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주

| 서울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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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중원경과 28개 군, 49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직접 관할한 현은 2개이다.
주치(州治)는 백제 한성(漢城) 근처인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광주 고읍)로 추정되고, 영역은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철원군(김화 포함)·평강군·이천군, 충청북도 동북부(남한강 유역) 등이다.
연혁
[편집]한산주 이전
[편집]한산주가 있던 지역은 유사 이래 마한의 북쪽지역이었다. 그 이북에는 고조선, 낙랑군이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온조왕이 이끄는 부여족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남하하자 낙랑과 말갈의 침입으로부터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마한의 의도[1]로 서울 송파구, 강동구를 중심으로 백제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한강 일대를 손안에 넣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마한 연맹체를 노령산맥 남쪽으로 밀어냈다.
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에 이어 대방군을 병합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예성강(백제의 패수)에서 국경을 접했다. 두 나라는 백제 근초고왕이 371년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면서 항쟁을 벌이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漢城, 하남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현재의 경기도 지역에서 완전히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백제는 551년 한성 지역을 잠시 회복했지만 이내 신라가 점령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한산주
[편집]한산주의 치소 일대는 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점령하여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고, 백제 성왕 때 일시 회복했다가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이 지역을 취하였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2] 557년(진흥왕 18년) 신주를 북한산(北漢山, 현 서울의 한강 이북 지역)으로 옮겼는데,[3] 이후에는 전세(戰勢)에 따라 치소(治所)가 이동해 568년(진흥왕 29년)에는 남한강의 남천(현 경기도 이천시)으로 옮겼다가[4] 604년(진평왕 26년)에 다시 한산정(漢山停, 현 경기도 하남시 일대)을 설치하였다.[5][6]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주의 거점과 명칭이 한산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7] 757년(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식 한자어로 고치면서 '한산주'도 '한주'로 개칭되었다. 혜공왕 때 행정구역 명칭을 원래 명칭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고려 때에 광주(廣州)로 개칭하였다.
한산주는 삼국 통일 전쟁 및 나당 전쟁 시기에도 영역이 계속 변화하였는데, 황해도 지역은 나당 전쟁 직후까지 군·현이 설치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가 이후 영역을 정리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694년(효소왕 3년)에 송악성(松岳城 : 개성시)과 우잠성(牛岑城)을, 703년(성덕왕 2년)에 개성(開城)을 쌓았고, 748년(경덕왕 7년)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762년에도 6개의 성을 쌓았다. 헌덕왕 때 취성군(取城郡)을 설치하고 826년 패강에 길이 300리의 장성(長城)을 쌓아 한산주의 북쪽 경계가 완성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경덕왕이 고친 명칭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다.
패강진
[편집]신라는 황해도지역을 영토화하면서 이를 방어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 부근[8]에 패강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신라는 살수(薩水)유역까지 가시권에 넣게 되었고 발해와는 평북일대를 중립지대로 두고 접했다.[9] 나중에 신라가 쇠퇴하면서 이 지역은 무주지(無主地)가 되어 황폐화되었다가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영토가 되어 서경(西京)으로 승격되었다.
한산주 이후
[편집]신라말이 되자 군웅의 할거와 토착호족에 의한 지방자치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안성일대인 죽주에서는 기훤(箕萱)의 세력이 웅거하고 있었고 패서일대에서는 박지윤과 유천궁, 용건 등의 호족들이 군집하고 있었다. 특히 박지윤은 그 출신이 신라왕실의 후손임에도 고구려의 장군인 대모달(大模達)을 자칭하고 있을 만큼 이 지역은 반(反)신라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중에 궁예는 자신의 새나라를 세우면서 이점을 적극 활용해 고려를 칭했다. 궁예는 처음에 패서일대인 개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차지했다가 나중에 철원으로 옮겨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과도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등 패서호족의 반감을 사서 결국 왕건에게 나라를 뺐기고 명성산(鳴聲山)에서 패사했다. 왕건의 고려는 다시 패서지역에서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983년(고려 성종 2년)에 12목이 설치되면서 옛 한산주에는 양주(楊州)·광주(廣州)·해주(海州)·황주(黃州)의 4주가 설치되었고, 995년(성종 14년)에 10도를 두면서 관내도(關內道)가 설치되었다. 5도 양계로 이행한 후 관내도는 개경일대의 경기를 제외하고 양광도와 서해도로 분할되었다. 조선시대에 각각 지금의 경기도와 황해도가 되었다.
