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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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토론  편집  역사

황제(黃帝)는 중국 전국 시대 이후로 문헌에 등장하는 오제(五帝) 중 첫 번째 제왕(帝王)으로, 삼황(三皇)에 이어 세상(중국)을 다스렸다고 설명된다.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라고도 부른다. ‘황제(黃帝)’의 명칭은, 제위시 황룡이 나타나 토덕(土德)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1] 도교의 시조로도 추앙받고 있으며,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노자와 더불어 실존 여부는 명확하지 않으며, 생존 시기도 확실하지 않다.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黃帝)가 만년에 자기가 직접 죽을 날을 택해 신하들과 사별한 후 교산(橋山)에 묻혔지만, 얼마 후 무덤이 갑자기 무너져내렸는데 무덤 속에 시신은 없고 검과 신만 있었다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산시성(陝西省) 황링현(黃陵縣) 교산(橋山)에는 황제(黃帝)의 무덤으로 알려진 황릉(黃陵)이 존재하고 1992년 중국 정부에 의해 대규모로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2]

또한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는 '서릉(西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而娶於西陵之女, 이취어서릉지녀)라는 기록이 나온다. '양잠과 방직을 전한 누조(嫘祖)는 황제(黃帝)의 정실 부인이 되었다'(嫘祖爲黃帝正妃, 누조위황제정비)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무덤은 후베이성(湖北省) 이창시(宜昌市, 의창시) 시링구(西陵区, 서능구)에 위치해 있다.[3] [4][5]

목차

문헌상의 기록[편집]

사기[편집]

황제가 중국의 역사로서 등장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6]가 최초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염제 신농과 그 제후들, 치우를 물리치고 천자(天子)가 되었다.
  • 산을 개간하고 길을 통하게 하였다.
  • 탁록(涿鹿) 아래의 평원에 도읍을 정했다.
  • 보정(寶鼎)과 신책(神策)을 얻었다.
  • 오곡을 심어 백성을 돌보았다.
  • 제사 의식을 연구하였다.

포박자[편집]

포박자(抱朴子)》에 따르면, 청구(靑邱)에서 자부선인(紫府仙人) 또는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한다.

논란[편집]

황제

한대 사마천의 역사서인 《사기》에 의하면, 소전(少典)의 아들이 헌원이라 하며, 치우를 물리치고 신농에 이어 제왕이 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무덤은 중원 허난성이 아닌 남방 후베이성에 위치한다. 과거에 4명의 제왕(전욱, 제곡, , )이 황제의 자손이라는 주장도 있어, 그 성씨들이 모두 희성이라고도 여겨왔다. 반면 각 군주에서 파생된 성씨에는 차이점이 존재하고, 모계 사회에서는 성씨가 없거나 모계 부족 성을 이어가는 풍습도 있어 부계 혈통의 연속성은 검증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성과 희성의 선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황제의 출자는 진나라 중국 통일 이후 생겨났다. 진시황제가 왕보다 높은 칭호을 원했고, 이사는 삼황오제을 합쳐 황제라는 명칭을 만들어 시황제에게 바쳤다. 진나라 시대 황제는 헌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고, 신화속 인물 삼황오제을 모두 포괄하여 만들어진 존칭이었다. 한나라 왕조는 저장성 출신의 미천한 신분이어서 황제 후손 의식은 없었고, 황제 칭호을 사용한 진왕조에 비판적이었다. '헌원'이라는 이름은 한대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인 《사기》에 처음 등장하였다.

