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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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Kurt Cobain
Nirvana around 1992.jpg
1992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공연하는 커트 코베인
기본 정보
본명 커트 도널드 코베인
(Kurt Donald Cobain)
출생 1967년 2월 20일(1967-02-20)
미국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
사망 1994년 4월 5일 (27세)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국적 미국 미국
직업 가수, 작곡가, 기타리스트
장르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
악기 보컬, 기타
활동 시기 1987~1994
가족 부인 코트니 러브, 딸 프랜시스 코베인
레이블 서브팝, DGC/게펜
관련 활동 너바나, 페컬 메터, 멜빈스

커트 도널드 코베인(Kurt Donald Cobain, 1967년 2월 20일 ~ 1994년 4월 5일)은 미국시애틀을 근거로 한 록 밴드 너바나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마리화나를 피웠을 정도로 심한 마약 중독자였고, 말년에는 헤로인에 중독되어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4월 8일 자택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죽음은 무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배우자는 코트니 러브이고, 딸로 프랜시스 빈 코베인이 있다.

생애[편집]

코베인이 태어난 애버딘의 그레이 하버 병원

커트 코베인은 1967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주애버딘에서 태어났다. 커트는 부모와 일가친척의 큰 기대와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태어났는데, 그의 외가 쪽으로는 6명의 이모와 삼촌, 친가 쪽으로는 2명의 삼촌이 있었다. 커트가 태어났을 때 가장 큰 특징은 금발머리와 담청색 눈동자였는데, 눈이 워낙 예뻐서 그가 태어났던 병원 안에서도 화제가 됐다고 한다.

코베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날 당시 21살이던 아버지 도널드 코베인과 19살이던 어머니 웬디 프라덴버그였는데, 그들은 1966년 부모의 동의없이 결혼하여 커트를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기사였고, 어머니는 아기를 돌보며 집안일을 했다.[1] 커트가 태어날 당시에는 부모의 과잉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랐는데, 이 때문에 그의 이모 마리는 그가 항상 행복해 하고 잘 웃는 아이였으며 집안의 복덩어리였다고 했고, 또한 기운차고 카리스마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커트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데에는 그의 가문의 영향이 컸다. 그의 외삼촌은 비치커머스라는 밴드의 멤버였고, 이모 마리는 기타를 칠 줄 알았으며, 큰할아버지는 테너 가수였다. 당시 커트는 비틀즈, 알로 거스리 등을 좋아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도 두각을 나타내는데, 당시 그의 유치원 친구 토니 허쉬만은 그가 무엇이라도 그릴 수 있었으며 매우 유사했다고 회상했다. 커트가 5살이었던 즈음 그의 부모의 사이는 매우 나빠져 결국 나중에는 이혼에 이르게 되며, 순수했던 커트에게 평생 동안 큰 상처를 남기게 되고, 음악적인 배경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가족과의 불화로 인해 그는 더욱더 내성적이고 소극적으로 변해 갔으며, 밀폐된 곳에 있길 좋아하게 된다.

열 네살 생일 때 기타를 선물받으면서 악기를 잡게 된 그는 메탈에 열광하던 또래들과 달리 뉴 웨이브와 하드코어 펑크에 심취하게 된다.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연주하던 그는 동료 뮤지션들과 교류를 하면서 훗날 너바나의 베이시스트가 된 크리스 노보셀릭을 1985년, 에버딘에서 만나게 된다. 크리스 노보셀릭은 크로아티아 출신의 안정적인 이민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이들은 곧 음악을 매개로 친해지게 되었는데, 이들을 공통적으로 사로잡은 것은 언더그라운드 하드코어 (펑크) 씬이다. 이들은 멜빈스(Melvins)의 멤버들과 친했고 그들의 음악을 좋아했다. 결국 둘은 너바나의 모태가 되는 스티프 우디즈(Stiff Woodies)란 밴드를 결성하였다. 크리스 노보셀릭이 베이스 기타를 맡았는데, 특이한 점은 이 밴드에서 커트 코베인이 드럼을 치고, 기타와 보컬은 그때그때 사람들을 기용했다는 사실이다.[2]

