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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 지진

니가타 지진
니가타시의 아파트가 토양액상화로 옆으로 쓰러진 모습
니가타 지진은(는) 일본 안에 위치해 있다
니가타 지진
니가타 지진은(는) 니가타현 안에 위치해 있다
니가타 지진
본진
UTC 시각1964-06-16 04:01:43
ISC 지진번호866844
USGS-ANSSComCat
현지일1964년 6월 16일
현지시간13시 1분[1]
규모   모멘트 규모 7.6
일본 기상청 규모 M7.5
최대 진도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진도 5 : 니가타현 니가타시, 나가오카시
진원 깊이34 km
진앙일본 니가타현 아와시마 남쪽 앞바다 40 km 해역[1]
북위 38° 24′ 동경 139° 12′ / 북위 38.4° 동경 139.2°  / 38.4; 139.2[1]
종류경사단층형 지진
피해
피해 지역일본 니가타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지진해일최대 6 m 높이 쓰나미 관측
사상자사망자 26명, 부상자 447명[2]

니가타 지진(일본어: 新潟地震 니가타지신[*])은 1964년 6월 16일 13시 1분 (JST) 니가타현 아와시마 남부 앞바다 40km (북위 38° 24′ 동경 139° 12′ / 북위 38.4° 동경 139.2°  / 38.4; 139.2)에서 발생한 지진이다.[3][4] 지진의 규모는 M7.5, 모멘트 규모 Mw7.6이다.[1]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석유 콤비나트 재해가 일어난 지진으로, 화학 소방 체제가 취약했던 시대적 배경도 있어[a] 지진으로 143개의 석유 탱크가 불에 타 12일간 화재가 지속되었다.[5] 이후 석유 콤비나트 방재의 한 지표가 되었다.[6] 또한 이 지진을 계기로 주거지나 공업지대의 액상화현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7] 또한 일본에서 지진보험이 생기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지진재해로도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지진 2년 후인 1966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지진보험제도가 탄생했다.[b]

또한 이 지진은 거의 전부 흑백이지만 당시 니가타현에 있던 NHK 니가타 방송국니가타 방송이 이미 TV방송을 진행한게 큰 영향을 미쳐 일본에서 처음으로 수많은 필름과 비디오 테이프 영상으로 지진 피해 상황을 담은 지진이다. 또한 니가타 방송이 촬영한 영상 중 일부는 지진 발생 후 정확히 60년 후인 2024년 6월 16일 방송된 프로그램인 《BSN NEWS 유나비 스페셜 니가타지진 60년 "그날의 기억, 내일의 준비"》의 생방송 프로그램에도 삽입되었고 다음날 BSN의 유튜브 공식 채널에도 프로그램 전 편이 업로드되어 인터넷으로 공개되었다.

지질학적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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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슈 서북쪽 동해 해안 지역은 일본 해구를 따라 유라시아판 아래로 태평양판섭입하면서 발생하는 배호분지열개로 형성된 동해의 동남쪽 가장자리 지역에 있다. 이 과정은 마이오세 초기에 시작되어 마이오세 중기에 끝났다. 플라이오세 말기에는 지각이 압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이즈-보닌-마리아나호혼슈의 충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이 때문에 열개지의 단층이 역으로 활성화되면서 단층으로 형성된 분지의 반전 현상이 일어났다.[9] 현대 일본은 태평양판, 필리핀해판, 오호츠크판, 아무르판 사이의 수렴 경계 위에 있다. 섬 배호의 동쪽과 동남쪽 해안을 따라 발생하는 태평양판과 필리핀해판의 섭입은 각각 일본 해구와 난카이 해곡에서 일어난다. 동해와 접해 있는 혼슈 서해안은 아무르판과 오호츠크판 사이 남북을 경계로 수렴 현상이 일어난다. 이를 동해 동연 변동대라고 부른다.[10] 특히 이 변동대 경계는 동쪽으로 가라앉는 충상단층으로 구성된 초기 섭입대라고 보여진다.[11]