본래 황제는 삼황, 오제의 합성어로 단일 인물을 가리키지 않았으나, 당나라 황제가 천황을 자체하면서 황제 헌원의 개념이 생겼다. 또한 헌원은 주나라 희성의 선조이므로 당나라 현종 이융기가 주씨로 바뀌고, 정나라 공족 '공손씨'가 헌원의 후손을 주장해 헌원은 공손씨라는 이야기도 만들어 졌다. 또한, 황제는 청대 말기에 혁명파가 황제가 즉위한 해를 기원으로 하는 '황제기원(黄帝紀元)'을 사용하여 청나라 왕조에 대항하는 한족 저항 의식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사마천은 고대 전설의 군주을 모두 같은 가계로 기술했다. 중국 과학원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거주하는 한족은 중원 사람들과 유전적 유사점이 없었으며, 묘족등 기타 중국의 소수 민족 보다도 중원 사람들과 혈통적으로 거리가 먼 DNA을 가진 남방 한족이라고 한다. 단일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유독 아시아에서는 단일 민족론의 개념이 강한데, 중국에서는 베이징 원인이 서아시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자생했다는 이론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황제의 가계가 하나라로 이어진다고 하지만, 현재 까지 하나라 문명의 구체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실존성이 고증되지 않았으며, 고대 부족 사회는 중앙 집권 체계가 아니므로 국가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하나라 우왕의 무덤이 저장성 사오싱에 있고, 헌원의 무덤은 후베이성 시링 구에 있어 중원 허난성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맹자의 경우 오제의 부계가 일치하지 한다고 보지 않았고, 주나라 사람들이 서이(西夷)라면서 본래 중원에 살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서이는 주로 중국 남부 후베이성이다.

사마천은 고대에 관한 야사을 수집하였고, 그들을 가계을 모두 같게 만들어 황제의 자손으로 일원화 했다. 진나라은 영성이므로 조씨이고, 그래서 전욱의 후예라는 것이 사마천의 주장이다. 그러나 진의 시조가 주나라에 침략한 서융을 방어한 공으로 영성이 수여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시황제가 조나라을 싫어해 주나라 수도 한단을 직접 불태운 일도 있었다. 조나라와 그 선조는 산융 지역 출신이다. 서이(徐夷)족이라는 이민족이 있었는데, 그들 또한 영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개념의 편리을 위해 진나라 유민들의 성씨도 영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한나라 고조노관(盧綰:루완)이라는 사람이 동호로 도망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 자손은 선비족으로 분류되겠지만 실제로는 여성 노씨이다. 이와같이 선비족이라고 다 같지 않듯이, 영성이 반드시 조씨라고 해석되지는 않는다.

헌원이 실제로 어떤 점이 훌륭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 한데, 막연한 우상이 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묘족을 물리 치고, 한족의 터전을 세웠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한족의 주장일 뿐이고, 특정 민족을 차별하는 요소도 있다. 묘족은 실제로 한족 만큼 인구수가 많은데, 중국 성을 쓰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려울 뿐이다. 중국 대부분의 성에 묘족 계통이 있다. 한족은 다른 민족을 오랑캐로 부르기을 좋아하는데, 사실 진왕조가 중국을 통일 했을 때 주나라, 초나라, 제나라 공족들이 요하지역 즉, 요서, 요동으로 달아나 동호 계열과 결합하여 오랑캐화 된 것이 선비족의 일부가 되므로 한족이 다른 민족을 오랑캐라 부르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요소도 있다.

중국에서는 징기스칸도 헌원의 후예라거나 또는 본래 중국인이라는 주장이 중국 일각에 존재한다. 사마천사기에 따르면 하나라 사씨 왕족이 흉노 땅으로 달아나 왕이 되므로, 징기스칸도 황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사마천사기 때문에 5호 16국 시대 흉노족의 국호을 하 (오호 십육국)로 정하기도 하였다. 북방과 중원의 인적 교류는 가능하지만 징기스칸의 부계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황제는 중국 중의학이나 풍수의 시조로도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랜 의학서인 《황제내경소문(黄帝内經素問)》, 《황제내경령추(黄帝内經靈樞)》도 황제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고 양택풍수의 고전서인 '황제택경'(黃帝宅經)도 포함된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7]이와 함께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瓉次郎), 이이지마 타다오(飯島忠夫)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는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8]

중국에서는 황제의 자손으로 족보을 만들면 황제의 자손으로 정의 되는 경우가 많다. 때대로 중화민족주의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자신의 가문을 포장하기 위해서 고대 부터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족보을 날조 하는 경우가 많은데, 황제라는 개념은 거의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집단 최면, 또는 강박증 같은 것으로, 황제의 자손이어야 자신의 가문이 높아진다는 의식이 바탕에 있다.

