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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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중국어 간체자: 周文谟, 정체자: 周文謨, 병음: Zhōu Wénmó 저우원모[*], 1752년 ~ 1801년 5월 31일)사제는 조선에서 순교한 중국인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다.[1] 세례명은 야고보, 포르투갈어 이름은 벨로조(Vellozo)이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서 6년간 활동했다.

생애[편집]

출생과 신학수업[편집]

1752년 청나라 장쑤 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쿤산 현(崑山縣)에서 태어났다.[2] 어려서 7세에 어머니를 잃고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고모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과거를 보았으나 계속 낙방하자 20살 때 결혼하였다.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다가 늦은 나이에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3]

조선 입국[편집]

당시 조선 천주교회중국 교구에 속하였으며, 1784년청나라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과 김범우 등은 임의로 교계제도를 제정하여 천주교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교리 문답을 하던 도중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천주교 교회법에 합치하는지 의문이 생겼고, 윤유일(尹有一)을 보내 천주교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하였다.(1789년) 구베아 주교는 가성직제도로 교회법을 어긴 사실에 대해서는 책망했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은 칭찬했으며, 조선에 천주교 신부를 보내 주기로 하는 한편, 그는 조선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1790년) 금지령에 따라, 천주교 신도인 윤지충권상연이 조상의 신주(神主)를 불사르자,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회를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가치관에 반대하는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하였다.(신해박해, 1791년) 북경 교구는 청나라 사람 오 신부를 보냈으나(1793년) 신해박해의 여파로 조선 입국에 실패한 후 병사하였다. 재차, 구베아 주교는 외모나 분위기가 조선 사람과 매우 닮은 주문모를 보내기로 하였다.

주교의 명에 따라 1794년(정조 18년) 봄에 북경을 떠난 주문모는 그해 음력 12월 3일(양력 12월 24일)[4] 조선인 신자 지황(池璜)·윤유일(尹有一) 등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한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서 왔기 때문에 북경에서 국경까지 10개월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 뒤 주문모는 12일 만에 서울에 잠입하였고, 북촌 계동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미사를 집전하였다. 국경을 넘은 지 6개월 만에 도착했다는 주장도 있다.[2]

전교[편집]

1795년 6월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세례성사를 주고 전교하였다. 그러다가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이 밀고하는 바람에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으며(음력 5월 11일(양력 6월 27일),), 그의 얼굴을 그린 벽보가 나붙기도 했다. 역관 최인길의 도움을 받아서 도피하였으며, 여성 교우 강완숙이 용감하게도 자신의 을 은신처로 제공하여 피신하였으며, 주문모 신부 대신 검거된 역관 지황과 윤유일은 붙잡혀서 순교했다.(을묘박해)

주 신부는 강완숙에게 세례를 주고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강완숙은 자신을 모시는 여종을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을 천주교로 인도했으며, 양반신분을 활용하여 은언군의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하였다. 주 신부는 교리 연구회인 명도회(明道會)를 만들어 정약종을 회장에 임명하고, 황사영을 비롯한 홍필주, 현계흠, 홍익만 등을 명도회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교리 연구와 전도에 힘쓰게 하였다.[1]

송씨와 신씨도 명도회(明道會)에 가입하고, 자신의 들까지 모두 입교하게 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의를 가졌는데, 이는 각각 남편이자 시아버지인 은언군강화도에 귀양가는 불행으로 마음을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에 집중했는지는 정순왕후가 송씨와 신씨에게 독약을 내려 함께 죽게 하라는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시어미와 며느리가 둘다 사학에 빠져서 외인의 흉추(凶醜,주문모 신부)와 왕래하여 서로 만나고 나라의 금지함이 지엄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는 《순조실록》1년 3월 16일조와 천주교 순교자 이기양의 《추안》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5]

주 신부는 서울에서 강완숙의 전도 등으로 목회에 자신이 생기자 지방으로도 발길을 옮겼다.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죽은 윤유일의 가족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경기도 여주, 충청도 온양, 공주, 남포, 내포, 전라도 전주에서 전교하여 5년 만에 신자 수가 4천여 명에서 1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교회 성장에 대해 황사영은 '백서'에서 조선 천주교회에서 강완숙만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하여 강완숙의 도움이 컸음을 말하고 있다.

순교[편집]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니,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정순왕후의 《사학엄금교서》 발표[6]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도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소재지를 알리지 않는 강완숙(골룸바)의 보호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고향인 청나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로 갔으나 사태가 매우 좋지 않음을 알게 되자 1801년 음력 3월 12일(양력 4월 24일) 한양으로 돌아와 의금부에 '내가 당신들이 찾는 천주교 신부'라며 자수하였다. 그해 음력 4월 19일(양력 5월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살아 있어서 도움이 안 되니 죽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우려하여 추방령으로 감형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사형으로 형이 확정되었다.[7] 새남터에서 참형으로 순교한 주문모 신부의 유해는 신도들이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8]

시복[편집]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영향[편집]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조선 입국전까지 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평신도들이 목회한 조선 천주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교리서와 신앙 안내서라고 생각하여《사순절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라는 고해성사 지침서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문서선교는 천주교회의 세력 확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

각주[편집]

  1. 김은신 1995, 244~246쪽.
  2. 〈주문모〉. 《엔싸이버 백과사전》. 2008년 9월 24일에 확인함. 
  3. 이덕일 (2003) "주문모는...할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스무살에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상처하고 혼자 살아왔다. 북경교구 신학교의 첫번째 졸업생이기도 한 그는 ..."
  4.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엔싸이버 백과사전에서는 (양력) 12월 23일로 나와 있고, 《이것이 한국 최초》에서는 (음력) 12월 3일로 나와 있다.
  5. 이덕일 (2003), 362쪽.
  6. 순조실록 (1838) 2권, 순조 1년 1월 10일 정해 1번째기사
  7. 이덕일 (2003), 360쪽.
  8. 《소년》2009년 8월호,가톨릭 출판사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