동해 동연 변동대에서는 열개와 이어진 반전 현상 때문에 경계인 혼슈 서해안을 따라 규모 M6.8~7.9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일련의 여러 단층이 생겨났으며, 이 단층은 많은 경우 지진과 함께 큰 쓰나미도 일으킨다.[10] 동해 동연 변동대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지진으로 1741년, 1833년, 1940년, 1964년, 1983년, 1993년의 지진이 있으나 1741년 지진은 그 발생 여부에 대해 아직 논쟁중이다.[12]

각지의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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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기준 진도4 이상을 관측한 지역은 아래와 같다.[1]

진도 도도부현 시구정촌
5 미야기현 나루코정, 센다이시 미야기노구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사카타시, 신조시
후쿠시마현 다다미정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니가타시 주오구, 사도시
4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오슈시
미야기현 쓰키다테정, 이시노마키시
아키타현 아키타시
야마가타현 야마가타시, 오바나자와시, 요네자와시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 고리야마시, 시라카와시, 이와키시, 아이즈와카마쓰시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
도치기현 오타와라시
군마현 미나카미정, 마에바시시
니가타현 조에쓰시
이시카와현 와지마시
나가노현 나가노시

당시 일본 기상청의 지진 관측은 기상관서에서만 이루어졌으며 진원 인근 지역에서는 진도6(현재의 진도6약~6강)이라고 추정된다. 니가타 방송의 사사인 《니가타 방송 40년의 발자취》에서도 "니가타에서 진도6"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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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망자 26명[13]
  • 부상자 477명[14]
  • 주택 완전 붕괴 1,960채[13]
  • 주택 반파 6,640채[13]
  • 주택 침수 15,298채[13]

지진 피해는 니가타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등 일본 혼슈 동해 연안을 중심으로 총 9개 현에서 발생했다. 해외 매스컴에서도 "일본 서북부에서 대지진 발생"이라고 보도할 정도로 피해가 컸지만 사망자는 26명에 불과해 그 수는 매우 작다.

야마가타현 쇼나이 지방은 니가타현 다음으로 큰 피해가 발생했으며 쇼나이 지방을 강타한 지진으로는 1894년 발생한 쇼나이 지진(M7.0)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지진이다.

쓰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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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 30분에 쓰나미경보가 발표되었으나[15] 지진 발생 약 15분 후 이미 쓰나미 제1파가 찾아와 니가타시에는 이미 4 m에 도달했으며 그 외에 사도섬과 아와지섬, 시마네현오키 제도에서도 침수 피해가 발생했다. 밀려오는 해일을 시작으로 사도섬 료쓰항에서 3 m, 시오야칸에서 4 m, 나오에쓰시에서 1~2 m, 이와후네항에서 4 m의 쓰나미를 기록했다. 모래사장으로 해일이 밀려오면서 최대 6 m가 넘는 쓰나미를 관측한 곳도 있었다. 제1파 파고가 가장 높았던 곳도 있으나 제3파의 파고가 제일 높았던 곳도 있다는 목격담이 있다. 또한 지진 발생 후 수 시간이 지나서 최대 높이 해일을 기록했다. 진폭 주기는 20분 주기와 50분 주기의 해일이 중복해서 일어났다.[16] 쓰나미 침수 피해는 주로 시나노강 우안의 야마노시타 지구 등 시나노강 유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발생했으며 특히 구리노키강 주변 등 일부 지역의 침수 피해는 한달 넘게 이어졌다.

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6월 16일 오후 3시[17]에 해일주의보를 발령, 17일 0시[18]에 해일주의보를 해제했다. 울산에서 최고 0.39 m, 부산에서 최고 0.32 m 높이의 쓰나미를 관측했다.[19]

화재와 액상화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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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기울어진 가와기정 현영아파트
쇼와석유 플랜트에서 화재가 난 모습 (1964년 6월 17일 촬영)

