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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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Kurt Cobain
커트 코베인.jpg
1991년 런던에서
기본 정보
본명 Kurt Donald Cobain
출생 1967년 2월 20일(1967-02-20)
미국의 기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
사망 1994년 4월 5일 (27세)
미국의 기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국적 미국의 기 미국
직업 가수, 작곡가, 기타리스트
장르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
악기 보컬, 기타
활동 시기 1987년 ~ 1994년
가족 부인 코트니 러브
프랜시스 코베인
레이블 서브 팝, DGC/게펜
관련 활동 너바나, 피컬 메터, 멜빈스
서명
Firma de Kurt Cobain.svg

커트 도널드 코베인(Kurt Donald Cobain, 1967년 2월 20일 ~ 1994년 4월 5일)은 미국의 시애틀을 근거로 한 록 밴드 너바나의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이다.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나고 자란 코베인은 크리스 노보셀릭과 1987년 밴드 너바나를 결성했고 시에틀 음악 씬과 그런지 장르의 일원으로 지낸다. 그들의 데뷔 음반 《Bleach》는 1989년 독립 음반 레이블을 통해 발표되었다. 메이저 레이블 DGC 레코드와 계약한 뒤 크게 성공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로 일약 스타가 되었으며 노래가 수록된 《Nevermind》 (1991) 또한 성공했다. 이 음반의 성공 뒤로 너바나는 X 세대의 "대표 밴드"라는 칭호가 부여되었고, 코베인은 "세대의 대변자"로 떠받들여진다.[1] 그러나 코베인 자신은 이러한 추앙을 거북스러워 했고, 자신의 메시지와 예술적 비전을 대중이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생애 마지막 해, 코베인은 헤로인 중독, 만성적 건강 문제,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또한 자신의 유명세와 대중의 이미지, 그리고 그와 아내 커트니 러브를 둘러싼 전문적, 개인적 심리적 부담감으로 힘겨워했다. 1994년 4월 8일 코베인은 시에틀에 있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죽음은 엽총에 의한 자살임이 밝혀졌다. 27세 나이의 죽음에 대한 정황은 대중으로부터 매력과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너바나에서 작곡가로서 활동한 이래 밴드는 2,500만 장의 음반을 미국 내에서 팔았고, 전 세계에서 7,500만 장을 팔았다. 사후 너바나의 일원인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과 함께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가계와 배경[편집]

커트 코베인은 외가 쪽으로는 6명의 이모와 삼촌, 친가 쪽으로는 2명의 삼촌이 있었다.[2] 친가 쪽은 아일랜드 치론 카운티에서 1875년 이주해 온 프랑스, 아일랜드 혈통이며 외가 쪽은 독일, 아일랜드, 영국 혈통인 프라덴버그 집안이다.[2] 프라덴버그 집안은 코스모폴리스 출신이며 그곳에서 1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몬테사노는 커트의 할아버지 르랜드 코베인이 자란 곳이다.[3] 커트의 외삼촌은 비치커머스라는 밴드의 멤버였고, 이모 마리는 기타를 칠 줄 알았다. 큰할아버지 델버트는 테너 가수였는데 《킹 오브 재즈》라는 영화에 출현한 적이 있었다.[4] 커트의 할머니 이리스와 할아버지 르랜드는 둘 다 가난의 상처와 일찍 아버지를 여읨에 대한 아픔을 간직했다. 이리즈의 아버지는 레이오니어 펄프 공장에서 독성 증기 때무에 숨졌고, 보안관으로 활동한 르랜드의 아버지는 오발된 자신의 총에 맞아 숨졌다. 르랜드는 해군에 입대해 과달카날에 배치되었으나 장교를 두들겨 팬 후 병원으로 보내져 정신감정을 받았다. 군대에서 쫓겨난 후로 이리스와의 결혼을 했지만, 술과 분노에 절여 가족에게 폭력을 표출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셋째 아들 마이클이 6살에 죽은 뒤로는 더 심해졌다.[5]

커트의 아버지 도널드 르랜드 코베인은 호퀴엄에 있는 셰브론 자동차 정비소의 정비공이었다. 어머니 웬디 엘리자베스(혼전성은 프라덴버그)는 웨이트리스로 일했다.[6] 도널드와 웬디는 고등학교에서 만났고 졸업한 지 몇 주 뒤인 1966년 6월에 웬디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도널드는 아버지의 차를 빌려 웬디와 함께 아이다호로 여행 도중 결혼했다.[7]

생애[편집]

출생과 부모의 이혼[편집]

커트 코베인이 태어난 그레이스 하버 지역병원

커트 도널드 코베인은 1967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의 그레이스 하버 병원에서 태어났다.[8] 첫 아이가 그렇듯 커트는 부모와 일가친척의 큰 기대와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태어났다. 그의 두드러지는 고운 담청색 눈은 그가 태어났을 때 간호사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2] 코베인은 스스로 "사람들이 히피즘으로 불타올랐던 해"에 태어났다고 자서전 같은 곳에 썼다. 또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부모는 반문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기록했다.[8] 호퀴엄의 남의 집 뒤뜰에 딸린 작은 집에서 살던 부부는 커트가 태어날 무렵 애버딘 가 2830번지에 있는 좀 더 큰 집으로 옮겨 갈 돈을 마련했다.[9] 두 돌이 지난 지 얼마 안되어 커트는 보다(Boddah)라는 상상 속의 친구를 만들었다.[10] 그 무렵 도널드와 웬디는 7,850달러를 주고 애버딘 이스트 1번가 1210번지에 있는 28평짜리 2층집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10]

