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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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異斯夫
다른 이름 이질부례지, 태종(苔宗), 이종(伊宗)
관직 관등: 이찬(伊湌), 상대등
직책: 실직주군주, 하슬라주군주(何瑟羅州軍主), 병부령
가문 김씨(혹은 박씨)
부모 소지 마립간+벽아부인
주군 지증왕법흥왕진흥왕

이사부(異斯夫, 생몰년 미상) 또는 태종(苔宗)은 신라 지증왕 ~ 진흥왕 시대의 장군 · 정치가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다.

일본서기》에는 실제 이름 발음으로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또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로 소개되어 있다. 《삼국유사》이후에는 풍습에 따라 단성으로 박(朴)씨로 기록되었으며 이름은 이종(伊宗)이라 나타난다.

박문영이 작곡·작사한 대한민국의 대중 가요인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과 〈독도는 우리 땅〉에 등장한다. 독도 인근의 해산이사부해산에 그의 이름이 붙었으며 강원도 삼척시의 '이사부길',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의 '독도이사부길'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름[편집]

異斯夫, 苔宗은 실제로 '잇부/잇보'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사(斯)는 사이시옷으로 흔히 사용되던 글자다. 태(苔)는 이끼이며 잇기로 발음되므로 우리말 '잇'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종(宗)은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접미사인 '보/부' (울보, 먹보 등)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던 글자다. 질(叱) 역시 거의 항상 사이시옷을 표시하고자 사용되었다. 이종(伊宗)은 '잇보'에서 사이시옷이 약해져서 탈락된 형태이다.

생애[편집]

가계 배경[편집]

그의 가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사서간의 기록이 달라서 정확하지 않다.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에는 그가 내물왕의 4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그의 성을 박(朴)씨로 기록하고 있다. 사서마다 성씨가 다르게 기록된 또 다른 인물로는 신라의 충신 제상(堤上)이 있는데 삼국사기는 박씨, 삼국유사는 김씨로 기록한다. 이것은 신라 말기와 고려시대 이후 한국 성씨를 중국식 단성으로 표기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실제 성명은 한반도식으로 이질부례지간기이며 박씨가 아니였지만 단성 기록에 의해 박씨와 김씨같은 단성으로 바꾸어 기록되었다. 실제로 중국 사서에 신라왕의 성이 단성으로 기록된 것은 진평왕이 최초다.[1]

화랑세기에는 아버지가 아진종, 어머니가 보옥공주로 나와 있다. 보옥공주는 백제 개로왕의 딸이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숙명공주는 진흥왕과 후비가 되었으나 풍월주 이화랑과 사통하여 궁을 떠났다. 아들로는 원광법사와 보리를 낳았고 딸로는 화명과 옥명을 낳았다. 궁에 있을 때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정숙은 태자로 봉해졌다가 폐해졌다.

경주김씨 세보에 따르면 이사부는 자비 마립간의 아들이자 소지 마립간의 동생이라 하여 열전의 기록과 다르다.[2] 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쓰는 시대에는 중국식 단성을 써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질부례지간기를 김씨로 후세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밀양이씨 족보는 이사부를 고시조로 삼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과 교류한 수창장군 이재도 성을 異로 쓰고 있다.

우산국 정벌[편집]

지증왕 6년(505년)에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가 되었으며[3], 512년에는 이찬의 관등과 함께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 영토로 복속시켰다.[4] 《삼국유사》에는 이사부(박이종)가 하슬라주 군주라는 지위를 우산국을 정벌한 공로로서 획득하게 된 것으로 적고 있어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금관국 합병[편집]

《일본서기》에는 법흥왕 16년에 해당하는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임나(任那) 4개 마을을 점령하는[5] 한편 탁순국(卓淳國)의 웅천(熊川)을 공격해 가락국의 부흥을 지원하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臣)의 왜병을 패퇴시키고, 법흥왕(法興王) 18년(531)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격파하여 이듬해에 금관국(金官國)을 신라에 합병시켰다.

《삼국사기》에는 탈해왕(脫解王) 시대의 인물로서 당시 신라와 이웃해 있던 우시산국(于尸山国)과 거칠산국(居柒山国)을 정벌한 거도(居道)라는 인물의 열전이 실려 있는데, 많은 말을 모아놓고 병사들에게 말 위에서 하는 마상재를 매년 열어서 두 소국 사람들 앞에서 늘 보였고, 두 나라 사람들이 마상재를 보며 어느 순간 방심하면서 신라군을 방비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두 나라를 급습해 멸망시켰다고 적고 있다. 이사부 열전은 지증왕(500~514) 때에 변경 관리가 된 이사부가 거도의 계략을 써서 가야를 멸망시켰다고 전한다.[6]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이 신라에 항복했다.[7]

고구려와의 전쟁[편집]

진흥왕이 즉위한 이듬해(541년)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신라의 국정을 총괄하였다. 545년에는 왕에게 국사 편찬을 건의하였으며, 550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국경의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놓고 서로 싸워서 지친 틈을 타서 출진하여 두 성을 모두 빼앗고, 성을 증축해 갑사 1천여 명을 배치하였으며 이때 고구려의 탈환 기도를 물리쳤다. 또한 단양 신라 적성비에 따르면 이사부는 이 때를 전후하여 파진찬(波珍飡) 두미(豆彌), 아찬(阿飡) 비차부(比次夫) · 김무력(金武力)과 함께 한강 상류 일대를 신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미진부, 비조부와 함께 신라 상대 마지막을 풍미한 3대 명장으로 손꼽을 수 있다.

