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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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의 법원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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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創氏改名 (そうしかいめい)) 또는 일본식 성명 강요(日本式姓名强要)는 1940년 2월부터 1946년 사이에 일본 제국조선인타이완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제도이다.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이들은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응하기도 하였고 또는 반대로 일본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서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의 뜻을 담은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자도 있었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1]

일부 친일파들은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에 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다는 창씨개명은 1940년 5월까지 창씨계출(創氏屆出) 호수(戶數)가 7.6%에 불과하자, 조선총독부가 권력기구에 의한 강제, 법의 수정, 유명인의 동원 등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그 비율을 79.3%로 끌어올렸다.[2]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의 개인적인 정책에서 출발한 것으로 일본 제국 조정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라 일본인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42년 미나미조선총독에서 해임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나미 지로에 의해 발표된 이래 창씨개명령은 조선인의 집단 반발 외에도, 일본 내부의 반대와 비난, 조선총독부 내부에서도 총독부 직원들의 집단 반발에 부딛쳤다. 조선총독부 경무국만 해도 창씨개명에 반대하였다.[3] 또한 일본 내지에서도 반대론이 거셌다.[3] 식민지 조선과 일본 내지에서 반대가 얼마나 거세게 일었던지 윤치호는 1940년 7월 5일자 일기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이 경질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3] 그러나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 계획을 밀어붙여 논란을 일으켰다.

창씨개명 권유가 들어오자 윤치호 등은 조선인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연기를 청하였다.[4] 개명은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의 권고가 있었으나, 실제 시행된 것은 1941년 1월부터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조선인들은 일본식 씨(氏)로부터 해방되었다. 1946년 미 군정소련 군정의 원적 회복 조치에 따라 창씨개명령은 최종 폐지되었고, 개명했던 조선인들은 본래의 이름을 회복하였다.

창씨개명의 의미[편집]

창씨(創氏)란 일본식으로 '씨(氏)'를 만드는 것을 말하고, 개명은 '이름'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5] 특히, 창씨(創氏)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모토 아래 지원병 제도, 신사참배(神社參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암송, 조선어 사용 금지와 함께 조선인들에게 강요되었다.

창씨개명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가 주도한 조선인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의 하나였다. 미나미의 조선총독부는 부계 혈통에 기초한 조선의 종족집단(종중)과 여자가 결혼을 해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성(姓)을 유지하는 조선의 가족 제도가 황민화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에게 모든 가족이 호주(戶主)의 씨(氏)를 쓰는 일본식 이에(家)제도를 따르게 함으로써 일왕(日王)을 정점으로 한 국가체계에 적합하도록 조선의 가족제도를 개조한다는 목적 아래 강요된 조선총독부내선일체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다.[6]

창씨개명은 개명 강요 이전에 자발적인 참여도도 개명률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개명 신청 접수는 창씨와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의무가 아니었기에 창씨와 달리 수수료를 내야 했고,[7][2]창씨가 6개월의 기한이 있었던 데 반해 개명에는 기한이 없었다.

1940년 1월 미나미 총독은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지만 결국 창씨를 강요하여 문제가 되었다. 윤치호에 의하면 '미나미 총독이 경찰, 학교, 관공서 등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과 관련한 압박을 가해서 원성을 산 것만큼은 엄연한 사실이다[8]'라고 진술하였고, 창씨개명령에 대한 조선인 반발의 후유증으로 미나미 총독의 해임과 하야시 센주로의 총독직 임명을 예견[8]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당시의 상황[편집]

