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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내현(尹乃鉉)
출생1939년 6월 11일(1939-06-11)(84세)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해남군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학력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
직업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종교기독교
부모어머니 이용남(李容南)
배우자김정오(金楨旿)
자녀2남 1녀

윤내현(尹乃鉉, YOON NAE HYUN, 1939년 6월 11일 ~ )은 전라남도 해남(海南) 출생의 대한민국 역사학자이다.[1][2]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과 단군학회 회장을 맡으면서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으로 북한에 다녀오기도 했다. 2005년 12월 1일부터 2009년 8월 31일까지의 단국대학교 12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거쳐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와 남북역사학자 학술 교류 및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학력[편집]

경력[편집]

수상[편집]

  • '오늘의 책' 상
  • 일석학술상
  • 금호학술상
  • 국무총리 표창

저서[편집]

  • 《상왕조사의 연구》, 경인문화사, 1978
  • 《상주사》, 민음사, 1984
  • 《중국의 원시시대》, 단국대학교출판부, 1986
  •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 《윤내현교수의 한국고대사》, 삼광출판사, 1991
  • 《중국사1》, 민음사, 1991
  • 《중국사2》, 민음사, 1992
  • 고조선 연구》(古朝鮮硏究), 일지사, 1994
  • 《고조선 -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민음사, 1995
  • 《중국사3》, 민음사, 1985
  • 《한국열국사연구》, 지식산업사, 1998
  • 《우리 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지식산업사, 2003
  • 《동아시아의 지역과 인간》, 지식산업사, 2005
  • 《새로운 한국사》, 집문당, 2005
  •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 동북공정 논란을 둘러싼 진실게임》, 지식산업사, 2007

비판[편집]

윤내현의 고조선 관련 연구 및 그의 대표적인 저서 《고조선 연구》는 북한역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1963)를 표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3]

이런 비판에 대해 윤내현은 이러한 조치가 학자의 양심을 저해한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따른 것이라 밝혔으며[4] “나의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장도빈 등의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기존 학설과 궤를 같이하고 있을 뿐 표절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5][6][7]

(누군가 원글을 수정하고 덧붙인 글)한편 이형구의 증언에 따르면 84년 당시 학술세미나에서 윤내현은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자, 자신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등 북한 자료를 미국의 대학도서관에서 입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85년 11월 "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 는 말을 남기고 이미 지급된 연구비를 반납하고 자신의 글을 거두어 갔다.[8] 한편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에서 "필자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 · 보완한 북한 학자들의 연구 업적과 그들이 발굴한 자료도 활용하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주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표적인 문헌 몇 권만을 소개하는데 그칠 것이다. 이 점은 분단시대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이므로 독자들의 이해 있기를 바란다."라고 언급했던 일이 있는데,[9] 이에 대해서 이형구는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를 수용·보완한 북한 학자의 연구 업적과 발굴 자료를 많이 활용하면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약간의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지 리지린과 같은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또 분단시대의 한국 역사학계가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주기를 일일이 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다른 학자들은 북한의 학술 성과를 주기로 소개한단 말인가? 그리고 역사학계만이 마치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일반 독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분단상황은 민족 모두의 고통이지 역사학계만 안고 있는 고통이 아니다. 북한의 자료가 제대로 입수되지 못하고 또 입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고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입수하고 검토하여 활용한 자료를 유독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분단상황의 고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비판하였다.[10]

