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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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숙정문
(서울 肅靖門)
대한민국사적
Sukjeongmun.jpg
지정번호 사적 제10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제작시기 조선 초기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북쪽의 대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三淸洞)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다.

한양도성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이름 유래[편집]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1]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편집]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2]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3]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4],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5]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6],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7]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8],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진[편집]

각주[편집]

내용주
  1. 《태조실록》에는 홍화문은 속칭 동소문(東小門), 흥인문은 속칭 동대문(東大門),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南大門), 소덕문은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
참조주
  1. 김효진 (2004년 6월 19일). “한양도성 창의문~혜화문”. outdoor. 2014년 12월 1일에 확인함. 
  2. 《태조실록》 10권 5년 9월 24일,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각 문의 이름. 국사편찬위원회, 위키문헌
  3. 《태종실록》 25권 13년 6월 19일, 서전문(西箭門)을 열다. 국사편찬위원회
  4. 《연산군일기》 54권 10년 7월 ​25일, 숙청문을 막고 새 문을 만들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5. 김도형 (2010). 《순성의 즐거움》. 경기: 효형출판. 165쪽. ISBN 9788958720966. 
  6. 반병희 (1993년 9월 2일). “자하문 26년만에 일반공개”. 《동아일보》. 2015년 11월 22일에 확인함. 
  7. 윤중식 (2006년 3월 19일). “’서울이 품 안 가득’ 미리 가 본 북악산 홍련사∼창의문”. 《쿠키뉴스》. 2015년 11월 22일에 확인함. 
  8. “삼청지구성곽·숙정문복원”. 《동아일보》. 1976년 10월 21일. 2015년 11월 22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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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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