코베인이 세 살이던 1970년 4월 24일 여동생 킴벌리가 태어난다.[11][12] 도널드는 "커트는 킴벌리를 무척 사랑"했으며 "애들은 서로를 너무 좋아했다"고 회상했다.[13] 1972년 9월, 커트는 집에서 북쪽으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로버트 그레이 초등학교에서 유치원 과정을 밟게 된다. 그해 커트의 학생 카드에 선생님은 '정말 착한 학생'이라고 기록했다.[14] 처음 몇 년 동안은 부부 관계의 갈등이 잠잠했지만 두 아이를 키움으로써 금전적, 신체적 문제가 발생하면서 둘은 싸움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렇지만 커트는 어릴 시절 좋은 기억도 있었다. 여름이면 커트 가족은 워싱천 해안인 워셔웨이 비치에 있는 프라덴버그 집안 오두막에서 휴가를 보냈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러 갔다.[15] 1974년, 경제적 부담이 심해지자 도널드 코베인은 직업을 목재업으로 전향하여 일거리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마이어 브러더스 사의 사무직 자리에 앉아 시간당 4달러 10센트를 받았다.[16]

커트의 부모는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이혼했다. 그런데 거의 20년이 지난 1993년에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일기에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여러 인터뷰에서도 종종 말했듯이 커트에게는 부모의 이혼이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 각인되었고 그것이 결코 따분한 일이 아님을, 계속해서 커트의 삶을 짓누르는 문제가 되었음을 암시했다.[17] 커트는 "모든 사람을 혐호하게 된 시점"이 "여덟 살"이었다고 자주 언급했지만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문제의 근원이 그렇게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고 보았다. 처음엔 이혼이 오히려 커트의 정서적인 상황에 좋은 쪽으로 작용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이사를 나갔는데 별거와 함께 부모와의 다툼과 불화도 줄어들었다. 커트와 돈은 좁아터진 한 칸짜리 트레일러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남자들 간의 결속감은 커트를 잘 지탱해주는 것처럼 보였고 학교도 친구관계도 그다지 별 문제가 없었다. 돈이 재혼했을 때도 일단 잘 견뎌내는 것처럼 보였고, 이복형제 및 자매와 함께 생활하면서 좀 더 그럴 듯한 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재혼하면서 그들은 다시 애버딘의 동쪽으로 12km 떨어진 작은 마을 몬테사노로 이사했다.[17]

중고등학교 시절[편집]

중학교 시절 친구들은 커트를 상당히 가난한 집안의 아이로 여겼고 실제로 그러해 보였다. 그는 미식축구와 레슬링, 트랙경기 등을 해 보고 그 중에서 레슬링에 열중했다. 반 친구였던 로니 토이라는 "거짓말 안 보태고 그는 가장 인기 있는 아이들 중 하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부모의 이혼만큼이나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커트의 어린 마음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대사건이었다. 커트는 1마일이 조금 안 되는 길을 매일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날 커트와 두 명의 친구들은 숲을 지나는 지름길을 걷다가 지난 밤 나무에 목을 맨 젊은 남자의 시체와 맞닥뜨렸다. 그는 친구의 형이었고 커트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시체는 사지가 뒤틀린 기괴한 모습으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커트는 그 사건을 늘 입에 달고 다녔으며 그의 청소년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17] 커트의 친구 중에 발달 장애를 앓는 누이가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그녀에 대해 조금씩 다른 표현을 했다. 커트와 두 명의 친구들은 방과 후에 소녀의 집에 들러서 부모가 술을 보관해 둔 진열장을 털었다. 친구들은 돌아갔고 커트와 단 둘이 남게 된 그 소녀는 커트 앞에서 옷을 벗었다. 그들은 서로를 애무하고 섹스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가 풍기는 냄새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그의 미숙한 첫 성경험은 그렇게 끝이 났다.[18]

커트가 일기에서 밝힌 대로라면, 그는 엄청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그 사건이 일어난 그 다음 주 내내 학교를 빠졌으며 학교에 나가자마자 외출 금지 명령을 받았다. 또 학교를 찾아온 그녀의 아버지는 그를 성폭행범으로 고소했으며 커트는 모테사노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경찰 조사와 관련된 어떠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으며 커트의 친구들 중 그 누구도 이 중대한 사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일은 커트의 과대망상이 만들어낸 일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그 소녀에게 학교 기념앨범을 보여주면서 거기서 그녀를 폭행한 학생이 누구인지 찾아보라고 했다. 커트의 일기에 따르면 커트는 앨범 사진을 찍는 날 결석을 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폭행한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커트의 사진은 중학교 시절 모든 앨범에 실려 있으며 그의 이 발언 또한 상당히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과 관련된 또 다른 버전에서 그는 "그녀는 18살이었으며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고소를 면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얘기 또한 다른 곳에서 했던 이 이야기들과 모순된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은 커트와 소녀 사이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그 일로 인해 그가 수치심을 느꼈을 거라고 했다.[19]

커트가 자신이 한때 머물렀다고 주장한 애버딘의 영 스트리트 브리지

커트의 가정생활은 점점 힘들어졌다. 아버지와 또 계모와의 갈등이 커져서 다툼으로 번졌고, 그 다툼은 거의 매일 반복될 만큼 잦아졌다. 그는 주말이면 애버딘에 있는 어머니에게 들렀는데 그녀와도 다투었다. 그것은 보통의 부모와 십대 자식 간의 갈등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심각해졌고 그 갈등은 부모들이 커트를 다른 친척집에 보내기로 결정할 만큼 커졌다. 처음 그는 삼촌 집에 머물렀고 이내 다른 친척집으로 옮겨갔다. 몇 달에 걸쳐 몇 차례의 이사를 한 후 그는 애버딘에 있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간 네 번이나 거처를 옮기면서 커트의 학교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전까지 그는 비교적 괜찮은 성적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영리한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10학년이 된 그는 성적불량으로 낙제를 밥먹듯 하게 되었다.[20] 애버딘으로 돌아간 커트의 일상은 불화의 연속이었고 그는 어머니와 자주 충돌했다. 웬디의 남자친구들 중 한 명은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는 커트를 "동성애자"라고 불렀다. 마침내 커트가 소녀를 데려와 함께 침대에 있는 모습을 웬디에게 들키고 난 후 커트는 집에서 쫓겨났다. 당시 그의 나이 17살이었다.[21]

