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아와지 대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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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시 효고구 미나토가와역 인근 다이에 계열 슈퍼마켓인 도포스 상가가 붕괴된 모습.
고베시 주오구 이쿠타신미치의 도큐핸즈 산노미야점 동쪽이 붕괴된 모습.
고베시 고베항이 있는 포트아일랜드 지구의 해상 컨테이너 하역용 거대 겐트리 크레인이 지반 침하로 무너진 모습.

한신·아와지 대진재(일본어: 阪神・淡路大震災 한신・아와지다이신재[*])는 1995년 1월 17일에 일어난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발생한 재해을 말한다.

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 46분 52초(JST) 일본 효고현 아와지섬 북부(혹은 고베시 다루미구) 앞바다인 아카시 해협을 진앙으로, 깊이 14 km 지점에서 일본 기상청 규모 Mj7.3[a]의 대지진인 효고현 남부 지진이 일어났다.[1]

긴키 광역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진원과 가까웠던 고베시의 시가지인 히가시나다구, 나다구, 주오구(산노미야, 모토마치, 포트아일랜드), 효고구, 나가타구, 스마구의 피해가 막대해 근대 도시의 재해로 일본 내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망자는 6,434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생한 지진재해로는 2011년 발생한 동일본대진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 내에서 발생한 모든 자연재해를 따져도 동일본 대진재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망자가 가장 많은 자연재해였다.

같은 해 7월 25일에는 극심재해에 대처하기 위한 특별재정원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격심재해(激甚災害)로 지정되었다

지진 특징[편집]

고베시 나가타구의 시가지가 화재로 전소된 모습.

지진으로 발생한 흔들림은 지진 이후 일본 기상청의 지진기동관측반을 통한 현지조사에서 한신칸(효고현 남부의 고베시, 아시야시, 니시노미야시, 다카라즈카시) 및 아와지섬 북부(쓰나정, 호쿠단정, 이치노미야정)에서 진도7의 격진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베해양기상대(현재의 고베지방기상대, 당시 고베시 주오구 나카야마테 소재) 및 스모토 측후소에서는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기준 진도6을 관측하였고 지진기동관측반의 현지조사에서 효고현 남부 대부분 지역과 오사카부에서도 오사카시 니시요도가와구 쓰쿠다, 도요나카시 쇼나이, 이케다시 스미요시 등에서 진도6으로 판정된 지역이 있었다.[2]

또한 동쪽으로는 현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오나하마까지, 서쪽으로는 나가사키현 사세보시까지, 북쪽으로는 니가타현 니가타시까지, 남쪽으로는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까지 넓은 지역이 진도1 이상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진동을 관측하였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으로는 1946년 일어난 쇼와 난카이 지진과 1948년 후쿠이 지진의 피해를 크게 웃돌아 당시 지진재해로는 전후 최대 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지진 피해의 특징으로 도시 바로 아래에서 일어난 직하형지진의 재해가 발생하였다. 일본에서의 도시형 지진재해로는 대도시를 직격한 1944년 쇼와 도난카이 지진 이후 처음으로 발생하였다.

후쿠이 지진을 계기로 처음 만들어진 진도7이 처음으로 적용된 지진으로 일본 기상청의 지진기동관측반을 통한 현지조사인 '실지검분'으로 진도7이 처음으로 적용된 지진이 되었다. 하지만 현지조사 후에 진도7을 발표하면 대응이 늦어진다는 비판을 참고하여 지진이 발생한 지 이듬해인 1996년부터 진도7도 지진계를 통해 계산한 계측진도를 통해 속보 가능한 체제로 변경되었다.[3] 본진 이후 발생한 2004년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이나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대진재), 2016년의 구마모토 지진, 2018년의 홋카이도 이부리 동부 지진에서의 진도7은 전부 진도계를 통해 측정된 진도이다.[4]

건축물에 큰 피해를 주는 것으로 알려진 주기 1~2초 사이의 "킬러 펄스"를 가진 지진동도 수치상으로 당대 최고치를 기록하여[5] 10초 이상 킬링 펄스가 지속된 지역도 있었다. 고베해양기상대에서는 최대 지반 가속도가 818 gal,[6] 최대 지반 속도 105 m/s, 최대 변위가 27 cm인 지진동이 덮친 것으로 분석된다.[7] 이 수치는 1993년 쿠시로 해역 지진 당시 922 gal, 67 m/s, 최대 변위 93 cm, 미국의 1994년 노스리지 지진 당시 약 800 gal, 128 m/s와 비슷하다. 고베시 롯코 아일랜드의 지진계에서는 최대 상하 흔들림 507 gal이 기록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과거 최대 상하 지반 가속도는 2008년 6월 이와테·미야기 내륙지진 당시 이와테현 이치노세키시에서 기록했던 4,022 gal이다.[8]

기타[편집]

도로, 철도, 전기, 수도, 가스, 전화선 등의 기반 시설이 지진으로 토막토막 끊어져 광범위한 지역의 생활권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도시형 재해와 지진 대책을 언급할 때 "기반 시설"의 조기 복구, 활단층에 대한 고려, 건축공법 상의 문제점, 가설주택 및 이재민 안정 대책 등의 행정적인 대책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일본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국가로 일본의 대형건축물이 대지진에 취약한 구조임을 인지하고 1981년에는 이른바 '신내진기준'이라고 하는 대폭 개정된 건축기준법이 재정되었다.[9] 하지만 일본의 건축물들이 안전하다는 보도에 근거한 오해를 하는 시민들도 많았으며 또한 신내진기준 개정 직후인 1982년 이후에 건축된 빌딩, 아파트, 병원, 철도 역사 중에서도 광범위하게 붕괴되거나 무너진 경우가 많았다.

명칭[편집]

한큐 전철 산노미야역 북쪽 출구에서 휴대 전화로 연락하고 있는 남성의 모습.

