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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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임씨
長興任氏
장흥 임씨의 종문
이칭관산 임씨(冠山任氏), 舊 정안 임씨 (定安任氏)
나라한국
관향전라남도 장흥군
시조임호(任顥)
집성촌전라남도 보성군
전라남도 순천시
전라남도 장흥군
전라남도 해남군
주요 인물임의, 임원후, 임원숙, 임원준, 임극충, 임극정, 공예왕후, 임보, 임유, 임항, 임부, 임효명, 임익돈, 임경숙, 임익, 임종선, 임득창, 임계영, 임발영, 임희중, 임재당, 임충간, 임병국, 임충식, 임상규, 임영득, 임종룡, 임종석, 임병택
인구(2015년)37,584명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전라남도 장흥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예종조에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임의(任懿)의 아버지 임호(任顥)를 시조로 한다.[1] 고려 시대 장흥 지역의 토착 성씨로 당시 장흥부는 현재의 보성, 강진, 고흥의 일부 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해남, 순천, 진도 등지로 이거하였다.

역사[편집]

장흥 임씨는 고려 시대 권문 세족 가문으로 조선 시대에는 유림 및 무관/의병 세력으로 다양한 활동을 한 호남의 재지 사족(在地 士族)이다.

고려시대[편집]

고려 시대에는 왕가와 혼인할 수 있는 가문[주 1]으로, 특히 호남의 호족세력으로서 현재의 장흥군과 인접 시군 일부에 장흥도호부라는 지명을 부여받게 하였다. 이후에는 호족 세력으로 지역발전에 기여하였다. 시중(侍中: 현대의 수상)을 비롯하여 판서·평장사 등 2품직 이상의 재상(宰相)만 10명 이상을 배출하는 등 전라도에서 첫째가는 명문으로 그 위명을 떨쳤다고 한다[2]. 고려시대 지속적으로 국가와 왕권을 보위한 가문으로, 장흥 임씨 세력이 고려의 다양한 권력 교체기에도 국가의 주요 직책에 봉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학술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민족을 사랑하고 청렴을 강조한 가풍과 혼맥에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3].

주요인물[편집]

장흥 임씨 2세조인 임의(任懿)는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를 거쳐 상주국(上柱國)[주 2]에 이르렀고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임의의 아들 원후(元厚, 또는 원개 元凱)시중에 올라 묘청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 文官 정1품 품계)·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문관 정1품 품계)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상주국으로 정안공(定安公)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원후의 두 형제 원숙(元淑)과 원순(元順, 또는 원준 元濬)은 각각 평장사(平章事; 정2품)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들 모두가 출세하였다. 그 중에 맏아들 극충(克忠)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 소속의 정4품 벼슬)를 거쳐 사공(司空: 삼공의 하나로 정1품 벼슬)을 역임하였고 이어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에 오른 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中書門下省 정2품職)에 이르렀다. 둘째 극정(克正)은 호부상서(戶部尙書; 정3품)를 지냈다. 셋째 유(濡)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종2품 문산계(文散階)에 올라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정2품)를 거쳐 태자태사(太子太師; 동궁의 종1품)에 이르렀다.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는 임원후의 딸이었다. 공예태후로 인해 왕실과 인연을 맺어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이 모두 장흥임씨의 외손으로 그들이 전후 약 50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장흥임씨는 고려귀족가문의 발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학덕이 높은 명신으로 희종묘(僖宗廟)에 배향된 양숙공(良淑公) 유(濡)의 아들 경숙(景肅)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정3품)·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3품)·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에 이어 평장사(平章事; 정2품)가 되었는데 그가 수찬관(修撰官; 사관(史館, 춘추관)에 두었던 벼슬)으로 있을 때 유명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였다. 유(濡)의 증손 익(翊)은 밀직부사(密直副使)·동수국사(同修國史; 사관(史館)의 한 벼슬)를 거쳐 찬성사(贊成事; 정2품)가 되었는데 왕명을 받들어 선원록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족보편찬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박식다문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당시의 수찬관 김련(金聯)과 함께 원나라에 초빙되어 원나라의 세조사적(世祖事績)을 편찬하였다. 원준(元濬)의 증손 방부(邦富)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아우 방수(邦壽)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렀다.

조선시대[편집]

조선 시대 초기에 장흥 임씨들은 관계(官界)에도 일체 진출하지 않았다. 이후 고려가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난 조선조 제13대 명종(明宗) 때부터, 당시 국내 정세가 당파싸움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는 것을 비롯하여 민란과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극히 어려워졌다. 그제서야 비로소 장흥 임씨들은 하나둘씩 관계에 진출해 국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관직을 멀리하는 등 여전히 적극적 중앙 진출을 하진 않았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등 국난 시에는 호남 의병장으로 활동하는 등 관군과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주요인물[편집]

조선 초기에는 유(濡)의 5세손 서종(瑞宗)이 예조판서(禮曹判書), 서원(瑞原)이 전공판서(典工判書), 서종(瑞宗)의 아들 헌(獻)은 대사헌, 손자 종선(從善)이 전라감사(全羅監司) 등을 역임했을 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 벼슬길을 멀리해 오다가 성종(成祖朝)에 이르러 원준(元濬)의 8세손 득창(得昌)이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가 된 이래 관직이 이어졌으나 고려조(高麗朝)에 비해 벌열(閥閱)하지는 못하였다. 득창(得昌)은 당대 제일 무장으로 불렸는데 그의 아들 광세(光世)는 좌통례(左通禮), 아우 충세(忠世)는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광세는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희준(希駿)은 절제사(節製使), 2남 희순(希馴)은 옥과현감(玉果縣監), 3남 희중(希重)은 호(號)가 국담(菊潭)인데 문장이 뛰어난 석학으로 지리·병서에도 능했으며 전남·보성군·조성면·축대리(全南寶城郡鳥城面築內里)에 사숙(私塾)을 지어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희중의 아들 계영(啓英)은 문과에 급제하여 진보현감(珍寶縣監)을 지낸 후 임진왜란을 당하자 전라좌도의병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으며, 해남 의병장 희진(希璡)은 효자 근(謹)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의병장 김천일(金健齋)와 함께 순절하였다. 조선 명종 때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낸 응룡(應龍)은 제주에서 돌아올 때 해송(海松) 여덟 그루를 가지고 나와 제천시의 북쪽 경치 좋은 곳에 심어 그곳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시객(詩客)을 불렀던 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의 탁사정유원지(濯斯亭遊園地)로 발전하여 지금은 많은 관광객과 피서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국난 시에 무장으로 활약한 인물들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국지적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한 인물들이 있으며, 한국전쟁시에는 제18연대장으로 이후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에 이른 충식(忠植) 등의 인물이 있다.