1911년부터 1939년까지 일제는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는 것을 금지하였다. 1909년 대한제국민적법을 시행함에 따라 호적 작성이 새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일부 조선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일본풍으로 고쳐 호적에 올리는 일이 있었다.[7] 조선총독부는 이를 막기 위해 1911년 11월 1일 총독부령 제124호 "조선인의 성명 개칭에 관한 건"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혼동될 수 있는 성명을 호적에 올릴 수 없었고, 출생신고를 할 때도 일본풍으로 이름짓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조선인의 개명을 어렵게 하고 이미 개명한 사람도 원래 성명으로 되돌리도록 하였다. 이런 상황은 창씨개명 시행 전까지 30여 년 간 이어졌다.[9]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자, 한·일 민족의 차별화에 바탕을 둔 지배질서 유지를 통치목표로 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이를 막기 위해 '조선인의 성명 개칭에 관한 건'(1911년 11월 1일 총독부령 제124호)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르면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혼동될 수 있는 성명을 호적에 올릴 수 없었고, 조선인의 개명을 어렵게 하며 이미 개명한 사람도 본래 성명으로 되돌리도록 하였다.[7][10]

일제의 이러한 정책기조는 중일전쟁으로 인한 전시동원체제에 조선인들의 자발적 동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내선일체가 강조되면서 급변하였다.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 호적국은 제령 제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을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놓고 조선인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일본의 극우 인사들 사이에서도 신성한 일본인의 성씨를 이민족이 쓰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등 반발이 있었다. 총독부가 39년 11월에 제정한 창씨개명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2]

  1. 조선식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이 영(令) 시행 후 6개월 이내에 호주가 새로운 일본식 성씨(姓氏)를 정하여 신고할 것.
  2. 조선에서도 서양자(壻養子)를 인정하며, 서양자는 처가의 성씨를 따름.[11]
  3. 이성(異姓) 양자를 인정하며, 양자는 양가의 성씨를 따름.[12]

이 제도의 핵심은 일본식 성씨를 만드는, 성씨와 이름을 모두 바꿀수 있게 했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이 조선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1940년 5월까지 창씨계출(創氏屆出) 호수(戶數)가 7.6%에 불과하자 권력기구에 의한 강제, 법의 수정, 유명인의 동원 등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마감까지 창씨율을 그 10배 이상으로 끌어올렸다.[7] 성씨와 이름을 모두 개명하는 등은 자율에 해당되었다. 이 점을 이용, 천황폐하의 일본식 발음인 덴노 헤이까(天皇陛下)와 발음이 비슷한 덴노 헤이까(田農炳下, 田農昞夏)로 개명하여 천황을 조롱하였고, 이름이 병하(昞夏, 炳夏, 炳河)인 사람들 역시 천황과 비슷한 덴노로 창씨개명을 하여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일본 내부와 조선의 반발[편집]

창씨개명 계획이 발표되면서 조선인 사회는 큰 논란이 들불처럼 번져갔고, 춘원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13]을 선언한다. 1939년 12월 12일 이광수경성일보에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는 동시에[13] 창씨개명에 앞장섰다. 그에게 무수한 협박과 투서, 비난이 쏟아졌으나 오히려 그는 창씨개명이 불가피하며 일본조선총독부는 어차피 강제로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14]이라고 답했다.

조선인들의 반발은 거셌고, 친일파들조차 논란에 빠졌다. 창씨(創氏)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이도 많았다.[2] 미나미 총독의 조선인 창씨개명 정책은 조선총독부 산하 경무국 등 내부의 반발에도 직면했다.[3] 일본의 극우파들은 신성한 일본의 성씨를 왜 조선인에게 부여하는가 항의하며 총독 퇴진 운동을 벌였다. 조선총독부 관리 출신들이 총독부 후원 기관으로 조직한 '중앙조선협회'도 창씨개명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3]

일본인들은 창씨개명으로 인종 구별·분리가 어렵다며 창씨개명을 반대했는데[6] 조선총독부는 조선에는 창씨개명이 내선일체의 완성이라고 선전했던 것과 반대로 일본의회의 대정부질문에서는 반대 여론 무마를 위해 '조선에 본적을 둔 조선인은 일본으로 본적을 옮기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일본인도 조선으로 본적을 옮길 수 없다'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분리·차별은 계속될 것임을 천명했다.[2] 일본 국내 여론은 그럼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고 총독 퇴진 운동이 계속됐다.