커트는 나중에 어머니의 집에서 쫓겨난 이 시기 거리를 전전하다가 애버딘의 영 스트리트 브리지 아래 축축한 곳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곤 말하곤 하였다. 훗날 커트는 이 시기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언론에 비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작사한 노래 〈Something in the Way〉에서 그때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상당기간 집을 나와 있었다는 사실은 틀림없었지만, 애버딘의 습한 날씨에서 노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 노보셀릭은 "그는 절대 다리 밑에서 지내지 않았"으며 "거기 자주 가긴 했지만 그런 강기슭 진창에서는 누구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1] 커트는 친구들의 집에서 남는 침실이나 베란다에서 잠을 청했으며 이도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따뜻한 아파트 복도에서 잤다. 그는 애버딘 팀버랜드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거기서 《아웃사이더》와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책을 읽으면서 독학을 했다. 하룻밤 지낼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면 이따금 그레이 하버 지역병원을 찾아가기도 했다.[22] 커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외형적인 삶뿐만 아니라 내적인 심리상태와도 계속 싸워가면서 보내야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잠시 대안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두 번씩이나 해군에 입대할 것을 고려할 만큼 좌절감이 컸다. 또한 그는 크리스천으로 거듭나기 위해 몇 주간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 청년부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신앙적으로 거듭나려면 한참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3]

피컬 메터와 크리스 노보셀릭[편집]

2004년의 크리스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무렵, 커트는 자신의 창조 목록에 작곡을 더하기 시작했다. 마리는 집에 녹음 장비를 갖추고 있었고 10대가 된 커트는 정기적으로 마리를 찾아가 그 장비를 활용하였다. 그가 15살이던 1982년 12월, 그는 '조직된 혼란'이란 이름 하에 자신의 첫 번째 데모 테이프를 녹음했다. 마리의 회상에 따르면 대부분의 노래는 심하게 뒤틀린 분위기였으며 커트의 목소리는 흐릿하고 냉소적이었다. 1985년 12월, 마리의 집에서 커트는 좀 더 체계적인 세션을 갖추고 녹음에 임했다. 멜빈스의 드러머 데일 크로버가 베이스를 연주하고 드럼은 동네 친구 그렉 호칸슨이 맡았다. 커트는 이 그룹을 피컬 메터(똥 덩어리)라고 불렀는데, 미숙하게나마 그가 그가 결성한 최초의 밴드였다. 커트는 자신이 쓴 노래들로 가득 찬 노트 한 권을 들고 왔다. 대부분의 곡은 멜빈스의 영향을 받은 허무주의 스타일의 습작이었다. 커트는 대부분의 가사를 직접 썼지만 녹음하는 동안 스스로 만족할 만큼 완성된 작품은 없었다. 그는 녹음을 끝낸 일보다 오히려 피컬 메터라는 기지 넘치는 밴드 이름에 더 애착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제작한 카세트 테이프를 참 자랑스럽게 애버딘의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24]

이름만 밴드였던 피컬 메터는 몇 번의 연습만 하다가 해체되었다. 하지만 피컬 메터의 테이프는 너바나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하게 되는데, 그 테이프를 손에 넣은 사람 중 한 명이 애버딘에 살고 있던 또 다른 사회부적응자 크리스 노보셀릭이었다. 노보셀릭은 커트보다 두 살이 많았고 마을의 버거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커트는 종종 그곳에 들러 노보셀릭과 음악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테이프에서 〈Spank Thru〉가 노보셀릭의 머리를 강타했고, 그는 "난 그것이 정말 좋은 노래라고 생각해요."라고 기억했다. 노보셀릭과 그의 여자 친구 셸리 딜리는 커트가 베란다에 있는 오래된 냉장고용 박스에서 잔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의 집 뒤에 주차되어 있던 밴을 내주었다.[23] 그들은 종종 주류문화의 타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떻게 그들의 무정부주의적인 음악적 아이디어들로 그런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토론했다. 주류문화를 접수하겠다는 그들의 생각은 아직 요원했고, 그들이 결성한 최초의 그룹은 음악을 통해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들은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이 첫 번째 히트곡을 발표한 지 20년이 지난 뒤에도 끊임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커트와 크리스는 이 밴드의 커버 밴드를 만들면 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그들은 몇몇 밴드를 연이어 결성했는데 그 팀들은 정식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유치하고 미숙한 밴드였다.[23]

실제로 결성되어 몇 번의 연습까지 가질 만큼 구체화된 스티프 우더스라는 팀이 있었다.[23] 전에 멜빈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연습도 특이한 취향을 가진 극소수 팬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 뒤로 음악은 커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지만 그는 계속 만화를 그리고 담벼락에 그래피티를 그렸으며 단편 영화들을 찍었다. 잠깐 동안은 록 비평가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는 샘플용 팬진, 팬클럽의 화보 같은 잡지를 기획하기도 했지만 친구들 중 하나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앨범을 비평할 수는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고 그 기획은 중단되었다. 몇몇 다른 팬진의 배포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가 직접 팬진을 제작하거나 배급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심지어 유명해진 후로도 이 발행을 이야기하며 아이디어를 포기하지 했다. 또한 자신의 레코드 레이블을 만드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는 이 아이디어를 부자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루트로 생각했다.[25]

너바나[편집]

