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토론:한국의 역사/보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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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1년 전 (비엠미니님) - 주제: 두막루의 부여 계승 여부

기자조선

기자조선은 학자에 따라 그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하며 때로는 고조선의 지방 제후국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자조선을 고조선의 틀속에 넣어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국가로 보는 것은 중립적이지 못합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도 전조선 후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는 학설들의 토론장이 아니기에, 일반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전조선/후조선의 명칭을 한국사틀에서 쓸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한국사틀은 여러 기사에서 인용되는 틀이기에 더더욱 그렇기에 생소한 명칭은 틀의 기능과 거리가 멉니다. 기자조선(?) 정도로 처리하면 충분합니다. 고조선 안에 있다고 고조선을 계승한다고 100% 단정한다고 보는 것도 무리입니다. 나머지 틀에서도 병렬되는 나라들간 계승을 의미하는 거는 아니고, ?까지 넣었으니 그렇게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편집자를 알기 위해, 서명 좀 넣어주세요. 대량편집시는 기왕이면 가입을 권장합니다. --Hun99 2006년 12월 31일 (일) 02:18 (KST)답변
계승국이 아니므로 수평으로 배열을 해야겠죠.
그렇게 하면, 계승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100% 배제하는 거 아닙니까. NPOV를 유지해야 합니다. 한 쪽의 입장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NPOV위반입니다.--Hun99 2006년 12월 31일 (일) 02:23 (KST)답변
존재가 확실하지 않은데 저렇게 단군-기자-위만으로 놓는것도 NPOV위반입니다. 아예 삭제하는것이 좋습니다.
기자의 존재를 말하는 학설도 분명히 있고 그들도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아예 빼는 것이 NPOV를 충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장배제사유로 NPOV위반의 소지가 더 큽니다.) 하지만, 틀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는 학설간 대립을 담기 힘든 이상 논란을 피하고 간결성을 추구하는 게 낫겠습니다. 영문판 처럼요. --Hun99 2006년 12월 31일 (일) 02:40 (KST)답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등장하는 후조선이 바로 기자조선입니다. 본문 내용 확인하셨는지 ...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20:19 (KST)답변

환국 배달국

신화이기는 하나 틀:중국사에도 삼황오제가 있고 고조선의 뿌리를 두고 있는 신화적인 나라이기때문에 첨가했습니다.

환국은 기원전 약 7000년에 세워졌는데 시베리아부터 수메르지역까지 모두 포함했다고하네요 거의 아시아의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환국의 "수밀이국"을 수메르문명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 거짓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뷁뷁뷁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역사학자 대부분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니가 생각하는 키케로 (토론) 2009년 1월 24일 (토) 20:07 (KST)답변

배달국의 신화

배달국을 신화로 인정못하신다는 분이 있어서 말합니다.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에 배달국과 신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중국 삼황오제의 하나인 헌원과의 전쟁기록이 있고, 이러한 기록은 중국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의 신시에 대한 것은 신화로 인정못하고 중국의 삼황오제는 신화로 인정한다고 하니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신시국과 헌원과의 전쟁기록이 있고, 헌원은 신화로 인정되지만 신시국은 신화로 인정되지 못한다는것이 무슨 이상한논리인지 모르겠습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수) 18:36 (KST)답변

배달국을 신화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겠습니다.
  1. 배달국이 기록된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는 그 위서여부로 내용의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아무리 NPOV라지만 그대로 믿어서 역사로 개편해야 할까요? 규원사화나 한단고기는 일본서기보다 더욱 위서로서 의심되어집니다.) 역사서로서 권위있는 사기에 등장하는 삼황오제의 경우와 같이 취급할 수 없습니다.
  2. 배달국을 신화로 규정하는 건 대한민국의 일부 학계의 의견이며 대한민국의 주류학계는 물론 동아시아 타국가(일본, 중국) 또한 이의 존재를 신용하지 않습니다. 이 또한 중국 학계 대부분은 물론 동아시아 3국 역사학계 및 전 세계 학계에서 대부분 역사로 인정하는 삼황오제의 경우와 같이 취급할 수 없습니다.
- χε 아이리디 (토론) 2007년 1월 30일 (수) 18:51 (KST)답변
  1. 규원사화는 진서임을 이미 확증하였습니다. 좀더 규원사화에 대해 공부하고 오세요.
  2. 사기의 삼황오제의 설명에도 신시국의 치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사기의 설명에 나오는 신시국의 치우는 가짜이고, 그중에 중국것만 골라서 진짜라고 하는것은 논리에 어긋납니다. 배달국을 신화로 규정하는것이 무리라고 하시면 명칭을 바꾸어 환인 환웅 신시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것도 신화로 부정하는 학계는 없을것입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수) 19:12 (KST)답변
규원사화의 배달국은 단군조선입니다. 환국은 언급되지도 않습니다.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20:15 (KST)답변
그렇죠 환국은 언급되지 않지만 신화적 존재로 환인이 등장합니다. 환단고기가 위서로 의심이 들므로 한국사 틀의 환국 배달국을 환인 환웅으로 대치해야할것 같군요. 환인 환웅은 조선시대 사서에도 나오며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자꾸 사서의 권위를 따지신다면 환국과 배달국을 환인 환웅 신시로 대체하는것이 좋을듯합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수) 20:19 (KST)답변
'규원사화 진서 확증'이라는 것도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규원사화를 위서로 주장하는 학자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jtm71 2007년 2월 1일 (목) 13:25 (KST)답변
“진서”임은 확증되었다? 그건 모르겠고, “진본”임은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위서”로 주장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진본이라고 해서 위서가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반대로 가필이 있는 책이라고 해서 위서라는 보장도 없고요. --Knight2000 2007년 8월 11일 (토) 22:03 (KST)답변
'진본'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필사본'입니다. 그리고, 규원사화 위서론은, 규원사화가 숙종 원년에 저술되었다는 서지사항을 의심하는 내용입니다. 규원사화의 본문을 살펴보면, 내용에 대한 판단은 별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jtm71 2007년 8월 13일 (월) 00:02 (KST)답변

역사학에서 가장 확실한 내용은 “정설”(“정론.” “통설”이 아닙니다)이고, 그 다음에 “가설”입니다. 여기까지가 역사로서 인정받는 부분이고, “전설”은 사실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고, “신화”는 사실 여부도 명확하지 않고, 그것을 재해석을 하더라도 증명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정설이 가장 신빙성 있고, 그 다음에 가설,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것이 전설과 신화인데, 신화가 가장 신빙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단군신화라고 부르는 명칭은 엄밀히 말해 “단군전설”쯤 되어야 옳고, 환국이니 배달국이니 하는 내용쯤 되어야 신화입니다. --Knight2000 2007년 7월 31일 (화) 18:14 (KST)답변

'일제 시대' -> '일제 강점기'로 이동

'일제 시대'를 한국어 표준이고, 일반에서 통용되는 언어인 '일제 강점기'로 변경하였습니다. jtm71 2007년 5월 23일 (수) 11:37 (KST)답변

'환인'과 '환웅'의 구분 ...

환인과 환웅은 항상 같이 등장하는데 따로 구분해 놓은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됩니다. 환인.환웅을 같은 시대로 표시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jtm71 2007년 7월 16일 (월) 23:40 (KST)답변

모양은 꽤 좋아졌습니다만 ...

고구려 건국시기가 당겨졌습니다. 옥저와 부여 사이의 고구려 시대를 부여 시대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jtm71 2007년 7월 18일 (수) 17:56 (KST)답변

틀에 정확한 건국시기를 담아낼 수는 많이 힘들겠지요. 말씀하신 부분은 깜박한 부분이라 고쳤습니다.  천어/토론 2007년 7월 18일 (수) 21:35 (KST)답변

동예와 고구려

동예는 일정 기간 고구려와 병존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동예가 망하고 고구려가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표를 보면 동예가 망한 뒤 고구려가 들어선 것으로 됩니다. 고쳐 주었으면 합니다. --Knight2000 2007년 7월 26일 (목) 14:33 (KST)답변

두막루국

두막루국은 북부여의 후신으로써 5세기~8세기에 존재했는데, 이 연표에도 붙이는게 좋은것 같아요. 3세기 정도의 기간을 단명이라고 할 수 없을것 같고, 국사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잊혀진 역사인 것 같아 아쉽네요--Kakarote17 (토론) 2009년 7월 17일 (금) 19:07 (KST)답변

About Chinese한국사 편집하기

我們發生關於韓國歷史的爭議zh:Template:朝鮮半島歷史,希望懂韓國歷史的編者能前往提出意見,謝謝。 We have dispute about table of Korea dynasty,May you provide some opinion about 唐 新羅、高麗 元朝東征省、李氏朝鮮or朝鮮王朝,Theak you。--Jason22 (토론) 2009년 7월 29일 (수) 02:42 (KST)답변

This is Chinese Wiki's table of Korea dynasty

朝鮮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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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時期 伽倻 百濟  高句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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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臨時政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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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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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鲜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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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가야

후삼국 시대 연표에 후가야라고 써져있는데 삼국시대 존재했던 가야와 연결되는데요. 아무리봐도 후가야에 대한 자료가 없습니다. 그런데 후삼국시대에 후가야가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토론) 2009년 8월 23일 (일) 18:00 (KST)답변


한국사 틀 문서 훼손 방지 요청

위키백과 한국사 틀은 한국에 존재했던 여러 국가의 설명 부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매우 중요한 틀입니다. 따라서 이 틀은 개인적 주관으로 함부로 수정, 추가, 삭제하거나 문서 되돌리기를 해서는 안 되며, 역사학계의 정설을 바탕으로 엄밀하게 작성되어야 합니다. 최근 제가 역사학계의 정설을 바탕으로 한국사 틀을 대폭 손질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용자들에 의해서 무분별하게 되돌리기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되돌리기를 한 후 아무런 설명이나 근거 제시도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일단 문서를 원래 상태로 되돌린 후, 다음과 같이 토론을 제안합니다.

고조선위만조선 문제

일부 사용자들이 고조선의 세로 높이가 너무 높은 것은 사이비 역사학 또는 유사 역사학이므로 높이를 줄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은 적어도 수백년 이상 동안 존재했던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국가이지, 단군신화에만 나오는 전설상의 국가는 아닙니다. 또한 위만조선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국가이지, 사이비 역사학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알다시피 고조선이라는 용어는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최초로 나오는 말입니다. 그 이전의 기록에서는 '조선'이라고 하였으나 삼국유사에서 처음으로 '고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일연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고조선이라고 부른 것은 이후에 존재했던 위만조선 등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말입니다.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현재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유는 삼국유사와 다르게,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고조선 안에는 단군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조선(단군조선)과 그 실체에 대해 논란이 많은 기자조선 및 한사군이 설치되기 전에 있었던 위만조선이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므로, 기자조선을 제외하고, 단군조선위만조선을 합쳐서 고조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조선의 건국 시점은 언제이고 국가의 존속 기간은 얼마나 될까요? 우선, 고조선선의 멸망 시점은 기원전 108년으로 위만조선이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평양성이 함락된 때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건국 시점만 알면 고조선의 존속 기간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단군신화입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 여러 역사서의 기록 역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기원전 2,333년 전후를 고조선의 건국시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고고학적 유물이나 유적이 전무하고 (일부에서는 홍산문화를 고조선과 연결시키려는 노력도 있지만 정설은 아닙니다.), 청동기 이후에 고대 국가가 형성된 점을 볼 때 건국시기가 너무 빠르다는 점에서, 기원전 2,333년 설은 신화나 설화는 될 수 있어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언제일까요? 정확한 건국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고고학적 유물이나 역사학계의 논의를 통해서 고조선의 건국 시점을 알아내면 좋겠지만,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고조선의 정확한 건국 시점은 알 수가 없지만, 고조선의 존속 기간은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최소한 수백년 이상 존재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고조선(즉, 조선)이라는 기록이 중국 측 기록에 나오는 것을 살펴보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입니다. 기자조선을 인정할 경우 기자조선만 1천년이 되니까 고조선의 존속 기간은 매우 길어집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있으므로 이 주장에 따라 한국사 틀을 그릴 수는 없습니다. 중국 측의 다른 기록인 《관자(管子)》에 보면 기원전 7세기 경에 조선이 제나라와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기록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고 나타납니다.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에 연나라진개가 조선을 공격하여 동쪽으로 2천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 이전에 조선이 있었고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으므로 약 6백년 이상 존재했던 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존속 기간은 단군신화에 따르면 2천년이 넘지만, 신화나 설화는 역사가 아니므로, 중국 측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6백년 이상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고조선의 존속 기간을 더 짧게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관자(管子)》나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기록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때의 조선이 국가로서의 고조선이 아니라 단지 조선이라는 부족, 또는 민족(?), 또는 세력권 정도로 볼 수 있으므로, 고조선이라는 국가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관에 따르면 당연히 고조선은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으므로 고조선의 존속 기간을 6백년 이상으로 보는 것은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식민사관에 따르면 고구려, 백제, 신라도 존속 기간이 훨씬 더 줄어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몽(추모왕)이나 온조, 박혁거세 등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부족 내지 소국, 또는 세력권에 불과했으며, 정식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므로 한국사 연표 자체가 상당히 많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 식민사관에 따르면, 부여, 동예, 옥저, 가야 등은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모두 다 한국사 연표에서 제외해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 식민사관에 따르면, 한국사 틀은 고구려, 백제, 신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식민사관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이 식민사관을 부정할 경우, 《관자(管子)》나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조선이라는 나라 혹은 부족 혹은 세력권에 대해서도 한국사 연표에 나오는게 마땅할 것입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역사는 아무리 줄여서 잡더라도 6백년 이상이 됩니다.

현재 역사학계를 실증사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실증사학은 친일 역사학자였던 이병도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든 작든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실증사학=식민사관을 동일하게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증사학이 반드시 식민사관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실증사학에 따르더라도, 고조선, 부여, 동예, 옥저, 가야 등 모두 고대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한국사 연표에 당당히 표시될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실증사학에서도 위만조선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위만조선을 부정하고 한국 역사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실증사학도 아니고 아마도 식민사학의 교육을 잘못 받은 일부 네티즌이나 식민빠(제가 그다지 좋아하는 용어는 아닙니다. 편의상 이렇게 쓰겠습니다.) 정도일 것입니다. 식민사학을 바탕으로 한국사 연표를 그릴 수는 없으므로 사실 고려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건 역사학계에서 인정되지 않은 《환단고기》 류의 주장을 근거로 한국사 연표를 그려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실증사학에서도 위만조선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한국사 연대표에 마땅히 추가할 가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의 변방을 지키던 위만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을 몰아내고 그 땅에(즉, 왕검성에) 세웠고, 그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위에서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하였는데,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고조선의 세로 높이는 《삼국유사》에 따라 수천년에 해당하는 높이로 그릴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수백년의 높이는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면, 아래에 의견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31일 (토) 16:08 (KST)답변

참고로 현재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이 기원전 12~10세기 무렵에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참고로 고조선의 도읍지 문제와 상나라의 동이족 문제로 저와 격렬한 토론을 벌였던 Xakyntos 님도 고조선의 성립 연대에 대해서 기원 전 12~10세기 설을 지지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설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약 1천년간 존재했던 국가입니다.

고조선의 실질적인 성립 연대를 기원전 12 ~ 10세기 무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일 (일) 16:57 (KST)답변

정안국 문제

한국사 틀에서 또 하나의 쟁점이 발해 유민들이 건국한 정안국에 대한 문제입니다. 정안국은 서기 938년 경 발해의 귀족 출신 열만화 왕이 서경 압록부 근처에 설립한 국가입니다. 알다시피 서기 926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동단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워 발해 유민들을 통치했습니다. 발해의 귀족 출신인 열만화(烈萬華)는 938년 경 서경 압록부 지역에서 정안국을 건국하고 거란에 맞서 발해를 부흥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제2대 왕인 오현명(烏玄明) 때에 이르러 정안국은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거란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멸망 시점은 대체적으로 986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발해 유민들의 저항과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발해가 한국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면, 정안국 역시 한국 역사에 포함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국가는 정안국 이외에도 상당히 많이 존재합니다. 발해 멸망 직후에 후발해라는 나라가 있었고 정안국은 이 후발해에 이어 설립된 국가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발해 계승 국가들은 1~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존재하다가 거란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2대 왕 48년간 독립 국가로 존재했던 정안국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서기 995년 발해 귀족 출신 오소경은 올야국(995년~996년)을 건국했으나 1년만에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서기 1029년 발해의 왕족 출신 대연림이 흥요국(1029년~1030년)을 건국했으나 역시 1년만에 거란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서기 1116년 1월 발해 귀족 출신 고영창은 대발해(대원국)(1116년 1월~5월)를 건국했으나 역시 거란에 의해 5개월만에 진압되었습니다. 이로써 발해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발해 유민들의 저항운동이 계속되면서 국가를 칭하는 세력이 많이 있었으나 어느 것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유독 정안국열만화 왕에서 오현명 왕까지 2대를 이어갔고, 또한 48년간 서경 압록부 지역에 존속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국가이고, 고구려 땅에 발해를 계승하여 존재했던 정안국이 한국사 연표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정안국과 비슷한 시기에, 즉 신라말 고려초에 한반도 남쪽에 견훤이 세운 후백제궁예가 세운 태봉이 있었는데요. 정안국이 적어도 이들 나라보다는 더 오래 지속되었으므로, 이들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사 연표에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던 후백제, 태봉, 정안국의 존속 기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정안국이 한국사 연표에 존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31일 (토) 16:26 (KST)답변

묘청의 난 문제

일부 개인들이 자꾸 되돌리기를 시도하는 한국사 틀에는 묘청의 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정리한 한국사 틀에는 묘청의 난이 빠져 있습니다. 묘청의 난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과연 단재 신채호가 말한대로 묘청의 난이 조선 1천년래 제1대 사건인가? 아니라고 봅니다. 따라서 한국사 틀에서 빠지는 것이 맞다는 의견입니다. 아시다시피 묘청의 난은 서기 1135년 승려 묘청과 서경 출신의 정지상 등이 풍수지리설(도참설)에 기반하여 금나라 정벌을 기치로 서경으로 천도하고자 했던 운동입니다. 묘청의 난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에 의해 1년만에 진압되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1년만에 진압된 이 사건이 왜 1천년래 제1대 사건이고, 왜 한국사 틀에 들어가야 하나요? 그건 단재 신채호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사대주의 유학자인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채호는 만약 묘청이 승리했더라면 《삼국사기》 같은 사대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책이 나오지 않았을 것인데, 묘청의 난이 김부식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한국 역사가 왜곡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묘청의 난이 실패한 것이야말로 민족주의 사관에 치명적 영향을 끼쳤으므로, 이것을 1천년래 최대 사건으로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학자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지, 실제 그 사건 자체가 우리 나라 1천년래 제1대 사건인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묘청의 난 이외에도 한국에는 수없이 많은 내전, 내란, 민란이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을 한국사 틀에 기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려 시대에서 꼭 언급되어야 할 중대 사건은 거란의 고려 침략과 몽골의 고려 침략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몽골의 고려 침략은 묘청의 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역사적 사건입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몽골의 고려 침략으로 인해 사실상 나라가 망하고(간신히 충..자로 시작하는 왕들이 명맥만 유지하고) 몽골의 식민지가 된 셈입니다. 굳이 외침이 아니더라도 내란을 보면, 묘청의 난보다도 무신정권이 훨씬 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최씨정권은 사실상 고려의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의 개인 가정집에서 한 나라를 좌지우지했습니다. 그것도 단기간에 끝난 내란이나 정변이 아니라, 최충헌 이후 무려 4대에 걸쳐 62년이나 지속된 정권입니다. 1년만에 진압된 묘청의 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고려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 주장의 요지는 묘청의 난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단재 신채호처럼 민족사관을 가진 역사학자의 입장에서는 1천년래 제1대 사건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한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 1천년래 제1대 사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묘청의 난은 불과 1년만에 진압된 내란으로서 무신정권(최씨정권)이나 몽골의 고려 침략 등의 사건과 비교할 때 그 중요성이 매우 떨어지는 사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한국사 틀에서 제거한 것입니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은 여기에 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S.Bullet 님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되돌리기를 하지 마시고, 여기에 의견을 남겨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31일 (토) 21:32 (KST)답변

쌍성총관부삼별초 문제

제가 한국사 틀에 고려-몽골 전쟁 항목 바로 밑에 괄호를 하고 그 속에 쌍성총관부삼별초를 나란히 삽입했습니다. 고려의 몽골 침략이 한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는 다들 아실 것입니다. 사실상 나라가 망한 것과 다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사실상 몽골의 식민지가 된 것과 같습니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 등 충(忠)자로 시작하는 왕이 여러 명 있었으나 모두 몽골의 허수아비였습니다. 충(忠)이란 고려의 왕이 몽골에게 끝없이 충성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고려 왕의 부인은 반드시 몽골 여자로 정하여 혈통이 뒤섞이게 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황족들에 대해 반드시 일본 여성으로 결혼하게 하여 혈통이 뒤섞이게 한 것과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젊은 조선의 여성을 정신대로 끌고가 태평양 전쟁에 나간 일본인 병사들에게 노리개로 던져준 것과 마찬가지로, 몽골은 고려의 여성 수천, 수만 명을 강제로 원나라에 끌고가 성 노리개로 썼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때 몽골에 저항한 삼별초가 있었습니다. 최씨정권의 일개 사병 부대로 시작되었던 삼별초가 끝까지 몽골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무려 3대 40년 간이나 끈질지게 저항하였습니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하여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 몽골 침략군에 저항하던 삼별초는 고려의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황제'로 옹립하고 진도에 별도의 도성을 쌓고 대몽항쟁을 벌였습니다. 이건 마치 일제 강점기에 이승만김구 등을 중심으로 멀리 바다 건너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것과 비슷한 구도입니다. 물론 일부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은 일개 테러리스트들의 소규모 저항에 지나지 않았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정설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해서도 일개 최씨정권 사병들의 소규모 항쟁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있는데, 그 규모와 지속성, 황제를 칭한 점, 자체 행정조직 완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일개 소규모 반란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삼별초의 항쟁은 한국사 틀에 포함되어야 할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와 그에 저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것처럼, 몽골의 고려 지배 시기에는 몽골이 설치한 쌍성총관부와 고려의 충...자 왕들이 있었고, 그에 저항한 삼별초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삼별초를 별도의 국가로 볼 수는 없겠지만, 한국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임이 분명하므로, 한국사 틀에 고려 부분에 한 줄 넣었습니다. 만약 다른 의견이 있으면 여기에 글을 남겨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3월 31일 (토) 23:42 (KST)답변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문제

제가 기존 한국사 틀에 있던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링크를 삭제했습니다. 저도 한국 사람이고 한국의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등 조선 시대의 문화 유산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제가 삭제했습니다. 삭제한 이유는 한국사 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국사 틀은 한국의 역사에서 명멸해간 많은 국가들을 나열하는 틀입니다. 한국사 틀은 문화나 예술 분야의 틀이 아니라 정치 분야의 틀입니다. 이 점에는 동의하실 것입니다. 국가의 건국과 멸망을 한 눈에 보여주고, 어느 국가가 어느 국가를 계승했는지 보여주는 틀이 바로 한국사 틀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한국사 틀에서는 정치와 군사, 전쟁, 식민지배와 저항운동 등의 사건이 중요성을 갖게 됩니다. 제가 절대 한국의 소중한 문화재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라서 삭제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한국사 틀의 성격상 부적당한 것 같아서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링크를 삭제한 것뿐입니다. 만약 조선시대의 이 문화유산을 꼭 반드시 기록해야 하고, 절대 삭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신다면, 마찬가지 논리로 고려 시대에도 팔만대장경과 같은 중요한 문화재를 모두 기록해야 하는데요. 그러다 보면, 한국사 틀이 한국의 국가에 대한 틀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재 틀로 변질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틀의 성격에 맞게 편집하는 과정에서 삭제한 것이지, 절대 문화재의 소중함을 몰라서 삭제한 것이 아니므로, 절대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서 기존 한국사 틀을 되돌리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편집한 한국사 틀의 문서를 훼손하지 말고, 그냥 두시기 바랍니다. 물론 제가 편집한 한국사 틀을 바탕으로 하여, 더 좋은 내용을 추가하거나 혹은 수정하여 틀을 개선하는 것은 환영합니다. 다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과거의 일관성 없는 한국사 틀로 되돌리기를 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일 (일) 02:07 (KST)답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줄바꿈 문제

기존 한국사 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줄바꿈이 이상하게 처리되어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줄바꿈이 매우 이상하게 되어 있어서 제가 줄바꿈을 좀 바꾸었습니다.

  • 변경 전

조선민주주

인민공화국
  • 변경 후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아무래도 아래처럼 변경한 것이 더 눈에 잘 들어오고 가독성이 좋지 않나요? 변경 후의 표현이 호흡을 고르면서 끊어서 읽기도 좋습니다. 그래서 변경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자꾸 제가 편집한 한국사 틀을 되돌리기를 하니까 이 편집이 없어지면서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아주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되돌리기를 하지 말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새로 추가하거나 일부 내용을 수정 또는 삭제하거나 해야지, 틀 자체를 되돌리기를 하니까, 이런 편집까지도 다시 예전 상태로 엉망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되돌리기를 하지 말아주세요. 아사달 (토론) 2012년 4월 1일 (일) 02:16 (KST)답변

그 정도는 누가 봐도 타당한 편집이니 되돌리기 안 당할 겁니다. 너무 우려하지 마세요. --Yes0song (토론) 2012년 5월 24일 (목) 14:44 (KST)답변

배경색 신라, 고조선

신라와 고조선의 배경색이 같습니다. 신라는 진국 색으로 교체 해주셧으면 좋겠습니다. 진국,진한,신라는 같은 색이면 좋겠네요.--18호 (토론) 2012년 5월 22일 (화) 13:52 (KST)답변

신라와 같은 색 (후백제, 태봉)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자칭 후백제라고 만들 뿐 前백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태봉 또한 신라 왕실의 서자이므로 해서 후백제, 태봉의 배경색은 같아야 합니다.--18호 (토론) 2012년 5월 22일 (화) 14:16 (KST)답변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해당국 스스로가 백제와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한 데다가, 주된 인구가 옛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 후손이 많아서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닌 듯합니다. --Yes0song (토론) 2012년 5월 24일 (목) 15:17 (KST)답변
견훤 문서에 보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원래 이씨였으나 뒤에 견(甄)[2]씨로 고쳤다. 라고 되어 있으며 이씨는 신라 성씨 혹은 당나라 성씨에 해당이 되지 않는지요?

백제에는 대성 팔족(大姓八族)이 있는데 사씨(沙), 연씨(燕), 협씨(劦), 해씨(解), 진씨(眞), 국씨(國), 목씨(木), 묘씨(苗)이다.

