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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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가(宮家) 또는 궁방(宮房)[1]한국의 역사에서 궁궐 밖에서 독립되어 생활하던 조선의 왕족대한제국의 황족가문을 나타내는 말이다.(예로 친왕국왕대군왕자군공주옹주의 거처를 가리킨다.)

개요[편집]

고려 시대 때에 궁가와 같은 제도가 존재 했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사료가 부족하다. 그러나 인조대왕실록에 궁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때는 궁가[2] 제도가 존재 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1. 용례

도승지 윤순지…등이 연명하여 아뢰기를,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산이나 바다를 떼어받는 폐단에 대해서는 말씀드린지 이미 오래입니다마는 근래에 둔전의 일은 그 해가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 都承旨尹順之…等 聯名以啓曰…諸宮家各衙門 折受山海之弊 言之已久 而近來屯田之事 其害尤甚 [인조실록 권제45, 24장 뒤쪽~25장 뒤쪽, 인조 22년 5월 5일(임진)]

조선의 궁가[편집]

조선 태조 연간

왕자[편집]

군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배우자 비고
1 진안대군 鎭安大君 방우 芳雨 1354년 - 1393년 신의왕후 한씨 삼한국대부인 충주 지씨 三韓國大夫人 池氏
2 정종대왕 定宗大王
영안대군 永安大君
방과 芳果 1357년 - 1419년 정안왕후 김씨 定安王后 金氏 제2대 국왕
3 익안대군 益安大君 방의 芳毅 1360년 - 1404년 삼한국대부인 동주 최씨 三韓國大夫人 崔氏
4 회안대군 懷安大君 방간 芳幹 1364년 - 1421년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 三韓國大夫人 閔氏
삼한국대부인 밀양 황씨 三韓國大夫人 黃氏
금릉부부인 김포 금씨 金陵府夫人 琴氏
5 태종대왕 太宗大王
정안대군 靖安大君
방원 芳遠 1367년 - 1422년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제3대 국왕
6 덕안대군 德安大君 방연 芳衍 생몰년 미상 미상
7 무안대군 撫安大君 방번 芳蕃 1381년 - 1398년 신덕왕후 강씨 개성부부인 개성 왕씨 開城府夫人 王氏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
8 의안대군 宜安大君
폐세자 廢世子
방석 芳碩 1382년 - 1398년 폐세자빈 현빈 유씨 賢嬪 柳氏[3]
삼한국대부인 부유 심씨 三韓國大夫人 沈氏

조선 태종 연간

왕자[편집]

군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양녕대군 讓寧大君
폐세자 廢世子
제 禔 1394년 - 1462년 원경왕후 민씨 수성부부인 김씨 隨城府夫人 金氏
숙빈 김씨 淑嬪 金氏
태종 18년(1418년) 폐세자[4]
2 효령대군 孝寧大君 보 𥙷 1395년 - 1486년 예성부부인 정씨 蘂城府夫人 鄭氏
3 세종대왕 世宗大王
충녕대군 忠寧大君
도 祹 1397년 - 1450년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沈氏 제4대 국왕
4 경녕군 敬寧君 비 裶 1402년 - 1458년 효빈 김씨 청원부부인 김씨 淸原府夫人 金氏
5 함녕군 諴寧君 인 䄄 1402년 - 1467년 신빈 신씨 군부인 전주 최씨 郡夫人 全州 崔氏
6 성녕대군 誠寧大君 종 褈 1405년 - 1418년 원경왕후 민씨 삼한국대부인 성씨 三韓國大夫人 成氏
7 온녕군 溫寧君 정 䄇 1407년 - 1454년 신빈 신씨 익산군부인 박씨 益山郡夫人 朴氏
8 혜령군 惠寧君 지 祉 1407년 - 1440년 선빈 안씨 낙안군부인 윤씨 樂安郡夫人 尹氏
9 근녕군 謹寧君 농 禯 1411년 - 1461년 정빈 고씨 태안군부인 허씨 泰安郡夫人 許氏
10 희령군 熙寧君 타 𥙇 1412년 - 1465년 숙의 최씨 군부인 순창 신씨 郡夫人 淳昌 申氏
군부인 평산 신씨 郡夫人 平山 申氏
11 후령군 厚寧君 간 𥘏 1419년 - 1450년 이씨 군부인 평산 신씨 郡夫人 平山 申氏
12 익녕군 益寧君 치 袳 1422년 - 1464년 선빈 안씨 군부인 운봉 박씨 郡夫人 雲峰 朴氏
- 왕자[5] 1400년 - 1401년 미상
-     왕자[6][7] 1403년 - 1404년
- 대군[8]     미상[주 1] 원경왕후 민씨
- 대군[8]
- 대군[8]
- 대군[9] 1412년 - 1412년