시행 직전의 여론수렴 과정[편집]

1939년 12월 12일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 개명 권고 칼럼

1939년 12월 20일 오후 4시부터 서울 반도호텔에서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공개 원탁회의가 열렸다. 일본인 측에서는 유가미, 매일신보의 이노우에, 그리고 몇몇 인사들이 참석했다. 조선인 측에서는 한상룡, 장덕수, 이광수윤치호가 참석했고, 최린이 사회를 보았다.[14] 매일신보 주최 원탁회의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요즈음 젊은이들을 건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하는게 토론 주제였다.[14]

이때 이광수는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1. 당국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우리들 대부분이-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2. 우리 어른들이야 창씨개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입학과 취직시에 (각종) 차별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3. 9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조선인들에겐 지금과 같은 성이 없었습니다. 김씨, 이씨, 박씨, 기타 성씨는 다 중국에서 빌려온 것입니다.[14]

설상가상으로 회의 발언 중 현재 조선인 성씨 보유자 대다수가 임진왜란 후 양반의 족보를 사서 혈통을 위조한 것이라 성씨를 일본식을 바꿔도 큰 흠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 사람도 있었다. 해당 발언 등이 신문지면을 장식하면서 회의의 주체였던 이광수는 다시 한 번 성토의 대상이 됐다. 1940년 6월 3일 이광수의 집을 방문한 윤치호는 그의 부인에게서 "자기 남편이 창씨개명 후 1천 통 이상 편지를 받았는데, 하나같이 욕설과 협박이었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하루 평균 5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15]

일본인들의 반발 원인[편집]

일본인들은 창씨개명을 시행함으로써 한국인과 일본인의 구별, 분리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창씨개명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조선인들의 창씨개명 반대 만큼 일본인들의 반발도 거셌다. 일본인의 반대 여론이 의외로 높았던 것을 두고 후일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교수는 다른 무엇보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 약화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3]

총독부 내부에서도 창씨개명에 반발했는데, 특히 조선총독부 경찰은 조선인이 똑같이 일본 씨와 성을 쓰게 되면, 그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했으며, 내지측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우려가 높았다[3]는 것이다.

경과[편집]

창씨 개명 유예[편집]

1940년 1월 초 총독부는 창씨개명이 조선인들의 희망에 의해 실시하는 것으로 일본식 성씨의 설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제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는 조선 사회에 논란이 되었다.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4] 그런데 그가 뒤이어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면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4] 총독에게 아부하는 조선인 지식인들은 당연한 것이라며 총독을 추켜세웠고, 결국 1940년 2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한편 한국의 정치 지도자 중 윤치호는 창씨개명에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로 1940년 5월 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 소환되었다가 풀려났다. 5월 1일 오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소환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오전 11시 그는 총독부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을 면담했다. 미나미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내선일체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개진하는 세 가지 이유를 총독 각하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이들은 도쿄에서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듭니다. 전 이것이 합당한 사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총독부가 도쿄에 있는 특정 인사들의 의견을 추종해서 조선의 세부정책을 입안해 실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지요.
  2.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이들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창씨개명을 반대한다는 이유를 듭니다. 창씨개명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별이 사라지게 될까봐 그렇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 모두가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면 자기들의 우월감이 사라지게 될까봐 우려하는 일본인들이 있다는 겁니다. 저는 특정 부류의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우월감을 타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총독 각하께 우리 조선인이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조선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조선인 이름을 간직해온 우리 조선인들이 지금처럼 김씨, 이씨 등으로 살면서도 충량한 일본 신민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전 이 주장에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마감시한을 오는 8월 11일로부터 6~10개월 정도 늦추면 어떨까 싶습니다.[16]

윤치호는 거듭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청했고, 그 뒤 윤치호의 청을 받아들인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령 시한을 늦춰 1941년 1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조선인의 협력과 창씨에 대한 입장[편집]

1940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 형식르로 창씨개명론을 발표했다.[4] 그리고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천명했다.[4] 일부 조선인들은 총독이 조선인을 배려한다며 총독의 뜻을 찬양하였다.