— (수서 권81 제46동이 백제전)

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18호 (토론) 2012년 5월 25일 (금) 09:35 (KST)답변

제가 드린 말씀은 18호님이 말씀하신 것 이외에도 다른 기준(계승 의식, 주민 구성)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건국자의 가계도 고려 대상이긴 합니다만. --Yes0song (토론) 2012년 5월 25일 (금) 14:25 (KST)답변

관련 있는 나라끼리 색깔을 통일하니 좀 헷갈리는 것 같네요

예전처럼 색깔을 달리하거나 나라 사이에 경계선을 넣어주는 게 좋을 것 같네요. --Yes0song (토론) 2012년 5월 23일 (수) 16:21 (KST)답변

나라 사이에 경계선을 진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18호 (토론) 2012년 5월 24일 (목) 14:38 (KST)답변

시대구분의 배경색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의 배경색을 하얀색으로 두고, 고려, 조선, 대한제국,등등 왼편에 길(?)다란 막대를 생성해서 시대구분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예)근세, 근대, 현대--18호 (토론) 2012년 5월 24일 (목) 14:41 (KST)답변

두막루는 한국사의 일부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서 약 300년간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한국사 틀에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찬성 및 반대 토론이 있었으며, 지금은 학계의 연구 결과를 존중하여,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기로 결론이 난 상태입니다. 자세한 토론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이 링크에서 논의된 사항을 번복시킬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두막루를 한국사 틀에서 제거하려는 경우, 문서 훼손으로 오해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3:33 (KST)답변

동란국을 한국사 틀에 포함해야 하는가 여부

윤성현님 토론문서가 아니라 여기서 토론해야 할 부분인것 같습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3:57 (KST)답변

동란국 문제와는 별개로 두막루까지 한꺼번에 한국사 틀에서 제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제가 원래 상태로 복원시켜 놓았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03 (KST)답변

동란국에 대해서 말하자면, 근대의 일제강점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나영남, 10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거란의 요동정책, 역사문화연구 제39집

위 논문은 저도 잘 알고 있고, 이미 예전에 읽어본 논문입니다. 이 논문을 근거로 동란국을 한국사 틀에서 빼자는 반대 논리를 펴기는 어렵습니다. 이 논문의 내용을 다시 잘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동란국은 거란이 발해 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세운 괴뢰국가입니다. 마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것과 같습니다. 동란국은 사실상 몇 년만 존재하다가 발해 유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서 결국 흐지부지되고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국가였습니다. 그에 따라 후발해, 정안국, 올야국 등 수많은 발해계 국가들이 발해 부흥을 내걸고 거란에 맞서 저항을 했습니다. 동란국을 한국사 틀에서 제거하자고 한다면, 일제강점기도 한국사 틀에서 제거해야 하는지 묻고 싶군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15 (KST)답변

둘다 안됩니다. 사서에서 두막루의 실재를 찾을 수 있는건 삼국지 위서 두막루전인데다가 또 두막루 출신 한국인이 사서에 나온적이나 있던가요? 그리고 예맥족, 예맥족이라고 하는게 완벽하게 후대의 한국인이라고 할수도 없습니다. 또 동란국의 란(丹)은 거란족의 그 '란' 자인데도 이걸 한국사로 꾸역꾸역 넣는다는 것도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거란족이 한국인이고 거란의 역사가 한국사라면 마땅히 중국의 요나라도 한국사에 포함되겠죠. 그래서 둘다 안됩니다. 다시 돌립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17 (KST)답변

거란족이 한국인이라는 주장, 혹은 거란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라는 주장이 틀렸기 때문에, 동란국도 한국사 틀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인이 아니고, 일본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는 한국사 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배자는 일본이 설치한 조선총독부였지만 대다수 백성들은 조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동란국의 지배자는 거란족이었으나, 대부분의 피지배민들은 발해인들이었습니다. 동란국은 발해의 수도에 설치한 식민통치기구였기 때문에 발해와 관련이 있어서, 추가한 것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21 (KST)답변
두막루 출신 한국인이 사서에 안 나오기 때문에 두막루를 한국사 틀에서 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몇 사람의 이름은 사서에 나옵니다. 예맥족 문제와 무관하게 두막루는 부여의 일부 주민들이 부여를 탈출하여 북쪽으로 나하를 건너가서 세운 부여계 국가입니다. 부여가 한국사 틀에 나온다면, 당연히 부여를 계승한 두막루도 한국사 틀에 나와야 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23 (KST)답변
거란족이 한국인이 아니고 지배층 역시 한국인이 아닌 나라를 왜 한국사에서 다룹니까? 그건 중국사로 가야죠. 요나라가 세운 괴뢰 정부를 왜 한국사에서 취급해야 하죠?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23 (KST)답변
그리고 두막루라는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알기로는 부여를 이은 나라중 가장 정통성이 있는 나라는 대소의 아우가 세운 갈사국입니다. 그런데 갈사국을 집어넣기는커녕 두막루라는 부여의 후손이 세웠을 것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 한국사에 뭉뚱구려 집어넣는다는것은 넓게 말하면 동북공정이랑도 다를게 없습니다. 당시 북방국가는 이른바 다문화 국가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동단국은 논할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거란이라는 몽골계 민족이 세우고, 중국사의 왕조인 요나라의 조종을 받고, 더구다나 괴뢰 정부를 인정해서 한국사 틀에 세운다는 것은 옳지는 않다고 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32 (KST)답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속지주의屬地王義와 속인주의屬人主義가 있습니다. 이로 볼 때 한 나라 혹은 한 민족의 역사는 한 나라에서만 연구될 수 있는 성질이라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윤성현님의 문제의식은 인정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렵군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5:31 (KST)답변

일단 두막루와 동란국은 구분해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할 듯 하군요. 따로 분리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4:29 (KST)답변

두막루

일단 하나씩 토론하자는 제안에 동의합니다. 두막루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사람이 참가하여 상당히 긴 토론을 진행했으며, 그 결과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 유지하기로 한 내용입니다. 지금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의제기를 하였다고 하여, 아무런 반대 논문이나 출처도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막루는 한국사 틀에서 제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예전 토론의 내용에 대해서는 토론:두막루를 참고해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33 (KST)답변

논문을 왜 제공합니까? 거기다가 제가 전문 학자도 아니고 제가 비싼 돈 주면서까지 논문을 읽어볼 만한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귀하가 사료 하나와 그 사료로 빚어낸 논문 3개만으로 장문으로 설득한 내용인데다가 당시 귀하가 장황하게 설명하시니 그렇게 수긍을 한것일 뿐입니다. 두막루의 실재는 인정하지요. 삼국지 위서 두막루전에 나타납니다만, 그곳에서 유명인이 났습니까? 아니면 대놓고 한국인이라 했습니까? 부여의 정통성을 이었나요? 결과적으로 이 토론은 다시 원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것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37 (KST)답변
해당 토론을 '눈팅'하는 입장에서 위의 입장은 동의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윤성현 님이 지닌 역사에 대한 전문성에 대해서는 존중하지만, 위키백과의 문서 그리고 토론 과정에서는 2차 출처가 될만한 확인 가능한 출처는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토론은 상대방과 소통하는 과정이고 상대방이 납득할 만한 근거는 제시해야죠. 실체가 없는 주장은 뼈가 없는 몸체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참고로 저는 이 토론에 대해 아무런 의견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어쏭(우리 소통합시다.) "희망을 드립니다." 2012년 7월 9일 (월) 14:41 (KST)답변
그럼 해외에서 출처를 돈주고 사라는 말씀이신가요? 저도 그렇게 한가한 편은 아닙니다. 전 분명 실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단 여러개의 사서가 아니라 사서 하나와 논문 3개만 보고 속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중 하나인 백산학회는 친환단고기 단체로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01 (KST)답변
그럼 그와 반대되는 출처 3개를 제시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한가편 편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토론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려면 그에 반대되는 출처를 확실히 제시하셔야죠. 최소한 무료 출처라도 있지 않을까요? 해당 부분에 전혀 모르는 제 입장에서도 윤성현 님의 의견이 허망한 메아리로밖에 보이지 않다는 의견은 저를 비롯해서 밑에 Mr.SamA님도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토론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게 목적이지, 상대방과의 분란을 일으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쏭(우리 소통합시다.) "희망을 드립니다." 2012년 7월 9일 (월) 15:13 (KST)답변
윤성현 님, 그런 다음 논문은 어떠신가요? 《국사관논총》에 실린 논문입니다만...
*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이와 같이 두막루를 부여의 후계로 보는 학계의 연구 논문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한두 편의 논문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반대 논문은 아예 없는 상황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16 (KST)답변
두막루갈사부여(=갈사국)가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를 추가하면 다른 하나를 빼야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두 국가는 서로 존재한 시기가 많이 다릅니다. 갈사부여를 넣어야 하므로, 두막루를 빼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두막루는 300년간 지속된 부여계통의 국가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37 (KST)답변
왜 아니지요? 갈사국이 오히려 정통성으로는 동부여의 왕제(王弟)가 세운 나라이니 정통성으로만 치자면 갈사국이 위입니다. 그리고 두막루에 대해서는 건국자가 누군지 역대 왕이 누군지에 대해서도 모르고 그 300년 역사에서도 존재하는 사서는 매우 극소수인데 그걸 보고 한국사로 속단할수가 있나요? 부분적인 한국사일수는 있어도 당시 여러 민족이 살던 만큼 순수하게 한국사의 일부분으로 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39 (KST)답변
윤성현 님, 갈사부여 문서를 좀 읽어봐 주세요. 그리고 두막루 문서도 읽어봐 주세요. 그 뒤에 차분하게 토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나라는 존재했던 시기가 전혀 다릅니다. 갈사부여는 서기 22년~68년까지 존재했던 나라이고, 두막루는 서기 5세기~8세기까지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갈사국과 두막루 중에서 누가 부여를 계승한 정통인지 논의하는 것 자체가 논점을 벗어난 토론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57 (KST)답변
그렇다면 고조선에 대해서는 건국자가 누군지만 알려져 있다 하나 신화에서 나온것이며, 역대 왕에 대해서도 공인된 사서에서 드러난 바 적습니다. 심지어 초기의 고조선은 요동지역을 기반으로 하였다고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해당 지역의 민족이 모두 한민족이었다고 속단할 수 없고 여러 민족이 살았다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등에도 나와 있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두막루 또한 윤성현님의 논리대로 속단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4:50 (KST)답변
두막루의 실재를 부정한다는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을 한국사로 대놓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 뿐입니다. 최소한 사서에 두막루 출신인 사람도 없으니깐 이 사람이 정말 한국인의 혈맥인지는 알수 없다는 겁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52 (KST)답변
윤성현 님, 두막루 사람 중에 사서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수령 낙개재(諾皆諸)라는 사람이 서기 724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중국 측 사서에 남아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00 (KST)답변
  • 724년 :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에 달말루의 대수령 낙개제(諾皆諸)가 와서 조공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낙씨 자체는 중국 성인 것으로 압니다만? 그리고 이사람이 한국인이라는 결정적 증거도 없이 조공을 했다, 그리고 나라가 만주 벌판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면 다 한국인인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03 (KST)답변
두막루 사람이 있었냐 아니냐를 요구하신 것 아닌가요? 또한, 방금의 말씀은 한국인의 원류에 대해서 너무 일편만을 보고계신다고 감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고조선 멸망기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니계상 삼, 조선상 노인 등-은 모두 한국인이라는 결정적 증거도 없고, 나라가 만주에도 일부 영역이 있었습니다만.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5:09 (KST)답변

참고로 예전 토론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41 (KST)답변

아사달 님이 말씀하신 두막루토론 문서를 보니 이의를 제기하신 분들이 솔직히 도가 지나치신 것 같아요. 제가 역사 전공은 아니어서(다만 인접 학문인 한문학이 제 전공[학부생 수준]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인용해 오신 자료가 충분히 한국사로 볼 수 있음에도 자꾸 태클을 거시네요. 아사달 님은 도무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시는 저 분들을 이해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아사달 님은 위키백과의 규칙을 준수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음에도 자꾸 태클을 받으신 겁니다. 적어도 두막루 건에 있어서는 상황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제 눈에는 아사달 님이 제시하신 자료로는 두막루가 한국사에 속하는 것을 충분히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갔습니다. 제가 봐도 학계에서 권위가 있는 학자들의 권위 있는 논문이라고 생각됩니다만(해당 학회명도 여러 번 들어봤고...) 왜 믿지를 못하시는지들 납득이 안 갑니다. 이런 식으로 몇몇 위키백과 사용자 분들은 검증 자료를 충분히 들이댔는데도 믿지 못하고 반대하시는 것 같아요. 저 정도 근거를 댔으면 수긍을 하는 게 옳은 거 아닌가요? 저도 토론:두막루를 읽어보니 상당히 당혹스럽습니다. 열심히 작성하신 분 입장에서는 맥이 빠지고 화가 안 날 수가 없죠. 위키백과 특성상 많은 사용자들이 비전문가라서 잘 모르는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비전문가인 사용자들도 자신들이 잘 모르는 분야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어느 정도 자료가 충분하면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사달 님은 그 설명 과정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필요한 양 이상으로 제시하셨고(너무도 안 믿으시니까) 그것도 자료를 해석하는 방법을 거의 일일이 떠먹여주다시피 설명하셨습니다. 이건 너무한 것 같네요. 경찰서에서 용의자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Yes0song (토론) 2012년 5월 10일 (목) 15:22 (KST)

저도 방금 두막루 토론을 봤는데, 뭔가 익숙하지 않다고 계속 증명 요구하는건 좀 아닌거 같습니다. 그정도 자료면 충분히 입증도 한 것이구요. --거북이 (토론) 2012년 5월 10일 (목) 16:25 (KST)
몇 사용자의 의견이 다 옳다고는 할수 없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52 (KST)답변
:)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4:56 (KST)답변
토론:두막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몇 사람의 의견이 아닙니다. 반대 의견을 낸 2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이 두막루를 한국사에 포함하자는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그렇게 동의하게 된 이유는 제 주장 때문이 아니라, 학계의 권위 있는 연구논문 때문이구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03 (KST)답변
결론이 났나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분으로 인정합니다. 이런 문구도 없이 귀하의 장황한 설명으로 인한 것입니다. 참여한 사용자도 딱 2명밖에 없던데 다른 사용자가 모두 찬성 의견이나 투표를 했나요? 아니잖습니까?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05 (KST)답변
글쎄요. 역사부분 위키프로젝트에 얼마나 많은 위키러가 참여하고 있는지, 또한 그만큼 권위가 있거나, 그에 관하여 연구하는 분들이 정말 극소수인 현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윤성현임께서 찬성의견이나 투표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인듯 합니다. 저 또한 정말 간만에 '우연히' 접속해서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구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5:22 (KST)답변

두막루에 대해서 제가 학계의 여러 연구 논문을 찾아보았는데,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서, 한국사의 일부로 봐야 한다는 연구 논문은 여러 편이 있었지만,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든지 혹은 중국사의 일부라든지 하는 연구논문은 지금까지 단 한 편도 찾지를 못 했습니다. 두막루를 한국사로 보는 것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반대 의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런 자료가 있다면 제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만약 반대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문서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09 (KST)답변

그 학계가 국사편찬위원회를 위시로 한 곳이라면 말씀해주시죠. 한국사 서지에서는 두막루를 다룬 논문이 한국의 역사를 총괄하는 "국사편찬위원회" 저작은 없네요. [1] 주류 학계의 총본산에서 이에 대해 나온 논문이 없는데 학계에서 반대 의견이 없다고 하는것도 무리가 아닌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14 (KST)답변
윤성현 님, 그런 다음 논문은 어떠신가요? 《국사관논총》에 실린 논문입니다만...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19 (KST)답변
*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그게 무엇이 어쨌다는 거죠?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21 (KST)답변

그리고 아래에 Mins님이 잘 말씀해주셨네요. 네 비중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막루라는 국가가 과연 한국사에서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군요. 결정적으로 두막루에 대해서는 사서의 설명도 적고 무엇보다 출토된 유적, 유물도 없는 것인 만큼 (아시겠지만 두막루가 한국사로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도 한국사에 실존했던 나라의 문화와 뿌리가 적어도 대동소이해야 합니다) 한국사로 속단하기는 이르죠. 중국의 하나라나 은나라도 유물로 인하여 실존성이 드러났으니깐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14 (KST)답변

윤성현 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키백과는 독자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두막루가 한국사의 일부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여기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계의 여러 연구논문들에서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쓰고 있는데, 왜 우리가 여기서 부정(?)을 해야 하나요? 유적과 유물이 있는지, 한국인과 혈통이 섞였는지, 사서에 비중이 있는지 없는지... 등등을 왜 여기에서 우리가 판단하나요? 학계에서 한국사의 일부라고 하는데, 왜 우리가 여기서 몇몇 사람들끼리 모여서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나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위키는 우리들끼리 독자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위키백과는 학계에서 연구논문 등을 통해 발표한 자료를 일반인이 알기 쉽도록 편집하여 올리는 곳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23 (KST)답변
그런 아무런 물증도 없이 단지 논문에서 한국사로 인정되었으니 한국사로 인정하자는 발상은 옳다고 보시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26 (KST)답변
학계에서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했는데, 왜 윤성현 님이 나서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는지 모르겠군요? 윤성현 님이 지금 학계의 연구 결과를 부정하고, 위키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주장을 펴는 건가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51 (KST)답변
[2] 추가로 더올립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26 (KST)답변
[3] 참고입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5:28 (KST)답변

두막루 문서는 제가 두막루에 관한 학계의 권위 있는 연구 논문을 여러 편 읽고서 작성한 글입니다.

  • 1.↑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
  • 2.↑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두막루 문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국 측 논문뿐 아니라 쑨진지간즈겅 등 현대 중국 학자들의 의견까지 반영되어 있습니다.

현대 중국의 학자인 쑨진지(孫進己, 손진기)와 간즈겅(干志耿, 간지경)은 두막루가 건국된 시기는 그보다 이전인 서기 410년 동부여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점령된 시점 이후로 이해하였다.

  • 7.↑ 孫進己 저, 임동석 역, 《동북민족원류》, 1992.
  • 8.↑ 干志耿, 〈古代槀離硏究〉, 《民族硏究》 第2期, 1984.

인터넷에 떠도는 권위 없는 글을 근거로 들이대면서, 학계의 연구 논문을 깎아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40 (KST)답변

두막루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국사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 첫째, 두막루를 건국한 주체들이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라고 자처하였다.
  • 둘째, 두막루의 각종 풍습과 생활 습관, 의복 등이 부여의 것과 거의 동일하였다.
  • 셋째, 두막루의 지리적 위치가 예전 북부여의 땅이었다.
  • 넷째, 두막루의 민족과 언어가 부여와 동일했다.
  • 다섯째, 두막루가 멸망한 후 그 땅은 발해로 계승되었다.

제 주장이 아니고, 학계의 연구 논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44 (KST)답변

두막루국은 물길(勿吉)의 북쪽 1천 리에 있고 낙양으로부터 6천 리 떨어져 있다. 옛날의 북부여(北夫餘)이다. -《위서》(魏書) 두막루조

두막루의 언어는 부여 및 고구려 등의 언어와 동일한 예맥어였으나, 후기에는 주변 거란족과 교류가 늘어나면서 동호어가 혼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위서》(魏書) 실위전에 따르면, 실위(失韋)의 "언어는 고막해, 거란, 두막루와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전랑운(傳朗云)과 양양(楊楊)은 두막루의 언어가 예맥어와 동호어의 혼합이라고 하였는데, 두막루의 언어가 초기에는 부여어와 동일했으나 후기에는 거란어가 많이 유입되어 혼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傳朗云, 楊楊, 《東北民族史略》, 吉林人民出版社, 1933.

당시 발해는 무왕 대무예(大武藝)가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제1송화강 중류를 경계로 하여 흑수말갈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두막루는 발해와 흑수말갈의 대립 속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결국 나라를 빼앗겨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두막루가 있던 지역은 이후 발해의 전성기 때 철리부(鐵利府)와 회원부의 관할에 소속되어 발해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 156쪽.

위 인용문 내용도 참고해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48 (KST)답변

백산학회는 딱히 신뢰할 만한 단체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만. 과격한 민족주의 성향 아닌가요? 그리고 설령 두막루라는 나라가 한국사에서 인정이 된다 하더라도 중요한건 실존을 더욱 공고히 할 유물의 발견도 중요합니다. 지금 귀하가 발췌하신것은 사료도 사료지만 논문입니다. 논문이 권위있어도 모든 논문이 다 권위있는 것은 아니죠. 유물이나 유적을 별로 신경쓰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럼 공룡이나 몽촌토성, 풍납토성은 단순히 기록만으로 찾아낸 것인가요? 예, 잊혀져가는 역사를 발굴하시는 취지는 좋습니다, 허나 한국사 틀에서의 비중을 봤을 때 두막루는 동북아사에 큰 궤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조공을 했다 몇천리 떨어져 있다 등등의 사실만 쓰여져 있겠죠. 만약 귀하가 두막루를 틀에 집어넣으려 하신다면 우산국 같은 경우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산국에 대한 사서 기록도 적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유물로서, 그리고 당시 한국의 문화와 뿌리를 같이 하였다는 증거도 없는데 기록에 쓰여있다는 것만으로 넣을 수는 없지요. 역사를 찾아내려면 종합적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현재 두막루에 대해서 발굴을 시작하였다는 기록도 보지 못했을 뿐인데 왜 계속 이 나라의 실존에 대해서만 설명하시나요? 분명히 저는 실재는 인정한다 하였으나 과연 이것이 한국사 틀에 들어갈만한 비중을 묻는다면 단호히 No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01 (KST)답변
그러니까 이제는 윤성현 님이 생각을 바꾸신건가요?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시는건가요? 한국사의 일부는 맞지만 비중이 적다고 말 바꾸기를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제가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06 (KST)답변

동란국

이것은 중국사일뿐입니다. 거란이 세운 괴뢰 정부라면 이건 당나라가 고구려 멸망 뒤에 세운 안동도호부 마저도 우리 역사로 인정해야 할판입니다. 한국사에서 존재하였던 당당한 국가라고 할수 없기에 이 국가는 크게 논의할 만한 쟁점은 없겠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41 (KST)답변

동란국은 거란이 발해 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세운 괴뢰국가입니다. 마치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것과 같습니다. 동란국은 형식상으로는 수십년간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몇 년만 지배력을 유지했을 뿐 발해 유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서 결국 흐지부지되고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국가였습니다. 그에 따라 후발해, 정안국, 올야국 등 수많은 발해계 국가들이 발해 부흥을 내걸고 거란에 맞서 저항을 했습니다. 동란국을 한국사 틀에서 제거하자고 한다면, 일제강점기도 한국사 틀에서 제거해야 하는지 묻고 싶군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44 (KST)답변
그러니깐 그렇다면 당나라가 고구려 백성들을 지배할 목적으로 세운 안동도호부도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로 인정해야 한다니깐요? 그리고 일제강점기는 한반도가 통째로 넘어간 것이고 동란국은 발해가 멸망한 뒤 여러 나라로 쪼개진 다음에 생긴 나라 중 하나입니다. 괴뢰 정부를 언제부터 한국사에서 인정하였죠? 최소한 일제강점기는 괴뢰로 보진 않습니다. 일본이 직할로 통치하였으니깐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50 (KST)답변
한국사적 틀에서 안동도호부를 연구하는 논문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는 것은 '한국사'의 범주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틀:한국사'를 논의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너무 과히 생각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분리해서 보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4:55 (KST)답변
발해 유민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측면에서, 동란국 자체는 발해유민사의 일부로 한국사에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사라고 속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 보입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4:52 (KST)답변
왜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안동도호부를 한국사로 치던가요? 발해사는 발해의 흥망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유민들의 그 출신이 명확한 후발해나 정안국은 이해가 갑니다만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지 아들을 보내서 통치하고 또 말 그대로 괴뢰 정부입니다. 허수아비 정부를 왜 한국사에서 인정하느냐는 겁니다. 이거는 잘못하면 환단고기로 빠질수도 있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54 (KST)답변
환단고기는 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은 재야 사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두막루나 동란국에 대한 연구는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린 연구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므로, 환단고기류와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01 (KST)답변

발해사를 한국사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서울대학교 송기호가 내세운 바로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통일신라와의 관계, 고려에의 계승성을 통해서 확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한국사연구회 편, 2008, <<새로운 한국사길잡이 上>>, 지식산업사, pp.177에서 인용). 이 틀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동단국의 발해 계승성은 발해 왕족도 아닌 요 태조의 태자인 야율배가 동란 국왕으로 책봉되며 완전히 무너졌으며, 한반도 국가와 어떠한 관계와 계승성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경우, 그 자체로 일본 내지와는 별개로 구성되어 일본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된 통치조직이었으나, 동란국의 경우 거란 권력 중추에 완전히 속한 통치조직이었기 때문에 같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4:44 (KST)답변

동란국도 형식적으로는 거란국과 완전히 별개의 독자적인 국가였습니다. 일제가 설치한 조선총독부는 별개의 국가를 표방하지 않고 단지 조선을 지배하는 총독을 따로 두었을 뿐이지만, 동란국은 형식적으로 거란국과 전혀 별개의 국가였습니다. 물론 내용상으로는 동란국은 거란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48 (KST)답변
논문을 확인하셨다니 아시겠지만, 동란은 거란연합국을 위한 예비단계로서 설치된 국가로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거란국과 완전히 별개인 독자적 국가라 하지만 이전 국가와의 계승관계를 볼 때, 단절적으로 보아야하는 요소가 다분합니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총독은 일련의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두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르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5:13 (KST)답변
중국의 원나라는 지배층이 몽골족이었으나 현재 중국인들이 원나라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청나라 역시 지배층이 만주족이었으나 중국사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지배자는 일본 조선총독부였으나 한국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란국 역시 그다지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영토와 백성이 모두 발해인이었으니까 발해의 역사에 한 줄 추가해 준 것뿐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58 (KST)답변
비중이 컸으니깐요. 중국의 원나라는 이민족 출신 최초의 통일 왕조라는 점도 있습니다. 당당히 원나라 시대로 불리지요. 헌데 현재 학계에서는 동란국을 그렇게 쳐주나요? 사분오열된 옛 발해의 찢어진 나라 중 하나인데 그것을 넣어줄만큼 당시 정세나 사세(史勢)에 큰 비중을 차지했냐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사 틀에 올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03 (KST)답변
물론 동란국이 발해의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임은 인정합니다(한국사 틀과는 분리되어서요). 중국의 역사를 예로 드셨는데, 아시다시피 몽골족의 일부(내몽골), 만주족 모두 현재는 중국인을 구성하는 일부입니다. 당연히 중국사로 포함시키는 것이 맞지요. 하지만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역사는 일본의 일본사 A, B 교과서 모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로서가 아니라, 그 나라를 이끌어가는 주 동력을 생각하면 '틀:한국사'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사실 끝나기 어려운 토론인 듯 합니다만, 어쨌든 두막루와는 다르게 동란국의 경우 속지, 속민의 두 원칙에서 모두 어긋나며, 발해유민사와 한국사는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고 생각되어 저는 동란국을 틀에서는 제거했으면 합니다.(잘못 올라가서 수정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6:07 (KST)답변

동란국에 대해서도 윤성현 님이 입장을 바꾸신건가요? 원래는 동란국에 대해 중국사의 일부이지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글을 읽어보니, 동란국을 한국사의 일부로 보더라고 그 비중이 작기 때문에 한국사 틀에 수록될 가치가 없다고 말을 바꾸신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08 (KST)답변
아니요, 설령 한국사로 뒤집어보아도 비중이 티끌만하기에 집어넣을 만한 이유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45 (KST)답변

틀 분리는 어떨까요?