소속 군현
[편집]757년 경덕왕이 지명을 고쳤을 당시 한산주에는 1개 소경, 27개 군, 46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지리지〉에 전하는 한주 조에는 1개 소경, 28개 군, 49개 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헌덕왕 때 설치된 취성군과 그 소속 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삼국사기》〈지리지〉에는 한산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을 옛 백제 땅이었던 곳도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나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서 쓴 "本高句麗"는 해당 지역이 신라가 영토로 흡수하기 전 고구려 땅이었다는 뜻이지, 그렇게 쓴 지역이 전부 본래부터 고구려 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 주·속 | 군의 이름 | 고구려 지명[10][11] | 이전 연혁 | 이후 연혁 | 현재 비정 |
|---|---|---|---|---|---|
| ● | 한주(漢州) | 한산군(漢山郡) | 원래 백제의 한성(漢城, 즉 남한산성)이 있던 곳으로, 고구려가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신라가 이를 취하고 신주(新州)를 거쳐 한산주(漢山州)로 고쳤다가 경덕왕 때 한주(漢州)로 개칭했다. | 고려 초에 광주(廣州)로 고쳤고, 고려 성종 대에 목(牧)으로 삼았다. 조선 광해군이 광주부로 승격하였다가 고종 대에 광주군이 되었다. | 하남시·광주시, 서울 송파구·강동구 |
| 황무현(黃武縣) | 남천현(南川縣)
또는 남매(南買) |
고려 태조 대에 이천군(利川郡)으로 고치고 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인종 21년(1143)에 감무를 두고 고종 대에 영창(永昌), 공양왕 대에 남천군(南川郡)으로 고쳤다. 조선 태조가 다시 이천현으로 고쳤다가 세종 대에는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 이천시 | ||
| 거서현(巨黍縣) | 구성현(駒城縣)
또는 멸오(滅烏) |
고려 초에 용구현(龍駒縣)으로 고치고 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조 6년(1406)에 수원부 처인부곡(處仁部曲)을 처인현으로 승격하였다가 동 13년에 용구현과 합쳐 용인현을 만들었다. | 용인시 | ||
| ● | 중원경(中原京) |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 탁장성(託長城) |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으로 신라가 이를 정복한 이후 진흥왕 대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했다. | 고려 태조 대에 충주(忠州)로 고치고 성종 대에 목(牧)으로 삼았다. | 충주시 |
| ● | 괴양군(槐壤郡) | 잉근내군(仍斤內郡) | 고려 초에 괴주(槐州)로 고치고 충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이후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대에 괴산군(槐山郡)으로 고쳤다. | 괴산군 괴산읍 | |
| ● | 소천군(泝川郡)
또는 기천군(沂川郡) |
술천군(述川郡)
또는 성지매(省知買) |
고려 초에 천녕군(川寧郡)으로 고치고 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조선 예종 대에 여주(驪州)에 병합하며 직촌(直村)이 되어 사라졌다. | 여주시 흥천면 | |
| 황효현(黃驍縣) | 골내근현(骨乃斤縣) | 고려 초에 황려현(黃驪縣)으로 고치고 원주(原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종 대에 영의(永義)로 불렀다가 충렬왕 31년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예종 대에 천녕군(川寧郡)을 병합하며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 여주시 시내 | ||
| 빈양현(濱陽縣) | 양근현(楊根縣)
또는 거사참(去斯斬) |
고려 초에 양근현(楊根縣)으로 되돌리고 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명종 5년(1175)에 감무를 두었다. 고종 대에 영화(永化)로 불렀다가 원종 10년(1269)에 익화현(益和縣), 공민왕 5년(1356)에 양근군(楊根郡)으로 승격하였다. | 양평군 양평읍 | ||
| ● | 흑양군(黑壤郡)
또는 황양군(黃壤郡) |
금물노군(今勿奴郡)
또는 만노(萬弩) |
고려 초에 강주(降州), 이후 진주(鎭州)로 고치고 청주목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종 46년(1259)에 창의현(彰義縣), 원종 10년에 의령군(義寧郡)으로 승격하였다가 다시 진주로 강등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진천현(鎭川縣)으로 고쳤다. | 진천군 진천읍 | |
| 도서현(都西縣) | 도서현(道西縣)
또는 도분(都盆) |
고려 초에 도안현(道安縣)으로 고치고 청주목의 속현으로 삼았다. 이후 청안현(淸安縣)[일명 청당현(淸塘縣)]에 감무를 두고 도안을 겸하게 하다가, 조선 태종 5년(1405)에 둘을 합쳐 청안현(淸安縣)을 만들었다. | 증평군 도안면 | ||