가야 정벌[편집]

진흥왕 23년(562) 9월 반란을 일으킨 가야에 사다함(斯多含)의 활약으로 가야가 멸망하였다.[8]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논란[편집]

지증왕(500~514) 때 이미 멸망한 가야가 진흥왕 23년(562) 때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지증왕 때에 가야가 멸망했다면 흔히 가야라 부르는 금관국이 신라에 합병된 532년까지 존속했다는 것도 모순이다. 또한 이사부가 562년에 정벌한 가야는 532년 신라에 합병된 금관국이 아니라 대가야이다. 지증왕 당시 가야 연맹 가운데 일부만을 점령한 것이라 추정하는 의견[9]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이사부가 가야를 정벌한 562년을 《일본서기》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 10국을 공격해서 멸망시킨 시기로 기록한다.[10] 멸망한 임나 10국은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인데 구체적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가족 관계[편집]

이사부가 등장한 작품[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책부원귀(冊府元龜)》는 법흥왕의 이름을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 기록한다. 《구당서》 권1 본기 제1 고조 7년(624), "봄 정월 기유(己酉)에 고려왕 고무(高武)를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백제왕 부여장(扶餘璋)을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하였다(七年春正月己酉 封高麗王高武爲遼東郡王 百濟王扶餘璋爲帶方郡王 新羅王金眞平爲樂浪郡王)."
  2. 이사부가 소지 마립간의 동생이라면 내물왕의 3세손이 된다.
  3.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6년(505), "봄 2월 왕이 친히 나라안의 주와 군,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군주라는 이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六年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始於此)."
  4.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13년(512),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로 조공하였다. 우산국은 명주(하슬라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리인데 험준한 지형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엄으로 오게 만들기는 어렵고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여럿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당장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十三年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獅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 則降)."
  5. 《일본서기》 계체 23년(529), "이에 신라는 상신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이사부)로 바꾸어 보냈는데 (신라에서는 대신을 상신이라고 한다) (어떤 책에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이라고도 한다) 3천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모야신(毛野臣: 오미노 케누)이 병사 수천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웅천에서 나와 임나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갔다. 이사부는 다다라 평야에 머물며 삼가 석 달을 기다려 칙을 듣고자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 하지 않았다. 이사부가 거느린 병졸들이 취락에서 밥을 구걸하다가 모야신의 종자 하내마사수어수(河內馬飼首御狩)와 마주쳤다. 어수는 다른 문에 들어가 숨어 걸식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멀리서 주먹을 날렸다. 걸식자들이 이를 보고 "삼가 석 달을 기다리며 칙지를 듣기를 기다렸지만 오히려 보이려 하지 않고 칙지를 들으려는 이를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상신을 죽이고자 함이로다."라 하였다. 그리고 본 바를 낱낱이 상신에게 알렸다. 상신은 금관金官, 배벌背伐, 안다安多, 위타委陀 4개 마을을 약탈했다. 어떤 책은 다다라多多羅, 수나라須那羅, 화다和多, 비지費智 4개 마을이라 한다(由是 新羅 改遣其上臣伊叱夫禮智干岐 新羅以大臣爲上臣 一本云 伊叱夫禮知奈末 率衆三千 來請聽勅 毛野臣 遙見兵仗圍繞衆數千人 自熊川入任那己叱己利城 伊叱夫禮智干岐 次于多々羅原 不敬歸待三月 頻請聞勅 終不肯宣 伊叱夫禮智所將士卒等 於聚落乞食 相過毛野臣傔人河內馬飼首御狩 御狩 入隱他門 待乞者過 捲手遙擊 乞者見云 謹待三月 佇聞勅旨 尚不肯宣 惱聽勅使 乃知欺誑誅戮上臣矣 乃以所見 具述上臣 上臣抄掠四村 金官 背伐 安多 委陀 是爲四村 一本云 多多羅 須那羅 和多 費智爲四村也)."
  6. 《삼국사기》 열전 제 4 이사부, "이사부는 태종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김씨고 내물왕 4세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 시절 변경 관리가 되었는데 거도(居道)의 계략을 답습하여 마희(말馬놀이)로써 가야국을 속여 취하였다(異斯夫 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誤加耶國取之)."
  7.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법흥왕 19년(532),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첫째 노종, 둘째 무덕, 막내 무력-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8.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토벌케 하고 사다함이 돕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인솔해 도착하니 일시에 항복하였다(九月加耶叛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入栴檀門立白旗城中恐懼不知所爲異斯夫引兵臨之一時盡降)."
  9.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698
  10. 《일본서기》 흠명 23년(562),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쳐서 멸망시켰다(어떤 책에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했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요, 개별적으로는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飡國, 稔禮國으로 모두 열 나라이다(卄三年春正月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卄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合十國)."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