1955년 발생한 니가타 대화재 이후 막 복구하여 부흥하던 니가타시는 지진으로 다시 큰 피해가 발생했다. 시나노강 좌안에서는 토양액상화가 발생해 강변의 현영 가와기정 아파트 8개 동 중 3개 동이 크게 기울어졌으며, 특히 4동은 거의 완전하게 옆으로 쓰러졌다. 진원에 가까운 시나노강 우안에서는 니가타 공항 활주로가 쓰나미와 액상화현상으로 침수되었으며 니가타항 내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 특히 공항과 항구 사이에 있는 쇼와석유 니가타 정유소(현 이데미츠코산 니가타 석유수입기지)의 가솔린 저장 탱크 No.33 배관이 지진의 흔들림으로 손상되어 유출된 가솔린이 액상화로 솟아난 지하수와 쓰나미로 온 해수 위를 퍼져나가 지진 발생 약 5시간 후 폭발하며 대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으로 번져 주변 탱크도 연쇄 폭발과 화재에 휩쓸렸으며 총 12일간 화재가 지속되었다. 화재는 주변 민가로도 번져 건물 전소 347채, 반소 6채, 피해 가구 347세대 1,407명의 피해가 발생했다.[20] 이 화재는 일본 내에서 발생한 복합 단지 화재 중에서는 규모와 피해 면에서 사상 최대로 기록되었다. 석유 탱크 화재는 당시 액상화현상이 원인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다른 대지진의 연구를 통해 장주기 지진동 때문에 발생한 화재로 밝혀졌다. 또한 액상화로 인한 측면 유동 현상[21] 때문에 만다이교 부근의 강폭이 약 23 m 좁아졌다.[22]

당시 니가타시에는 물로 소화할 수 없는 정유소항공 사고 등의 유류 화재에 대응할 수 있는 화학소방차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소방청을 경유해 도쿄 소방청에 지원 요청이 있었고 가마타 소방시를 중심으로 한 소방대가 파견되어 화재를 진압했다. 일시적으로 가솔린용 첨가제 탱크와 수소 탱크도 연소 위험이 발생했으나 도쿄에서 급파된 화학 소방차 5대와 대원들의 20시간에 걸친 소화 활동으로 화재 확산을 막았다. 만약 이 탱크에 불이 옮겨붙었다면 니가타시 전역에 폭발 피해가 미칠 위험이 있었다. 소화 작업을 위해 현내 민간 기업에 있는 자위 소방대가 소유한 화학 소방차에 출동 요청을 하기로 했으나 연락 수단이 지진으로 파괴되어 니가타 방송 라디오[c]에서 "○○회사 관계자 여러분께 대책본부에서 출동 요청입니다. 화학소방차를 니가타시로 파견해 주십시오"라는 방송을 진행했고 그 방송을 들은 관계자가 달려오는 장면도 송출되었다.

액상화는 구조물 파괴뿐만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던 몇 가지 피해를 경감시키는 작용도 발생시켰다.[23][24]

  1. 분출된 물로 인해 화재 확산을 막는 효과가 발생했다.
  2. 액상화된 지층이 면진 장치의 아이솔레이터 역할을 하여 상부 구조물의 흔들림을 줄이게 만들었다.

한편, 니가타 지진 당시에는 아직 '액상화현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행정 기관과 언론은 '유사현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지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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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시 고바리 지역에선 지하수가 분출한 지반 균열 틈에 25세 여성이 추락해 사망했다. 목격자는 "지진 후 모래 사이로 한쪽 팔만 나와 있었기에 파내어 보니 지반 균열에 빠진 여성이 기어오르다 한쪽 팔을 든 채 모래에 파묻혀 죽었다"고 증언했다.[25][26]

또한 야마가타현 사카타시의 시립제3중학교에서도 운동장에 생긴 지반 균열에 피난가던 여학생이 추락해 압사했다. 해당 학교 부지는 모가미강 하구 부근 매립지로 지진으로 심한 액상화 현상이 발생했다. "사망한 여학생의 최후를 목격한 이야기"로 "살아있다는 느낌도 없이 슬쩍 앞을 보니 소녀가 갈라진 땅 아래에 빠져 어깨 부근까지 땅속에 들어가 손을 들고 무언가 외치는 것 같았지만, 그건 한순간이었고 곧 균열이 닫히고 소녀의 모습은 땅속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갈라진 틈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 것은 그 후입니다."라는 목격자 증언이 있다.[26]

건축물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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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및 생활 기반 시설도 장기간 마비되는 등 피해 지역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지진이 평일 오후에 발생해 학교 시설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니가타역니가타시역소는 액상화 가능성을 예견하여 당시 내진 기준을 넘는 내진성을 갖추고 설계 및 건축되었기 때문에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23][d]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에서는 시 북서부의 오오야마·사이고 지역과 우젠미즈사와역 주변을 중심으로 한 일대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인접한 교다 지구에서는 교다 유치원 건물이 붕괴되어 아동 17명이 매몰되었고 이 중 3명이 사망했다. 지진 이듬해인 1965년 3월 쓰루오카시가 편찬한 《니가타 지진의 기록-쓰루오카시를 중심으로》에서 이 피해가 상세하게 다루어졌다.