너바나[편집]

여러 차례의 멤버 교체와 밴드명 변화를 거쳐, 커트 코베인이 기타와 보컬을 맡게 되었고, 1987년 최종적으로 밴드명이 너바나로 바뀌었다. 이때의 멤버는 기타와 보컬에 커트 코베인, 베이스 기타에 크리스 노보셀릭, 드럼에 채트 채닝이었다. 너바나의 초기 무대는 보잘 것 없었지만, 이들은 얼마 안가 지역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87년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였고, 이를 통해 시애틀에 근거지를 둔 인디 레이블 서브 팝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2]

1988년 12월, 쇼킹 블루의 커버곡 〈Love Buzz〉를 첫 싱글로 발매한 후, 이듬해 봄 데뷔 앨범을 만들었다. 1989년 3월 나온 《Bleach》는 35,000장이란 많지 않은 판매고와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리뷰를 얻는데 그쳤지만 끊임없는 라이브 연주로 대학가(컬리지 씬)의 인기와 선배 얼터너티브 뮤지션/밴드와 음악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0년 여름 너바나는 머드허니의 댄 페터스를 세션으로 기용하고 부치 빅을 프로듀서로 맞이하여 만든 싱글 〈Sliver / Dive〉를 발매했다. 스크림에서 활동하던 데이브 그롤이 밴드의 드러머로 합류한 것도 1990년의 일이다. 너바나는 앞서의 싱글 외에 부치 빅과 데모 테이프 작업을 더 했고, 이를 들어본 메이저 레이블 게펜이 호감을 보였는데, 결국 너바나는 1991년 4월 287,000달러에 게펜과 계약을 맺었다. 

1991년 여름 너바나는 유럽의 페스티벌 시즌을 맞아 각종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유럽 공연 후 그해 9월 이들의 세 번째 앨범인 《Nevermind》(1991)가 발매되었다. 발매 당시 이 앨범은 차트 100위권 밖이었다. 게펜 레이블도 너바나가 인디 밴드였던만큼 대략 10만장 정도 팔릴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초판 5만장은 금새 동이 나고 품귀 현상마저 일어났다. 음반은 발매 두 달만에 플래티넘 디스크가 되었고, 급기야 1992년 1월 마이클 잭슨의 컴백 앨범 《Dangerous》를 끌어내리고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2월에 이미 판매고는 3백만장을 넘어섰으며, 영국에서도 탑 10에 올랐다. 《Nevermind》의 앨범 차트 1위와 더불어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도 싱글 차트 탑 10에 오르면서 골드를 기록했고, 4월에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1992년 1월 11일, 너바나는 유명한 TV 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했는데, 이는 그들의 인기를 증명해주는 역할 이상이었다. 라이브 연주를 마치면서 크리스 노보셀릭과 데이브 그롤이 서로 입을 맞추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이는 동성애에 대한 연대감을 표현한 것이자 이성애주의와 마초주의의 주류 문화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 것이었다. 

커트 코베인은 1992년 2월 커트니 러브와 결혼하고, 8월에 프랜시스 빈 코베인을 낳았다. 코베인은 헤로인 남용과 정신적 문제가 악화되어 자살 시도와 더불어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 1993년 9월 3집 《In Utero》가 발매되었다. 발매되자 마자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고, 역시 멀티 플래티넘 행진을 이어갔다.