| 음성현(陰城縣) | 잉홀현(仍忽縣) | 고려 초에 충주목의 속현이 되었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 음성군 음성읍 | ||
| ● | 개산군(介山郡) | 개차산군(皆次山郡) | 고려 초에 죽주(竹州)로 고치고 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조선 태종 대에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하였다. | 안성시 죽산면 | |
| 음죽현(陰竹縣) | 노음죽현(奴音竹縣) | 고려 초에 충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 이천시 장호원읍 | ||
| ● | 백성군(白城郡) | 나혜홀(奈兮忽) | 고려 초에 안성현(安城縣)으로 고치고 수주(水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이후 천안부에 내속시켰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공민왕 10년 홍건적을 물리쳤다 하여 군으로 승격하고 수원 소속의 양양(陽良)·감미탄(甘彌呑)·마전(馬田)·신곡(薪谷) 4개 부곡을 여기에 이관하였다. | 안성시 시내 | |
| 적성현(赤城縣) | 사복홀(沙伏忽) | 고려 초에 양성현(陽城縣)으로 고치고 수주(水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 안성시 양성면 | ||
| 사산현(蛇山縣) | 사산현(蛇山縣) | 고려사 등에서는 이곳이 백제 온조왕이 도읍을 세운 위례성(慰禮城)이라고 쓰고 있는데 사실 여부는 논쟁적이다. | 고려 초에 직산현(稷山縣)으로 고치고 천안부의 속현으로 삼았다. | 천안시 직산읍 | |
| ● | 수성군(水城郡) | 매홀군(買忽郡)
또는 수성(水城) |
고려 태조가 수주(水州)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종 대에 도호부를 두었다. | 화성시 봉담읍, 수원시 | |
| ● | 당은군(唐恩郡) | 당성군(唐城郡) | 전통적으로 신라 당항성(黨項城) 또는 당항진(黨項津)과 동일한 곳으로 여겨졌는데 최근에는 반론이 있다. | 고려 초에 당성군(唐城郡)으로 되돌리고 수주(水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나중에 인주에 내속하였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충렬왕 때 익주(益州)로 승격하였다가 충선왕 때 남양부(南陽府)로 강등되었다. 조선 태종이 남양도호부로 고쳤다. | 화성시 남양면 |
| 차성현(車城縣) |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 |
고려 초에 용성현(龍城縣)으로 고치고 수주(水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원의 속현으로 나오나 이후 폐지되었다. | 평택시 안중읍 | ||
| 진위현(振威縣) | 부산현(釜山縣)
또는 송촌활달(松村活達) |
고려 초에 수주(水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 평택시 진위면·송탄동 | ||
| ● | 율진군(栗津郡) | 율목군(栗木郡)
또는 동사힐(冬斯肹) |
고려 초에 과주(果州)로 고치고 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이후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대에 과천현(果川縣)으로 고쳤다. 이후 두 차례 금천현(衿川縣)과 합친 적이 있으나 모두 얼마 되지 않아 되돌렸다. | 과천시 | |
| 곡양현(穀壤縣) | 잉벌노현(仍伐奴縣) | 고려 초에 금주(衿州)로 고치고 수주(樹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정종 대에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되었다. | 서울 금천구 | ||
| 공암현(孔巖縣) |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 | 고려 초에 수주(樹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충선왕 2년(1310)에 양천현(陽川縣)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 서울 강서구 | ||
| 소성현(邵城縣) | 매소홀현(買召忽縣)
또는 미추홀(彌鄒忽) |
고려 초에 수주(樹州)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인종 대에 경원군(慶源郡), 인종 대에 인주(仁州)로 고쳤다. 조선 태조 대에 인천군(仁川郡)으로 고쳤다. | 인천 미추홀구(구 남구) | ||
| ● | 장구군(獐口郡) | 장항구현(獐項口縣)
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
고려 초에 안산현(安山縣)으로 고치고 수주(水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 안산시 | |
| ● | 장제군(長堤郡) | 주부토군(主夫吐郡) | 고려 초에 수주(樹州)로 고쳤다. 충렬왕 34년(1308)에 길주목(吉州牧), 충선왕 2년(1310)에 부평부(富平府)로 고쳤다. 조선 태종 대에 도호부를 두었다. | 인천 계양구 | |
| 수성현(戍城縣) | 수이홀(首尒忽) | 고려 초에 수안현(守安縣)으로 고치고 수주(樹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으나, 공양왕 3년(1391)에 통진에 감무를 설치할 때 여기에 합하여 폐지되었다. | 김포시 대곶면 | ||