조선 세종 연간

왕자[편집]

작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문종대왕 文宗大王 향 珦 1414년 - 1452년 소헌왕후 심씨 현덕왕후 권씨 顯德王后 權氏 제5대 국왕
2 세조대왕 世祖大王
수양대군 首陽大君
유 瑈 1417년 - 1468년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제7대 국왕
3 안평대군 安平大君 용 瑢 1418년 - 1453년 부부인 연일 정씨 府夫人 鄭氏 육종영 중 한사람
단종 1년(1453년) 사사됨[10]
4 임영대군 臨瀛大君 구 璆 1420년 - 1469년        의령 남씨 宜寧 南氏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 齊安府夫人 崔氏
부부인 안동 안씨 府夫人 安氏
연산군폐비 신씨의 외조부
중종단경왕후의 외증조부
5 광평대군 廣平大君 여 璵 1425년 - 1444년 영가부부인 평산 신씨 永嘉府夫人 申氏
6 화의군 和義君 영 瓔 1425년 -   ?  영빈 강씨 군부인 밀양 박씨 郡夫人 朴氏 육종영 중 한사람
성종 20년(1489년) 이후 사망[11]
7 금성대군 錦城大君 유 瑜 1426년 - 1457년 소헌왕후 심씨 완산부부인 전주 최씨 完山府夫人 崔氏 육종영 중 한사람
세조 3년(1457년) 사사됨[12]
8 계양군 桂陽君 증 璔 1427년 - 1464년 신빈 김씨     정선군부인 청주 한씨 旌善郡夫人 韓氏[13]
9 평원대군 平原大君 임 琳 1427년 - 1445년 소헌왕후 심씨 강녕부부인 남양 홍씨 江寧府夫人 洪氏
10 의창군 義昌君 공 玒 1428년 - 1460년 신빈 김씨 양원군부인 연안 김씨 梁源郡夫人 金氏
11 한남군 漢南君 어 𤥽 1429년 - 1459년 혜빈 양씨 안동군부인 안동 권씨 安東郡夫人 權氏 육종영 중 한사람
12 밀성군 密城君 침 琛 1430년 - 1479년 신빈 김씨 풍덕군부인 여흥 민씨 豊德郡夫人 閔氏
13 수춘군 壽春君 현 玹 1431년 - 1455년 혜빈 양씨 영천군부인 연일 정씨 榮川郡夫人 鄭氏
14 익현군 翼峴君 련 璭 1431년 - 1463년 신빈 김씨 김제군부인 평양 조씨 金堤郡夫人 趙氏
15 영응대군 永膺大君 염 琰 1434년 - 1467년 소헌왕후 심씨     대방부부인 여산 송씨 帶方府夫人 宋氏[14]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 春城府夫人 鄭氏
연성부부인 연안 김씨 延城府夫人 金氏
영흥대군 永興大君
역양대군 歷陽大君
16 영풍군 永豊君 전 瑔 1434년 -   ?[주 2] 혜빈 양씨     군부인 순천 박씨 郡夫人 朴氏[15] 육종영 중 한사람
17 영해군 寧海君 당 瑭 1435년 - 1477년 신빈 김씨 임천군부인 평산 신씨 林川郡夫人 申氏
18 담양군 潭陽君 거 璖 1439년 - 1450년 미혼

조선 중종 연간

왕자[편집]