인물[편집]

장흥 임씨는 고려시대 문과 급제자 12명,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 무과 급제자 19명, 생원시 급제자 8명, 진사시 급제자 15명 등을 배출하였다.[4]

고려시대[편집]

임의(任懿, 1041년(정종 7년) ~ 1117년(예종 12년)

고려의 문신.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번저(藩邸) 시절 선종(宣宗)의 주청으로 전첨(典籤; 제왕자부(諸王子府)의 관료로 從八品)이 되고, 선종(宣宗)이 즉위(卽位)하자 우승선(右承宣; 正三品 벼슬)이 되었다. 1095년(肅宗 卽位) 형부시랑(刑部侍郞; 刑部에 소속된 正四品의 벼슬)으로서 요나라(遼)에 가서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리고 귀국했다. 1099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소속의 正四品)가 되고, 1100년 상서(尙書; 尙書省의 正三品 벼슬)로서 송나라(宋)에 파견되어 송 철종(哲宗)의 죽음을 조위(弔慰)했으며, 휘종(徽宗)으로부터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기증(寄贈)받아 가지고 이듬해 돌아와 어사대부(御史大夫; 高麗朝 御史臺의 正三品)가 되었다. 1103년 병부상서(兵部尙書; 兵部의 버금 벼슬로 正三品)를 거쳐 다음해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御史臺의 으뜸 벼슬로 正三品)로서 왕을 남경(南京; 오늘날 서울)에 호종(扈從)한 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1105년 추밀원사·이부상서(樞密院事吏部尙書)가 되었다. 이 해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상서좌복야·참지정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 이듬해 개부의동삼사·주국(開府儀同三司柱國), 1107년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를 역임, 1109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임언(林彦) 등이 여진(女眞)토벌에 패전한 죄(罪)를 극언(極言)했다. 이 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中書門下省의 正二品)로서 동북면병마사겸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兼行營兵馬使)가 되어 여진(女眞)에게 함경도(咸鏡道)의 9성(城)을 환부하려고 했으나 이미 최홍정(崔弘正) 등이 군·민·병기 등을 철수시켰으므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다음해 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守太尉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다. 인종(仁宗) 때 중서령(中書令; 中書門下省의 우두머리 從一品)에 추증(追贈), 시호(諡號)는 정경(貞敬)이다. 묘지명(墓誌銘)[5]이 발견되어 탁본 및 수장되어 있다.

임원후(任元厚, 1089년(선종 6년) ~ 1156년(의종 10년)

고려의 문신. 초명(初名)은 원애(元敱 또는 원개(元凱; 『長興任氏記蹟卷之一』出),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懿)의 아들, 공예태후의 아버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1127년(仁宗 5年) 예빈소경·어사잡단(禮賓少卿御史雜端),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 1131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1133년 참지정사·판한림원사(參知政事判翰林院事), 판공부사(判工部事), 1134년(仁宗 12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중군원수(中軍元帥)가 되어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이를 토벌(討伐), 1137년 동덕좌리공신(同德佐理功臣)에 오르고 검교태보·수사도·판비서성사(檢校太保守司徒判祕書省事)가 되었다.

妙淸妖說宰執皆傾信公獨擯之不從; 묘청이 괴이한 말을 하자 재집(宰執)들이 모두 기울어 믿게 되었다. (그러나) 공은 홀로 그것을 물리쳐 따르지 않았다.

— 『長興任氏記蹟卷之一』

이듬해 개부의동삼사·검교태부(開府儀同三司檢校太傅), 1139년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다음해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1142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 1146년(毅宗 卽位) 문하시중(門下侍中; 中書門下省의 首相職으로 從一品)으로 정안후(定安侯)에 봉(封)해지고, 1148년 수태위(守太尉)로서 정안공(定安公)에 진봉(進封) 된 뒤, 부(府)를 두어 수령부(壽寧府)라 했다. 경사(經史)에 정통(精通)했고, 근검청백(勤儉淸白)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定 또는 文忠; 『長興任氏記蹟卷之一』出)이다.

임원숙(任元淑)

시호(諡號)는 문숙(文肅), 고려 예종(睿宗) 때 예부상서(禮部尙書)·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등을 역임하고, 인종(仁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임원순(任元順) / 임원준(任元濬)[6]과 동일인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1116년]](睿宗 11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뒤에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文官 正一品 벼슬)·중서령(中書令; 中書門下省의 으뜸벼슬로 從一品)·상주국(上柱國; 으뜸 勳位로 正二品)·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의 正二品 벼슬)·판형부사(判刑部事)·태자소부(太子少傅; 太子府에 둔 從二品 벼슬)에 이르렀으며, 선충안사좌리공신(宣忠安社佐理功臣)·동덕익성공신(同德翊聖功臣)으로 정안공(定安公)에 봉(封)해졌다.

임극충(任克忠)

고려의 문신(文臣),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오빠,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148년(毅宗 2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51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역임, 이듬해 한림학사(翰林學士; 翰林院 正四品 벼슬)로서 동지동거(同知貢擧)를 겸했다. 1155년 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태자빈객(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太子賓客), 1157년 수사공(守司空), 1162년(毅宗 16年)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1165년 태자소사(太子少師; 太子府에 둔 從二品 벼슬), 1170년(明宗 卽位)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中書門下省의 正二品職)가 되었다.

임극정(任克正)

고려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임충빈(任忠贇)

부친은 원후(元厚)이고 모친은 파평윤씨 윤관(尹瓘)의 딸이다. 원준(元濬)의 딸과 결혼하여 2남 4녀를 두었다. 문음(門蔭)으로 등용되어 의종 때 장생서승(掌牲署丞), 운주방어사(雲州防禦使), 장작주부(將作注簿), 대부승(大府丞), 문하녹사(門下錄事), 사재승(司宰丞)을 거쳤다. 명종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侯), 고공낭중(考功郎中), 소부감(少府監), 대자우찬선대부(大子右贊善大夫), 시전중감(試殿中監), 전중감(殿重監) 3품직에 올랐다. 66세 작고 묘지석[7]이 발견되었다.

임박(任薄)

고려의 문신. 공예태후(恭睿太后)의 동생, 아버지가 죽은 뒤 의종(毅宗) 외척(外戚)에 대한 탄압이 심하여 20세에 이르도록 벼슬을 하지 못했으며, 명종즉위(明宗卽位) 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거쳐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올랐으나 사직한 후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이부상서·한림학사(吏部尙書翰林學士)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예태후 임씨
임유(任濡, 1149년(의종 3년) ~ 1212년(강종 1년)

고려의 학자(學者) 초명(初名)은 극인(克仁), 문하시중(門下侍中; 中書門下省의 首相職으로 從一品 벼슬), 공예태후(恭睿太后)의 동생,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 1186년(明宗 16年)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나라(金)에 다녀오고,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는 동안 수차(數次)에 걸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197년(神宗卽位)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1200년 수태부·문하시랑평장사(守太傅門下侍郞平章事), 이듬해 수태위·주국(守太尉·柱國)이 되고, 1211년 최충헌(崔忠獻)의 명(命)으로 한남공(漢南公)(貞; 康宗)을 추대(推戴)하여 즉위(卽位)케 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만년(晩年)에는 불교를 깊이 믿어 『대장경(大藏經)』을 금서(金書)했다. 희종(熙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시호(諡號)는 양숙(良淑)이다.

임항(任沆)

어려서부터 문학(文學)에 능했고 덕망(德望)이 높았다.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사신(使臣)으로 금나라(金)에 갔을 때 그의 풍의(風誼)에 감탄한 그곳 명사(名士) 주객시랑(主客侍郞) 이양(李陽)으로부터 환대(歡待)를 받았다.

임부(任溥)

고려의 문신으로 이부시랑, 예빈주부, 합문지후 등을 역임하였다.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추증되었다.[8]

임종일(任從一)[9]

고려 문종 때 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의 正二品 벼슬)를 지냈다.

임익돈(任益惇)

조부는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극정(克正)이며 부친은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올랐으나 존함 미상이다. 문음(文蔭)으로 출사 대창승(大倉丞), 경시서승(京市署丞), 예부원외랑 겸 삼사판관(禮部員外郎兼三司判官), 안동대도호부판관을 지냈다. 고종 때는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시어사·낭중·전중소감(殿中少監)·시랑, 조의대부 시대부경(朝議大夫試大府卿), 통의대부 판예빈성사(通議大夫判禮賓省事), 삼사사(三司使) 등을 지냈다. 묘지명[10]이 발견되어 수장되어 있다.