1986년 겨울 즈음 커트는 트레이시 머랜더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고, 같은 시기에 애버딘에서 월세 100달러짜리 집을 찾아냈고 룸메이트를 구해 월세를 나눠 내게 되었다. 월세를 해결하기 위해 커트는 워싱턴 주 오션 쇼어 비치의 폴리네시안 리조트에서 잡역부 일을 하기도 했지만 몰래 수시로 잠을 자다 덜미가 잡혀 해고되었다. 그럼에도 음악에 관해서는 게으르지 않았고 몇 시간씩 기타를 연습하고 커버 곡들과 직접 쓴 투박한 노래를 불렀다.[25] 멜빈스 멤버들이 올림피아 주에서 열린 한 공연에서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시를 읊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생애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설 수 있는 무대를 갖게 되었다. 관객들은 커트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기회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다시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커트는 동네 친구인 애런 벅하드를 설득해 드러머로 끌어들이고 레이먼드에 사는 친구가 주최한 하우스 파티를 통해 밴드의 첫 번째 무대를 갖게 되었다.[26] 레이먼드에서의 데뷔 공연 직후, 커트는 트레이시와 함께 살기 위해 올림피아로 이사했다.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그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썼고 잠깐 경비원 일도 하기도 했지만 그 게으른 천성에 걸맞게 대체로 트레이시의 친절에 빌붙어 생활했다. 그 즈음 커트의 밴드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간간이 공연을 가졌다. 대부분 타코마에서 열렸으며 관객들은 늘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몇 개의 이름으로 공연했는데 커트가 너바나라고 팀 이름을 확정짓기 전까지 보통 스키드 로우라는 이름을 썼다. 열반 내지 해탈이라는 의뜻의 너바나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커트는 동양의 신비주의에도 끌렸지만 사실 그는 이 단어가 주는 세련된 어감 때문에 그 이름을 선택했다.[26]

1988년까지 밴드는 커트의 노트 속에 있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노보셀릭과 커트는 연습시간을 자주 가졌지만 그들은 꾸준히 같이 활동할 드러머를 찾기 위해 애썼다. 커트는 그때 이미 20곡이 넘는 곡들을 써 놓은 상태였으며 노트에 제목 리스트를 꼼꼼히 적고 결코 제작될 것 같지 않은 앨범의 차례를 구상했다. 이때까지, 몇 회밖에 되지 않던 너바나의 공연에서 그들은 세 명의 서로 다른 드러머들과 함께 연주했다. 그나마 그들에게 가장 큰 행운은 멜빈스의 드러머 데일 크로버를 빌려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로버와 커트가 매우 친한 사이였음에도 당시 너바나는 밴드로서 기대주가 되지 못해 그는 멜빈스를 떠나는 것을 고민하지 않았다. 《로켓》의 1987년 10월호에 커트는 종신직으로 일할 드러머를 구하기 위해 구인광고를 실었다.[27] 이 무렵, 커트는 《로켓》에 실린 시간당 20달러에 레코딩 스튜디오를 빌려준다는 광고에 혹하였다. 여섯 시간 동안 커트, 크리스 노보셀릭, 데일 크로버는 아홉 곡 반을 녹음하고 믹싱했으며 "데일 데모"라고 이름 붙여진 테이프를 완성했다. 마지막 곡 〈Pen Cap Chew〉를 녹음하던 중에 릴 테이프가 다 돌아갔는데 커트는 그 곡을 녹음하기 다시 녹음하기 위해 30달러나 하는 릴 테이프에 돈을 더 쓰지 않기로 했다. 값싼 데일 데모에 담겨 있던 몇몇 노래들은 결국 공식적으로 발매되었다. 곡의 가사는 이상했지만 커트는 쉬운 멜로디를 매력적으로 잘 가다듬었으며 그것은 서브 팝의 조나단 포맨의 흥미를 끄는 계기가 되었다. 잭 엔디노가 그들의 데모 테이프를 폰맨에게 건냈고 그 레이블의 대표는 밴드에게 레코드 계약을 제안했다. 사실 그 계약은 구두 협약과 다를 바 없이 서브 팝이 너바나의 싱글 컷을 위한 최소한의 녹음 비용을 지불한다는 약속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28] 1988년 초, 채드 채닝이 드러머로 너바나에 합류했다. 밴드는 제대로 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서브 팝과 계약하고 시애틀에서 몇 차례 공연도 갖자 밴드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1988년 11월이 되어서야 마침내 〈Love Buzz〉 싱글을 발매했다. 그 싱글은 처음에 회원제로 발매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쇼킹 블루의 예전 곡을 다시 부른 곡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데뷔 음반으로 좀 별난 선택이었다는, 실망스런 논평을 실었다.[29]

커트는 전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곡을 쓰고 있었음에도 서브 팝의 재정적인 문제가 정식 앨범 녹음을 가로막았다. 1988년 12월 마침내 서브 팝은 레코딩 예산을 할당했고 밴드는 프로듀서 잭 엔디노와 함께 자신들의 첫 번째 앨범을 녹음했다. 《Bleach》는 1989년 6월 15일에 발매되었으며 그 직후 밴드는 첫 번째 미국 순회공연을 갖게 되었다. 이후 3년에 걸쳐 너바나의 투어는 한 시즌도 빠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대학 방송국은 《Bleach》에 수록된 몇몇 곡을 방송하기 시작했고 투어 역시 초반에는 약간 손해를 보았지만 이내 티쳐츠 등을 팔아 적으나마 수익을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30] 너바나의 첫 번째 유럽 투어는 커트가 집안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던 1989년 말 시작되었으며 커트에게는 기분전환의 기회가 되어주었다.[31]

연애와 결혼[편집]

트레이시 머랜더[편집]