만주 지역의 역사를 따로 다를 틀을 만드는건 어떨까요? 만주 지역에 흥망한 여러 나라들(고조선에서 만주국까지)을 민족을 망라해서 다루는겁니다. en:Template:History of Manchuriaja:Template:満州の歴史 처럼요. -- ChongDae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02 (KST)답변

그것은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만주 지역이 워낙 흥망성쇄가 심했던 지역이니 만큼 만주의 역사 틀을 새로이 생성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한국사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으니 더 나은 선택 같군요. 민족이나 나라에 구애받지 않구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04 (KST)답변
물론 동란국이 발해의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임은 인정합니다(한국사 틀과는 분리되어서요). 중국의 역사를 예로 드셨는데, 아시다시피 몽골족의 일부(내몽골), 만주족 모두 현재는 중국인을 구성하는 일부입니다. 당연히 중국사로 포함시키는 것이 맞지요. 하지만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역사는 일본의 일본사 A, B 교과서 모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로서가 아니라, 그 나라를 이끌어가는 주 동력을 생각하면 '틀:한국사'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사실 끝나기 어려운 토론인 듯 합니다만, 어쨌든 두막루와는 다르게 동란국의 경우 속지, 속민의 두 원칙에서 모두 어긋나며, 발해유민사와 한국사는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고 생각되어 저는 동란국을 틀에서는 제거했으면 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6:07 (KST)답변
동란국이라면 이미 그 윗전인 요나라가 틀:만주의 역사에서 설명될 터인데 틀에서 필요가 없겠죠. 두막루는 넣어도 괜찮겠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08 (KST)답변
다시 말씀 드리지만, 동란국은 일제강점기와 동일하다고 봅니다. 비록 세세한 차이점을 열거하라면 수도 없이 많겠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식민 지배 기구였습니다. 그 백성이 그 지역이 전부 발해였는데, 게다가 동란국 고위 관료 중 상당히 많은 숫자가 거란인이 아니라 발해인이었습니다. 숫자만 따지면 동란국의 관료들 중에서 거란인보다 발해인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전부 발해인들이었구요. 그런 나라를 한국사에서 제외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12 (KST)답변
일제강점기랑 무엇이 동일하나요? 식민 통치기구로서 일제치하 조선인들처럼 강력한 항일운동도 없었고 사서에서도 별다른 비중이 없었습니다. 발해 틀을 새로 만드시던지 하십시오. 한국사의 큰 궤적을 살피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42 (KST)답변
동란국의 지배에 대한 발해인들의 강력한 저항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결국 동란국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거란국 본국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일제하 독립운동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발해 유민들이 동란국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중 열만화, 오현명 등이 거란국에 대항해 정안국을 세워서 2대왕 48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때도 형식적으로는 동란국이 존재했으므로, 동란국과 정안국이 상당 기간 병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서에서 비중이 없었다고 하는데, 제가 읽은 학계 논문에서는 동란국이 발해사의 일부로서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14 (KST)답변
틀분리가 아니라 틀 생성을 고려해야 할 부분인것 같군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6:13 (KST)답변
만주 지역의 틀을 새로 생성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국사 틀에서 만주 지역과 관련된 나라들을 제외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도사관이 아니라면, 만주 지역을 고대 한국사에서 제외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15 (KST)답변

한국사 틀 내에 포함되어야 하는 여러 나라들에 대한 논란

아사달님, 일단 두막루에 대한 의견은 상호 이견이 없기에 저는 일단 동란국에 한정하여 적었습니다. 추가로, 한국사-틀의 최근 수정목록을 보니 대부분 아사달님의 기여입니다. 그런데 바로 위 '틀분리' 부분 논의에서대로라면 한사군 또한 아사달님의 논리대로라면 한국사-틀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포함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6:21 (KST)답변

한사군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통일된 의견이 없습니다. 다수설, 소수설, 정설, 통설 등 아주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학계에서 아직 통일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 일개 위키 사용자에 불과한 제가 한국사 틀에 넣자, 빼자고 제안하기가 쉽지 않군요. 하지만 두막루와 동란국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그다지 반대 의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막루와 동란국을 한국사 틀에 추가한 것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18 (KST)답변

문서 보호

반복적으로 편집 분쟁이 발생한다고 판단되어 일단 문서 보호를 하였습니다. 기존 틀이 무기한 준보호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호 기한을 따로 둘 수가 없어(기간을 두면 기간 만료 후 자동으로 준보호도 함께 해제됩니다.) 무기한으로 보호하였습니다. 분쟁 내용에 대해 토론이 마무리 되면 위키백과:문서 관리 요청에 보호 해제 및 준보호 요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분쟁 내용과 상관 없는 내용 편집, 혹은 합의된 일부 분쟁 내용 편집 등은 {{보호 문서 편집 요청}} 틀을 사용하여 편집 요청해주시면 됩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25 (KST)답변

원래 상태대로 복원한 후에 보호를 하셔야 합니다. 새로운 사용자가 와서 문서를 변경한 (제 생각에는 문서를 훼손한) 내용으로 보호를 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문서가 원래 있던 상태 그대로 보호를 하셔야 합니다. 이미 예전에 한 차례 토론이 있었고, 총의가 모아져서 이 상태의 한국사 틀이 유지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편집 분쟁을 일으킨 후, 원래 상태가 아니라 자기가 변경한 상태로 문서를 보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원래 상태대로 보호를 해 놓고 나서, 토론을 해야 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29 (KST)답변
일단 분쟁 사실을 확인하는대로 문서 보호를 하였습니다. 해당 분야에 대해 잘 몰라 어떤 상태로 보호해야하는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토론을 통해 총의가 모아졌다고 하시는데 해당 분야에 대해 잘 모르고 토론에 참여하지 않은 사용자로서는 딱히 이 토론 문서를 봐도 직접적으로 한국사 틀에 아사달 님이 주장하는대로 편집하자는 토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위키백과의 모든 토론을 주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토론이 어떻게 되었는지와 어떤 상태가 보호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 문서 보호가 이뤄진 판은 그것이 옳음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서 보호한 판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일반적으로 분쟁이 일어나면 분쟁이 일어나기 전 혹은 분쟁이 전혀 없었던 분쟁과 무관한 판으로 일시적으로 되돌리는 것이 관례입니다.(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 막 확인해보려던 참이었고요.) -- Min'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34 (KST)답변
제가 마지막으로 되돌렸던 판이 분쟁이 없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판입니다. 윤성현 님이 오늘 와서 문서를 수정했고, 제가 되돌리기를 해서 편집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편집 분쟁이 발생하기 전 원래 상태로 되돌려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39 (KST)답변
편집 분쟁 내용은 '두막루'와 '동란국'을 틀에 추가할지/말지에 대한 분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전에 토론이 있었다는 것은 토론:두막루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이 토론이 한국사 틀에 '두막루'를 추가하자는 것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중간에 다른 사용자들의 의견이 인용고, 토론이 길고 장황해지는 바람에 해당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사용자와 해당 토론을 주시하지 않은 사용자로서는 이 토론이 한국사 틀 추가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46 (KST)답변
토론:두막루를 읽어봤는데 해당 내용은 한국의 옛 나라인가 아닌가에 대한 여부를 토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해당 토론에서는 이를 인정하는 식으로 총의가 결정된 걸로 확인이 됩니다. 여기 나온 총의를 근거로 아사달 님께서는 한국사 틀에 해당 나라를 넣기를 원하는 걸로 앎니다.--어쏭(우리 소통합시다.) "희망을 드립니다." 2012년 7월 9일 (월) 14:52 (KST)답변
일반적으로 나라 역사 틀에는 그 나라 역사에 있었던 모든 나라나 역사적 사건을 싣는 것이 아니라, 주요 나라와 중요 사건만을 싣어 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산국과 같이 한국의 역사라고 생각되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한국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추가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당 토론은 한국 역사의 일부인지/아닌지에 대한 토론인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한국사 틀 추가와 어떠한 관련이 있으며, 한국사 틀 추가와 관련되어서는 어떠한 결론이 났다는 말씀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00 (KST)답변
보면은 아사달님 본인만이 실제로 장황하게 설명을 하셨고 정작 참여한 사람은 별로 없네요. 여러 사람들의 닉네임이 보이는건 그저 인용문이구요. 즉 총의로 속단할 수도 없죠.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56 (KST)답변
윤성현님의 역사에 대한 넓은 지식과 그를 통한 이해 틀에는 찬탄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단지 비난을 위한 비판밖에 되지 않습니다. 두막루가 왜 한국사 틀에서 제거되야 하는지에 대해서 총의가 아니라 하여 반대의견을 내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우선 아사달님의 의견에 반박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것은 그 의견에 이의가 없다는 뜻으로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5:03 (KST)답변
총의가 결과적으로는 없었으니까 드리는 말입니다. 저 토론에서 언제 어디에서 총의를 물었나요? 보면은 아사달님이 두막루의 실존에 대해서만 설명한 것말고는 아무것도 결론이 난 것이 없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06 (KST)답변
그리고 검색 엔진을 통하여 찾고는 있습니다만 상당수 웹페이지에서 인용한 부분이 환단고기도 같이 다루는지라 신뢰할 만한게 딱히 보이질 않군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09 (KST)답변
윤성현님이 사학과 지망이라는 부분은 어디선가 검색엔진에서 본 듯 합니다. 하지만 아사달님과 제가 보고있는 부분은 한국사와 관련한 여러 권위있는 통사서들, 그리고 논문들을 중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 또한 상당수 웹페이지를 일괄적으로 신뢰하고 있지는 않고요, 기존까지 위에서 논의가 된 부분은 국회도서관 논문검색이나 Riss.kr에서 검색을 통해서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5:17 (KST)답변
현재 친 환단고기 웹페이지는 모두 빼야 합니다. 보아하니 두막루를 어디서 들었는지 당당하게 잊혀진 한국사 이러면서 마고할미, 환인 등등도 나오는데 이러면 상당히 골치 아픈 웹페이지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논문의 제목만 보고 논문의 모든 것을 알순 없죠. 구매를 해야되니.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5:23 (KST)답변
원하신다면 지금 제 학교 아이디와 비밀번호 알려드리고 교외접속하여 직접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그게 안된다면 해당 논문들을 모두 메일로 보내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5:25 (KST)답변
수고해주신다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허나 백산학회 부분은 제가 상술하였듯 극단적인 민족사를 연구하는 곳이고 환단고기에 호의적인지라 딱히 신뢰가 가지 않으니 백산학보를 제외한 논문은 보내만 주시면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잘 시간이기도 하니깐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07 (KST)답변
환단고기가 호의적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이 토론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환단고기는 학계에서 위서로 보고 인정하지 않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 책 한 권 때문에, 정식 역사학계 교수와 학자들이 쓴 논문까지 싸잡아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22 (KST)답변
추가로, 윤성현님 논리대로라면 일제시기 만들어진 진단학회, 역사학회 등은 모두 인정할 수 없으며, 오히려 환단고기를 옹호하는 쪽에서 주장하듯 그 제자들까지 문제가 되면서 식민사학자들에게 배웠던 사람들이 주축으로 만들어진 국편위마저 신뢰성을 잃습니다. 또한, 백산학회 논문이 극단적 민족사를 추구한다 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해당 논문이 폄하되는 것은 수긍할 수 없습니다. (저는 뉴라이트를 좋아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만,) 분명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올라간 논문중에서도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수긍할만한 논문들이 많고, 현재 그것이 학계에 수용된 부분을 생각한다면 편파적이다 못해 본인의 틀을 너무 고립적으로 세우고 계시다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군요. 아사달님이 말씀하신 논문은 제가 학교에서 찾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윤성현님께 보낼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6:34 (KST)답변
설령 읽는다 하더라도 저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보내신다 하더라도 그 논문은 안 봅니다. 더군다나 뉴라이트요? 뉴라이트는 정치적 사상이 버젓이 깔려있죠. 일제강점기가 축복이었다 하는 뻘글들이 많은데 그것도 역사의 새로운 관점이라 할순 없죠. 그런건 중립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7:06 (KST)답변
뉴라이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환단고기도 아무런 상관이 없구요. 두막루와 동란국에 대한 토론은 대한민국 역사학계 교수들과 연구자들, 동북아역사재단 등 권위 있는 학술 연구 기관에서 나온 연구 논문과 단행본 서적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뉴라이트나 환단고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25 (KST)답변
아니오. 이 모든 것은 윗 사용자가 논란이 된 부분을 넣은 것이니 당연히 현재판으로 두는게 맞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4:33 (KST)답변
원래 있던 한국사 틀에 대해서 조금 전 윤성현 님이 수정을 시도하셔셔 제가 원래 상태로 되돌린 것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4:45 (KST)답변

이 문서의 역사를 확인해보니 이 문서는 수개월 전부터 간헐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되돌림이 반복되어 왔음을 확인했습니다. 한국사 틀에 '두막루'와 '동란국'을 추가할지 여부에 대한 분쟁인데, 아래와 같은 이유로 문서 보호 판을 유지함을 밝힙니다.

  • 수개월 전부터 비슷한 사항에 대해 되돌림이 간헐적으로 반복되어 어떤 상태가 분쟁 없는 상태 혹은 분쟁 없이 유지된 상태라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한국사 틀에 추가하는 것은 당연히 그 대상이 한국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하지만, 그 외에도 나라 역사 틀에서 다뤄질 정도로 그 나라에서 주요한 역사의 일부분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되어야 하는데, 한국사 틀에 다수의 사용자가 추가하기로 했다는 토론:두막루의 토론은 한국의 역사의 일부분인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일 뿐이기 때문에, 어떤 판으로 임시로 유지해야할지에 대해서는 그 토론을 근거로 삼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 한국 역사의 일부분이 아니라면 당연히 한국사 틀에 포함되지 않겠지만, 한국 역사의 일부분이 아니더라도 한국사 틀에 추가될 수도, 추가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한국의 역사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부터 의견이 충돌되는 만큼 일단 양측의 의견(한국사 일부 여부)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추가되지 않는 판으로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 아울러 편집자 간 추가해야할지 말지에 대한 편집 분쟁이 있는 상태에서는, 독자 입장에서 그러한 분쟁 내용에 대해 없는 상태에서 유지한 다음, 토론 결과에 따라 반영하는 것이 덜 혼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측 사용자의 의견이 팽팽한 상태에서 어떤 특정 사용자 측의 의견대로 임시적으로 유지시킬 판을 결정하기가 관리자 입장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편집 분쟁 사항과 과거 역사들을 살펴보며 위와 같은 근거로 일단 임시적으로 현 상태를 유지해놓고자 합니다. 보호 문서에서 유지되는 판은 그 판이 옳음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며, 보호되는 판에는 어떠한 의미나 분쟁 내용에 대한 판정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호 상태에서 어떤 판으로 유지해야할지보다 분쟁 내용에 대한 토론이 우선적이라는 점을 생각해주시고, 토론을 통해 좋은 결론에 도달하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이러한 판단에 대해 이의가 있다면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서의 관례와 같이, 분쟁 내용과 무관한 오래 전의 과거 판으로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10 (KST)답변

Min's 님, 그렇지 않습니다. 두막루를 넣어둔 한국사 틀이 아주 오래된 틀입니다. 그걸 되돌렸던 적이 한두 번 있었으나, 모두 일회성, 일시적 되돌림이었습니다. 또한 밑에 윤성현 님 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두막루를 한국사 틀에 넣는 것에 동의하는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동란국은 아직 논쟁 중입니다. 우선 원래 문서로 되돌려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16 (KST)답변

동란국이라면 이미 그 윗전인 요나라가 틀:만주의 역사에서 설명될 터인데 틀에서 필요가 없겠죠. 두막루는 넣어도 괜찮겠습니다. -- 윤성현 論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08 (KST)

평소에 인용문을 많이 사용하시는 것 같은데 인용문을 적게 사용해주신다면 아사달 님의 의견을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해질 것 같습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두막루'가 간헐적으로 추가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2월이었고 그 이전까지는 계속 추가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근거를 추가되지 않은 상태가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는 것'만'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일부 내용에 대해 토론을 통해 합의가 되었다고 판단되신다면 {{보호 문서 편집 요청}} 틀을 사용해 해당 부분에 대해서만 편집 요청해주시면 됩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21 (KST)답변
이번 일은 윤성현 님의 오해로 발생한 일입니다. 다시 원래 상태대로 되돌려 주세요. 이번에는 예전 토론보다 더 깊이가 얕은 편이군요.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알겠습니다. 원래 상태로 되돌려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24 (KST)답변
(편집 충돌) 혹시 아사달 님께서는 보호된 문서의 판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시나요? 말씀하신 것처럼 윤성현 님이 오해를 하셔서 생긴 일이라면, 오해를 설명하시고 토론하신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용자가 오해를 했는지 여부는 관리자가 판단하지 않으며, 오해 여부를 판단한다한들 어떤 판으로 유지시킬지 근거로 삼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상태'라는 것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예와 같이 과거 오래전 분쟁과 무관한 판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아사달 님이 주장하시는 편집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36 (KST)답변
아사달님, 일단 소모적 논쟁의 와중에서 두막루가 아니라 동란국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성현님의 오해'와 달리, 비록 힘드시겠지만 동란국에 대해서는 원상복귀할 것은 아직 이르며, 논의는 진행중이라고 생각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6:27 (KST)답변
그럼 일단 두막루가 있었던 원래 상태로 복원해 주세요. 그 뒤에 동란국을 뺄지 말지에 대해서 다시 토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29 (KST)답변

오해는 아사달님이 하신것 같군요. 무슨 오해요? 제가 왜 틀:만주의 역사 문단에다 글을 썼을까요? 한국사로서 100% 정해진 것이 없으니 새로 생성될 틀에다가 두막루 추가를 찬성하지 한국사 틀에다 추가하자는 의견은 금시초문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40 (KST)답변

저의 문서편집간에 벌어진 충돌로 일어난 오해입니다. 확인 하실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두 분 다 이해 바랍니다. 어쨌든 한국사 틀에서 논의는 지속될 듯 하군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6:46 (KST)답변
두막루에 대해서 한국사로서 100% 정해진 것이 없다는 윤성현 님의 글은 사실과 다릅니다. 아래 토론에도 나오듯이,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서 100%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역사학계의 통일된 견해입니다. 반대 의견이나 소수 의견이 없습니다. 따라서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몇 달 전 토론:두막루 페이지에서도 동일한 결론이 난 상태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30 (KST)답변

한국 고대사 교과서 수정 및 내용수용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년 2월 23일 2007학년도 고교 역사교과서의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단원을 수정한 개정 교과서를 신학기부터 보급키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바뀌는 부분은 기존 교과서 27쪽의 ‘신석기 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는 문장입니다.

개정 교과서에는 ‘신석기 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녕(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돼 있습니다.

교육부 구난희 연구관은 “최근 2~3년 사이 정선, 춘천 등에서 청동기 초기 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쯤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발굴되고 있어 우리 청동기 시대도 연대를 올려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이 있었다”고 교과서 개정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구연구관은 또 “그동안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고조선 건국시기(기원전 2333년)와 청동기 도입 시기가 맞지 않아 애매한 점이 많았는데 이 부분도 납득할 수 있도록 교과서를 고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개정 교과서는 특히 고조선 건국과 관련,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부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좀더 명시적인 표현으로 수정했습니다.

‘고조선 건국’은 이제 고교 역사교과서의 수정으로 한국사의 공식역사가 되는 첫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위키백과 편집에도 많은 변화가 요구됩니다.

Lexu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5:44 (KST)답변

편집 요청

{{보호 편집 요청}} 이번 일은 원래 있던 한국사 틀에 대해 윤성현 님이 오해하면서 발생한 일입니다. 토론을 통해 본인도 두막루를 한국사 틀에 추가하는데 동의하였으므로, 다시 원래 상태대로 되돌려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27 (KST)답변

이 무슨 말씀이신지? 문맥을 살펴보시면은 틀:만주의 역사에선 두막루를 넣어도 괜찮다는 뜻이지 한국사 틀에 추가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6:39 (KST)답변

미완료 아직 분쟁 내용에 대한 토론이 완료되지 않았고, 어떻게 편집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합의가 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 요청을 처리하지 않겠습니다. 충분한 토론을 통해 의견을 교환한 후, 사용자 간 합의를 통해 편집 요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41 (KST)답변

알겠습니다. 그럼 더 토론을 해 보죠.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42 (KST)답변

두막루 2차 토론

위에서 논의가 정리된 것으로 알았는데, 아니라고 하니, 다시 2차 토론을 이곳에서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45 (KST)답변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의 옛 나라입니다. 두막루는 한국사의 일부입니다. 이 주장은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의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린 여러 편의 논문을 참고로 한 의견입니다. 원래 두막루가 위키백과의 한국사 틀에 추가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제거하는 것은 타당한 근거가 없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47 (KST)답변

아사달님의 기여는 이 틀을 만드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토론을 여기서 다시 진행하는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두막루가 포함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한국사-틀'에 들어갈 수 있는 국가들, 그리고 그 원칙 및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명확화가 선행되어야할 듯 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6:49 (KST)답변

두막루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국사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 첫째, 두막루를 건국한 주체들이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라고 자처하였다. - 위서 두막루조
  • 둘째, 두막루의 각종 풍습과 생활 습관, 의복 등이 부여의 것과 거의 동일하였다. - 위서 두막루조
  • 셋째, 두막루의 지리적 위치가 예전 북부여의 땅이었다. - 신당서 유귀전
  • 넷째, 두막루의 민족과 언어가 부여와 동일했다. - 위서 두막루조, 위서 실위전, 중국 학자 전랑운과 양양
  • 다섯째, 두막루가 멸망한 후 그 땅은 발해로 계승되었다.

이 내용은 1차 자료에 나올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학계의 연구 논문(즉, 2차 자료)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
  •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중국 현대 학자들의 연구 논문도 있습니다.

  • 孫進己 저, 임동석 역, 《동북민족원류》, 1992.
  • 干志耿, 〈古代槀離硏究〉, 《民族硏究》 第2期, 1984.

반면 두막루가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한 연구 논문이나 주장은 아직까지 단 한 편도 제시되지 않았다.
이상의 이유로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6:55 (KST)답변

백산학보는 신뢰할 수 없는 논문이라고 상기 서술하였으며 또한 두막루가 실재했냐를 전제 하에 한국사 틀에 들어갈만한 비중, 그에 대한 영향력으로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특히나 아직까지 베일에 쌓여져있고 정치구조, 형법, 유적, 유물 등등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마당에 성급하게 한국사 틀로는 넣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동란국은 중국사로 생각하지만, 두막루에 대해선 이에 대해 이의가 없었음을 밝힙니다. 즉, 중국사로 생각하진 않았다는 것이죠.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7:02 (KST)답변
아사달님, 지금 논의가 지속되면서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엉킨것 같은데요. 어쨌든 여기는 '한국사-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한 곳이지 '한국사'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한 곳은 아닙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7:04 (KST)답변
따라서 제가 위에서 '한국사-틀'에 대한 성격규명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말씀드렸고요, 두막루의 한국사로서의 성격은 다 공감하고 있습니다. 현재 논의는 1. 한국사-틀에 두막루를 포함시킬 것인가, 2. 한국사-틀에 동란국을 포함시켜야 하는가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다만 동란국의 경우 이견이 있기 때문에 우선은 두막루부터 논의하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하군요. 아까처럼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기는 너무 힘듭니다. ㅠㅠ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7:07 (KST)답변
동란국 자체를 한국사 틀에다 넣어야 할 이유는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비중도 없고, 상기 아사달님의 주장에 따라 동란국이 발해의 정통을 이었다고 자칭하지도 않았는데 왜 넣어야 하는것이죠? 일제강점기랑은 다른 점이 많다고 분명히 말씀드렸고 중국왕조 요나라의 위성국을 한국사에 편입시키는거는 중국이 고구려나 발해를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7:10 (KST)답변
동란국만 놓고 보면 아사달님이 개인적으로 구축해 두신 한국사의 이해범주 틀에 해당해서 그러시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각됩니다. 학계 주장을 계속 이야기 하시지만 그렇게 놓고 보면 한사군을 한국사-틀에 두어야 하는 부분, 그리고 한국사-틀 내에 부여의 시작을 고조선 중간지점에 위치시켜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전되야 합니다(이건 물론 제발 반영되었으면 좋겠군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9일 (월) 17:27 (KST)답변
동란국은 발해 지역에 설치된 거란국의 통치기구입니다. 그 백성과 영토와 문화가 모두 발해의 것과 동일했습니다. 비록 발해가 거란에 패해서 나라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다시 강력히 항거하여 동란국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발해 유민들이 독립 국가를 여러 개 수립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 중 정안국이 가장 유명하고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마치 일제하 상해 임시정부, 만주 항일 독립 운동 단체 등이 일본에 대항해 독립 운동을 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비록 조선을 일본이 점령하고 조선총독부를 세웠으나, 그 시기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듯이, 동란국에 짓밟힌 발해 유민들의 저항 운동을 한국사의 일부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38 (KST)답변
한국사의 일부로 보는 것과 한국사-틀에 두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한국사에서 의의를 논하고자 할 때 동란국-후발해-정안국-흥료국-대발해국이라는, 발해 이후 발해의 고토에 건국된 나라들 중 동란국을 다른 넷만큼 중요하게 논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4:45 (KST)답변

두막루에 대한 몇 가지 반론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의견에 대한 반론입니다.

