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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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월 사진 | |
종목 | 사적 제121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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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5,973.6m2 |
시대 | 조선 태조 4년 (1395년) |
소유 | 국유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
좌표 | 북위 37° 34′ 32″ 동경 126° 58′ 04″ / 북위 37.575556° 동경 126.967778° 좌표: 북위 37° 34′ 32″ 동경 126° 58′ 04″ / 북위 37.575556° 동경 126.967778° |
정보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
사직단(社稷壇)은 조선 시대, 국가에서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21호, 서울사직단으로 지정되었다가,[1] 2011년 7월 28일 사직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
설명[편집]
사직단은 두 겹의 담장 안에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의 사방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단(社壇)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배치했으며, 단의 형태는 '하늘을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의해 네모난 방형(方形)으로 만들었다. 단의 둘레에는 3층의 돌계단을 사방으로 둘렀으며, 단 위에는 각 방위에 따라 황색, 청색, 백색, 적색, 흑색 등 다섯 가지 빛깔의 흙을 덮었다.
처음 조성 시 단 주변에 동ㆍ서ㆍ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신실 등은 모두 소실되었다. 선조 말년에서야 수복되고 역대에 걸쳐 수리가 계속되었다. 신문(神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있다.
일제(日帝)가 시민 공원으로 삼으면서 제단 원형이 훼손되었고, 대한민국 수립 이후 도시 계획 등을 거치면서 면적이 축소되었다. 특히 종로구와 서대문구를 잇는 사직터널과 사직로가 개통되며 사직문이 이전되었다. 이후 사직공원은 사직동과 효자동 등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또 부지 측면에는 서울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종로도서관(구 경성도서관), 한국 최초의 어린이도서관인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등이 들어서며 50여년 간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1980년대 말에 사직단 정비 사업이 추진되어 조선시대 제단과 그 주변이 일부 복원되었다.
문화재 보호시설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직접 출입이나 왕래는 할 수 없고 대신 사직단 홍살문이나 돌담 너머를 통해서 제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설 관리[편집]
사직단의 관리는 종전 서울특별시 종로구청에서 담당하였으나, 종묘와 사직은 조선왕조의 존립 기반인 상징적 시설물인 점을 감안하여 2012년 1월 1일부터 문화재청장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3] 2010년대 들어 문화재청은 사직단 복원 계획을 세우고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을 허물고 조선시대 사직단 부지 전체를 다시 확보하려 했으나, 주민들과 뜻있는 시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사직 시민공원은 폐쇄됐고, 현재 조선시대 제단과 부속물들을 만드는 공사 및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사진[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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