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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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역사

서울특별시대한민국의 수도이며, 과거 백제, 조선의 수도였다. 서울은 시대에 따라 위례성(慰禮城), 한산(漢山), 한성(漢城), 한양(漢陽), 양주(楊州), 남경(南京), 경성(京城)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수도를 가리키던 '서라벌'이 '셔ᄫᅳᆯ'(예. 용비어천가)을 거쳐 '서울'로 변형된 말로 추정되며, 1945년 광복과 함께 경성부서울시로 개칭되었다.

고대[편집]

서울은 삼한의 중심이었던 마한 세력이 터를 잡고 부족국가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기원전 18년 부여계의 일파인 백제온조왕고구려의 왕위 계승에서 밀리자 한강 유역으로 남하해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웠다. 위례성은 당시 한성(漢城)으로도 불렸는데, 하남위례성은 한강남한산 사이의 현 서울 송파구, 강동구 일대에 위치했다. 위례성475년 고구려장수왕이 점령할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면서, 국력이 왕성한 나라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475년 백제 한성(漢城)을 점령한 고구려의 장수왕은 한성을 한산군(漢山郡)으로 개칭하고,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였다.

551년 백제가 다시 점령하였으나, 553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일대를 빼앗았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557년(진흥왕 18년) 신주를 북한산주(北漢山州)로 개칭하였는데, 이후에는 전세(戰勢)에 따라 치소(治所)가 이동하면서 한강 유역에서는 북한산주와 남천주(南川州, 이천시)의 폐치분합(廢置分合)이 반복되다가, 664년(문무왕 4년)에야 비로소 한산주(남한산주)로 정리되었다.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바꾸면서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북한산군(현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을 한양군(漢陽郡)으로 개칭하였다.

유적[편집]

고려[편집]

고려에는 918년 고려 태조양주(楊州)로 이름이 바뀌었고, 983년(고려 성종 2년), 처음으로 십이목(十二牧)을 두었는데 이때, 양주에 양주목(楊州牧)[1]을 두었다. 1067년 고려 문종 때에는 양주목에 소속시켰던 것을 3소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남경의 경계는 동쪽이 대봉(大峰), 서쪽이 기봉(岐峰), 북쪽이 면악(面嶽), 남쪽이 사리(沙里)까지로, 남경 승격으로 인하여 서울은 더욱 지방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에 궁궐이 처음으로 창건되었고, 인근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생활하게 함으로써 큰 도시로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숙종 때에는 현재의 경복궁 부근에 남경 행궁을 짓는 등 건설사업이 추진되었다. 1231년 이래 몽골이 침입하던 때에는 몽골군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1308년 충렬왕 때 원나라의 간섭으로 3경제도가 없어지자, 남경은 지방단위의 하나인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1356년에 다시 3경 제도를 부활시켜 남경으로 승격하여 궁궐을 중수하였다. 1362년에는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자는 정책인 한양천도론은 우왕 때에 고조되어, 마침내 1382년 9월에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2월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어 천도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였다. 그 후 우왕 때 천도 논의가 있었으나 기각되었고, 공양왕 때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또 6개월 만에 개경으로 돌아갔다.[2]

남경의 위치와 영역[편집]

남경의 영역은 동쪽을 대봉(大峰), 서쪽을 기봉(岐峰), 북쪽을 면악(面嶽), 남쪽을 사리(沙里)로 삼았다. 이 가운데 면악(面嶽)은 북악산을 가리킴이 명확하다.[3] 사리(沙里)는 ‘모래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용산 일대의 한강 백사장으로 생각되기도 하나, 면악에서의 시야 한계를 고려하면 황토현(黃土峴) 앞으로 추정된다.[4] 대봉(大峰)은 창덕궁 뒤 응봉(應峰)에서부터 송현(松峴)까지의 산줄기, 기봉(岐峰)은 인왕산으로 추정된다.[5]