(덧붙인 글에 대한 반론)윤내현이 논문을 거두어갔다고 하지만 그 논문은 [정신문화연구] 84년 여름호에 전문이 실려있어 누구라도 열람할 마음만 있으면 도서관이나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는데 무슨 의도로 저런 주장을 자신의 논문에 마치 신문 가쉽거리라도 되는 양 실은 건지 모르겠다. 뭣보다 각주를 달면 자신의 학설이 무너진다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이형구 개인의 주장일 뿐이며, 애초에 역사논문에 어떠한 각주가 달려야 그 각주를 단 논문저자의 학설이 무너진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 불가능이다. 또한 이형구의 주장인 "자신의 주장에 영향을 주고 참고로 삼은 타인의 연구 업적을 밝힐 용기가 없으면 글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라고 했는데, 실제 예를 들어보겠다. 리지린의 [고조선연구]에 나오는 글이다. "일반적으로 국가 발생 시기에는 그 통치자의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하여 건국신화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번엔 이형구 일파인 노태돈의 [단군과 고조선사]에 나오는 글이다. "단군신화의 요체는(....) 즉 고조선왕의 정통성과 존엄성의 근거를 그 신성한 핏줄에서 찾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문장은 의미가 완전히 동치하는 표절문장인데 노태돈은 리지린은 언급하지도 각주를 달지도 않았다. 더구나 훨씬 인상적인 부분이 나온다. "리지린-단군 신화가 불교 사상에 의하여 윤색되었다는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그 몇가지 예를 들면 단군의 조부인 환인은 범어 제환인타라의 환인을 그대로 차용한 명칭이다.", "노태돈-가령 환인은 산스크리트어(...)제환인타라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뒤에 불교 신앙 체계에 수용되어...." 어떤가, 의미상 동치임은 물론이고 중심개념어인 제환인타라까지 그대로 베꼈지만 리지린을 언급하지도 각주를 달지도 않았다. 결론, 전술한 내용을 표절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많은 학자들은 표절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위 내용은 이미 학자들 사이에서 당연히 알고 공유하는 내용이라 각주가 없어도 독창성을 표절했다고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상대성이론을 이야기하면서 아인슈타인을 언급하지 않아도 표절이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들어 표절이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역사학을 모르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윤내현이란 학자를 표절자로 인식시키려는 비열한 사기행위라 규정지을 수 있겠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윤내현교수 - ::: 해남신문 :::‎
  2. 조선닷컴 포커스 인물
  3. 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 서영수,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p22,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4. 「고조선의 강역」해석싸고 표절 논쟁 재연 경향신문 6면 생활/문화 기사(뉴스, 1986.04.23) 참조
  5. “「古朝鮮(고조선)의 疆域(강역)」해석싸고 표절 論爭(논쟁) 재연”. 경향신문(네이버).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6. "고구려 태동 현도군과 관계없어". 연합뉴스(네이버).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7. “오후여담, 역사 vs 역사”. 문화일보(네이버). 2012년 7월 3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8. 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9.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p.14
  10. 이형구, 〈리지린과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비교〉, 《역사학보》 146호, 1995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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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
별명 미염공
출생지 하동군 해현
사망지 맥성, 임저현
최종계급 전장군 가절월 한 수정후
주요 참전 황건적의 난
원술 토벌전
여포 토벌전
서주 전투
관도 대전
박망파 전투
적벽 대전
남군 전투
청니 대치
익양 대치
번성 전투
형주 공방전
기타 이력 관성제군

관우(중국어 간체자: 关羽, 정체자: 關羽, 병음: Guān Yǔ 꽌 유[*], ? ~ 219년 음력 12월)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字)는 운장(雲長)이며 본래의 자는 장생(長生)이다. 사례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사람이다. 동생 장비[1]와 더불어 유비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히며, 한대(漢代) 이후로 남송악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각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후세사람들은 '용맹한 자' 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관우, 장비의 경우를 들어 말하였다고 한다.[2]

의리의 화신으로 중국의 민담이나 민간 전설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되어 관제묘(關帝墓)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생애[편집]

초반[편집]

젊었을 때 탁군(涿郡)으로 달아났는데 유비가 무리를 모으기에 장비와 함께 합류하였다. 유비가 공손찬 밑에서 평원 상(平原相)이 되자 장비와 함께 별부 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부곡을 나누어 거느렸다. 유비, 관우, 장비는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 같았다. 공적인 장소에서는 하루 종일 유비를 윗사람처럼 모시고 어디든 따라갔으며 고난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198년 유비와 조조가 같이 여포를 토벌할 때 그 부하 진의록의 전처를 달라고 조조에게 청하였다. 조조는 이를 허락했는데 하비가 함락된 후 관우가 거듭 보채자 그 미색을 궁금히 여겼다. 이에 먼저 불러들여 그 용모를 확인하고는 자신이 취하니 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3]

조조에게 의탁[편집]

199년? 200년 유비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그 땅을 차지했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하비 태수 직무 대행?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 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 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뒤쫒지 말거라” 라고 타이르며 그(관우)를 조용히 보내주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유비와의 재회[편집]

관우는 유비와 다시 만나 신야에 주둔하게 된다. 그런데 조조의 침공으로 유비가 도주하게 되었다. 이에 관우는 형주로 건너가서 유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유표는 이를 수락하였다. 유비가 조조에게 잡히기 직전 관우는 유표가 빌려준 배를 갖고 유비에게 와서 유비 일행은 그 배를 타고 도주에 성공했다. 그 이후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지한다. 이 즈음 제갈량이 출사하여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 평정에 착수하자, 관우는 수백 척의 군선을 모아 하구로 향해 오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다.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는 형주를 손권에게서 빌렸다.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龐統)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손권과의 갈등[편집]

