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풍납동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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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 風納洞 土城)
(Earthen Fortification in Pungnap-dong, Seoul)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천호역 인근의 북쪽 토성 부분
종목사적 제11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1,428필지 399,005.8m2[1]
시대삼국시대
위치
서울 풍납동 토성 (대한민국)
서울 풍납동 토성
주소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1동 72-1번지 외
좌표북위 37° 32′ 20″ 동경 127° 7′ 15″ / 북위 37.53889° 동경 127.12083°  / 37.53889; 127.12083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서울 풍납동 토성(서울 風納洞 土城)[2]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기원전(B.C) 2세기때 축조한[3] 토성 유적으로 풍납동 토성이라는 명칭은 과거 풍납리일대의 토성이라는 뜻에서 온것이며, 정확히 조선시대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고산성(古山城)" 이라고 나와있다. 풍납토성이 정식적으로 1900년대 학계에 처음 발견된 것은 1925년대홍수 때이며, 지난 1997년 아파트 공사를 계기로 다량의 유적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발굴 과정과 출토 유물[편집]

1900년대 정론적인 학계에서의 발견은 1925년 홍수 때로, 당시 풍납토성은 한강의 의해 서벽이 유실됨으로써 발견, 조사되었다. 이후 1963년 성벽 둘레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성의 내부는 사유지로 남아있다. 1964년 시굴조사에서 삼국 시대 건국초기의 철기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1997년 아파트 공사를 하던 중 유물이 발굴되어, 발굴 조사를 하였다.

당초 명칭은 광주풍납리토성(廣州風納里土城)이었으나, 2011년 7월 28일 지역명 병기 및 한글맞춤법(띄어쓰기)를 적용하여 서울 풍납동 토성(서울 風納洞 土城)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2]

1925년 대홍수 때 청동제 초두가 2개 발견되었으며, 이후 토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1996년 이후 발굴로 토기, 그물추, 물레, 가락바퀴,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1999년 이후 한신대 박물관은 경당지구를 발굴하였는데, 제사유적과 제사후 폐기된 도구와 음식을 버리는 구덩이 유구, 기와와 건물바닥에 까는 전, 토기, 유리구슬 조각, 제물로 보이는 12마리의 말머리 등이 나왔다. 경당지구의 제사유적 주건물은 길이 13.5m, 폭 7, 길이 3m의 궁자형 가옥이었다.

복원 사업과 갈등[편집]

송파구청과 서울특별시청은 이 곳의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땅을 확보하여 공원화 하고있다. 문화재청과 사업자와 거주 주민들 사이에 보상비 갈등이 존재한다. 2000년 5월 13일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주민들이 굴삭기로 발굴 현장을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4] 삼표 풍납레미콘공장 부지의 이전 협상도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송으로 번졌다. 대법원이 이전하라는 판단을 했고 이 부지는 송파구로 넘어갈 예정이다.

성의 규모와 성격[편집]

풍납토성은 동벽 1.5km, 남벽 200m, 북벽 300m로 둘레 약 2.7km가 남아있으나 조사 결과 둘레가 4km가 넘고 부지 26만평 이상으로 한반도 내의 최대 규모 토성일 것으로 추정하고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성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3] 성의 성격을 두고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삼국 시대 국경의 방어성이었다는 견해, 또는 삼한의 소국이었다는 세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성을 짓는데에 연인원 100만명 정도가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하여 도성의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5] 기원전 1세기 낙랑의 인구수가 40만 6748명이었다는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志)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6] 인구 40만의 낙랑에게 밀리던 백제 초기때 토성 축조에 100만명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다.

성벽이 축조된 지점은 한강 지천의 자연제방의 윤곽을 이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7] 또한 같은 곳에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여러 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점과, 과거 백제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던 중국에서 유래된 판축(版築)기술이 적용된[8]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삼한시대 어떤 소국의 중심지였다가 3세기 중후반~4세기 초반[7][9] 삼국 세력 중 하나에게 흡수되어 새로운 축성기술이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편집]

각주[편집]

관련 홈페이지[편집]

주요 영상[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