1986년 겨울, 커트는 트레이시 머랜더라는 소녀를 만났고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다.[25] 그녀는 재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바나의 가장 큰 후원자였지만 그는 종종 투어를 떠났고, 커트와 생활하는 일은 그녀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들은 동물을 사랑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커트가 "동물농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집에서 많은 동물을 키웠다. 그 동물원은 많은 손길을 필요로 했지만 커트는 그 많은 동물우리를 청소하기는 커녕 허구한 날 게으름을 피웠다. 이 문제를 비롯하여 집안일에 대한 커트의 태만함은 차츰 그들에게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트레이시는 비교적 솔직담백한 여자였으며 소녀 같은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커트가 관심을 보이는 여상상이란 그가 수집하거나 공동묘지에서 훔친 성모마리아상 혹은 도자기 인형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들 사이에 또 다른 문제는 커트가 끌어모은 온갖 중고 잡동사니들이었다. 트레이시는 제발 물건 좀 정리하라 몰아부쳤고 몇 번이고 '청소하라'는 메모를 붙였다. 대개의 경우 그녀의 말은 무시당했고 대신 더 많은 잡동사니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같은 단지의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커트는 이내 더욱 많아진 보물들로 더 넓어진 공간을 차곡차곡 채워 나갔다.[32]

토니 베일[편집]

코트니 러브[편집]

A woman posed for a photo staring into the camera
1986년, 《스트레이트 투 헬》의 홍보용 사진에서의 러브

1990년 봄의 어느 날 밤에 데이몬 로메로가 커트의 집에 놀러 왔고 그들은 비디오를 빌렸다. 커트는 조 스트럼머와 엘비스 코스텔로가 나오는 알렉스 콕스의 최신작 《스트레이트 투 헬》을 골랐다. 영화가 나오는 동안 로메로는 여배우를 가르키면서 "이봐, 포틀랜드에서 활동하는 밴드에 있는 여자야."라고 말했다. 로메로는 코트니 러브를 가르키고 있었다. 비평가들의 평은 아주 안 좋았지만 커트는 그 영화를 즐겼다. "커트가 좋아할 만한 조잡한 영화였다."고 로메로는 회상했다.[33] 커트 코베인과 코트니 러브의 눈길이 서로 꽃인 것은 1990년 1월 20일 금요일 저녁 11시였다.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 있는 작고 어스름한 불빛의 나이트클럽 사타리콘에서 커트는 너바나 공연을 하러 왔고, 코트니는 오프닝 밴드 오일러 블러드멘의 멤버와 사귀고 있던 친구와 함께 이곳에 왔다. 이미 포틀랜드에서는 악명 높은 인물이었던 코트니는 몇 분 후 공연을 하게 될 커트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부스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여왕 행세를 하고 있었다. 코트니는 "너 데이브 퍼너 같아 보인다"고 말문을 열았다. 실제로 머리를 자주 감지 않는다는 점에는 소울 애실럼의 리드 싱어인 그와 조금 비슷해 보이기는 했다.[34] 그러자 커트는 코트니를 잡고는 바닥에 레슬링 하듯이 메쳤다. 이 순간을 코트니는 이렇게 기억했다. "앞에 있는 주크박스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리빙 칼라의 곡이 나오고 있었고 바닥에는 맥주가 있었다." 바닥에서 뒹군 것은 순전히 장난이었다. 커트는 몸싸움 한 뒤에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준 후 자신의 마스코트로 삼았던 침침 스티커를 선물로 줬다.[35]

건강과 죽음[편집]

"나의 병은 러시안 룰렛과도 같다. 그 발작이 언제 들이닥칠지 전혀 알 수 없다. 나는 집에서 자연용천수를 마시면서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이, 어떠한 괴로움도 없이, 매우 편안한 분위기에서 쉬고 있으면서도 쾅! 별안간 장총에 맞은 것처럼 극심한 위통이 엄습했다."

– 커트 코베인, 일기장에서[36]

초등학교 2학년 때부버 커트는 교실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힘들어했다. 일곱 살 때 커트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 때문에 리탈린을 처방받았다. 어른이 된 후 커트는 자신이 마약에 중독된 원인 중 하나로 어린 시절 약물 치료를 자주 언급했다. 과다한 약물 치료를 받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마약 중독이나 약물 남용에 빠지기 쉽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밭침하는 일부 연구결과를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과잉행동 장애를 치료하는 약들이 커트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결국 그의 부모는 약물 치료를 중단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이미 약물로 인한 손상을 느낀 뒤였다고 말했다.[37] 커트와 함께 자란 아이들은 그가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했다고 돌이켜 말했다. 의사는 그의 광적인 행동을 다스리기 위해 리타놀을 처방했지만 필연적으로 따르는 우울은 예상하지 못했다. 우울증과 마약중독을 포함한 정신적인 건강 문제는 그의 양가에 두루 존재했으며 그의 친척들 중 몇 명은 자살을 기도했거나 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했다.[37] 커트의 아버지쪽 삼촌 두 명은 권총으로 자살했고 그 중 한 명은 머리를 쏴 자살했는데, 10대이던 커트는 이 죽음을 자주 농담처럼 희화해서 묘사하고는 했고, 친구들에게 "우리 삼촌은 짐 모리슨처럼 자살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17]

어려서부터 그는 다양한 종류의 위장병을 앓았다. 그는 담즙까지 토하는 경우도 잦았고 야채는 소화기관을 자극하고 치즈 가공품은 속을 가라앉힌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생각은 대부분 소화기 전문의들의 권고와는 상반되었다. 올림피아로 이사한 후,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한 전문가를 찾아냈고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1988년 당시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으며 다른 치료 가능한 질환들이 다 배제된 후에 흔히 내려지는 진단명이었다. 커트에게 있어 이 사실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통증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커트는 또한 어려서부터 척추측만증으로 고생했다. 커트의 경우 교정도구를 사용할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 병 또한 통증을 유발했으며 커트가 "뼈 속이 쑤신다고 말할 정도의 고통을 불러왔다. 커트는 무거운 기타를 메고 있어서 통증이 더욱 심해진다고 느꼈지만 그는 매일 몇 시간씩 기타를 연주했고 그것은 더욱 병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두 가지 만성 질환이 우울증과 섞이게 되자 육체로 인한 좌절감은 커트가 견디기 어려운 정도로 커졌다. 그는 자신의 병을 이겨내야 할 단순한 신체적 장애가 아니라 저주라고 생각했다. 커트는 언제나 여윈 편이었으며 고질적인 위장병으로 인해 좀체 몸부게가 늘지 않았다. 특히 체구를 커보이게 하기 위해서 자주 두세 장의 셔츠와 두어 벌의 진바지를 겹쳐 입곤 했다.[38]