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 46분에 일어난 지진이 일어난 지 4시간 14분 후인 같은 날 오전 10시에는 일본 정부가 "효고현 남부 지진 비상재해대책본부"(兵庫県南部地震非常災害対策本部) 설치를 결정하였다.[10] 같은 날 오전 11시에는 일본 기상청이 본진을 헤이세이 7년 (1995년) 효고현 남부 지진(平成7年(1995年)兵庫県南部地震, 영어 명칭 the 1995 Southern Hyogo Prefecture Earthquake[11][12])으로 명명하였다.[10]

한편 본진으로 일어난 지진재해를 가리키는 단어는 신문사 등 각 언론매체마다 다르게 임의대로 붙여졌다. 마이니치 신문은 지진 발생 당일 오후 3시에 발행한 호외에서 한신대진재(阪神大震災)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1월 18일자 조간 신문 발행 이후부터는 동 신문사 내에서 널리 쓰였다.[13][14] TV 방송에서는 요미우리 TV 방송이 지진 당일부터 일부 프로그램에서 한신대진재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월 24일 낮부터 방송국 내에서 통일해 쓰기 시작했다.[13] MBS 텔레비전은 1월 18일 점심 무렵부터 한신대진재라는 단어로 통일하기 시작했다.[13] 이후 타 언론사에서도 이같이 단어를 통일해 쓰기 시작했다. 간사이 TV 방송은 1월 19일부터, 요미우리 신문은 1월 22일자 조간부터, 아사히 신문산케이 신문은 1월 23일자 조간부터, 니혼케이자이 신문은 1월 23일자 석간부터, 아사히 방송 테레비는 1월 23일부터, NHK는 1월 23일 저녁부터, 고베 신문은 1월 24일자 조간부터, 교도 통신사는 1월 24일자 보도기사부터, 주간문춘은 2월 2일호부터 각각 '한신대진재'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3]

한편 슈칸겐다이는 2월 4일호부터, 선데이 마이니치는 2월 5일호부터,[b] 주간 아사히는 2월 3일부터,[c] 아사히 그래프는 2월 1일부터, AERA는 1월 30일호부터(2월 5일호 긴급증간, 2월 13일, 2월 25일, 3월 25일호 임시증간 등), 제군!은 3월, 4월호에서, 닛칸스포츠는 1월 18일부터[15] 간사이 대진재(関西大震災)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13] 도쿄 신문은 1월 23일자 석간까지, 요미우리 위클리는 2월 5일호에서, 산케이 신문 긴급증간(산케이 신문, 주간Gallop, 산케이 스포츠 1월 27일호)에서는 고베대진재(神戸大震災)로, 슈칸신초는 2월 2일호에서[d] 고베지진(神戸地震)이라는 용어를, 요미우리 텔레비전의 일부 프로그램에서는 간사이 대지진(関西大地震)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13]

일본 언론매체에서 한신대진재라는 표기가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그 전까지 독자적인 명칭을 사용하던 언론 매체도 지진재해 명칭을 "한신 대진재"로 바꾸기 시작했다. 도쿄 신문은 1월 24일자 조간부터, 주간 아사히는 2월 5일 긴급증간호부터, 아사히 그래프는 2월 10일부터 "한신 대진재"란 표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3]

2월 14일, 일본 정부는 지진 재해 명칭을 한신·아와지 대진재로 부르기로 각의에서 구두결정하였다.[10][16] 이는 정부가 고베시를 중심으로 한신 지역과 아와지섬 북부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으며 재해 규모가 큰데다 향후 복구에 통일된 명칭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16] 그 이전부터 지진 발생 직후 호쿠단정 정장인 고쿠보 마사오는 지진재해 명칭을 한신·아와지 대진재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었다.[13] 2월 24일에는 5년간의 시한입법안인 "한신·아와지 대진재 부흥의 기본방침 및 조직에 관한 법률"(1995년 제12호)가 제정, 당일부터 시행되었다.

오사카부에서는 도요나카시를 제외하면 효고현 급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阪"(한, 오사카의 '사카')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효고현 내의 지역 구분인 한신칸(고베시 나다구, 히가시나다구 및 효고현 아시야시, 아마가사키시, 니시노미야시 인근)에서의 피해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또한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에서도 남부를 중심으로 큰 피해가 발생해 사망자 9명이 발생하였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한신칸'에서는 고베시, 아카시시, 도요나카시가 제외되어 버리고, 오사카시나 고베시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한신'에서는 보통 오사카부 서부, 효고현 남부 순으로 지칭되기 때문에 명칭에 대한 이의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지진재해의 명칭을 남효고 대진재(南兵庫大震災)라고 지칭하는 서적들도 있다.[17]

또한 지진 재해를 단순히 '한신대진재'로 지칭하는 언론사들이 있지만, 일부 이재민들은 이 호칭에 대해 이의를 가지기도 한다. 대도시, 대 공업지대, 관광 도시 중 하나인 고베, 한신 지구만 지진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것처럼 표현되었고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입었던 아와지섬 북부 및 한신 지구 주변 지역의 피해가 고려되지 않은 표기이기 때문이다.[13] 마이니치신문에서는 실제로 아와지섬의 독자에게 '한신대진재'의 명칭에 "왜 아와지를 넣지 않느냐"라는 항의 편지가 들어오기도 하였다.[18] 지진 당시 아와지섬에 있던 쓰나정(현 아와지시) 정장 가시와기 와사부로는 '한신대진재'라는 명칭에 대해 "어디서 일어난 지진인가 하고 남의 일 같다", "언론사에 엄중 항의하고 싶지만 바빠서 그럴 상황이 아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13] 또한 NHK에서는 '한신대진재'라는 표기를 부를 때 가능한 한 "아와지섬이 진원인"이라는 말을 덧붙여 "아와지섬이 진원인 한신대진재"라고 부르도록 하는 원칙을 세웠다.[13]

피해[편집]

