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명동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로고.jpg

종파 로마 가톨릭교회
위치 국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소속 관구 서울관구
소속 교구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설립일 1898년 5월 29일
서울 명동성당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종목사적 제258호
(1977년 11월 22일 지정)
면적1,668m2
시대대한제국
소유(재)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
위치
서울 중구 명동 (대한민국)
서울 중구 명동
주소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1-8번지
좌표북위 37° 33′ 51″ 동경 126° 59′ 14.3″ / 북위 37.56417° 동경 126.987306°  / 37.56417; 126.987306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통칭 명동성당(明洞聖堂, 영어: Myeongdong Cathedral)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대성당이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고딕 양식 천주교 성당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사제가 상주하며 사목하는 성당)이다. 1977년 11월 2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명동성당은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의 주교좌가 있는 서울대교구의 중심성당으로, 현재 교구장은 2012년 서울대교구의 교구장대주교에 착좌한 염수정 추기경(안드레아)이며, 본당 주임 신부는 조학문(바오로) 신부이다. 주보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다. 주변에 서울대교구청, 가톨릭 회관, 성 바오로 서원, 다양한 문화시설 등이 있다.

2009년 외벽 벽돌 보수공사가 이뤄졌다. 2011년 이후부터 언덕 남쪽에 별관을 짓는 개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역사[편집]

조선 천주교의 시작[편집]

조선인 최초로 북경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 1784년 봄에 귀국하여 서울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통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를[1] 결성하였다.[2] 이승훈, 정약용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3][4] 그러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명례방 사건'이 발생하여 김범우가 유배된후 1787년에 사망하면서[5]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뿌린 씨앗은 밀알이 되어 김범우가 사망한지 100년이 흐른 1887년에 김범우의 집이 있던 일대의 대지를 매입 완료한후 명동성당 건립을 위한 첫삽을 뜨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6][7][8][9][10][11][12][13][14]

대지매입과 정지작업[편집]

1882년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전교회장 명의로 대지매입 작업을 시작하였다.[15][16] 매입과 건축에 따른 재정지원은 파리선교회가 하였다.[15] 현재의 명동성당 자리는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저택이 있었는데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 블랑 주교는 이 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고종 24)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3]

소유권 분쟁과 금교령[편집]

조선 왕실은 천주교 측에 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구하지만 천주교 측은 공사를 강행했다.[17] 성당의 건설은 조선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88년 4월 조선 정부는 금교령을 발표하며 천주교를 탄압했는데 이 원인이 명동성당 건립 때문이었다. 당시 고종은 왕궁보다 더 높은 자리에 훨씬 높은 건물이 올라 가는 것에 분개했다.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가까워 성당 건립으로 영희전의 풍수(風水)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소유권을 억류하여 공사를 지연시켰다.[18] 특히 이 저택과 부지는 평소 청백리로 소문났던 침계 윤정현을 위해 고종이 직접 하사한 집[19]이었기에 고종의 분노는 더 컸다. 고종은 천주교 측에 당장 건축의 중단을 요구했지만 천주교 측은 고종의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고종은 금교령을 발표해 천주교 및 개신교의 전도 활동을 막았다.[20] 4월 28일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식이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3국 공사에게 기독교 전교를 금하라는 조회문을 통보한 것이다. 명동성당 건설로 인한 조선 정부의 금교령 발표로 천주교 뿐만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들까지 선교활동에 발목이 묶이기도 했다.[21] 이 때문에 한동안 성당 건설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성당 건축과 완공[편집]

소유권 분쟁이 해결된후 저택을 허문 뒤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22]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3]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유진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사망한 뒤 프와넬 신부가 남은 공사를 마무리했다. 1898년 5월 29일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3] 이 당시의 이름은 종현성당(鐘峴聖堂)이었다. 종현은 명동 성당이 세워진 장소를 말한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군 양호가 이곳(당시 북달재, 북고개)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는 종을 가져다 달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23]

1909년 12월 22일에는 독립운동가 이재명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 미사에 참석하고 나오던 이완용을 명동성당 앞에서 칼로 3차례 찔러 암살을 시도했으나 의거에 실패했다. 이재명은 당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성당 앞문에서 대기하다가 나오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3번 찔렀는데, 이완용은 이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고 인럭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했다. 이완용은 피습 직후 대한의원에서 당시 조선 기준 최고의 외과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회복되었으며, 이재명은 체포되어 이듬 해 9월 15일 교수형을 언도받고 처형됐다.

1924년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수입되어 처음으로 성당 내에 설치되었다. 다만 이 당시의 파이프오르간은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24]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이름을 명동성당으로 바꾸었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수배자나 시위대가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어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25] 1987년 6.10 항쟁 당시 시위대들이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 내부로 피신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들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라는 말로 경찰들의 성당 진입을 막았다.[26]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할 당시에는 교황장으로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조문 인파로 긴 행렬을 보였다.[27][28]

그 외 정보[편집]

역대 주임신부[편집]

