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클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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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래시
The C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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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오슬로에서 펼쳐진 더 클래시 공연.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조 스트러머(Joe Strummer), 믹 존스(Mick Jones), 폴 시모논(Paul Simonon)
기본 정보
국가 영국
장르
활동 시기 1976–1986
레이블
관련 활동
웹사이트 theclash.com
이전 구성원

더 클래시(The Clash)는 1976년에 결성된 영국의 펑크 록 밴드이다. 4인조로 구성된 이 밴드는 펑크(punk)와 더불어 그들의 음악에 레게, 스카, , 펑크(funk), , 댄스, 로커빌리의 요소들을 들여왔다. 또한 인종차별, 인권문제 등 사회참여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200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섹스 피스톨스의 덕을 보고,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클래시는 섹스 피스톨스보다 양질의 펑크 음악을 선보여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영국 내에서만 잘 나간 섹스 피스톨스와 달리 세계 무대 진출에 성공, 그 존재가 더 널리 알려졌다. 또한 2년 만에 파산한 섹스 피스톨스보다 훨씬 수명이 길었다.[2]

역사[편집]

1974–79[편집]

1976년 5월 영국 런던에서 펍 록(pub rock) 그룹 101어스(The 101ers) 출신의 조 스트러머(Joe Strummer)가 펑크 록 그룹 섹스 피스톨스의 공연을 보고 난 후 믹 존스(Mick Jones. 기타, 보컬), 폴 시모논(Paul Simonon. 베이스), 키스 레벤(Keith Levene. 기타), 토리 크라임스(Tory Crimes. 드럼)와 함께 결성한 그룹이다. 그해 7월 셰필드(Sheffield)에서 열린 섹스 피스톨스의 공연에서 데뷔무대를 가졌고, 9월 키스 레벤이 팀을 탈퇴했다.[1] 그해 7월 셰필드에서 열린 섹스 피스톨스의 공연에서 데뷔무대를 가졌고, 9월 키스 레벤이 팀을 탈퇴했다.[1] 그리고 12월에는 악명높던 섹스 피스톨스의 ‘대영제국의 무정부 상태’ 순회공연에 오프닝으로 참가, 펑크 물결 확산에 나섰다.[2]

섹스 피스톨스는 메이저 레코드사들에게 연이어 물먹었지만 더 클래시는 1977년 1월 20만 불이라는 엄청난 선금을 받고 CBS 레코드와 음반계약을 체결했고,[2] 그해 4월 데뷔 음반 《The Clash》(1977년 영국 앨범차트 12위)를 발표했다. 《The Clash》에서 〈White Riot〉, 자메이카 출신의 레게 뮤지션 주니어 머빈의 1976년 노래를 리메이크한 〈Police And Thieves〉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또한 그해 드러머를 니키 히든(Nicky Headon. 드럼)으로 교체했다.[1]

1978년 〈Clash City Rockers〉, 〈(White Man) In Hammersmith Palais〉, 〈Tommy Gun〉 등의 싱글을 히트시켰다. 또한 그해 말부터 ‘반나치 동맹(Anti-Nazi League)’과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8년에 발표한 2집 음반 타이틀은 《Give` em Enough Rope》이었고, 80년에는 미국의 중남미 내정 개입을 비판하려는 취지에서 당시 니카라과의 친미적 콘트라 반군과 싸운 좌익 민족해방전선인 ‘산디니스타’를 음반 제목으로 내걸기도 했다. 82년도 음반은 숫제 《Combat Rock》으로 붙였다. 79년 말에 선보인 걸작 음반 《London Calling》에도 그러한 경향은 유지되었다. 여기 수록된 ‘〈Spanish Bombs〉’이란 곡에서 클래시는 19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독재자 프랑코 대통령과 싸운 대중들을 자유의 전사로 찬양했고 〈The Guns of Brixton〉을 통해서는 자메이카 흑인 빈민 지역에 대한 정부의 폭동 진압에 강한 반발을 표출했다.[2]

1979년 펑크 록, 레게, 스카, 로커빌리 등의 장르들을 퓨전시킨 세 번째 앨범 《London Calling》을 출시했고, 〈London Calling〉, 〈Train In Vain〉,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발발했던 스페인내란을 다룬 〈Spanish Bombs〉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1980–현재[편집]

1980년 런던 소호의 섹스 숍에서 일하던 클래시의 팬이 클래시의 매니저가 되는 이야기를 그린 잭 하잔, 데이비드 밍게이 감독의 영화 《루드 보이》(Rude Boy)에 멤버 전원이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해 12월 니카라과의 사회주의 단체인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Sandinista National Liberation Front)에서 음반 제목을 가져온 네 번째 앨범 《산디니스타!》(1981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24위)를 발표했고, 〈The Call Up〉, 〈Hitsville U.K.〉, 〈The Magnificent Seven〉 등을 히트시켰다.

세계적 성공을 거둔 1982년부터 멤버들 간에 어색한 기류가 맴돌아 그 해 니키 히든이 정치적 견해차를 이유로 그룹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조 스트러머와 작사 작곡 콤비로 사실상의 기둥이었던 믹 존스가 탈퇴했다. 이후 피트 하워드(Pete Howard. 드럼)와 닉 셰퍼드(Nick Sheppard. 기타), 빈스 화이트(Vince White. 기타)를 영입했다.[1] 믹은 클래시 이후 자신의 새 그룹 ‘빅 오디오 다이나마이트’를 결성하여 다이나믹한 활동을 펼쳤으나 날개 한 쪽을 잃은 조 스트러머의 클래시는 추락을 거듭했다. 클래시는 85년 《Cut The Crap》 앨범을 발표해 건재를 과시했지만 음반 평가는 빅 오디오 다이나마이트의 작품보다 나빴다. 그룹의 명성은 나날이 퇴조했고 결국 1986년에 해산되어버렸다.

스트러머는 믹 존스 탈퇴시 “그는 스튜디오에 오려고 하지도 않고 휴일에는 쉬려고만 하는 등 더 이상 밴드의 이상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축출하게 됐다”며 불화의 책임을 믹에게 돌렸으나, 86년 클래시 해산 후 영국의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책임이 실은 자기에게 있었다고 고백하고 독자들에게 잘못을 공개 사과했다. 그 무렵 조와 믹은 2년간의 적대 감정을 씻고 해후하여 옛날처럼 같이 작품을 쓰는 등 우정을 회복했다.[2] 2002년 12월 22일 조 스트러머가 사망했다.[1]

정치[편집]

클래시는 당시 영국에 만연되어 있던 ‘인종차별’을 가장 반민주적인 형태로 규정하고 노래 운동의 전부를 이의 종식에 걸었다. 그리하여 78년 하반기에는 동료 펑크 가수들인 엘비스 코스텔로, 탐 로빈슨 등과 함께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60년대 록 음악의 정신, 이른바 ‘저항 정신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담긴 움직임이었다. 클래시는 60년대의 정신이 화석화되지 않고 후대 록 음악인에게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실증했다. 이들은 이념적으로 좌파의 경향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조 스트러머는 저 유명한 이탈리아의 좌익집단 '붉은 여단'의 신파라며 스스로 좌익임을 공언했다. 초창기 공연 때는 ‘레드’라고 쓰인 완장을 착용했다는 얘기도 있었다.[2]

디스코그래피[편집]

스튜디오 음반

각주[편집]

  1. “클래시[The Clash]”. 《두산백과》. 2016년 1월 6일에 확인함. 
  2. 임진모 (1993년 4월). “클래시(Clash)”. 《이즘》. 2016년 1월 6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