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스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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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스
The Rolling Stones

Stones members montage2.jpg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믹 재거, 키스 리처즈, 찰리 와츠, 로니 우드
기본 정보
국가 영국 영국
장르 , 블루스 록, 로큰롤, 리듬 앤 블루스, 하드 록, 블루스
활동 시기 1962년~현재
레이블 Decca, London, Rolling Stones, Virgin, ABKCO, Interscope, Polydor
웹사이트 www.rollingstones.com
구성원
믹 재거
키스 리처즈
로니 우드
찰리 와츠
이전 구성원
브라이언 존스
빌 와이먼
믹 테일러
이언 스튜어트

롤링 스톤스(영어: The Rolling Stones)는 1962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록 음악의 역사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인 활동을 하는 몇 안되는 밴드 중 하나로, 가장 위대한 록 밴드 중 하나로 꼽힌다.

1970년대 전성기 시절에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면서도 서던 록이나 소울, 글램 록, 댄스, 뉴 웨이브 등의 요소를 포함시킨 작품이 많다. 이름은 시카고 블루스의 거장 머디 워터스의 《Rollin' Stone》을 기념하여 브라이언 존스가 이름지었다. 1990년대에 베이시스트 빌 와이먼이 탈퇴한 후 멤버에는 베이시스트가 없다.

롤링 스톤스의 음악적인 뿌리는 흑인의 블루스에 있다. 데뷔곡 〈Come On〉은 척 베리의 커버곡이다. 그들이 데뷔한 1960년대 초기에는 아직까지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고, 블루스 앨범의 표지에는 흑인의 사진을 실어서는 안된다는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흑인의 음악을 표현한 밴드가 롤링 스톤스이다. 그 결과 지금은 흑인 뮤지션으로부터 경의를 받는 얼마 안되는 백인 밴드가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써 롤링 스톤즈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받아들였지만, 음악적 스타일에 관해서는 앵글로 색슨적인 표현 방법-인종이나 민족의 우열과는 관련 없이 음악적 표현 방법의 테두리에 머무른 비틀즈와는 구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롤링 스톤스의 활약은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두는 백인 뮤지션이 다수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무렵에 데뷔한 비틀즈의 깔끔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롤링 스톤스의 멤버는 자유로운 의상과 길게 늘어뜨린 머리로 그 후의 록 밴드들의 스타일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초기에 영국의 학교에서는 비틀즈의 머리 스타일은 금지되고 있었다. 잠시 후 롤링 스톤스가 데뷔하고 비틀즈의 머리 스타일을 허용한 학교가 많았지만, 롤링 스톤스의 머리 스타일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롤링 스톤스의 사진을 보면 기발하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당시 그들의 패션과 머리 스타일은 과격한 것이라고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빌보드지는 '핫 100 차트(Hot 100 Chart)'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롤링 스톤스는 10위에 올랐다. 약 2억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1]  데뷔 이래 수익은 거의 9천억 원에 달하며 《비거 뱅 투어》(Bigger Bang Tour)는 단독공연 최다 수익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2]

역사[편집]

초기[편집]

믹 재거는 런던 정치경제대학 경제학부 출신이며 키스 리처즈 역시 중산층 자손이었으며 초기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는 음악가정에서 자랐다. 베이스 담당 빌 와이먼과 드럼 찰리 와츠는 노동계급 출신이었다.[3]

1962–1967[편집]

1962년,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존스를 주축으로 보컬 믹 재거,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 베이스 빌 와이먼, 드럼 찰리 와츠 등 5명이 모여 결성되었다.[4] 1962년 7월 12일, 영국의 라이브 클럽 마키에서 〈Kansas City〉, 〈Bad Boy〉 등 18곡을 선보이며 첫 공연을 가졌다.[5] 재거는 당시의 공연에 대해, "청중은 밤을 새며 놀고 있는 대학생들이었다"며 "그들은 특별히 감정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진가를 알아봤다"고 말했다.[6] 데뷔 당시 비틀즈 흉내를 내다가 참패를 맛본 그들은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덤의 권고에 따라 곧바로 정반대 이미지로 차별화하여 재도전을 단행했다. 이때부터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는 불량, 퇴폐, 반항, 비행, 섹스 그리고 말썽과 같은 하위문화가 되었다.[3]

