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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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주기철(朱基徹, 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1])은 한국장로교 목사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일제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주기철은 1938년 제27차 신사참배를 가결한 총회 이후,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에 의해서 1939년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반대 이유로 장로교 목사직을 면직당했다. 이후 1997년에 예장통합 서울 동노회에서 목사직 복권을 하고, 2006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평양노회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학적 복적을 선포하였다.[2] 2015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총신대학교가 목사직 복권 및 평양신학교 복적을 선포하였다.[3] 그의 생을 기린 전기가 2007년《예수의 양 주기철》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생애[편집]

  •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에서 태어남
  • 경남 창원의 개통학교 졸업[4]
  •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병으로 1년 만에 중퇴, 창원으로 귀향함
  •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여 웅천교회의 집사로 추천됨[4]
  •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교회활동과 가끔 ‘술 취한’ 상태로 ‘강단에서 설교’하던 것을 1920년 9월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렸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깨닫고 다시 거듭남[4]
  • 남학회(南學會)를 조직, 3·1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6년 평양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함.
  • 부산초량교회, 마산 문장교회를 거쳐 1936년 은사 조만식으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에 부임해줄 것을 요청받음[5]
  •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초빙목사로 부임함.
  • 자기 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설교[6]기독교 신앙실천과 배일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일제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함.
  • 1938년 4월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다가 1차 검속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6월 풀려났다.[4]
  • 1938년 8월 제2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1939년 1월 풀려났다.[4]
  • 1939년 10월 제3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4]
  • 1939년 12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신사참배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
  • 1940년 2월 산정현 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설교를 하다.[5]
  • 1940년 9월 제4차 검속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할 때 함께 체포됨.[4]
  • 1944년 복역 중 고문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인해 48세를 일기로 옥사함.

사후[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주기철”. 엠파스 인물검색. 2007년 11월 11일에 확인함. 
  2. 주기철목사, 67년 만에 '목사직 복권'
  3. 주기철 목사 '불법 파직' 무효 , 평양노회에 복권 지시
  4. [허명섭 칼럼] 신사참배 반대와 주기철 목사 :: 1등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5. [이덕일 사랑]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6. 주기철 목사가 남긴 '남을 위해 일사각오'라는 설교를 보면, "예수의 삶 전체는 남을 위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탄생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죄인을 (구원하기)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자기가 죽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이냐!"라는 내용이 있다. 《예수의 양(蘇羊) 주기철》/김인수 저/홍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