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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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역사

선사 시대때부터 고대인들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유역에 자리잡기 시작한다. 초기 백제의 수도였으며, 위례, 한산, 남경, 한양 등의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었으며, 현재 명칭인 서울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정식으로 서울이 된 것은 1946년이다.

삼국시대, 남북국 시대[편집]

삼국시대에는 시대에 따라 백제, 고구려, 신라 모두가 한강 유역을 서로 차지하였다. 한강 유역과 서울을 차지한 국가는 전성기가 되었으며, 백제는 서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기원전 18년, 온조가 하북위례성을 수도로 삼았고 기원전 5년에는 하남위례성으로 천도를 했다. 위례성은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점령할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위례성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풍납토성, 아차산성, 몽촌토성, 석촌동 백제고분군 등이 있다.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위례성을 점령하고 이름을 남평양(南平壤)으로 바뀌었다. 551년 백제가 다시 점령하였으나 553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위례성을 점령하여 신주(新州)로 개칭하였으나 4년 후인 557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라 했고, 또 11년 뒤인 568년에는 남천주(南川州)로 바꾸었다. 614년에는 다시 북한산주(北漢山州)로 바뀌었다.

남북국시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후 687년에는 한산주(漢山州)로 편입되었고 757년에는 한양군(漢陽郡)으로 개칭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시대에 따라 백제, 고구려, 신라 모두가 한강 유역을 각기 차지하였다.

유적[편집]

백제의 유적[편집]

기원전 18년경부터는 백제(百濟)의 세력이 서울 지방에 미치게 되면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이 처음 도읍지로 삼은 곳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으로, 현재 중랑천 일대 혹은 강북구 미아동 부근으로 비정된다.[1] 이곳은 백제의 발상지가 되었다. 기원전 5년에 백제는 도읍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겼으며, 일반적으로 몽촌토성에 비정한다. 이후 왕도조직을 갖추면서 한성 (백제)으로 발전하는데, 한성의 왕성으로는 남북의 두 성이 있었는데 각각 몽촌토성풍납토성으로 비정된다. 백제는 678년의 역사 가운데 475년간 이 한강 유역에서 번성했다.[2] 그 후 삼국시대에는 서울이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삼국이 모두 서울을 차지하려고 하여, 세력의 충돌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유적[편집]

392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한때 서울을 점령하였고, 475년에 장수왕은 또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여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하였다. 서울은 551년 백제가 점령 할때까지 76년 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신라의 유적[편집]

신라는 국력을 신장하여 영토 확장에 힘을 써오다 백제와 연합하여 551년에 고구려의 세력을 한강 유역에서 물리쳤고 553년에는 백제를 공격해서 서울을 차지하였다. 서울의 이름을 신주(新州)로 개칭하였으나 4년 후인 557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라 했고, 또 11년 뒤인 568년에는 남천주(南川州)로 바꾸었다. 614년에는 다시 북한산주(北漢山州)로 바뀌었다. 경덕왕때는 한주라 개칭하고, 서울은 한양군(漢陽郡)이라고 하였다. 이 명칭은 고려 건국까지 계속 사용되었다.[1]

  • 이성산성 - 백제, 고구려, 신라 중 어느 나라의 유적인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려[편집]

고려에는 918년 고려 태조때 양주로 이름이 바뀌었고 983년 고려 성종은 12목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이 되었으며 1067년 고려 문종남경으로 승격되어서 지방행정구역의 중요한 단위가 되면서 정치적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 때부터 다시 서울이 큰 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308년 고려 충렬왕은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격하시켰다. 공민왕은 1356년 한양부를 다시 남경으로 격상시키고 이후 남경 천도 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중단되었고, 천도 논의는 우왕, 공양왕 또한 진행했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1362년에는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1067년 고려 문종 때에는 양주목에 소속시켰던 것을 3소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다. 남경의 규모는 동쪽이 대봉(大峰, 현 낙산), 서쪽이 기봉(岐峰, 현 안산), 북쪽이 면악(面嶽, 현 북악산), 남쪽이 사리(沙里, 현 용산 남단)까지로, 서울은 더욱 지방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에 궁궐이 처음으로 창건되었고, 인근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생활하게 함으로써 도시로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숙종 때에는 현재의 경복궁(景福宮) 부근에 남경 이궁(離宮)을 짓는 등 건설사업이 추진되었다. 1231년 이래 몽골이 침입하던 때에는 몽골군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1308년 충렬왕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3경제도가 없어지자, 남경은 지방단위의 하나인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1356년에 다시 3경 제도를 부활시켜 남경으로 승격하여 궁궐을 중수하였다. 1362년에는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자는 정책인 한양천도론은 우왕 때에 고조되어, 마침내 1382년 9월에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2월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어 천도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였다. 그 후 공양왕 때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나 또 6개월 만에 개경으로 돌아갔다.[1]