  1. 마리장구스타브 블랑 (1882~1890)
  2. Doucet (1890~1892)
  3. 빅토르루이 푸아넬 (1892~1926)
  4. Marie Pierre Paul Villemot (1926~1942)
  5. 이기준 토마스 (1942~1950)
  6. 장금구 요한 크리소스토모 (1950~1957)
  7. 양기섭 베드로 (1957~1962)
  8. 이종순 라우렌시오 (1962~1963)
  9. 신인식 바오로 (1963~1964)
  10. 황민성 베드로 (1964~1965)
  11. 이계중 요한 (1965~1968)
  12. 이문근 요한 (1968~1971)
  13. 최석우 안드레아 (1971~1972)
  14. 김몽은 요한 (1972~1978)
  15. 경갑룡 요셉 (1978~1982)
  16. 김수창 야고보 (1982~1986)
  17. 김병도 프란치스코 (1986~1988)
  18. 정의채 바오로 (1988년~1988)
  19. 조순창 가시미로 (1988~1994)
  20. 장덕필 니콜라오 (1994~1999)
  21. 백남용 바오로 (1999~2003)
  22. 이성만 토마스 (2003~2004)
  23. 박신언 라파엘 (2004~2010)
  24. 여형구 미카엘 (2010~2013)
  25. 고찬근 루카 (2013~2018)
  26. 조학문 바오로 (2018~ )

사제단[편집]

사제[편집]

사제(세례명) 직위 담당 축일 사제서품
조학문(바오로) 주임 총괄 6월 29일 1981.02.24
이길재(베드로) 수석부주임 6월 29일 2006.07.07
심승우(마르티노) 부주임 청년ㆍ문화예술 4월 13일 2012.02.10
파비아노 레베쟈니(파비아노) 영어미사ㆍ외국인을 위한 고해성사 1월 20일 2021.02.05
조인기(암브로시오) 선교ㆍ교육 12월 7일 2016.02.05
김주신(멜키올) 전례ㆍ성음악분과 1월 6일 2018.02.01
김영우(스테파노) 장애인신앙교육 12월 26일 2020.02.07

수도자

  • 권처화(아가다 쟌) - 원장수녀님, 김연숙(오틸리아), 서윤하(엘리사벳 씨튼), 이주희(릿다)

미사 시간[편집]

주일 미사[편집]

미사장소 주일 미사시간
대성당(오전) 07:00 09:00 10:00 11:00 12:00
대성당(오후) 16:00 17:00 18:00 19:00(청년) 21:00
소성당 09:00(중고등부) 11:00(초등부/솔봉이)
특전미사 18:00 19:00 - - -
영어미사(English Mass) 09:00

사진[편집]

각주[편집]

  1. [네이버 지식백과] 명례방공동체 [明禮坊共同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신자들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자, 모임 장소를 수표교에서 멀지 않은 장악원(掌樂院) 앞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행정구역상 명례방에 속했기 때문에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공동체를 오늘날 연구자들이 ‘명례방공동체(明禮坊共同體)’라고 부른다.
  2. [명동대성당 홈페이지] 민족사 100년의 명동대성당 01....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된 한국 천주교회 모든 신자들의 의식 한 가운데 ‘서울의 신앙공동체’, 특히 이벽과 이승훈에 의해 시작된 ‘명례방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고, 이 공동체가 탄생한 지역에 조선대목구 주교좌본당이 설정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을 다시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례방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의 까따꼼바이고, ‘명동본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바티칸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3. [명동대성당 홈페이지] 명동대성당의 역사
  4.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8
  5.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9
  6. [네이버 지식백과] 김범우의 집이 훗날의 명동성당으로…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7. <종교신문> 2004년 1월 2일자
  8.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8
  9. [네이버 지식백과] 명동성당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한미자,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본래 이 성당이 선 자리는 교회당 창설 때 교회당으로 삼았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서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매수하였었다.
  10.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명동성당 [─明洞聖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명동성당이 자리잡은 대지는 종현(鐘峴)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일찍이 1784년(정조 8)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명동 부근) 소재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모여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곳이기도 하다.
  11. [다음백과] 명동성당 (明洞聖堂).....명동성당 자리는 1784년(정조 8)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으로 이승훈(李承熏),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모여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곳이기도 하다.
  1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적포털] 서울 명동성당 (서울 明洞聖堂).....본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블랑주교가 김 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다.
  13. [Good News 카톨릭사전] 종현성당.....이곳의 신앙 공동체는 1784년 이벽의 집에서 세례식이 있은 다음해, 김범우의 집에서 이승훈 정약전과 함께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
  14. [Godd News 카톨릭사전] 명동본당.....이곳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그보다 104년 전인 1784년의 일이다. 그 해 가을부터 수표교(手標橋)의 이벽(李檗)의 집에서 영세식이 있었고, 다음 해에는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부근) 소재 중국어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 대청마루에 모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에 교회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15.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적포털] 서울 명동성당 (서울 明洞聖堂)
  16. [Good News 카톨릭사전] 종현성당.....블랑 주교가 전교 회장 김 가밀로의 명의로 이곳을 매입하였다.
  17. 《답사여행의 길잡이 15》(서울, 초판 2004, 5쇄 2009, 돌베개)
  18.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명동성당 [─明洞聖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 “명동성당 재개발 현장에 고종 하사 옛 집터” (MBN). 2011년 12월9일에 확인함. 
  20.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8) 알렌 외교관인가 선교사인가” (국민일보). 2014년 6월6일에 확인함. 
  21. 손윤탁《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 역사》
  22. 임덕순 <읽고 떠나는 국토순례> 집문당 1994년 p109
  23. [Good News 카톨릭사전] 종현성당
  24. “보관된 사본”. 2017년 1월 3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1월 19일에 확인함. 
  25. http://news.donga.com/3/all/20120621/47199877/1
  26.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177331
  2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528659
  28.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071316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