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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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목사

주기철(朱基徹, 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1])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웅천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이다. 한상동 목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아호(雅號)는 소양(蘇羊)이다. 일제 강점기일제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학력[편집]

생애[편집]

  •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에서 태어남
  • 경남 창원의 개통학교 졸업[2]
  •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병으로 1년 만에 중퇴, 창원으로 귀향함
  •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여 웅천교회의 집사로 추천됨[2]
  •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교회활동과 가끔 ‘술 취한’ 상태로 ‘강단에서 설교’하던 것을 1920년 9월에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렸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깨닫고 다시 거듭남[2]
  • 남학회(南學會)를 조직, 3·1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함.
  • 부산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1936년 은사 조만식으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에 부임해줄 것을 요청받음[3]
  •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초빙목사로 부임함.
  • 자기 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설교[4]기독교 신앙실천과 배일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일제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함.
  • 1938년 4월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다가 1차 검속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6월 풀려났다.[2]
  • 1938년 8월 제2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1939년 1월 풀려났다.[2]
  • 1939년 10월 제3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2]
  • 1939년 12월 19일 불법 총회로 결의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평양노회로부터 신사참배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
  • 1940년 2월 산정현 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설교를 하다.[3]
  • 1940년 9월 제4차 검속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할 때 함께 체포됨.[2]
  • 1944년 복역 중 고문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인해 48세를 일기로 순교함.

사후[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주기철”. 엠파스 인물검색. 2007년 11월 11일에 확인함. 
  2. [허명섭 칼럼] 신사참배 반대와 주기철 목사 :: 1등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3. [이덕일 사랑]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4. 주기철 목사가 남긴 '남을 위해 일사각오'라는 설교를 보면, "예수의 삶 전체는 남을 위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탄생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죄인을 (구원하기)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자기가 죽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이냐!"라는 내용이 있다. 《예수의 양(蘇羊) 주기철》/김인수 저/홍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