| 김포현(金浦縣) | 검포현(黔浦縣) | 고려 초에 수주(樹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 김포시 시내 | ||
| 동성현(童城縣) | 동자홀현(童子忽縣)
또는 구사파의(仇斯波衣) |
고려 초에 수주(樹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공양왕 3년(1391)에 통진에 감무를 설치할 때 여기에 합하여 폐지되었다. | 김포시 하성면 | ||
| 분진현(分津縣) | 평유압현(平唯押縣)
또는 평회압현(平淮押縣), 별사파의(別史波衣) |
고려 초에 통진현(通津縣)으로 고치고 수주(樹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공양왕 대에 감무를 두었다. | 김포시 월곶면 | ||
| ● | 한양군(漢陽郡) | 북한산군(北漢山郡)
또는 남평양(南平壤) |
본래 백제와 고구려가 각축을 벌이던 곳으로 백제 북한성(北漢城)[12]이나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자료에 따라 평양(平壤)[13]이나 남평양(南平壤)[14]이라고도 한다]에 해당한다. 신라 진흥왕이 이곳을 차지하고 주(州)로 삼았다. | 고려 초에 양주(楊州)로 고쳤고, 충렬왕 34년(1308)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하였다. 조선 태조 3년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한성부(漢城府)라 고쳤다. | 서울특별시(한강 이북 지역) |
| 황양현(荒壤縣) | 골의노현(骨衣奴縣) | 고려 초에 풍양현(豊壤縣)으로 고치고 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이후 포주(抱州)에 내속하였다가 조선 세종 원년(1418)에 양주로 되돌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주목의 속현으로 나오나 이후 폐지되었다. | 남양주시 진접읍 | ||
| 우왕현(遇王縣) | 개백현(皆伯縣)
또는 왕봉현(王逢縣) |
고려 초에 행주(幸州)로 고치고 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 대에 고봉현(高峯縣)에 감무를 두며 행주를 내속시켰다가 태종 13년(1413)에 고봉 현감을 두고 행주 등을 합쳐 고양현(高陽縣)을 만들었다. |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행주외동 | ||
| ● | 내소군(來蘇郡) | 매성현(買省縣)
또는 마홀(馬忽) |
고려 초에 견주(見州)로 고치고 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 양주시 시내 | |
| 중성현(重城縣) | 칠중현(七重縣)
또는 난은별(難隱別) |
고려 초에 적성현(積城縣)으로 고치고 장단현(長湍縣)의 속현으로 삼았다. 문종 대에는 개성부에 내속, 예종 원년(1106)에는 감무를 두었다. | 파주시 적성면 | ||
| 파평현(波平縣) |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
또는 액봉(頟蓬) |
고려 초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이 되었다. 문종 대에는 개성부에 내속, 예종 원년(1106)에는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조 대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서원군(瑞原郡)과 합쳐 원평군(原平郡)을 만들었고, 세조 대에 목으로 승격하며 파주로 개칭하였다. | 파주시 파평면 | ||
| ● | 교하군(交河郡) | 천정구현(泉井口縣)
또는 어을매곶(於乙買串) |
고려 초에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조선 태조 대에 감무를 두었다. 영조 대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 파주시 교하동(구 교하읍) | |
| 봉성현(峯城縣) | 술이홀현(述尒忽縣)
또는 수니홀(首泥忽) |
고려 초에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우왕 13년(1387)에 서원현(瑞原縣)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태조 2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동 7년에 파평군과 합쳐 원평군(原平郡)으로 만들었다. 태종 대에 교하현을 병합하였다가 곧 되돌렸다. 세조 6년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하였다. | 파주시 파주읍(구 주내면) | ||
| 고봉현(高烽縣) | 달을성현(達乙省縣) | 고려 초에 고봉현(高峯縣)으로 고치고 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조선 태조 3년에 감무를 설치하며 행주(幸州), 부원현(富原縣), 부원 황조향(荒調鄕)을 여기에 합쳤다. 태조 13년 고봉에 행주의 이칭인 덕양(德陽)을 합쳐 고양현(高陽縣)으로 개칭하였다. |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 ||
| ● | 견성군(堅城郡) | 마홀군(馬忽郡)
또는 비성군(臂城郡) |
고려 초에 포주(抱州)로 고치고 양주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 포천시 군내면 | |
