발매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팀 라이스, 한스 짐머와 함께 엘도라도의 사운드트랙의 음악을 작업했다. 사운드트랙은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작업되었고, 1999년 2월 중순, 《The Road to El Dorado》를 2000년 3월에 발매한다고 발표했다.[75]

2006년 초연한 하이틴 코미디 영화 《It's a Boy Girl Thing》에서 사운드트랙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이 영화는 대한민국에서 《보이걸 씽》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3월에 개봉하였다. 엘튼 존은 2011년 4월에 대한민국에 개봉한 《노미오와 줄리엣》의 음악 작업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영화에는 레이디 가가와 함께 부른 신곡 〈Hello, Hello〉뿐 아니라 〈Crocodile Rock〉,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 〈Bennie and the Jets〉 등 엘튼 존의 기존 명곡들까지 사운드트랙으로 삽입되었다.

엘튼 존이 음악을 맡은 《빌리 엘리어트》는 2009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뮤지컬 상(Tony Award for Best Musical)을 비롯한 10개 부문의 상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76] 엘튼 존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을 뮤지컬로 제작하기도 할 예정이다.[77]

2012년 4월 기준으로 엘튼 존의 영화음악을 기초로 한 뮤지컬 《라이온 킹》은 총 8억5384만6062달러의 수입을 올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8억5312만2847달러)을 꺾고 역대 브로드웨이 최고 흥행작으로 올라섰다.[78]

올림픽 주제곡 선정[편집]

2012년 7월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LOCOG)는 2012년 런던 올림픽 주제곡으로 Pnau가 엘튼 존의 1970년대 곡들을 리믹스한 〈Good Morning to the Night〉이 선정되었음을 발표했다. 동명의 주제곡이 수록되어 "Elton John vs Pnau"의 이름으로 발매된 음반 《Good Morning to the Night》은 7월 말 영국 음반 차트 1위를 기록하였다.[79]

런던 올림픽 주제곡으로는 이외에 뮤즈의 〈Survival〉, 델픽의 〈Good Life〉, 케미컬 브라더스의 〈Theme For Velodrome〉, 디지 래스컬의 〈Scream〉등 총 5곡이 선정되었다.

특별출연[편집]

엘튼 존은 2010년 제52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레이디 가가의 곡 〈Speechless〉와 자신의 곡 〈Your Song〉을 편곡하여 레이디 가가와 함께 불렀으며, 201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리언 러셀의 헌액자 자격으로 무대에 올라 로이드 프라이스, 리언 러셀, 닥터 존과 함께 〈Stagger Lee〉를, 앨리스 쿠퍼, 닐 다이아몬드, 달린 러브, 벳 미들러와 함께 〈Da Doo Ron Ron〉을 불렀다.

2012년 6월 4일에 엘튼 존은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 콘서트에 출연해 〈I'm Still Standing〉, 〈Your Song〉, 〈Crocodile Rock〉을 불렀다. 콘서트에는 엘튼 존 외에 폴 매카트니, 앤드루 로이드 웨버, 스티비 원더, 클리프 리처드, 톰 존스, 셜리 배시, 카일리 미노그, 게리 발로, 로비 윌리엄스 등이 출연했다.

2013년 1월 25일, 엘튼 존은 야마하 125주년 기념공연 'Yamaha’s 125th Anniversary Dealer Concert Elton John + Yamaha'에서 데이비드 포스터,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 샤카 칸, 토토, 네이선 이스트, 제임스 뉴턴 하워드, 에이미 그랜트, 마이클 맥도널드, 세라 매클라클런 등과 함께 출연했다. 이 공연을 통해 엘튼 존이 〈Rocket Man〉등 5곡을 연주하는 피아노의 건반과 페달의 움직임이 원격 디스클라비어 피아노(remote Disklavier piano)를 통해 일본,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캐나다, 독일, 영국, 프랑스, 싱가포르, 미국 등 세계 각지에 그대로 재현되었다. 공연 전체 영상은 엘튼 존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제공되었다.[80][81]

2013년 2월 10일 제55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는 에드 시런과 함께 〈The A Team〉을, 잭 브라운 · T 본 버넷 등과 함께 〈The Weight〉를 불렀다.[82]

가족관계[편집]

엘튼 존은 2010년 12월과 2013년 1월 배우자 데이비드 퍼니시와의 사이에 대리모를 통해 아들 재커리 잭슨 레번 퍼시니존(Zachary Jackson Levon Furnish-John)[83] 과 일라이저 조지프 대니얼 퍼니시존(Elijah Joseph Daniel Furnish-John)[84]을 얻었다.

