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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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스(영어: The Monkees)는 미국밴드영국비틀즈와 대응되어 언급되었던 밴드 중 하나이다. 1966년에 결성된 이후 미국 청소년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어서, 텔레비전레코드로 고루 활동하며 데뷔곡 〈Last Train to Clarksville〉 이후 지속적으로 밀리언 셀러를 발매했다. 멤버는 데이비 존스, 미키 드렌츠, 피터 투크, 마이크 네스미드 등 4명이었다. 밴드로서 뿐 아니라 연극에서도 활약하였다.

역사[편집]

1966년의 몽키스

1964년의 비틀즈 선풍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뒤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적인 현상이었다. 비틀즈의 살인적 인기와 그에 따른 엄청난 부는 홍보, 판매, 팬 관리 등 모든 부문에 전략과 전술의 개념이 도입되어 조직적으로 실행된 결과였다. 음악 관계자들은 비틀즈의 성공을 통해서 이른바 대중접근의 방식에 눈이 떴다. 비틀즈 선풍은 또한 영국 출신 그룹들의 미국 진출 붐을 초래했다. 미국에 상륙한 영국 그룹들은 미국가수들을 젖히고 무대를 완전 장악, 미국인들의 기를 죽였다. 언론은 그것을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했다. 미국은 남의 잔치에 땅을 빌려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대중음악계는 자존심 회복이 요구되었다.[1]

이윽고 두 명의 미국인이 비틀즈에 맞서는 미국 그룹을 만들어 긍지를 되찾고 그들처럼 막대한 부를 창출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프로듀서 밥 라펠슨버트 슈나이더였고 그들의 기획포인트는 조립식 비틀즈의 창조였다. 그 기획하에 그룹 몽키즈가 탄생되었다. 당시 콜롬비아 영화사 사장 아들인 버트 슈나이더와 재능있는 제작자 밥 라펠슨은 리처드 레스터가 만든 《하드 데이즈 나이트》의 대성공을 주시하고 거기서 비틀즈 같은 4인조 그룹을 만들어보자는 뜻을 구체화했다. 그들은 1865년 레이버트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먼저 주요 헐리우드 업계지에 구인광고를 냈다. “텔리비전 새 시리즈에 출연할 17~21세의 네 익살꾼을 찾습니다.”[1]

슈나이더와 라펠슨은 한 달간 4백 37명의 응모자를 오디션했다. 응모자들 가운데는 스티븐 스틸스와 나중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킨 찰스 맨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 잘 받고 활달하며 연예계 활동 경력이 일천한 네 명의 소년이 엄선되었다. 아마추어 가수 마이크 네스미스, 그리니치 빌리지의 포크 싱어 피터 토크, 아역배우 출신의 미키 돌렌즈, 그리고 탁월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 데이비드 존스가 행운의 면면들이었다. 그들이 그룹 몽키스가 되었다. 그런데 몽키스 멤버들 중 둘은 가수, 둘은 배우였다. 온전한 뮤지션으로 평가받기에 이미 성분상 몽키스는 ‘절반의 실패’를 안고 들어갔다.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두 제작자는 몽키스라는 상품을 팔리게 하기 위해 그것의 포장 및 품질관리 작업을 했다. 윌리암 프러울리라는 언더그라운드 영화 감독을 고용하여 몽키스에게 스파르타식 연기 수업을 지도케 했다. “처음에 그들은 당황했고, 몸이 굳어 있었으며, 약간은 촌스러웠다. 때때로 마룻바닥을 굴렸으며, 동물처럼 되라고 요구했다. "넌 개야. 기린이 하는 식으로 말하라구. 코끼리하구 놀라구. 마치 찻잔이 얘기하는 듯이 말해야 해." 그건 그들을 외적으로 개조해 육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프러울리의 말이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창조되어가고 있었다. 포장은 그럴 듯해졌으나 이제 품질이 문제였다. 몽키즈가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라펠슨-슈나이더팀은 그 돈 커시너에게 접근했다. 돈 커시너는 60년대 초반 크리스탈즈나 로네츠같은 여성 보컬그룹 유행을 몰고 온 음악제작업의 대부로, 그의 영향 아래 닐 세다카-하위 그린필드, 제리 고핀-캐롤 킹 등 명작곡 콤비들이 탄생했다. 커시너는 당시 ‘스크린 젬스 콜롬비아 뮤직’사 대표였는데, 그 때 막 콜젬스 레코드사를 신설했다. 그는 박력있고 흥이 넘치는 사운드를 몽키스에게 기대했지만, 함량 미달이라는 것만을 확인했고, 이들을 훈련시켜 한 앨범에 22곡을 수록하고 다섯 개 TV쇼에 출연시키기엔 시간이 없었다. 출고 시점을 맞춘 생산이 요구되었던 까닭이었다. 할 수 없이 돈 커시너는 그가 거느린 작곡 부대를 활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고핀-킹, 세다카-그린필드, 토큰즈, 닐 다이아먼드 등 프로 작곡가들이 몽키스 긴급 수혈을 위해 동원되었다. 연주 또한 자체로 해결할 수 없어 캔디 스토어 프로페츠라고 불린 팀이 맡았다. 몽키스는 딴 사람이 써서 연주해준 곡에 입을 벌리고 몸만 놀리면 되었다.[1]