| 사천현(沙川縣) | 내을매현(內乙買縣)
또는 내이미(內尒米) |
고려 초에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폐현으로 쓰여있다. | 동두천시 송내동 | ||
| 동음현(洞陰縣) | 양골현(梁骨縣) | 고려 초에 동주(東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 원종 10년(1269)에 영흥현(永興縣)으로 고쳤고 조선 태조 3년(1394)에 영평현(永平縣)으로 고쳤다. | 포천시 영중면 | ||
| ● | 철성군(鐵城郡) | 철원군(鐵圓郡)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 |
신라 말에 궁예가 나라를 세우고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왕건이 고려 태조로 즉위할 때 송악으로 천도하며 철원을 동주(東州)로 고쳤다. 충선왕 2년(1310)에 철원부(鐵原府)로 강등되었다. | 철원군 철원읍 | |
| 동량현(㠉梁縣) | 승량현(僧梁縣)
또는 비물(非勿) |
고려 초에 승령현(僧嶺縣)으로 고치고 동주(東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고 삭녕(朔寧)을 겸하게 하였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삭녕을 군으로 승격하며 승령을 합쳤다. 동 14년에 안협현(安峽縣)을 합하여 안삭군(安朔郡)을 만들었다가 도로 나누었다. | 연천군 인목면(북한 철원군 갈현리) | ||
| 공성현(功成縣) | 공목달현(功木達縣)
또는 웅섬산(熊閃山) |
고려 초에 장주(漳州)로 고치고 동주(東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명종 5년(1175)에 감무를 두고 승령(僧嶺)을 겸하게 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피휘하여 연주(漣州)로 고쳤다. 조선 때 두 차례 마전(麻田)에 합하였다가 되돌렸다. | 연천군 연천읍 | ||
| ● | 부평군(富平郡) | 부여군(夫如郡) | 고려 초에 김화군(金化郡)으로 고치고 동주(東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인종 21년(1143)에 감무를 두었다. | 철원군 김화읍 | |
| 광평현(廣平縣) | 부양현(斧壤縣)
또는 어사내현(於斯內縣) |
고려 초에 평강현(平康縣)으로 고치고 동주(東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이후 김화 감무가 겸하게 하였다가 공양왕 원년(1389)에 감무를 따로 두었다. | 평강군 평강읍(북한 평강군 평강리) | ||
| ● | 토산군(兎山郡) |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 | 고려 초에 장단현(長湍縣), 문종 16년(1062)에 개성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 | 금천군 토산면(북한 토산군 월성리) | |
| 안협현(安峽縣) | 아진압현(阿珍押縣)
또는 궁악(窮嶽) |
고려 초에 동주(東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 | 이천군 안협면(북한 철원군 철원읍) | ||
| 삭읍현(朔邑縣) | 소읍두현(所邑豆縣) | 고려 초에 삭녕현(朔寧縣)으로 고치고 동주(東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예종 원년(1106) 승령(僧嶺) 감무가 겸하게 하였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삭녕군(朔寧郡)으로 승격시키며 승령현(僧嶺縣)을 합쳤다. | 연천군 삭녕면(북한 철원군 삭녕리) | ||
| 이천현(伊川縣) | 이진매현(伊珍買縣) | 고려 초에 동주(東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 이천군 이천면(북한 이천군 이천리) | ||
| ● | 우봉군(牛峯郡) | 우잠군(牛岑郡)
또는 우령(牛嶺), 수지의(首知衣) |
고려 초에 평주(平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문종 16년(1062) 개성부에 내속하였고,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조 대에 현이 되었다가 효종 대에 강음현과 합쳐져 금천군(金川郡)이 되었다. | 금천군 우봉면(북한 금천군 현내리) | |
| 임강현(臨江縣) | 장항현(獐項縣)
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
고려 초에 장단현(長湍縣), 문종 16년(1062)에 개성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공양왕 원년(1389)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장단에 합쳐서 장임현(長臨縣)이라 하였다가 곧 다시 분리했고, 세조 4년(1458)에 다시 장단에 합치며 폐지되었다. | 장단군 강산면 임강리(북한 장풍군 임강리) | ||
| 장단현(長湍縣) | 장천성현(長淺城縣)
또는 야야(耶耶), 야아(夜牙) |
고려 목종 4년에 단주(湍州)로 승격되었다가 현종 9년(1018)에 도로 현이 되었고, 상서도성(尙書都省) 관할하다가 문종 16년(1062) 개성에 내속하였다. 조선 태종 14년(1414) 임강(臨江)과 합쳐 장임현(長臨縣)이라 하였다가 곧 분리하였다. 다시 임진(臨津)과 합하여 임단현(臨湍縣)이 되었으나 세종 원년(1418)에 장단현으로 되돌렸다. 세조 2년(1456)에 장단과 임강을 임진에 예속시켰다가 다시 동 4년에는 임강과 임진을 장단에 편입시켰다. | 연천군 장남면 | ||