남경 행궁의 영역이 좁아 그 남쪽을 경복궁 영역으로 삼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는데[6], 이를 고려하면 남경 행궁은 향원지(香遠池) 서쪽 언덕 부근으로 추정된다.[7] 남경 행궁에는 연흥전(延興殿), 천수전(天壽殿), 북녕문(北寧門), 남명문(南明門) 등의 건물이 있었다.[5]

남경 천도 논쟁[편집]

최초로 남경을 세운 것은 고려 문종 21년(1067년)이다.[8] 문종 22년(1068년)에는 남경에 궁궐을 지었다.[9] 숙종 6년(1101년) 9월에는 남경 개창도감이 설치되었으며[10], 3년 뒤 숙종 9년(1104년) 5월에는 남경의 이궁이 완성되었다.[11] 신도시라 할 수 있는 남경에는 거란 사람들도 귀순하여 살았다.[12]

일관(日官)인 최사추 등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으며, 이는 남경 건설에 영향을 미쳤다.

‘저희들이 노원역(盧原驛), 해촌(海村), 용산(龍山) 등지에 가서 산수(山水)를 살펴본즉 도읍을 정하기에 합당하지 않고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 남쪽의 산수 형세가 옛 문헌의 기록에 부합되오니 청컨대 삼각산 주룡의 중심 지점인 남향관에 그 지형대로 도읍을 건설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중략)

‘남경을 새로 건설하는 데는 반드시 땅을 넓게 차지하고 백성들의 농토를 많이 빼앗아야 될 것이오니 청컨대 경위령(京緯令)의 말한 바에 근거하여 산에 의거하여 형세를 취하기도 하고 물로 지형을 표하기도 하되 우선 안으로 산수 형세를 따라 동으로는 대봉(大峯)까지, 남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로는 기봉(岐峯)까지, 북으로는 면악(面嶽)까지를 경계로 삼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 《고려사》 , 세가 제11 숙종 7년(1102년) 3월의 기사

이러한 천도의 논리를 제공한 것은 김위제라는 일관으로 보인다. 김위제는 도선의 비기·답산가, 그리고 저자가 불명확한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개성의 지덕이 그의 시기에 쇠하였음을 이야기하였다[13]. “건국한 후 1백 60여 년에 목멱벌에 도읍한다”고 하며, 그 근거로는 앞선 도참서들 말고도 오행설, 즉 존재자들에게 부여되는 속성들의 상응 체계 역시 그 뒷부분에서 인용되었다. 비기의 내용으로 인용된 문장에는 “11, 12, 1, 2월을 중경에서 지내고 3, 4, 5, 6월을 남경에서 지내며 7, 8, 9, 10월을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가 포함되어 있고, 이는 묘청의 난과 같은 고려조의 여러 사건들에서 여러 차례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공민왕1356년 이후 남경 천도 작업을 진행하고 이 과정을 주도하였다.

1357년 1월 임진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 진전에 참배하고 한양(漢陽)에 천도할 데 대하여 점을 쳤더니 왕의 손에 '정(靜)'자가 잡혔다. 다시 이제현에게 명령하여 점을 치라 하였더니 '동(動)'자를 얻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대가 몸을 깨끗이 하고 제사하여서 길한 점괘를 얻었으니 참으로 나의 마음이 흡족하다.”
 