도도부현별 피해 내용(효고현 및 합계는 2006년 5월 19일 일본 소방청 최종치.[19] 효고현 이외는 2000년 1월 11일 소방청 발표치.[20])
도도부현 인명피해 주택피해
사망자 실종자 부상자 전괴 반괴
효고현 6,402 3 40,092 104,004 136,952
오사카부 31 3,589 895 7,232
교토부 1 49 3 6
도쿠시마현 21 4 84
나라현 12
시가현 9
와카야마현 7
가가와현 7
기후현 2
미에현 1
고치현 1
돗토리현 1
오카야마현 1
합계 6,434 3 43,792 104,906 144,274
  • 사망자
    • 효고현의 사망자 중 재해 관련 사망자(직접적인 사망 외 연관사망자)는 919명 (14.3%).[21] 2005년에는 사망자수의 오류가 드러나 수정되었다.[22]
    • 소사자수 403명(효고현의 집계), 558명(각 시의 합계. 고베시 528명 등)[23]
  • 부상자
    • 중상자: 효고현 10,494명 (98.2%), 효고현 이외 189명 (1.8%)[24]
    • 경상자: 효고현 29,598명 (89.4%), 효고현 이외 3,511명 (10.6%)[24]
  • 피난인원: 316,678명
  • 주택피해: 파괴 104,906동, 반파 144,274동, 총 주택 붕괴 피해 249,180동, 일부 파손 390,506동[24]
  • 화재피해 : 전소 7,036동, 일부 피해 7,574동, 이재 가구 8,969가구[24]
  • 피해총액: 약 10조 규모
  • 기타피해 : 도로 7,245개소, 교량 330개소, 하천 774개소, 절벽 붕괴 347개소[19]

간토대진재 당시에는 목조 주택 밀집 지역의 화재가 피해를 키워 대부분의 사망자가 소사였고, 일본의 자연 재해 중 가장 많은 사망자인 10만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25] 동일본 대진재 당시에는 사망자 대부분이 쓰나미에 의한 익사로 사망자가 15,000명이 넘었다.[26] 이와 비교해 한신·아와지 대진재에서는 단층을 따른 지역에 피해가 집중되어 피해 지역의 영역은 좁았지만 겨울철 이른 아침에 지진이 일어나 자택에서 자고 있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사망자의 대부분이 압사로 6,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27] 큰 피해가 일어난 지진이지만 몇 가지 아래의 이유로 피해가 줄어든 요인이 있었다.

  • 지진 발생 시각이 이른 아침이라 산요 신칸센신오사카역발 하행 첫 열차가 6시에 출발하는 등 대중교통과 도로의 이용률이 매우 적었으며,[28] 외출자도 적어 시가지와 자택 밖에서의 피해가 매우 적었다. 이 덕분에 대부분의 시민이 자택 내에서 피해를 입어 귀가곤란자 발생 수가 적어졌고, 안부 확인도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 기온이 1년 중 제일 낮은 시기인 1월 초였지만 낮 최고기온은 10도 안팎을 기록하는 기후와 지리 조건이라 고온으로 발생하는 열사병, 또는 저온으로 발생하는 동상 환자가 적어 붕괴된 가옥에 갇힌 이재민을 쇠약하게 만드는 발병 요인이 적었다. 또한 대부분의 이재민이 취침 중 발생한 피해라 본진 당시 이불이나 담요로 몸을 덮어 낙하물로부터의 피해를 보호하였고, 체온도 유지할 수 있었다.
  • 지진 발생 시 바람이 잠잠했고 발생 시각이 이른 아침이라 불 사용이 적어 연소가 최소화되었다.

또한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니가와에서는 주택가와 맞닿은 경사면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나 34명이 사망하는 피해도 일어났다.[29]

피해자의 사인[편집]

가시와이 빌딩의 붕괴 과정을 찍은 사진. 좌측은 빌딩이 길가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모습이고, 우측은 완전히 옆으로 쓰러진 모습이다.
완전히 붕괴된 구 거류지 15번관.(고베시 주오구 구 거류지)

NHK의 사체검안서 분석에 따르면 지진 당일에 사망한 5,036명 중 76%인 3,842명은 지진 발생 1시간 이내에 사망했으며, 이 중 90%가 압박사(압사, 질식사 등)였다.[30] 사망자의 대부분이 목조 가옥의 붕괴로 가옥에 깔려 압사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1층에서 취침 중 지진으로 가옥이 무너져 즉사한 사람이 많았다. 2층 목조주택의 경우 (지붕 기와와 2층 무게로) 1층 기둥이 부러저 찌그러진 경우가 많았지만, 건물이 무너저도 2층의 경우 생존 공간이 남아 생존자들이 있었다.

지진의 전체 사망자 중 90%가 압사로 추정된다.[31] 또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도 짧았다. 사체를 검안한 검안의들의 정리에서는 고베시에서 사망한 2,456명의 사망자 중에서 건물 붕괴 후 15분 내로 사망한 사람이 2,221명으로 92%에 달해 압사, 질식사로 '즉사'한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32] 선데이 마이니치의 조사에서는 분석 대상 247명 중 47명이 건물에 깔렸으며, 2명이 가구에 깔려 사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33]

사망자 중 20대가 30대보다 200명 가까이 많은 등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사망자수도 증가하였던 동일본 대진재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34] 사망자 중 20대가 가장 많은 이유로는 대학가인 고베시 나다구에서 고령자와 같이 문화주택 등 목조 아파트에서 같이 거주했던 학생이 무너진 아파트에 깔려 숨진 사례가 많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35] 31개 대학에서 총 111명이 사망했으며 특히 고베 대학에서는 학생 39명, 교직원 2명이 사망하는 등 대학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36][37]

건축물 피해[편집]

창고, 병원, 빌딩, 멘션[편집]

고베시 나다구에 있던 다이마루 백화점 고베 배송센터 건물의 1층이 완전히 짓눌린 모습. 이 건물의 붕괴로 잔해가 주차 중인 트럭 뒷부분을 깔아버려 트럭 앞부분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1995년 1월 25일 촬영.
건물 일부가 기울어져 붕괴된 고베시 중앙병원 서부지병원의 모습.

초고층 건축물은 대부분 피해 없이 무사했다. 또한 1978년 미야기현 해역 지진의 피해를 토대로 1981년 개정된 건축기준법에 따라 건축된 건물의 피해도 적었다. 하지만 항구 도시인 고베로 상징되는 수많은 벽돌조와 콘크리트 구조의 낡은 창고와 물류 시설 외에도 낡은 빌딩이나 1층이 주차장으로 되어 있는 빌딩 멘션 등 이른바 필로티 구조 건축물의 피해가 많았다.[38] 하지만 건축물 피해에 비해 사망자가 적었으며 일부 철근 콘크리트 구조 아파트는 화재가 발생했으나 옆 건축물로 옮겨 붙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래된 건축물의 경우 다층 건물에서는 팬캐이크 붕괴 현상이, 저층 빌딩에서는 1층 붕괴 현상이 발생하거나 그 전까지 일본에서 볼 수 없었던 건물이 기반 구조에서 떨어져 나가 옆으로 누워서 무너져버리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기울어진 상태에 있던 가시와이 빌딩은 다음날 아침의 여진으로 옆 대로변으로 완전히 누워버렸다. 그 외에도 고베시 효고구미츠비시 은행 효고 지점(1968년 완공, 철근 6층), 호고현 약사회관(1967년 완공), 다이이치 간교 은행 고베 지점(1926년 완공, 2층 건물)이 붕괴하였다.