임익순(任益淳, 1163년(의종 17년) ~ 1227년(고종 14년)

고려의 문신(文臣). 공부상서(工部尙書) 극정(克正)의 손자,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1189년(明宗 19年) 황려(黃驪; 驪州)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병역(病疫)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救濟)했다. 1211년(熙宗 7年) 호부 원외랑 겸 삼사 판관(戶部員外郞兼三司判官), 1212년(康宗 1年)에 안동도호부판관(安東都護府判官), 1215年(高宗 2年)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에 이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병부낭중(兵部郎中)·전중소감(殿中少監)·대부경(大府卿) 등을 역임했다. 1224년(高宗 11年)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가 되고 이듬해 겸삼사사(兼三司使)에 임명되었다.

임경숙(任景肅)

고려의 학자, 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의 正二品 벼슬)(濡)의 아들로, 1227년(高宗 14年) 수찬관(修撰官)으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238년 형부상서(刑部尙書)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1240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 1244년 좌복야(左僕射; 尙書省의 正二品 벼슬)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1251년(高宗 38年) 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대학사·판이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로 치사(致仕)했다.

임경겸(任景謙)

고려(高麗)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냈다.

임효순(任孝順) 또는 임효명(任孝明)

고려(高麗) 때 판도판서(判圖判書; 版圖司 소속의 正三品 벼슬)를 역임하였다.

임경순(任景恂)

고려 때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지냈다.

임찬(任儧)

고려 때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냈다.

임익(任翊, ? ~ 1301년(충렬왕 27년)

고려의 문신(文臣). 동지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同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 경겸(景謙)의 아들로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277년(忠烈王 3年) 좌찬덕(左贊德), 1279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대사성(大司成)·판합문사(判閤門事), 밀직부사·동수국사(密直副使同修國史)에 이어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치사(致仕)했다. 일찍이 왕명(王命)으로 『선원록(璿源錄)』을 지었고, 1295년(忠烈王 21年)에는 동수국사치사(同修國史致仕)로 왕명(王命)을 받아 사관수찬관(史官修撰官) 김병(金賆)과 함께 원나라(元) 세조(世祖)의 사적(事蹟)을 찬(撰)했다. 박학(博學)하고 전고(典故)에 밝았다. 시호(諡號)는 광정(匡靖)이다.

임급(任伋)

1368년(恭愍王 17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뒤에 광정대부(匡靖大夫; 文官으로 從二品)에 올랐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판삼사사(判三司事)·문하좌찬성사(門下左贊成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임방부(任邦富)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 中書門下省의 正二品 벼슬)를 지냈다.

임방수(任邦壽)

고려(高麗) 때 태자태부(太子太傅; 東宮에 속하여 世子의 敎育을 맡아보던 從一品 벼슬)를 지냈다.

임서원(任瑞原)

고려(高麗) 때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역임하였다.

임홍헌(任洪憲)

고려(高麗) 때 태자태부(太子太傅; 東宮에 속하여 世子의 敎育을 맡아보던 從一品 벼슬)를 지냈다.

임인정(任仁貞)

고려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임보(任寶)

고려 때 예빈시랑(禮賓侍郞)을 지냈다.

임영령(任永齡)

고려 때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동지공거가 되어 재사들을 천거하였다.[11]

임서종(任瑞宗)

1380년(禑王 6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392년(朝鮮太祖 1年)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功)을 세워 순성보조개국원종공신(純誠輔祚開國原從功臣)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시대[편집]

임헌(任獻)

조선태조(朝鮮太祖) 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399년(定宗 1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뒤에 예조참판(禮曹參判)·대사헌(大司憲)·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品階)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임약(任約)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임종선(任從善)

1419년(世宗 1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등용(登庸) 된 후 사간(司諫)·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時文)에 능하였다.

임정(任挺)

조선 때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임석명(任錫命)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 五衛에 둔 從四品 西班 武官職)을 지냈다.

임규(任揆)

조선조(朝鮮朝) 때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임중경(任仲卿)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임회(任會)

조선 때 판관(判官; 從五品 벼슬)을 지냈다.

임득창(任得昌)

조선 성종(成宗) 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무과(武科)에 장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신(使臣)으로 명나라(明)에 다녀온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뒤에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했다. 성종 때 "당대 제일 무장"으로 칭송되었다.[1]

임광세(任光世)

(字)는 현숙(顯叔), 조선 성종(成宗) 때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거쳐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이르렀다. 뒤에 손자(孫子) 임발영(任發英)의 공(功)으로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追贈), 관산군(冠山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임충세(任忠世)

(字)는 신숙(信叔), 조선 때 부사맹(副司猛; 五衛에 딸린 從八品)을 지냈다.

임은(任誾)

(字)는 석공(碩公), 호(號)는 죽담(竹潭), 1472년(成宗 3年)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에 전심(專心), 후진교육(後進敎育)에 힘썼다. 특히 경사(經史)에 밝았다.

임근(任謹)

(字)는 경중(敬仲), 호(號)는 백헌(柏軒), 조선 중종(中宗) 때 효행(孝行)으로 관찰사(觀察使)의 추천을 받아 강릉참봉(江陵參奉)을 지냈다. 뒤에 그가 죽었을 때 왕(王)이 특별히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였다. 이때 왕명(王命)으로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正四品 벼슬) 조홍진(趙弘鎭)이 왕(王)이 하사(下賜)한 제문(祭文)과 비문(碑文)을 찬(撰)했으며, 현감(縣監) 박민헌(朴敏獻) 등이 함께 치제(致祭)하였다.

임희준(任希駿)

(字)는 덕기(德驥), 호(號)는 백담(伯潭),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임희훈(任希訓)

(字)는 덕일(德馹), 호(號)는 송담(松潭),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임희중(任希重)

(字)는 대수(大受), 호(號)는 국담(菊潭), 조선 명종(明宗) 때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專心)하였고, 임억령(林億齡)과는 막역(莫逆)한 사이로서 누차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었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다가 잠시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뒤에 다시 은퇴, 후진교육(後進敎育)과 학문연구에 전심했고, 그의 저서 『인재책(人才策)』은 유명하다. 경서(經書)에 밝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천문(天文)·지리(地理)·병법(兵法)·수학(數學) 등에도 정통했다. 특히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많은 일화가 전한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임희보(任希普)

(字)는 거규(巨奎). 호(號)는 연담(蓮潭), 조선 때 만호(萬戶; 從四品 武官職)를 지냈다.

임희성(任希聖)

(字)는 중현(仲賢), 호(號)는 난실(蘭室),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진도군수(珍島郡守)를 지냈다. 뒤에 아들 발영(發英)의 공(功)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관흥군(冠興郡)에 추봉(追封)되었다.

임희진(任希璡)

(字)는 사현(士賢), 호(號)는 국암(國巖), 조선 선조(宣祖) 때 진사(進士)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해남(海南)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누차 왜적(倭賊)과 싸워 공(功)을 세우고 이해 제2차 진주성 전투(第2次 晋州城 戰鬪)에서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사했다.

임희사(任希駟)

(字)는 치원(致元),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임응룡(任應龍)

(字)는 희운(希雲), 1556년(明宗 11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장흥(長興)·이산(理山)·경원(慶原) 3읍(邑)을 다스린 뒤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뒤에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赴任),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임천감(任千鑑)

(字)는 경택(景澤), 조선 때 판관(判官; 從五品 벼슬)을 지냈다.

임준(任俊)

(字)는 경흡(景洽), 1561년(明宗 16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從四品 品階)·수문장(守門將) 등을 지냈다. 1592년(宣祖 25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여 용만(龍灣)에 이르러 왜적(倭賊)을 만나 역전(力戰) 끝에 형(兄) 천감(千監)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임경백(任慶伯)

(字)는 자한(子翰), 조선 때 훈련원부장(訓練院副將)을 지냈다.

