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석촌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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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 고분군
(서울 石村洞 古墳群)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사적
종목사적 제243호
(1975년 5월 27일 지정)
면적49,999m2
시대백제
위치
서울 석촌동 고분군 (대한민국)
서울 석촌동 고분군
주소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61-6번지
좌표 북위 37° 30′ 7.86″ 동경 127° 6′ 8.25″ / 북위 37.5021833° 동경 127.1022917°  / 37.5021833; 127.1022917좌표: 북위 37° 30′ 7.86″ 동경 127° 6′ 8.25″ / 북위 37.5021833° 동경 127.1022917°  / 37.5021833; 127.1022917

서울 석촌동 고분군(서울 石村洞 古墳群)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 초기의 무덤이다. 1975년 5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43호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지역명 병기 및 한글맞춤법(띄어쓰기)을 적용하여 문화재 명칭이 서울 석촌동 고분군으로 변경되었다.[1]

개요[편집]

이 일대에는 1916년 조사 당시 90여 기의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봉토분(흙무덤)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2]

그러나 대부분의 무덤은 개발로 인해 없어졌으며, 1974년 조사 당시 3호와 4호 적석총까지만 남아 있었다. 1985년에는 이 일대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백제고분군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1호와 2호 적석총이 추가로 발굴되었다.[2]

이곳의 적석총은 외형상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적석총과 같지만 내부 구조면에서는 서로 다른 유형이다. 즉 3호 적석총은 무덤의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고구려식이며, 2호와 4호 적석총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기단부만 남은 1호 적석총은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남분은 고구려식이고 북분은 백제식이다. 무덤 내부와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와당, 금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3호 적석총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2]

석촌동 제1호분[편집]

석촌동 제1호분

일찍이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가 들어서 상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으로 보인다.[3]

즉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과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남분이 합쳐진 것인데 함침에 있어 남·북분 서쪽 기단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졌다.[3]

내부 구조는 남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길이 20cm~30cm 크기의 표갠돌로 네 벽을 쌓고 바닥에 10cm 안팎 포갠 돌 조각·자갈 등을 깐 석곽 4개가 있었다. 4개의 석곽 중 중앙에 가장 큰 것이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놓였으며 작은 석곽 3개는 북쪽 적석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놓여 있었다. 가장 큰 중앙의 석곽은 길이 약 2.5m 너비 약 2.3m이고 1호 소형석곽은 길이 약 1.8m·너비 1.2m, 2호 소형석곽은 길이 1.6m·너비 1.4m, 3호 소형석곽은 길이 1.2m·너비 1.0m이다.[3]

그리고 평면모양이 이 적석총과 거의 같은 것으로는 고구려의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려묘자촌 제15호분, 평안북도 송암일 제45호분 등이 있다.[3]

석촌동 제2호분[편집]

석촌동 제2호분

제2호분은 복원 정비하기 이전에는 길이 약 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봉우리 모양을 이루고 남아있던 것으로서 봉우리 모양의 분구 기저부 주위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돌담이 둘러 있었으며 파괴된 분구 위에는 약 10~3cm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4]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제2호분의 분구 축성은 제1단의 바깥둘레에 1m 정도 높이로 포갠 돌을 쌓고 그 내부에 진흙을 다져 채웠으며 제2단은 제1단의 적석 가장자리에서 얼마쯤 안쪽으로 들어가서 포갠 돌을 쌓은 다음에 다시 그 내부에 진흙을 다시 채우고 제3단은 제1, 2단과 같은 방법으로 축성하고서 정상부에서는 둥그렇게 흙을 덮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1단의 동·서·남쪽 면에는 지탱석이 각각 1개씩 남아 있었다. 내부구조의 확인에 있어 동북 1/4구역과 서북 1/4구역의 일부만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전모는 알 수가 없고 다만 동북 1/4구역의 바닥에 자갈과 막돌조각이 섞여 깔려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깔린 돌 사이에는 붉은 갈색 연결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4]

복원 정비된 제2호분의 제1단은 길이 동서 16.4m, 남북 16.5m, 높이 90cm,단의 너비 2m 이며 제2단은 길이 동서 12.5m, 남북 12.6m, 높이 0.9m,단의 너비 2m 이며 제3단은 길이 동서 8.5m, 남북 8.6m, 높이 1.7cm, 단의 너비는 정상부에 흙이 덮여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전체 높이는 3.5m이다.[4]