  1. 동부여를 계승한 나라는 갈사부여인데, 두막루를 추가하는 것은 정통성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입니다. 갈사부여는 서기 22년~68년까지 3대 왕에 걸쳐 46년간 존재했던 나라이고, 두막루는 서기 410년 부여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점령된 시점 이후에 그 유민들 중 일부가 부여를 탈출하여 나하를 건너 건국한 국가이므로, 서로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통성 운운하는 것은 이 논의와 무관합니다.
  2. 두막루 인물 중 사서에 나오는 사람도 없는데 한국인으로 혈통이 계승되었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서기 724년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에 달말루(=두막루)의 대수령 낙개제(諾皆諸)가 와서 당나라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에 나옵니다.
  3. 두막루의 낙개제라는 사람의 성씨가 '낙'씨 인데, 중국 성씨가 아니냐고 질문하신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낙'씨는 부여 관련 인물들 성씨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서기 22년 고구려 대무신왕 5년에 갈사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사람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자, 고구려 대무신왕이 그에게 락씨(絡氏)라는 성을 하사했습니다. 비록 한자 표기는 '諾'과 '絡'으로 서로 다르지만, 발음은 '낙'과 '락'으로 매우 유사합니다. 부여의 원래 성씨 중에 '낙'씨가 있었는데, 그것을 한자로 음을 차용하여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설령 아니라고 할지라도, 낙씨 또는 락씨가 현대 한국인 성씨 중에 없다고 하여 무조건 중국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4. 두막루에 대한 고고학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고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조선 유물도 몇 점 없고, 부여, 동예, 옥저 등의 유물도 거의 없지만, 우리가 그 나라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5. 만주 북부 지방에 여러 민족이 섞여서 살았는데 어떻게 두막루를 한국계 나라로 판단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고구려도 다민족국가였고, 발해도 다민족국가였지만, 그것을 이유로 한국사에서 제외하지는 않습니다. 두막루의 건국 주체가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계라고 말했고, 기록에 나타난 두막루의 풍습과 지역 언어 의복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부여와 매우 유사하므로, 두막루를 부여계 국가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6. 두막루에 대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환단고기, 마고할멈 등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이 나온다고 지적하신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두막루 문서의 주된 기여자인 제가 그 문서를 쓸 때는, 환단고기나 기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어떤 글도 참고하지 않고, 오직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권위 있는 학술 연구 논문만을 읽고 정리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환단고기 등은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두막루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동일선상에서 비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7. 백산학회 등에서 발행한 논문이 편향되어 있으므로 읽지도 않겠다고 하신 것에 대한 의견입니다. 백산학회는 서울대학교 교수 등 학계의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단체로서 수십년 이상 지속된 오랜 전통과 권위를 가진 학회로 알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등이 1980년대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훨씬 전부터 존재하던 학회입니다. 이 학회에 대해서 일부 연구자들이 환단고기 등에 대해 우호적으로 본다는 이유만으로 이 학회 자체를 동등한 시각(사이비, 재야사학자 등)으로 보는 것은 매우 편향적인 생각입니다. 이 학회는 역사학계의 교수와 연구자들로 구성된 학회이지, 재야사학자들끼리 모인 단체가 아닙니다.
  8. 설령 백산학회에서 나온 논문을 제외하더라도 '국사논총' 등 다른 학술지에 실린 여러 편의 논문이 제시되어 있으므로, 특정 단체 하나만 문제 삼는 것은 근거가 희박합니다. 게다가 두막루를 한국사로 보는 이론에 대한 반대 이론이나 학설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상 두막루에 대해서 위에서 어지럽게 논의된 쟁점에 대해서 1차로 해명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7:40 (KST)답변

대단히 성급하시네요. 그렇다고 고조선처럼 8조법이 나왔나요 아니면 그당시 생활풍습 같은게 전해지나요? 한국사라는 범주 안에 확실히 들만한 유물이나 유적도 아직 없이 일단 한국사로 집어넣자는건 아전인수아닌가요? 밑의 동란국도 거란족인 요나라가 세운 그것도 괴뢰정부를 무엇하러 인정해주는 지도 이해가 안가네요. 두막루는 아직은 모르겠지만 동란국만큼은 비중이 아예 없는데 무엇하러 한국사 틀에 계속해서 추가시키려는 겁니까. 그냥 물타기인것 같네요. 그렇다고 해서 독도나 울릉도인 우산국이 한국사의 일부분이었는데 반해 왜 추가되지 않았을까요? 우산국이 한국사에 들어가는건 다알지만 비중이 적었습니다. 이사부가 정벌한 것을 끝으로 기록은 끝입니다. 더구다나 우산국에 대해서 문화같은게 전해지지 않은 것도 그러했죠. 그런데 귀하는 단지 기록상을 근거로 모든걸 결정지으려 하고있습니다. 특히나 고대사 같은 경우에는 한 유적, 한 유물이 매우 중요한데 이러한 일체 조건을 무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아직' 못 찾았으니 한국사의 개괄적인 범주를 다루는 한국사 틀에도 넣기 '아직' 이르다는 겁니다. 그리고 동란국에 대해서는 저는 논할 이유도 없으니 동란국에 대한 토론은 앞으로 하지 않겠습니다. 대표적인 유민 국가 후발해와 정안국이 들어갔는데, 더구다나 동란국은 정통도 아닌데 넣어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부끄러운 역사 운운할 만한 가치조차도 없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8:18 (KST)답변
그래서 한국사로 완전히 단정짓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니까 이에 대해서는 틀:만주의 역사를 새로 만들자는데 이에 대해서도 반응은 냉소적이신듯 한데 다문화 국가가 흥망성쇄하였던 만주를 보자면 이에 알맞는 틀도 없습니다. 그리고 뒤져보니 웹페이지에서 환단고기 내용이 뒤섞일수도 있다는 거는 또 무엇이 어떤가요? 학술 연구 논문이 어쨌거나 저는 한국에 살고있지도 않은지라 한국 내에 논문이 어떤지 구매하는 방법도 모르고 단지 제목만 보고 캐치할 뿐입니다. 또한 낙(駱)씨 자체는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가 대다수이니 한국인이 아닐수도 있지요. 물론 제가 중국인이 확실히 맞다고 한적도 없지요. 그렇다고 한국인, 부여인이라 단정하는 것은 비약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9일 (월) 18:23 (KST)답변
틀:만주의 역사를 새로 만들자는 제안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만주의 역사 틀을 새로 만든다고 하여, 만주 지역에 있었던 여러 한국계 국가를 한국사 틀에서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두막루 등 전부 만주 지역에 있던 국가들인데, 이 국가들을 한국사 틀에서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47 (KST)답변
낙씨는 두막루의 낙개제와 갈사부여의 사촌동생 "낙OO"의 두 명을 예시로 들었는데요. 두 명 모두 한국계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부여인이 맞습니다. 비약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오늘날 현대 한국인 중에 '낙'씨가 없다고 하여, 부여의 '낙'씨를 중국인으로 추측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백제의 대성팔족 중 오늘날 한국에 전해지는 성씨는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백제의 대성팔족을 중국인으로 추측하지는 않으니까요. 마찬가지 이유로 '낙'씨도 부여(및 두막루)의 성씨가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47 (KST)답변
낙개제라는 사람이 두막루의 사신으로 당나라에 와서 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낙개제라는 사람은 두막루 사람이 맞다고 봐야 합니다. 두막루를 대표하는 사신을 중국 사람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즉, 낙개제는 두막루의 대수령으로서 두막루 사람이 맞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두막루 사람이 한국 사람인가? 두막루 사람은 부여 사람이고, 부여 사람은 한국 사람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도 부여에서 나왔고, 백제도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두막루=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부여를 한국사에 포함시킨다면, 두막루도 한국사에 포함해야 합니다. 부여 사람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서 한국 사람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신다면, 두막루 사람도 한국 사람으로 그 혈통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두막루 땅은 발해에 흡수되었으니, 발해 사람=한국 사람으로 본다면, 두막루 사람=한국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9:53 (KST)답변
그리고 두막루의 풍습에 대해서는 중국 측 사서에 잘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도 두막루의 풍습에 대해서 잘 나오는군요. 두막루의 풍습은 부여와 매우 비슷하다고 나옵니다. 특히 그 군장(=정치적 지배자)들은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마가, 우가, 저가 등 부여에서 가축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는 것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다만 두막루의 복식은 부여가 아니라 고구려와 유사했는데, 당시 고구려가 만주 지역의 강대국이었으므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이 되어 있군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9:58 (KST)답변
두막루가 한국사이냐 아니냐의 논의는 이곳이 아니라 토론:두막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0:48 (KST)답변
토론:두막루 페이지에서는 이미 두막루를 한국의 옛 나라로 보기로 결론이 난 상태입니다. 현재 아무런 반대 의견이 없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3:17 (KST)답변
틀토론:한국사는 두막루의 성격 논쟁을 위한 공간으로 적합하지 못합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00:16 (KST)답변
누가 인정했죠?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2:53 (KST)답변
아닐수도 있지요. 다문화 국가인데. 점점 대동아공영권스러운 주장을 하고 계시는데 삼가해주십시오. 말갈 사람이나 거란 사람도 두막루에 들어가면 다같은 한국인이 되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2:54 (KST)답변

동란국 2차 토론

동란국에 대해서도 한국사의 일부로 볼 것인지 여부가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2차 토론을 진행하면 좋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7:52 (KST)답변

'동란국'은 거란이 발해를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그 수도인 홀한성에 설치한 식민통치 기구이자, 거란국의 괴뢰국가입니다. 비록 그 지배층은 거란족이었으나, 대부분의 백성들과 그 영토는 발해의 땅이었으며, 발해 유민들의 끈질긴 저항과 거란의 내분으로 마침내 동란국이 거란국으로 쫓겨갔습니다. 동란국이 쫓겨난 발해 땅에는 후발해, 정안국, 올야국 등 여러 나라가 건국되어 발해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란국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혹은 몽골 지배기의 쌍성총관부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비록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동란국을 한국사에 추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7:55 (KST)답변

현행 고등학교 검정교과서 '한국사' 6종 교과서 중 발해의 부흥운동에 관련하여 설명하는 교과서는 (주)미래엔컬쳐그룹(구 대한교과서)의 36페이지 1권 외에는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발해 유민들은 약 200년간 적극적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후발해, 정안국, 대발해국 등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발해의 부흥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한국고중세사사전 '동란국' 항목에서는 '거란의 괴뢰국가'로 규정하였고 지배체제 중 핵심적 직위에는 전부 거란인이 임명되었으며 발해인은 한직으로 밀려났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동란국을 한국사로 포함시키기는 무리가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한국사-틀에도 포함시키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 원간섭기-쌍성총관부와의 비교는 한국사의 논의과정에서 하나의 예가 될 수는 있으나 아사달님 개인 생각의 역사틀을 확장시켰음이지 한국사-틀에서의 논의와는 비껴갔다고 생각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1:42 (KST)답변
덧붙입니다. 한국고중세사사전 127쪽 동단국 항목에서는 '동단국의 설립은 발해유민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원래부터 독자성이 없이 명목상 국가란 이름만 가지고 있던 거란의 괴뢰정권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편 국편위 한국사 10권 발해의 목차를 보면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1) 발해유민의 의미
(1) 발해유민과 발해유예
(2) 발해국 지배층의 성씨 분포와 그 유민
2) 전기 부흥운동 - 후발해와 정안국 -
3) 후기 부흥운동 - 흥료국과 대발해국 -
....
이상과 같습니다. 2) 전기 부흥운동의 해당 항목(85쪽)에도

'발해유민들의 자발적 운동 결과는 아니었지만, ~ 동란국이었다. 그러나 동란국은 거란 정복자들이 세운 괴뢰정권이었으므로 이를 발해 부흥운도의 일환으로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편 한길사 한국사 3권 272쪽에도

'발해 유민들의 자발적인 부흥왕조에 앞서 바해의 수도였던 홀한성에 거란이 세운 '동란국'에도 발해 유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거란이 발해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세운 괴뢰정권에 불과하였는데, 그 왕은 거란 야율아보기의 큰아들 야율배였으며, 그 밖의 고위직에 발해인들이 등용되었을 뿐이었다. 거란의 동란국 건설로 발해지역은 거란화 되었으나, 발해 유민의 거센 저항으로 얼마간 성공하지 못하였다.'

를 통해 볼 때, 동란국을 주체적 한국사로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발해유민사의 일부 혹은 북방침투왕조사의 일부에서 파악할 수 있겠지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4:38 (KST)답변

한국사 틀에 포함될 범주 결정

위의 토론을 읽다보니 토론의 초점이 어긋난 듯하여 글을 남깁니다. 우선 토론의 초점은 한국사 틀에 들어갈만한 가치가 있는 국가의 범주로 맞춰져서 그 범주를 결정하는 논의가 주가 되어야 합니다. 두막루와 정란국이 한국사냐 아니냐의 토론은 이곳이 아니라 각 문서의 토론 문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위에서 진행되는 토론들은 개인적으로 각 문서로 이동하든지 보존문서로 이동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저는 두막루와 정란국이 한국사 틀에 들어갈만큼 중요한 비중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시대별 연표에서도 전혀 검색이 되지 않는 나라들입니다. 아사달님께서 언급하신 몇몇 논문들이 있다고 하지만 학계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주류 학계의 입장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논문이 있다고 이를 국사편찬위원회나 일단의 학계의 전반적인 입장으로 해석하기도 어렵고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동등한 비중으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할만한 가치가 있을런지요? 이러한 위치에 있는지 의심스러운 국가를 한국사 틀에 포함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해당 국가들이 한국사 틀이 아닌 한국사의 범주에 들어가는지의 논의는 이 토론 문서에서는 지양해주십시오.)--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18:26 (KST)답변

(추가) 국사편찬위원회 고대사 연표를 검색해보니 ‘926년 음2월 거란, 발해를 동단국(東丹國)으로 바꿈.’이라는 한 줄뿐이군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18:47 (KST)답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검색창에 '두막루'라고 쳤더니,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풍습도 부여와 같다고 자세히 설명이 나오는군요. 두막루라는 나라에 대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부정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없습니다.

참고하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19:46 (KST)답변

아사달님께서는 제 의견을 잘못 읽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고대사 연표를 언급하며 두막루와 동란국의 역사적 비중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지금 이 토론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해당 국가를 인정하는지 부정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 틀에는 역사적으로 비중있게 언급할만한 것들을 추가하여야 한다고 보기때문입니다. 더불어서 아사달님께서 링크를 걸어주신 글을 읽어보더라도 부여만큼 큰 국가도 아닌 군장급의 소국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하니 한국사 틀에 삽입될 정도의 국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0:41 (KST)답변
한국사로 인정하느냐가 첫번째 쟁점입니다. 두번째는 한국사로 인정할 경우의 비중 문제입니다. 쟁점은 저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시는 듯 하니(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가 큰 도움이 되었군요. ^_^), 이제 두번째 문제로 토론 쟁점을 이동하고자 합니다. 두번째 토론을 하면서, 다시 첫번째 쟁점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0:54 (KST)답변
저는 한국사로 인정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바가 없습니다. 또한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 관한 토론은 이곳이 아닌 토론:두막루토론:정란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한국사 틀에 추가될 정도의 역사적 비중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만 논하고자 합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03 (KST)답변
죄송합니다만, 천리단주기 님이 정란국이라고 자꾸 쓰시는데, 정란국정안국을 말하나요, 아니면 동란국을 잘못 쓰신건가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09 (KST)답변
위에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란국의 오기입니다. 자꾸 편집충돌이 이루어져서 혼란스럽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13 (KST)답변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추가될만한 비중이 있는 국가인가 아닌가가 두번째 쟁점입니다. 두막루가 한국의 옛 나라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여러 소국들 중에서 하나이므로 비중이 작아서 추가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은 한국사 틀에 추가할만한 비중이 있는 국가라는 점입니다. 한국사 연표는 국가를 추가하는 연표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경우 칸이 남아서 중요한 사건도 몇 개 추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전 국가들은 단지 "국가명"만 추가되어 있습니다. 두막루는 북부여를 계승한 '국가'로서 서기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약 300년간 존재했던 국가입니다. 당연히 한국사 틀에 추가되어야 합니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국가인 동예옥저 등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후기의 국가입니다. 또한 태봉, 후백제 등 겨우 수십년간 존재했던 국가들과 달리 두막루는 300년간이나 지속된 국가입니다. 아시다시피 태봉은 18년, 후백제는 36년간 존재했던 단명 국가이지만 한국사 틀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태봉이나 후백제는 중국에 조공을 하거나 외교 정책을 펼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이 멸망했으나, 두막루는 낙개제 이외에도 여러 차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외교 행위를 한 기록이 중국 측 사서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추가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01 (KST)답변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추가되어야 할 또 다른 근거가 있습니다. 태봉이나 후백제고려 왕건에 의해 멸망하고 고려로 이어졌습니다. 역사적 계승성이 있습니다. 두막루는 발해로 이어졌습니다. 두막루국은 서기 726년경 발해와 흑수말갈에게 멸망하여 국토가 두 나라에 양분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발해는 무왕 대무예(大武藝)가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제1송화강 중류를 경계로 하여 흑수말갈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두막루는 발해와 흑수말갈의 대립 속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결국 나라를 빼앗겨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막루가 있던 지역은 이후 발해의 전성기 때 철리부(鐵利府)와 회원부의 관할에 소속되어 발해의 영토로 흡수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두막루의 계승성은 명백해 보입니다. 따라서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추가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05 (KST)답변

아사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와 같이 역사적 비중이 있는 국가였다면 왜 현행 국사교과서와 강단 사학에서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을까요? 해당 국가를 일반 역사책에서 비중있게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옥저, 동예, 태봉과 같은 역사적 비중으로 해당 국가를 평가하는 것은 위키백과가 아닌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내용인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는 어떤한 역사적 대상을 재평가하는 곳은 아니니까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12 (KST)답변
어떤 일반 역사책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읽은 역사학계의 모든 논문들은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출처를 페이지까지 다 표시해서 인용해 두었습니다. 위키백과는 "신뢰할 수 있는 2차 출처를 제시"할 것을 요구합니다. 제가 근거를 제시했으니,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반대 근거를 제시해야지, 막연히 아니라고 부정해서는 제대로 토론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20 (KST)답변
해당 국가들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현행 국사 교과서에 언급될 정도로 비중이 있지는 않습니다. 말씀하신 논문들이 있다고 바로 한국사 틀에 들어갈 정도로 역사적 비중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막연하게 부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사달님께서 주로 인용하신 논문의 출처는 '백산학회'라는 곳에서 주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역사학계에서 비중있는 '한국역사학연구회'나 '한국고대사학회'에서 발표된 논문이 있나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22 (KST)답변
위에 쓴 글을 잘 안 읽으시는군요. 같은 내용을 또 써야 하네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27 (KST)답변
*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같은 말씀을 계속드리게 되네요. 위의 논문으로 역사적 비중이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해당 국가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28 (KST)답변

의견 한국사 틀에 삽입될 정도의 국가는 적어도 현행 역사 교과서에 언급될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31 (KST)답변

두막루 문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국 측 논문뿐 아니라 쑨진지와 간즈겅 등 현대 중국 학자들의 의견까지 반영되어 있습니다. 현대 중국의 학자인 쑨진지(孫進己, 손진기)와 간즈겅(干志耿, 간지경)은 두막루가 건국된 시기는 서기 410년 동부여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점령된 시점 이후로 이해하였습니다.
* 孫進己 저, 임동석 역, 《동북민족원류》, 1992.
* 干志耿, 〈古代槀離硏究〉, 《民族硏究》 第2期, 1984.
두막루에 대해서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쪽에서도 연구된 논문이 꽤 있습니다. 참고로 중국 쑨진지간즈겅 등의 학자는 위키백과에도 나오고, 중국 바이두 등에서 검색해 보시면, 자세한 정보가 있는 학자들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34 (KST)답변
저는 국가가 편찬한 공인된 역사책이라고 볼 수 있는 현행 역사 교과서에 언급되어야 한국사 틀에 등재될 수 있다는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연구한 논문이 있다고 하여 모든 내용을 틀에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37 (KST)답변
토론에 끼어드는 것 같아 송구합니다만, 현행 역사 교과서는 고등 교과과정의 교과서를 의미하시는 것이 맞나요? 고등 교과과정의 교과서인 경우, 고등학생이 이해할 만하고, 알만한 수준의 내용들을 싣습니다. 한국사 능력검정시험과 현행 역사 교과서가 일대일 합치는 되지 않듯이요. 그래서 현행 역사 교과서를 한국사 틀에 들어갈 만한 비중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쓰는 것에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현행 역사교과서에 따르면 현행 한국사 틀에서 뺄 것이 여러개 생기게 됩니다. --Sotiale (Talk·Contribs) 2012년 7월 9일 (월) 21:43 (KST)답변
현행 역사 교과서가 가장 기초적인 가이드 라인이 된다고 봅니다. 현재 한국사 틀에서 이 기준에 배제될만한 특이점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51 (KST)답변
현행 개정 교육과정인 한국사에 나오는 책은 검토를 해 봐야 알겠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전 교육과정에서 쓰도록 한 검정 교과서에는 발해 부분이 상당히 미약하게 나옵니다. 후발해나 정안국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낸 책에는 나오지도 않고,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책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괜히 이러한 사소한 것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 같아 송구합니다만, 여튼 기본이 된다고는 할 수 있어도 현재 문제를 판단하기엔 부족한 면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저는 일단 이만 말을 줄이도록 하지요. --Sotiale (Talk·Contribs) 2012년 7월 9일 (월) 22:02 (KST)답변
제가 제시한 기준은 가장 기본이 되는 사항이라고 생각됩니다. 언급하신 후발해와 정안국에 대해서는 저는 틀에 존재해야 한다고 옹호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2:07 (KST)답변
밑에 제시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 국가에서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학술 연구 단체에서 발행한 책에 두막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두막루를 부여를 계승한 국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출범한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국책 연구기관입니다.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 연구 기관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2:16 (KST)답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단독 타이틀로 나온 서적도 아니고 그냥 부여에 포함된 한 장에 나온 국가를 비중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2:20 (KST)답변

두막루는 학계 연구 논문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통사를 서술한 역사책에도 나오는군요.

위 책을 보시면 알겠지만, 무슨 재야사학자들이 쓴 역사책이 아니라 현직 대학 교수들이 여러 명이 모여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각자 한 Chapter씩 맡아서 작성한 단행본 역사책입니다. 그 책에 두막루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군요. 거듭 주장하지만, 학계의 연구논문이 우선이고, 그 논문이 있으면, 이런 통사 책에는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48 (KST)답변

참고로 위 "이야기 한국고대사"를 집필한 사람들 명단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람도 포함되어 있군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50 (KST)답변
  • 조법종 우석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중국고구려사왜곡대책위원
  • 박경철 강남대학교 교양교수
  • 박대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 연구사
  • 금경숙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원
  • 박현숙 고려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 정운용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이영식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교수
  • 구효선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원
  •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부연구위원
지금 아사달님께서 근거로 제시하시는 내용은 두막루를 부정하는 주장에다가 보여주시는 것이 적절합니다. 틀에 삽입하는 역사적 비중을 언급하는 곳에서 근거로 삼기는 부족하다고 저는 봅니다. 상기 이야기 한국고대사에서도 Tip으로 두막루를 언급하지 하나의 큰 장으로 다루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54 (KST)답변
일단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는 인정을 하셔야겠군요. 학계 연구논문과 각종 단행본 서적에 모두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 언급하고 있으니, 더 이상 부정하시기 어려울 듯 합니다. 또한 '비중'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위 책에 동예나 옥저, 후백제와 태봉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지만, 두막루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니, 오히려 두막루가 더 비중이 크다고 반대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2:00 (KST)답변
저는 두막루의 한국사 논쟁은 관심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후백제와 태봉은 위 책이 다루는 범주가 아닙니다. 그리고 해당 서적은 학자들이 자신의 관심 분야를 정리한 연구서로 볼 수 있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2:03 (KST)답변

또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편찬한 단행본 책에도 두막루에 대해서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동북아역사재단은 대한민국 국가 차원에서 설립한 기관으로서,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 연구 단체입니다.--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1:56 (KST)답변
[3] 부여

  1. . 우리에게 부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2. . 신화가 들려주는 부여 건국 이야기
  3. . 부여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4. . 부여의 나라와 사회
  5. . 부여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6. . 또다른 부여 동부여와 작은 부여 두막루
같은 말씀을 드리네요. 두막루를 저는 부정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틀에 삽입될 정도의 비중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막루를 포함하면 동부여도 포함되어야하고 수많은 중소 국이 모두 첨가되어야 합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1:59 (KST)답변
저희끼리는 의견을 충분히 교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견 요청 틀을 달아두었으니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시지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2:02 (KST)답변
두막루가 여러 중소국과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한 54개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수많은 소국을 모두 한국사 연표에 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막루는 그런 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나라입니다. 훨씬 더 역사적 비중이 큰 나라입니다. 우선 3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와 비교할 때, 현저히 오랫동안 지속된 나랍니다. 또한 중국과 조공 외교를 전개했습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조공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따로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죠? 두막루가 당나라에 조공 외교를 했다는 것은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에 있었던 당나라로부터 정식 국가로 인정을 받고, 국제 무대에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국가라는 말입니다. 옥저, 동예, 태봉, 후백제, 혹은 마한 54개국, 우산국... 이 중 어느 나라도 중국과 조공 외교를 펼친 나라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막루를 이런 소국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한국사 틀에 추가되어야 할 자격이 있는 매우 "비중 있는" 국가로 보아야 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2:06 (KST)답변

두막루의 대외 관계 내용입니다. 두막루는 고구려, 말갈, 거란 등 주변의 유목 민족들과 유화적 관계를 맺으면서, 중국 왕조들에게 지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면서 국가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 486년 : 두막루가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위서》(魏書) 물길전
  • 567년 : 3년 10월에 돌궐, 대막루(→두막루), 실위, 백제말갈 등의 나라들이 각기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 569년 : 5년 2월에 대막루국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 723년 : 당나라 현종 개원 11년에 달말루(→두막루)의 구 2군(郡) 수령이 조공했다. -《신당서》(新唐書) 유귀전
  • 724년 :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에 달말루의 대수령 낙개제(諾皆諸)가 와서 조공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이와 같이 300년간 존재하면서 중국과 조공 외교를 펼친 국가를 옥저, 동예, 태봉, 후백제, 우산국 등 일개 소국에 비유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두막루는 그런 나라들보다 훨씬 더 비중이 큰 나라였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2:08 (KST)답변

앞서 말씀드렸듯이 위키백과는 어떠한 역사적 대상에 대하여 스스로 재평가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아사달님의 말씀처럼 비중있는 나라였다면 역사 교과서에 한 줄도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2:14 (KST)답변

혹시 대학교재와 같은 수준의 역사책에서 해당 국가를 중요하게 언급하거나 연표에 삽입한 적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케골 2012년 7월 9일 (월) 22:17 (KST)답변

케골 님도 오셨군요. 제가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 한국 고대사"라는 책이 대학교재 혹은 일반인을 위한 통사 서적인 것 같은데, 두막루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군요. 그리고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행한 책에도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국가로 서술되어 있구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두막루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모르겠으나, 만약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안 나오는 모든 역사적 지식을 위키백과에서 삭제하실 게 아니라면, 이 문제에 대해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2:23 (KST)답변
저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위키백과 문서에서 모두 삭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확대 해석하지 말아주십시오. 지금 틀 삽입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입니다. 제시하신 연구서적에서 부여를 계승했다는 사실과 틀 삽입에 해당할 역사적 비중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2:26 (KST)답변
제 말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의 옛 나라이고, 한국사에 포함되어야 하며, 한국사 틀에 추가될만큼 비중이 있는 국가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의 근거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 권위 있는 여러 편의 학술 연구 논문을 출처로 제시했습니다. 또한 중국 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 내용도 소개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두막루에 대한 연구가 무슨 '환단고기' 류의 유사 역사학으로 오인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그런게 아니라고 확실히 증명해 드렸습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안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계속 한국사 틀에서 빼자고 하는데,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국사 교과서'에 안 나온다는 말의 원래 취지는 "유사 역사학"이므로 정식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환단고기' 같은 책에 실린 내용은 일체 국사 교과서에 안 나옵니다. 유사 역사학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국사 교과서에 안 나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막루에 대해서는 대학교 교수들, 연구자들, 국책 연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 등 모든 곳에서 유사 역사학이 아니라 정식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안 나온다는 이유로(이것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각종 학계 권위있는 연구논문과 일반인을 상대로 한 통사 서적들 그리고 국책 연구기관에서 발행한 단행본 서적 등에 나오는 내용을 한국사 틀에서 제거하자는 주장은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2:39 (KST)답변
저는 유사역사학의 유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제 의견을 곡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의견의 요지는 가장 기초적인 역사 교과서인 국사책에서도 언급되지 않을 정도의 비중의 국가라면 아무리 학자들의 개인적인 연구서적이 있다고 하나 틀에 삽입될 역사적 비중이 없다입니다. 학술 서적이 있다고 틀에 당연히 삽입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시하신 동북아역사재단이나 이야기 고대사에서도 비중있게 해당 내용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2:43 (KST)답변
제가 보기에는 동예나 옥저에 대해서는 위 한국 고대사 책에 한 줄도 언급이 없는데, 현재 한국사 틀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막루에 대해서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통사 역사책에 서술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사 틀에서 빼자고 하니, 이해가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두막루는 300년간이나 존재했고,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중국과 조공 외교를 펼친 비중 있는 국가입니다. 적어도 현재 한국사 틀에 나오는 동예나 옥저, 태봉이나 후백제보다는 훨씬 더 비중이 큰 나라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2:49 (KST)답변
아사달님이 제시한 책은 학자들이 자신의 분야를 묶어서 자유롭게 저술한 연구서입니다. 이 한 권의 책을 근거로 이 나라가 이만큼 비중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해당 국가에 대한 비중있다는 평가는 아사달님의 개인적인 역사적 평가로 생각됩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2:52 (KST)답변
"이 한 권의 책을 근거로" --->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 이외에도 많은 연구 논문과 단행본 서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학자들뿐 아니라 중국 학자들의 연구까지도 인용해 두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처럼 권위 있는 학술 기관에서 발행한 책에도 두막루에 대해서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의견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한 연구 논문은 보지 못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3:49 (KST)답변
해당 주장은 한국사 인정여부에서 진행하십시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3:54 (KST)답변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이 있습니다. 두막루를 한국사 틀에서 빼자고 하는 주장의 근거는 두막루가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빼자는 것입니다. 적어도 처음 토론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토론뿐 아니라 수개월 전에 진행된 토론에서도 두막루를 한국의 옛 나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사 틀에서 빼자고 하였습니다. 굳이 두막루 1개 국가만 제외하려는 것은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학계의 권위 있는 각종 연구 논문과 단행본 서적에서 두막루가 한국계 국가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유독 두막루 1개 국가만 한국사 틀에서 제외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번째 토론은 오늘 천리주단기 님이 제시한 것인데 '비중'에 대한 것입니다. 즉 두막루가 한국계 국가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비중이 적어서 뺀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본질적으로는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인정을 하기를 주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두막루가 한국계 국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막루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축소하여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토론에서 천리주단기 님은 단 한 번도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라고 인정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두막루를 한국의 옛 나라 중 하나로 인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뒤에 그 비중에 대해서 논의해야 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2:59 (KST)답변