임숙견(任叔堅)

조선 때 현령(縣令; 東班 從五品 外官職)을 지냈다.

임만영(任萬英)

(字)는 홍백(弘伯), 조선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임천영(任千英)

(字)는 홍로(弘老), 조선 때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지냈다.

임백영(任百英)

(字)는 홍언(弘彦), 호(號)는 화동(花洞), 조선 때 학문(學問)과 무예(武藝)에 뛰어났으며, 특히 눈동자가 둘씩이었다고 한다. 1561년(明宗 16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관(經筵官)·수찬관(修撰官)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文官 正三品 堂上官)에 오르고, 뒤에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1592년(宣祖 25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익복(金益福)·박광전(朴光前) 및 동생 임계영(任啓英) 등과 함께 의거(義擧)를 협의(協議), 이때 그는 연로(年老)하여 직접 전장에 임(臨)할 수 없으므로 동생 임계영(任啓英)에게 의병장(義兵將)을 위임(委任)하고 모든 전략(戰略)을 지시하는 한편, 가재(家財)를 풀어 군량(軍糧)을 보급하는 등 많은 공(功)을 세웠다. 문장(文章)과 병략(兵略)에 뛰어났다.

임계영(任啓英)

조선의 문신. 자는 홍보(弘甫), 호는 삼도(三島),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진보(眞寶) 현감을 지냈으며 조선 중기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해 큰 공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주변 선비들과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남원에서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고 전라좌도의병장이 되었다. 전라좌도 의병장으로서 근왕의병을 이끌고 경상도 지역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특히 장수 거창 합천 성주 개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했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부장인 장윤에게 의병 300명을 나누어 관군을 지원하게 했다. 고성과 거제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해 큰 전과를 거두었다. 화의가 성립된 후 양주 목사 등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사후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가 추증되었다.

임발영(任發英)

조선의 무신(武臣). 희성(希聖)의 아들로 1568년(宣祖 1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그 후 무예(武藝)를 연마(硏磨), 추천(推薦)을 받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592년(宣祖 25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서 묘주(廟主)를 모시고 왕(王)을 의주(義州)에 호종(扈從)했다. 의주(義州)에서 무과(武科)에 급제,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고, 이듬해 운량사(運糧使)로 군량수송(軍糧輸送)에 공(功)을 세웠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예양군(汭陽君)에 추봉(追封),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중진(任仲眞)

(字)는 거위(去僞), 호(號)는 귀암(龜巖), 어려서부터 문학(文學)과 무예(武藝)에 뛰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달양(達梁)의 난(亂)에 누차 적(敵)을 격파한 공(功)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慶尙左道水軍僉節制使)를 역임(歷任)하였다.

임계진(任季眞)

(字)는 전여(銓汝), 조선 때 사과(司果; 五衛에 속한 正六品의 武官職)를 지냈다.

임정(任廷)

(字)는 여필(汝弼),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1592년(宣祖 25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를 따라 안골포 해전(安骨浦 海戰)에서 공(功)을 세우고 한산도 대첩(閑山島 大捷)에서 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임달영(任達英)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찰방(察訪; 驛站을 管理하던 從六品의 外官職)을 지냈다. 1597년(宣祖 30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 의병(義兵) 수백을 거느리고 소사(素砂)·전주(全州)·금산(錦山) 등지에서 누차(屢次)(敵)을 격파했다. 그 공(功)으로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에 올랐다.

임혼(任混)

(字)는 극초(極初),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으로서 1592년(宣祖 25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복남(李福男)을 따라 용성 전투(龍城 戰鬪)에서 많은 전과(戰果)를 올리고 이복남(李福男)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임제(任濟)

(字)는 제부(濟夫),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임충간(任忠幹, ? ~ 1644년(인조 22년)

조선의 무신(武臣). 탁영(卓英)의 아들로, 1592년(宣祖 25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종묘령(宗廟令)이 된 숙부(叔父)를 따라 묘주(廟主)를 모셨고, 1600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여러 고을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1636년(仁祖 14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임금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 이듬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고, 그 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여러 지방의 목사(牧使)를 거쳐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임희(任喜)

(字)는 경숙(慶叔), 호(號)는 이계(怡溪),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전심(專心),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도 정통했다.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벼슬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이재(李縡)가 그의 행장(行狀)을 찬(撰)했고, 유림(儒林)에서 보성(寶城)오현사(五賢祠)를 세워 제향(祭享)하고 있다.

임시윤(任時尹)

(字)는 화수(華叟), 호(號)는 거곡(巨谷),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임즙(任楫)

(字)는 경득(景得), 호(號)는 제천당(濟川堂), 조선 때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學者)로,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했을 때 예절(禮節)에 따라 상례(喪禮)를 치르니 효행(孝行)과 학문(學問)이 당세(當世)에 저명(著名)하였다.

임대년(任大年)

(字)는 수경(壽卿), 호(號)는 대은암(大隱庵), 평소 영달(榮達)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전심(專心)하여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명성(名聲)이 높았다. 특히 빈곤(貧困)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흉년(凶年)을 만날 때마다 돈과 곡식으로 구휼(救恤)했으며, 때로는 전장(田庄)까지 팔아서 제민(濟民)에 힘썼다. 숙종(肅宗)이단하(李端夏)의 추천으로 백의(白衣)로서 찰방(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시문(詩文)에 능(能)했다.

임대유(任大有)

(號)는 이암(耳巖), 1607년(宣祖 40年)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1634년(仁祖 14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군무(軍務)에 종사(從事)했다.

임대진(任大晋)

(號)는 국사재(國士齋), 조선의 학자(學者)이다.

임려(任侶)

(字)는 중성(仲盛),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임만기(任萬紀)

(字)는 예겸(禮謙), 1665년(顯宗 6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숙종(肅宗) 때 오위장(五衛將)·양덕현감(陽德縣監)·영암군수(靈巖郡守)·장흥부사(長興府使)·위도첨절제사(蝟島僉節制使)·전라남도우후(全羅南道虞侯), 순천(順天)·나주(羅州)의 영장(營將), 평양중군(平壤中軍)·숙천부사(肅川府使) 등을 역임했다. 관직(官職)에 있는 동안 명관(名官)으로 이름났으며, 특히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명성(名聲)이 높았다.

임자당(任子堂)

(字)는 세구(世構), 호(號)는 보연(寶燕), 조선 때 학자(學者)이다.

임재당(任再堂)

보성 출신으로 임재당 선생의 일기인 갑진록(甲辰錄)은 현존 최장의 도망시(悼亡詩)로, 최근 페미니즘 등 다양한 시각에서 인문학적 연구주제가 되었다. 갑진록은 자식이 없이 떠난 풍산 홍씨 부인을 생각하며 쓴 일기로, 유교적 틀안에서의 조선 선비의 부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은 부인이 떠나고 얼마되지 않아서 세상을 마감하였으며, 큰 형님의 셋째를 양자로 삼았다. 양자는 이후 무과에 합격했고, 손자는 과거에 급제해 정6품 이조좌랑에 올랐다.[12] 갑진록과 관련해서는 2017년에 개최된 '임재당 도망시 학술대회' 등의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임성(任誠)

(字)는 여현(汝賢),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임이열(任以說)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임홍주(任弘舟)

(字)는 의중(毅仲), 조선(朝鮮) 때 학자(學者)이다.

임상주(任相舟)

(號)는 강수헌(強睡軒), 1673년(顯宗 14年)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경서(經書)에 능(能)했다.