고려 숙종[편집]

최초로 남경을 세운 것은 고려 문종 23년(1068년)으로 보인다[3].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약 30년 뒤인 숙종대 1099년에도 건도 논의가 있었고, 1101년에는 실제로 집행된 것으로 보인다[4]. 같은 곳에는 일관인 최사추 등의 상주가 수록되어 있다.

‘저희들이 노원역(盧原驛), 해촌(海村), 용산(龍山) 등지에 가서 산수(山水)를 살펴본즉 도읍을 정하기에 합당하지 않고 오직 삼각산 면악(面嶽)[5] 남쪽의 산수 형세가 옛문헌의 기록에 부합되오니 청컨대 삼각산 주룡의 중심 지점인 남향관에 그 지형대로 도읍을 건설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중략)

‘남경을 새로 건설하는 데는 반드시 땅을 넓게 차지하고 백성들의 농토를 많이 빼앗아야 될 것이오니 청컨대 경위령(京緯令)의 말한 바에 근거하여 산에 의거하여 형세를 취하기도 하고 물로 지형을 표하기도 하되 우선 안으로 산수 형세를 따라 동으로는 대봉(大峯)까지, 남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로는 기봉(岐峯)까지, 북으로는 면악(面嶽)까지를 경계로 삼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 『고려사』 , 세가 제11 숙종 7년 3월의 기사

서울 600년사에 따르면 대봉은 낙산이며 기봉은 안산이고 사리는 신용산·이촌 일대라고 한다. 즉 남경은 조선조의 도읍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천도의 논리를 제공한 것은 김위제라는 일관으로 보인다. 김위제는 도선의 비기·답산가, 그리고 저자가 불명확한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개성의 지덕이 그의 시기에 쇠하였음을 이야기했다[6]. “건국한 후 1백 60여 년에 목멱벌에 도읍한다”고 하며, 그 근거로는 앞선 도참서들 말고도 오행설, 즉 존재자들에게 부여되는 속성들의 상응 체계 역시 그 뒷부분에서 인용되었다. 비기의 내용으로 인용된 문장가운데는 “11, 12, 1, 2월을 중경에서 지내고 3, 4, 5, 6월을 남경에서 지내며 7, 8, 9, 10월을 서경에서 지내면 36개국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가 포함되어 있고, 이는 묘청의 난과 같은 고려조의 여러 사건들에서 여러 차례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공민왕 ~ 공양왕[편집]

공민왕1356년 이후 남경 천도 작업을 진행하고 이 과정을 주도했다.

1357년 1월 임진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 진전에 참배하고 한양(漢陽)에 천도할 데 대하여 점을 쳤더니 왕의 손에 '정(靜)'자가 잡혔다. 다시 이제현에게 명령하여 점을 치라 하였더니 '동(動)'자를 얻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대가 몸을 깨끗이 하고 제사하여서 길한 점괘를 얻었으니 참으로 나의 마음이 흡족하다.”
 
— 《고려사》39권 세가 39권

라고 하여 국왕의 천도 의지가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그 실행이 힘들었던 것 같다. 명확한 중단 기사는 없으나 공민왕 즉위 10년을 넘기면서 적극적인 천도 진행 기사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된다. 또한 유학자들이 공민왕을 제지했다는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7].

