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1756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승훈(李承薰, 1756년 ~ 1801년 4월 8일)은 조선 말기의 천주교 순교자이다. 이승훈의 교명은 베드로[1]이며 본관은 평창(平昌)이다. 이승훈은 조선 최초로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생애[편집]

천주교와의 만남[편집]

자(子)를 자술(子述), 호를 만천(蔓川)이라 하였고 본관은 평창(平昌)이다. 그는 1756년(영조32) 서울의 남인 학자의 가문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20세 전후에 고명한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780년(정조 4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3] 당시 남인 학자들 사이에는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이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그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는 뚜렷한 움직임이 있었다.

세례[편집]

1783년(정조 7년) 황인점(黃仁點)을 정사(正使)로 하는 사절단이 구성될 때, 그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그도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4] 그가 떠나기 전, 천주학을 연구하던 친밀한 친구 이벽이 그를 찾아와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올 것과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구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5] 세계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민족적 자진 귀의의 특사로서 이승훈은 이해 11월 8일(음력 10월 14일) 한양을 떠나 1784년 1월 13일(1783년 음력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6] 40여 일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즉, 천주교회성공회에서 주교가 목회하는 교회를 뜻하는 주교좌(主敎座)성당인 남천주당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후, 1784년 음력 1월 이승훈은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이승훈은 성서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왔다.

천주교회를 세우다[편집]

마침내 1785년(정조 9년) 봄 명례동(明禮洞 :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처음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세웠다. 이벽·이가환정약용·정약종·정약전 3형제와 함께 주일 미사강론을 행하면서 성서한글로 번역하여 천주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정약전·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다.(1786년, 가성직제도)[7][8] 그는 1790년 음력 10월에 음서로 비로소 관직에 나가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고[9] 1791년(정조 15년, 신해년) 2월 서부도사를 거쳐[10] 이 해 6월에 평택현감이 되기도 하였으나, [11] 마침내 천주교의 전국적 전파를 막으려는 조정의 탄압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나 관직이 박탈되었다.(음력 11월)[12] 1795년 주문모 신부 입국 사건으로 충남 예산군에 유배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 1868년 그의 뒤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순교하고, 1871년 증손까지 순교하여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13]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 이태석(李泰錫)
    • 할아버지 : 이광부(李光傅)
      • 아버지 : 이동욱(李東旭)
      • 어머니 : 여주 이씨(驪州 李氏) - 이가환의 누이
        • 동생 : 이치훈(李致薰)
        • 부인 : 나주 정씨(羅州 丁氏) - 정약전, 정약전, 정약용의 누이
          • 장남 : 이
          • 차남 : 이
          • 삼남 : 이신규(李身逵)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프랑스인 클로드샤를 달레가 저술한 《조선 교회사》에서는 ‘Pierre Seng-houn-i’로 표기하고 있다. 클로드샤를 달레 (1874).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Volume 1》. 234쪽. 
  2. 《평창이씨세보(平昌李氏世譜)》
  3.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43행 참조.
  4. 정조실록 1805 33권, 정조 15년 11월 3일 갑술 2번째기사 " 그 아버지의 사행(使行)에 따라가 수백 권의 사서(邪書)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그르친 자가 있으니, 바로 평택 현감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
  5. 샤를르 달레 (1874) 247~48쪽 "Son fils Seng-houn-i, l'un des amis intimes de Piek-i, devait l'accompagner dans ce voyage."
  6. 정조실록 1805 17권, 정조 8년 2월 17일 계유 4번째기사
  7. 〈권일신〉. 《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 2016년 2월 8일에 확인함. 그 뒤 권일신과 이승훈 등은 1786년부터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성직제도를 만들어 운영하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이승훈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권일신·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이 사제로서 각 지역에서 성사를 집전했다. 
  8. 이덕일 (2009) 441쪽.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權日身, 정약전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는데, 이를 정식 신부가 맡은 체제가 아니라는 뜻의 가성직 체제라고 한다."
  9. 승정원일기》, 정조14년 庚戌 10월 2일조.
  10. 승정원일기》, 정조15년 辛亥 2월 9일조.
  11. 승정원일기》, 정조15년 辛亥 6월 24일조.
  12. 정조실록 1805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
  1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이승훈

참고 문헌[편집]

바깥 고리[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