임후창(任後昌)

(字)는 무백(茂伯),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임수창(任壽昌)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임최(任最)

(字)는 유선(惟善),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임욱(任勗)

(字)는 군보(君輔),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임경관(任鏡觀)

(字)는 광보(光甫), 1725년(英祖 1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장령(掌令; 司憲府 正四品 벼슬)·사성(司成; 成均館 從三品 벼슬) 등을 거쳐 옥구현감(沃溝縣監)·울진현령(蔚珍縣令)·서산군수(瑞山郡守)·진주목사(晋州牧使)·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 등을 역임하고, 대사성(大司成; 成均館의 으뜸 벼슬로 正三品)에 이르렀다. 여러 지방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포상(褒賞)으로 은마(銀馬)를 하사(下賜)받았다.

임재대(任載大)

(字)는 여후(汝厚),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 五衛에 둔 從四品 西班 武官職)을 지냈다.

임주원(任柱元)

(字)는 대재(大哉), 호(號)는 낙은재(樂隱齋), 1735년(英祖 11年) 진사(進士)가 되고, 1762년 반궁(泮宮)에 있을 때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케 했고, 박남계(朴南溪)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지 말 것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직(辭職)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학문(學問)과 절의(節義)로써 명성이 높았다.

임장원(任長源)

(字)는 회일(會一), 호(號)는 규암(葵庵), 1773년(英祖 49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798년(正祖 22年)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왕(王)으로부터 극찬(極讚)을 받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特進)되어 경연관(經筵官)·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을 겸임(兼任)했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造詣)가 깊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성품(性品)이 충직(忠直)하여 정조(正祖)로부터 많은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당시 유학(儒學)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예조참판(禮曹參判)·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일원(任一源)

(字)는 효여(孝汝), 1754년(英祖 30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서(司書)·설서(設書)를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장례원정(掌隷院正) 등을 역임하고, 뒤에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좌통례(左通禮)·경성도호부지평(鏡城都護府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임제원(任濟遠)

(字)는 군즙(君楫), 호(號)는 수암(叟巖), [[1755년]](英祖 31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감찰(監察)을 거쳐 병조(兵曹)·예조(禮曹)·호조(戶曹)의 정랑(正郞), 장령(掌令)·봉상시정(奉常寺正)·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등을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만경현령(萬頃縣令)·양산군수(梁山郡守)를 지냈다.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인망(人望)을 얻었고,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임용재(任龍材)

(字)는 인용(仁用), 호(號)는 만회(晩悔), 1831년(純祖 31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오위장(五衛將)에 특임(特任)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838년(憲宗 4年) 80세에 이르러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임사국(任思國)

(字)는 성보(聖甫), 호(號)는 뢰옹(懶翁), 조선 때 학행(學行)이 뛰어나 누차(屢次) 도천(道薦)되어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임중현(任中鉉)

(字)는 윤화(允和), 호(號)는 초운(樵雲), 1894년(高宗 31年)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학문(學問)과 효행(孝行)으로 명성이 높았고, 평생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학문(學問)에만 전심(專心)했다. 김윤식(金允植)이 그의 행장(行狀)을, 김복한(金福漢)이 초운당기(樵雲堂記)를, 박기양(朴箕陽)이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각각(各各)(撰)했다.

임태주(任泰柱)

(號)는 성재(誠齋),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여 고향인 화순(和順)에서 일생동안 학문과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전념(專念)했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많은 학자(學者)가 배출(輩出)되었는데, 그는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造詣)가 깊어 당시 대표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추앙(推仰)되었다.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고, 장흥(長興)의 용강사(龍岡祠), 능주(綾州)의 칠송서원(七松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임귀현(任龜鉉)

(字)는 성구(聖求), 호(號)는 전은(田隱), 효행(孝行)이 뛰어나 고종(高宗) 때 누차(屢次) 천거(薦擧)되어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임기남(任琪南)

(字)는 응수(應叟), 호(號)는 의재(毅齋), 한말(韓末) 고종(高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1894년(高宗 31年)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일어나자 수성대장(守成大將)이 되어 동학군(東學軍)과 격전(激戰) 끝에 박헌양(朴憲陽) 등과 함께 전사(戰死)했다.

임병관(任炳琯)

(字)는 문초(文初), 호(號)는 죽파(竹坡), 고종(高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을 지냈다. 1894년(高宗 31年)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때 아버지 임기남(任琪南)이 전사(戰死)하자 단신(單身)으로 적진(敵陣)에 뛰어들었다가 적탄(敵彈)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때 그의 부인 박씨(朴氏)가 뒤따라 적진에 뛰어 들어가 시아버지 시체(屍體)는 들것에 싣고, 부상당한 남편은 등에 업고 적군(敵軍)을 헤치고 집에 돌아왔다. 그 후 일문(一門)의 3절(三節; 忠·孝·烈)로서 세인(世人)의 많은 칭송(稱頌)을 받았다.

임정현(任淨鉉)

서기1874-1908, 한말 의병장, 일명 준현(準鉉), 보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병서를 즐겨읽고 천문과 술수에도 능 하였다. 1908년 안규홍(安圭洪)이 보성 동소산에서 의거하자 이에 가담하여 파청, 대원 ,운월, 서봉, 진산 등지에서 승전하였다. 병치에서 격전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1990년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임병국(任柄國)

(字)는 민호(珉鎬), 1905년(光武 9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締結)되자 국권(國權)을 회복(恢復)코자 수백 장정(壯丁)을 규합(糾合)하여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고 안규홍(安圭洪)·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양동훈(楊東勳)·이관회(李貫會) 등과 합세, 1908년 3월 26일 왜적(倭敵) 영호(永戶, えいと)·평정부대(平井部隊, ひらい ぶたい)가 순천(順天)으로부터 보성(寶城)에 출동한다는 정보(情報)를 탐지(探知)하고 길목에 잠복(潛伏)하였다가 기습(奇襲)하여 대장 영호(永戶, えいと)와 평정(平井, ひらい)을 비롯하여, 많은 왜적(倭賊)을 죽이고 전리품(戰利品)을 노획하는 등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그 후 계속해서 문덕(文德)·복내(福內) 등지에서 수차(數次)에 걸쳐 교전하였으며 왜적(倭賊)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敗)하고 왜적(倭賊)에게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宣告)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服役)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대한민국[편집]

임충식(任忠植)

육사1기 참위(육군소위)로 임관하여 6·25동란때는 유명한 백골부대(18연대장·대령)를 이끌고 탁월한 전략전술과 투철한 책임감으로 많은 전투에서 용명을 떨쳤다. 원산탈환작전 등 1백40회 이상의 계속된 전투에서 상승(常勝) 대한민국 전사에 신화를 남겼다. 태극무공훈장·을지·충무·미국 은성훈장 등 36개의 국내외 훈장이 그 전공을 말한다. 제2·7사단장 제5·6군단장 제2훈련소장 헌병사령관 등 지휘관과 국방부차관보 육군참모차장을 거쳤지만 지휘관으로 있는 동안은 한번도 부하를 처벌한 일이 없는 덕장으로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2] 군인으로 제10대 합동참모의장(대장)을 지냈고 정치인으로서 제17대 국방부 장관과 제8·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임상규(任祥奎)

제17회 행정고시로 임용되어 대한민국 공무원으로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제21대 과학기술부 차관, 초대 과학기술혁신본부 본부장, 제11대 국무조정실장, 제56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행정학 박사(博士)로 순천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임갑인

고등검사장(대전,1960년) 서울제1변호사회장(1976년)

임동백(任東伯)

순천시의회 시의원 역임.

