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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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
百濟 聖王
백제의 제26대 국왕
본명 부여명농(扶餘明禯)
재위 523년 ~ 554년
사망일 554년
사망지 충청북도 옥천군 관산성
부왕 무령왕
전임자 무령왕
다음 왕 위덕왕

성왕(聖王, ? ~ 554년, 재위: 523년 ~ 554년 음력 12월)은 백제의 제26대 국왕이며,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명농(明禯)이고, 삼국유사에는 명농(明穠), 중국 측 기록인 양서(梁書)에는 이름이 명(明)으로 기록되었다.[1] 무령왕의 아들로 결단성이 있고 지혜와 식견이 빼어났다. 무령왕이 죽자 왕위를 이은 명농을 백성들은 성명왕이라 하였다.[2]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 또는 명왕(明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왕은 생존 시에도 성명왕 혹은 성왕이라는 존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왕'은 '전륜성왕'을 줄인 이름으로, 성왕은 불가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여 왕실과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데 사상적으로 불교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여겨진다.[3] 성왕은 왜(倭)에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었고[4], 또 겸익인도에서 불경 등을 가지고 돌아오자 이를 크게 환영하는 한편, 그 불경을 번역하게 하는 등 [5] 불교 번성과 교단 정비에 노력하였다. 또한,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초빙하여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제작하게 하였다.[6]

생애[편집]

523년 음력 5월에 부왕인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그해 음력 8월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7]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이 즉위한 때는 무녕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524년 정월로 기록되어 있다. 524년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양 고조로부터 "지절도독 백제제군사수동장군 백제왕(持節都督 百濟諸軍事 綏東將軍 百濟王)"에 책봉되었다.[8] 525년 음력 2월,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여 수교하는 한편,[9] 526년 음력 10월 웅진성을 수리하였으며 [10] 남조와 연대하고, 왜와 제휴를 꾀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전통적 외교 노선을 다져나갔다.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혈성이 함락되었다.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싸우게 했지만 오곡원(五谷原) 전투에서 패하여 2천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전사하는 등 .[11]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534년 3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나라에 조공하였다. 그 해 여름 4월 정묘에 형혹(熒惑; 화성)이 남두(南斗, 남두육성 ; 궁수자리의 일부)를 침범하였다.[12]

538년 , 수도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13] 540년 9월에 왕은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14] (541년)에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를 올려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경서)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여 양나라의 허락을 받았다.[15]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한북, 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진흥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16] 549년 10월에 성왕은 양나라의 건강(建康)에 후경(侯景, ? ~ 552년, 양의 장군)의 난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이미 황폐하고 허물어진 성(城)과 대궐을 보고 단문(端門) 밖에서 소리 내 우니, 길을 가던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 일행을 모두 잡아 가두어 버렸다. 그 후 후경의 난이 평정되고 그들은 비로소 환국할 수 있었다.[17] 불교를 진흥했으며 중국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여 일본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550년 정월에 왕은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18]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19]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 진흥왕은 함경남도, 함경북도까지 진출하여 순수비를 세우며 세를 넓혀갔지만,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고구려 평양성 협공을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 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 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를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를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제가 화해를 원하므로 진군을 멈추었다. 553년 음력 7월,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회복한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신라에 빼앗기고,[20][21] 신라에 포위되었다. [22] 음력 10월에 왕녀를 신라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23]

554년 일본에서 병사를 모으는 한편, 왕자 창(昌):27대 위덕왕(威德王)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신라의 복병 김무력에게 살해당하였다.

사망에 대한 이견[편집]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성왕의 사망년도는 554년이다.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전사한 것은 현존하는 기록들 모두가 증언하고 있지만,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이 모두 다른 의견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기(백제)에서는 "32년(554년)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 현재의 옥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고 하고[24] 본기(신라)에서는 "백제왕 명농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였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병(主兵)을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백제왕을 급히 쳐서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의 목을 베었고 단 한 마리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25] 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왕이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성왕이 밤에 몰래 신라를 기습하려다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왕이 데리고 갔던 군사가 불과 5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볼 때 내용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26] 태자 창이 직접 참여한 관산성 전투는 오히려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서기에 보면 음력 12월 아들인 창이 신라로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신라의 고도(苦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혔다. 고도는 성왕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해주시오."라고 청하고, 성왕은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 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고도는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종의 손에 죽소."라며 잘라 말했다. 이에 성왕은 "과인은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때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 북청(北廳)의 계단 밑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 있었으며, 지금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은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 즉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과의 외교[편집]

성왕 때, 백제일본불교를 전파했다(538년).[27] 그리고,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達率; 백제의 관직)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28]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2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들을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도 파견하였다.[30] 이렇듯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을 뿐 아니라, 의박사 ·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가계[편집]

무령왕
武寧王
성왕
聖王
위덕왕
威德王
혜왕
惠王
소비 부여씨
比召 扶餘氏
(진흥왕 후궁)
미상
아좌태자
阿佐太子
미상 임성태자
琳聖太子
법왕
法王
목도왕
目圖王

성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참고[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2.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3.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56쪽. ISBN 8987787796. 
  4. 卷第十九 欽明天皇〉. 《일본서기》. 720. 
  5. 미륵불광사 사적(彌勒佛光寺事蹟)》. 
  6.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64쪽. ISBN 8987787796. 
  7.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8.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9.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0.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1.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2.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3.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4.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5.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6.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7.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8.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19.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20.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21.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22.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23.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24. 김부식 (1145). 〈본기 권26 성왕〉. 《삼국사기》. 
  25. 김부식 (1145). 〈본기 권4 진흥왕〉. 《삼국사기》. 
  26. 이희진, 《전쟁의 발견》
  27.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28. 卷第十九 欽明天皇〉. 《일본서기》. 720. 
  29.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30.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외부 링크[편집]

전 대
무령왕
제26대 백제 국왕
523년 - 554년
후 대
위덕왕 (백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