아사달님, 제 의견을 왜이리 곡해하십니까? 저는 해당 국가들이 한국사에 들어가는지는 관심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토론을 이상한 방향으로 호도하지 마십시오. 그 토론은 이곳이 아니라 각 나라 문서의 토론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사 인정여부와 상관없이 틀에 삽입될 정도의 역사적 비중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충분히 토론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생각하신다면 심히 유감입니다. 이곳은 한국사 틀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공간이지 해당 국가들이 한국사인지 아닌지를 다루는 공간이 아닙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3:05 (KST)답변
만약 그게 아니라면, 한국사에 존재했던 국가들 중에서 유독 두막루 1개만 한국사 틀에서 제외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론 마한 54개국 등이 있었으나, 기원 전에 존재했던 국가들이었고,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나라들입니다. 그런 기원 전에 존재했던 나라들을 빼고, 고구려/백제/신라 이 때 이후에 존재했던 나라들 중에서 '비중'이 적어서 한국사 틀에서 빼자고 하는 것은 오직 '두막루' 1개국뿐입니다. 왜 두막루 1개 나라만 한국사 틀에서 빼야 하나요? 그 이유는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을 하기가 좀 주저되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면 저는 '비중' 운운하면서, 유독 두막루 1개 국가만 한국사 틀에서 빼자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3:11 (KST)답변
지금 두막루와 동란국을 틀에 추가할지 말지를 다루는 상황에서 이 둘에 대해서 줄곧 이야기 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국가에 대한 토론이 이 토론의 핵심인가요? 그리고 제가 언제 "본질적으로는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인정을 하기를 주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라는 의미에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까? 관심도 없는 사항에 아는 내용도 없으니 의견을 제시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 토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식의 오독을 계속하시면 토론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마한 54국이 전부 한국사 틀에 들어가 있던가요? 지금 이 토론은 두막루와 동란국이 한국사 틀에 삽입될 정도의 역사적 비중이 있는가의 토론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두막루 이야기만 계속하는 것 아닙니까?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3:15 (KST)답변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인정하는 학계 연구논문이 여러 편 있고, 각종 한국사 통사와 동북아역사재단 등 권위있는 연구기관에서도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로 보고 있는데, 천리주단기 님에 그 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고 해 버리시면, 어떻게 토론이 되겠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국가에 대해서 한국사 틀에 포함될지 말지 그 '비중'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저는 두막루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아는 것도 많습니다.(죄송~ ^_^) 이번에는 제 의견을 좀 존중해 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사실 제 의견이라기보다는 역사학계의 의견이지만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3:27 (KST)답변
관심도 없고 아는 바 없다는 표현은 이 토론의 주제와 범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3:47 (KST)답변
이모티콘은 쓰지 마십시오. 진지한 곳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2:51 (KST)답변

두 분의 이상의 토론은 잠시 중단하심이 어떠실는지요? 두분이서 토론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서로 의견을 받아들이실 여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분의 의견을 수렴해 보신 다음에 토론을 다시 진행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Sotiale (Talk·Contribs) 2012년 7월 9일 (월) 23:31 (KST)답변

예,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토론은 이미 승부가 난 것 같습니다. 저는 역사학계의 다양한 출처를 제시했으나, 반대 의견을 제시한 분은 아무런 출처도 제시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만 계속 하였습니다. 저는 제 의견이 아닌 역사학계의 의견을 책 이름과 논문 제목과 페이지 숫자까지 제시했고, 반대 측은 아무런 출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토론은 끝이 난 것 같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3:37 (KST)답변
아전인수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이 토론은 역사학계에서 해당 국가를 인정했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무조선 틀에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 인정 여부는 이 토론의 주제도 아니고 다른 곳에서 진행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님께서 제시하는 출처는 이곳이 아니라 한국사 인정여부에 제시하실 출처입니다. 그리고 그리 다양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케골님이 언급하신 해당 국가가 비중있게 언급된 연표는 있으신가요? 또 국사 교과서에 등장하지 못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출처와 근거는 해당 내용을 주장하는 사람이 제시하는 것입니다. 본래 해당 국가가 역사적 비중이 있다는 근거는 제가 아니라 아사달님이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9일 (월) 23:45 (KST)답변
현재 제가 제시한 의견에 대한 반대 의견의 출처가 전혀 없습니다. 주장만 하지 마시고, 또 제가 제시한 출처를 자꾸 깎아내리지 마시고, 종합적으로 판단해 주세요. 제가 수없이 많은 출처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반대 의견에 대한 출처는 전혀 제시된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두막루에 대해서 역사학계에서 어떤 반대 의견, 소수설 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있다면 제시해 주세요. 저더러 자꾸 조금 더 증명해 보라~ 나는 아직 설득이 안 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이 정도면 거의 토론은 끝난 겁니다. 그냥 고집 부리는 게 아니라면, 저에게 더 제시하고 더 증명하라고 요청하지 말아주세요. 이미 충분히 제시했고, 충분히 증명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9일 (월) 23:55 (KST)답변
제가 두막루와 동란국을 부정하는 주장을 한바가 없는데 무슨 출처를 제시하라고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부정하는 주장은 이 토론과 전혀 관계 없는 내용입니다. 엉뚱한 근거 제시를 요구하시지 마시고 아사달님이 생각하시는 틀 삽입이 가능한 역사적 비중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용자 분들의 동의를 구하십시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00:05 (KST)답변

천리주단기님이 확실히 말씀해주셨네요. 그나라의 역사라면 당연히 해당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정이 되야 하며 국사 교과서에도 일말의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여, 옥저, 동예는 설명이 되었죠. 물론 저역시도 후발해랑 정안국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한국사 틀에 아직도 남아있는게 모르죠. 묻겠습니다. 한국사라면 지금 사서에 대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이랑 교류가 있기나 했습니까? 두막루가 망한뒤에 발해로 흡수되었다 말고는 입증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까? 한국사로 편입되려면 당연히 한국사에 나오는 국가들이랑 교류가 있어야 하는데 귀하는 이에 대해선 묵묵부답이군요. 그리고 유적, 유물 발굴도 무시한 채 말입니다. 또 천리주단기님한테도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계신데 상대방의 의견을 곡해하지 마십시오. 저나 천리주단기님이나 모두 두막루의 실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왜 이해하지 못하시나요? 단 한국사 틀의 범주, 뭐 결국에는 한국사의 범주로 넣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2:51 (KST)답변

두막루에 관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 내용은 밑에 옮겨 두었으니 참고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동란국은 저는 한국사-틀 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보니) 후발해와 정안국은 한국사-틀에 남아 있는것은 마찬가지 국편위 한국사 및 한길사 한국사 서적을 참고하셨다면 문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역으로 묻겠습니다. 토론에 진지하게 임하셨으면 위에서 제가 역사를 판단하는 기준에 속지주의와 속민주의가 있다고는 말씀 드렸고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백제-신라-발해를 언급하셨는데, 두막루가 엄연히 부여의 뒤를 이었다고 사서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비슷하게 부여의 뒤를 이었다고 주장한 경우는 성왕이 백제의 이름을 남부여로 고쳤던 것이 있듯 부여를 한국사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시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교류의 유무로서 확답을 내리기는 무리가 아닌가요? 그리고 유적 및 유물발굴이야말로 중국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한국사 연구자들이 특정 발굴을 놓고 두막루라고 확정짓기는 현재로서는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중국 고고학자들이 관련성을 찾으면 그것을 통해 추론해 갈 수 있을 뿐이죠.
따라서 두막루를 한국사-틀에서 '발해-후발해,정안국'의 형태와 같이 '부여-두막루'와 같은 형태를 취했으면 좋겠군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4:28 (KST)답변

재미 있는 예전 글

예전 두막루 토론 때와 상황이 비슷해져 버렸군요. 참고로 예전 5월에 토론했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아사달 님이 말씀하신 두막루토론 문서를 보니 이의를 제기하신 분들이 솔직히 도가 지나치신 것 같아요. 제가 역사 전공은 아니어서(다른 인접 학문인 한문학이 제 전공[학부생 수준]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인용해 오신 자료가 충분히 한국사로 볼 수 있음에도 자꾸 태클을 거시네요. 아사달 님은 도무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시는 저 분들을 이해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아사달 님은 위키백과의 규칙을 준수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음에도 자꾸 태클을 받으신 겁니다. 적어도 두막루 건에 있어서는 상황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제 눈에는 아사달 님이 제시하신 자료로는 두막루가 한국사에 속하는 것을 충분히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갔습니다. 제가 봐도 학계에서 권위가 있는 학자들의 권위 있는 논문이라고 생각됩니다만(해당 학회명도 여러 번 들어봤고...) 왜 믿지를 못하시는지들 납득이 안 갑니다. 이런 식으로 몇몇 위키백과 사용자 분들은 검증 자료를 충분히 들이댔는데도 믿지 못하고 반대하시는 것 같아요. 저 정도 근거를 댔으면 수긍을 하는 게 옳은 거 아닌가요? 저도 토론:두막루를 읽어보니 상당히 당혹스럽습니다. 열심히 작성하신 분 입장에서는 맥이 빠지고 화가 안 날 수가 없죠.

위키백과 특성상 많은 사용자들이 비전문가라서 잘 모르는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비전문가인 사용자들도 자신들이 잘 모르는 분야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어느 정도 자료가 충분하면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사달 님은 그 설명 과정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필요한 양 이상으로 제시하셨고(너무도 안 믿으시니까) 그것도 자료를 해석하는 방법을 거의 일일이 떠먹여주다시피 설명하셨습니다. 이건 너무한 것 같네요. 경찰서에서 용의자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Yes0song (토론) 2012년 5월 10일 (목) 15:22 (KST)
저도 방금 두막루 토론을 봤는데, 뭔가 익숙하지 않다고 계속 증명 요구하는건 좀 아닌거 같습니다. 그정도 자료면 충분히 입증도 한 것이구요. --거북이 (토론) 2012년 5월 10일 (목) 16:25 (KST)

토론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일까요? 위 글은 5월에 쓰인 것이고, 지금은 7월인데,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상황으로 흐르는지...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0:00 (KST)답변

지금 주제인 틀 삽입에 해당한 역사적 비중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00:06 (KST)답변
천리주단기 님, 이제 그만 하시죠. '비중'에 대해서도 제가 300년간 지속된 국가라는 점, 중국에 여러 차례 조공한 기록이 있다는 점, 유독 두막루 1개 국가만 제외하는 이유가 없다는 점, 동예/옥저/태봉/후백제와의 상대적 비중 등 자세한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더 제시하고, 더 증명하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0:15 (KST)답변
비중이 300년 지속되었다, 중국에 조공한 기록이 있다? 그게 비중이 있다고나 보시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2:51 (KST)답변
비중이란 것은 상대적인 중요도를 말합니다. 지금 한국사 틀에 나오는 동예/옥저/태봉/후백제 중 어느 나라도 두막루만큼 300년간 지속된 나라가 없습니다. 또한 이 네 나라 중 어느 나라도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중심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정식 국가로 인정 받고 조공 외교를 펼친 기록이 없지만, 두막루는 여러 차례 조공 외교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다른 네 나라에 비해 훨씬 더 비중이 크다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사 틀에 수록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03 (KST)답변
참고로 발해의 경우에도 대조영이 나라를 설립한 초기에는 중국 측으로부터 전혀 인정을 못 받다가, 서기 713년 당나라 현종 2년에 와서야 비로소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책봉하고 그 땅을 홀한주로 삼았는데, 이때부터 나라 이름을 발해(渤海)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로써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유학생도 보내고 '조공 외교'를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중국 측의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모화사상을 가진 사대주의자는 아닙니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가 그러했다는 뜻입니다.) 두막루는 기록상 최소 5회 이상 중국에 조공을 바친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08 (KST)답변

다음 글도 인용하게 만드시는군요. 자꾸 인용해서 죄송하지만, 예전 상황과 너무 비슷해서 저도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다만 두막루에 대한 '비중'으로만 바뀌었을 뿐, 토론 태도 등 다른 상황은 전부 몇 개월 전 때와 동일하군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0:18 (KST)답변

토론은 출처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군요. 백:면책이 밝히는 바와 같이 위키백과는 확인가능한 출처를 근거로 작성되면, 그것의 진위 여부는 출처에 일임하는 것입니다. 물론 폭 넓은 출처의 확인을 거쳐 되도록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서술을 해야겠지만, 여러 출처를 제시하여 쓰인 글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을 때에는 "확증할 수 없음"을 문제삼기 보다는 "반대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보다 좋은 토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제시된 출처를 근거로 두막루가 부여계 유민이 세운 한국사의 일부라는 설명에 대해 어찌 한국사의 일부인지 확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 보다는 반대되는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어떻게 문서에 반영할 것인지를 토론할 수 있겠지요. -- Jjw (토론) 2012년 6월 2일 (토) 17:42 (KST)

다른 사용자 분들의 의견을 기다리시지요. 그리고 제 의견을 곡해하지 마십시오. 또한 제가 주장한바 없는 내용에 대해 곡해하여 호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00:22 (KST)답변
"틀 삽입이 가능한 역사적 비중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용자 분들의 동의를 구하십시오." ---> 천리주단기 님이 요구하신 이 사항은 좀 과도한 요구인 듯 합니다. 유독 두막루 1개 국가를 위해서, 게다가 역사학계에서 이미 합의된 내용에 대해서, 제가 충분한 출처와 증거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이드 라인을 만들고 다른 사용자 분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나요? 위에 예전에 쓴 Jjw 님의 글처럼 '비중'이 크다고 "확증할 수 없음"을 문제삼지 말고, '비중'이 없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학계의 연구논문 등 확인 가능한 출처를 제시해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0:26 (KST)답변
제가 비중이 없다는 연구논문 등 확인 가능한 출처를 제시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00:28 (KST)답변
천리주단기 님, 확인 가능한 출처를 제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니, 더 토론하기 어렵겠군요. 저는 이미 위에 각종 출처와 증거들에 대해서 충분히 제시했으므로 제 입장에서 더 제시하고, 더 증명할 내용이 없군요. 이제 밤이 깊었으니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볼 시간인 듯 합니다. 역사는 항상 이렇게 논란이 많은가 봅니다. E. H. Carr가 말했듯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니까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0:36 (KST)답변

지금 왜 저 인용문은 또 재탕되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2:44 (KST)답변

아사달님의 의견은 '현재 한국인과 관련되어 있는 국가라면 어떤 국가라도 한국사-틀에 표기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1:29 (KST)답변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현재 한국인과 관련된 모든 국가를 한국사 틀에 표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한 54개국의 이름을 모두 한국사 틀에 표시하자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갈사부여도 한국사 틀에 표시하자고 하지 않고, 올야국 등도 표시하자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소국들, 1-2년간 단명한 국가들은 굳이 한국사 틀에 표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두막루는 300년간 존재했던 부여의 후계 국가이고, 발해로 연결된 나라입니다. 중국 당나라 등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 외교를 펼친 기록도 있습니다. 적어도 현재 한국사 틀에 표시되고 있는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보다는 훨씬 더 비중이 큰 나라이므로, 한국사 틀에 표시되는 것이 좋겠다는 뜻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3:53 (KST)답변
잠시만요, 지금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다고 후백제, 태봉같은 후삼국보다도 비중이 더 클수가 있나요? 300년이나 갔다고 비중이 되나요? 이에 대해 생활양식, 정치 제도, 형법 같은게 온전히 남아있는게 있나요? 혼자서 비중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5:05 (KST)답변

두막루에 대한 추가 토론

토론을 읽어봤는데 제가 볼 때는 일단 해당 나라가 한국사인지 아닌지 먼저 따지고 나서 그 다음에 비중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역사 쪽과 관련이 없어서 구체적으로는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논리적 흐름으로 볼 때 한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전제부터 먼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천리주단기 님께서 나름 논리적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정리를 한 점은 좋아보이지만, 비중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한국사 편입 여부에 대한 전제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이 전제가 틀리면 비중 논의는 하나마나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한국사에 포함된다는 전제에 모두 동의한다면 그 다음에 비중입니다. 지금 한국사에 포함된다고 제가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틀에 들어가지 않은 국가는 우산국, 탐라국입니다. 해당 국가와 위의 제시한 국가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편집자들께서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서대로 해야 합니다. 비중 설명 전에 전제부터 먼저 맞는지 확인해야 합니다.--어쏭(우리 소통합시다.) "희망을 드립니다." 2012년 7월 10일 (화) 01:16 (KST)답변

예,저도 두막루가 한국사의 일부인지 아닌지부터 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비중에 대해서 논의해야 합니다. 다만, 어쏭 님이 비중에 대해서 질문을 하시기에 답변을 드립니다. 우산국의 경우 국제적 학자들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비중이 작은 섬나라입니다. 반면 두막루는 국제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즉, 중국 측 여러 학자들의 연구 서적이 있는) '비중이 큰' 나라입니다. 우산국은 당시 국제정세에서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였던 중국 측에 조공 외교를 한 적이 없지만, 두막루는 여러 차례(중국 북위, 중국 당나라 등) 조공 외교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즉, 300년간 존재한 매우 비중이 있는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2:59 (KST)답변
한국사랑 연결고리를 밝혀주십시오. 자신들이 북부여 혈통을 자처한것 말고 그이상으로 주류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교류한 사실 등등 한국사임을 입증할 만한 것들이 필요합니다. 헌데 혈통이 부여라는 점만 들어서 비중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주에서는 비중이 있을지 몰라도 한국사서인 삼국사기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데 과연 틀에 넣어줘야 할지 의문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3:06 (KST)답변
두막루와 한국사의 연결고리를 밝혀달라고 하셨는데요.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나중에 발해 땅으로 흡수되었습니다. 두막루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막루는 부여 및 발해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당연히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의 3개 나라에 대한 역사 책이기 때문입니다. 고조선도 삼국사기에 안 나오고, 발해도 안 나오지만, 그 나라들을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여와 그를 계승한 두막루도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혼자 주장하는게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13 (KST)답변
두막루와 고구려는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두막루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종래 중국의 동북사 연구자들인 마가승(溤家昇)과 장박천(張博泉)은 부여고구려문자명왕에게 멸망 당한 서기 494년 이후 부여의 유민들이 두막루를 건국한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출처: 溤家昇, 〈豆莫婁國考〉, 《禹貢》半月刊 7卷 1,2,3 合刊, 1937.) (張博泉, 〈魏書豆莫婁傳中的幾個問題〉, 《黑龍江文物叢刊》 第2期, 1982.) 하지만 현대 중국의 학자인 쑨진지(孫進己, 손진기)와 간즈겅(干志耿, 간지경)은 두막루가 건국된 시기는 그보다 이전인 서기 410년 동부여고구려광개토대왕에게 점령된 시점 이후로 이해하였습니다. (孫進己 저, 임동석 역, 《동북민족원류》, 1992.) (干志耿, 〈古代槀離硏究〉, 《民族硏究》 第2期, 1984.) 《위서》의 기록을 근거로 볼 때, 두막루가 건국된 것은 늦어도 서기 486년 이전이므로, 후자의 학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17 (KST)답변
지금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그렇다는 주장은 상당한 억지주장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북국시대 때 신라랑 발해가 대치중이었고 전쟁 직전까지 갔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렇다면 두막루라는 나라에 대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모두 자신들의 핏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지금 이것은 과도하게 한국사로 편입시키는 것 같습니다. 고조선은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나옵니다, 북부여, 동부여도 나오지요. 근데 두막루는 나오나요? 대동아공영권 만들기는 말씀드렸듯 삼가해 주십시오. 그리고 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시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3:18 (KST)답변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왜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는지에 대해서 윤성현 님이 동의하지 못하고 있군요. 하지만 위키는 학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올리는 곳이지, 역사학계의 주장을 부인하고 독자 연구를 하는 곳은 아닙니다.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는 것과 '대동아공영권'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두막루의 존재 및 부여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중국 측 여러 역사서들에 나오는 내용이지, 후대 사람들이 추측하여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25 (KST)답변
  • 《신당서》(新唐書)의 유귀전(流鬼傳)
  • 《위서》(魏書) 두막루조
  • 《위서》(魏書) 물길전
  • 《만주원류고》의 권1 부여(夫餘) 편
  •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비록 두막루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한국 측 사서에는 안 나오지만, 위와 같이 중국 측 역사서(1차 자료)에는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25 (KST)답변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왜 두막루를 한국사로 편입시켰는지, 그리고 그것은 상당한 억지주장이 아닌지에 대해서 윤성현 님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윤성현 님은 한국에 계시지 않고, 외국에 거주하시는 분 같은데(맞나요?), 한국사에 대해서 이렇게 깊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학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없고, 저는 단지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그런 주장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도록 잘 정리하여 위키에 올린 것뿐입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저는 전혀 대동아공영권이나 환단고기 추종자, 혹은 뉴라이트 계열 사람이 아니므로,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31 (KST)답변
그럴수 밖에 없지요. 지금 귀하는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두막루, 그러니까 다민족 국가였던 곳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을 보고 부여인의 혈통을 이어받아 자처한 나라이니, 두막루 사람은 부여 사람, 즉 한국 사람이라는 논리를 펴고 계십니다. 마치 일본이 신에게 선택받은 나라로 자처하고 조선인들에게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대동아공영권이랑 다를게 무엇이 있나요? 그리고 왜 계속 제가 두막루의 실존을 부정한다 생각하시는것이죠? 그리고 중국 사서에만 있다는 점도 여러모로 한국사에 편입하기가 애매한 점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만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사로 편입시키자는게 말이 되나요?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주류는 누가 뭐래도 국사편찬위원회이며 이에 대해서는 교과서 등에도 별다른 얘기가 없는데 무엇하러 계속 편입시키려고 하시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03:38 (KST)답변
위에 보시면, 대한민국 주류 역사학계에서 편찬한 서적에도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45 (KST)답변
* 이야기 한국 고대사에 나오는 두막루 :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의 교수들이 쓴 책에 두막루를 부여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 동북아역사재단이 펴낸 책에 나오는 두막루 : 대한민국 정부에서 설립한 국책 연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편찬한 단행본 서적에도 두막루를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두막루를 한국사로 본다고 하여, 무슨 재야사학자나 유사 역사학자의 주장인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주류 역사학계의 의견입니다. 참고하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50 (KST)답변

아시다시피, 두막루의 건국 주체는 부여의 유민으로서 예맥족입니다. 예맥족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을 구성한 민족으로서 현대 한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입니다. 역사학계에서는 두막루를 만주 지역에 존재한 한국의 옛 나라 중 하나로서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 146쪽.
  •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두막루가 중국처럼 '한족'이 아니고 만주 지역에 있었던 '거란족, 몽골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중 어느 것도 아닙니다.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예맥족이고, 현재 대한민국도 예맥족의 후예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두막루와 한국사의 연관성이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3:45 (KST)답변

(편집 충돌) 한적한 시간 때에 흥미로운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뭔가, 류큐 제도를 자기들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랄까, 하나 아사달 님께 질문을 할까 합니다. 그렇다면, 낙랑이나, 소고구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람 (논의) 2012년 7월 10일 (화) 03:40 (KST)답변
이 늦은 밤에 가람 님도 오셨군요. (^_^) 낙랑국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분분합니다. 최리의 낙랑국과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같은지 다른지조차 아직 역사학계에서 확실하게 의견 통일이 안 된 것 같습니다. 소고구려에 대해서는 135년간이나 지속된 나라이고, 발해로 계승된 나라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04:00 (KST)답변

두막루에 관한 토론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 첫째,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 둘째, 두막루는 한국사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 셋째, 두막루는 한국사 틀에 표시되어야 합니다.

위 내용에 대해 중국 측 사서와 역사학계의 논문 및 단행본 서적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인터넷사이트 등 충분한 출처가 제시되었습니다.

  1. 두막루에 대한 중국 측 사서
    1. 《위서》(魏書) 두막루조
    2. 《위서》(魏書) 물길전
    3. 《신당서》(新唐書)의 유귀전(流鬼傳)
    4. 《만주원류고》의 권1 부여(夫餘) 편
    5.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2.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논문
    1.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
    2.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3. 중국 측 학자들의 연구
    1. 孫進己 저, 임동석 역, 《동북민족원류》, 1992.
    2. 干志耿, 〈古代槀離硏究〉, 《民族硏究》 第2期, 1984.
    3. 張博泉, 〈魏書豆莫婁傳中的幾個問題〉, 《黑龍江文物叢刊》 第2期, 1982.
    4. 溤家昇, 〈豆莫婁國考〉, 《禹貢》半月刊 7卷 1,2,3 合刊, 1937.
    5. 傳朗云, 楊楊, 《東北民族史略》, 吉林人民出版社, 1933.
  4. 역사 단행본 서적
    1. 《이야기 한국 고대사》, 2007.01.25. :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쓴 책
    2. 《고조선 단군 부여》, 2007.11.30. : 동북아역사재단이 지은 책
  5. 인터넷 사이트
    1.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중 두막루 부분

이상 모든 출처들이 위에서 정리한 3가지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두막루에 대해서 반대 의견 또는 소수설을 제시하는 출처는 지금까지 단 1개도 제시된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더 제시하라, 혹은 더 증명하라고 하는데, 더 제시하고 더 증명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것으로서 두막루에 대한 토론은 끝난 것 같습니다. 참고하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0:00 (KST)답변