1994년이 되자 커트 코베인의 정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투어는 종종 취소되었고, 그는 병원에 입원도 하고 마약 재활 센터에도 들어갔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사망[편집]

커트 코베인의 유서

1994년 4월 8일, 커트 코베인은 시애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되기 3일 전에 머리에 권총을 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었고, 그의 유서가 발견되었다.[3] 경찰은 하나밖에 없는 문이 안에서 잠긴 점과, 타인의 지문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 유서를 남긴 점 등을 들어 자살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후에 공개된 사진에는 커트의 사체, 그리고 자살에 쓰인 12-게이지 샷건이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경찰이 자살에 사용되었다고 밝힌 엽총에서 커트 코베인의 지문까지도 전혀 발견되지 않아 누군가 살해한 후 지문을 전부 닦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경찰이 “문이 하나뿐인데 안쪽에서 잠겨진 상태였다”라는 발표와 달리 문이 두 개였던 것으로 밝혀져 커트 코베인이 타살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커트 코베인의 혈액에서 검출된 헤로인이 치사량의 세 배가 될 정도인데도 주변이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며, 그런 상태라면 정신이 매우 혼미하여 장전을 하거나 목표물을 맞추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커트 코베인의 수사 기록에는 그가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커트 코베인의 시신 옆에 있었던 유서에서도 필체가 “두 사람의 것”이라는 필적 전문가의 주장도 제기되었다.

커트 코베인을 살해했을 것이라고 지목된 용의자로는 커트 코베인의 부인이었던 코트니 러브 또는 소속사가 지목되었다. 코트니 러브는 당시 커트 코베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이혼 위기에 있었는데, 결혼생활 시절 “이혼 할 경우 재산 분할을 하지 않는다”라며 내건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재산을 얻기 위해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과 내연 관계를 유지하며 커트 코베인을 살해한 후 수사 과정을 조작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며, 코트니 러브의 아버지 역시 코트니 러브의 정신적인 부분을 언급하여 “자신의 딸이 커트 코베인을 살해했다”라는 주장에 무게를 실었다. 커트 코베인의 시신에서 검출된 헤로인 역시 만성 두통에 시달리던 커트 코베인을 위해 코트니 러브가 투약하던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한편, 커트 코베인은 작업 당시 우울증을 앓아 음악 활동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는데,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소속사가 그와 계약이 끝날 것을 우려하여 커트 코베인을 “불멸의 음악가”로 만들어 수익을 올리기 위해 살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4][5][6]

사용하던 기타[편집]

커트 코베인이 사용한 펜더 머스탱 기타

커트 코베인은 주로 펜더 사의 기타를 많이 사용하였다. 특히 펜더 재규어, 머스탱, 재그스탕 등을 자주 사용했고, 스트라토캐스터, 텔레캐스터 등도 사용을 했다. 재그스탕은 커트가 펜더 사의 직접 주문 제작한 제품으로, 머스탱과 재규어 기능을 합친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또 그는 모스라이트사의 레스폴형 기타와 유니복스사의 기타도 사용하였고, 에피폰사의 ET-270 모델도 사용하였다.

기타 파괴[편집]

그는 많은 공연 도중 수많은 기타를 박살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가 무대에서 보여준 기타 파괴행위를 물질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강력하게 몸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도 하고, 그의 불행했던 과거에 담겨 있는 분노, 슬픔 등을 밖으로 배출한 것이라고도 한다.

음반 목록[편집]

솔로[편집]

Montage of Heck: The Home Recordings》 (2015)

각주[편집]

  1. 안재필 (2004년 5월 15일). “시대의 목소리 커트 코베인”. 《네이버》. 살림출판사. 
  2. 박문각. “커트 코베인 - 시사상식사전”. 《네이버》. 
  3. “에이미 와인하우스, 커트 코베인, 지미 헨드릭스의 공통점은?”. 《한국경제》. 
  4.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0년 3월 14일 방송분
  5. 김소희 기자 (2010년 3월 14일). “커트 코베인 죽음, 자살인가 타살인가? 미스터리 의혹만 증폭”. 뉴스엔. 2010년 3월 14일에 확인함. 
  6. 김재창 기자 (2010년 3월 14일). “커트 코베인, 죽음의 배후에 아내인 '코트니 러브'(?)”. 아츠뉴스. 2010년 3월 14일에 확인함.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