그리고 제1단 바닥 서북쪽에는 장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둔 목곽 토광묘 1기가 드러났는데 크기는 길이 2.5m, 북쪽너비 1.6m, 중앙너비 0.4m, 남쪽너비 0.65m, 길이 0.1m~0.15m 이다.[4]

이러한 구조 형식의 적석총은 분구·내부 구조 등 고분 전체를 돌로 쌓아 축조한 고구려 식의 전형적 적석총이 변하여 백제화된 것으로 보인다.[4]

석촌동 제2호 토광묘[편집]

석촌동 제2호 토광묘

석촌동 제2호 토광묘는 생토층을 파서 묘광을 만들었는데 평면은 장방형이고 장축은 동남동에서 서북서로 두었다. 벽면은 바닥에서 위로 향하여 약간 경사졌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동쪽에는 회백색의 목이 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으며 묘광 바닥에서 약간 위인 흙속에서 지름 1.6~1.7cm 크기의 민 고리 금귀고리 1개가 드러났다.[5]

토광묘의 크기는 길이 223cm, 너비 76cm, 높이 21cm 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형식의 토광묘는 제3호분과 근접한 동쪽 지점에서 10여기가 드러났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토광묘는 적석총보다 앞선 시기의 묘제였음을 짐작케한다.[5]

내원외방형 적석총[편집]

내원외방형 적석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 전에 분구, 내부구조, 기단부 등이 파괴되어 흙이 덮이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 고분의 원형을 밝힐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 의하여 고분 기단부의 서남 모서리와 서·북쪽의 석축 기단 일부를 찾아냈다. 찾아낸 고분 기단부의 석축 부분을 바당으로 복원 정비하니 안쪽은 지름 11.4m의 원형을 이루고 바깥쪽은 변 길이 16m의 방형이 되었다.[6]

이로서 이 적석총의 기단부의 모양은 내원외방형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안쪽 원형 석축 바닥에서는 적석 토광묘 2기가 석관묘 3기가 드러났는데 이러한 적석 토광묘와 석관묘 위에 이 적석총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6]

한편 일본 고분에는 상부가 평면 원형이고 하부가 평면 방향인 상원하방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평면의 모양은 이 적석총의 기단 평면 모양과 흡사하다.[6]

석촌동 제3호 토광묘[편집]

석촌동 제3호 토광묘

제3호 토광묘는 표토 밑 70cm에서 드러났고 평면은 네 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장방형이며 장축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벽면은 수직이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의 목이 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7]

묘광의 규모는 길이 230cm·너비 84cm·높이 18cm 이다. 이 모형 토광묘는 원형 토광묘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원형 토광묘에 방수시설을 하고 그 바로 위 50cm 되는 곳에 원형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토광묘는 이 지역에서 3기가 드러났다.[7]

석촌동 제5호분[편집]

석촌동 제5호분

분구를 흙으로 쌓은 봉토분으로서 유존 상태가 양호하고 또 이 일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봉토분이므로 보존하기 위하여 분구 일부만 발굴 조사하고 내부 구조는 확인하지 않았다.[8]

분구는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아 덮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을 섞어 한 벌 깐 다음에 다시 그 위에 흙을 엷게 덮은 즙석분구이다.[8]

이와 흡사한 즙석분구의 본토분인 가락동 제1·2호분이 이 고분에서 동분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2기의 고분은 1969년의 발굴 조사에서 그 내부 구조가 확인되었는데 가락동 제1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형식이었고 제2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협의의 것과 옹관묘 형식의 것이 함께 묻힌 구조형식의 고분이었다. 가까이에 있고 거의 같은 시기인 백제 전기 2기의 고분인 점으로 미루어 석촌 제5호분도 그 내부 구조는 목관토광묘 형식의 것으로 추측케 된다.[8]

분구의 현재 크기는 지름 17m, 높이 3m인 원형봉토분이다.[8]

각주[편집]

  1. 문화재청고시제2011-116호,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7560호, 392면, 2011-07-28
  2. 현지 안내문1 인용
  3. 현지 안내문2 인용
  4. 현지 안내문3 인용
  5. 현지 안내문4 인용
  6. 현지 안내문5 인용
  7. 현지 안내문6 인용
  8. 현지 안내문7 인용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