유비와 손권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는데 특히 유비가 유장을 쳐서 익주를 병탄하려 하자 더욱 악화되었다. 왜냐하면 일전에 손권이 유장을 치려고 했을 때는 유비가 반대하여 무산됐었기 때문이다. 이때 관우는 노숙과 서로 경계를 접하였는데 일선에서는 수차례 의심이 생겨 자주 분쟁이 발생하였다. 다만 그때마다 노숙이 잘 무마하였다.[4]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215년 손권은 제갈근을 사신으로 보내 형주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비가 기한을 미루며 응하지 않자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했다. 이마저 관우가 쫓아내자 손권은 대노하여 여몽에게는 3군을 공략하게 하고, 노숙에게는 1만 명의 병력으로 파구(巴丘)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막도록 했다.[5] 유비는 공안(公安)으로, 관우는 익양(益陽)으로 가서 강을 사이에 두고 노숙과 대치했다. 관우는 정예병 5천 명을 데리고 상류의 얕은 여울로 10여 리를 가서는 3만 명의 대군이라 과장하며 밤에 건널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감녕이 노숙에게 자원하여 1,300명을 이끌고 강 건너에 대기했다. 관우가 이를 듣고는 차마 건너지 못하고 병영을 지어 주둔하니 후일 이곳을 관우뢰(關羽瀨)라 하였다.[6]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와 노숙이 한 자루 칼만 쥐고 그 측근들을 대동한 채 담판을 가졌으나 분위기만 험악해지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4] 이내 조조가 한중(漢中)을 점령하자 유비는 손권과 화해하고 형주를 반으로 갈라 강하, 장사, 계양을 넘겨주었다.[7]

서량마초(馬超)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

북벌[편집]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허도()를 떠나서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장제(蔣濟) 등이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건의를 듣고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키려 해서 사신으로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을 관우에게 보냈지만, 관우는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으로 온 제갈근에게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느냐는 욕설과 협박을 하는 등의 무례함을 범하였다.

관우의 번성 포위 작전 때 손권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자, 손권을 오소리에 비유하며 모욕하였기에 손권은 관우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손권은 관우의 행동으로 인해 분개했지만 촉오가 동맹국인 관계로 참았다. 이후에 관우가 우금 (문칙)과 그의 휘하병력 3만명을 포로로 수용한 이후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자 식량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었는데, 관우는 식량 공급을 위해 오나라가 상관에 저축하고 있던 군량을 노략질했다. 위나라는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도록 했지만(219년 7월), (손권의 영지인) 상관(湘關)의 쌀을 마음대로 탈취하였다. 손권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행동을 시작하여 먼저 여몽을 보내 앞에 가도록 했다. 그 주변에 관측소를 설치했는데 이를 알아낸 여몽이 관우가 설치한 관측소들을 모두 찾아내어 철거했다.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 사마 조루과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사로잡혀서 거의 즉시 참수당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사후[편집]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關興)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등애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인민군의 편이 되어 참전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8]

시기가 불확실한 패전[편집]

  1. 악진이 양양에 주둔할 때 관우와 소비(蘇非)를 패주시키자 남군(南郡) 일대의 산과 계곡에 살던 만이(蠻夷)들이 투항했다.[9]
  2. 문빙이 심구(尋口)에서 관우를 격퇴한 공으로 연수정후(延壽亭侯)에 봉해지고 토역장군(討逆將軍)을 더하였다. 또 한진(漢津)에 있는 관우의 치중대를 공격해 형성(荊城)에서 그 배를 불태웠다.[10]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편집]

나관중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창작했다. 일단 162년에 태어났다고 설정했으며?,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게다가 키가 9척(약 2m7cm[11]), 수염 길이가 2자[12](약 46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한나라 때 1근 = 223g, 82근 = 18kg 286g)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었다.

정사 삼국지와 중국 남북조 양나라 때 쓰여진 고금도검록이라는 서적 등을 참고하자면 관우의 무기는 언월도가 아닌 그냥 일반 칼, 대도, 삭, 모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는 유비에게 총애(寵愛)를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몸소 도산(陶山, 오나라 회계군 지역의 명산)의 철(鐵)을 캐서 칼 두 자루(쌍도)를 만들고 (거기에) '만인적 (萬人敵)' 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전투에서 패하자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 속에 던졌다.

— 도홍경(陶弘景),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태사자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유비와 같이 태사자의 요청에 따라 공융을 구출하러 가서 관해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사살하고 공융을 구출한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비가 직접 출동한 것은 아니고 유비가 태사자에게 정병 3천명을 빌려줘서 보내자 이 소식을 들은 관해가 포위를 풀고 도망친 것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의 허락을 받아 화웅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孫堅)에게 죽임을 당했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이때 조조는 여포로부터 몰수한 적토마도 주었다.