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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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붕괴된 쇼와 대교의 모습
지진 이후인 1964년 6월 17일 13시경 촬영한 시나노강 상공의 모습. 맨 앞쪽부터 각각 쇼와 대교, 야치요교, 반다이교다.

니가타시를 흐르는 시나노강을 지나는 다리 중 목제 다리는 하구에서 오코즈 분수로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붕괴했다. 아가노강 하구 근처의 마쓰하마교도 지진으로 붕괴했다.[27] 마쓰하마교에서는 택시 2대와 보행자가 상판과 함께 통째로 강에 추락하여 운전사 등 5명이 부상을 입었다.[26]

한편 영구교(철강교 혹은 콘크리트교)의 지진 피해는 반다이교, 야치요교, 쇼와 대교, 에치고선 시나노강 교량 등 총 4개 교량으로 한정되었다.[27] 콘크리트교인 반다이교는 연결부의 파손, 침하만 발생하여 차량 통행이 유일하게 가능한 상태로 남았다. 야치요교는 교각이 쓰러지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쇼와 대교는 당시 준공 1개월 후이었음에도 교각이 붕괴되어 교각 2개는 모래 아래에 파묻혀 행방불명되었고[28] 각각의 상판이 기울어졌다. 붕괴된 쇼와 대교의 사진은 니가타 지진의 피해 사진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쇼와 대교(한쪽 끝은 핀으로 지지, 다른 쪽 끝은 롤러로 지지한 단순 보)와 1929년(쇼와 4년)에 건설된 반다이교(철근 콘크리트제, 다중 스팬 아치교)의 피해 차이는 구조 차이 때문이다.[23]

석유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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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석유 니가타 정유소의 석유 탱크는 12일 동안 화재가 발생해 "지반의 액상화 현상"과 "석유 탱크 화재"가 주목받았으나, 1948년 후쿠이 지진의 경험을 살려 지반을 바이브로 플로테이션 공법(느슨한 사질 지반의 다짐을 위한 지반 개량 공법)으로 다져 놓은 탱크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23]

행사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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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는 제19회 국민체육대회가 4일 전까지 개최되었으나 수영 경기를 중심으로 한 하계 대회는 니가타 지진의 영향으로 복구 작업을 우선으로 해 취소되었다. 또한 천황배, 황후배 경쟁은 춘계 대회(통상적인 추계 대회 시기가 1964년 하계 올림픽과 겹쳐 6월로 앞당겨 개최했다)까지의 성적으로 결정되었다.

기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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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도쿄에서 니가타로 이송 중이던 수감자가 행방불명되었고 니가타현 미쓰케 경찰서에서 신변을 확보했으나 니가타에서 발신한 경찰 무전을 도쿄에서 수신하지 못하자, 미쓰케시의 아마추어 무선가가 현지 경찰의 요청을 받아 "수감자 몇 명을 미쓰케 경찰서에 구금할 수 있었다고 나카노 교도소에 전해 달라"고 아마추어 무선을 통해 전달한 적도 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야마네 카즈마가 이를 도청하여 출발지인 나카노 교도소에 전화 연락하여 통신 확보에 협력한 일도 있었다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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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 지진은 일본에서 풍부한 기록 영상이 남아 있는 최초의 지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지진 피해를 담은 영상은(당시에는 흑백이었지만) 당시 니가타에 존재했던 NHK와 니가타 방송 두 개의 텔레비전 방송국, 더 나아가 후자는 가맹하고 있는 JNN의 키국 TBS를 통해 전국의 뉴스 프로그램 등을 통해 일본 각지에 전해졌다.[e] 그러나 지진 발생 당시 니가타현 내 TV 방송국에 연결되는 전전공사(당시)의 TV 중계 회선이 모든 방향(3방향 4회선)으로 끊어져 버려 일본 전국에 그 모습을 전하는 데 있어 그 대응에 NHK와 JNN 계열의 니가타방송, TBS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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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 지진 당시 NHK의 대응은 《NHK 연감 '65》(1965년 10월 25일, 일본방송출판협회 발행)에 상세히 게재되어 있다.[29]