— 《고려사》39권 세가 39권

라고 하여 국왕의 천도 의지가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그 실행이 힘들었던 것 같다. 명확한 중단 기사는 없으나 공민왕 즉위 10년을 넘기면서 적극적인 천도 진행 기사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된다. 또한 윤택 등의 유학자들이 공민왕을 제지했다는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14]

이러한 천도 논의는 우왕, 공양왕 또한 진행했었으나 공민왕대와 동일한 이유로 인해 모두 기각되었다.[15] 공양왕은 1390년 9월 남경으로 천도하기는 하였으나[16], 1391년 2월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는 일이 있었다.[17]

한성부[편집]

1894년 한성의 시가지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한양부(漢陽府)로 수도를 천도해서 1395년 이름을 한성부(漢城府)로 바꿨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394년 - 1398년과 1400년 - 현재까지 두 시기로 한양의 수도시기를 나눠 볼 수 있다. 1394년부터 4년 동안 수도였다가 1400년부터 다시 수도가 된 것인데 맨 처음 한양이 수도로 정해진 때까지 합치면 610년이 넘고, 태종 즉위부터 따지면 600년 가량 된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조선 태조는 풍수 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였다. 이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현재의 종로구, 중구보다 좁은 지역이다. 도성으로부터 약 10리 이내의 외곽지역도 한성부 관할의 성저십리로 편입되었고, 해당 지역에서의 매장, 벌채 등을 금지하였다. 이어 조선 태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도시가 확장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시는 많이 파괴되었다가 19세기에 많이 복구되었다. 19세기 말, 각종 근대 문물이 들어왔고,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다.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명 정도였다.

경성부[편집]

1900년대의 서울

일제 강점기에는 1910년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고 경기도의 하부 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1910년한일 합방과 함께, 같은 해 9월 30일에 시행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18] 경성부라는 이름은 수도가 있는 서울이라는 성곽을 가리킨 뜻이지만, 그 의미의 약화를 위해서 대개 일본식 발음인 ‘게이조’ 발음으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성부의 영역은 사대문안과 서대문구 일부, 용산, 숭인동, 창신동 일대로 축소되고 나머지 경성부의 8개면은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1936년에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주변 지역을 병합하여 4배로 확장되었고, 1943년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가 설치되었다. 이때 7구(종로구, 중구, 용산구, 성동구, 영등포구, 동대문구, 서대문구)가 설치되고, 1944년에 주변의 일부 지역을 병합해 마포구를 추가로 설치하였다.

서울특별시[편집]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서울은 한때 미군정 관할하에 있기도 하였으나, 그 해 10월 행정의 책임자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 1946년 8월 15일을 기해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쳤고, 9월 28일 경기도에서 독립하여 서울자유특별시가 되면서 행정상의 직능과 권한이 도단위와 같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종래에 써 오던 가로명과 동명의 일본식 명칭을 없애고, 선조들의 아호와 고유명칭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서울의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였고, 주변 지역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개칭되었다.[2]

휴전(休戰) 후 전국 곳곳에 피난갔던 시민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은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착수하였고, 시민들의 생활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서울은 계속 발전하여 1960년 말에는 244만 5천 명의 인구가 생활하고 있는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경 이후부터 도심지에는 많은 회사와 금융기관이 집중하게 되면서 사무실이 부족하게 되고, 지가(地價)가 급속하게 상승되면서 도심지의 토지이용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1960년경부터 소공동(小公洞)·명동(明洞)·서소문·퇴계로·충무로 1가·회현동 등지에는 10∼20층 내외의 고층건물이 들어서서 도심지의 스카이 라인(skyline)은 높아져 갔다. 즉 서울도 근대적인 거대 도시(巨大都市-metropolitan)로서의 경관을 보이게 되었다. 그 반면 도심지에 있었던 주택지는 점점 줄어들어 공동화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청계·종로·수송·방산·일신·서대문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한편 강남의 영동지구에는 신흥주택 단지, 여의도와 반포지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2]

경기도 주변으로 서울의 행정구역은 점차 넓어졌고, 1963년의 대대적인 시역 확장은 오늘날 시역(市域)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73년1995년을 거쳐 2015년에 현재의 시계(市界)가 완성되었다. 한편 1975년에는 강남구, 1977년에는 강서구, 1979년에는 은평구·강동구, 1980년에는 구로구·동작구가 신설되어 총 17개 구가 되었다. 이어 1988년까지 양천구·서초구·송파구·중랑구·노원구가 신설되었고 1996년 광진구·강북구·금천구가 신설됨으로써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은 총 25개 구로 늘어났다.[2]