그러나 1939년 12월부터 창씨개명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자고 권고한 이광수 조차 총독의 희망하는 사람에 한해서 창씨개명을 해도 좋다는 주장에 의혹을 제기한다. 이광수는 '당국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우리들 대부분이-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이 틀림없을 것[14]'이라는 점과 '우리 어른들이야 창씨개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입학과 취직시에 (각종) 차별대우를 받을 것[14]'이라며 창씨개명 거부 이후의 불이익을 예상, 우려하였다.

창씨개명에 시종 부정적이었던 윤치호 역시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에 가해질 불이익을 염려하였다.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들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17]'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조선인들은 자발적으로 창씨에 참여하였고 경성부청과 구청, 각 부청과 군청사 등에는 창씨개명을 하러 자발적으로 몰려든 주민들로 인해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반면에, 창씨개명의 강요를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도 있었으며,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도 나타났다.[2]

조선민사령 개정 직후의 상황[편집]

1939년 12월 12일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 개명 권고 칼럼

1940년 1월 4일, 조선총독부 미나미 총독은 창씨개명을 권고하는 형식의 창씨개명 담화를 발표하면서, 이는 단지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일 뿐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18]

그러나,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미나미의 담화에 대해서는 친일파들조차 믿지 않았다. 1939년 12월 12일, 경성일보를 통해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고 앞장서서 창씨개명을 한 춘원 이광수[13]는 "당국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가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이야 창씨개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입학과 취직시에 각종 차별대우를 받을 것입니다."라며 창씨개명 거부 이후의 불이익을 예상하고 있었다.[18] 윤치호 역시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라고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에 가해질 불이익을 염려하였다.[18]

창씨개명의 시행[편집]

윤치호는 거듭 창씨개명 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청했고, 그 뒤, 윤치호의 청을 받아들인 미나미 지로 총독은 창씨개명령 시한을 늦춰 1941년 1월부터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단행된다.

1940년 경성부청 민원국 호적과에 찾아가 창씨개명 등록을 하는 경성부 주민들

한편, 이와 같은 창씨의 강압 속에서도 일부 인사들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고, 6개월간 신고하도록 했으나 3개월이 지나도록 신청률이 7.6%에 불과하자 조선총독부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하도록 더욱 협박하고 강요해 신고 마감 시기까지 80%인 322만 가구가 창씨개명하였다.[19][20]

창씨계출(創氏屆出) 초기에는 일부 친일파들이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려고 몰려들어 경성부청과 구청, 그 밖의 부청과 군청사 등이 혼잡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다는 창씨개명은 1940년 5월까지 창씨계출(創氏屆出) 호수(戶數)가 7.6%에 불과하자, 조선총독부는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창씨개명을 하도록 협박·강요하여 신고마감 시기까지 322만 가구, 79.3%로 창씨율을 끌어올렸다.[21][22]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방식은 주로 다음과 같았다.[2]

  1. 창씨(創氏)를 하지 않을 경우,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2. 아동들을 이유없이 질책·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들의 창씨를 강제한다.
  3.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조치를 취한다.
  4. 행정기관에서 다루는 모든 민원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5.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수첩에 기입해서 사찰을 철저히 한다.
  6. 우선적인 노무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7. 식량 및 물자의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8. 철도 수송화물의 명패에 조선인의 이름이 씌어진 것은 취급하지 않는다.

창씨개명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일부 존속했고, 1946년부터 미군정소련 군정 치하에서 원 성명, 원적 회복 조치에 따라 다시 한국식 성명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씨 개명 당시의 토지와 재산을 찾지 못한 사례가 일부 존재하여, 2000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일부 인사들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뒤에 재산을 찾는 소송이 나타나기도 한다.