병원[편집]

효고현 내 342개 종합 병원 중 완전 붕괴되거나 화재로 소실된 병원이 총 13곳 있었다. 소규모 진료소까지 합칠 경우 총 2,926개 병의원 중 완전 붕괴 239곳, 반파 270곳, 화재 피해 13건, 인프라 손실로 인한 의료 업무 중단이 973곳으로 대략 절반 이상의 병원이 의료 업무를 보지 못했다. 중상자를 제외한 공식적인 부상자수도 35,000명이다.[24] 고베시내의 재해중점의료기관 3곳 중 고베시 중앙병원 서부지병원 본관이 완전히 붕괴되고 중앙시민병원은 고립되어 의료 기능을 정지했다. 현립 니시노미야 병원에서 438명을, 메이와병원에서 658명을, 사사오병원에서 1,029명을, 니시노미야 와타나베 병원에서 1,200명의 부상자를 받는 등 다른 병원도 부상자로 넘쳐났다. 반대로 니시노미야시 무코가와정의 효고의과대학병원에서는 구명구급센터 직원 22명을 포함한 274명의 의사가 대기하였으나 환자는 평일의 8%인 200명만이 왔다.

나가타구 고베 시립 니시시민병원은 본관의 5층이 파괴되어 입원중인 환자 44명과 간호사 3명이 갇혔으나 생존 공간이 남아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1명이 사망하였다. 기타 건물 파괴 피해를 입지 않은 병원에서 더 많은 수의 부상자를 이송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병원은 경상자는 당일 내로 조기 퇴원하거나 다른 여유가 있는 병원에 이송하는 등으로 병상을 최대한 확보하였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병상이 매우 부족해 로비와 대합실에 소파이불을 깔아 병실을 마련하는 등 긴급조치를 취한 병원도 있었다. 또한 치료하는 의사 수도 환자 수에 비해 매우 적어 환자가 치료를 기다리던 도중 사망하던 예도 있었다.

빌딩[편집]
붕괴된 고베시정 제2청사의 모습. 6층이 붕괴되어 건물 중간이 찌그러져 있다.

고베시의 다케나카 공무점 건설부의 통계에서는 고베 국제회관 7층, 고베시청 제2청사 6층, 고베 신문회관, 고베 한큐 빌딩이 붕괴되었고 총 2,500동의 빌딩 중 붕괴 17곳, 대파 25건, 해체 56건, 보수 필요 217건으로 조사되었다. 다이세이 건설이 시공한 메이지 야스다 생명보험 빌딩도 지진으로 2.5 m나 움직였다.

고베 신문은 본사를 니시구의 신문 제작 센터(인쇄소)로 임시이전하고 동시에 편집 업무를 다이아닛세이 빌딩(하버랜드)로 이전해 1996년 7월 고베 정보문화빌딩으로 이전한다. 다만 본사 이전은 지진 이전부터 결정되었던 사항으로 지진 발생 당시 신 사옥도 건설중이었다.[39]

당시 고베시 스마구에 있던 라디오 간사이 본사 빌딩도 큰 피해를 입어 부지 내에 있던 가설 스튜디오로 이전한 후 1996년 6월 하버랜드의 신 사옥으로 이전하였다.[40]

아파트와 맨션[편집]

효고현 아시야시 와카바정과 다카하마정에 있는 해안가의 고급 아파트 주택단지인 "아시야하마 시사이드 타운"[e]에서는 두께 5 cm, 길이 50 cm 정도의 두꺼운 사각형 골조가 3 cm 길이로 전체적으로 찢겨나가 전체 52동 중 25개 동 72개 곳이 골조가 끊어져버렸다. 이는 예상된 피해였지만[41][f] 중량철골조 건물의 취성 파괴 현상은 일본에서 당시 최초로 발견된 현상이었다. 당시 맨션의 철골이 노출된 상태라 0도에 가까운 당시 기온과 사용한 철골의 저온에서의 특성, 매립지 지역에서 증폭된 진동의 고층 빌딩 고유 주기 등 다양한 요인으로 철골의 탄성 한계를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 지붕, 목조, 전통 가옥의 위험성[편집]

목조 주택이 많았던 고베시 효고구와 나가타구의 피해가 매우 컸으며, 화재도 많이 발생하였다. 사진은 나가타구의 시가지가 화재로 전소된 모습.
붕괴된 가옥의 모습.

일본의 전통 기와를 사용해 기초를 돌 위에 기둥을 얹기만 하고 대각재가 적은 오래된 목조 주택에서 사망자가 많이 발생해 지진 이후 고베 지역에서 지붕으로 기와를 쓴 목조 주택이 사라졌다. 일본의 전통 건축 양식을 따른 목조축조구법으로 지어진 주택에 피해가 집중되었으며 새롭게 건설된 주택 중에서도 대각재가 부족한 주택은 큰 피해를 입었다.[42] 사카모토 이시오의 "목조주택을 재검토하다"라는 저서에서는 "사망자 중 5,000명 가까이가 축조구법으로 지어진 주택에 깔려 사망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중요한 점이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축법으로 지어진 기와 지붕이 많았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와가 무거워서 문제였다"라고 오해한다고 밝혔다.[43][44]

낡은 목조주택은 시간이 지나면서 건조해지고 화재를 막는 내염재를 사용하지 않아 화재 피해도 많았다. 고베 지역의 목조 주택이 지진보다는 태풍에 대비한 목조주택을 중심으로 건설하다보니 기와 부분이 무거워 진동에 약했고 기와의 고정 방법도 지붕 위에 흙을 덮고 그 위에 그냥 기와를 덮는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각재가 많은 목조주택은 내진성이 강했다. 또한 같은 목조주택 중에서도 서양식 조립식 건축이나 목조 틀막 건축(프레임 건축법)으로 건설한 주택은 내진성이 높았다.

