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클레멘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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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7세
전임자하드리아노 6세
후임자바오로 3세

교황 클레멘스 7세(라틴어: Clemen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II)는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 ~ 1534년 9월 25일)이다. 본명은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이탈리아어: Giulio di Giuliano de' Medici)이다.

초기

1519년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레오 10세의 그의 사촌 추기경들. 레오 10세의 왼쪽에 있는 자가 줄리오 데 메디치, 곧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이다.

1478년 5월 26일,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피렌체 공화국에서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고리니 가문의 안토니아 델 치타디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줄리아노는 그가 태어나기 한주 전에 파치 가문의 음모에 관련되어 암살당하였다. 비록 그의 부모가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남녀가 서로에게 충실한 배우자가 되겠다고 맹세하기만 해도 사실혼으로 간주하는 당시 교회법에 따라 줄리오는 사생아가 아닌 적자로 취급받았다. 얼마 안가 어머니까지 여읜 줄리오는 고아 신세로 전락하였으나, 백부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그를 거두어들여 양육하였다. 백부 로렌초가 1492년 사망한 후 줄리오는 메디치 가문이 퇴출당하자 1494년부터 1512년까지 식구들과 함께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줄리오는 사촌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세(1513-1521)로 선출되자 로도스 기사단에 입단하고 곧이어 로마로 거처를 옮겨 단번에 로마 교황청의 실세로 등극하였다. 사촌이 교황이 되자 줄리오는 그의 참모이자 고문으로 등용되었으며, 특히 피렌체의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이익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1513년 9월 23일 줄리오는 추기경에 임명되었으며, 9월 29일 서임식을 가졌다. 그는 레오 10세의 치세 동안 교황청의 정책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인원이었으며, 특히 잉글랜드 왕국에 친화적인 인사로서 잉글랜드의 보호자를 맡았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왕국 우스터셔 주에 있는 우스터명예주교이기도 하였다. 1517년 3월 9일 상서국 차장이 되어 교황청의 정책을 책임 지게 되었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활약하였다.

교황 선출

1521년 교황 레오 10세가 선종한 후, 줄리오 메디치 추기경은 교황 선거 콘클라베에서 곧 강력한 차기 교황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줄리오 메디치 추기경이나 그와 더불어 강력한 교황 후보였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훗날의 교황 바오로 3세) 추기경이나 모두 예상과는 달리 교황이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줄리오 메디치는 콘클라베를 이끌어 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새로 선출된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하드리아노 6세가 교황으로 즉위한지 얼마 못가 선종하자(1523년 9월 14일), 이어 열린 콘클라베에서 줄리오 메디치는 다수의 표를 얻어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1523년 11월 19일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하였다.

교황

집권 초반기의 교황 클레멘스 7세

교황좌에 오른 클레멘스 7세는 유럽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카푸아 교구장 니콜라우스 폰 쇤베르크 주교를 프랑스스페인, 잉글랜드의 국왕들에게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마쳤다.

유럽 대륙과 메디치 가문에 대한 정책

클레멘스 7세가 재위하던 당시 유럽 대륙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발루아 왕가 통치하의 프랑스 왕국 두 강대국 간의 대립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은 유럽 패권 다툼에서 특히 이탈리아 반도를 서로 먼저 손에 넣으려고 대립하고 있었다.

1524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밀라노를 침공해 점령하자 클레멘스 7세는 즉시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왕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1525년 1월 베네치아 공화국을 포함한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및 프랑스 왕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동맹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파르마피아첸차교황령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으며,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소유권을 보장받았으며, 그 대가로 프랑스 군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나폴리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약속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 자체는 좋았지만, 클레멘스 7세의 열정은 곧 시들었다. 그는 부족한 통찰력과 미성숙한 경제정책으로 인해 스스로를 사나운 로마의 지방 귀족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켰으며, 이는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1개월 후,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로 사로잡혔다. 그리고 클레멘스 7세는 나폴리의 승리 후 편을 바꾸어서 다시 카를 5세와 이전 관계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526년 마드리드 조약 후 프랑수아 1세가 자유의 몸이 되자 다시 마음을 돌리고 동맹에서 탈당하였다.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 베네치아, 밀라노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함께 코냑 동맹에 참가하였다.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에 대항하여 그를 비판하자, 카를 5세는 교황은 목자가 아니라 늑대라고 비난하며, 루터파의 요구에 응답하여 공의회를 소집하겠노라고 위협하며 압박을 가하였다.

