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상
| 정지상 | |
|---|---|
| 출생 | ? 고려 서경 |
| 사망 | 1135년 고려 개경 |
| 사인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연루된 혐의 |
| 국적 | 고려 |
| 별칭 | 초명(初名)은 지원(之元), 호(號)는 남호(南湖) |
| 직업 | 문신, 정치가, 시인 |
| 부모 | 아버지 미상, 어머니 노씨 |
정지상(鄭知常, ? ~1135년)은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의 문신(文臣)이자 시인이다. 서경(西京) 출신으로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이다.
묘청((妙淸)), 윤언이 등과 함께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을 주장하였으며, 후일 묘청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묘청의 난)의 주요 관련자라는 이름으로 김부식에 의해 처형당했다.
목차 |
생애 [편집]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노씨(盧氏) 슬하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이미 5세 때에 강 위에 뜬 해오라기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을(乙)자를 강물에 썼는고(何人將白筆 乙字寫江波).”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라서는 문학뿐 아니라 역학(易學)과 불교 경전에도 뛰어났고, 그림 · 글씨에 능했으며 노장철학(老莊哲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서경에 두었던 분사국자감시(分司國子監試) 진사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된 뒤, 예종 7년(1112년) 오연총이 지공거가 되어 주관한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예종 9년(111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인종 5년(1127년) 좌정언으로서, 앞서 이자겸(李資謙)과 그 일파를 제거하는 공을 세운 권신(權臣) 척준경(拓俊京)이 "자신의 공만 믿고 권력을 농단하고 발호한다"며 탄핵하여 결국 척준경은 유배되었다. 11월 을묘에 인종이 기린각에 거동하였을 때는 정지상에게 《서경(書經)》의 무일(無逸)편을 강의케 하고, 따랐던 신하들과 서경 출신의 유신(儒臣) 25인에게 시를 짓게 하며 술과 음식을 내렸다.
인종 7년(1129년)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윤언이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설을 논하는 소를 올렸다. 인종 8년(1130년)에는 지제고(知制誥)로서, 왕명으로 시인 곽여(郭輿)의 죽음을 기린 《산재기(山齋記)》를 지었다. 인종 10년(1132년) 3월 임인에 인종이 다시 기린각에 거동하였을 때 국자사업(國子司業) 윤언이에게 《역경》의 건괘를 강의하게 하고 승선(承宣) 정항(鄭沆)과 예부낭중 이지저, 기거주(起居注) 정지상 등을 시켜 이 가운데 어려운 것을 묻게 하였으며, 4월 갑술에는 왕명으로 정항, 윤언이와 함께 다시 경연에 나와 경서를 강의하고 인종으로부터 화서대(花犀帶)를 받기도 했다.
인종 11년(1133년) 5월 임신에 왕명으로 숭문전(崇文殿)에서 평장사 김부식이 강의한 《주역》과 《상서》(서경)의 내용에 대해 한림학사승지 김부의(金富儀), 지주사(知奏事) 홍이서(洪彛敍)와 승선 정항, 기거주 정지상과 사업(司業) 윤언이 등이 나서서 어려운 것을 물었다.
음양비술(陰陽秘術)에 관심이 높아, 묘청이 풍수지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서경 천도를 진언했을 당시, 함께 서경 천도를 주장한 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삼성(三聖)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수도를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고려 조정의 별도(別都)이기도 했던 서경으로 옮기는 동시에 칭제건원(稱制建元)과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묘청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 출신 귀족들의 반대와 묘청 자신이 조작한 미신적인 행위가 발각되면서 서경 천도는 중단되고, 묘청 등이 인종 13년(1135년)에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키자(묘청의 난) 이를 반역으로 간주한 조정에 의해, 백수한과 함께 피살당하였다.
김부식과의 관계 [편집]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문학 관련 일화들을 추려 홍만종이 정리한 《백운소설(白雲小設)》에 따르면, 정지상과 김부식은 문학적인 입장에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부식과 함께 어느 절에 들렀던 정지상이 지은 "절에 독경소리 그치니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구나" 라는 한시 구절을 보고 김부식이 그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정지상은 이를 거절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김부식은 훗날 묘청이 서경에서 거병한 것과 그것을 반란으로 간주한 조정의 서경 반란군 진압 명령과 관련해 정지상을 '역적'으로 간주하여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왕명으로 반란군 진압을 맡게 된 김부식이 출정에 앞서 정지상, 백수한, 김안 세 사람을 서경의 역적들과 동조하는 자들로 매도하고, 서경으로 출병하기에 앞서 이들 세 사람을 왕명이라며 불러들인 뒤 대궐로 들어서는 순간 밖으로 끌어내서 모두 죽였다는 서술과 더불어,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식은 본래 지상과 문인으로서 명성이 같았으므로 불평이 쌓였더니, 이에 이르러 내응하였다 하고 그를 죽였다'고 하였다"며 말미에 적고 있다.
《백운소설》은 후일담으로서 귀신이 된 정지상이 어느 날 김부식이 "버들은 천 가닥으로 푸르고 복사꽃은 만 점(點)으로 붉다"는 시구를 짓자 김부식 앞에 나타나, "버드나무가 천 갈래인지 복사꽃이 만 점인지 그걸 네가 세어봤느냐? 어떻게 '버들은 가닥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라고 지을 줄 모르느냐?" 라며 김부식을 욕했고, 결국 뒷간에 간 김부식의 불알을 잡아 비틀어 죽였다는, 김부식에 대한 악감정이 다분히 배어난 일화를 남기고 있다(다만 《고려사》에는 김부식의 죽음에 관련해 이러한 기록이 없다).
작품 [편집]
기록에는 정지상의 문집으로 《정사간집》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그의 특수한 상황과도 맞물려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전하는 그의 작품은 한시 20편과 연구(聯句) 4편이 있고 완전한 형태의 산문은 《동문선》에 5편이 전하고 있는데, 이미 고려 시대부터 《파한집》, 《보한집》, 《동국이상국집》, 《역옹패설》, 《삼한시귀감》 등에 그의 작품이 수록되고, 조선조의 《동문선》 등 한국의 대부분의 한시 관련 문헌들이 그에게 붙은 '역적'이라는 이름과는 상관없이 그를 고려의 대표 시인으로 꼽는 데 이론이 없었다. 그의 대표적인 한시 <송우인(送友人) = 대동강(大同江)> 1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 |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비 그치고 긴 둑의 풀빛은 싱그러운데, 임을 보낸 남포(남쪽 포구)에는 슬픈 노래만 울리는구나. 대동강 물은 언제 되어야 마를텐가, 이별의 눈물은 해마다 푸른 물결을 더하는데. |
” |
저서와 작품 [편집]
저서 [편집]
- 《정사간집 鄭司諫集》
시 [편집]
- 〈신설 新雪〉
- 〈향연치어 鄕宴致語〉
- 〈백률사 栢律寺〉
- 〈서루 西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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