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종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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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종
高麗 靖宗
고려의 제10대 국왕
본명 왕형(王亨)
재위 1034년 ~ 1046년
종교 불교
왕후 용신왕후
용의왕후
용목왕후
부왕 현종
모후 원성왕후
이전 왕 덕종
다음 왕 문종

정종(靖宗) 1018년 8월 31일 (음력 7월 18일)[1] ~ 1046년 6월 24일 (음력 5월 18일)은 고려 제10대 국왕(재위: 1034년~1046년)이다. 는 형(亨), 는 신조(申照), 묘호정종(靖宗), 시호홍효안의문경용혜대왕(弘孝安毅文敬容惠大王)이다. 현종과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의 둘째 아들이자 덕종의 친동생이며 문종, 정간왕의 이복 형이다.

5역(五逆)·5천(五賤), 불충, 불효자와 향(鄕)·부곡(部曲) 거주자 및 천인인 악공(樂工)·잡류(雜類) 들의 자손들의 과거 응시를 금지했고, 1046년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을 제정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022년(현종 13) 내사령 평양군(內史令平壤君)에 봉해졌고, 1027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 겸 내사령(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兼內史令)에 임명되었다. 그 뒤 1034년 동복형 덕종이 죽자 그 유언으로 왕위를 승계하였다.

서경개경팔관회를 열어 대사면령을 내림으로써 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 최제안, 최충, 유지성 등을 각각 예부, 이부, 형부, 공부상서로 기용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재위 기간[편집]

즉위 초반[편집]

즉위년 11월 팔관회를 열었을 때 송나라의 상인들과 동·서여진(東西女眞) 및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쳤는데, 이후 이들 동, 서 여진의 사신 및 탐라국 사절단에게도 팔관회를 관람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1035년 서북로(西北路) 함경남도 송령(松嶺, 함흥 부근)에 장성을 쌓아 변방의 수비를 강화했고,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昌城)에 성을 쌓아 창주(昌州)라 하고 백성을 이주하여 살게 했다. 1036년 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를 더 지급하여 변경의 방비를 맡게 하였다.

1036년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수리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복과 옷을 지어주게 하였다.

거란과의 수교[편집]

그러나 거란의 계속된 위협으로 1037년 압록강 일대에서 거란의 침입을 받자, 강화 회담을 체결하여 한동안 단절되었던 조공을 다시 바치기로 하여 거란과 화친을 맺었으며, 1038년부터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1039년 거란요나라 황제로부터 책봉교서를 받았다.

1039년 광종때 폐지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다시 부활하여 노비 여성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는 노비가 되도록 했고, 1045년 임진강(臨津江)에 부교(浮橋)를 놓았다.

그러나 비밀리에 백성들을 징발하여 정변진(靜邊鎭)·숙주(肅州)·영원(寧遠)·평로(平虜)·장주(長州)·정주(定州)·원흥진(元興鎭) 등에 계속 성을 수축하게 하였는데, 1044년 천리장성을 완공케 했다.

제도 개편[편집]

또한 예학 관련 서적의 반포를 명하여 그해 〈예기정의 禮記正義〉·〈모시정의 毛詩正義〉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5역(五逆)·5천(五賤)·불충·불효한 자와 향(鄕)·부곡인(部曲人)·악공(樂工)·잡류(雜類) 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할 것을 금지, 박탈했다. 1046년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을 제정했다.

사망[편집]

정종은 병이 위독해지자 이복 동생 휘(徽, 문종)를 불러 임시로 국정을 맡게 하고, 이후 그에게 선위하고 붕어하였다. 능은 주릉(周陵)이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가계[편집]

동복형인 덕종은 왕위 계승문제로 이복 누이를 비로 맞이한 것과 달리 정종은 왕비들을 왕족이 아닌 다른 귀족가문과 혼인하여 이 때부터 근친혼에서 벗어난 것으로 알 수 있다.

주석[편집]

  1. 《고려사》권6〈세가〉권6

관련 항목[편집]

전 임
덕종
제10대 고려국왕
1034년 - 1046년
후 임
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