군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복성군 福城君 미 嵋 1509년 - 1533년 경빈 박씨 군부인 파평 윤씨 郡夫人 坡平 尹氏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폐출
중종 28년(1533년) 사사됨[16]
2 해안군 海安君 희 㟓 1511년 - 1573년 숙의 홍씨 진산군부인 유씨 晉山郡夫人 柳氏
익창군부인 신씨 益昌郡夫人 愼氏
3 금원군 錦原君 영 岺 1513년 - 1562년 희빈 홍씨 파징군부인 정씨 波澄郡夫人 鄭氏
4 인종대왕 仁宗大王 호 岵 1515년 - 1545년 장경왕후 윤씨 인성왕후 박씨 仁聖王后 朴氏 제12대 국왕
5 영양군 永陽君 거 岠 1521년 - 1561년 창빈 안씨 경양군부인 안씨 景陽郡夫人 安氏
6 덕양군 德陽君 기 岐 1524년 - 1581년 숙의 이씨 영가군부인 권씨 英嘉郡夫人 權氏
7 봉성군 鳳城君 완 岏 1528년 - 1547년 희빈 홍씨 군부인 동래 정씨 郡夫人 東萊 鄭氏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됨[17]
- 왕자[18] 1528년 - 1528년 귀인 한씨
8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 초 岹 1530년 - 1559년 창빈 안씨 하동부대부인 정씨 河東府大夫人 鄭氏 제14대 국왕 선조의 아버지
9 명종대왕 明宗大王
경원대군 慶原大君
환 峘 1534년 - 1567년 문정왕후 윤씨 인순왕후 심씨 仁順王后 沈氏 제13대 국왕
- 왕자[19] 생몰년 미상 희빈 홍씨
- 왕자[19]
- 왕자[19]
- 왕자[20] 이수
頤壽
창빈 안씨

조선 선조 연간

왕자[편집]

군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임해군 臨海君 진 珒 1572년 - 1609년 공빈 김씨 군부인 양천 허씨 陽川 許氏 광해군 1년(1609년) 사사됨
2 광해군 光海君 혼 琿 1575년 - 1641년 폐비 유씨 廢妃 柳氏 제15대 국왕
인조반정으로 폐위
3 의안군 義安君 성 珹 1577년 - 1588년 인빈 김씨 미혼
4 신성군 信城君 후 珝 1578년 - 1592년 군부인 평산 신씨 平山 申氏[21]
5 정원군 定遠君
원종대왕 元宗大王
부 琈 1580년 - 1619년 연주군부인 구씨 連珠郡夫人 具氏
인헌왕후 仁獻王后
제16대 국왕 인조의 아버지
인조 10년(1632년) 원종으로 추존
6 순화군 順和君 보 𤣰 1580년 - 1607년 순빈 김씨 군부인 장수 황씨 長水 黃氏
7 인성군 仁城君 공 珙 1588년 - 1628년 정빈 민씨 군부인 해평 윤씨 海平 尹氏 인조 6년(1628년) 역모혐의로 사사됨
8 의창군 義昌君 광 珖 1589년 - 1645년 인빈 김씨 군부인 양천 허씨 陽川 許氏
9 경창군 慶昌君 주 珘 1596년 - 1644년 정빈 홍씨 군부인 창녕 조씨 昌寧 曺氏
10 흥안군 興安君 제 瑅 1598년 - 1624년 온빈 한씨 군부인 청주 한씨 淸州 韓氏
군부인 파평 윤씨 坡平 尹氏
이괄의 난때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처형됨[22]
11 경평군 慶平君 늑 玏 1600년 - 1673년 군부인 삭녕 최씨 朔寧 崔氏
12 인흥군 仁興君 영 瑛 1604년 - 1651년 정빈 민씨 군부인 여산 송씨 礪山 宋氏
13 영창대군 永昌大君 의 㼁 1606년 - 1614년 인목왕후 김씨 미혼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증살
14 영성군 寧城君 계 㻑 1606년 - 1649년 온빈 한씨 회산군부인 황씨 檜山郡夫人 黄氏
- 왕자[23]   ?   - 1603년   미상  

조선 숙종 연간

왕자[편집]

군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경종대왕 景宗大王   윤 昀[24] 1688년 - 1724년 희빈 장씨 단의왕후 심씨 端懿王后 沈氏
선의왕후 어씨 宣懿王后 魚氏
제20대 국왕
2 왕자 성수 盛壽 1690년 - 1690년
3 왕자 영수 永壽 1693년 - 1693년 숙빈 최씨
4 영조대왕 英祖大王
연잉군 延仍君
금 昑 1694년 - 1776년 정성왕후 서씨 貞聖王后 徐氏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제21대 국왕    
5 왕자 1698년 - 1698년
6 연령군 延龄君   훤 昍[25] 1699년 - 1719년 명빈 박씨 상산군부인 김씨 商山郡夫人 金氏