음악적 기교[편집]

영향[편집]

몬테사노 고등학교 밴드에서 드럼을 두드리는 코베인

코베인은 아주 어릴 적 가족이 외가를 방문할 때마다 열리던 즉석 음악회에 매료되었고 이모와 삼촌이 그가 부르는 비틀즈, 알로 거스리, 몽키스 주제곡을 부르는 소리를 녹음했다.[4] 삼촌 두 명 중 한 명은 지역에서 연주활동을 하던 밴드를 이끌고 있었고, 이모 마리는 싱어송라이터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음악이 가정생활의 일부인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의 오래된 앨범을 커트에게 준 이모 마리는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성인이 되고나서 커트는 록에 대한 관심의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이모의 선물을 언급했다. "그녀는 분명 내 삶에 음악만큼이나 큰 도움을 준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너바나의 전기 《컴 애즈 유 어》의 저자 마이클 애저라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8살 때 하와이안 일렉트릭 기타와 앰프를 선물했습니다. 또 비틀즈 음반들을 내게 구해다 주는 사람이었지요."[39] 코베인의 전기작가 찰스 R. 크로스는 드럼이 "커트가 음악을 체험한 최초의 관문이었으며 어떤 식으로든 창조적인 재능을 처음으로 표현한 도구였다."고 썼으며, 코베인은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난 드디어 통신판매 카탈로그 겉장으로 헤드를 씌운 싸구려 양철 드럼 세트를 얻을 수 있었다."고 24살 때 썼다.[8] 그가 두 살 되던 해 이사간 가족의 첫 번째 집에서 커트는 훗날 들여놓게 되는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으며, 여동생 킴은 그가 피아노로 "금방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들을 연주하곤 했어요."라고 말했다.[39]

훗날 커트는 기타를 잡자마자 클래식 펑크 록의 명곡부터 바로 연주하기 시작한 것처럼 말하지만 처음 그가 관심을 가졌던 음악들은 당시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개러지 록과 헤비 메탈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끝까지 연주를 익힌 최초의 곡은 킹스먼과 패뷸러스 웨일러즈에 의해 북서북 지역에서 20년 전 히트했던 〈Louie Louie〉라는 곡이었다. 개러지 록으로 출발한 커트는 헤비 메탈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기타 선생에 따르면 커트가 가장 연주해보고 싶었던 곡은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이었다. 선생님은 커트에게 몇 달에 걸쳐 그 곡의 기본적인 코드들과 AC/DC의 연주 스타일을 가르쳐주었다.[40] 커트가 집을 나오기 2년 전인 1983년 여름, 몬테사노에서 단 하나뿐인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커트는 처음으로 펑크 록 콘서트를 보게 되었다. 밴드 멜빈스의 공연이었였다. 커트는 자신의 일기에 그 순간을, 그를 영원히 펑크 록으로 이끈 전환점으로 기록해 두었지만,[22] 친구들은 그가 여전히 스스로 주류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했던 데프 레퍼드를 듣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커트는 서서히 미적 대상으로 펑크 록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커트는 멜빈스의 연습실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으며 새로 신봉하게 된 대상을 상징하는 패션과 의상으로 갈아입으면서 스스로를 서서히 변화시켜 나갔다.[41]

작곡, 작사, 창법[편집]

8학년이 되었을 때 자살이란 소재는 커트가 작곡하고 있던 몇몇 초창기 노래들의 테마로 나타난다. 보우라는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커트는 컨트리 앤 웨스턴 풍에 1974년 테리 잭슨이 크게 히트시켰던 노래 〈Seasons in the Sun〉과 비슷했던 〈Ode to Beau〉라는 제목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리고 테리 잭슨 음반은 커트가 직접 구입했던 첫 번째 음반이었다.[19] 1988년 말 커트의 음악에는 버즈 오스본에게서 배운 펑크, 10대 시절 들었던 헤비 메탈 그리고 어린 시절에 발견한 팝송들이 섞여 있었다.[42] 너바나와 계약한 서브 팝이 움직여지기를, 그리고 밴드가 좀 더 많은 공연을 할 수 있기를 기다리던 커트는 그 시간 동안 올림피아의 아파트에서 홀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노래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하거나 곡을 쓰면서 보냈다. 당시 애인이던 트레이시가 커트는 모든 것에 관한 곡을 만들면서 자신에 대한 노래는 한 번도 쓴 적이 없다고 불평하자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사랑 노래를 쓰려고 시도했다. 《Meet the Beatles!》를 들으며 욕조에 앉아 일주일 전에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고 그들의 대화는 〈About a Girl〉이 되었다.[43] 같은 시기 커트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인 〈Negative Creep〉을 썼다. 너바나의 노래 대부분은 가사보다 기타 코드 중심으로 짜여졌으며, 〈Negative Creep〉은 세 번씩 반복되는 열 줄의 가사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와 달리 "Daddy's little girl ain't a girl no more"의 코러스는 스물 일곱 번 반복되며 대부분의 가사는 해독이 불가능하였다. 커트는 노래를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녹음 스튜디오로 들어갔고 일단 테이프가 돌아가면 소리치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몇 번의 짧은 구절을 부르며 녹음을 끝냈다. 보컬의 이런 창법은 밴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특징적인 사운드로 자리 잡았다.[29]

기타 연주[편집]