한국관련 화제거리[편집]

내한공연 (2004/2012/2015)[편집]

엘튼 존은 2004년 9월 17일 오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첫 내한공연을 했다. SBS는 녹화·편집된 당시 공연 실황 영상을 같은 해 추석연휴 중에(9월 24일) 특집으로 편성하여 방영했다.[85]

2012년 11월 엘튼 존은 그의 히트곡 중 하나이자 별칭이 된 〈Rocket Man〉의 싱글발매 40주년을 기념하는 '40th Anniversary of the Rocket Man' 투어의 일환으로 밴드 구성원들을 포함해 50여명의 스탭과 함께 방한하여 서울특별시 올림픽체조경기장(11월 27일 오후 8시)에서 두 번째 내한공연을 진행했다.[86][87]

엘튼 존은 2015년 11월 27일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세 번째 내한공연을 진행했다.[88]

뮤지컬 공연[편집]

2010년 8월 13일부터 2011년 2월 27일까지 엘튼 존이 음악을 맡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다.[89]

또한 2010년 12월 17일부터 2011년 3월 27일까지는 엘튼 존이 음악을 맡은 뮤지컬 《아이다》 공연이 성남아트센터에서 이루어졌다.[90] 《아이다》는 2005년에도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적이 있으며, 2012년 12월에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다시 공연이 진행된다.[91]

기타 화제거리[편집]

엘튼 존은 2005년에 한국의 사진가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을 3,000여만원에 구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92]

주해[편집]