이러한 천도 논의는 우왕, 공양왕 또한 진행했었으나 공민왕대와 동일한 이유로 인해 모두 기각되었다[8].

한성부[편집]

1894년 한성의 시가지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한양부(漢陽府)로 수도를 천도해서 1395년 이름을 한성부(漢城府)로 바꿨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394년 - 1398년과 1400년 - 현재까지 두 시기로 한양의 수도시기를 나눠 볼 수 있다. 1394년부터 4년 동안 수도였다가 1400년부터 다시 수도가 된 것인데 맨 처음 한양이 수도로 정해진 때까지 합치면 610년이 넘고, 태종 즉위부터 따지면 600년 가량 된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조선 태조는 풍수 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였다. 이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현재의 종로구, 중구보다 좁은 지역이다. 서울성곽으로부터 약 10리 이내의 외곽지역도 한성부 관할의 성저십리로 편입되었고, 해당 지역에서의 매장, 벌채 등을 금지하였다. 이어 조선 태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도시가 확장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시는 많이 파괴되었다가 19세기에 많이 복구되었다. 19세기말, 각종 근대 문물이 들어왔고,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다.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명 정도였다.

경성부[편집]

1900년대의 서울

일제 강점기에는 1910년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에 따라 한성부는 경성부로 개칭되고 경기도의 하부 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1910년한일 합방과 함께, 같은 해 9월 30일에 시행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어 경기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9] 경성부라는 이름은 수도가 있는 서울이라는 성곽을 가리킨 뜻이지만, 그 의미의 약화를 위해서 대개 일본식 발음인‘게이조’발음으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성부의 영역은 사대문안과 서대문구 일부, 용산, 숭인동, 창신동 일대로 축소되고 나머지 경성부의 8개면은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1936년에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주변 지역을 병합하여 4배로 확장되었고, 1943년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가 설치되었다. 이때 7구가 설치되고, 1944년에 주변 지역을 병합해 마포구를 추가로 설치하였다.

서울특별시[편집]

한국이 광복한 후 1945년 다시 경성을 서울로 고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개칭되었다. 이후 경기도 주변으로 서울의 행정구역은 점차 넓어졌고, 1963년의 대대적인 시역 확장은 오늘날 시역(市域)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73년를 거쳐 1995년에 현재의 시계(市界)가 완성되었다.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였고,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광복 후 및 한국 전쟁[편집]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서울은 한때 미군정 관할하에 있기도 하였으나, 그 해 10월 행정의 책임자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1946년 8월 16일 경기도에서 독립하여 서울자유특별시가 되면서 행정상의 직능과 권한이 도단위와 같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종래에 써 오던 가로명과 동명의 일본식 명칭을 없애고, 선조들의 아호와 고유명칭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서울의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였고, 주변 지역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서울은 미군정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그 해 10월 행정의 책임자가 한국 사람으로 바뀌었다.[1]
  • 1946년 8월 15일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
  • 1946년 9월 28일 서울시가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되어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되었고 행정상의 직능과 권한이 도(道)단위와 같게 되었다.[1] 관할 구역은 종전과 같이 8개의 구(종로구, 중구, 마포구, 성동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로 하였다.[10] 이에 따라 서울특별자유시는 직능과 권한이 도와 동등하게 되었다.
  • 1946년 10월 9일에는 서울특별자유시의 행정기구를 개편하여 종래에 1실 4부였던 것을 8개국으로 하는 동시에 서울특별자유시 헌장 제1조에 의하여 행정구역의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구제도는 종전과 같이 8구제를 실시하였고 여기에 속한 동(洞)은 모두 267개 동이었다. 동명은 종래에 써 오던 가로명(街路名)과 동명(洞名)의 일본식 명칭을 바꿔 한성부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동명 또는 위인이나 선철(先哲)들의 이름, 선현(先贅)들의 아호(雅號)와 고유명칭을 따서 새로 제정하였는데 정목(丁目)은 가(街)로, 통(通)은 로(路)로, 정(町)은 동으로 변경하였다.[1]
  • 1948년 8월 1일 서울시내 자동차 4,706대 등록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시기에 가로를 확장하여 대로변에 있는 일본식 상점 건물은 철거하고 새로운 양식의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1]
  • 1949년 8월 15일 서울의 명칭을 서울특별시로 결정하고, 고양군의 숭인면·뚝도면·은평면·연희면 일부와 시흥군의 신동면 중 구로리, 도림리, 번대방리를 서울에 편입시켜 면적이 268.3㎢로 확장되고 인구는 141만 8천 명이 되었다.[1] 숭인면과 동대문구 일부에 성북구를 설치하여 9개 구가 되었다.[11] 새로 편입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하여 같은 날 서대문구은평출장소, 성동구뚝도출장소, 성북구숭인출장소가 설치되었다[12].
  • 1949년 8월 15일 제1회 서울시 문화상 시상식
  •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자유시에서 서울특별시로 개칭
  • 1950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에 속한 (里)가 모두 (洞)으로 변경됨 [13]
  •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정부는 부산으로 일시 옮겨 갔다.[1]
  • 1950년 6월 28일 대한민국 국군한강 인도교를 폭파함. 서울시가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함
  •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함.
  •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함.
  • 1951년 1월 4일 조선 인민군이 다시 승기를 잡으면서, 서울을 점령(1.4 후퇴)부산에 서울특별시 행정청 설치를 피난하다.
  • 1951년 3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시가(市街)는 심한 전재(戰災)를 입었다. 즉 정부기관·공공시설·공장·학교·주택 등의 도시의 기본적인 시설이 일시에 파괴되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1]
  • 1952년 7월 20일 한강철교 복구 개통