마음대로 우기시지 마세요. 두막루가 환상속의 나라라는 것도 아니고 300년간이나 존재했으면서 한국사의 3국, 남북국과 별다른 이해관계도 없는데 부여인이 세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정하나요? 현재 시대적 구분인 삼국시대, 남북국 시대에서 과연 두막루가 이러한 시대 명칭을 바꿀만한 영향력 그리고 판도를 가지고 있었나요? 이 모든 걸 따져본다면은 결국은 한국사 틀로는 포함시킬수 없는 겁니다.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저번 토론에서도 끝냈나 본데 이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여전히 두막루에 대한 보다 더 많은 연구가 나타나지 않는 한 한국사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은 무리인것 같군요. 특히나 중국 측의 사서에서 더많이 언급되는 것으로 볼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죠), 그리고 삼국사기도 상당 부분 중국의 사서를 참고한 것인데 이에 대해 언급이 되지 않았으니 두막루는 올릴 수 없다고 봅니다. 아, 물론 동란국 역시 올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1:26 (KST)답변
두막루가 삼국사기에 안 나오기 때문에 한국사 범주에 집어넣는게 무리라고 하셨는데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연구자라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3개 국가에 대한 역사책입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 안 나오는게 당연합니다.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고구려/백제/신라의 3개 국가에 대한 기록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삼국사기에 발해도 안 나오고, 두막루도 안 나오지만, 그걸 이유로 한국사의 범주에서 제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두막루에 대해서 중국측 사서에서 여러 건 나온다고 하여, 두막루가 중국의 국가인 것은 아닙니다. 중국측 사서에 마한 54개국에 대해서 나오는데(사실 중국측 사서 기록밖에 없죠), 그렇다고 하여 마한이 중국 나라인 것은 아닙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1:35 (KST)답변
현재 시대적 구분인 삼국시대, 남북국 시대에서 과연 두막루가 이러한 시대 명칭을 바꿀만한 영향력 그리고 판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질문을 하셨는데요. 그런 시대 명칭을 바꿀만한 영향력과 판도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국사 틀에 추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야'는 삼국시대 중 3국에 속하지 않지만, 한국사 틀에 나오고 있습니다. 시대 명칭을 바꿀만한 영향력과 판도를 가진 나라만 한국사 틀에 나와야 한다는 기준은 올바르지 않으며, 과도하게 높은 기준입니다. 가야뿐 아니라 동예나 옥저가 삼국시대라는 시대 명칭을 바꿀만한 영향력과 판도를 가진 나라인가요? 아니지만, 현재 한국사 틀에 나오고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1:43 (KST)답변
예, 가야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고조선 역시 삼국유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어서 인정을 한것입니다. 하지만 3국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가야 자체는 연합국가체제로서 다른 3국과 달리 수직적인 중앙집권체제가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막루는요? 둘다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고구려를 논할때 주변국인 부여, 북연 등은 삼국사기에서 광개토대왕의 정벌로 인해 기술이 되어있지만 두막루라는 나라는 그 어떠한 유래를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두막루라는 나라는 결국 주변국의 정세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 소국이라는 것입니다. 밑의 3국처럼 강력한 왕이나 중앙집권체제의 존재도 모르는 판이고 말이죠. 그리고 당시만 하더라도 만주에 나라가 여러개가 있었는데 귀하의 원리대로라면 당시 만주에 있던 모든 나라도 결국은 부여인이 섞여있을 것이니 그들도 모두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한이 중국의 나라가 아니고 두막루가 중국의 국가가 아니듯이 두막루가 진정 한국인의 조상이 세운 나라라고도 완전히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말했듯이 동부여가 망하고 몇백년 뒤에 세워졌고 스스로를 예맥족이라 자칭한 것으로 봐서는 이에 대해 추측과 함께 의심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1:45 (KST)답변
윤성현 님, 역사적 사실 자체를 먼저 정확히 인식해 주세요. 두막루는 동부여가 망하고 몇 백 년 후에 나타나서 부여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국가가 아닙니다. 우선 두막루 문서 내용부터 꼼꼼하게 읽어주세요. 서기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부여를 점령했는데, 이 때 부여의 유민 중 일파가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서 북쪽으로 가서 나하를 건너서 과거 고리국(=색리국)이 있는 지역에 두막루라는 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부여를 계승했다고 그냥 단순히 주장하는 세력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실제로 부여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서 나하를 건너가서 세운 나라입니다. 궁예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것,그리고 견훤이 백제를 계승했다고 '선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두막루는 실제 부여 주민들이 이동해서 세운 나라이니까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2:08 (KST)답변
그렇다면 낙씨에 대해서도 따져보시죠. 귀하는 일전에 낙씨는 분명히 부여 사람이니 한국 사람이라고 한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한 물타기로밖에 볼수밖에 없군요. 그런데 누가 한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 나라가 부여의 정통성을 이어받을 만큼 그렇게 강대한 나라였는지, 한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이러한 이해 관계는 따지지도 않으면서 무조건적으로 "권위 있는" 논문만을 증거로 내세우면서 부여 사람들이 세웠으니 300년이나 갔으니 비중있다면서 한국사 틀에 집어넣자 하는것은 혼자서 집요하게 우기려는 몽니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5:04 (KST)답변
덧붙여 적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1997, <<한국사 4-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201쪽 내용을 그대로 옮깁니다. 두막루 자체를 한국사의 한 부류로 인정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그저 비난을 위한 행동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편 부여의 주민집단이 고구려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일단의 잔류세력이 서북쪽으로 옮겨가 豆莫婁國을 형성하였다.79) <<위서>> 열전 豆莫婁傳은 두막루가 舊부여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서>> 두막루전은 "두막루국은 물길 북쪽 천 리에 있는데 ... 옛날 북부여이다."라는 내용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삼국지>> 부여조의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流鬼傳에는 "達末婁는 ... 북부여의 후예이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그 유민이 那河를 건너 그 곳에 살았다"고 하여 달말루, 즉 두막루국에 관하여 아주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나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오늘의 눈강과 제1송화강 합류점 일원으로 비정하여, 이 강을 건넌 부여인들이 호눈평원 또는 송눈평원 일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80)

79) 金貞培, <豆莫婁國 硏究>(<<國史館論叢>> 29, 1992), 71~80쪽; 魏國忠, <豆莫婁國考>(<<學習與探索>> 3期, 1982), 137쪽; 張博泉, <魏書豆莫婁傳中的機個問題>(<<黑龍江文物叢刊>> 2期, 1982)
80) 李健才, <<東北史地考略>>(吉林文史出版社, 1986), 38쪽; 董萬兪, <<東北史綱要>>(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108쪽; 한편 두막루인들은 점점 주변의 실위나 물길 등의 영향을 받아 8세기 경에 이르러 그 이름을 잃어버리고 부여국의 존재 또한 이 때서야 사라진다고 보기도 한다(金貞培, 위의 글, 79~80쪽).
따라서 저는 위에서 언급했듯 '발해-후발해, 정안국'의 형태와 같이 '부여-두막루'로, 작은 글자로 덧붙이면 문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4:47 (KST)답변
그것도 이릅니다. 부여의 후신이라는 명백한 증거와 단지 멸망한지 400년이 지나서 부여의 유민들이라 자칭한 사람들이 세운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역사책이나 이런곳에서 좀더 대중적으로 알려지거나 아니면 좀더 확실한 연구 없이 한국사에서의 비중이나 영향력이 거의 없는 나라를 넣는 것은 이르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5:04 (KST)답변
윤성현 님, 제가 위에 답변을 단 내용 자체를 읽지도 않고 계속 잘못된 사실을 퍼뜨리지 말아주세요. 역사적 사실 자체를 먼저 정확히 인식해 주세요. 두막루는 동부여가 망하고 400년 후에 나타나서 부여를 계승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국가가 아닙니다. 궁예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것,그리고 견훤이 백제를 계승했다고 '선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두막루는 실제 부여 주민들이 이동해서 세운 나라이입니다. 우선 두막루 문서 내용부터 꼼꼼하게 읽어주세요. 서기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부여를 점령했는데, 이 때 부여의 유민 중 일파가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서 북쪽으로 가서 나하를 건너서 과거 고리국(=색리국)이 있는 지역에 두막루라는 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부여를 계승했다고 그냥 단순히 주장하는 세력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실제로 부여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서 나하를 건너가서 세운 나라입니다. 부여가 망하고 400년 후에 세운 나라가 아니라, 부여가 망하기 전에 미리 북쪽으로 도망(?)을 가서 세운 나라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5:48 (KST)답변
윤성현님. 부여의 후신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위한 요소들에 대하여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엄연히 학계 일반에서 인정받는 사실을,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도대체 무얼 요구하는지 납득할 수 없을 뿐 더러 비난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 책 이상의 한국사에서 권위있는 연구논의가 몇이나 될는지, 그리고 그 무엇이 논할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분명 두막루 자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기 때문에, 부여 내 소항목으로 반영할 수 있다고는 봅니다만.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5:10 (KST)답변
첫째로 부여의 정통성을 이었다 할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건국자가 부여의 왕족 출신인지 왕의 이름도 모르는데 섣불리 올릴수 있을까요? 학계, 학계 하지만 역사학계의 총본산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하는 교과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반면 부여, 옥저, 동예는 연표로 표시되어 있지요. 국사편찬위원회가 바보도 아니고 왜 두막루를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비중 자체가 작으면 왜 넣어줘야 하는거죠? 갈사국은 안되고 두막루는 되나요? 도대체 두막루가 혼자만 작게라도 들어가야할 이유 또는 특색이 뭡니까? 거기다가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쪽은 오히려 중국입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노리고 부여 역시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내세우며 두막루를 연구할 수도 있는 가능성은 생각들 안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5:16 (KST)답변
말씀 드렸습니다. 속지주의 원칙으로서 중국 내에서도 당연히, 부여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동북공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역사학도들과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속지주의와 속인주의가 역사 서술에서 어떻게 작용하는 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하는 교과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제시하는 가이드라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가이드라인의 세부는 책자로 되어 있고 제가 지금 확인할 수 없어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적어도 한국의 교육과정 변천사를(위키에는 잘 나와있지 않지만) NCIC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또한 제발 위에서 적어 둔 글들은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윤성현님이 한국에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가 적어놓은 책들은 대부분의 도서관에서 확인 가능하고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하는 한국사 책이 윤성현님께서 말씀하시는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확실한 연구 결과서임은 다시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전국 모든 사학과와 역사교육과에 저 책의 권위성을 부정하는 분이 계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한 나라를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엄연히 언급할 수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5:33 (KST)답변
그렇다면 정 틀에 집어넣고 싶으면 부여의 모든 계승국을 집어넣으세요. 왜 두막루만이 특별하게 혼자만 부여 밑에 조그맣게라도 있어야 합니까?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5:49 (KST)답변
이야기를 이상하게 몰아가려 하시는군요. 전 두막루가 한국사-틀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을 뿐이고, 동란국 논의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다 넣는데에 동의한 적은 없습니다. 두막루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서적에 부여의 계승국으로 나와 있어 공신력 있으며, 시간적 지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발해와 같은 형식으로 포함시켰으면 어떻겠느냐가 제 주장의 현재입니다. 이것에 대한 논의를 부탁드리고 싶군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5:55 (KST)답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어렵습니다. 발해가 망한 후의 유민운동의 기촉제가 된 두 국가에 반해 두막루는 알려진게 너무 없습니다. 두막루가 부여의 후계자가 될 만큼 역사학계에서 확실한 논의도 안되었을뿐 더러 하다 못해 누구랑은 달리 주류 학계에서는 동예와 옥저보다도 더 낮게 칩니다. 두막루라는 나라는 대중은 물론이거니와 고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사람도 태반입니다. 저도 이 토론을 시작하면서부터 알게된 나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대중적으로, 그리고 학계에서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 순서이지 여기서 가타부타 논의할 사항은 아니네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6:22 (KST)답변
자기가 잘 모른다고 하여 비중이 낮다고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비전문가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위키백과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28 (KST)답변

두막루의 역사적 비중에 대해서

아사달님께서 두막루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면서 제시하신 《이야기 한국 고대사》의 해당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 책의 두막루는 한 페이지 분량밖에 안되더군요. 이와 같이 새로운 견해로 등장하여 아직 연구서가 몇개 되지도 않고 학계에서 검증과정에 있는 내용을 한국사 틀 연표에 삽입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또한 왠만한 역사 연표에 등장하지도 않고 있고요. 두막루가 비중있게 등장한 고대사 연표가 있나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5:21 (KST)답변

종래의 우리 학계는 부여사의 전개와 두막루의 존재를 직접 연계시키는 데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중략) 그런데 최근 부여사와 이 두막루를 직접 연관시켜 이해하려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중략) 이런 입장의 학자들은 두막루가 5~8세기까지 존속했고, 부여의 후예인 두막루인은 처음에는 고구려와 같은 부여어를 사용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 세력의 영향을 받아 실위 같은 언어를 쓰게 됐다고 주장한다. 우리 학계가 두막루와 부여사의 연관성 여부를 놓고 토론하는 것은 우리의 고대사 인식의 시공간적 확장 가능성과 결부된 문제인 만큼 귀추가 주목된다. - 박경철(강남대 교양교수), 《이야기 한국 고대사》, 85 ~ 86쪽, 2007년.

(추가) 200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4권 초기국가 고조선·부여·삼한의 목차입니다.

1. 초기국가의 성격
2. 고조선
3. 부여
4. 동예와 옥저
5. 삼한

두막루는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라는 챕터에 201쪽에 딱 10줄이 나옵니다. 이를 보고 동예와 옥저와 동일한 역사적 비중으로 볼 수 있을까요? 201쪽에 등장하는 내용은 사용자:Mr.SamA께서 이미 언급하셔서 생략합니다. 《위서》에 등장하는 두막루의 설명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부여의 설명을 그대로 옮긴 내용으로 두막루에 대한 독자적인 중국 사서의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두막루에 대한 설명이라고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 님께서 연결해놓은 링크도 《중국정사조선전》이라는 책의 각주에 불과합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5:26 (KST)답변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사》라는 개괄적인 책에 두막루에 대해서 10줄이 나오면 꽤 나오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은 하지 않겠군요.(천리주단기 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게다가 2003년에 발행한 책에 그 정도 나왔으면 꽤 많이 나온 셈입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연구가 진행되었으니 앞으로는 훨씬 더 많이 나오겠군요. 고려 시대에 쓴 삼국사기에는 두막루에 대해서 1줄도 안 나왔는데, 대한민국에 와서 많이 좋아지고 있군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책에 두막루가 나오니까, 이제 윤OO 님처럼 더 이상 '백산학회' 등을 환단고기 류의 단체로 매도하는 일은 없어지겠군요. 국사편찬위원회까지 환단고기 류의 글에 점령당했다고 주장하실게 아니라면, 윤oo 님처럼 더 이상 근거 없는 매도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천리주단기 님처럼 역사 개론서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권위 있는 학회지의 교수들이 쓴 연구 논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연구 논문이 먼저입니다. 교과서는 나중입니다. 무슨 환단고기 류의 책도 아니고, 해당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들이 쓴 연구 논문이 몇 편 있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이나 소수 의견 자체가 없는데, 굳이 한국사 틀에서 제거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교과서에 몇 줄 나오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연구논문에 수십 페이지 짜리로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요약해서 위키에 올린 내용보다 몇 배 더 많은 분량으로 훨씬 더 자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학계의 권위 있는 연구논문에 수십 페이지씩 나오는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안 나온다, 혹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책에는 10줄밖에 안 나온나고 하면서, 300년간 지속되고 국제 정세에서 큰 비중이 있었던 두막루라는 나라를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거나, 아니면 포함시키더라도 매우 비중이 없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5:40 (KST)답변
반대의견이나 소수의견은 두막루의 한국사 인정과 관련하여 나와야 정상입니다. 역사적 비중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나올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연표에 추가할 정도의 역사적 비중이 있느냐의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야기 한국사》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없으시군요. 님께서는 옥저와 동예보다도 두막루가 역사적 비중이 높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장으로 있는 옥저와 동예와 달리 두막루는 딱 10줄이고, 세부적인 내용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사달님께서 권위있다고 주장하시는 국내 논문도 딱 2개 뿐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5:44 (KST)답변
동의합니다, 분명 귀하는 두막루가 옥저와 동예 그리고 후삼국을 이루는 태봉과 후백제보다도 비중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죄를 졌나요? 왜 이름을 가리죠? 그리고 백산학회 자체는 극우 민족주의적 학회가 맞습니다. 북한을 몰아내고 만주를 되찾자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이나 한건가요? 함부로 죄인처럼 매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5:48 (KST)답변
천리주단기 님, 국내 논문은 제가 3편 정도 본 것 같은데, 지금 제시할 수 있는 2편만 제시한 것입니다. 아마도 찾아보면 논문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논문이 적은 편이 절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 고조선 연구 학자가 6명인가(정확하지는 않음) 밖에 없습니다. 발해처럼 큰 나라를 전공하는 교수도 서울대 송 교수 님을 포함하여 몇 명에 불과합니다. 이런 실정을 감안할 때, 두막루에 대해서 수십 페이지 짜리 논문이 3편 정도 있다는 것은 절대 비중이 작은 편이 아닙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5:51 (KST)답변
3편이라고요? 한국사 관련 논문을 검색할 수 있는 역사서지검색에서 '고조선', '발해'만 키워드로 치더라도 수십개의 논문이 검색됩니다. 2010년까지 정리된 한국사 논문에서 두막루를 검색하면 딱 3개의 항목이 나오고 하나는 책이고 2개는 논문입니다. 참고로 이 사이트에서 왠만한 역사 논문은 검색이 가능합니다. 아직 두막루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국사》에 제가 인용한 해당 내용에 대하여도 의견을 제시해 주시지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5:56 (KST)답변
'이야기 한국 고대사'라는 단행본 책에 '두막루'가 나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환단고기 류의 주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권위 있는 학자들이 쓴 단행본 서적에도 두막루가 나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학계의 의견은 연구논문으로 살펴보는 것이지,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혹은 시중에서 판매 중인 개론적인 통사 책에 나오는 것을 근거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책들은 학계의 권위 있는 연구논문에 대해서 시차를 두고 반영해 나갈 뿐입니다. 위키백과의 저명성 지침에 따르면, "신뢰할 수 있는 2차 출처"에서 확인 가능한 내용이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요. 첫번째 쟁점인 두막루의 한국사 포함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났습니다. 여러 토론을 통해 확인 가능한 출처가 계속 밝혀지면서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윤성현 님을 제외하고는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포함시키는데 대해서는 더 이상 거부감이 없다고 봅니다. 두번째 쟁점은 '비중'인데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사 책에 비중이 작다는 것인데, 그건 옛날에 나온 책이라서 그런 겁니다. 출판 연도를 비교해 보니, 제가 제시한 연구논문 중 가장 최신의 것이 2004년이고, 그 책은 2003년이니까 그 이전에 나온 책이군요. 즉 최신의 연구결과가 전혀 수록되지 않은 예전 국사 책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 논문이 나와 있고, 그 내용은 심지어 국회 전자도서관 등에서 인터넷으로도 검색이 가능한데, 굳이 옛날에 나온 국사책에 1페이지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두막루를 빼자는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06 (KST)답변
나온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중요한 것 입니다. 또한 1997년에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책과 2003년에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책의 두막루 내용은 똑같고 딱 10줄입니다. 옛날나온 책이라서 비중이 없다라는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 논리입니다. 2007년에 나온 《이야기 한국고대사》에서도 1쪽도 되지 않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6:11 (KST)답변
또 시작이군요. 저는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적은 없는데요? 단 기준이 미치지 못하니 틀에 입성은 하지 못한다고 하였죠. 그리고 이야기 한국사가 아닌 것 같네요. 제가 가지고 있는 청아출판사판 이야기 한국사에는 두막루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두분이 말하시는 책은 이야기 한국 고대사 아닌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6:14 (KST)답변
책 이름은 '이야기 한국 고대사'가 맞습니다. 수정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25 (KST)답변
아사달님. 두막루의 비중에 대한 문제는 국편위 한국사가 예전 책이고 최신의 연구성과를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 하시며 다른 논문들을 언급하셨습니다. 물론 최신의 연구결과 또한 중요합니다만, 역으로 말하면 더 이상 연구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에 학계에서 연구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위의 '이야기 한국 고대사'의 경우 한국 고대사 자체가 대중의 관심 대상이었고 학계의 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데 치중한 서적이라 생각합니다. 천리주단기님이 올려주신 부분과, 전체 쪽수와 비교해서 볼 때, 아직 학계에서 아사달님이 생각하시는 만큼 두막루국의 비중을 한국사-틀에 반영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6:17 (KST)답변
두막루 자체가 한국의 역사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이 긴 토론을 하는 제가 참 힘이 들군요. "더 이상 연구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에 학계에서 연구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추측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 연구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를 할 것입니다. 2004년에 나온 논문 제목이 <두막루... 시론>입니다. 즉, 앞으로 더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시론이라는 뜻입니다. 연구할 필요성은 매우 큰데, 여러 가지 여건상 우선 시론을 발표한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은 연구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비중'에 대한 판단은 개론서나 중고등학교 교과서로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학계 연구논문이 우선입니다. 두막루는 옥저, 동예, 태봉, 후백제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이 있는 국가이고, 당연히 더 큰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23 (KST)답변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군요. 어느 학계에서 어느 학자가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보다 훨씬 더 비중이 있다고 썼습니까? 그것은 지금 귀하의 독자연구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6:25 (KST)답변
시론이라고요? 그렇다면 학계에서 이제야 뿌리를 내리는 수준입니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다면 지금 한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더 큰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학계가 아니라 아사달님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두막루에 대한 연구가 지금 초기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한국사 틀에 들어갈 정도의 비중있는 국가는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2007년 발간된 《이야기 한국고대사》에서 두막루에 대하여 언급된 사항에서도 아직 학계의 논의 중이라는 태도였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6:28 (KST)답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시론에 나온 내용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그 역사적 비중이 입증된 상태입니다. 본 연구까지 나오면 훨씬 더 큰 비중을 가지게 될 것이지만, 그건 아직 안 나왔으니, 논외로 합시다. 현재나온 연구 결과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한국사 틀에 실릴만큼 비중이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33 (KST)답변
아직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 역사적 비중이 충분히 입증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국내 관련 서적과 논문이 딱 3권인데도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6:37 (KST)답변

토론이 어떤지 여부를 떠나 상대방의 의견 비하이나 공격적인 언행에 대해서는 주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3자로서 보기 참 껄끄럽습니다. --어쏭(우리 소통합시다.) "희망을 드립니다." 2012년 7월 10일 (화) 16:34 (KST)답변

두막루의 역사적 비중 토론 2

한국사와 관련된 배경지식이 적어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포함될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사달 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 일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막루가 300년 간 존재했기 때문에 한국사 틀에 포함될 정도로 한국사에서 비중이 있는 대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탐라국, 우산국에 서술된 존치기간을 참고하니 300년 혹은 특정 기간을 기준으로 한국사 틀에 실을 수 있냐/없냐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존재 기간이 길어도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짧아도 그 나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대상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보다 두막루의 비중이 더 크다는 점에 대해서는 한국사를 잘 모르는 사용자 입장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문 서적이나 전문 자료까지는 잘 모르겠고 그 자료에서 각 대상에 대해 어떻게 서술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순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봐도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는 한국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두피디아 백과사전 등 온라인 백과사전에 실려있지만, 두막루는 실려있지 않은 점, EBS 연계 교제 내용 조회 서비스[4]를 이용하여 국사 관련 교재의 자료를 찾아봐도 온라인 백과사전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점, 네이버 전문정보 검색[5] 서비스를 이용하여 검색해보면 학술정보 검색 결과가 3건에 불과한 두막루와 달리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는 그보다 수십배 이상 더 많은 학술정보가 검색되는 점 등을 참고하면 전문적 배경지식이 없는 사용자 입장에서는 온라인 자료들을 찾아봤을 때 오히려 두막루보다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가 한국사에서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네이버 학술정보 검색 기준으로는 오히려 '두막루'보다 '탐라국', '우산국'의 검색결과가 더 많이 나오는군요.)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33 (KST)답변

Min's 님도 오셨군요. 잘 생각해 봅시다. 두막루에 대해서 삼국사기 등 대한민국 이전에는 잊혀진 나라였다가 근래에 연구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를 해보니, 대단한 결과가 나온 겁니다. 연구 논문 편수가 적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안 나온다는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백과사전이나 온라인에 안 나온다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내용을 잘 생각해 보세요. 2004년 논문을 한 번 찾아서 읽어봐 주세요. 국회 전자도서관에 있으므로,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한국사의 역사적 비중을 입증했습니다. 설령 단 한 편의 논문일지라도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면, 논문의 편수에 상관없이 역사적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막루의 역사적 비중이 왜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 등보다 더 큰 지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 두막루는 300년간 지속된 나라입니다. 불과 1-2년 지속된 나라, 혹은 겨우 30년도 지속되지 않은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오랜 기간입니다. 물론 단순히 오래 지속되었다고 하여 비중이 크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우산국 등 더 오래 지속된 나라도 많지만, 두막루에 비해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2.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서 두막루는 매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을 중국에 보내 여러 차례 조공 외교를 전개했습니다.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 중 과연 어떤 나라가 (혹은 우산국이)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중국으로부터 정식 국가로 인정을 받고 사신을 보낸 경우가 있었던가요?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고대 동아시아는 중국을 황제의 나라로 보고, 주변 국가를 제후국으로 보았는데,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정식 국가로 인정이 되었습니다. 두막루는 300년간 총 5회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지만,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 우산국은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냥 한반도 내에서 잠깐 설립되었다가 사라진 국가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두막루는 300년간 중국과 교류하면서 정식 국가로 사신을 파견한 나라입니다.
  3. 한국사와의 관련성에서 보자면,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또한 그 영토가 발해로 흡수되어 발해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막루는 부여와 발해를 잇는 중간 다리에 해당합니다. 이런 점에서 두막루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두막루가 한국사에서 그 비중이 매우 크다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44 (KST)답변

2004년에 발표된 논문 한 편이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 평가했다면 그 후에 나온 저작물에서 '두막루'를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야 합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연구 성과물이 쏟아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아사달님께서 계속 언급하시는 논문도 제가 지금 훝어보고 말씀드리지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6:49 (KST)답변
{편집 충돌}두막루에 대해 폄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직 학계에서 그만한 논의가 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한국사-틀에서 이전과 같은 비중으로 두기는 시기상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 말씀드립니다만, '발해-후발해, 정안국'과 같이, '부여-두막루'로 두자는 것입니다. 이는 충분히 납득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6:53 (KST)답변
조공을 보냈다고 정식 국가로 인정받았다 하셨는데 그리고 결론적으로 두막루와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와는 비교와도 할 수 없습니다. 두막루가 있던 5세기 - 8세기는 중국의 통일이 완성된 수, 당 시기입니다. 허나 태봉, 후백제 때는 이미 당나라는 망하고 오대십국 시대가 열렸는데 그걸 가지고 두막루는 정식 국가로 인정받고 나머지는 괴뢰 국가로 취급 할수 없는 것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7:01 (KST)답변

의견 두막루에 대해서는 홍익대학교 한국사 서지 검색에서 1991년 이후 단 3편의 논문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논문의 출전은 백산학회등 비주류 연구 집단입니다. 어떠한 이론이 주류의 설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옳지 않다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위키백과의 백:중립성백:출처에서는 되도록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과 설명을 우선하여 백과사전의 문서를 편집하고 비주류 이론에 대하여는 간단한 소개 이상을 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두막루는 최대한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여도 정설로서 채택되지 않은 사안이므로 연표와 같은 주요 틀에 집어넣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두막루 문서 자체의 출처도 백산학회등 사관이 매우 편향적인 단체의 것 밖에 없어 보다 중립적인 관점의 서술이 필요하여 보입니다. -- Jjw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52 (KST)답변

Jjw 님도 오셨군요. 두막루에 대해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줄 몰랐습니다. (^_^) 두막루에 대해서 소수설로 보시는 듯 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발행한 책에(1991년 책에)도 나온다고 하니, 2004년에 나온 논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이야기 한국 고대사 등 시중에서 판매 중인 통사 서적에도 나오고 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 등에서 편찬한 책에도 나옵니다. 두막루 자체가 비주류 이론인 것은 아닙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6:59 (KST)답변
(편집 충돌)백산학회가 자꾸 사관이 편협된다고 나오는데요. 백산학회 설립 취지만 놓고 보면 분명 그렇게 판단할 여지는 충분하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백산학회 편집위원분들이 그런 사관에 물들어 있는분들이냐라고 물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학회의 성격에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자유지만, 논문을 읽고 나서 비판할 문제입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이 비록 뉴라이트계열이 홍보를 해서 다 뉴라이트 처럼 비춰졌지만, 그 책에 기고한 교수들 중 일부의 논문은 전혀 뉴라이트와 관계 없고 한국근현대사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져준 것으로 충분히 가치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또한, 백산학회 편집위원 자체만 놓고 보아도 고려사의 한국 일인자 박용운, 고구려 사회문화에 대해 인정받고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전호태 등, 백산학회 전체를 폄훼하기는 그들의 학문적 성과로 볼 때 어렵습니다. 단지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국가들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이대로는 흑백논리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17:09 (KST)답변
Jjw 님, 200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4권, 201쪽에서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 나온다고 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사관도 편협한건가요? 그런 식으로 흑백 논리를 내세울 때는 아닌 듯 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15 (KST)답변

위에도 썼지만,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국가로 보는 것은 소수학설, 비주류학설, 환단고기 류의 학설이 아닙니다. 중국 측 사서와 역사학계의 논문 및 단행본 서적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인터넷사이트 등 충분한 출처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학계에서 아무런 반대 주장이나 소수설도 없는 상황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02 (KST)답변

  1. 두막루에 대한 중국 측 사서
    1. 《위서》(魏書) 두막루조
    2. 《위서》(魏書) 물길전
    3. 《신당서》(新唐書)의 유귀전(流鬼傳)
    4. 《만주원류고》의 권1 부여(夫餘) 편
    5. 《책부원귀》(冊府元龜) 외신부 조공조
  2.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논문
    1.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
    2.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3. 중국 측 학자들의 연구
    1. 孫進己 저, 임동석 역, 《동북민족원류》, 1992.
    2. 干志耿, 〈古代槀離硏究〉, 《民族硏究》 第2期, 1984.
    3. 張博泉, 〈魏書豆莫婁傳中的幾個問題〉, 《黑龍江文物叢刊》 第2期, 1982.
    4. 溤家昇, 〈豆莫婁國考〉, 《禹貢》半月刊 7卷 1,2,3 合刊, 1937.
    5. 傳朗云, 楊楊, 《東北民族史略》, 吉林人民出版社, 1933.
  4. 역사 단행본 서적
    1. 《이야기 한국 고대사》, 2007.01.25. :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쓴 책
    2. 《고조선 단군 부여》, 2007.11.30. : 동북아역사재단이 지은 책
    3. 200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4권, 201쪽.
  5. 인터넷 사이트
    1.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중 두막루 부분

정보 아사달님께서 근거로 제시하는 논문인 유태용(경기대학교 박물관 상임연구원)의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를 살펴보았는데 19페이지가 전부네요. 지금 아사달님께서 말씀하시는 두막루에 관한 설명은 거의 이 논문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군요. 결론 부분만 발췌해 봅니다. 그리고 님께서 주장하시는 근거 자료 중에 4번 서적에서 《이야기 한국 고대사》에서 두막루는 1페이지, 5번, 국사편찬위원회 링크는 각주이고 그 내용도 《위서》의 보충 설명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7:05 (KST)답변

사료들을 여러 측면에서 검토한 결과 두막루국은 또다른 부여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첫째, 두막루국은 적어도 486년 이전에 나하 북쪽의 구부여 고지에 건립된 부여족 국가이며, 두막루는 고구려어와 부여어로 '구토회복'을 의미하는 '다물'과 같은 뜻이다. (중략) 둘째, 사서에 따르면 두막루국은 ~ (중략) 오늘날의 송눈평원의 동부과 송요평원의 북쪽에 위치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섯째, 두막루국의 사회는 부여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중략) 넷째, 두막루국의 문화도 부여와 유사하다. (중략) 마지막으로, 두막루국은 A.D. 724년에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기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서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흑수말갈과 발해가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두막루국은 두 나라에 국도가 양분되면서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끝)

의견 두막루를 부여의 후계 국가이자 우리 민족의 국가로 보는 시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로써는 학계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학자들이 단편적인 관심 이외에 특별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군요. 두막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막루를 한국사의 큰 틀의 하나로 인정하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많다는 점이 명백하거든요. 아사달 님께서 제기하신 3가지 항목에 대해서도 사실 충분히 반박이 가능합니다.