임종문(任鍾汶)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임관. 중앙정부 사무관으로 임용. 초대 율촌산단개발사업소장, 도청이전사업본부장, 경제자유구역청 행정개발본부장 및 투자유치본부장 등을 역임. 전남대 토목공학박사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정통 개발관료로 불렸다.

최근 인물[편집]

군: 임형백(공군준장)

변호사: 임종모, 임원배, 임태선, 임통일 등

사법부: 임성규(판사), 임한흠(판사) 등

시민단체: 임종희(任鍾熙, 일제징용보상위원회)

입법부(국회의원): 임영득(任煐得)

입법부(지방의회): 임종기(순천시의회 의장, 전남 도의원)

행정부(장차관급): 임종룡(任鍾龍, 국무총리실장), 임종석(任鍾晳, 대통령비서실장)

행정부(지방자치단체): 임병택(시흥시장), 임영태(군수)

학계: 임문석(성균관전학), 임병순(보성향교전교), 임선준(고흥교육장), 임을규(한양대교수), 임정모(농림부연수원교수), 임정배(목포해양대학장), 임정수(순천향교전교), 임중규(전남대교수), 임진모(전북대교수), 임형일(해양전문대교수), 임희모(한일장신대교수) 등

해외: 임근수(컴퓨터과학자), 임병우(미국주립대교수) 등

금융권: 임정수(농협손해보험 전남총국장)

주요 유적[편집]

현존[편집]

현대 재건[편집]

소실[편집]

집성촌[편집]

주요 이거 시점[편집]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후 임득창의 손자 대에서 인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임광세와 임충세의 자 7형제 중에서 집안의 장손들을 제외하고 차자들이 이주한 경향을 보인다.

보성 이거[편집]

임희중(국담)은 보성 조성 축내로 이거하였다. 임희중이 1511년경에 장천동 분암을 두고 떠난 회한이 시로 국담유고에 남아있다.[3]

해남 이거[편집]

임희성(난실)의 아들 임발영의 집안은 해남 계곡으로 이거하였다.

순천 이거[편집]

임충세의 장손자 임대진의 자손은 순천 해룡면 마산과 서면 운평/비월로 이거하였다.

세계도 (世系圖)[편집]

상계 (上系)[편집]

시 조
2 세
3 세원숙원후원순(원준)
분 파문숙공파문충공파문헌공파

장남이 왼쪽임.


문충공파(중파)[편집]

3세원후
4세극충극정
5세-경숙경겸경휘경순
6세익돈
7세홍헌홍방홍대홍정인정서종서원
8세
9세승언종선맹경중경
10세희신수신익신처신
11세이로이겸석견숙견순원순수
12세우윤덕유
13세응기응린응표응룡응형종해종두
분파봉황동파효자동파진주공파원주양주파아산파제천파보령파여주파

문숙공파(종파)[편집]

3세원숙
4세영첨충빈
5세효성
6세영부순부
7세
8세진승귀검
9세충전좌원
10세
11세서규
12세
13세희무희관희우희로희경희진희주희벽희찬
분파운곡파청계파예락파지석파선전관공파국암공파학산파

문헌공파(계파)[편집]

3세원순(원준)
4세윤(潤,국자감제주國子監祭酒)
5세정보(貞輔,찬성사贊成事)
6세방부(邦富,평장사)방수
7세보(寶,절제사節制使)
8세약(約)
9세석명석복
10세득창(得昌,부사府使)
11세광세충세
12세희준희순희중(보성이거)희보희성
13세맹진중진대영만영천영정영백영계영말영철영석영탁영발영귀영
분파충순위공파절제공파의곡파첨지공파사창파화동공파삼도공파운수동파람치파난실공파해남이거


3세원순(원준)
4세윤(潤,국자감제주國子監祭酒)
5세정보(貞輔,찬성사贊成事)
6세방부(邦富,평장사)방수(邦壽,이부상서吏部尙書)
7세보(寶,절제사節制使)영령(永齡,중랑장中郞將)
8세약(約)
9세석명석복일중집중윤중
10세득창(得昌,부사府使)득청귀청치원가원정(貞,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1세광세충세보세백손세호세희
12세희기희사몽필자숙희정희율희현희백희보
13세대진백진계진익수국필동영중영남영장영경영검영
분파국사재공파(순천이거)대치파평촌파성자동파진도맹진파진도고성파진도세방파

원순(元順)과 원준(元濬)을 동일인으로 보는 논거[편집]

원순에 대한 족보외 문헌상의 기록을 찾기 어렵다. 원순에 대한 거의 유일한 문헌상의 기록은 경상도관찰사 선생안(慶尙道觀察使 先生案)이다. 반면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기록에는 의(懿)의 자(子)로 각각 평장사·문하시중을 역임 재상의 반열에 오른 원숙(元淑), 원후(元厚), 원준(元濬)의 3인의 활동상황만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원순(元順)은 원준(元濬)의 오기이거나 초명으로, 양자가 동일인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사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초명, 일명, 일휘, 초휘 등의 복수의 이름을 사용한 선조들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원준의 형인 원후의 경우 초명이 원애이다. 이러한 학계의 시각과 일치되게 1803년 발간된 장흥 임씨 계해가승보(고내)와 이후 발간된 임진고내파보와 갑자대봉보에 원준의 초명을 원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1978년 발간된 장흥 임씨 기미대동보에 기록된 원순의 이력은 고려사에 기록된 원준과 동일하다.

주요파[편집]

  • 충렬공파
  • 봉황동파
  • 광주파
  • 원주파
  • 아산파
  • 제천파
  • 보령파
  • 여주파
  • 운곡파
  • 청계파
  • 지석파
  • 두륜봉파
  • 초평파
  • 학산파
  • 백담파
  • 송담파
  • 국담파
  • 연담파
  • 난실공파
  • 국사재공파(순천)
  • 대치파
  • 평촌파
  • 성자동파
  • 진도파

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편집]

장흥 임씨 항렬표[편집]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석(錫)

○현(鉉)

태(泰)○ ○모(模)

○식(植)

병(炳)○

형(炯)○

○규(圭) 종(鍾)○ ○수(洙) 영(榮)○

상(相)○

○환(煥)

○열(烈)

교(敎)○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탁(鐸) 한(漢)○ ○근(根) 형(炯)○ ○달(達) 호(鎬)○

인구[편집]

  • 1985년 장흥 임씨 34,141명 + 관산 임씨 1,157명 = 35,298명
  • 2000년 장흥 임씨 24,523명 + 관산 임씨 1,461명 = 25,984명
  • 2015년 장흥 임씨 32,198명 + 관산 임씨 5,386명 = 37,584명

기원[편집]

장흥 임씨는 고려의 재상 반열에 오른 2세조 임의(任懿)와 그의 아들들인 원숙, 원후, 그리고 원순(또는 원준)을 그 기원으로 모시고 있다. 장흥 임씨의 사당인 정안사(定安祠)에서는 추가로 공예태후(恭睿太后)까지 모시고 있다. 2세조 정경공 이전에 장흥 임씨의 상고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설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헌원 임씨와의 관계를 고증하려한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 토착 성씨로의 기원에 대한 것이다. 즉 여러 가지 이견이 있어서 고고학적 고증과 과학적 정립이 필요하다.

