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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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스히폴 국제공항에 운집한 팬과 기자

비틀마니아(Beatlemania)는 영국의 음악 그룹 비틀즈의 팬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특히 1960년대에 존재했던 열광적인 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편집]

1963년 10월 13일 비틀즈는 런던 팔라듐 극장에서 공연했다. '런던 팔라듐의 일요일 밤'이라는 제목으로 텔레비전에 생방송됐던 이날 라이브 실황은 1천5백만의 영국 시청자가 지켜봤다. 그러나 콘서트 시작 전부터 몰려든 팬들 때문에 극장과 그 앞길은 하루 종일 아수라장이었다. 팬들이 가져온 선물과 전보더미로 무대의 문은 아예 막혀버렸으며 수천 명이 내지르는 비명으로 인해 극장 안 스태프들은 리허설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자 다른 방송국들이 이 사상 초유의 현장을 담기 위해 재빨리 보도진을 파견했다. 반면에 준비 안 된 경찰들은 군중 통제력을 완전히 잃었다. 공연을 마친 비틀즈는 출입구가 차단됨에 따라 무대 뒷문을 통해 탈출해야 했고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차가 있는 곳까지 전력으로 달렸다. 다음날 모든 신문은 광적인 군중들의 사진과 기사를 1면에 실었고 그 가운데 《데일리 미러》지는 전례 없던 그 대혼란을 묘사하려고 비틀마니아(Beatlemania)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내보냈다.

비틀마니아가 유행하면서 영국 순회공연에서는 매일 밤 정신을 잃은 관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듬해 그 뜨거운 열기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 비틀즈의 음반을 출시하지 않았던 미국 캐피톨 레이블은 1964년 1월, 거액의 홍보비를 투자해 미국 출시용 음반 《Meet The Beatles》를 내놓았고, 싱글 커트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처음으로 미국 팝 차트를 정복했다. 2월 9일 비틀즈가 CBS TV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해 공연 모습을 공개했을 때 미국은 순식간에 그들에게 사로잡혔다. 사회자 에드 설리번이 "비틀즈입니다!"라고 외치자 자리에 있던 방청객 728명은 한꺼번에 함성을 내질렀다. 당시 미국 인구의 40%였던 7천3백만 시청자가 이 장면을 목격했고, 이튿날 이 사건은 모든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밴드의 성공적인 미국 데뷔를 축하하려 엘비스 프레슬리가 축전까지 보냈지만 당시 미국 언론의 반응은 엇갈렸다. 《헤럴드 트리뷴》은 "75%의 홍보, 20%의 헤어스타일, 5%의 경쾌한 노래"라고 논평했고, 일부 보수인사들은 "비틀마니아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면 《뉴스위크》는 "비틀즈는 긍정적인 매력을 주고 아이들에게 울분을 토해낼 기회를 제공한다면서 그들은 귀엽고 안전하다. 겨우 '네 손을 잡고 싶어'라고 요구할 뿐이지 않은가"라고 평가했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비틀즈 열성팬은 영국보다 훨씬 더 광적이고 과격했다. 비틀즈와 똑같은 옷을 입고 머리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공연장에 몰려들어서는 담장을 무너뜨렸다. 밴드는 흥분의 도가니였던 콘서트 현장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가려고 구급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샌프란시스코 공연장에서는 비틀즈의 리무진을 둘러싼 팬들 때문에 급기야 차 지붕이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결국 밴드는 긴급히 근처에 있던 앰뷸런스로 갈아타고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비틀즈가 묵던 호텔 방문의 손잡이는 그들이 만졌던 그 어떤 것이라도 훔치고 싶었던 팬들 때문에 죄다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1]

배경[편집]

미국에서 비틀마니아는 영국과는 조금 다른 배경 속에서 터져 나왔다. 영국의 경우는 가치관의 변화와 경제성장이 비틀마니아를 자극했다면 미국의 비틀마니아는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록 음악 팬들은 1950년대 로커빌리와 블루스에 기반을 둔 강렬한 로큰롤 비트를 기억하지만 더 이상 들을 수는 없었다. 1959년 로큰롤이 일순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로큰롤의 죽음'이었다.

로커빌리의 원조였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갑자기 군에 입대해 팬들을 실망시키더니 제대 후에는 온순한 사람이 되어 얌전한 팝 발라드를 불렀다. 버디 홀리와 리치 발렌스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고 척 베리는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리틀 리처드는 기독교에 귀의해 가스펠로 전향했다. 사촌 누이와 결혼했던 제리 리 루이스는 비난을 견디다 못해 로큰롤을 등졌다. 로큰롤 죽이기에 앞장섰던 페이올라 청문회도 결정적인 악재였다. 청문회 과정에서 흑인음악과 로큰롤을 적극 후원했던 디제이 앨런 프리드가 레코드사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자 이때부터 라디오 디제이들은 방송에서 로큰롤을 트는 것 자체를 주저했다. 달콤한 10대 취향의 팝이 그 시대를 장악해나갔고 비치 보이스의 서프 사운드와 프랭크 시내트라 류의 스탠더드, 걸 그룹의 사랑 노래가 나머지를 채웠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역시 비틀마니아를 촉발시킨 커다란 요인이다. 케네디를 잃은 상실감으로 젊은이들은 가슴이 뻥 뚫리는 슬픔에 빠졌고 어둡고 암울한 생활을 해야 했다. 미국의 진보 정신이 산산이 부서진 것이었다. 이때 등장한 비틀즈는 잿빛이었던 미국을 환하게 밝혀줬다. 데이비드 자트마리는 "재미있고 사랑스러웠던 비틀즈는 케네디 사망 후 미국을 집어삼켰던 염세주의에 완벽한 치유책 같았다"라고 말했다.[1]

각주[편집]

  1. 고영탁 (2006년 9월 30일). “비틀마니아”. 《네이버 지식백과》. 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