  1. 존속 기간으로 따지자면, 이미 아사달 님께서 제기하신 우산국을 비롯해서 삼한의 100여 개에 달하는 소국이나 가야 제국을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들 국가를 하나하나 다 틀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2. 국제정세를 따져야 한다면, 삼한, 그리고 초기 신라는 아예 국제정세에서 존재 여부를 찾아볼 수 없는 마이너 국가가 됩니다. 중국과 교류 몇 번 했다는 것이 그 국가의 중요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3. 계승 관계만 따진다면 고구려 멸망 이후에 건국된 계승 국가나 괴뢰국은 훨씬 더 많습니다. 발해 멸망 이후에 건국된 후계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을 모두 다 틀에 넣어야 할 당위성은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아사달 님께서 지적하신 태봉이나 후백제 같은 국가는 그 국가 자체가 후계 국가인 고려로 직접 이어지며, 후삼국의 쟁패가 벌어진 장소 자체가 비할데 없는 중요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두막루는 아닙니다. 두막루는 한국사의 일반적인 강역으로 여겨지는 영역을 넘어선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실 발해로 계승되었다고 볼 여지조차도 크지 않습니다. 게다가 설사 발해로 계승되었다손 치더라도, 그 위치로 볼 때 발해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계승 관계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습니다. 도저히 한국사의 주류 국가(...)로 볼 당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한국사학계도 두막루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사실 틀에 들어갈 가치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의견 부탁드립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15 (KST)답변

아사달님께 - 너무 간략히 의견을 쓰니 약간의 오해가 있군요. 풀어 써 봅니다.

  1. 두막루가 실재하였던 나라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그 구성원의 실체 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현재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은 백산학회 등의 논문 이외에 분명한 출처가 없습니다.
  2. 제가 비주류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두막루의 부여 계승설 입니다. 이 역시 백산학회 등의 주장 이외에 별다른 분명한 출처가 없습니다. 백산학회는 스스로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近代朝鮮에 이르러 반도 이외의 古土가 망각된 것은 통탄스러운 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는 등 매우 민족주의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관을 갖는 여러 역사적 입장을 일반적으로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3. 어떠한 이론이 주류 이론, 즉 해당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는 일반적 견해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대다수의 교과서나 주요 강의 교재에 해당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가의 여부, 또는 여러 관련 학회가 그 이론을 지지하는 가의 여부, 중요 저널이나 학회지에 논문이 수록되었는가의 여부가 그러한 조건들입니다. 현재의 두막루 부여 계승설은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간단히 말씀드리면 역사학회등의 보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학회와 학술 집단의 추가적인 지지가 있어야 두막루의 부여 계승설을 한국사 연표에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Jjw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17 (KST)답변

덧붙임 - 물론 다른 일반적인 역사서에 간단한 언급이 있습니다. 아사달님이 언급하신 국사편찬위의 것을 포함해서 고려하여도 그 설명의 핵심 내용은 이러한 새로운 주장이 있기도 하다는 소개 이상을 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위키백과의 중립성을 말씀드린 것과 정확히 같은 입장입니다. 따라서 두막루 문서는 국사편찬위의 것을 포함한 보다 객관적인 출처를 통해 보강될 필요가 있고, 역사 연표에는 아직 삽입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 Jjw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25 (KST)답변

정보 아사달님께서 두막루의 근거 자료로 제시하시는 중국측 학자들의 연구(孫進己, 干志耿, 張博泉, 溤家昇)는 유태용(경기대학교 박물관 상임연구원)의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에서 두막루의 건국 시기를 추정하는데 인용될 뿐 그 이상의 언급은 없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7:23 (KST)답변

아사달 님께 추가로 한말씀 드립니다. 이전에 토론에서도 몇 차례 느꼈던 것인데, 아사달 님께서는 본인이 찾아서 참고한 자료를 무작정 신뢰하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상나라 동이족 관련 논쟁에서 인터넷 검색 결과에서 인용한-그러나 과연 그게 사실인지조차 의문시되는-자료를 토대로 “모든 학계가 동의하는 사실”이라 주장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나 학자라는 양반들도 사람인지라, 자신들이 연구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실제 사실보다 더 좀 과장되게 중요성과 신뢰성 등을 설파하는 경향이 있게 마련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부조화라고 부르기도 하죠. 물론 인지부조화보다는 훨씬 약한 증세(?)기도 하지만요. 좀더 쉽게 말하자면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나 할까요?
즉, 논문에 이 것은 한국사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라고 써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중요한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겁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연구 주제의 중요성은 많은 학자들의 검토와 비판, 동의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지 한 개인의 연구자가 논문에 이건 진짜 중요한 것이다라고 쓴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막루가 정말 중요한 역사라면 더 많은 학계의 연구가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중요성이 확인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41 (KST)답변
Xakyntos 님도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몇 개월만에 다시 위키백과에서 이렇게 만나는군요. 그 때나 지금이나 가장 치열한 논쟁의 시점에서 만나는군요. 두막루가 뭔지, 토론 내용과 별개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다니 참 대단합니다. 제가 학계 교수나 연구자들을 평가할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고, 위키백과의 일개 편집자인 제가 독자연구를 수행할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학계의 권위 있는 논문들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여 위키에 올린 것뿐입니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이러저러한 출처에서 이러저러하게 설명이 되어 있다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51 (KST)답변
네. 오랜만에 뵙네요. 반갑습니다. 위에 쓴 글에 대해서 첨언을 하자면, 논문에서이건 정말 중요한 것임이라고 쓰는 것은 일종의 관례이자 외교적 수사(?)입니다. 학자가 논문을 쓰는데 중요하니까 쓰지 안 중요한 걸 쓰진 않겠지요. 저것을 좀 노골적으로 풀자면, 내 생각에는 이렇게 이렇게 중요한 거 같다. 그러니 관심 좀 부탁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두막루와 관련된 논문 역시 마찬가지죠.--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56 (KST)답변

두막루의 부여 계승성

두막루의 부여 계승설이 과연 역사학계의 비주류 혹은 소수 이론인가요? Jjw 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먼저 이것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비주류 혹은 소수 의견이라면 당연히 한국사 틀에 들어갈 여지는 없게 됩니다. 두번째 쟁점인 '비중' 토론은 할 필요도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7:54 (KST)답변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두막루가 비주류 의견이 아니라고 역사적 비중이 갑자기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7:57 (KST)답변
제가 많은 논문을 살펴본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일반적인 비주류나 소수 학설과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오히려 미개척 분야에 가깝죠. 아무도 관심을 특별히 기울이지 않았던 두막루를 최근에 몇몇 연구자가 연구를 시작한 것이라고 봅니다. 부여 계승설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학계의 주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겠지요. 굳이 따지자면 비주류 학설이라고 할 수는 있겠네요.--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8:00 (KST)답변
그럼 두막루에 대한 주류의 학설은 무엇인가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8:05 (KST)답변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무도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두막루라는 나라가 있었나보다 하는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는 말이죠.)--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8:07 (KST)답변
그럼 국사편찬위원회나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곳에서 발간한 책에는 왜 두막루에 대해서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서술한 것일까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8:08 (KST)답변
보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지금 백산학회 등이 주장하는 바가 학계 전반에서 사실이라고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면, 동예나 옥저 정도의 역사적 지위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 시기 상조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한 소개를 마치 국사 학회 전반이 두루 중요하게 인정하는 것 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과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 Jjw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8:10 (KST)답변
사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사료에 기록된 것대로 치자면 신라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의 후계 국가가 되고 기자조선은 사실이 됩니다. 그러니 연구와 비판이 필요한 것이죠. 두막루가 부여의 후계국가라는 기록은 명백하지만,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그러니 소위 주류 학계에서는 기록에 이런 것이 있긴 하다는 수준의 간단한 언급 이상의 반응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인거죠. 연구가 부족하니까요.--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8:13 (KST)답변
비주류, 주류를 떠나 대중적 저명성으로는 제로에 가깝습니다. Xakyntos님이 말씀하셨듯, 이 나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 중에서 몇명 정도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유는 제가 누누히 말씀드렸습니다. 유물, 유적도 아직 발굴하지 못했고 연구가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간만 본 상태에서 우리가 음식을 다 먹었다고 할 순 없는 것이죠.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8:19 (KST)답변

의견 두막루의 한국사 틀 추가는 아직은 불가능하다고 여러 사용자들의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토론 문서가 지나치게 길어진 것 같아서 이 문서는 보존으로 이동하고자 합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8:39 (KST)답변

후발해와 정안국의 틀로부터 삭제

후발해정안국을 틀에 특별히 삽입해야하는 이유가 있나요? 과거 기록을 보니 아사달 님께서 2012년 3월에 틀에다가 추가하신 것으로 나오네요.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8:25 (KST)답변

사실 제가 수정하려 했을 때 이것도 뺄까 생각을 했지만 정안국의 경우는 그래도 꽤 알려진 경우여서 내버려뒀고 가장 문제가 되는 동란국, 즉 거란이 발해에 세운 괴뢰 정부만 일단 지웠습니다. 계속 보니 이것도 딱히 있을만한 이유가 있는지 조금 의아합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0일 (화) 18:31 (KST)답변

이의 제기

한참 토론하다가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더니, 갑자기 토론 내용이 다 보관함으로 사라져 버렸네요.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좋지만, 이건 좀 너무 하군요. 옳고 틀린 것을 떠나서 토론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싶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13 (KST)답변

토론을 계속 진행하시고 싶으시면 이 토론란에서 의견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토론 문서의 길이(3십만 바이트)가 지나치게 길어져서 피치못하게 옮긴 것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9:17 (KST)답변
결론이 나거나 여러 사용자들의 의견이 모아져서 옮긴 것인가요, 아니면 정말로 문서가 길어져서 옮긴 것인가요? 제가 저녁 06:05분에 마지막 글을 남기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1시간 정도 하고 돌아왔더니, 그 많던 토론 글이 전부 사라져 버렸네요. 아무리 토론이 뜨거워도 1시간 정도 식사 할 시간은 주셔야죠? 식사하러 간 사이에 토론이 정리되고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글을 다 이동해 버리는 것은 토론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싶습니다. 며칠간이나 지속되던 토론인데 잠깐 1시간 정도 식사할 시간도 안 주는 건가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20 (KST)답변
그럼 지금이라도 계속 이야기를 나눠보면 되지요:-) 문서를 어떻게 보존해야 하냐에 대해서도 얘기하다보니 계속 길어졌는데, 또 토론을 보존했어야했냐 말았어야 했냐 이야기하다 보면 길어지고 본래의 토론 진행에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 같네요.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22 (KST)답변
예, 밑에서 다시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Min's 님이 삭제한 글인지도 모르고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사과까지 했는데, 저는 이런 무례한 일을 당해도 그냥 넘어가야 하나 보군요. 어쨌든 밑에서 다시 논의를 재개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37 (KST)답변
토론 문서가 삭제된 것이 아니라 보존된 상태입니다. 보존된 토론에서 아직 논의가 덜 된 부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기존 보존된 토론에서 꺼내오셔도 됩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40 (KST)답변
토론이 길어져서 보존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러 간 틈을 타서 마치 결론이 모아진 것처럼 하면서, 예전 토론을 다 옮겨버리고 다른 토론을 시작하니까(한국사 틀에서 정안국을 빼자는 토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의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45 (KST)답변
토론을 보존하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보존된 토론 내용 중 일부 내용에 대해 계속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의 제기"하며 보존이 옳으냐/아니냐 논의를 시작하면 주 논의 내용의 토론 진행을 더디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경우에는 보존된 토론 내용 중 필요한 일부 내용을 다시 꺼내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아사달 님의 사용자토론에 말씀드렸던 내용을 예를 들어 비꼬시는 듯이 말씀하시니, 제가 말씀드린 그러한 내용들이 아사달 님께서는 불쾌하게 생각하셨던 것은 아닐지하는 생각이 들어 사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51 (KST)답변
아울러 이전에 제가 드린 말씀에 대한 답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아사달 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산국의 존치 기간이 길어도 한국사에서 중요한 요소로 보지 않는 것처럼, 존치 기간을 근거 중 하나로 삼기보다 다른 여러 근거들을 더 봐야하지 않냐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제가 한국사에서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넣을 만큼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두막루가 그런 대상인지는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막루가 한국사에서 중요한 대상이라는 주장과 의견에 대해서는 잘 알겠는데, 저는 단지 아사달 님께서 말씀해주신 동예, 옥저, 태봉, 후백제가 두막루보다 한국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습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31 (KST)답변

저는 문서 길이의 양 때문에 문서를 옮긴 것입니다. 아사달 님께서 식사를 하러 가셨는지 제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이로 인해 언잖게 생각하신다면 사과드리지요. 그럼 저도 하나 집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어제 토론을 하는 중간에 틀토론:한국사/보존1#재미 있는 예전 글을 게시한 것은 토론 상대방인 저에 대한 무례한 행동 아니십니까?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19:52 (KST)답변

어쨌든 두막루를 한국사 틀에서 제외하자는 안에 대해 '총의'가 모아져서 문서를 옮긴 것은 아니고, 단지 문서의 길이가 길어져서 옮긴 것뿐이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저에 대한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제 토론 중간에 "재미 있는 글"을 올린 것은 예전 두막루 토론 때와 상황이 비슷해져서 참고하시라고 올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결국 토론이 진행되다 보니,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는군요.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0:03 (KST)답변

두막루에 대한 3가지 질문에 대한 의견조사

두막루에 대해서 3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각자의 의견을 부탁합니다.

1.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국가이다. (동의, 아님, 모름)

2. 두막루는 한국의 역사에 포함된다. (동의, 아님, 모름)

3. 두막루는 한국사 틀에 표시할 수 있다. (동의, 아님, 모름)

위에서 천리주단기 님께서 총의가 모아진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정말 그러한 것인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사실 역사학계에서 정할 일을 이곳 위키백과에서 비전문가들끼리 정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결정은 내려야 하니, 어쩔 수 없군요. 참고로 저는 이곳에서 난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34 (KST)답변

"역사학계에서 정할 일을 이곳 위키백과에서 비전문가들끼리 정한다는 것"이라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한국사 틀에 실어야 할지, 말지를 역사학계에서 정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37 (KST)답변
1번과 2번은 역사학계에서 정하는 게 맞습니다. 3번도 역사학계에서 정해주면, 우리끼리 이런 고생(?)을 안 해도 되고 좋겠다는 개인적 바램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41 (KST)답변
위키백과는 외부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설사 외부에서 한국사 틀에 포함될지 말지 결론을 내려 정해준다한들, 그것이 한국어 위키백과 사용자의 의견보다 우선시 될 수 없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전문가들이나 권위자들을 다른 위키백과 사용자보다 더욱 중요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46 (KST)답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의견과 위키백과 일반 사용자의 의견이 다른 경우에 대해서는 저와 의견이 다른 것 같은데, 위키백과의 저명성 지침과도 관련이 있는 내용이니까, 이곳이 아니라 나중에 다른 곳에서 깊이 토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54 (KST)답변
아, 외부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사달 님이 이 분야 전문가이시고 자신의 의견이 전문가의 의견이니 자신의 의견이 비전문가인 다른 사용자보다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나요?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57 (KST)답변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제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더 중요하거나 비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전문가인 역사학자들의 논문을 정리하여 위키백과에 올린 것뿐이고, 반론이 들어와서 제가 본 여러 논문들의 출처를 제시한 것뿐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0:09 (KST)답변
아, 그런 뜻이었군요. 제가 저런 말씀을 드린 것은 제 의견이 아니라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라서 Ellif 님이 말씀하셨던 의견[6]을 빌려봤습니다. 전문가의 의견을 중심으로 백과사전을 만드는 시티즌디움와 달리 위키백과는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출처나 여러 근거를 제시해야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그 의견 또한 다른 사용자와 동등하게 취급됩니다. 외부 전문가 역시 한국어 위키백과의 내부의 의견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고요. 아사달 님이 말씀하신 것은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할 수 있다면 참고하면 좋겠다는 뜻으로 표현하신 것이겠지요?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0:19 (KST)답변
가장 최근에 쟁점이 되었던 사안은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포함될 만큼 비중이 있는 국가인가, 아닌가' 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시하신 의견을 따른다면 부여를 계승한다->한국의 역사에 포함된다->한구사 틀에 포함할 수 있다. 로 토론이 일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을지 우려됩니다. --비엠미니 2012년 7월 10일 (화) 19:38 (KST)답변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유도할 생각도 없습니다. 1번, 2번, 3번 모두 저처럼 찬성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두막루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정확히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41 (KST)답변
역사학계가 정할 일은 두막루가 한국사에 포함될지 안될지, 그리고 그 비중을 연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 틀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국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인과관계가 성립되진 않습니다. 한국사 틀에 포함시킬지의 여부는 역사학계가 정할 일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비엠미니 2012년 7월 10일 (화) 19:48 (KST)답변
글쎄요. 과연 두막루를 한국사 틀에서만 빼고 끝날 수 있을까요? 두막루 문서에 대한 삭제토론이 들어오지나 않을지 걱정도 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19:51 (KST)답변
저는 "사실 역사학계에서 정할 일을 이곳 위키백과에서 비전문가들끼리 정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합니다만" 이라는 말씀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일 뿐, 틀 내 존속 여부에 대한 별다른 의견을 제시한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해당 문서의 한국사 내 비중에 대한 토론이 심화되었다고 삭제토론이 들어오지의 걱정은 성급한 기우라고 생각합니다. --비엠미니 2012년 7월 10일 (화) 19:58 (KST)답변
윤성현 님이 말씀하시기를, 학계에서의 주류/비주류를 떠나서 두막루에 대한 대중적 저명성이 제로에 가깝다고 쓰셨네요. 저명성 부족으로 두막루 문서를 삭제라도 하시겠다는 건지? 정안국도 한국사 틀에서 빼자고 하시고...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0:06 (KST)답변
'대중적 저명성'과 '저명성'은 포함관계일 뿐, 저명성 부족으로 즉각 결부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윤성현님께서 말씀하신 대중적 저명성은 한국사적인 비중도를 토론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사용하신 말씀일 뿐, 해당 문서의 존속 여부를 따지기 위한 저명성에 대한 언급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저명성의 개요 문구를 인용하자면, '명성, 중요도, 유명함이 판단을 확고히 하는데에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저명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이 요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지는 않습니다.'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비엠미니 2012년 7월 10일 (화) 20:12 (KST)답변
지나치게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윤성현 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 만큼 한국사 틀에 실을 만큼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문서를 삭제해야한다는 뜻이 아니고요. 위키백과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다고 삭제하지는 않습니다. 위키백과는 백과사전이기 때문에 대중적인 것만을 싣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어려운 과학 용어나 법칙, 원리도 백과사전에 실릴 수 있지요. -- Min'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0:12 (KST)답변

한국사 틀이 모든 국가를 포함할 수 없어서 비중 문제를 따지게 된 것일 뿐, 두막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아사달님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Sotiale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0:13 (KST)답변

Min's 님과 Sotiale 님의 답변이 저에게 힘을 주는군요. 하지만 저 분들이 두막루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 추측(?)인가요, 아니면 정말로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건가요? 앞의 여러 토론을 통해서 볼 때, 윤성현 님이나 천리단주기 님 혹은 Jjw 님 등은 두막루를 아예 모르거나 아니면 부정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혹은 인정할 수 없는) 나라를 한국사 틀에 추가하자고 하니까 거부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한국계 국가라는 점을 인정도 할 수 있지만) 비중이 적어서 빼자고 하는건지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 위에 있는 저 의견 조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0:45 (KST)답변
토론을 보니 제시하신 다른 사용자 분들께서 한국사의 내용임을 부정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듭니다. 단지 비중 문제를 논하게 되면서, 두막루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있었겠지만 해당 사용자분들이 한국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제시하셨었지 않나요? 그러한 기우까지는 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Sotiale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0:48 (KST)답변
아사달님께서 두막루의 근거라고 제시하신 자료 중에 김정배 논문과 동북아역사재단의 책만 안보았지 다른 것은 다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모르는 거라고 단정할 수 없지요. 저는 두막루를 부정한다는 주장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고, 오로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이 작으니 틀에서 빼자고 일관되게 주장하였습니다. 제 입장을 아직도 모르겠다고 하신다면 제가 여태까지 누구와 토론한 것입니까?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20:50 (KST)답변
천리주단기 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두막루에 대해서 한국사에 포함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1:20 (KST)답변
저는 아사달님과 역사적 비중에 대해서 여지껏 토론해왔습니다. 당연히 한국사 포함 여부는 해당 토론의 주제가 아니니 제가 따로 특별히 의견을 제시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관심도 없다고 밝힌 것입니다. 제발 제가 주장한 것 이상으로 해석하거나 추측하지 마십시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21:26 (KST)답변

반대 두막루는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이 매우 낮기 때문에 현행 한국사 틀에 삽입을 반대합니다. 아사달님이 제시하신 유태용의 논문은 19쪽짜리의 각주만 있을 뿐이지 참고문헌도 따로 적혀있지 않은 논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자료도 1페이지, 또는 각주이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한국사》에도 10줄 뿐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현대 중국 학자의 자료라고 소개하신 서적은 유태용 논문에서 두막루의 건국 시기를 추측하기 위해 인용한 각주에서 등장하는 책들입니다. 해당 서적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도 없습니다. 2010년까지 한국사에 관련된 논문 중에 두막루에 관한 것은 서적이 1권이고 논문이 2개입니다. 두막루는 연구 성과가 거의 없는 분야입니다. 이런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비중있게 등장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나 학술연구단체에서 제시하는 연표에 두막루가 비중있게 등장한다면 그때 한국사 틀에 넣으면 모를까 지금은 멀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한국사 틀에서 제외된다고 한국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라는 추측은 제발 그만해 주십시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21:34 (KST)답변

천리주단기 님이 3번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1번과 2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02 (KST)답변
중국측 고대 사서에 따라 두막루가 부여계 유민에 의해서 세워진 국가이고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1번과 2번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22:11 (KST)답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군요. 어쨌든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볼 수 있다는 천리주단기 님의 말씀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윤성현 님만 동의하면 되겠군요. 물론 '비중'이 없으니 한국사 틀에 추가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19 (KST)답변

토론 과정 정리 및 의견

그동안 토론이 진행된 과정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1.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한국의 역사로 포함할 수 있으며, 한국사 틀에 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 상태로 한국사 틀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2. 이것에 대해서 윤성현 님이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한 나라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으며, 한국의 역사에 포함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고, 한국사 틀에는 당연히 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한국사 틀에서 두막루를 제거하였습니다. ---> 여기서 첫번째 쟁점이 생겼는데,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인가 아닌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여러 출처를 제시하고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보는 역사학계의 권위 있는 연구가 많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윤성현 님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3. 이 때 천리주단기 님이 토론에 참여하셔서,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나라인지 아닌지는 이곳에서 토론할 사항이 아니며, 설령 한국계 국가이라고 할지라도 한국사 틀에 실릴만큼 '비중'이 크지 않으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 이로써 두번째 쟁점이 생겼습니다. 물론 이 말은 천리주단기 님이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인정했다는 뜻이 아니며, 단지 한국계 국가라고 '가정'을 하더라도 '비중'이 적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긴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토론의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4. 오늘 새로 여러 사람들이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출처도 더 많아지고 풍부해졌습니다. 두막루를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로 보는 다양한 연구논문과 단행본 서적, 사이트 등이 제시되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몰랐던 출처를 새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Jjw 님이 말씀하시기를 비록 출처가 있다고 하더라도 비주류 이론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주류 이론이라면 한국사 틀에 추가하기 어려운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주류냐, 비주류냐 하는 세번째 쟁점이 생기던 중에 제가 1시간 정도 식사하러 간 사이에 갑자기 토론이 종결되고, 결론이 난 것처럼 오해가 되었습니다.

이상이 제가 본 이번 토론의 진행과정입니다. 결국 아직까지 위 세 가지 쟁점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결론이 난 것이 없습니다.

  • 첫번째 쟁점은 두막루에 대해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가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 두번째 쟁점은 두막루를 한국계 국가로 인정하더라도 한국사 틀에 추가될만큼 비중이 큰가 하는 점입니다.
  • 세번째 쟁점은 두막루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가 주류 이론인가, 비주류 이론인가 하는 점입니다.