창씨개명의 사례[편집]

한국인들의 창씨(創氏) 경향은 아주 왜식(倭式)으로 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대개는 자기의 관향(안동 권씨는 안동이나 안동의 별칭인 영가(永嘉), 김해 김씨는 김해)을 땄으며, 일부는 원래의 성씨를 파자(예. 朴 = 木+卜)하기도 하였다. 전주 이씨의 경우는 조선 왕실의 일가라 하여 대개 국본(國本), 궁본(宮本), 조본(朝本) 등으로 창씨하거나, 일부는 본관의 지명을 따서 '전주'로 창씨하기도 하였다.[23]

창씨에 반대하던 이들 중에는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일본식 발음인 '덴노 헤이까'와 발음이 비슷한 '덴노 헤이까'(田農炳下, 田農昞夏)로 개명하여 일왕(日王)을 조롱하거나, 산천초목(山川草木), 청산백수(靑山白水), 강원야원(江原野原→에하라 노하라) 등으로 장난삼아 짓거나, 성(姓)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라 해서 '이누코'(犬子 (いぬこ))라고 창씨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당시의 조선 총독의 이름이 미나미 지로("미나미 가의 둘째 아들"라는 뜻)인 것에 착안해서 '미나미 다로'(南太郞→미나미 가의 큰 아들)로 이름을 바꾸어 창씨개명을 강행한 미나미 지로 총독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24]

창씨(創氏)의 예시[편집]

연도 신분 본관(本貫)과 성(姓) 씨(氏) 명(名) 전체 이름
1909년 전: 족보 기록[25] 남편 경주 이씨(慶州 李氏) 없음 준개(俊介) 이준개(李俊介)
아내 김해 김씨(金海 金氏) 없음 없음 기록 없음(여자 이름은 족보에 기록하지 않음)
1909년부터 1939년까지: 민적법(民籍法: 1909년)과 호적제도(1923년 7월 1일. 민적법 폐지) 시행[26] 남편 경주 이씨(慶州 李氏) 없음 준개(俊介) 성+명: 이준개(李俊介)
아내 김해 김씨(金海 金氏) 없음 무아(撫兒) 성+명: 김무아(金撫兒)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창씨개명(성(姓)+명(名)→씨(氏)+명(名)) 설정창씨(設定創氏) : 창씨계출(創氏屆出)을 한 경우
남편 경주 이씨(慶州 李氏) 쓰키야마(月山) 슌스케(俊介) 씨+명: 쓰키야마 슌스케(月山俊介)
아내 김해 김씨(金海 金氏) 쓰키야마(月山) 나데시코(撫子) 씨+명: 쓰키야마 나데시코(月山撫子)
법정창씨(法定創氏) : 창씨계출을 하지 않은 경우
남편 경주 이씨(慶州 李氏) 리(李) 준개(俊介) 성+명: 리 슌스케(李俊介)
아내 김해 김씨(金海 金氏) 리(李) 무아(撫兒) 씨+명: 리 나데시코(李撫兒)
1946년 : 조선 성명 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 남편 경주 이씨(慶州 李氏) 없음 준개(俊介) 성명: 이준개(李俊介)
아내 김해 김씨(金海 金氏) 없음 무아(撫兒) 성+명: 김무아(金撫兒)

창씨개명의 폐지[편집]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조선인들은 일본식 씨(氏)로부터 해방되었다. 1946년 10월 23일미군정조선 성명 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 군정법령 제122호)이 발효되면서 창씨(創氏)한 성씨는 폐지되었고, 개명했던 한국인들은 본래의 이름을 회복하였다.