1980년 2월, 14살이 된 커트는 6줄 짜리 린덴 전기 기타를 선물로 받았다. 기타를 능숙하게 연주하게 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기타는 가장 중요한 창조력의 출구가 되어주었다. 그는 몇 시간씩 기타를 연습했으며 그에게 그렇게 변함없이 즐거움을 주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기타가 그렇게 쉽게 커트의 창조적인 출구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단 패션 악세서리였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기타리스트로 여기게끔 가는 곳 어디든 기타를 들고 다녔다. 그 싸구려 악기가 망가져서 더 이상 불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기타를 매고 다녔다. 친구인 트레버 브릭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길에서 커트와 마주친 적이 있는데 그는 '네게 음악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하지 마. 이건 망가졌거든'하고 말했어요." 그 전에도 커트는 늘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기타는 그러한 관심에 불을 붙였다. 그는 잡지 《크림》을 구독했고 애버딘의 한 군데 가게에서만 취급하던 음악잡지 《더 로켓》을 25센트에 정기적으로 사서 읽었다.[40]

공동 작업[편집]

너바나의 인기가 서서히 높아져 갈 무렵, 자신의 모든 야망을 단지 하나의 밴드에 걸고 싶지 않았던 커트는 계속해서 또 다른 음악적 모험들을 시도했다. 1989년 말 유럽에서 돌아온 커트는 마크 레이건의 앨범 작업을 돕기 위해 녹음실로 향했다. 이는 커트가 너바나 이외의 뮤지션들과 스튜디오 세션을 함께 했던 여러 번의 기회 중 하나였다. 올림피아의 고 팀과는 다소 실험적인 음악을 녹음했으며, 유럽 투어 직전에는 스크리밍 트리스의 멤버 두어 명과 작은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그 그룹으 더 주어리라고 불렀는데 커트와 크리스, 스트리밍 트리스의 마크 레인건과 마크 피커럴이 멤버로 합류했다. 커트는 이 그룹을 너바나의 레퍼토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블루스와 포크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1989년에 있었던 레코딩 세션에서 더 주어리는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와 〈Grey Goose〉를 포함한 리드 벨리의 노래 네 곡을 녹음하였다. 또한 커트는 〈They Hung Him On A Cross〉의 한기 돋는 솔로 버전을 녹음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 그룹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지만 1989년의 그 녹음이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31]

예술가적 기교[편집]

그림과 조각[편집]

커트의 하드코어 티셔츠. EMP 박물관 소장.

그림에 대한 그의 흥미는 아주 커서 그의 부모는 그가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커트는 로이 트래킨과의 1991년도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미술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어린 시절 난 화가가 되기로 어머니와 서면 약속까지 했습니다." 또한 커트는 친척들 중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선물로 축하 카드를 그려주곤 했다. 그의 친할아버지 린랜드에게는 도널드 덕을 카드에 그려서 선물했는데, 너무 똑같아서인지 릴랜드는 그림을 대고 베낀 게 아니냐고 물었고, 커트는 아니라며 할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그려 보였다. 커트는 이처럼 디즈니 사의 캐릭터와 만화책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를 그리는 데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39] 2학년 때 커트의 작품은 초등학교 신문의 첫 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에 흥미를 보였던 그는 석고 등의 재료를 섞어 찰흙처럼 만든 퍼티 파우더나 찰흙으로 슈퍼히어로들의 조각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 아이리스는 노먼 록웰을 좋아했는데 커트는 종종 그녀를 도와 유명한 그의 작품들을 마른 버섯 위에 이쑤시개로 새겨서 재창조하고는 했다.[37]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은 커트가 꾸준히 관심을 보인 과목이었다. 그는 여러 번 오전 수업을 몽땅 빼먹곤 했지만 미술 수업이 있는 날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수업들 들었고,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는 좋은 미술 선생님을 통해 확신과 자심감을 찾을 수 있었다. 1985년, 커트의 미술 선생이던 밥 헌터는 그에게 고등학교 미술대회에 참가해 보라고 권유했다. 그의 그림은 최종 단계로 진출했고 전체 주 단위의 결선까지 올랐다. 커트의 작품은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는 참가 증명서를 받았다. 밥 헌터는 "그는 그림 그리는 재능과 뛰어난 상상력 두 가지 모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44] 그는 친구들의 부탁으로 많은 만화를 그리면서 장래 만화가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훗날 기자들에게 자신이 예술학교 장학생으로 입학을 제의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허풍으로, 그의 나머지 과목의 성적은 예술학교 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입학하기에 너무 낮은 수준이었다.[45] 커트가 멜빈스의 팬이 되었을 무렵에 그는 기타 솜씨보다 미술적 재능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는 밴드의 포스터와 전단을 자주 디자인했으며 그들만의 티셔츠를 만들자고 조언했다.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멜빈스의 밴 일부를 꾸민 것으로, 그는 밴드 키스의 이미지로 그 차를 장식했으며 KISS 로고를 흉내 낸 스타일로 멜빈스의 팀 이름을 써 넣었다.[44]

직접 그린 만화에서 커트는 스토리텔링을 시도하였고 이 때 익힌 것들은 훗날 작곡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만화에는 통조림 제품, 아버지, 자신에게 맥주를 사준곤 했던 애버딘의 두 낙오자 등 일련의 캐릭터들이 정기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테마들은 나중에 그가 쓴 곡에 반영된다. 그가 창조한 캐릭터들은 권위에 맞서는 인물이었고 사회의 규범을 주도하는 룰 메이커들을 조롱하거나 죽임으로써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골목길과 건물 벽에 그래피티를 그려서 애버딘 인근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기도 했다. "신은 게이다"라는 슬로건을 가장 좋아했고 그는 이 슬로건을 애버딘 곳곳에 그려넣었다. 애버딘의 경찰은 그래피티를 심각한 위법행위로 간주했고 커트는 적어도 한 번 이상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었다.[45] 또한 아이들의 스케이트 보드를 멋지게 칠해주고 돈을 받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돈을 내지 않은 고객 한 명을 받고 끝나버렸다.[24] 마리아와 예수는 커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였으며 그는 또한 묘지에는 있는 마리아상을 여러 번 훔치기도 했다. 그는 훔쳐 온 마리아상을 집에 가져다놓고 얼굴에 피눈물을 칠하기도 했으며 공동묘지에서 훔친 십자가를 벽에 걸어놓기도 했다.[26]