1965년 롤링 스톤스 북미 투어 광고에서

1964년 2월 7일, 비틀즈의 주도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되었고, 6월에 롤링 스톤스도 편승했다. 허나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처럼 미국에서 히트한 곡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진출했다. 무모하게도 보인 미국 진출이었지만 2집에 수록된 〈Time Is On My Side〉가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오르면서 주목을 받게 되고, 1965년 공개된 앨범 《Out Of Our Heads》에 수록된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7]

1965년의 브라이언 존스

1966년, 발표한 《Aftermath》는 믹과 키스의 곡으로만 채워진 앨범으로 그들이 1960년대에 발표한 것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브라이언 존스가 시타르를 연주한 〈Paint It Black〉은 큰 인기를 끌었고, 악동 이미지를 굳힌 〈Under My Thumb〉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8]

1968–1972[편집]

1967년, 재거와 리처즈가 마약 불법 소지 사건으로 무거운 형량을 선고 받고, 이어 브라이언 존스도 런던 아파트에서 같은 혐의로 체포되었다. 《타임스》는 이에 대해 "누가 바퀴로 나비를 찢어 죽이나?"라는 비호 기사를 개재했다.[3] 1968년, 《Beggars Banquet》를 발표했다. 밴드가 발표한 최고의 곡 중 하나인 〈Sympathy For The Devil〉, 반항적인 이미지에 어울리는 〈Street Fighting Man〉을 수록한 앨범은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9년, 브라이언 존스의 탈퇴로 밴드는 큰 위기를 맞았다. 그는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을 만큼의 천재적인 능력 가진 사람이었으나, 술과 약물에 찌든 일상을 반복해 보냈고 이기적인 성향 탓에 멤버들과 불화가 잦았다. 결국 밴드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후반에는 탈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공식적으로 밴드를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1969년 7월 3일, 27세의 나이로 자택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이에 밴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이드 파크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했다.[8] 그들은 브라이언 존스의 후임으로 믹 테일러를 영입했다.[9] 이후 발표한 싱글 〈Honky Tonk Women〉은 영국과 미국 차트 1위에 올랐다. 〈Gimme Shelter〉,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가 수록된 《Let It Bleed》(1969)도 음악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1969년 12월 6일, 롤링 스톤스가 캘리포니아 주 앨터몬트 고속도로에서 무료로 연 공연을 보기 위해 3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아수라장이 되었고, 흥분한 관중 가운데 흑인 청년이 경호팀 헬스엔젤스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후에 흑인 청년이 총기를 사용하려 했다는 증거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추방을 당했다.[9] 큰 충격을 받은 밴드는 사건 당시에 연주하고 있던 〈Sympathy For The Devil〉을 무대에서 한동안 연주하지 않았다.

1970년 자신들의 레이블 '롤링 스톤스'를 설립한 후,[10] 잠시 휴식기를 보낸 밴드는 1971년, 평단으로부터 "밴드 최고의 앨범"이라는 찬사를 받은 《Sticky Fingers》를 직접 설립한 레이블에서 발표했다. 1972년에 발표한 《Exile On Main St.》는 18곡을 수록한 더블 앨범으로 음악적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3–현재[편집]

1978년에 발표한 《Some Girls》는 디스코 영향권에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 걸작으로 〈Miss You〉, 〈Beast Of Burden〉이 히트했다. 미국에서만 600만 장 이상 판매된 앨범은 영국에서도 골드를 기록하며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 1980년에 발표한 《Emotional Rescue》는 록앤롤 성향이 짙어진 앨범으로 영국, 미국 차트 1위에 올랐다.