NHK 니가타 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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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발생 후 라디오는 13시 02분부터 2분간, 텔레비전은 3분간이라는 짧은 전면 정전 후 즉시 재해 방송을 시작했다.[30]

  • 라디오 제1방송

16일 13시 4분부터 18일 오전 1시까지 36시간 연속 방송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뉴스·재해 관련 프로그램 등의 전국 중계 방송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역 방송으로 편성하여 재해 상황·기상청·경찰·소방 관련 공지, 주의사항, 피난민 유도, 관계 기관의 긴급 연락을 비롯해 재해 대책 본부 및 피해 지역과 연결한 3원 방송, 공지사항, 방문자 안내 등 다양한 방송을 진행했다. 18일부터 20일까지는 하루 15시간 정도의 지역 방송을 편성했으며, 이후에도 지역 특별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편성했다.[30]

  • 종합테레비

16일 13시 5분에 방송을 재개한 후, 같은 날 14시 30분 이후에는 TV 카메라를 옥상, 더 나아가 40 m 철탑에 올려 피해 실황 중계를 지역 방송으로 송출한 것을 시작으로 2대의 TV 중계를 활용하여 피해를 보도했다.[30]

NHK 전국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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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디오

지진 발생 직후인 13시 15분에 지역 속보를 방송한 뒤, 13시 25분과 37분에 쓰나미 경보 임시 뉴스를 방송했다. 이후 정시 뉴스를 포함해 적시에 경보, 지진 범위, 피해 상황 등을 보도했으며 15시 27분에는 니가타국 방송을 녹음한 1차 방송을 프로그램 중단 후 실시, 19시 뉴스는 30분으로 시간을 확대해 방송했다. 이후 뉴스도 지진 관련 특설 뉴스를 마련해 방송 시간을 확대해 17일 오전 1시 21분까지 현지발 뉴스를 포함해 방송했다. 17일 새벽 방송 시작 후에도 정시 뉴스 시간을 임시로 연장하여 석유 탱크의 연소 등을 중심으로 재해 상황을 전했다.[30]

  • 텔레비전

NHK 종합 텔레비전에서 16일 13시 18분부터 연속 보도를 시작했고, 13시 25분부터 쓰나미 경보를 발표했다.[31] 그러나 앞서 언급한 텔레비전 네트워크 회선이 완전히 단절됨에 따라, 전국에 그 영상을 중계하기 위해 NHK 니가타 방송국야히코산 송신소에서 나오는 방송파를 NHK 도야마 방송국구로하산 송신소 방송파 중계로 겨우 잡아[32] NHK 가나자와 방송국과 NHK 나고야 방송국의 마이크로파 회선으로 도쿄에 보내는 경로를 독자적으로 개발해 17시 33분, 피해 영상이 전국에 생방송되기 시작했다.[33][34][35] 이후에도 18시가 넘어서도 생방송을 진행했다. 이 독자 회선은 처음에는 영상이 나빴으나 점차 개선되어 화질이 선명해졌다. 야간에도 수시로 특설 뉴스를 마련해 석유 탱크 폭발 등의 뉴스를 방송했다.[30]

이 재해 보도에 따라 도쿄의 방송 센터나 NHK 나가노 방송국 등에서도 니가타로 지원을 갔다.[30]

니가타 방송 (B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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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 방송의 대응은 니가타 방송 측이 1967년에 발행한 사사 《니가타 방송 15년의 발자취》(니가타 방송 사사 편찬 위원회: 편)의 제11장 〈전국의 이목을 모은 니가타 지진〈주목받은 재해 보도〉〉[36], 1992년에 발행한 사사 《니가타 방송 40년의 발자취》 제4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37]