  1. 1996년 신년 서작 · 서훈자명단(1996 New Year Honours)에서 선정
  2. 1998년 신년 서작 · 서훈자명단(1998 New Year Honours)에서 선정
  3. hon. DMus, honorary Doctorate of the University of London
  4. 후에 엘튼 존은 어머니가 엘비스 프레슬리와 빌 헤일리 & 히즈 코메츠(Bill Haley & His Comets)의 음반을 사왔을 때 그 음악에 당장 매혹되었던 일을 기억한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5. 이후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1974년에 이에 대한 경험을 배경한 〈Bitter Fingers〉를 작사 작곡했으며, 1975년 정규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에 수록되어 발매되었다.
  6. <It's Me That You Need>는 이후 1971년 5월에 일본에서 발매되어 일본 오리콘 싱글 차트 13위, 오리콘 인터네셔널 차트 2위로 기록했다.
  7. 정규 1집은 1975년 1월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매되어 미국 빌보드 팝 음반 차트 6위, 캐나다 RPM 음반 차트 30위로 기록했다.
  8. 이 시기때 만들어진 대부분의 곡들은 정규 2집 《Elton John》과 정규 3집 《Tumbleweed Connection》에 수록되었다.
  9. 이후 천만장의 판매를 거둔 음반은 1994년 라이언 킹의 사운드트랙이 있고, 싱글은 전세계적으로 33,000,000장의 판매를 거둔 다이애나 왕세자비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가 있다.
  10. 1967년 이후로 10년 동안 협업을 맺었으니 자연스레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버니 토핀은 1977년 여름부터 앨리스 쿠퍼와 협업을 가졌으며, 엘튼 존과 다시 작업하기 시작한 건 1979년 8월부터였다.
  11. 엘튼 존은 이 곡을 1979년 8월에 14집 《21 at 33》를 작업하면서 작곡했다.
  12. 1998년 신년 서작 · 서훈자명단(1998 New Year Honours)에서 선정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October 21, 1975 in History, Brainy History
  2. May 1, 1979 in History, Brainy History
  3. 김정선 (2013년 4월 10일). "밥 딜런, 1970년대 '철의 장막' 넘을 뻔"<외교전문>”. 연합뉴스. 
  4. May 21, 1979 in History, Brainy History
  5. “Songwriters Hall of Fame - Elton John Exhibit Home”. 《작곡가 명예의 전당》 (영어). 2015년 9월 24일에 확인함. 
  6. “Elton John: inducted in 1994”. 《로큰롤 명예의 전당》 (영어). 2015년 9월 24일에 확인함. 
  7. “Elton John: Introduction”. 《폴라음악상 공식 웹사이트》 (영어). 2015년 8월 28일에 확인함. 
  8. “Supplement to The London Gazette: 1996 New Year Honours”. 《The Gazette》 (영어) (런던) (54255): 9. 1995년 12월 29일. 2015년 9월 24일에 확인함. 
  9. “Supplement to The London Gazette: 1998 New Year Honours”. 《The Gazette》 (영어) (런던) (54993): 2. 1997년 12월 30일. 2015년 9월 24일에 확인함. 
  10. “The London Gazette: Honours and Awards”. 《The Gazette》 (영어) (런던) (55229): 2. 1998년 8월 28일. 2015년 9월 24일에 확인함. 
  11. 그래미 공식 웹사이트
  12. 엘튼 존 등 6명 평생공로상 수상, 네이버 뉴스
  13. “팝스타 엘튼 존 “40년만의 학위””. 동아일보. 2002년 7월 04일. 
  14. 월트 디즈니 컴퍼니 공식 웹사이트
  15. 브릿 어워드 공식 웹사이트
  16. 엘튼 존 공식 웹사이트 중 바이오그래피(Biography)
  17. Billboard Hot 100 Chart 50th Anniversary
  18. 55 Pinner Hill Road - On This Very Spot
  19. Family detective: Elton John - Telegraph
  20. years of eltonjohnallsongslist: 1972: Hercules Chronology
  21. “Frome Court - On This Very Spot”. On This Very Spot. 2007년 4월 3일. 2009년 4월 18일에 확인함. 
  22. "Born to Rock - The Corvettes: Reggie's First Band"
  23. “Elton John”. 2009년 6월 24일에 확인함. 영문 위키에 SPECTACLE: Season 1 - Episode 1 (clip) 에 존재한다고 기술되어 있음 
  24. James | Biography & History | AllMusic
  25. Elton: The Biography 페이지 78.
  26. Elton: The Biography 페이지 86.
  27. "Elton John as a Session Musician"
  28. Elton John’s American Debut: August 25, 1970
  29. "Funeral For A Friend / Love Lies Bleeding"
  30. "Mariah Is Our Christmas Number 1"
  31. "Soul Train History Book: Elton John"
  32. "Elton John The Dodger Stadium Documentary"
  33. "UK’s biggest selling singles of all-time"
  34. Elton: The Biography 페이지 183.
  35. Elton John, Lonely at the Top: Rolling Stone's 1976 Cover Story
  36. Goaldigger's Chronology
  37. Elton John In French Charts
  38. The Story of Elton John’s Historic First Tour of Russia
  39. That Time Elton John Duck-Walked Through Central Park
  40. Story Behind "Les Aveux"
  41. Elton: The Biography 페이지 268.
  42. The Story Behind "Elton's Song"
  43. "Elton John South Africa tour jogs memories of Sun City gigs"
  44. Unforgettable People (VI): Renate Blauel
  45. Elton: The Biography 페이지 298.
  46. 1987: Sir Horace Pussy's Chronology
  47. Rupert Murdoch and Elton John
  48. Elton John Behind The Music
  49. Elton settles Times libel case
  50. Elton John Won't Go Breaking Estranged Wife Renate's Heart—He's a 'single Man' Again, but Friendly
  51. That Time Elton John Auctioned Off $8.2 Million Worth of Memorabilia
  52. Elton John Auction Nets $8.2 Million
  53. Elton John Describes His 1990 Rehab in Extraordinary New Book
  54. "British album certifications – Elton John – The Very Best of Elton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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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Mercury Tribute Concert Was 20 Years Ago Today
  57. VMA 1992 - M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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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BBC – Press Office: Elton John tops million sellers c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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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Rolling Stone, 30 Best Albums of 2010 - Elton John and Leon Russell, The Union
  71. Elton John Announces New Album 'Wonderful Crazy Night'
  72. Best Original Score Written for a Motion Picture or a Television Special 부문(2015년 현재 Best Score Soundtrack for Visual Media 부문)
  73. Story Behind "The Lion King"
  74. Elton John - The Big Picture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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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황유진 (2012년 4월 10일). “뮤지컬 ‘라이온 킹’ 브로드웨이 ‘킹’ 등극”.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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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엘튼 존 공식 웹사이트 뉴스
  82. 황미현 (2013년 2월 11일). '그래미' 엘튼 존, 파란색 안경 깔맞춤..'귀요미 패션'. OSEN. 
  83. 권오용 (2011년 1월 20일). “엘튼 존-데이비드 퍼니쉬 커플, 대리모통해 얻은 아들 공개”. 일간스포츠. 
  84. 엘튼 존 공식 웹사이트 특별성명
  85. 김선우 (2004년 9월 23일). “SBS추석특집 ‘엘튼 존 내한 공연’”. 동아일보. 
  86. 정지섭 (2012년 11월 13일). “엘튼 존, '로켓 맨' 발매 40주년 기념 내한 공연”. 조선일보. 
  87. 이연정 (2012년 11월 27일). '거장의 품격' 보여준 엘튼 존 내한 공연”. 연합뉴스. 
  88. 오유진 (2015년 11월 4일). “세계적인 팝스타 ‘엘튼 존’ 내한공연 소극장에서 열려”. 일요서울. 
  89. 박진아 (2010년 6월 17일). “감동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아시아 최초 공연”. 한국경제매거진. 
  90. 이한철 (2010년 12월 17일). “한 차원 높은 ‘음악·무대·색감’…닻 올린 뮤지컬 <아이다>”. 데일리안. 
  91. 김효원 (2012년 9월 13일). “뮤지컬 '아이다'가 돌아온다”. 스포츠서울. 
  92. 박아름칼럼니스트 (2009년 6월 23일). “소나무,세계가 반했다”. 매스타임즈. 2009년 8월 3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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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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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에이즈 재단(EJAF) 이사회 의장
1992년 ~ 현재
왓퍼드 FC 구단주(Owner)
1976년 ~ 1987년
왓퍼드 FC 종신명예회장(honorary Life-President)
1990년 ~ 현재
왓퍼드 FC 이사회 의장(Chairman)
1997년 ~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