창씨개명을 한 친일 행적자[편집]

  • 이동인: 개화기에 활동한 인물 가운데 창씨개명한 사람 제1호(1880년 10월) - 아사노 도진(淺野東仁).[27]
  • 송병준: 정미칠적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한 사람 제1호.[28]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郞).[29]
  • 김석원: 일본군 대대장 출신으로, 중일전쟁 참전. - 가네야마 샤쿠겐(金山錫源)
  • 정일권: 전 국무총리, 만주군 헌병 대위 출신. -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權)
  • 김석범: 2대 해병대 사령관, 만주군 장교 출신. - 카네야마 쇼우(金山照)
  • 노덕술: 경찰, 독립지사를 검거하고 고문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 윤치호 - 이토 지코(伊東致昊)
  • 이광수 -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주석[편집]

  1. 조선민사령 (조선총독부제령 제19호, 1939.11.10 일부개정) 제11조제1항 단서·제3항 및 제11조의2
  2. 창씨개명 참고
  3.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창씨개명' 연합뉴스
  4.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2페이지
  5. 다만, 일제는 씨명제(氏名制)를 실시해 강요하면서도 일본식 씨(氏)와 별도로 종래의 성(姓)과 본(本)을 호적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6.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창씨개명' 연합뉴스
  7. “1940년 일제, 조선인 창씨개명 실시”. 경향신문. 2010년 2월 10일. 2011년 7월 7일에 확인함. 
  8.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3페이지
  9. “동화와 배제, 두 얼굴의 日식민주의”. 조선일보. 2007년 5월 4일. 2011년 7월 7일에 확인함. 
  10. “동화와 배제, 두 얼굴의 日식민주의”. 조선일보. 2007년 5월 4일. 2011년 7월 7일에 확인함. 
  11. 한국의 전통 가족제도에서 서양자(壻養子: 사위가 장인의 양자가 되어 처가의 호주를 승계하거나 성씨를 물려받는 것)는 인정되지 않았다. 일본식 제도인 서양자제도는 창씨개명과 함께 도입되어 대한민국 민법(1960.1.1 시행)에도 규정되었으나 거의 쓰이지 않았으며, 1991년 1월 1일 폐지되었다.
  12. 한국의 전통 가족제도에서 입양은 소목지서(昭穆之序: 양자로 될 사람은 양부가 될 사람과 같은 항렬인 동성동본(同姓同本) 남자혈족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성(異姓)양자를 인정하는 제도는 이후 대한민국의 민법에 정착되었으나, 이성양자가 양부의 성(姓)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13. 일제때 산 사람은 다 친일파이고 '척결' 주장에 정치적 고려 있다고? - 오마이뉴스 2002년 05월 30일자
  14.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1페이지
  15.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5페이지
  16.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1페이지
  17.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63페이지
  18.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19. "창씨개명 안하면 살 수가 없었다". SBS 8뉴스. 2005년 3월 11일. 
  20. 손제민 기자 (2010년 2월 10일). “(어제의 오늘)1940년 일제, 조선인 창씨개명 실시”. 경향신문. 
  21. "창씨개명 안하면 살 수가 없었다". SBS 8뉴스. 2005년 3월 11일. 
  22. 손제민 기자 (2010년 2월 10일). “(어제의 오늘)1940년 일제, 조선인 창씨개명 실시”. 경향신문. 
  23. 대통령과 창씨개명 - 오마이뉴스
  24. 《한눈에 보는 교과서 한국사 만화 근현대사 상》143쪽
  25. 16세기 무성층(有姓層)의 비율은 조선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했다. 왜란과 호란 이후 천민층의 양민화가 이루어지는 등 사회변화로 1909년에는 그 비율이 20%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6. 민적법(1909년 시행)에 따라 누구나 성(姓)과 본(本)을 갖도록 법제화되었다.
  27. 임종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베개. 24~25쪽. 
  28. 이규태 (2001년 5월 18일). 《[이규태의 개화백경 6] 오로지 교육만이 살 길이라》. 조선일보사. 38~39쪽. ISBN 89-7365-308-3. 
  29. 광복회, 반민족행위처벌법에 근거한 친일반민족 행위자 명단 (2002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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