서울의 확장과 현대화[편집]

제35회 3·1절 시가행렬. 각종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눈길을 끈다(1954)

휴전(休戰) 후 전국 곳곳에 피난갔던 시민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은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착수하였고, 시민들의 생활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서울은 계속 발전하여 1960년 말에는 244만 5천 명의 인구가 생활하고 있는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경 이후부터 도심지에는 많은 회사와 금융기관이 집중하게 되면서 사무실이 부족하게 되고, 지가(地價)가 급속하게 상승되면서 도심지의 토지이용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1960년경부터 소공동(小公洞)·명동(明洞)·서소문·퇴계로·충무로 1가·회현동 등지에는 10∼20층 내외의 고층건물이 들어서서 도심지의 스카이 라인(skyline)은 높아져 갔다. 즉 서울도 근대적인 거대 도시(巨大都市-metropolitan)로서의 경관을 보이게 되었다. 그 반면 도심지에 있었던 주택지는 점점 줄어들어 공동화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청계·종로·수송·방산·일신·서대문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한편 강남의 영동지구에는 신흥주택 단지, 여의도와 반포지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75년에는 강남구, 1977년에는 강서구, 1979년에는 은평구·강동구, 1980년에는 구로구·동작구가 신설되어 총 17개 구가 되었다. 이어 1988년까지 양천구·서초구·송파구·중랑구·노원구가 신설되었고 1996년 광진구·강북구·금천구가 신설됨으로써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은 총 25개 구로 늘어났다.[1]