지진 이후 니가타 방송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 6월 16일
    • 13시 02분 - 라디오 《노래로 걸어온 50년》, TV 《언젠가 푸른 하늘》 방송 중 M7.5 지진 발생. 가와기시마 본사는 정전과 본사-송신소 간 지하 매설 방송선이 단선되어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이 불가능해짐. 본사에 인접한 호쿠리쿠 가스의 가스 탱크 2기가 가스 누출로 폭발 위험이 발생하여 전 사원에게 대피 명령이 내려졌으나 수십 분 후 해제됨.[f][38][39]
    • 14시 15분 - 텔레비전 방송이 재개되었다. 스튜디오 카메라를 옥상에 설치하여 불타오르는 쇼와 석유에서 피어오르는 두 개의 검은 연기나 무너진 쇼와대교 등을 방송했다.[40][41]
    • 14시 33분 - 옥상 카메라로 시나노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180cm 쓰나미를 방송함과 동시에 2인치 VTR에도 녹화한다,[40]
    • 15시 05분 - 라디오, 야마니쓰 송신소에서 방송을 재개했다. 야마토 백화점 니가타점에서 중원 취재 중 지진을 겪은 보도부 후지타 미노루 기자가 도보로 야마니쓰 송신소로 향하며 쇼와 대교 피해, 쇼와 석유 화재, 쓰나미, 국철 운행 중단 등의 정보를 방송한다.[42][43] 라디오 방송 재개 후, 텔레비전은 라디오 음성을 송출하기 시작한다.[44]
    • 15시 25분 - 본사→현경찰본부(신코마치)→경찰청(가스미가세키)→도쿄지사(당시 긴자에 위치) 경유로 TBS 라디오에 지원을 요청했다.[45]
    • 16시 01분 - 라디오로 현청에 설치된 현재난대책본부에서 재난 정보 및 실종자 방송을 시작했다.(본사 스튜디오는 방송 불가로, 니가타현청에 주차한 라디오카에서 송신한 FM파를 직접 야마니쓰 송신소에서 수신해 방송했다)[46][47]
    • 20시 00분 - 주요 인프라, 공공 정보, 재해 상황, 실종자, 니가타를 방문 중인 수학여행생 안부 정보 등을 밤새 방송한다.[48][49]

공중 촬영을 위해 니가타 공항에 있던 해당 방송국 카메라맨은 활주로에서 발생한 액상화 현상을 8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사용 불가 직전의 니가타 공항에서 하네다 공항으로 향해 대기 중이던 도쿄 방송(현: TBS TV) 스태프에게 필름이 전달되어 전국 방송되었다. 이 지진에서 BSN과 TBS가 촬영한 비디오 및 필름 영상은 이후 연구 자료 등으로도 활용되어, 이후 지진 대책 등에 큰 기여를 했다.[40]

지각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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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아와시마섬 전체가 약 1m 융기했다. 일본해 연안에서는 5~20 cm 침하했다. 침하로 인한 주택 붕괴가 니가타시, 무라카미시, 쓰루오카시, 사카타시 등 각지에서 발생했다.[50]

지진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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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시 주변에서는 1950년대 이후 도시화의 진전과 생활 양식의 근대화 등으로 인해 지하수에 포함된 수용성 천연가스를 채취하기 위한 지하수 양수량이 급증했고, 이에 따른 지반 침하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1959년 이후 니가타현과 각 시정촌이 천연가스 및 지하수 채취 규제를 시행하면서 대규모 지반 침하는 진정되었으나, 그 이전까지 니가타시를 비롯한 각 시정촌에서는 연간 평균 약 20 cm의 지반 침하가 관측되었다. 이 지반 침하는 니가타시 중심부의 액상화 및 쓰나미의 침수 등의 피해를 크게 만들었다.

연속된 아치가 특징인 만다이교는 시나노강 니가타시 중심부에 걸친 도로 교량 중 유일하게 이 지진을 견뎌냈으나, 지진의 흔적이 주변에 남아 있다. 교량부 양단부, 시나노강 제방을 따라 이어지는 시도(시나노강 우안통로, 시나노강 좌안통로)가 있다. 양 시도는 상류 쪽에서 하류 쪽으로 향하며 모두 일직선으로 다리 아래를 통과하지만, 교량 아래의 보행자용 박스형 배수로(박스 칼버트) 앞뒤의 선형은 지진으로 인한 지각 변동의 영향으로 완만한 갈고리 모양의 커브를 그리며 상류 쪽과 하류 쪽 사이에는 약 1 m의 높낮이 차이가 있다. 만다이교의 교량 본체는 니가타 지진 당시 약 10 cm 침하했으나, 지진 이전에는 앞서 언급한 지반 침하 등으로 인해 약 1.2 m 침하한 상태였다.