위 3가지 쟁점에 대한 제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첫째,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가 맞다는 학계의 연구논문과 서적이 많으므로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 둘째, 두막루는 300년간 지속되고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서 사신을 파견하는 등 비중이 큰 나라이므로 한국사 틀에 추가될 수 있습니다.
  • 셋째, 학계에서 두막루에 대한 연구자가 적어서 반대 학설 또는 소수설 자체가 없는 상황이므로 주류인지 비주류인지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지금까지의 논의 과정을 정리하고, 제 의견을 덧붙여 보았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1:48 (KST)답변

틀토론이니까 두막루에 한국사 인정 논쟁은 토론:두막루에서 이동하여 하시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두막루에 대한 다양한 연구 논문은 현재까지 없습니다. 한국어로는 논문이 2개이고 서적이 1권일 뿐입니다. 한국사 틀에 삽입은 아사달님 혼자만이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두막루을 한국사 틀에 임의로 삽입하신 분도 아사달님 본인이십니다. 주류/비주류 논쟁이 아니라 역사상 중심에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토론이 맞습니다. 주류/비주류 논쟁은 아사달님이 언급하신 환단고기 논쟁에서 등장할 이야기입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21:53 (KST)답변
세번째 쟁점 즉 주류인지, 비주류인지는 잘못된 논점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Jjw 님이 이번에는 문제를 잘못 파악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환단고기 류의 논쟁을 할 때 유사 역사학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낙랑의 성격과 위치를 이야기할 때 주류/비주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번 두막루 건은 그런 사항이 아닙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07 (KST)답변
그리고 두막루에 대해서 논문 2개, 서적 1권이라고 하셨는데, 그보다는 많습니다. 보존된 토론에 가 보면, 한국에서 발행한(권위 있는 곳에서 발행한) 단행본 서적만 3권이고, 중국 측 논문이 더 있습니다. 앞에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논문도 1개 정도 더 있을 겁니다. 물론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발해 역사를 다룬 책이 조선시대 말까지 겨우 [발해고] 1권이었다는 점도 기억해 주세요. 논문의 편수가 많으냐 적으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비록 몇 사람이기는 해도, 두막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12 (KST)답변
아예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이라는 수사를 붙일 정도의 논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측 논문도 유태용의 논문의 각주에 등장한 6개에서 두막루라는 명칭이 적힌 것은 2개뿐입니다. 더욱이 해당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합니다. 두막루에 대해서 중국측 학자의 서적에 무엇이라고 적혀있는지 아시는지요? 논문의 편수가 많으냐 적으냐로 역사적 비중을 따지는 것은 안될 일이지만 10개도 안된다는 것은 그만큼 비중이 없기에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태용이라는 분이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신 권위자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천리주단기 2012년 7월 10일 (화) 22:18 (KST)답변
두막루에 대한 학계의 연구 논문이 많지 않고, 큰 관심도 못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학계에서 볼 때 두막루가 다른 분야에 비해 연구 주제로서 '비중'이 적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를 합니다. 하지만 한국사 틀에 실릴 비중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시니까 좀 생각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22 (KST)답변
쟁점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여기서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왈가왈부한다고 해서 두막루가 부여의 계승 국가인지 아닌지, 한국사의 일부인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롯이 대한민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한국사학계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앞선 토론에서 아사달 님께 말씀드린 바 있듯이, 겨우 논문 몇 편, 그것도 한국사학계에서 아무런 비중도 차지하지 못하는 논문을 가지고 한국사 틀에 추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저는 아주 오만하고 불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 틀은 한국 역사의 가장 큰 흐름을 구성하는 연표입니다. 이 흐름에 있어서 두막루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거의 역할이 없었고,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고작해야 사료 몇 줄과 그것을 가지고 이제야 겨우 문제제기나 하고 있는 논문 몇 편이 있을 뿐입니다. 한국사 틀 운운할 가치 자체가 없습니다. 게다가 쟁점 하나 하나도 지극한 오만함과 무의미함만 보여줄 뿐이군요.
  • 한국계 국가가 맞는지 아닌지는 한국사 틀에 첨부되는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계 소국들은 수백 개에 달하지만 역사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개 소국들까지 틀에 넣어야 할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러한 논란 자체도 무의미하고, 설사 의미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걸 여기서 위키 사용자들이 왈가왈부한다고 결정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으로써 학문적으로 가능한 판단부여의 후계 국가라고 기록되어 있다라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위키 사용자들이 저 1차 사료의 기록 말고 다른 것을 결정할 권한이 있습니까?
  • 고작 사신 몇 번 파견한 것으로 비중을 논할 수 없다 이미 앞선 토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시베리아 원주민들도 중국에 사신은 수도 없이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위 항목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과 두막루가 한국사 틀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한국사 틀은 중국에 사신을 보낸 나라라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한국사의 큰 흐름에 포함되는 중요 국가들을 싣는 곳입니다. 대체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과 한국사 틀이 무슨 관계입니까?
  • 주류인지 비주류인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현재까지 연구된 것이 없습니다. 연구된 것이 없다는 것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위키 사용자들이 결정할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국사 틀에 넣어야 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할 방법, 그 자체가 없는 겁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나라인지조차 모르니까요.
좀 격하게 쓴 것 같긴 합니다만, 아사달 님 본인께서도 자신의 주장이 대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쓴소리를 좀 하였습니다. 제발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24 (KST)답변
길게 적다 편집충돌이 나 다시 살펴보니 위에 천리주단기님과 Xakyntos님의 의견과 대동소이하므로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새롭게 주장되어 검증되지 않은 이론은 그 자체로 비주류 이론입니다. 연표와 같이 기정사실을 나타내는 틀에 새로운 소수 학설을 인용하여 표기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 Jjw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28 (KST)답변
새롭게 주장되어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듯 싶습니다. 소수 학설도 아닙니다. 비주류는 더더욱 아닙니다. 몇 편의 연구가 있고, 그걸 인용한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의 단행본 역사책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천리주단기 님 말처럼 '비중'이 적다고 말을 할 수는 있겠으나, 검증이 안 된 비주류 또는 소수 이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41 (KST)답변
(편집 충돌) 논의가 다시 여기에 진행되는군요. 그리고 여기서 진행된 논의로 보면 전 속된말로 뻘소리만 지껄인 셈인 듯하군요. 어쨌든 두막루와 동란국 모두 한국사-틀에는 게재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건가요? Mr.SamA_Shun (논의/기여) 2012년 7월 10일 (화) 22:32 (KST)답변

개인적 생각 - 큰 나라가 멸망한 뒤 그 나라를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역사상 수도 없이 있어 왔습니다. 서양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은 흔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와 관련이 있지도 않았으며 제국도 아니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지금 논란이 되는 두막루의 경우도 일부 몇 편의 논문에서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하였다고 자처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부여 계승론을 주장하는 것 이외에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학계의 학설이 전무합니다. 이런 형편의 역사적 기록과 주장을 가지고 한국사 전반을 나타내는 연표에 집어넣는 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너무나 성급한 행동이고,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일부 소수 학파의 일방적 주장을 검증없이 수록하는 것입니다. -- Jjw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40 (KST)답변

Jjw 님, 앞에서 보존된 토론을 찾아보시면 아겠지만, 200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4권, 201쪽에 '두막루'에 대해서 나오고, 부여를 계승한 국가로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사 연표에 추가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Jjw 님은 제가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이다"라고 위키백과에 쓸 수 있다고 보시나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45 (KST)답변

두막루의 부여 계승 여부

윤성현 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시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답변을 해 주세요. '비중' 이야기는 천리주단기 님이 말씀하신대로 별개의 문제이므로 따로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두막루가 한국사의 일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만 토론을 했으면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시다가 다른 곳에서는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부정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가 오락가락 하셔서 정확히 어떤 의견인지 모르겠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31 (KST)답변

추가로 Xakyntos 님과 Jjw 님께도 질문 드리겠습니다.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는 중국 측 사서가 5권 정도 있고,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논문이 3편 정도 있고, 중국측 연구도 몇 편 있고, 대한민국의 권위 있는 기관에서 발행한 단행본 역사 서적에도 나오는데, 전문가도 아니고 일개 위키백과 편집자인 제가 어떻게 그걸 의심(?)하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반대 의견이나 소수학설이 없는데, 당연히 그 의견을 따라서 위키백과에 문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틀'에 추가할 정도의 '비중'이 있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Xakyntos 님과 Jjw 님에게도 윤성현 님과 동일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번과 2번 질문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서,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이다"라고 위키백과에 쓸 수 있나요, 없나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37 (KST)답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계에서 합의된 연구 성과가 없으니까요. 위키백과에서 허용된 편집한국계 국가라는 기록/주장이 있다는 것 뿐입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에게는 두막루가 한국계 국가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46 (KST)답변

답변 - 위에도 적었습니다만,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로마를 자처하는 나라는 많았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나치 독일, 파시즘 치하의 이탈리아가 모두 로마 제국을 들먹였지요.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들 후대 나라를 로마와 관련짓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중국측 사서와 같은 "1차 자료"는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는 "논문"이나 "저술"로서 인정되지 않을 때 진위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고조선에 대해 기자조선설은 조선 시대까지 숱한 사서에 등장하지만 현대 역사 학계에서는 인정하지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2차 자료들 뿐입니다. 현재 두막루에 대한 3편의 논문은 인정받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합니다. 기타 제시하신 여러 2차 자료에서는 모두 두막루란 나라가 있었고 스스로 부여를 계승하였다고 자처하였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이 부분 역시 저를 포함한 여러 사용자가 지적한 것이고요. 그리고 제가 직접 살펴본 결과 백산학회는 과도하게 국수적 민족주의에 편향되어 있는 것이 맞습니다. 지금의 동북아시아 지역을 "古土"라고 표현하는 것이 단적이라 할 것입니다. 조금 더 벗어나면 고토 회복 운동이라도 할 기세더군요. 최소한 역사 학계 일반이 인정할 때 까지는 기다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 Jjw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2:52 (KST)답변

Jjw 님,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했다고 단지 '자처'만 한 것이 아닙니다. 궁예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처'한 것,그리고 견훤이 백제를 계승했다고 '선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두막루는 실제 부여 주민들이 이동해서 세운 나라입니다. 우선 두막루 문서 내용부터 읽어봐 주세요. 서기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부여를 점령했는데, 이 때 부여의 유민 중 일파가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서 북쪽으로 가서 나하를 건너서 과거 고리국(=색리국)이 있는 지역에 두막루라는 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부여를 계승했다고 그냥 단순히 '자처'하는 세력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실제로 부여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서 나하를 건너가서 세운 나라입니다. 게다가 두막루는 부여와 풍속도 같았고, 민족도 예맥족이고, 언어도 비슷했고, 의복도 비슷했다고 하니, 부여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Jjw 님, 두막루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국사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 두막루를 건국한 주체들이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라고 자처하였다. - 위서 두막루조
  2. 둘째, 두막루의 각종 풍습과 생활 습관, 의복 등이 부여의 것과 거의 동일하였다. - 위서 두막루조
  3. 셋째, 두막루의 지리적 위치가 예전 북부여의 땅이었다. - 신당서 유귀전
  4. 넷째, 두막루의 민족과 언어가 부여와 동일했다. - 위서 두막루조, 위서 실위전, 중국 학자 전랑운과 양양
  5. 다섯째, 두막루가 멸망한 후 그 땅은 발해로 계승되었다.

이 내용은 1차 자료에 나올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학계의 연구 논문(즉, 2차 자료)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1.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
  2. 김정배, 〈두막루국 연구: 부여사의 연결과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제29집, 1991년 12월.

중국 현대 학자들의 연구 논문도 있습니다.

  1. 孫進己 저, 임동석 역, 《동북민족원류》, 1992.
  2. 干志耿, 〈古代槀離硏究〉, 《民族硏究》 第2期, 1984.

권위 있는 기관에서 발행한 단행본 서적에도 나옵니다.

  1. 《이야기 한국 고대사》, 2007.01.25. :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쓴 책
  2. 《고조선 단군 부여》, 2007.11.30. : 동북아역사재단이 지은 책
  3. 200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4권, 201쪽.

인터넷 사이트도 있습니다.

  1.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중 두막루 부분

반면 두막루가 한국사의 일부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한 연구 논문이나 주장은 아직까지 단 한 편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이상의 이유로 두막루를 한국사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0일 (화) 23:00 (KST)답변

연구랍시고 여러가지를 늘어 놓으셨습니다만, 과연 중국 학자들의 논문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렇게 두막루를 한국사에 연결시켰을까요? 직접 확인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어떤 논문에 해당 내용이 직접 인용된 것을 보셨습니까? 저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동북민족원류》는 동북공정과 관련된 대표적인 저서의 하나로 악명이 높습니다. 〈古代槀離硏究〉는 고대의 신화적인 국가/부족인 고리(槀離)를 연구한 것이 틀림 없겠지요. 저 고리는 한국사에서는 ‘신화네 피식(...)’하고 무시하는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어떻게든 고구려를 중국의 후계 국가로 연결지으려고 가져다 붙이기 바쁜 웃기는 물건이죠. 물론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니 부여도 마찬가지죠. 참 잘도 저 중국의 책들이 두막루를 한국사라고 썼겠습니다. 물론 저도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으니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의심하기에는 충분한 물증이 있다고 사료됩니다만. 또한 사이트라고 링크하신 것은 중국정사조선전이라는 것으로, 중국의 역대 정사에서 한국과 관련된 동이열전/조선전 등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단순한 사료 모음집을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편법이죠. 그러니 저것도 증거가 아니네요.
이렇게 의미 없는 걸 제외하고 보면 결국 두막루를 한국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몇몇 연구서와 연구자들이 있는 것일 뿐입니다만. 어디에도 한국사학계 전반에 걸쳐 합의된 의견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반대 의견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의견이 무조건 지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100명 중에 2명만 목에 핏대 올리고 98명은 뭐하는 거임? 하고 무시하고 있으면 반대 의견이 없으니 2명의 의견이 맞다는 논리는 대체 어느 논리학 교재에 나오는지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00:13 (KST)답변
Xakyntos 님, 토론 시 입이 거친 점은 여전하군요. 첫째, 제가 중국 연구를 제시한 것은 '비중'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우산국/동예/옥저/태봉/후백제에 대해서는 중국 측 연구가 없지만, 두막루에 대해서는 중국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 즉 비중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지금 논의의 쟁점인 '부여 계승 문제'와는 논점이 좀 다릅니다. 둘째, 사료 모음집을 링크로 제시한 것은, 두막루에 대한 연구를 무슨 환단고기 류의 연구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려드리고자 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환단고기 류의 책은 사료로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두막루에 대한 자료는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둘은 차이가 크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오해가 없기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0:15 (KST)답변
덧붙여 100명 대 2명이라는 말은 논리적 비약입니다. 우선 역사학계에서 부여나 두막루 관련 연구자가 100명씩이나 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고조선 연구자도 겨우 6-7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2명이 떠드니까 100명이 이게 뭐임? 하고 있는게 아니라 "주목을 끌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0:47 (KST)답변
제 의견 역시 위의 Xakyntos님과 대동소이하기에 반론은 그것으로 대신하고 자료의 신빙성 만을 따로 언급합니다. 우선 《이야기 한국고대사》(다음 아이디가 있으면 로그인하시고 직접 본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의 해당 내용을 그냥 인용합니다.

(두막루가 부여의 후계라는 것에 유보적인 한국 역사 학계 일반의 의견에 따르면) 고구려가 길림지방을 장악하고 부여국의 경계였던 약수 유역까지 세력을 뻗침에 따라 두막루인은 어떤 과정에서든 고구려의 존재를 인식하였을 것이고 고구려가 엣 부여 지역을 북부여라고 하였으니 두막루도 자신들을 북부여라 하였을 것이다. 또는 (북)부여가 선비 모용씨의 두 차례 강습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고 송화강 유역을 상실한 뒤 몽골계 일원인 두막루가 이 유역에 들어왔다 고구려에게 쫓겨 났을 것을 상정하고 있다. 이경우 두막루를 당서에서 언급하는 막달루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최근 부여사와 이 두막루를 직접 연결시키려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후략)

— 조법종, 이야기 한국고대사, 청아출판사, 2007년, ISBN 893680359X, 85-86쪽
결국 아사달님이 제시하신 출처도 두막루가 부여와 직접 연결되는 것은 일각의 주장일 뿐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출처도 확정하지 않는 사안을 어찌 그리 단정지어 말씀하시나요. -- Jjw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01:48 (KST)답변

제 의견을 물으시니 장문이라도 대답해드리죠. 네, 두막루가 한국사의 일부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부여의 후예를 자처한 것을 사실로 친다 하더라도 연구도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았고 하물며 국사편찬위원회 같은 곳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별달리 없어서 한국사로 확실히 인정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한국사의 일부분으로 볼만한 측면이 있지만, 반대로 확실하지 않은만큼 두막루를 한국사로 확정한다는 것도 시기상조입니다. 제가 말했듯이 대중에 대한 저명성이 제로라는 것은 그만큼 대중이나 학계나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비중이 있으면 관심도 정비례합니다. 그리고 jjw님이 위에 말씀하셨듯 보아하니 두막루가 몽골계였다고도 하네요. 그렇다면 대놓고 한국사라고 우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일각의 주장을 모두의 주장이라고 할 수 없죠.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듯 아직은 음식의 간만 본 단계이지, 그것을 보고 음식을 다 먹었다고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Xakyntos님이 말씀하셨듯 2명은 계속해서 논문을 내는데 나머지는 반대 논문이 없이 침묵한다는 것도 성급한 일반화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1일 (수) 04:21 (KST)답변

의견 지금 논의가 헛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틀 토론에서는 기술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야 하고, 그 외 두막루에 관해서는 토론:두막루에서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덧붙여서, 앞서서 이야기가 나왔지만, 아사달 님이 주장하신 내용들을 바탕으로 ‘부여계 계통으로 추정된다’라고 쓸 수 있을지 언정, 위키백과 자체에서 ‘부여계 계통이므로, 한국사의 일부다’라고 단정을 지어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는 사학회에서 할 일이지, 위키백과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니까요. --가람 (논의) 2012년 7월 11일 (수) 09:57 (KST)답변

이 의견은 천리주단기 님의 의견과 동일하군요. 저도 천리주단기 님의 의견에 대해서는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부여와 두막루의 계승성 자체를 부인하는 의견이 있어서, 그건 좀 이상한 듯하여 토론에 참여할 뿐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0:10 (KST)답변

중국의 《위서》(魏書) 두막루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옵니다.

두막루국은 물길(勿吉)의 북쪽 1천 리에 있고 낙양으로부터 6천 리 떨어져 있다. 옛날의 북부여(北夫餘)이다. 실위(失韋)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 있고, 사방 2천 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구릉,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東夷)의 지역에서 가장 넓고 높다랗게 트여있다. 땅은 오곡에 알맞고,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신중하고 중후하니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음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을 마름질하는 것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나 폭이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엄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은 음란하고 투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죽여서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 시신을 거두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라 한다.

위서》(魏書) 두막루조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豆莫婁國,在勿吉國北千里,去洛六千里,舊北扶餘也。在失韋之東,東至於海,方二千里。其人土著,有宮室倉庫。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爲平敞。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長大,性強勇,謹厚,不寇抄。其君長皆以六畜名官,邑落有豪帥。飲食亦用俎豆。有麻布衣,制類高麗而幅大,其國大人,以金銀飾之。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爲奴婢。俗淫,尤惡妒婦,妒者殺之,屍其國南山上至腐。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或言本穢貊之地也。원문 출처 보기

내용을 보면, 두막루는 부여계 국가가 명백합니다. 풍습이 부여와 동일하고 혈통은 예맥족입니다. 두막루의 군장(君長)은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임금 아래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자, 사자 등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명을 사용했던 부여의 풍습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위서》(魏書)는 중국의 여러 역사책 중에 하나인 비중 없는 책이 아니라, 정사인 24사 중의 하나입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0:03 (KST)답변

독자연구에는 편집자의 개인 견해, 정치적 의견, 그리고 공개 발표된 자료에 대한 공개 발표되지 않은 분석이나 공개 발표된 자료를 토대로 이를 확대 재생산한 내용이 포함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진정으로, 부여의 후손이라 할 지라도, 지금 당장에 그것을 입증할 근거가 없습니다. 현재까지 나타난 근거에 따르면, ‘부여의 것과 닮았다’일 뿐, 그것이 ‘부여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의미를 확대 해석하신 게 아닌가 싶은데요, 앞서 말한 것을 명확히 말하자면, 이를 ‘부여의 풍습과 생활 양식이 닮았다고 추정된다’라고 쓸 순 있습니다. 이건 가능해요, 하지만, ‘두막루는 한국계다’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논문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이므로, 위키백과에서 결정지을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위키백과는 전문가의 견해가 아니라는 것이 이미 면책 조항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 결론적으로, 이 논의는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가람 (논의) 2012년 7월 11일 (수) 10:19 (KST)답변
이건 좀 오해네요. 제 해석이 아니라 역사학계의 해석을 붙인 겁니다. 제 독자연구는 아닙니다. 독자연구를 할 의사도 없고 그럴만한 능력도 안 됩니다. 학술연구 논문에서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는 겁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0:24 (KST)답변

또 인용하게 되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독자연구가 아니라는 점은 밝혀야겠습니다. 유태용 논문인데요. 이 논문이 맞느냐 안 맞느냐를 떠나서, 일단 중국 위서를 해석한 것은 제가 아니라 역사학자라는 점만 강조하고 싶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0:37 (KST)답변

부여가 494년에 고구려에 멸망당하면서 국가의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그러나 사서에 부여가 고구려에 흡수되기 8년 전에 이미 부여인 일부가 북쪽의 나하를 건너 구북부여 고지에 두막루라는 국가를 건립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사료들을 여러 측면에서 검토한 결과 두막루국은 또 다른 부여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서로 더이상 새로운 논거가 없으므로 논의가 헛돌고 있는 것 맞습니다. 두막루의 부여 계승설의 진위 여부는 두막루에서 따지면 될 일 이고, 여기서는 한국사 틀에 넣는 것은 불가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시기 상조다라는 점에서 그쳤으면 합니다. -- Jjw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0:55 (KST)답변

아사달님은 일전에 태봉, 후백제, 동예, 옥저보다도 두막루가 훨씬 비중이 있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저를 비롯한 여러 사용자들은 그에 대해서 입증할 만한 출처를 가져오라더니 결국엔 두막루의 실증만을 강조한 사서나 논문의 출처만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독자연구가 아니면 무엇인가요? 그리고 제가 일전에 이미 다 말했던 것을 모든 걸 부인하시더니 다른 사용자들이 얘기하니 (저나 여러 사용자들이나 얘기한 본질은 다 같고 대동소이합니다) 조금씩 수긍하는 듯한 태도도 별로 탐탁치 않습니다. 제가 십수번을 말했듯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헀다는 점은 현재로서는 더 많은 사료가 설명되지 않는한 완전히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1일 (수) 11:00 (KST)답변

윤성현 님, 예전에 본인이 쓴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삼국사기에 안 나오니까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시니, 너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또한 1차 출처가 전부 중국 측 사료니까 두막루가 중국사 아니냐는 식으로도 말씀하시니까, 정말 너무 놀랐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1:17 (KST)답변
덧붙여서 말씀 드리면, 두막루의 실체는 누구나 인정합니다. 두막루가 부예를 계승한 한국계 국가인지는 위키에서만 쟁점이 있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쟁점이 없습니다. 2-3명이 주장하고 있고, 나머지가 흥미롭다/주목된다고 지켜보는 정도입니다. '비중' 문제는 역사학계에서 논의된 적이 없고, 천리주단기 님이 제시하신 건데, 제가 '비중'이 있다고 제 개인 의견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비중' 문제에 대해서는 천리주단기 님의 의견도 나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두막루의 부여 계승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학계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고(그냥 지켜보기만 하고 or 새로운 연구라고 이 책 저 책에서 소개하기 시작했고), 위키에서만 계승성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제가 반론을 펼친 것입니다. 각 항목/쟁점별로 나눠서 살펴봐 주세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1:22 (KST)답변
제가 그래서 두막루의 실체를 부정했나요? 하지만 여러 사용자도 인정했듯 중국에서도 연구하는 것이 동북공정을 노리는 수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인정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리고 제가 언제 대놓고 중국사라고 했죠? 곡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만 중국 쪽에서 그 연구가 더 활발한것으로 봐서 중국의 학자들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연구할수 있다 그랬지 중국사라고 한적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두막루에 대해서 더 정확한 연구가 없는한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말자고 십수번째 말합니다. 그리고 역사학계의 쟁점이 없다는 건 귀하의 생각일 뿐입니다. 두어명만 주장하고 나머지는 이에 대해 할말이 없다 식인데 그 나머지 모두가 흥미롭다, 주목한다라는 반응 역시 독자 연구입니다. 어느 누가 주목한다, 흥미롭다라는 반응을 보였는지도 이에 대한 실체 또는 출처를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귀하도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두막루에 대한 계승성이나 한국사 포함 여부는 여기서 논할 것이 아닌 것 같군요. 비중 문제나 역사학자들이 주목한다 하는 자신의 의견에 독자연구가 있는지 없는지 다시 살펴보고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2년 7월 11일 (수) 11:30 (KST)답변

두막루에 대해서 "새로운 연구가 나와서 주목을 받고 있다"고 말한 것은 제 독자적 연구가 아닙니다. 아래 출처는 사실 토론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이 알려준 내용입니다.

  • 1.《이야기 한국 고대사》, 2007.01.25. :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쓴 책
  • 2.《고조선 단군 부여》, 2007.11.30. : 동북아역사재단이 지은 책
  • 3.200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사》 4권, 201쪽.

인터넷 사이트도 있습니다.

  • 1.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중 두막루 부분

두막루에 대한 논문이 겨우 2-3편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사 전반을 다루는 책에서 저렇게 새로운 연구라고 소개(!)를 하고 있고, 자기들이 직접 "주목된다"고 썼군요. 제 독자연구가 아닙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1:40 (KST)답변

아사달님 - 논의가 헛돌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사달님이 저와 여러 사용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다음의 사항에 대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 《위서》등의 사서와 그것을 모은 《중국정사조선전》외 기타 1차 자료는 두막루 부여 계승설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기록된 사료일 뿐입니다. 2) 1차 자료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하며 위에 제가 아사달님이 제시하였던 출처를 그대로 인용한 바와 같이 역사 학계 일반의 견해는 두막루의 한국사 편입에 대해 유보적입니다. 이와 관해 여러 사람이 여러 차례 지적하였으나 아사달님은 한 두 편이 논문으로 실재가 완전히 증명되었다는 입장을 보이고 계십니다. 이것은 과도한 일반화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국 고대사》는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하였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위에 인용된 부분에 대해 그냥 무시할 생각이신지요? 3) 흥미롭다는 반응이 지지한다는 반응은 아닙니다.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확고한 사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수긍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결론 - 역사 학계 일반이 인정할 때 까지는 두막루가 부여를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아직 일반화 되지 않은 가설로서만 의의를 가질 뿐이며, 따라서 한국사 연표에 삽입될 수 없고, 기타 부여 계승의 진위 여부는 이곳이 아닌 두막루 문서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 Jjw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1:46 (KST)답변
1차 사료가 5편 정도 있고, 그걸 학계의 몇몇 연구자들이 사료 내용이 "맞다"고 연구논문을 썼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나머지 연구자들이 '주목된다'고 단행본 서적에 썼습니다. 기존의 학계 의견은 '유보적'이었으나,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서 '주목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대 의견은 아직 한 건도 없습니다. 이게 정확한 평가일 것입니다. 그리고 토론 참가자들이 더 이상 새로운 출처를 추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니, 토론이 헛돌고 있다는 말에도 동의를 합니다. 출처는 대부분(전부는 아니지만) 제가 제시했고, 다른 분들은 그냥 의견과 추측만 올리셨는데, 제가 더 이상 제시할 출처가 없군요. -- 아사달(Asadal) (토론)
반대 의견이 없는 것은 아직까지 해당 분야가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서 주목된다는 의견은 아사달님의 견해인가요, 아니면 역사학계의 견해인가요? --Sotiale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2:09 (KST)답변
단행본에서 주목된다고 쓴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정한다는 것도 아니고 지지한다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 Jjw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2:29 (KST)답변
주목하다 : 관심을 가지고 주의하여 보여지거나 살펴지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Jjw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2:32 (KST)답변

언급해놓은 게 어영부영 될 거 같아서, 다시 언급합니다. ‘부여 계통’이냐 아니냐는 토론:두막루에서 해주세요. 여기서는 한국사 틀에 기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 논하도록 하며, 본디 그랬어야 했습니다. --가람 (논의) 2012년 7월 11일 (수) 12:46 (KST)답변

동의합니다. 두막루의 부여 계승 여부는 토론:두막루에서 다루어야 할 사항입니다. -- Jjw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3:01 (KST)답변
예,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게 하시죠.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7월 11일 (수) 13:02 (KST)답변
한국사 틀에 대한 추가는 반대로 총의가 모아졌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비엠미니 2012년 7월 11일 (수) 13:35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