| 임단현(臨端縣) | 마전천현(麻田淺縣)
또는 이사파홀(泥沙波忽) |
고려 초에 마전현(麻田縣)으로 고치고 장단현(長湍縣)의 속현으로 삼았다. 문종 16년(1062) 개성부에 내속되었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문종 2년(1452) 군으로 승격하였다. |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 | ||
| ● | 송악군(松岳郡) | 부소갑(扶蘇岬) | 고려 태조 2년에 송악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開州)라 이름하였고, 성종 14년(995)에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충렬왕 34년(1308)에 도성 안은 부윤(府尹)이 관할하게 하고 도성 밖은 개성현(開城縣)을 설치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 태조 3년에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며 유후사(留後司)를 두었고 세종 20년(1438)에 유수(留守)로 고쳤다. | 개성시 | |
| 여비현(如羆縣) | 약두치현(若豆恥縣)
또는 삭두(朔頭), 의두(衣頭) |
고려 초에 송림현(松林縣)으로 고치고 장단현(長湍縣)의 속현으로 삼았다. 문종 16년(1062)에 개성부에 내속하였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18년(1418) 임강현(臨江縣)에 편입되어 사라졌다. 임강현은 세조 4년(1458) 다시 장단(長湍)에 편입되어 사라졌다. | 장단군 진서면(북한 장풍군 선적리) | ||
| 강음현(江陰縣) | 굴압현(屈押縣)
또는 홍서(紅西) |
고려 초에 개성현(開城縣)의 속현이 되었다가, 인종 21년(1143)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효종 대에 강음과 우봉(牛峯)을 병합해 금천군(金川郡)을 만들었다. | 금천군 서북면(북한 평천군 연홍리) | ||
| ● | 개성군(開城郡) | 동비홀(冬比忽) | 고려 태조가 송악에 도읍을 정할 때 개주(開州)로 고쳤고, 성종이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가 현종 9년(1018)에 혁파하고 개성현령(開城縣令)을 두어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 3개 현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켰다. 충렬왕 34년(1308)에 개성부가 도성 안을, 개성현이 도성 밖을 관할하도록 따로 설치하였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개성을 송도개성유후사(松都開城留後司)로 고칠 때 개성현을 폐지했다. | 개풍군 서면(북한 개풍군 개풍읍) | |
| 덕수현(德水縣) | 덕물현(德勿縣) | 고려 초에 개성현(開城縣), 문종 16년(1062)에 개성부의 속현이 되었다가, 공양왕 원년(1389)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해풍군(海豊郡)에 편입하여 풍덕군(豐德郡)을 만들면서 폐지되었다. | 개풍군 봉동면(북한 개성시 봉덕리) | ||
| 임진현(臨津縣) | 진림성(津臨城)
또는 오아홀(烏阿忽) |
고려 초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이 되었다가 공양왕 원년(1389)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에 장단에 합하여 임단(臨湍)으로 고쳤다가 세종 원년(1418)에 되돌렸다. 세조 4년(1458)에 임강(臨江)과 함께 장단도호부에 합치며 폐지되었다. | 파주시 군내면 장단리(구 연천군 임진면) | ||
| ● | 해구군(海口郡) | 혈구군(穴口郡)
또는 갑비고차(甲比古次) |
고려 초에 강화현(江華縣)으로 고치고 현령을 두었다. 고종 19년(1232)에 몽골군이 개경으로 침입하자 이곳을 도읍으로 삼고 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원종 원년(1260)에 환도하였다. | 강화군 강화읍 | |
| 호음현(沍陰縣) | 동음나현(冬音奈縣)
또는 휴음(休陰) |
고려 초에 하음현(河陰縣)으로 고치고 강화현의 속현으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폐현으로 쓰여있다. | 강화군 하점면 | ||
| 교동현(喬桐縣) | 고목근현(高木根縣)
또는 달을참(達乙斬) |
고려 초에 강화현의 속현이 되었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 | 강화군 교동면 | ||
| 수진현(守鎭縣) | 수지현(首知縣)
또는 신지(新知) |
고려 초에 진강현(鎭江縣)으로 고치고 강화현의 속현으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폐현으로 쓰여있다. | 강화군 양도면 | ||
| ● | 영풍군(永豐郡) |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지홀(多知忽) |
고려 초에 평주(平州)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 원종 10년(1273)에 복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 대에 복구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평산(平山)으로 고치고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 평산군 평산면(북한 평산군 산성리) | |