헌원계설[편집]

헌원씨

1979년 7월 중화민국에서 발간한 임성본원휘고(任姓本源彙考)에서는 중국 헌원 임씨의 호(顥, 109세)가 장흥 임씨의 시조와 동일인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견이 있어 확실한 정립이 필요하다. 그 내용인 즉, 장흥 임씨의 시조 임호(顥)는 중국 송나라 소흥부(紹興府) 출신으로 상서공부원외랑(尙書工部員外郞; 공조 소속의 정6품 벼슬)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는데[14], 당시 중국의 정세가 혼란하자 난을 피하여 고려 정종 때 정안현(定安縣; 현재의 장흥군 관산읍(冠山邑)의 임자도(任子島 또는 荏子島)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그곳 천관산 아래에 있는 당동(堂洞)에 정착하였다. 따라서 장흥 임씨의 원조는 도교의 시조이자, 중국의 건국 신화에 나타나는 제왕으로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군주로서 문명의 창시자로 숭배되고 있는 헌원씨로 알려져 있다. 헌원은 유웅국군(有熊國君)인 소전의 아들 또는 자손이며, 유웅국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곰족(단군신화의 곰을 연상해 볼 수 있다)이 세운 나라이다. 중화민국 임씨종친회에서 발간한 임성본원휘고에는 헌원씨의 8자인 우양(禹陽)이 임씨(任氏)로 사성(賜姓)되어 헌원계(軒轅系) 임씨의 시조로 인정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주 3] 여기에서 우양(禹陽)의 107세인 약(鑰)의 손자 호(顥, 109세)가 바로 장흥 임씨의 시조라는 설이다.

유웅국군      소전(少典)
              |
중국시조      황제헌원(黃帝軒轅)
              +---------------+----------+------+----------+----------+------+----------+----------+
헌원계 1세    우양(禹陽, 8子) 창의(昌意) 보(寶) 용묘(龍苗) 청양(靑陽) 휘(暉) 이팽(夷彭) 창림(濸林) ...
              +----------+----------+
헌원계 2세    우호(禹號) 중양(仲陽) 총 25子
              |
헌원계 3세    우경(禹京)
              |
헌원계 4세    요양(徭梁)
              |
헌원계 5세    번우(番禹)
              |
헌원계 6세    해우(奚禹)
              |
헌원계 7세    해중(奚仲)
              |
              ... (중략)
              |
헌원계 100세  이(梨)
              +--------------------+
헌원계 101세  경(燝)               욱(煜)
              +----------+         |
헌원계 102세  관(雚)     양(壤)    (생략)
              |          |
헌원계 103세  염삼(念三) 염구(念九)
              |          |
헌원계 104세  정방(廷芳) 익(益)
              |          +---------+
헌원계 105세  (생략)     성(誠)    혜(譓)
                         |         |
헌원계 106세             수(壽)    원지(元之)
                         |         |
헌원계 107세             (생략)    약(鑰, 紹興始祖 절강성 소흥부 자계현 소흥시조)
                                   |
헌원계 108세                       충(种)
                                   |
헌원계 109세                       호(顥, 東來韓國始祖 長興任氏遠祖 추정)
                                   +----------+
헌원계 110세                       전(銓)     관(瓘, 歸河南)
                                   +----------+
                                   정옹(定翁) 연옹

이에 대한 해설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가설이 있다. 송나라 소흥부의 호(顥)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전(銓)이고 둘째아들(季子)은 관(瓘)으로, 계자인 이 관이 '귀하남불명('歸河南不明:황하강 남쪽으로 돌아가 생사를 모른다)'으로 중국의 임씨 세계표에 기록되어 있는점에 바탕한다. 즉 이로 미루어, 시조 호(顥)가 종통을 이을 장자는 중국에 남겨두고 계자인 관(瓘)을 데리고 고려국으로 왔으며, 고려에 입국하면서 관(瓘)이 의(懿)로 개명되었다고 일각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도래설의 추정 논거로는 정안(현재 장흥) 지역은 후삼국시대 선종 9산(禪宗 9山)의 하나인 가지산의 소재지로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가 활발하였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16세기에 건립된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으로 다소 중국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맡길 임씨 문중에서는 이와 같은 사료를 바탕으로 민간 교류를 시작하였다. 2016년 4월 한국 임씨 대표단(장흥 임씨, 풍천 임씨)이 중화 임씨의 성지인 중국 제녕시 임성구를 방문한데 이어 2016년 8월에 중국 맡길 임(任)씨 기업총상회 대표단이 장흥 임씨의 발상지인 한국 장흥군을 답방하였다.

시조 임호의 휘자에 대한 고증: '顥'와 '灝'[편집]

  • 정경공 묘지명이 발견되어 이를 자세히 검토한 결과 '顥’가 바로 정경공의 부친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두 분은 父子之間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역대 장흥임씨 족보에서 원조(遠祖)라 부르던 분의 휘자(諱字)가 '灝’였는데 정경공 묘지명에서는 '顥’ 字로 기록되어 있다.
  • 대만에서 입수한 전기 임성본원휘고에서 살펴보니 역시 중국소흥임씨의 시조인 임약의 손자가 바로 '任顥’로 되어 있어 정경공 묘지명에서 부친으로 나타난 '顥’와 이름이 일치함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연대를 추정해 보니 묘지명의 연대와 임성본원휘고 상의 연대가 일치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 따라서 정경공 묘지명에 나타난 '顥’와 임성본성휘고에 나타나는 '顥’가 일치한다는 결론을 맺었고 또한 임충빈(任忠贇)의 묘지명과 임익돈의 묘지명에서도 모두 동일하게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장흥 임씨의 기미대동보 때부터 시조공의 諱字(휘자)를 '灝’에서 '顥’로 변경하여 표기하게 된 것이다.

중국임씨 헌원계 109세 '顥’와 장흥임씨 시조 '顥’ 선조의 이름이 동명(同名)이라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동일인(同一人)이라는 고증이 안되어있다.

한반도 토착 성씨설[편집]

하지만 장흥 임씨 족보 외의 사료나 유물 상으로 송나라 도래설이 고증된 것은 아니다. 몇가지 도래설에 대한 반론의 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정경공의 묘지명을 보면 공은 '나주 정안현 사람이다’라고 분명히 출신지를 밝히고 있다.
  • 고려사 등의 사료를 보면 정경공 이전에도 任氏姓(임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고려에 살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 고려사에 장흥 임씨 2세조 정경공의 행적은 1095년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반하여, 그 이전에도 임억(任億, 1061년), 임술광(任述光, 1017년) 등 총 6명의 맡길 임씨의 활동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 삼국시대에도 맡길 임씨 성을 사용하는 인물의 기록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신라의 임영리(任永里) 장군이 있었다. 임영리의 관등은 이찬으로 신라 진골에 속한다. 가야의 지배층이 신라 진골로 흡수된 것을 감안하여, 임나(任那) 가야 지역 인물들을 당시의 왕이 임생(任生)이라 칭한 기록이 남아있음을 상기해 볼 수 있다.
  • 고려사 등에서는 문헌이 확실한 정경공(懿)을 장흥임씨의 1세조로 하였다.
    • 서기 1979년 장흥임씨 己未大同譜 발간 전까지는 장흥임씨의 시조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 다만 역대 족보에서 諱 '灝’가 중국에서 고려시대에 이주하였을 것으로만 추정하여 諱 '灝’를 원조로 하고 있다.
  • 직접적 연관은 없으나 덧으로 장흥 임씨는 원래 정안 임씨로 불렸는데 비슷한 시기에 출몰한 정안국과 한자가 동일하다. 정안국은 발해계 유민이 건국한 나라로 많은 수가 이후 고려에 흡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또한 한반도 고대어로 임(任) 또는 님은 임금(군주)나 연인을 뜻하기도 한다.