생존 공간[편집]

일본 전통 공법으로 지어진 목조축조기법으로 건설한 주택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찌그러진 건물에 깔려 생존 공간 없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분해되기 쉬운 구조라 지진이 일어나자 기와 지붕, 지붕토, 흙벽, 바닥, 기둥이 산산조각 나 낙하해 깔려 신체가 찌그러진 경우가 많았다. 흔들림이 작았던 경우에는 흙벽이 건물을 지켰지만 흔들림이 클 경우 흙벽도 파괴되어 떨어져 나가 흉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 건물의 경우 견고한 일체형 구조로 크게 파손되더라도 기둥, 지붕, 바닥은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 기둥이 파괴되어도 천장만 주저앉을 뿐 바닥이나 지붕이 무너지지 않아 즉사하는 일이 적었다. 여기에 일반적인 아파트의 경우 벽이 많았고 벽이 기둥 역할을 하는 내력벽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아파트가 크게 파괴된 경우 문이 열리지 않고 큰 금이 가는 등 거주할 수는 없지만 건물에 깔려 다치거나 즉사하는 경우가 적었다. 예외적으로 저층에 회사나 슈퍼마켓 등 창문이 크고 기둥이 적으며 벽이 적은 구조의 공간이 있는 아파트의 경우 1층 기둥이 파괴되 천장이 매우 주저앉은 경우가 많았다.

건축기준법 개정 이전 주택[편집]

내진 기준을 고려해 일본 건축기준법이 개정된 1981년 이후 1982년부터 건축된 주택의 피해는 매우 적었다. 지진 당시 붕괴된 가옥의 98%가 개정 이전 건축기준법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었다. 즉 붕괴되어 사망자가 발생한 주택 대부분이 1982년 이전에 건축된 주택으로 내진성이 더 약했다.[45] 결과적으로 건축기준법 개정안이 효과가 있었다. 이후에도 건축기준법은 1996년, 2000년, 2006년에 개정되었다.[46]

구 기준법에 따른 합법 주택의 위험성에는 낡은 주택의 경우 내진성이 낮고 붕괴 위험이 높았어도 위법하지 않았다. 건축기준법 위법 여부는 신축 당시 건축기준법을 따라 판단했기 때문에 신축 당시 건축기준법을 준수했던 건물은 이후 노후화되어 위험해져도 위법하지 않았다. 이를 "기존부적격" 건물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건축기준법이 없던 에도 시대 당시 건물은 매우 위험해도 합법이었다.[47] 3층 주택에서 피해가 거의 없었던 것은 1988년 건축기준법이 개정될 때 까지는 준방화지역에서 목조 3층주택의 건축이 금지되어 있어 내진성이 없는 합법적인 목조 3층주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내에서 내진성이 부족한 기존부적격 주택은 일본 국토교통성 추산 기준 2008년에는 일본 전체 주택의 23%인 1,050만 호 이상에 달한다.[48]

교통[편집]

액상화 현상이 발생한 고베시 주오구 미나토지마미나미마치 1가의 모습.
붕괴된 국도 제43호선 우회 고가도로의 모습.(고베시 나다구)
붕괴된 한신 고속도로 고가도로의 모습.

도로 교통은 지진으로 당시 주고쿠 자동차도, 국도 제43호선국도 제2호선이 도로 복구를 위한 차량 통제로 극심한 정체 현상을 빚었다. 특히 고가도로가 붕괴된 한신 고속도로 제3호선 고베선(제2 신메이 도로히메지 바이패스랑 직결되어 오사카-히메지를 잇는 도로로 사용)은 오랫동안 도로가 통제되었다.[49] 이 때문에 철도 피해와 맞물려 간사이 지방을 통과하기만 하는 도로 교통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 복구 기간동안 국도 제9호선, 제 372호선(두 국도는 교토-히메지 구간 우회 가능), 제27호선 같은 일반도로에 장거리 운행 트럭이나 버스가 몰렸다. 당시에는 피해 구간을 일반 국도 없이 우회할 수 있는 경로가 하나도 없어 게이한신을 통하지 않는 우회도로의 빈약함이 부각되었다.

철도 교통은 효고현을 지나는 서일본 여객철도(JR 서일본), 한큐 전철, 한신 전기 철도, 산요 전기 철도 등의 노선이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고가홈 구조의 역사에서 지진 발생 당시 전차가 있던 한큐 이타미선 이타미역도카이도 본선(JR 고베선) 롯코미치역이나 한신 전기 철도 이시야가와 차고가 붕괴한 영상은 한신 고속도로가 붕괴된 영상과 함께 지진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다.

지하에 있는 고베 고속선 다이카이역이 붕괴하여 바로 위에 있던 국도 제28호선 구간도 땅으로 가라앉았다. 사고 직후 도로 교통 관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국도 제43호선, 2호선, 야마테 간선 등 고베 방면으로 향하는 주요 간선도로에서 대규모 정체가 발생했다.

지진 발생 직후 JR, 사철 등 각 회사가 서로 제휴하여 버스나 타 회사 철도선으로 이루어진 대체수송은 파괴 구간이 복구되며 점차 차례차례 중단되었다. 4월 넘어서 모든 대체수송을 끝낸 JR은 신년도의 정기권 발매에서도 우위를 점해 이용자 점유율이 JR로 옮겨가는 모양으로 변했다.[50]

고베 경제의 큰 수익원이었던 고베항도 지진으로 부두 시설이 파괴되어 정박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고베시 주오구 포트아일랜드와 히가시나다구의 롯코 아일랜드, 아시야시 아시야하마, 아마가사키시 쓰키 지구 등 매립지를 중심으로 지면이 연약해지는 액상화현상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해로 지원도 어려워졌다.

당시 건설중이었던 아카시 해협 대교는 직접적인 지진 피해는 없었지만 전체 길이가 1 m 늘어났다. 대교의 아와지산 위에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일본-프랑스 우호 기념건축물이 건축될 예정이었고 1995년 1월 12일 프랑스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매입식을 시작했으나 5일 후 지진이 발생하여 공사가 중지되었다. 무기한 중단되었던 공사는 2015년 11월 발족 당시 인원이 사망하였고 건설 재개 분위기 조성이 어려워 일본-프랑스 우호 모뉴먼트 일본 위원회가 사업 중단을 발표하고 위원회가 해산되었다. 결국 일본-프랑스 우호 프로젝트는 완전히 중단되었다.[51]

도로 교통[편집]

한신 고속도로[편집]
붕괴된 고가도로에 버스가 걸터 앉아 있는 모습.