  • 1953년 9월 23일 서울시내버스 운수조합 창립
  • 1954년 1월 7일 서울시내 택시조합 창립
  • 1955년 4월 18일 : 행정동제가 실시됨.[14]
  • 1955년 5월 31일 : 서울시내 무허가 건물 철거시작
  • 1956년 8월 13일 : 초대 서울특별시의회 의원선거 실시 - 9월 5일 의회 구성
  • 1956년 8월 16일 :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발족으로 교육자치제 실시
  • 1958년 5월 15일 : 한강인도교 개통
  • 청계천 복개공사 완공(1958년1961년, 12월 3일)
  • 1960년 4월 19일 : 4·19 혁명이 서울에 일어났다.
  •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서울은 또다시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다. 수도 서울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서울특별시는 행정상 내무부장관의 감독권을 벗어나, 국무총리에 직속되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특별시장은 소관사무에 관하며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1]
  • 1961년 12월 4일 : 최초 단지아파트(마포아파트) 건설
  • 1962년 1월 1일 : 서울시민헌장 발표
  • 1962년 5월 16일 : 남산케이블카가 등장했다.
  • 인구의 증가로 시가지의 확대가 불가피하게 되어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의 구리면·노해면, 광주군의 구천면·언주면·중대면·대왕면, 김포군의 양동면·양서면, 부천군의 오정면·소사면, 시흥군의 신동면의 전부 또는 일부가 성동구·동대문구·성북구·영등포구에 각각 편입되었다.[15] 이상의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됨으로써 시역(市域)은 강남지구와 북동부쪽으로 크게 확대되었고 서울특별시의 총면적은 613.04㎢에 달하였으며 서울특별시민은 3,094,022명이 되었고 행정기구는 9개구, 13개 출장소, 341개의 행정동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도심부에 있는 주택·학교·공장의 일부가 천호동·불광동·남가좌동·월곡동·장위동·화계동·공항동 등의 주변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1] 또한 1963년 9월 17일부로 건설부 고시에 의거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이 신규 행정편입지와 경기도 일부지역(고양군 신도면, 시흥군 서면 북부·과천면, 부천군 오정면 일부)으로 확장되었다.[16]
  • 1966년 5월 3일 : 광화문 지하보도 공사
  • 1966년 1월 31일 ~ 1969년 12월 31일 :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착공됨
  • 1967년 6월 15일 : 세운상가 개관
  • 1967년 6월 17일 : 태평로 지하도 개통
  • 1967년 8월 13일 : 3·1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완성(2003년에 철거되었다.)
  • 1968년 4월 1일 : 서울 세종로 충무공 동상 제막
  • 1968년 11월 30일 : 서울시내에 전차운행이 중지되었다.
  • 1969년 3월 31일 ~ 1970년 8월 31일 남산 1·2호터널 개통

서울특별시는 판자촌과 도시빈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도시(성남)를 개발하여 빈민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킬 계획을 마련하였다. 서울특별시는 1968년 5월 7일 건설부로부터 개발인가를 받아 1969년 4월 1일 "중부면 성남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 조성공사에 착수하였으며, 1969년 5월 2일부터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 지역)로 서울시의 철거민을 집단 강제 이주시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빈민들의 수는 14만5천여 명에 이르렀다.[17] 1970년 3월 17일 조선호텔은 지하 2층, 지상 18층 규모의 최신식 호텔을 새로 지어 개관하였다.

서울 한강변의 맨션아파트 전경(1976)

1990년대 이후[편집]

주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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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최완기. 《한양: 그곳에서 살고 싶다?》 초판. 서울: (주)교학사. 14쪽. 
  3. 《고려사》 세가 8권
  4. 《고려사》 세가 11권
  5. 백악(白嶽)
  6. 《고려사》122권 열전 35권
  7. 《고려사》 제106권 열전 제19 윤해
  8. 《고려사》 제133권 열전 제46 신우 1 신우 원년, 제112권 열전 제25 박의중 등
  9. 조선총독부령 제6호, 제7호 (1910년 10월 1일)
  10. 군정법률 제106호 서울특별시의설치 (1946년 9월 18일)
  11. 대통령령 제159호 시·도의관할구역및구·군의명칭·위치·관할구역변경의건 (1949년 8월 13일)
  12. 대통령령 제160호 서울시구출장소설치에관한건 (1949년 8월 13일)
  13. 서울특별시 조례 제10호
  14. 서울특별시 조례 제66호
  15. 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도·군·구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 (1962년 11월 21일)
  16. http://theme.archives.go.kr/next/gazette/viewGazetteDetail.do?gazetteEventId=0027999512&actionType=keyword
  1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170쪽. 
  18. 법률 제2596호 서울특별시및경기도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 (1973년 3월 12일)
  19. 대통령령 제12367호 서울특별시송파구등13개구설치와구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규정 (1987년 12월 31일)
  20. 법률 제4802호 서울특별시광진구등9개자치구설치및특별시·광역시·도간관할구역변경등에관한법률 (1994년 1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