또한 쇼와대교는 복구 공사 시 교각을 재사용한 부분이 있으며, 그 교각 일부가 기울어진 채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법제도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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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국회의원(중의원 니가타 제3구)이자 당시 이케다 하야토 정권의 대장대신(재무장관)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지진보험의 필요성을 느끼고 보험심의회에 자문, 심의를 거쳐 1966년 6월 지진보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또한 이 지진으로 니가타시 임해부에 있던 석유 콤비나트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 점도 있어, 1965년에는 소방법 개정도 이루어졌다.[51]

같이 보기

[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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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주
  1. 당시에는 물로 진화할 수 없는 기름 화재에 대응할 수 있는 화학소방차가 제대로 배치되지 않았다.
  2. 보험금 전체를 손해보험회사가 지급하는 화재보험과는 달리 지진보험은 1966년 일본 《지진보험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정부와 민간 손해보험사가 합동으로 운영하는 제도로 출범했다. 제도의 창설 경위 등은 株式会社損害保険ジャパン P115、P120 문서나 損害保険料率算出機構(国内各損害保険会社に対し保険料の基礎となる保険料率等の提供機関 ), 社団法人日本損害保険協会 業務企画部 地震 ・ 火災・新種グループ 2 地震保険制度の概要 > (2)制度創設, 保険毎日新聞 地震保険を語る 日本損害保険協会常務理事 문서를 참조.
  3. 니가타현 내 AM방송은 21세기에도 NHK 제1방송과 니가타 방송 2곳 뿐이다. 또한 당시에는 FM방송을 도쿄도 내에서만 방송했다.
  4. 니가타역 역사는 피해가 경미했으나, 역 구내는 액상화 현상으로 인해 사용이 불가능해져 역 동쪽의 사사구치 지구에 임시 승강장을 설치하여 6월 19일부터 영업을 재개했다.
  5. 한편, 이 지진 당시 방송국이 촬영·보존한 영상은 모두 흑백이었으며, 당시 중요 방송국인 NHK(방송센터)나 TBS도 컬러 필름으로 보도 취재를 하지 않았다(NHK는 1966년 10월 26일, TBS는 1968년 9월 30일 각각 컬러 취재를 시작했다). 또한 니가타의 지역 TV 방송국의 보도 취재가 컬러화된 것은 NHK와 BSN 모두 1970년의 일이다. 1964년 지진 당시 NHK 니가타 방송국은 종합·교육 모두 이미 컬러 방송을 시작했으며, BSN은 그 후 같은 해 10월 1일, 도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해당 방송을 시작했다. 모두 해당 방송 시작 초기에는 도쿄·오사카 등에서 전전공사(전신전화공사)의 방송용 마이크로파 회선을 통해 수신한 전국 프로그램만 컬러 방송이 가능했다.
  6. 당시 니가타 방송국의 진도는 진도 5이다.
출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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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年新潟地震は、日本の歴史上、最も大きな災害を被った石油コンビナートの事例である」「火災が12日間続き、約150基の石油タンクが延焼し、ボイルオーバーが数回起こった」、消防庁消防研究センター古積博岩田雄策らによる「Loss Prevention Bulletin(June 2013) 보관됨 2016-06-10 - 웨이백 머신」掲載の英語論文『Multi-Boilover Incidents in Oil and Chemical Complexes in the 1964 Niigata Earthquakes (1964年新潟地震における石油コンビナートの複ボイルオーバー事例) 보관됨 2016-06-10 - 웨이백 머신』の日本語要約『1964年新潟地震における貯蔵タンクのボイルオーバー事例』より。
    新潟地震の火災と液状化新潟西港新潟空港の間に位置する昭和石油新潟製油所(現:昭和シェル石油新潟石油製品輸入基地)の被害。
    古積博、「ボイルオーバー:事故事例と最近の研究」『安全工学』 2016年 55巻 4号 p.253-264, doi:10.18943/safety.55.4_253, 安全工学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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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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