이후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였고,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연혁[편집]

행정구역사[편집]

한성부 행정구역 영역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변천도 (1914-1995년)
  • 삼국 시대 : 북한산군, 북한산주 (강북 지역 한정)
  • 삼국 시대 : 하남 위례성이 백제의 수도였음 (BC 18-AD 475)
  • 고려 시대 : 한양군, 남경 (강북 지역 한정)
  • 1394년 : 한양을 조선의 새 도읍지로 자리 잡음.
  • 1395년 :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도성 내부와 그 주변인 성저십리 지역으로 획정.
  • 조선 후기 :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효자동을 성저십리(연은방 훈창계)에 편입.
  • 1895년 :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지금의 광진구 서부, 중랑구 면목동, 성동구 성수동)를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
  • 1911년 :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 성저십리의 방(坊)은 면(面)으로 전환.
  • 1914년 4월 1일 : 도성안과 용산 및 서대문, 동대문 주변 지역을 제외한 한성부 외곽을 고양군에 편입.
  • 1936년 : 고양군 연희면 일부·은평면 일부·숭인면 일부·용강면·한지면을 경성부에 재편입. 시흥군 영등포읍 및 북면 일부와 김포군 양동면 양화리를 경성부에 편입.
  • 1943년 6월 10일 : 경성부 아래에 7개의 구(종로구, 중구, 성동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를 설치하였다.[19]
  • 1944년 11월 1일 : 마포구를 설치하였다.[20]
  • 1946년 8월 15일 :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
  • 1946년 9월 28일 : 서울시가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되어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었고, 관할 구역은 종전과 같이 8개의 구로 하였다.[21] 이에 따라 서울특별자유시의 직능과 권한은 도(道) 단위와 같아졌다.[2]
  • 1946년 10월 1일 : 행정구역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8개 구의 명칭은 유지하되, 정목(丁目)은 가(街)로, 통(通)은 로(路)로, 정(町)은 (洞)으로 변경하고, 일본식 명칭을 한성부 시절 명칭이나 위인·선현들의 이름·호 등을 인용하여 새로 제정하였다.[22][23][24]
  • 1946년 10월 9일 : 서울특별자유시의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종래에 1실 4부였던 것을 8개국으로 하였다.
  • 1947년 6월 : 정회(町會)를 동회(洞會)로 개편하여 동회제를 실시하였다.[25]
  • 1948년 8월 15일 :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시기에 가로를 확장하여 대로변에 있는 일본식 상점 건물은 철거하고 새로운 양식의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2]
  • 1949년 8월 15일 : 서울특별자유시에서 서울특별시로 개칭.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숭인면·뚝도면을 서울특별시에 재편입. 시흥군 동면 구로리·도림리·번대방리를 서울특별시에 편입. 숭인면과 동대문구 일부에 성북구를 설치하여 9개 구가 되었다.[26] 새로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하여 같은 날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성동구 뚝도출장소, 성북구 숭인출장소가 설치되었다[27].
  • 1950년 3월 15일 : 서울특별시에 속한 (里)가 모두 (洞)으로 변경됨[28]
  • 1955년 4월 18일 : 동회제를 폐지하고 행정동제를 시행하였다.[29]