로마 약탈

클레멘스 7세의 오락가락하는 정책은 교황청 안에 친독일파의 출현을 낳았다.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의 사병들은 바티칸 언덕을 약탈하였으며, 로마 시 전체가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굴욕을 당한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편으로 다시 돌아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콜론나 추기경은 그 후 곧바로 나폴리로 떠났다. 결국 클레멘스 7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콜론나 추기경은 파면을 당하였다. 이때부터 클레멘스 7세는 친프랑스파를 믿고 운명을 맡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곧 그는 이탈리아에서 자기 혼자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페라라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 편에 가담하여,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란츠크네흐트 무리가 로마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길을 터준 것이었다.

산탄젤로 성.

부르봉 공작 샤를은 공성전을 벌이던 중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오르다가 총을 맞고 전사하자, 그의 병사들은 보수도 받지 못하고 지휘관까지 죽자 흥분하여 1527년 5월 6일 로마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수많은 살인과 약탈, 강간, 기물 훼손 등이 뒤따랐고 로마 시내 일대는 무법천지로 변하였다. 이로써 르네상스 시절 로마의 찬란함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정치적인 행보에 비해 군지휘에서는 강한 결단력을 보여주지 못했던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후 5월 6일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보장하는 대가로 400,000 두카트를 지불하는데 동의하였으며, 파르마피아첸차, 치비타베키아, 모데나를 신성 로마 제국에 양도하는데도 동의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데나만이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러한 교황이 처한 상황을 기회 삼아 시기스몬도 말라테스타리미니로 귀환하는 동안 체르비아라벤나를 점령하기 위해 이용하였다.

클레멘스 7세는 포로의 신분으로 6달 동안 산탄젤로 성 안에 감금당한 채 지냈다. 몇몇 제국 관리들을 돈으로 매수한 다음에야 그는 뱃사공으로 위장한 채 산탄젤로 성을 빠져나와, 오르비에토로, 그다음에는 비테르보로 피신하였다. 1528년 10월 클레멘스 7세는 비로소 로마로 돌아왔지만, 이미 인구는 급감하고 시내 곳곳은 황량해진 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의 적대자들이 혼란한 정국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고 피렌체에서 교황의 가족들을 다시 축출하였다.

이듬해 6월 전쟁 당사국들이 모여 바르셀로나 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교황령은 몇몇 도시를 되찾았으며, 카를 5세는 메디치 일족이 피렌체 공화국을 지배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1530년 11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피렌체는 함락되었으며,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사생아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그곳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따랐다. 이는 카를 5세가 독일에서 루터파에 대해 강경한 행동을 취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공의회를 열자는 카를 5세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잉글랜드 교회와의 분열

카를 5세가 옥좌에 앉은 채 자신이 쳐부순 적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쉴레이만 1세, 교황 클레멘스 7세, 프랑수아 1세, 윌리히클레브스베르크 공작 빌헬름, 작센 선제후 요한 프레데릭 1세, 헤세 백작 필리프 1세이다.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에게 의존하게 되면서 간접적으로 잉글랜드 왕국이 가톨릭교회와 결별하는 결과를 낳았다. 1520년대 후반,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기를 원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아들을 보지 못했으며, 따라서 헨리 8세는 튜더 왕조의 혈통을 계속 유지해나가기 위해 아들을 갈망하였다. 헨리 8세는 자신이 아들을 갖지 못하는 것이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이 하느님의 눈에는 범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1] 캐서린 왕비는 본래 헨리 8세의 죽은 형 아서와 혼인하였으며, 따라서 형수인 그녀와 결혼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2] 실제로 헨리 8세와 캐서린이 결혼할 당시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특별히 관면혼을 허락받아야 했었다.[3] 헨리 8세는 관면혼을 받은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고, 따라서 캐서린과의 혼인은 처음부터 불법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527년 헨리 8세는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절하였다. 교회법에 따르면, 제아무리 교황이라도 이전에 허가를 해준 혼인이 장애가 있다는 근거로 도로 무효화시킬 수 없었다. 또한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분노 또한 염두에 두어야 했다. 카를 5세가 다름 아닌 캐서린 왕비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만약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이 위법이라고 규정한다면, 카를 5세가 이에 반감을 품고 여차하면 대군을 보내서 로마 약탈을 재현할 위험이 있었다.[4] 이러한 상황 때문에 혼인 무효화를 더 이상 진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헨리 8세의 측근들은 교황의 의견 따위는 그냥 무시해버리라고 조언하였다. 하지만 1530년 열린 잉글랜드 의회에서 성직자들과 법률가들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교황의 지시에 불순명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고 결의하였다. 특히 존 피셔 주교는 의회 발언에서 교황의 권위를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헨리 8세는 각종 논란에도 불구, 1532년 말과 1533년 초 사이에 시녀인 앤 볼린과 혼인하였다. 한 16세기 연대기 기록자는 1532년 11월 14일 즈음에 도버 성에서 헨리 8세와 앤 볼린이 결혼식을 올렸다고 적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1533년 1월 25일 웨스트민스터 화이트홀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혼배미사를 집전한 사제는 롤런드 리 신부(미래의 리치펄드의 주교)라고도 하고, 조지 브라운 신부(미래의 더블린의 대주교)라고도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교황의 충실한 친구인 윌리엄 워햄 대주교가 선종하자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헨리 8세는 클레멘스 7세에게 볼린 가문과 친분이 있는 토머스 크랜머 신부를 새 대주교로 추천하였고, 클레멘스 7세는 토머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교황의 이러한 결정은 차후에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결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캐서린과의 혼인은 무효라고 선언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앤 볼린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의 새 왕비로서의 대관식을 거행한지 석달 후에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았다. 이에 교황은 헨리 8세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두 사람 모두를 파문하여 가톨릭교회에서 축출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수염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무덤

