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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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西村)은 대한민국 서울의 경복궁과 서울의 내사산 가운데 서쪽 산인 인왕산 사이에 있는 지역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는 흔히 '장의동'(藏義洞, 壯義洞)이나 '장동'(壯洞)으로 불렸다. 서촌은 창덕궁 남쪽의 교동이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다. 조선 시대엔 왕족과 사대부, 중인들의 거주지로 유명했으며, 일제 시대 이후엔 문인과 예술인들이 많이 자리잡았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경호와 경비 목적으로 여러 규제를 받아 쇠퇴했으나,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명칭[편집]

서촌의 다른 명칭으로는 장의동과 장동, 웃대(상촌), 효자동, 세종마을 등이 있다. 조선 전기엔 '장의동', 조선 중후기엔 '장동'이 널리 사용됐고, 해방 뒤엔 '효자동', 2000년대 이후엔 '서촌'이 널리 사용된다.

범위[편집]

서촌의 범위는 비교적 명확하다. 동쪽 경계는 경복궁,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사직로, 북쪽은 창의문(자하문)과 북악산이다. 그러나 전통적 관점에서 남쪽의 경계는 사직로가 아니라, 사직단 앞길(사직로 8길)이다. 현재의 사직로는 조선 시대엔 없던 길로 일제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유래[편집]

서촌이란 지명은 조선 시대 한성의 5부 가운데 '서부'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한성의 서부는 서대문서소문, 정동, 경희궁, 사직단 일대를 아울러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의 서촌에서 남쪽 필운동사직동, 적선동 등은 한성 서부에 속했다. 또 현재의 서촌을 한성의 서쪽으로 인식하는 일은 보편적이었다. 예를 들어 서울의 내사산 가운데 서쪽 산인 인왕산 일대는 통상 한성의 서쪽으로 인식됐다. 광해군 때 현재의 서촌 남부에 지어진 인경궁은 '서궁'으로 불렸다. 현재의 서촌 금천교 시장 어귀 자하문로에 묻혀있는 '금천교'는 인경궁 안에 있던 다리였다.

조선 시대에 현재의 서촌에는 서인과 서인의 일파인 노론의 대표적 인물들이 다수 거주했다. 이것은 '서촌엔 서인이 살았다'는 서촌의 유래와도 잘 들어맞는다. 서촌에 살았던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인물로는 송익필, 성수침 성혼 부자, 이이, 정철, 이항복, 김상용 김상헌 형제와 그 후손들인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 김정희 등이 있었다.

특히 대대로 장동(효자동, 궁정동, 청운동 일대)에 살았던 신안동 김씨 김상용, 김상헌 형제와 그 후손들에선 무려 15명의 정승이 나왔다. 장동 김씨 가운데 정승을 지낸 사람은 김상용과 그 후손인 김이교, 김상헌과 그 후손인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 김이소, 김달순, 김좌근, 김홍근, 김흥근, 김병시, 김병덕, 김병국, 김병학이었다. 이것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한 집안에서 낸 최다 정승이다. 그리고 김조순 이후로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장동 김씨들은 60년가량 조선의 조정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장동은 서인노론에겐 본거지, 반대파인 남인에겐 서인과 노론의 소굴로 알려져 있었다.

흔히 현재의 서촌이라는 지명이 2000년대 이후에 처음 사용됐으며, 과거의 서촌은 서울 중구 정동이나 서소문 일대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현재의 서촌을 조선 시대에 서울의 서쪽으로 인식한 사례는 많으며, 일제 시대 기록에는 '서촌'이라고 적은 경우도 있다. 또 조선 시대에 정동과 서소문 일대를 서촌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기록은 대한제국 시대와 일제 시대에 두세 차례 나타날 뿐이다. 서촌뿐 아니라 북촌이나 남촌이라는 표현도 조선 시대 문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표현들은 1900년대 전후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정동서소문 일대를 서촌으로 불렀다는 기록은 조선 시대 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 11월27일 <독립신문> 기사와 일제 시대인 1924년 김기전이 <개벽>에 쓴 '예로 보고 지금으로 본 서울 중심 세력의 유동'이란 글에 나올 뿐이다. 서소문과 정동 일대에 서인이 주로 살았다는 주장도 붕당 분열의 시작이었던 서인 심의겸이 정동에 살았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다.