  • 1963년 1월 1일 (서울 대확장) : 경기도 시흥군 동면(안양리 제외)·신동면, 부천군 소사읍 동부, 김포군 양서면·양동면, 광주군 언주면·대왕면 일부·중대면·구천면, 양주군 노해면·구리면 일부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30] 이상의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됨으로써 시역(市域)은 강남지구와 북동부쪽으로 크게 확대되었고 서울특별시의 총면적은 613.04㎢에 달하였으며 서울특별시민은 3,094,022명이 되었고 행정기구는 9개구, 13개 출장소, 341개의 행정동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도심부에 있는 주택·학교·공장의 일부가 천호동·불광동·남가좌동·월곡동·장위동·화계동·공항동 등의 주변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2]
  • 1963년 8월 28일 : 서울 행정구역 신규편입지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되었다.[31]
  • 1963년 9월 17일 : 경기도 중 시흥군 서면 철산리·광명리·하안리 및 과천면,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원종리·작리, 고양군 신도면이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되었다.[32]
  • 1970년 : 경기도 중 양주군 구리면 갈매리와 별내면 일부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추가 편입되었다.
  • 1973년 7월 1일 : 도봉구관악구가 신설되어 11개 구가 되고,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진관내리 및 진관외리가 서울시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이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 개봉동과 경기 시흥군 서면 광명리 간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33]. 이로써, 면적은 627.06㎢ 가 되었다.[2]
  • 1973년 :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중 진관외리·진관내리·구파발리를 서울시에 편입,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개봉동과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간 경계조정.
  • 1975년 10월 1일 : 강남구가 신설되었다.[34]
  • 1977년 10월 1일 : 강서구가 신설되었다.[35]
  • 1979년 10월 1일 : 강동구은평구가 신설되었다.[36]
  • 1980년 4월 1일 : 동작구구로구가 신설되었다.[37]
  • 1982년 12월 :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 중 광명시 철산동·하안동·광명동 대부분 지역이 도시계획구역에서 분리되었다. (광명시 도시계획구역 신설)
  • 1986년 :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 중 부천시 지역(구 오정구 일부)이 도시계획구역에서 분리되었다. (부천시 도시계획구역 편입)
  • 1988년 1월 1일 : 강동구, 동대문구, 도봉구, 강남구, 강서구 중 일부를 관할로 각각 송파구, 중랑구, 노원구, 서초구, 양천구가 설치되었다.[38]
  • 1991년 :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 중 과천시 지역(과천시 전역)이 도시계획구역에서 분리되었다. (과천시 도시계획구역 신설)
  • 1994년 :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 중 고양시(현 덕양구 일부), 구리시(갈매동) 및 남양주군(현 별내동 일부) 지역이 도시계획구역에서 분리되었다. (고양시, 구리시 도시계획구역 편입)
  • 1995년 3월 1일 : 성동구, 도봉구, 구로구 중 일부를 관할로 각각 광진구, 강북구, 금천구가 설치되었다. 이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 일부와,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 및 철산3동 일대의 월경지를 서울특별시에 편입하였다.[39].
  • 1995년 상반기 :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 중 광명시 철산1동 일부 지역이 도시계획구역에서 분리되었다. (광명시 도시계획구역 편입)
  • 2015년 12월 7일 : 위례신도시 건설에 따라 서울특별시 송파구,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 간의 관할 구역을 조정하였다.[40]