1527년 반년간의 유폐기간 동안 클레멘스 7세는 전체적으로 수염을 길렀는데, 이는 로마 약탈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을 애도한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는 성직자들은 모두 깨끗이 면도해야 한다는 당시 교회법 조항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수염을 기른 교황이 있었는데, 바로 교황 율리오 2세이다. 율리오 2세는 1511년부터 1512년까지 9개월간 수염을 길렀는데, 이 또한 클레멘스 7세와 비슷한 애도의 표시로서 교황령에 속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볼로냐를 재정복하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교황군 병사들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율리오 2세와는 달리 클레멘스 7세는 1534년 선종할 때까지 수염을 계속 길렀다. 이는 곧 본보기가 되어 그의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3세도 수염을 길렀으며, 1700년에 선종한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에 이르기까지 총 24명의 교황이 모두 수염을 길렀다. 따라서 클레멘스 7세는 비록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100년을 훨씬 넘게 이어져온 수염 스타일의 선구자가 되었다.

죽음

1533년 10월 13일 마르세유에서 프랑수아 1세와 만난 클레멘스 7세.

1533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비서인 요한 비트만슈테터는 교황과 추기경 두 명에게 코페르니쿠스지동설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에 교황은 기뻐하며 비트만슈테터에게 감사의 뜻으로 선물을 하사하였다.[5]

클레멘스 7세는 말년에 또 한 번 프랑스 동맹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독버섯의 일종인 알광대버섯을 먹고 1534년 9월 로마에서 선종하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클레멘스 7세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안장되었다.

한편 클레멘스 7세는 예술을 숭상하여 라파엘로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를 시켜 예술 진흥에 힘썼다. 그리고 선종하기 며칠 전에 미켈란젤로를 불러 시스티나 경당최후의 심판을 그릴 것을 지시하였다.

같이 보기

각주

  1. Phillips, Roderick (1991년 6월 28일). 《Untying the Knot: A Short History of Divorce》. Cambridge; New York; Melbour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쪽. doi:10.2277/0521423708. ISBN 978-0521423700. 
  2. 구약성경 레위기 20장 21절에는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그것은 불결한 짓이다. 그가 제 형제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므로, 그들은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근친상간을 죄악으로 규정하였다.
  3. Lacey, Robert (1972년 1월). Antonia Fraser, 편집. 《The Life and Times of Henry VIII》.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7쪽. ISBN 978-0297831631. 
  4. Morris, Terence Alan (1998년 2월 18일). 《Europe and England in the Sixteenth Centur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66쪽. ISBN 978-0415150415. 
  5. Repcheck, Jack (2007년 12월 4일). 《Copernicus' Secret: How the Scientific Revolution Began》. New York: Simon & Schuster. 79, 78, 184, 186쪽. ISBN 978-0743289511. 
전임
하드리아노 6세
제219대 교황
1523년 11월 26일 ~ 1534년 9월 25일
후임
바오로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