영상[편집]

중학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아버지의 수퍼 8밀리 무비 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윌 빈튼의 작품을 흉내 내어 스톱모션 클레이메이션 모험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위해 공들여 대본을 썼는데 그 중 하나는 마당에 착륙한 외계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커트는 항상 외계인에 대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다른 친구들이 공책에 자동차와 탱크를 그릴 때 지구 밖의 생물체나 좀비를 스케치하곤 했다.[18] 커트가 15살이던 1982년에 만든 작품은 레이 브래드베리보다는 웨스 크레이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그 작품에 "커트는 잔인하게 피 튀기는 자살을 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복동생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동안 커트는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고 그의 상처에서는 시뻘건 쿨에이드 음료가 흘러내렸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죽어갔으며 마치 엉성한 유랑극단의 보드빌 배우처럼 과장스럽게 연기했다. 비슷한 시기에 찍은 또 다른 작품에서도 그는 가짜 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다시 마지막 순간을 연기한다. 슬래셔 무비같은 끔찍한 테마는 이들 조악한 작품에서 쓰이는 공통된 주제였으며 커트는 자신이 봤던 공포영화 장면을 흉내내면서 총, 칼 혹은 야구 방망이 등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바짝 긴장한 희생자를 연기하곤 했다.[18] 노보셀릭과 함께 팀을 결성한 뒤에도 집에 있던 8밀리 카메라로 몇 편의 무성 단편 영화를 찍었는데, 그 중에는 그가 애버딘의 버려진 빈 건물과 다리들을 마치 첩보원인 양 배회하는 것도 있었다. 또 다른 작품 중에서 그는 미스터 T의 마스크를 쓰고 마치 코카인을 흡입하는 것처럼 하얀 분말을 코로 흡입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커트는 그 장면의 시작적 효과를 위해 진공청소기를 사용했다. 또 다른 한 편은 그레이 하버에 외계인이 착륙한다는 내용으로, 거의 모두 커트의 관심사에 중점을 둔 단편들이었다.[25]

유산[편집]

음반 목록[편집]

솔로[편집]

Montage of Heck: The Home Recordings》 (2015)

각주[편집]

  1. Michael Azerrad (1992년 4월 16일). “Nirvana: Inside the Heart and Mind of Kurt Cobain”. 《Rolling Stone. 2016년 9월 17일에 확인함. 
  2. 크로스 2006, 21쪽.
  3. 크로스 2006, 20쪽.
  4. 크로스 2006, 25쪽.
  5. 크로스 2006, 39쪽.
  6. Halperin, Ian; Wallace, Max (1998). 《Who Killed Kurt Cobain?》. Birch Lane Press. ISBN 1-55972-446-3. 
  7. 크로스 2006, 22쪽.
  8. 크로스 2011, 10쪽.
  9. 크로스 2006, 24쪽.
  10. 크로스 2006, 26쪽.
  11. Halperin, Ian; Wallace, Max (1998). 《Who Killed Kurt Cobain?》. Birch Lane Press. ISBN 1-55972-446-3. 
  12. William Addams Reitwiesner. “Ancestry of Frances Bean Cobain”. Wargs.com. 2012년 4월 8일에 확인함. 
  13. 크로스 2006, 26-27쪽.
  14. 크로스 2006, 28쪽.
  15. 크로스 2006, 30,31쪽.
  16. 크로스 2006, 35쪽.
  17. 크로스 2011, 18쪽.
  18. 크로스 2011, 20쪽.
  19. 크로스 2011, 21쪽.
  20. 크로스 2011, 24쪽.
  21. 크로스 2011, 25쪽.
  22. 크로스 2011, 26쪽.
  23. 크로스 2011, 37쪽.
  24. 크로스 2011, 34쪽.
  25. 크로스 2011, 38쪽.
  26. 크로스 2011, 39쪽.
  27. 크로스 2011, 41-42쪽.
  28. 크로스 2011, 43쪽.
  29. 크로스 2011, 44쪽.
  30. 크로스 2011, 46-49쪽.
  31. 크로스 2011, 52쪽.
  32. 크로스 2011, 50쪽.
  33. 크로스 2006, 218쪽.
  34. 크로스 2006, 262쪽.
  35. 크로스 2006, 263쪽.
  36. 크로스 2011, 16쪽.
  37. 크로스 2011, 40쪽.
  38. 크로스 2011, 15쪽.
  39. 크로스 2011, 22쪽.
  40. 크로스 2011, 27쪽.
  41. 크로스 2006, 176쪽.
  42. 크로스 2006, 175-176쪽.
  43. 크로스 2011, 29쪽.
  44. 크로스 2011, 30쪽.

참고 문헌[편집]

  • Azerrad, Michael (1994). 《Come as You Are: The Story of Nirvana》. Doubleday. ISBN 0-385-47199-8. 
  • Burlingame, Jeff (2006). 《Kurt Cobain: Oh Well, Whatever, Nevermind》. Enslow. ISBN 0-7660-2426-1. 
  • Cross, Charles (2001). 《Heavier Than Heaven: A Biography of Kurt Cobain》. Hyperion. ISBN 0-7868-8402-9. 
  • Cross, Charles (2008). 《Cobain Unseen》. Little, Brown and Co. ISBN 0316033723. 
  • Kitts, Jeff (1998). 《Guitar World Presents Nirvana and the Grunge Revolution》. Hal Leonard. ISBN 0-7935-9006-X. 
  • 크로스, 찰스 (2006). 《Heavier Than Heaven》 [평전 커트 코베인]. 이룸. ISBN 89-5707-203-9. 
  • 크로스, 찰스 (2011). 《Cobain unseen》 [커트 코베인]. 세경. ISBN 978-89-92280-79-2.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