한신 고속도로 제3호 고베선의 고가도로 붕괴는 지진의 막대한 피해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찍혀 전 세계 신문이 실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피해를 입은 구조물의 실물과 자료는 1999년부터 한신고속이 고베시 히가시나다구에 있는 진재자료보관고에 전시되어 있으며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52]

"무너진 고속도로가 붕괴되기 직전에 파도가 치고 있었다"라는 목격담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교각과 도로면의 접합 부분이 지진으로 파괴된 것도 확인되었다. 이 때문에 교각이 기둥 위에 얹여진 널빤지와 같은 상태가 되어 내진성이 사실상 없는 것에 가까워졌다. 붕괴된 고속도로와 간신히 떨어지지 않고 버틴 고속버스 사진이 일어난 현장의 경우에도 교각이 완전이 끊어져 붕괴한 것으로 추정된다.[53]

주고쿠 자동차도[편집]

주고쿠 자동차도스이타 분기점에서 니시노미야키타 나들목 사이 구간이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긴키 지방에서 게이한신을 경유하지 않고 미에현 가메야마시(도카이도 연선)이나 시가현 마이바라시(나카센도 연선) 주변에서 효고현 히메지시(산요도 연선)까지 가러면 기타킨키후쿠이현 쓰루가시(호쿠리쿠 지방 남부)나 효고현 와다야마정(현 아사고시)까지 가야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기타킨키의 우회로를 가지고 의견이 분분한 일본의 도주제 논의에 대해 "지역적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통 일체형의 도주제로 가야 한다"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교통 통제[편집]

지진 발생 직후 피해 지역의 대규모 교통 통제가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각 경찰서에서 통행허가증을 발급했지만 위조된 허가증이 나돌아 교통 체증이 해소되지 않아 이후 복사가 불가능한 새로운 허가증인 "부흥표장"과 "제외표장"을 발급해 허가증 발급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교통 통제는 한신 고속도로 제3호선의 복구와 맞물러 서서히 완화되어 1996년 8월 모두 해제되었다. 당시 교통 통제가 이루어졌던 도로 구간은 다음과 같다.

JR[편집]

역사가 완전히 붕괴된 JR 고베선롯코미치역.
역사가 완전히 붕괴된 롯코미치역의 정면 모습.

서일본 여객철도(JR 서일본)도 각 사 사철과 같이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철도 중에서는 제일 먼저 복구되어 피해 노선 중에서는 최초로 전 노선의 운행이 재개되었다. JR 노선이 가장 빠르게 복구된 것은 여러 요인이 꼽히나 자본력 동원의 차이와 전국 지사에서의 지원 등이 그 이유로 꼽히고 있다.

JR 고베선[편집]

지진으로 니시노미야역-스마역 사이에서 화물열차를 포함한 열차 8대가 탈선했으며 다카토리 공장에서도 39량의 열차가 탈선하여 전복되었다. 역 관계 시설에서는 롯코미치역을 중심으로 고가철도와 기둥에 큰 피해를 입었으며 신나가타역에서는 성토가 붕괴되어 역사가 땅 밑으로 꺼졌다. 또한 다카토리 공장은 건물이 붕괴되고 검수고와 검수 설비에 피해를 입었으며 흙막이를 하는 옹벽이 붕괴되는 피해를 입었다.[54]

지진 발생 직후 전 노선의 운행을 중지했지만 지진 발생 당일 운행 재개가 불가능해 그 다음날인 18일 오사카역-아마가사키역(- 후쿠치야마선 쓰카구치역)의 단선 구간과 니시아카시역-히메지역 구간 운행을 재개하였다. 운행 재개는 회차가 가능한 역을 활용해 공사하는 식으로 넓혔는데, 회차가 불가능한 스마역과 스미요시역에서는 새롭게 임시 선로를 깔고 나다역에서는 전 역인 히가시나다 신호장의 구내 배선을 변경하여 인상선으로 만들어 회차를 가능하게 전환하였다.[54]

니시아카시 방면으로는 홈이 있는 상하행 전차선 우선 복구를 시작했지만 나다역-효고역 구간은 방향별로 선로가 서로 달라 우선 바다 쪽 2개 선(하행 전차선, 열차선) 우선 복구를 시작하였다. 신나가타역 지역은 피해가 매우 커 하행선과 와다미사키선간이 운전선을 활용해 복선화하였다. 당시 간이 운전선은 비전철화 구간이었기 때문에 급히 전철화하였다. 이어 신나가타역은 역사가 완전히 파괴되어 1월 30일 고베역-스마역 사이 구간이 재개될때도 무정차 통과했으며 3월 10일 가역사가 건설되고 나서 정차를 시작했다.[55]

열차 시간표에서는 오사카 방면에서 고시엔구치역까지 복구시에는 신쾌속(오사카역 서쪽은 각역정차)과 보통열차만 운행하여 교토 방면에서 쾌속은 오사카역에서 회송하였다. 오사카 방면 신쾌속은 아시야역이 복구되자 운행을 재개했지만 히메지 방면으로는 3월 12일이 넘어서야 신쾌속 운행이 재개되었다.