또한 관도 대전에서 관우는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도 죽였다고 하나, 실제로 관우는 안량만 주살했을 뿐 문추의 경우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荀攸)의 책략에 빠진 문추서황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유비에게로 떠나는 도중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관우는 적벽 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고 하나, 정사엔 화용도에 관한 내용이 없다.

연의에서의 제갈량이 취한 강릉과 양양을 공격할 때 사용한 '공성의 계'

관우는 방덕과의 대결에서 팔을 크게 다쳐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각색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가 방덕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관우가 실제로 이런 치료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 것은 사실이지만 연의에서는 그 의원을 화타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타가 아닌 다른 의원이 치료를 해준 것이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었다. 또한 손권이 이를 보고 관우를 벤 것에 대한 후환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연의에서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평가[편집]

삼국지정사 저자 진수 평은 다음과 같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진수(정사 삼국지 저자)의 평가 :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대의 호랑이 같은 신하(장수)였다" / "둘 다 국사(國士-나라의 뛰어난 선비)의 풍모가 있었다."

육손은 관우는 용맹하여 그를 (정면으로)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온회는 관우는 평소 용맹하고 날카로운 것으로 이름나 그 기세를 타고 올라온다면, 근심이 될 것입니다.

  • 정욱 은 관우를 "만인지적" 이다 라하였다.
  • 주유 는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 라하였다.
  • 유엽 은 관우와 장비가 삼군을 뒤덮을 용맹으로 장군이 된다면 ... (중략) ... (촉을) 도모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곽가 또한 관우를 만명을 당해낼수있는 자다 라며 평을 한다.

장비와 관우는 용맹하면서 의리가 있고, 모두 만명을 대적할 수 있으니, 장수가 될 자입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다 인걸(人傑)입니다. 유비의 웅략에 이 세 인걸이 보좌한다면, 무엇을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 라 했다. 삼국지 선주전 주석 부자 (부간)

관우와 장비는 굳세고 씩씩하여,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윗사람을 잘 받들었으며, 호랑이처럼 웅장하고 거셌다. 삼국지 양회전에 인용된 계한보신찬

  • 마초유비의 휘하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관우는 제갈량에게 마초에 대해 물었다. 이에 제갈량은 마초에 대해 평하기를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천하의 재원이지만 관공보다는 못한 장수"라 답장을 보냈다. 이에 관우는 제갈량의 답장을 빈객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 여몽은 무예가 출중한데다 《춘추좌씨전》을 외울 정도로 학문을 즐기며 강직하고 씩씩한 기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부심이 상당하여 남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13]

1.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관우전--

3.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관우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이통전--

6.서황만총(滿寵)과 함께 한진(漢津)에서 관우(關羽)를 치고 격파하였다.--서황전--

7.방덕은 직접 관우와 교전하여 관우를 노리고 화살을 날려 그 이마에 적중시켰다. 그 무렵,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으니, 관우의 군중에서는 그를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모두 두려워하였다.

8.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방덕을 붙잡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9.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 에 주둔했다. 때마침 한수(漢水)가 크게 범람하여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서황이 이끌던 병사들은 다수가 신졸(新卒-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쟁봉(爭鋒)하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陽陵陂)로 나아가 주둔했다. 적(관우군)은 언성(偃城-번성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황이 도착하여 궤도(詭道-속임수)로 참호를 파며 적의 배후를 끊으려 하는 것처럼 과시하자 적이 둔영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偃城)을 점령하고 양면으로 진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적은 위두(圍頭)에 둔(屯)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四塚)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양성(揚聲-널리 소문을 퍼뜨림)하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서황이 크게외치길, “운장雲長의 머리를 얻으면 천 금을 상으로 주리라.” 관우가 놀라고 두려워, 서황에게 이르길 “대형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이르길 “이는 나라의 일이오!"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서황전--

10.관우는 형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그래서 형주는 평정됐다. --손권전--

게다가 안량을 참살한 것 역시 사실상 서황, 장료등이 안량의 주의를 끄는 사이 관우가 몰래 암살한 것에 가까우

사후 숭배[편집]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관우가 황제(관성대제)를 넘어서 신으로 추대된 이후에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관우와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피휘(避諱)를 하였다.[14] 중국인들이 관우를 차라리 운장이라고 부르거나 굳이 굳이 관공(關公)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보물 제142호)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관우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현재까지 아무도 모르며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즉 관우의 묘는 묘(墓)가 아니고 관우의 위패를 모신 묘(廟)이다.