이러한 바탕위에 최근의 중국학계는 황제를 비롯한 오제전설(전욱, 제곡, , ) 주인공들의 고향을 대체로 동북방으로 보고 있다. 훙산 문화를 꽃피운 것은 '황제'(黃帝)이고 '황제족'(黃帝族)이라는 논리에서 나온 결론이다. 후계자 전욱도 “북방의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얻었다. 뉴허량 유적(신전)에서 하늘과 땅의 관계를 독점하며 제정일치 시대를 이끈 이가 바로 전욱이라는 것이고 3대 황제, 제곡은 훗날 상나라의 선조라는 역설이다.

중국은 이미 ‘하상주단대공정’을 단행, 전설상의 하나라 건국연대를 기원전 2070년으로 올려 확정한 상태이다. 이렇게 올려놓은 중국역사가 4000년을 넘고 그런 중국학계가 이젠 더 나아가 발해문명과 훙산 문화를 창조한 이가 바로 황제이며, 그 황제가 중국인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다시 전설의 1000년 역사가 ‘사실(史實)’로 회복되는 셈이다. 이른바 중국문명 5000년이 확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화문명탐원공정’의 핵심이다. [4] [5]

관련 문화[편집]

시조로서의 황제[편집]

오늘날에도 공손씨, 희씨, 헌원씨 등은 황제를 직접 시조로 받들고 있다. 한국의 변(邊)씨 또한 헌원을 시조로 한다.[9]

별자리[편집]

동아시아의 별자리 중 성수(星宿)에 속한 헌원은 황제 헌원에서 유래하였다.

제사[편집]

조선시대 초기에는 왕이 군사 훈련시 황제 헌원에 마제를 지냈다.

저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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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책의 저자로서 알려져 있으나,[10] 실제 저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도가

《황제사경(黃帝四經)》 4편, 《황제명(黄帝銘)》 6편, 《황제군신(黄帝君臣)》 10편, 《잡황제(雑黄帝)》 58편

  • 신선

《황제잡자보인(黄帝雑子歩引)》 18권, 《황제기백안마(黄帝岐伯按摩)》 10권, 《황제잡자지균(黄帝雑子芝菌)》 18권, 《황제잡자십구가방(黄帝雑子十九家方)》 21권

  • 천문

《황제잡자기(黄帝雑子気)》 33편

  • 오행

《황제음양(黄帝陰陽)》 25권, 《황제제자론음양(黄帝諸子論陰陽)》 25권

  • 잡점

《황제장류점몽(黄帝長柳占夢)》 11권

  • 의경

《황제내경(黄帝内經)》 18권, 《황제외경(黄帝外経)》 37권

  • 경방

《신농황제식금(神農黄帝食禁)》 7권

  • 방중

《황제삼왕양방(黄帝三王陽方)》 20권

  • 풍수

《황제택경(黃帝宅經)》

주석[편집]

  1. 오행설에 따르면 황색은 흙에 해당된다.
  2. 황제 무덤에 대한 전설, <두산백과> 참조 인용
  3. 중국 서릉씨는 최초로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조선 시대에는 선잠단을 세워 매년 서릉씨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4. 뉴허량·선양 이기환 선임기자, 경향닷컴 이다일 기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중국인의 조상 ‘황제’는 동이족었나”, 《경향신문》, 2008년 1월 18일 작성. 2013년 6월 9일 확인.
  5. 리동혁 재중동포 작가 (2003). 《삼국지가 울고 있네》. 금토. ISBN 9788986903416
  6. 사마천, 《사기》〈오제본기〉, 기원전 2세기경
  7. 빈미정, 〈황제신화전설에 대한 문헌적 고찰〉, 《중국문학》제44집, 2005
  8. 김종미, 〈중국문헌(中國文獻)에 나타나는 "치우(蚩尤)"의 이중형상(1) -제국(帝國)의 희생양, 치우(蚩尤)의 악마형상-〉, 《중국어문학지》, 2007 / 김선자,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 책세상, 2007
  9.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10. 《漢書》〈藝文志〉

더보기[편집]

참고문헌[편집]

  • 《열자》, 중국 전국시대.진나라

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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