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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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
高麗 仁宗
고려의 제17대 국왕
본명 왕해(王楷)
재위 1122년 ~ 1146년
종교 불교
왕후 인천 이씨
인천 이씨
공예왕후
선평왕후
부왕 예종
모후 순덕왕후
이전 왕 예종
다음 왕 의종

인종(仁宗, 1109년 10월 29일 (음력 10월 4일) ~ 1146년 4월 10일 (음력 2월 28일)은 고려 제17대 국왕(재위: 1122년 ~ 1146년)이다. 는 해(楷), 는 인표(仁表),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 예종과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맏아들이다.

1122년부터 1146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122년부터 1126년까지 외조부 이자겸(李資謙)이 섭정(攝政)을 하였고 이자겸을 축출한 1126년부터 1146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親政)을 하였다.

생애[편집]

인종은 1109년 예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1115년(예종 10) 음력 2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122년 음력 4월 아버지가 죽자 14살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이 염려되었으나 외조부인 평장사 이자겸이 옹립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즉위 초에는 이자겸이 정권을 틀어쥐고 인종을 위협하였다. 심지어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 즉 인종의 이모들을 모두 인종에게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까지 되었다. 일부 신하들은 이러한 이자겸의 횡포에 반기를 품고 이자겸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이자겸이 과거 윤관의 부하 장수인 척준경과 손을 잡고 권세를 부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자겸은 심지어 인종을 자신의 집에 가두고 자신이 공공연히 왕이 될 것이란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곧 멀어지고 그사이 척준경은 인종과 가까워진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궐내에 침입하여 궁실을 방화하여 왕은 남궁(南宮)에 파천하였으나, 최사전(崔思全)·척준경(拓俊京) 등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잡아 영광에 귀양 보내고, 이듬해 척준경도 귀양 갔다.

인종은 개경의 터가 좋지 않은 것 같아 고심하고 있던 차에 승려 묘청이 인종에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 주장하였고, 역시 고려가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왕을 황제로 높이고 연호를 써야 한다는 자주적 사상을 인종에게 설득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북부의 금나라가 고려를 심히 견제하자 김부식 등 개경파는 이에 크게 반대하였고, 어떻게든 인종이 개경에 머물게 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묘청이 인종의 신임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자 인종은 점차 묘청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1135년(인종 13년)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묘청의 난이다. 김부식을 서경정토대장(西京征討大將)으로 보내어 이듬해 평정하였다. 인종은 또한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여 1145년 완성을 보았다.

1146년(인종 23년) 음력 2월 향년 38세에 태자(太子)에게 왕위를 물리고 병으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장릉(長陵)이다.

평가[편집]

어려서부터 재능과 기예가 있어 음률과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국가 재정을 절약하여 환관(宦官)들을 감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문운(文運)을 일으키고 김부식 등에 명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가계[편집]

인종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참고 자료[편집]

전 임
예종
제17대 고려국왕
1122년 ~ 1146년
후 임
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