  • 대한민국의 보물 제 142호인 동묘(東廟)는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라 하며 선조 34년인 1601년에 건립돼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이전에는 조선에서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관우 숭배 사상은 임진왜란때 조선에 출병 온 명나라 군사들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15]

역대 시호[편집]

한편,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는 충의의 화신인 관우는 무조건적 충성의 좋은 본보기였기에 관우를 우대하고 여러 시호를 봉했다. 그 종류는 아래와 같다.

나라 황제 연대 봉호
북송 송 휘종 숭녕원년(1102년 충혜공(忠惠公)
북송 송 휘종 숭녕3년(1104년 숭녕진군(崇寧眞君)
북송 송 휘종 대관2년(1107년 무안왕(武安王)
북송 송 휘종 선화5년(1123년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남송 송 고종 건염2년 (1128년 장무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
남송 송 효종 순희14년(1187년 장무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
원 태정제 천력8년(1335년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義勇武安英濟王)
명 신종 만력42년(1613년 단도복마(單刀伏魔)、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神威遠鎭天尊關聖帝君)
명 의종 숭정3년(1630년 진원현응소명익한천존(眞元顯應昭明翼漢天尊)
청 세조 순치9년(1652년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
청 세종 옹정3년(1725년 삼대공작(三代公爵)、성증조(聖曾祖)、광소공(光昭公)、성조(聖祖)、유창공(裕昌公)、성고(聖考)、성충공(成忠公)
청 고종 건륭원년(1736년 산서관부자(山西關夫子)
청 고종 건륭31년(1767년 영우(靈佑) 二字 추가
청 인종 가경18년(1813년 인용(仁勇) 二字 추가
청 선종 도광8년(1828년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

가계[편집]

  • 장남 : 관평(연의에서는 양자로 설정)
  • 차남 : 관흥
  • 딸 : 관씨
  • 삼남 : 관색(전설 속 가공의 인물)

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에는 관우의 탄생과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관공연보(關公年譜)≫·≪관제지(關帝志)≫ 등의 기록들과 민간(民間)에 전하는 여러 가지 설(說)들을 종합하자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2년 음력 6월 24일)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 내용은 ≪성제세계고증≫(聖帝世系考证)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중국 지방지(地方志), 민간전설(民間傳說)에 근거해서 그 내용을 살펴보자면

관우의 조부(할아버지)는 관심(關審)이며 자는 문지(問之), 호는 반석(磐石)이다. 90년(후한 화제 영원 2년 경인년) 생으로 해주 보지리 상평촌(解州 寶池里 常平村)[16]에 거주했으며 항상 『역(易)』,『춘추(春秋)』등의 책을 자식에게 가르쳤다. 157년(후한 환제 영수 2년 정유년)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관우의 부친은 관의(關毅) 자는 도원(道遠)이며 아버지 관심이 세상을 떠나자 부친의 묘소에서 3년상을 치렀다. 관의의 3년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60년(후한 환제 연희 3년 경자년) 음력 6월 24일에 드디어 그의 아들 관우가 태어났다.

각주[편집]

  1. '삼국지 촉서 장비전'에 의하면 관우는 장비보다 몇 년 연상으로, 장비는 그를 형님으로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입(이십)이사차기(廿二史箚記) 관장지용(關張之勇) 漢以後稱勇者必推關張
  3. 왕은, 《촉기》. 손성, 《위씨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36권 촉서 제6 관우에서 인용
  4. 《삼국지》54권 오서 제9 노숙
  5. 《삼국지》47권 오서 제2 오주 손권
  6. 《삼국지》55권 오서 제10 감녕
  7. 유비? 손권?
  8. 『NOW』관우 67대손 찾았다, 동아일보, 2001-02-26.
  9.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악진
  10. 《삼국지》18권 위서 제18 문빙
  11. 한나라때 1척은 약 23cm였다. 자(두산백과)
  12. 자와 척(尺)은 같은 단위이다.
  13. 우부, 《강표전》(江表傳) ; 배송지 주석, 《삼국지》54권 오서 제9 여몽에서 인용
  14. http://www.hkwmrc.com/communication01.php?cid=181
  15. 가스통ㆍ쓰레기에 둘러싸인 보물 142호 `동묘', 연합뉴스, 2008-02-17.
  16. 상평촌은 '하풍촌 (下馮村)' 이라고도 불린다.

참고 문헌[편집]

  • 《삼국지》36권 촉서 제6 관우

틀: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 독자연구, 중복 내용 대거 제거하고 관우에만 포커스를 두어 문단 정리 등 싹 정리. 각주도 삽입. 의문 사항 있으실 시 제 토론 페이지 방문 바랍니다. 덧. 개인적인 분석은 일기장에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