1967년 3월의 몽키스

품질과 포장이 완성된 그들은 드디어 출고 시점인 1966년 6월 NBC TV의 카메라 앞에 섰다. 팬들의 반응은 라펠슨과 슈나이더의 기대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들이 출연한 《몽키스 위클리》 프로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응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버렸다. 그 해 겨울 몽키스 프로는 회당 1천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지켜보았다. 하루에 날아든 팬레터는 무려 5천통에 달했다. 비록 모조된 비틀즈였지만, 몽키스는 오리지널 비틀즈만큼 잘 팔렸다. 그들의 노래는 데뷔작 《The Last Train to Clarksville》가 차트 1위로 치솟은 것을 비롯, 당시 차트는 그들의 것이었다. 4장의 앨범이 연속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셔츠, 코트, 카드, 인형, 도시락 등 몽키스 기획상품은 2천만 달러의 판매고를 올렸다. 몽키스 현상이었다. 그룹 멤버 미키 돌렌즈는 “우리가 상품을 팔고 있다. 우린 몽키스를 팔고 있다"고 자랑스레 외치기도 했다.[1]

그들의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 영국의 데이비드 존스라는 이름의 가수가 막 데뷔했다. 그러나 몽키스의 멤버 중 데이비드 존스가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데이비드 보위로 바꾸었다. 70년대 대중음악에 획을 그은 슈퍼스타 보위도 몽키스로 인하여 본명을 잃어버렸던 셈이었다. 몽키스는 너무 했다 싶을 정도로 비틀즈의 성공 패턴을 본떴다. 데뷔음반을 발매하기 직전 ‘몽키스가 오고 있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수천 장 게첩한 것을 포함, 광고 캠페인에 10만 달러를 썼으며 방송국의 디스크쟈키들에게 일제히 홍보판을 살포했다. 이와 같은 홍보 전략은 비틀즈의 전설적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이미 활용했던 방식이었다. 그룹 이름도 비틀즈처럼 고의적으로 스펠을 틀리게 했다(딱정벌레는 Beetles인데 Beatles라 한 것과 같이 Monkeys를 Monkees로 썼다.) 레이버트 프로덕션의 한 간부 스스로가 몽키스를 ‘미국판 비틀즈’라고 언급할 지경이었다. 《뉴스위크》지는 그들을 ‘외형적인 비틀즈의 직계후손’이라고 표현했고, 《타임》지는 1967년 “교활한 프로모터 한 팀이 제록스 기계로 비틀즈를 복사해 몽키스를 내놓았다”고 코멘트했다. 평론가들은 애초부터 몽키스의 TV쇼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완전한 가수, 완전한 연기자 둘 가운데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틀즈처럼 진지하게 대중음악을 추구하는 밴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악평과 무시를 유발시키기에 적합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예술적 역량이 부족했고 그것을 메울 수 있는 환경에 처하지도 못했다. 물론 몽키스가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몽키스 멤버 중 가장 의식있는 마이크 네스미스는 “우리 음악은 하등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불평을 토로했으며 서서히 비틀즈 흉내와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1]

1969년 텔레비전 스페셜에서의 몽키스

그들은 1967년 말부터 묻혀버린 자기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에 돌입, 악기를 연주하고 곡쓰기를 시도했으며, 순회공연을 통해 새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네스미스는 몽키스가 뮤지션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우리를 ‘제도권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우린 오늘날 ‘우상 타파적’인 청춘의 가장 진실된 표현이다”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키스의 이러한 국면전환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간을 노린 기획상품이었기에 그들의 인기는 오래 지속될 리 만무였고 1969년에 이르러서는 시청률이 크게 하락하면서 시리즈는 방영이 중단되었다. 이런저런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밴드는 엉망이 되어 갔고 피터 포크가 그룹을 탈퇴했으면 몇 개월 후 몽키스는 마침내 공식 해체되었다. 몽키스는 조립식 비틀즈 또는 제 2의 비틀즈를 표방했지만, 둘간에는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내재하고 있었다. 비틀즈는 영국의 노동계급 출신 젊은이들이 ‘욕구 분출’을 위해, ‘신분 상승’을 위해 음악을 한 ‘자생적’ 그룹이었다. 그들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 제도권에 진입했지만, 주체의식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것에 용해되거나 도구화되는 위험을 피하고 오히려 제도권을 요리하고 사회를 ‘지도’할 수 있었다. 반면 몽키스는 제도권 또는 자본계급이 ‘부의 축적’을 위해 만든 ‘인위적’ 그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키스는 자본가의 목적이 달성됐을 때 효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쉽게 ‘폐기 처분’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비틀즈는 아래에서 발생하여 위로 올라간 그룹이라면 몽키스는 위에서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낸 그룹이었다. 몽키스는 제도권에 의한, 제도권을 위한, 제도권의 그룹이었고 또한 제도권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록 뮤직이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를 향해 외치는 젊음의 의사표현’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할 때 몽키스는 정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록 평론가들이 몽키스를 진정한 록 그룹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티스트의 주체성을 배제한 제도권의 대중음악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몽키스는 실증했다. 또 그에 의해 고정된 이미지는 쉽게 타파할 수 없음을 가르쳐주었다.[1]

몽키스 멤버들은 그룹이 해체된 후 솔로의 길을 모색하면서 고정된 이미지로 인해 일을 찾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피너 토크는 87년 주간지 《피플》과의 인터뷰에서 몽키스 시절을 이렇게 평했다. “60년대는 정말 분열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희망과 갈채 그리고 우아함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함이 있었다. 몽키스는 어느 면에서 좋은 쪽의 증류액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극단적인 멋, 극단적인 갈채, 극단적인 무해(無害)의 축소판이었다.” 그 때 몽키스는 20년만에 재결합하여 《That was Then, This is Now》이란 히트곡을 내어 올드팬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마이크 네스미스는 참여를 거부했다).[1]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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