과학적 고증 (분자인류학)[편집]

문헌공파 임대진(任大晋)의 자손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30세 손의 SRY(Sex Determining Region Y)를 유전자 분석한 결과 O-CTS201로 판별이 난 것이 보고 되었다. O-CTS201의 하부에는 크게 2가지 세부 분류가 있다. 하나는 한반도, 만주, 일본 등지에서만 주로 검출이 되는 SK1702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 본토에서만 주로 검출되는 M159이다. SK1702는 약 6천년전에 한반도와 만주 지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5%를 상회하는 비율로 나타나는 부계 유전자 하플로 그룹이다. 한국인의 경우 O-CTS201은 99% 이상의 확률로 SK1702로 판별이 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장흥 임씨의 선조는 약 6천년 전에 만주 지방으로 이주하여 이후 삼국시대 초기 또는 이전에 남하하여, 이후 한반도 남부 지방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토착 성씨 중의 하나가 된다. 따라서 향후에 세부 분류에 대한 검사와 보다 많은 유전자 샘플에 대한 검사가 이뤄진다면 장흥 임씨의 기원에 대한 논쟁을 과학적으로 고증할 수 있겠다.

어원[편집]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임(任)'이라는 글자가 '맡는 것(符, 委任)'이며, 인(人)자를 변으로 두고, 소리는 '임(壬)'이라 한다고 하였다. (任, 符也. 从人, 壬聲.)[15] 현대어에서 '임'이란, 중요한 책임이나 직을 '맡기다' 또는 '맡다'라는 뜻이다. 이는 '능하다'와 '믿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임'자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그 문헌상의 기원을 갑골문(甲骨文) 또는 서주금문(西周金文)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파생 해석이 존재한다.

지도자, 리더(Leader)라는 해석[편집]

'임(任)'자의 어원을 임금 왕(王)자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 하나는 '임'자의 형태가 금문(金文)에 '사람 인(亻)'과 '임금 왕(王)'자를 조합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16]. 이후 '왕'자의 가운데 획이 길이진 형태로 진화한 후에 다시 윗 획이 기울어진 형태인 현재의 '임(壬)'자로 변화되었다. 이를 토대로 '임(任)'자의 뜻을 현대와 유사하게 사용한 원문이 금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임'자의 그 원 뜻을 임금, 지도자 등으로 해석한 것이다.
  • 다른 하나는 '왕(王)'자의 본 의미의 해석과 관련이 있다. '왕'자는 천지인에 해당하는 세 획(三)을 관통(丨)하는, 즉 통달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王={三, 丨})과, '공(工)'자 두 개를 위아래로 겹친 모양으로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는 해석(王={工, 工})이 상존한다[17]. 즉, 갑골문을 '임(任)'의 어원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갑골문의 '공(工)'자가 능통함, 리더, 지도자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거나 내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용하는 '장인 공(工)'자는 갑골문에서는 '丅+口' 또는 '丅+ㅂ' 자 모양을 띄고 있기 때문에[18], 갑골문의 '공(工)'자를 현대의 '장인 공(工)'자로 오인하는 착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어원에 대한 해석과 무관하게, '임(任)'자에 '사람 인(亻)'과 함께 사용된 '임(壬)'자는 북방, 크다, 성대하다, 지도자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아홉번째 천간(天干)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장인(匠人, master), 공학자(工學者)라는 해석[편집]

'임(任)'자의 어원을 갑골문으로 보는 경우 뛰어난 기술자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으나, 갑골문자 해석과 관련된 오류일 확률이 높다. 중국 '상형자전(象形字典)'과 '한전(漢典)'에서는 '임'자의 원류가 '장인 공(工, 巨, 矩)[19]'과 '사람(亻)'의 합성어라고 주장하고 있다[20]. 즉, 고대 사회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뛰어난 장인/기술자', 현대어로 공학자, 엔지니어(Engineer)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어떤 일이나 사무를 '맡다' 또는 '맡기다'라는 뜻이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갑골문을 원류로 보는 시각에서는 임(任)자에서 임(壬)자는 왕(王)자의 변형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 논거는 임(任)자의 형태가 '임금 왕(王)'자를 포함한 이유는 금문(金文) 이후로부터 '사람 인(亻)'과 '장인 공(工)'자에, 장비를 쥔 모양 혹은 강조의 뜻을 나타내는 지사부호(指事符號, 一)가 추가된 형태로 합성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갑골문에서 '장인 공(工)'자는 아래 획이 '입 구(口)' 모양 또는 '비읍(ㅂ)' 모양을 띄고 있다. 즉, 갑골문에 '공(工)'자는 현대의 '장인 공(工)'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의 신빙성이 낮다[18]. 단적으로 장인 또는 기술자라는 뜻의 '장인 장(匠)'자는 갑골문에 이미 등장하는데, 그 모양이 임(任)자와는 확연하게 다르다[21].
  • 갑골 문자는 5천여자 발견되어 겨우 1천여자가 해석된 상형문자로 해석이 난해하다. 그 이유는 좌우의 구분이 없으며 합문(合文)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갑골문에 '임(任)'자의 어원이라고 주장하는 구문의 경우에도 '공(工)'자가 '사람(亻)'자 앞에 나오는 등 좌우가 바뀌어 있는 경우를 포함하고 있다.
  • 근본적으로 상형문자(象形文字)를 구갑(龜甲, 거북등)에 세겨 기록한 갑골문에서 형성문자(形聲文字)인 '임'자의 원류를 찾는 것이 정확한 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형성 문자는 뜻 글자와 소리 글자를 조합해 만든 문자로 이후 시대가 많이 흘러 육서를 통해 비로서 구분되고 체계화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 장흥 임씨 대종회
  • 풍천 임씨와는 족내 통혼을 금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집안 모두 족보상으로 동일 지역 출신인을 원조로 모시고 있는 등 상호 간의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풍천 임씨와 장흥 임씨 문헌공과의 관계에 대한 고증을 시도한 사례도 있다.

각주[편집]

내용주
  1. 재상지종(宰相之宗) 3번째 가문
  2. 고려의 오등봉작제에 따르면 1등급인 공작 국공(國公)에 해당하며 식읍으로 3천 호를 하사.
  3. 일반적으로 헌원계 성씨로는 희(姬), 유(酉), 기(祁), 기(己), 등(滕), 침/짐(葴), 임(任), 순(荀), 희(僖), 길(姞), 현(儇), 의(衣)가 알려져 있다.
참조주
  1. 『고려사』 권95, 열전8
  2. “장흥고문학-기록문학(1) 고려조 장흥임씨와 장흥부(長興府) 탄생”. 2022년 4월 21일. 2022년 9월 19일에 확인함. 
  3. 신, 수정 (Vol.- No.25 [2006]). “무신정권기 定安任氏 任濡系의 혼인망”. 한국사학보. 2021년 8월 1일에 확인함. 
  4. 장흥 임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5.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2018년 9월 3일에 확인함. 
  6. “임원준(任元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8년 9월 3일에 확인함. 
  7.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2018년 9월 3일에 확인함. 
  8.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E%A5%ED%9D%A5%20%EC%9E%84%EC%94%A8&ridx=120&tot=135
  9. “임종일(任從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9년 9월 4일에 확인함. 
  10.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2018년 9월 3일에 확인함. 
  1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년 4월 20일에 확인함. 
  12.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075458
  13. “보관된 사본”. 2016년 3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0월 24일에 확인함. 
  14. 출처: 승석가부해동설(乘石舸浮海東說)
  15. “漢典”. 
  16. “漢典”. 
  17. “파자 명상 3 : 임금 왕(王)”. 2019년 12월 3일. 2021년 8월 1일에 확인함. 
  18. “대지를 흐르는 큰 물, 江(강)과 河(하)를 갑골문으로 풀어 본다”. 2020년 12월 23일. 2021년 8월 1일에 확인함. 
  19. “漢典”. 
  20. “象形字典”. 
  21. “존 한자사전 - 음으로 찾기 "%C0%E5". 2021년 8월 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