1924년 김기전이 <개벽>에 쓴 글 '예로 보고 지금으로 본 서울 중심 세력의 유동'이나 1928년 황학정의 5대 사두인 성문영(成文永)이 지은 '황학정기'를 보면, 당시에도 현재의 서촌 지역을 '서촌'으로 인식하거나 기록한 사례가 있었다.

역사[편집]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 담긴 장동(壯洞)이 현재 서촌의 북부인 자하동과 청풍계, 백운동(현재의 청운동)에서 중부인 수성동, 남부인 필운대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 시대부터 이 일대는 하나의 지역으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편집]

조선 시대 서촌의 지명으로는 조선 시대에 '장의동'과 '장동'이 널리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만 '장의동'과 '장동'이 53차례 나온다.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서울 지도에도 '장의동'과 '장동'이 나온다. 애초 장의동과 장동은 현재의 서촌 북부인 효자동궁정동, 청운동 일대를 이르는 지명이었으나, <장동팔경첩>에서 보듯 서촌 전체를 일컫는 지명으로도 흔히 사용됐다. 서촌의 가장 남쪽인 적선동에 있던, 추사 김정희가 살던 '월성위궁'도 '장동에 있다'고 표현됐다.

조선 시대엔 경복궁 바로 옆이란 점 때문에 왕족들이 많이 살았다. 초기엔 태종 이방원, 무안대군, 세종, 효령대군, 안평대군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주로 세자가 아니었던 왕자들이었다. 조선 중기엔 광해군이 이 지역에 인경궁과 자수궁 등 2개의 궁궐을 짓기도 했다. 인경궁은 금천교 시장을 중심으로 서촌 남쪽에, 자수궁은 현재의 군인아파트를 중심으로 서촌 중북부에 지어졌다. 그러나 두 궁궐은 광해군의 몰락으로 버려졌다. 인경궁은 궁궐의 들머리에 있던 금천교 외엔 자취가 사라졌고, 자수궁은 후궁과 여승들의 거처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엔 영조가 서촌 남쪽의 창의궁에서 자랐는데, 이 곳은 금천교 바로 앞이어서 인경궁과 관련됐을 수도 있다.

대한제국과 일제 시대[편집]

대한제국과 일제 시대엔 서촌과 북촌, 세종로 일대를 이르는 지명으로 '웃대'(상촌)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웃대는 청계천 상류 전체를 뜻하는 지명으로 현재의 서촌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다. 웃대엔 세종대로의 양쪽 뒷길 일대와 북촌삼청동천 일대, 서촌의 백운동천 일대가 모두 포함됐다.

해방 이후[편집]

해방 이후엔 일제가 장의동, 장동 지역에 붙인 지명인 효자동이 서촌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도 서촌의 행정동은 북부와 중부의 청운효자동과 남부의 사직동 등 2개다. 법정동은 15개다.

2000년대 이후[편집]

2000년대 들어서는 먼저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된 북촌에 대응해 '서촌'(西村)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서촌'이란 이름은 2007년 김한배의 논문 '서울 서촌 역사문화탐방로 조성방안 연구'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서촌주거공간연구회 등 주민단체가 생기고 이 지역 가게들이 '서촌'을 자신들의 상호에 널리 사용하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2013년 서울시 종로구 지명위원회가 '서촌'이란 자연발생적 지명 대신 '세종마을'이란 지명을 새로 만들어 보급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세종마을은 세종이 태어난 준수방(俊秀坊)과 자란 장의동이 모두 서촌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세종의 잠저(사저)는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잠저이기도 하기 때문에 세종마을이 아니라 '태종마을'로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준수방은 현재의 통인동, 장의동은 현재의 효자동궁정동, 청운동 일대다.

주요 시설[편집]

대한민국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이 있다. 청와대의 연무관과 영빈관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서울청사의 창성동별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