| 단계현(檀溪縣) | 수곡성현(水谷城縣)
또는 매단홀(買旦忽) |
고려 초에 협계현(俠溪縣)으로 고치고 곡주(谷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이후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신계현에 합쳐져 폐지되었다. | 신계군 다율면(북한 신계군 추천리) | ||
| 진단현(鎭湍縣) | 십곡성현(十谷城縣)
또는 덕돈홀(德頓忽) |
고려 초에 곡주(谷州)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 조선 태조 2년(1393)에 곡산(谷山)으로 개칭하였다. | 곡산군 곡산면(북한 곡산군 곡산리) | ||
| ● | 해고군(海皐郡) | 동삼홀군(冬彡忽郡)
또는 동음홀(冬音忽), 시염성(豉鹽城) |
고려 초에 염주(鹽州)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가 해주에 내속시켰고, 뒤에 다시 감무를 두었다. 고려시대에 영응(永膺), 복주(復州), 석주(碩州), 온주(溫州)를 거쳐 연안(延安)으로 개칭되었다. | 연백군 연안읍(북한 연안군 연안리) | |
| 구택현(雊澤縣) | 도랍현(刀臘縣)
또는 치악성(雉嶽城) |
고려 초에 배주(白州)로 고치고 평주(平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이후 개흥부(開興府), 충익현(忠翊縣), 복흥군(復興郡)으로 개칭되다가 공민왕 18년(1369)에 다시 배주(白州)로 고쳤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배천군(白川郡)으로 개칭했다. | 연백군 은천면(북한 배천군 배천읍) | ||
| ● | 폭지군(瀑池郡) | 내미홀군(內米忽郡)
또는 지성(池城), 장지(長池) |
고려 초에 해주(海州)로 고치고 목(牧)의 하나로 삼았다. | 해주시 | |
| ● | 중반군(重盤郡) | 식성군(息城郡)
또는 한성군(漢城郡), 한홀(漢忽), 내홀(乃忽) |
고려 초에 안주(安州)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가 해주(海州)에 내속시켰다.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고 고종 4년(1217)에 재령현(載寧縣)으로 승격했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풍주(豐州)의 삼지현(三支縣)을 편입했다. | 재령군(북한 재령군, 신원군) | |
| ● | 서암군(栖嵒郡) | 휴암군(鵂嵒郡)
또는 휴류성(鵂鶹城), 조파의(租波衣) |
고려 초에 봉주(鳳州)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가 이후 황주목에 내속시켰다. 이후 봉양군(鳳陽郡)으로 승격하였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에 봉산군(鳳山郡)으로 고쳤다. | 봉산군 동선면(북한 봉산군 구읍리) | |
| ● | 오관군(五關郡) | 오곡군(五谷郡)
또는 우차탄홀(于次呑忽) |
고려 초에 동주(洞州)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가 이후 평주(平州)에 내속시켰다. 원종 대에 서흥현(瑞興縣)으로 승격하였다. | 서흥군 서흥면(북한 서흥군 고성리) | |
| 장새현(獐塞縣) | 장새현(獐塞縣)
또는 고소어(古所於) |
고려 초에 수안현(遂安縣)으로 고치고 곡주(谷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충선왕 2년(1310)에 수주(遂州)로 승격하였다. 조선 대에 수안군(遂安郡)으로 고쳤다. | 수안군 수안면(북한 수안군 수안리) | ||
| ● | 취성군(取城郡) | 동홀(冬忽)
또는 우동어홀(于冬於忽) |
고려 초에 황주(黃州)로 고치고 목(牧)의 하나로 삼았다. 고종 4년(1217)에 고령군(固寧郡)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황주목(黃州牧)이 되었다. | 황주군 황주읍(북한 황주군 황주읍) | |
| 토산현(土山縣) | 식달(息達)
또는 금달(今達), 신달(薪達) |
고려 초에 황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충숙왕 9년(1322)에 상원군(祥原郡)으로 개칭되었다. | 중화군 상원면(북한 상원군 상원읍) | ||
| 당악현(唐嶽縣) | 가화압(加火押) | 고려 때 서경(西京)의 속촌(屬村)이 되었다가 인종 14년(1136)에 경기(京畿)를 나누어 6현으로 할 때 황곡(荒谷)·당악(唐岳)·송곶(松串) 등 9개 촌을 합하여 중화현(中和縣)을 설치하고 서경 평양부(平壤府)의 속현으로 삼았다. 충숙왕 9년(1322)에 군으로 승격했다. | 중화군 당정면(북한 강남군 장교리) | ||
| 송현현(松峴縣) |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
또는 구사현(仇史峴) |
고려 때 서경(西京)의 속촌(屬村)이 되었다가 인종 14년(1136)에 경기(京畿)를 나누어 6현으로 할 때 황곡(荒谷)·당악(唐岳)·송곶(松串) 등 9개 촌을 합하여 중화현(中和縣)을 설치하고 서경 평양부(平壤府)의 속현으로 삼았다. 충숙왕 9년(1322)에 군으로 승격했다. | 중화군 해압면(북한 강남군 영진리) |
고구려 한산주
[편집]또한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 한주조에는 나오지 않으나 고구려 한산주조에 나오는 고구려 지명들이 있다.