1989년, 《Steel Wheels》 이후 5년의 공백을 가진 롤링 스톤스는 1994년에 《Voodoo Lounge》를 발표하며 투어도 재개했다. 앨범 발표 직후 원년 멤버 빌 와이먼이 밴드를 탈퇴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이번 투어가 마지막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멤버들은 가벼운 농담으로 대꾸하는 여유를 보였다. 음반은 미국에서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1997년에 발표한 《Bridges To Babylon》은 곡을 쓰고 앨범을 녹음하는 방식에 변화를 준 앨범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데뷔 40주년을 맞은 2002년에 새로운 베스트 앨범 《Forty Licks》를 발표했다. 〈Don't Stop〉, 〈Keys To Your Love〉 등 4개의 신곡을 수록한 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무려 8년만에 발표한 정규 앨범 《A Bigger Bang》(2005)은 블루스 성향이 좀 더 강해진 록앤롤 앨범으로 〈Streets Of Love〉, 〈Rain Fall Down〉 등이 주목을 받았다. 《비거 뱅 투어》 장면들이 담긴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다큐멘터리 《샤인 어 라이트》는 2008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2009년부터 과거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2011년, 그 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라이브 음원들을 디지털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결성 50주년을 기념하는 베스트 앨범 《GRRR!》을 발표했다.[11] 2016년 블루스 커버 음반 《Blue & Lonesome》을 발표했다. 에릭 클랩턴이 〈Everybody Knows About My Good Thing〉, 〈I Can’t Quit You Baby〉 2개 트랙에 참여했다.[12]

구성원[편집]

현재 구성원[편집]

전임 멤버[편집]

디스코그라피[편집]

정규 음반

타가수와의 관계[편집]

마룬 5

2011년 발매되어 8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들 목록에 오른 마룬 5의 〈Moves Like Jagger〉의 Jagger는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를 뜻한다.[7] 롤링 스톤스와 마룬 5는 예전에 함께 투어를 한 적이 있다.

비틀즈

1960년대까지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를 의식한 활동을 했다. 예를 들어 존 레논폴 매카트니공동 작곡 시스템을 갖추자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도 이를 흉내내어 재거/리처즈란 시스템을 구축했다.[9] 1966년작 《Aftermath》는 재거와 리차즈가 《Rubber soul》에 충격 받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자세로 제작에 임한 것이며, 1967년 사이키델릭 음반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황급히 만들어진 것이었다.[3]

바깥 고리[편집]

각주[편집]

  1. Billboard Hot 100 Chart 50th Anniversary
  2. 문학산. “마틴 스콜세지의 '샤인 어 라이트'. 《주간한국》. 
  3. 임진모.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이즘》. 
  4. 강민욱 (2016년 5월 5일). “롤링스톤즈, "트럼프에 우리 노래 쓰게 허락한 적 없어". 《시사포커스》. 
  5. 이현우. “롤링스톤즈 50년 전 첫 공연장 방문 ‘인증샷‘”. 《스타투데이》. 
  6. “`50년 장수' 롤링스톤즈‥"비결은 교감". 《연합뉴스》. 2012년 7월 13일. 
  7. 권오성 (2012년 11월 15일). “[뮤직 토크] 롤링스톤즈(상)”. 매일신문사. 
  8. “The Rolling Stones”. 《멜론》. 
  9. 권오성 (2012년 11월 22일). “[뮤직토크] 롤링스톤즈(하)”. 《매일신문》. 
  10. 김경진. “Rolling Stones”. 《그루버스》. 
  11. 배순탁. “롤링스톤스 결성 50주년 반세기 이야기”. 《네이버 뮤직》. 유니버설뮤직. 
  12. 김현식 (2016년 12월 2일). '록의 전설' 롤링 스톤스, 11년 만에 신보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