문화사[편집]

제35회 3·1절 시가행렬. 각종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눈길을 끈다(1954)
공사중인 광화문 지하도
서울 한강변의 맨션아파트 전경(1976)

교통사[편집]

각주[편집]

  1. 그 위치는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1399번길에 있다.
  2.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서울의 연혁〉
  3. 이종묵 (2006). 《조선의 문화공간 1》. 서울: 휴머니스트. 61쪽. ISBN 9788958621171. 
  4. 최종현; 김창희 (2013). 《오래된 서울》. 서울: 동하. 26쪽. ISBN 9788996787228. 
  5. 최종현; 김창희 (2013). 《오래된 서울》. 서울: 동하. 27쪽. ISBN 9788996787228. 
  6. 《태조실록》 태조 6권 3년 9월 9일,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종묘·사직·궁궐·시장 등의 터를 정하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7. 최종현; 김창희 (2013). 《오래된 서울》. 서울: 동하. 28-30쪽. ISBN 9788996787228. 
  8. 《고려사절요》 권5, 문종 21년 “改楊州, 爲南京留守官, 徙旁郡民, 實之.”
  9. 《고려사절요》 권5, 문종 22년 “創新宮于南京.”
  10. 《고려사절요》 권6, 숙종 6년 “置南京開創都監 …”
  11. 《고려사절요》 권7, 숙종 9년 “南京宮闕成.”
  12. 《고려사》 권14, 세가 권제14, 예종 12년 8월 “契丹投化人, 散居南京圻內者, 奏契丹歌舞雜戱以迎駕, …”
  13. 《고려사》 권122 열전 권제35
  14. 《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6년 2월 “命李齊賢相宅于漢陽, 築宮闕. 開城尹致仕尹澤上言, “妙淸惑仁廟, 幾至覆國, 厥鑑不遠, 矧今四境有虞, 訓兵養士, 猶懼不給, 興工勞衆, 恐傷本根.””
  15. 《고려사》 권133 열전 권제46 신우 1 신우 원년, 제112권 열전 제25 박의중 등
  16. 《고려사》 권45, 세가 권제45, 공양왕 2년 9월 “병오 遷都于漢陽, …”
  17. 《고려사》 권46, 세가 권제46, 공양왕 3년 2월 “정묘 至自南京, …”
  18. 조선총독부령 제6호, 제7호 (1910년 10월 1일)
  19. 조선총독부령 제163호 (1943년 6월 9일)
  20. 조선총독부령 제350호 (1944년 10월 23일)
  21. 군정법령 제106호 서울특별시의설치 (1946년 9월 18일)
  22. 서울특별자유시 헌장 제1조
  23. “서울市町會聯合會, 市에 町名改定 건의”. 《서울신문》. 1945년 11월 24일. 2017년 2월 26일에 확인함. 
  24. “通(통)은街(가)로町(정)은洞(동)으로 十月一日(십월일일)부터”. 《동아일보》. 1946년 10월 4일. 2017년 2월 26일에 확인함. 
  25. 서울시령 제2호
  26. 대통령령 제159호 시·도의관할구역및구·군의명칭·위치·관할구역변경의건 (1949년 8월 13일)
  27. 대통령령 제160호 서울시구출장소설치에관한건 (1949년 8월 13일)
  28. 서울특별시 조례 제10호
  29. 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
  30. 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도·군·구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 (1962년 11월 21일)
  31. 건설부 고시 제524호 (1963년 8월 28일)
  32. http://theme.archives.go.kr/next/gazette/viewGazetteDetail.do?gazetteEventId=0027999512&actionType=keyword
  33. 법률 제2596호 서울특별시및경기도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 (1973년 3월 12일)
  34. 대통령령 제7816호 구의증설및관할구역변경에관한규정 (1975년 9월 23일)
  35. 대통령령 제8666호 서울특별시강서구설치및구간관할구역조정에관한규정 (1977년 8월 27일)
  36. 대통령령 제9630호 서울특별시은평구등7개구설치및구관할구역조정에관한규정 (1979년 9월 26일)
  37. 대통령령 제9630호 서울특별시은평구등7개구설치및구관할구역조정에관한규정 (1979년 9월 26일)
  38. 대통령령 제12367호 서울특별시송파구등13개구설치와구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규정 (1987년 12월 31일)
  39. 법률 제4802호 서울특별시광진구등9개자치구설치및특별시·광역시·도간관할구역변경등에관한법률 (1994년 12월 22일)
  40. 서울특별시 송파구와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 대통령령 제26665호 (2015년 11월 26일)
  41. “새서울의 靑寫眞 (12) 光化門立體交叉路신설”.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66년 3월 15일. ...光化門입체교차로공사 때문에 光化門우체국과 首都醫大부속光化門병원이 철거되고 유서깊은 碑閣도 인근 녹지대로 옮겨진다. 
  42. 강준만 (2002).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