- 구을현(仇乙峴)[또는 굴천(屈迁)]: 고려 풍주(豐州), 조선 풍천군(豊川郡)
- 궐구(闕口): 고려 유주(儒州), 조선 문화군(文化郡)
- 율구(栗口)[또는 율천(栗川)]: 고려 은율현(殷栗縣), 조선 은율군
- 장연(長淵): 고려 장연현(長淵縣), 조선 장연군
- 마경이(麻耕伊): 고려 청송현(靑松縣), 조선 태종 때 가화현과 합쳐 송화현(松禾縣) 설치
- 양악(楊岳): 고려 안악군(安岳郡), 조선 안악군
- 판마곶(板麻串): 고려 가화현(嘉禾縣), 조선 태종 때 청송현과 합쳐 송화현 설치
- 웅한이(熊閑伊): 고려 영녕현(永寧縣)[또는 수녕현(水寧縣)], 조선 태종 때 가화현에 합쳐 폐지
- 옹천(甕迁): 고려 옹진현(瓮津縣), 조선 옹진군
- 부진이(付珍伊): 고려 영강현(永康縣), 조선 세종 때 백령(白翎)과 합쳐 강령현(康翎縣) 설치
- 곡도(鵠島): 고려 백령진(白翎鎭), 공양왕 때 문화현에 편입하여 폐지되었다가 영강현과 합하여 강령현 설치
- 승산(升山): 고려 신주(信州), 조선 신천군(信川郡)
이에 대해, 본래 신라가 군현제를 시행하지 못한 지역으로 후삼국이나 고려 시기의 지명이라는 견해(정상수웅, 1974, 87쪽; 김태식, 1997, 47~51쪽)[15][16], 신라가 군현으로 편제하지 못하고 대곡성(大谷城=永豐郡, 황해도 평산)에 설치한 패강진(浿江鎭)이 일종의 군관구로 군사적으로 통괄하다가 궁예의 태봉에서 처음으로 행정구역으로 편제하였다는 견해(전덕재, 2013, 25~28쪽)[17], 신라 9주에 소속되지 않은 지역으로 대곡진(大谷鎭) 두상(頭上)이 설치된 선덕왕 3년(782)년부터 패강진전(浿江鎭典)에서 독립적으로 관할하였다는 견해(박남수, 2013, 57~62쪽)[18] 등이 있다.[19]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18년(기원전 1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을 하여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임진강)에서 맞아 싸웠다.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묻어 죽였다.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원문: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 ↑ 14년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十四年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飡武力爲軍主)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 ↑ 18년,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十八年 廢新州 置北漢山州)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 ↑ 29년 겨울 10월,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二十九年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 ↑ 26년 가을 7월, 남천주를 없애고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였다.(二十六年 秋七月 廢南川州 還置北漢山州)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평왕
- ↑ 남천정을 두었다가 진평왕 26년에 남천정을 폐지하고 한산정을 두었다.(置南川停 眞平王二十六年 罷南川停 置漢山停) 《삼국사기》 제40권 잡지 제9(신라 무관 3)
- ↑ 4년(서기 664년) 봄 정월, 아찬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았다.(四年 春正月 以阿飡軍官爲漢山州都督)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 통일신라의 패강(패수)은 대동강을 가리키므로, 대동강 하류와 가까운 황해도 봉산군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 ↑ 조이옥(2001)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 ↑ “삼국사기 권 제35잡지 제4 지리(地理)二 신라(新羅) 한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 “삼국사기 권 제37잡지 제6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한산주의 주·군·현·성”.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 근초고왕 24년, 도읍을 남평양으로 옮기고 "북한성(北漢城)"이라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광주목.
- ↑ 한양군은 본래 고구려의 북한산군으로 평양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
- ↑ 한성부는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이니, 일명 북한산군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
- ↑ 井上秀雄, 1974, 「三国史記地理志の史料批判」,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 ↑ 김태식, 1997,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의 사료적 검토」, 『역사학보』 154
- ↑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 ↑ 박남수, 2013, 「신라 浿江鎭典의 정비와 漢州 西北境의 郡縣 설치」, 『동국사학』 54
- ↑ “삼국사기 권 제37잡지 제6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한산주의 주·군·현·성”.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