지진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폐쇄 구간도 점차 줄어들었지만 폐쇄 구간 너머 동서 양쪽에 있던 구간은 당시 가지고 있었던 차량으로만 운행해야 했고 특히 폐쇄 구간 동쪽의 열차가 모자랐다. 이 때문에 반탄선 우회 구간으로 차량을 회송했는데 반탄선은 당시 비전철화 구간이었기 때문에 팬터그래프 등의 열차 부속부품을 아보시 전차구(현재 아보시 종합차량소)에서 철거한 후 디젤 기관차가 견인하여 후쿠치야마 운전소(현재 후쿠치야마 전차구)까지 회송한 후 이 운전소에서 떼어냈던 부품을 다시 붙여 자력으로 미야하라 전차구(현 미야하라 종합 운전소)로 회송하였다.[56]

롯코미치역을 포함한 스미요시역-나다역 구간은 고가도로 다리 붕괴로 가장 큰 피해를 입어 마지막까지 폐쇄 구간으로 남아 있었으나 74일만인 4월 1일 전 구간 복구가 완료되었다. 지진 후 처음으로 복구된 한신칸의 철도가 되어 이날 발표된 열차 운행계획 개정에서 신쾌속선이 증편되었다. 복구 구간이 연장될 때 마다 재개통 직후부터 안정 운행 가능 시기까지의 임시 시간표와 이후 정식 시간표가 도입된 후 다음 복구 구간이 이어질 때까지의 잠정 시간표 2종류가 만들어져 지진 발생 직후부터 전 노선 복구 기간까지 철도 시간표가 총 18회 개정되었다.

JR 고베선의 복구 연표를 그린 지도.

아래는 노선 복구 연표이다.

  • 1월 18일: 오사카역-쓰카구치역, 니시아카시역-히메지역 구간 개통. 오사카역-쓰카구치역 구간은 상하행 외측선 단선 보통열차만 운행하고 JR 후쿠치야마선 쓰카구치역에서 회송.
  • 1월 19일: 오사카역-고시엔구치역 상하행 내측선 복구. 보통열차만 운행.
  • 1월 23일: 스마역-니시아카시역 구간 복구.[57] 상하행 전차선을 사용해 쾌속, 보통열차 운행.
  • 1월 25일: 고시엔구치역-아시야역 구간 상하행 내측선 복구.[57] 보통열차는 아시야역에서, 신쾌속(오사카역-고시엔구치역간 보통열차로 운행)은 고시엔구치역에서 회송.
  • 1월 30일: 고베역-스마역 구간 복구.[57] 효고역-스마역 구간은 상하행 열차선으로 운행하는 신나가타역-다카토리역 구간을 제외하고 상하행 안쪽 구간과 전차선에서 운행. 신나가타역은 통과.
  • 2월 8일: 아시야역-스미요시역 구간 상하행 내측선 복구.[57] 보통열차는 스미요시역까지, 신쾌속은 아시야역까지 운행.
  • 2월 14일: 아마가사키역-아시야역 간 상하행 외측선 복구. 보통열차 및 신쾌속은 스미요시역까지, 쾌속은 아시야역까지 운행.
  • 2월 20일: 나다역-고베역 구간 하행 내, 외측선 복구.[57] 고베시 중심부까지 노선을 연장하여 복구한 최초의 노선이 되었다.
  • 3월 10일: 효고역-다카토리역 구간 전차선을 복구하여 신나가타역 영업을 재개.
  • 3월 26일: 나다역-고베역 구간 상행 내측선을 복구하여 상행 열차는 상행 내측선으로 운행 시작.
  • 3월 27일: 나다역-고베역 구간 하행 열차가 하행 내측선으로 운행 시작.
  • 4월 1일: 마지막까지 복구 작업을 하던 스미요시역-나다역 구간이 복구되어 전 노선 복구 완료.
후쿠치야마선[편집]

JR 고베선이 지진으로 토막토막 끊어지자 우회 경로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힌 후쿠치야마선이 JR의 최우선 복구 노선으로 선정되었다. 지진 당시 후쿠치야마선은 가와니시이케다역-나카야마데라역 구간 피해가 컸고 지진 발생 당일인 1월 17일에는 히로노역-후쿠치야마역 구간이 재개통되어 이후 차례대로 복구 공사를 진행하였다.

수송력 확보를 위해 재개통 직후부터 임시 열차를 운행하여 5시 30분부터 21시까지 1시간당 1대에서 2대 꼴로 임시열차를 최대 42대 운행하였으며 특급 "기타킨키"도 증편하였다. 오사카역에서부터 출발하는 특급열차는 도카이도 신칸센과의 접속 때문에 3왕복은 신오사카역 발착으로 운전하고 이밖에도 기타킨키 15호 열차는 후쿠치야마역에서 와다야마역까지 연장 운행해 반탄선과 접속했다. 또한 JR 고베선이 전 노선 복구된 4월 1일 이후에도 4월 17일까지 신오사카역 연장운전을 2왕복하여 와다야마역까지 연장 운정하였다.

JR 고베선에서 운행되던 화물 열차의 우회 운행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후쿠치야마선이나 산안 본선의 와다야마역-고야마역 구간은 화물 열차를 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거운 화물 열차를 매일 운전하는 데 문제가 있어 승무원 양성 및 설비 일부 개량 문제가 있었지만 후쿠치야마선, 산인 본선, 하쿠비선을 경유하는 우회 운행을 2월 11일부터 시작하였다.[58] 화물 열차가 운행되지 않던 구간의 우회 운행 임무는 JR 서일본이 담당했다.[59] 또한 운행 계획 일정에 맞춘 신 차량의 갑종회송도 3월 14일부터 8편, 특대 화물 2편을 우회 운행하였다.

아래는 노선 복구 연표이다.

  • 1월 17일: 히로노역-후쿠치야마역 구간 재개통.
  • 1월 18일: (도카이도 본선 오사카역-)아마가사키역-쓰카구치역 구간 복구.
  • 1월 19일: 다카라즈카역-히로노역 구간 복구.
  • 1월 21일: 쓰카구치역-다카라즈카역 구간이 복구되어 전 노선이 복구가 완료되었다.[60] 고베 시내에서는 호쿠신 급행 전철고베 전철을 이용항 우회 철도 노선이 완성되었다. 임시 열차가 10왕복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 1월 22일: 임시 열차를 14왕복으로 증편했다.
  • 1월 23일: 히메지역-신오사카역 구간(반다이선, 후쿠치야마선 경유) 직통 쾌속 1왕복 운전이 시작되었다.
  • 1월 24일: 임시 열차를 19왕복으로 증편했다. 증편한 열차 중 쾌속 4편은 니시노미야나지오역까지 정차했다.
  • 2월 11일: 도쿄 화물 터미널역-후쿠오카 화물 터미널역 구간 화물 열차의 우회 운전이 시작되었다.(컨테이너 열차 10량)[61]
  • 3월 20일: 도쿄 화물 터미널역-후쿠오카 화물 터미널역 구간 우회 화물열차가 2왕복으로 증편되었다.(컨테이너 열차 8량 열차로 증편)[61]
기타 피해 및 복구[편집]

JR의 고베역에서 도야마역으로 가는 슈퍼 카미나리토리 1호 열차가 다카토리역까지 회송 중 스미쇼시역에서 지진을 맞아 산노미야역 앞 700 m 지대에서 정차하고 10량 중 8량이 탈선되었다. 또한 슈푸르 하쿠바·도가이케 6호 열차와 니시아카시역발 교토역행 보통열차가 스미요시역과 산노미야역 사이 구간에서 탈선하였다. 역사의 피해도 컸다. JR 고베선의 롯코미치역과 신나가타역은 지진으로 붕괴되었으며, 다카토리역도 반파되었다.

