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녕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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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녕태자
元寧太子
고려 태조의 왕자
이름
별호 진주낭군(鎭州郞君)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미상
사망일 976년
부친 태조
모친 숙목부인
배우자 미상
자녀 효당태자

원녕태자(元寧太子, ? ~ 976년)는 고려의 왕족으로 태조숙목부인의 아들이다. 진주낭군(鎭州郞君)이라고도 한다.

생애[편집]

가계[편집]

고려의 초대 태조와 태조의 제10비 숙목부인의 아들이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 본관개성이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1]. 혜종, 정종, 광종 등의 이복 형제이다.

원녕태자의 생모 숙목부인에 대해 《고려사》에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단지 진주(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2]) 출신이며 대광 명필(名必)의 딸이라고만 적혀 있다[3].

이에 대해 현대의 일부 학자는 태조 즉위 후 곧바로 행한 인사이동에서 나타나는 임명필(林明弼)을 숙목부인의 아버지 명필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될 경우 숙목부인은 진천 임씨(진주 임씨)가 된다[2]. 한편 충북대학교 교수 신호철도 자신의 연구 논문 〈고려의 건국과 진주 임씨의 역할〉에서 숙목부인을 진주 임씨라고 주장하고, 그 혼인 시기는 태조가 궁예의 휘하에 있으면서 진주 지역을 정벌하러 갔을 때, 즉 고려 건국 전으로 추측하였다[4].

왕자 시절[편집]

광종은 960년(광종 11년) 이후 왕권 강화를 위해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다[5]. 그러나 광종이 죽고 그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광종 때 숙청되었던 호족들은 976년(경종 원년) 경부터 집정 왕선의 주도 하에 복수극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원녕태자와 효성태자(태조와 천안부원부인의 장남 천안부원낭군)도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6]. 그러나 경종은 자신의 숙부뻘이 되는 원녕태자 등이 살해당하자 복수법에 염증을 느끼고, 이 해 음력 11월 왕선을 귀양보냈다[7]. 한편 이러한 점을 근거로, 원녕태자 등이 광종의 호족 숙청에 상당한 지원을 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2][8].

원녕태자(元寧太子)이며, 생전에는 진주낭군(鎭州郞君)으로도 불렸다[2]. 원녕태자는 아들 효당태자를 둔 것으로 보아[1] 혼인을 한 것은 확실한 듯 하나, 아내가 누구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가족 관계[편집]

  • 조부 : 세조(世祖, ? ~ 897)
  • 조모 : 위숙왕후 한씨(威肅王后)
    • 아버지 : 태조(太祖, 877 ~ 943)
  • 외조부 : 임명필(林名必)
  • 외조모 : ?
  • 부인 : 미상
    • 아들 : 효당태자(孝當太子)

원녕태자가 등장한 작품[편집]

출처[편집]

  1. 《고려사》권90〈열전〉권3 - 원녕태자
  2.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숙목부인〉항목”. 2016년 3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8월 15일에 확인함. 
  3. 《고려사》권88〈열전〉권1 - 숙목부인
  4. 진천 임씨 종친회 - 고려의 건국과 진주 임씨의 역할[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 박영규 (2000년 3월 25일).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32쪽. ISBN 89-7527-154-4. 
  6. 정성희 (2007년 2월 15일). 《이야기 고려왕조사》. 청아출판사. 81쪽. ISBN 9788936803605. 
  7. 《고려사》권2〈세가〉권2 - 경종 원년 11월 - 왕선 등을 귀양보내다
  8. 박영규 (2000년 3월 25일).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52쪽. ISBN 89-7527-154-4.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