산요 신칸센도 지진으로 총 8곳의 다리가 붕괴하거나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조사 결과 부실공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62] 산요 신칸센은 지진 81일 후인 4월 8일 복구를 완료하였다.[63] 도카이 여객철도(JR 도카이) 구간에서도 도카이도 신칸센의 게이한신 구간 교각에 균열이 발견되어 지진 직후 교토역-오사카역 간 구간은 시속 170km로 서행 운전하였다.[64]

사철[편집]

지진으로 탈선된 한큐 전철 산노미야역의 차량.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한신 전기 철도 이시야가와 차고.

재해 지역 내에 있던 철도 노선 중 가장 남쪽에 있던 한신 본선은 히가시나다구와 나다구의 고가도로 구간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미카게역 서쪽 유치선에 있던 차량이 크게 흔들려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다. 한신 전기 철도 이시야가와 차고도 붕괴되어 전날 밤부터 유치되었던 다수의 차량이 붕괴된 차고에 깔려 파손되었다. 이는 고가도로 구간이 고도경제성장 시기인 1967년 준공된 다리로 내진구조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65] 또한 인근 구간에서 철교가 지상으로 떨어져 남북을 통과하는 여러 도로가 막혔다. 신자이케역 지역에서는 고가도로 아래 구간의 토지를 임대하기도 했기 때문에 복구 과정에서 임차인에게 철거 허가를 받기 위해 피난소를 돌며 허가를 받거나 인근 주민들에게 고가도로와 함께 자택의 잔해도 치워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하였다.[66] 한신 본선의 큰 피해로 이후 일본 각지의 교량의 붕괴 방지를 위한 보강공사가 이루어졌다.

산노미야 인근 지하 구간에서 운행 중이던 차량을 포함해 총 41량의 차량이 지진으로 파괴되어 한꺼번에 철거되면서 차고 자체를 한번에 철거한 뒤 이듬해까지 복구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JR이나 한큐 전철과 달리 한신 전기 철도는 복구차량 및 신규 차량 도입도 아마가사키 차고의 한계 용량에 맞춰 증차해야 해서 감편한 채로 운행을 시작해야 했다. 다른 사철들도 선로와 역에 여러 피해가 발생했으나 차량이 차고 1개 급의 피해를 입은 것은 한신 전철이 유일하다.

주요 피해[편집]

각주[편집]

참고주
  1. 지진 발생 당시에는 Mj7.2이였으나, 2001년 4월 23일 일본 기상청일본 기상청 규모 계산 방법을 변경하면서 수정된 수치이다. 이 때문에 변경 이전 낡은 문헌이나 참고 자료에서는 규모를 M7.2로 적은 곳도 존재한다.
  2. "간토 대진재 이래 대참사"라는 주제를 달아 이 지진재해와 연관짓는 기사를 싣으며 명칭 또한 간토 대진재를 의식한 표현을 사용했다.[13]
  3. "인적, 물적 피해가 간사이 권역으로 확대되다"라는 판단으로 용어를 사용하였다.[13]
  4. 괴멸한 지역이 고베 지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3]
  5. 설계는 ASTM(아스템) 아시야하마, 신일본제철, 다케나카 공무점, 다카사고 열화학공업, 마쓰시타 전기공업, 마쓰시타 흥산이 맡았다. 관리는 일본 주택관리공단, 효고현 주택공급공사, 효고현, 민간회사 등이 나눠 맡았다. 14~29층 건물이며 총 호수는 3,381호다. 1979년 준공되어 계단실과 5층마다 공용 철골로 이어진 라멘식 구조 건물이다.
  6. 한계 이상의 힘을 받을시 파괴되는 골조의 순서가 정해져 있으며 건물의 핵심 부분은 제일 마지막에 파괴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후 여진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출처주
  1. 兵庫県南部地震最終報告書 - 建築研究所
  2. 気象庁 (1997). “第2章 現地調査” (pdf). 《気象庁技術報告, 第119号》. 2018년 6월 20일에 확인함. 
  3. 中森広道, 1 阪神・淡路大震災における初動情報
  4. “気象庁 震度と加速度” (일본어). 気象庁. 2018년 8월 21일에 확인함. 
  5. 寒川(2010), p259-260.
  6. 阪神・淡路大震災の概要 内閣府
  7. 神戸大学. “第2章 兵庫県南部地震” (pdf). 神戸大学. 2018년 6월 21일에 확인함. 
  8. “宮城県栗原市で2933ガル=強い揺れ2分強続く-気象庁”. 《時事通信》. 2011년 3월 11일. 2011년 3월 12일에 확인함. 
  9. 住宅・建築物の耐震化について 国土交通省(2019年1月23日閲覧)。
  10. メモリアル・フォト M7.2の恐怖(淡路町発行。神戸大学附属図書館「震災文庫」)
  11. Operational Procedures of Contributing Agencies(気象庁地震火山部 著。英国国際地震センター 発行)
  12. 地震と津波 ― 防災と減災のために ― Earthquakes and Tsunamis – Disaster prevention and mitigation efforts –(気象庁)
  13. 「震災報道 『阪神』淡路島では不評」『朝日新聞』1995年1月28日付東京朝刊、29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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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阪神・淡路大震災から20年、 復興の軌跡と継承 阪急阪神ホールディングス株式会社、2020年1月17日閲覧。新在家駅付近の復旧を担当した木戸洋二は、後にハービスOSAKA開業やホテル阪神の福島移転に携わり、阪神電鉄副社長等を努めた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