※ 조선 고종 연간

  • 완화군(후일 완친왕)
  • 의화군(후일 의친왕)
  • 흥선대원군(후일 흥선헌의대원왕)
  • 덕혜옹주(고종 황제의 막내딸)

대한제국의 궁가[편집]

고종 황제순종 황제 연간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궁방
  2. 궁가
  3.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6월 19일(계사)
    내시 이만을 죽이고, 세자의 현빈 유씨를 내치다
  4.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6월 3일 (임오)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를 삼다
    세자 이제(李禔)를 폐하여 광주(廣州)로 추방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왕세자를 삼았다.
    (중략)
  5.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7월 1일 (무자)
    상왕의 탄일에 2살된 왕자가 죽다
  6.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1403년 명 영락(永樂) 1년) 2월 1일 (무신)
    왕자가 탄생하니 개복신 초례를 궐내에서 행하게 하다
  7.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4월 30일 (경자)
    두 살 난 왕자가 죽자 도감을 설치하여 장사지내다
  8.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2월 3일 (무인)
    상왕이 양녕에게 간곡히 심회를 말하고 매 사냥이나 하며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다

    (중략)

    "양녕의 하는 짓이 광태하여 가르쳐도 고치지 못하고 드디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반역을 도모한 죄는 전혀 없기 때문에 서울 근방에 두고 목숨이나 보존케 하려고 하였는데, 또 다시 오늘 같은 일이 있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에 두게 했고,

    병자년(1396년)에 효령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1397년)에 주상(세종)을 낳았다.

    (중략)

  9.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6월 23일 (병자)
    중궁이 해산을 하자 문성군 유양과 좌대언 이관 등에게 내구마를 하사하다
  10. 단종실록》 8권, 단종 1년(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10월 18일 (신축)
  11. 성종실록》 228권, 성종 20년(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5월 9일 (병인)
    화의군 이영이 자기 서자를 종적에 편입시켜 줄 것을 상소하다
  12.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10월 21일 (신해)
  13. 한확의 둘째 딸이자 인수대비의 언니
  14. 단종정순왕후의 고모
  15. 박팽년의 딸
  16.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26일 (무진)
    흉모 연루자들을 벌하다
    "미(嵋, 복성군)에게는 사약을 내리라. 두 옹주는 폐서인하고, 김인경은 먼 변방에 귀양보내라. 박수림·박인형·홍서주도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홍숙은 고신을 죄다 추탈하라. 이항에게는 사약(死藥)을 내리고, 정광필은 체직하라."

    【미(嵋, 복성군)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상(중종)이 슬픈 마음으로 정원에 전교하였는데, 이 전교를 들은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미(복성군)가 어느 곳에서 죽느냐! 그가 죄 때문에 죽기는 하지만 바로 나의 골육이다. 시체나마 길에 버려지지 않게 거두어 주어야 하겠으니, 그의 관(棺)을 상주(尙州)로 실어보내도록 하라. 이 뜻을 감사(監司)에게 하유하고, 지금 가는 도사(都事)에게도 아울러 이르라. 그리하여 연로(沿路)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내어 호송하게 하라."】

  17.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1547년 명 가정(嘉靖) 26년) 윤9월 16일 (갑오)
    영의정 윤인경과 육조에서 이완의 사사를 청하다
    완(봉성군)은 성품이 상당히 총명하였다.

    중종의 상(喪)을 당했을 때 슬퍼함이 얼굴에까지 나타나니, 보는 이들이 칭찬하였다.

    여러 왕자 중에 가장 현명하였으므로, 을사년에 가장 참혹한 화를 만났다.

    처음에 울진(蔚珍)으로 귀양갔었는데, 왕실의 지친이므로 목숨이 보존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밭을 사서 생활 대책을 세우며 장구한 계획을 마련했었다.

    자살하라는 명이 내리자, 사람들이 차마 알리지 못하고 치상(治喪)의 준비를 마친 다음에 비로소 말해 주었는데, 즉시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고 죽었다.

    곧바로 관(棺)에다 염(斂)을 하여 발인(發引)해서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18. 《귀인한씨묘지명(貴人韓氏墓誌銘)
    가정(嘉靖) 무자년(1528년)에 왕자를 낳았으나 한 돌이 되기도 전에 그만 일찍 죽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 성균관 사예 김규(金戣)의 처가 된 왕자 해안군(海安君) 이희(李㟓)의 딸을 일찍이 친자식처럼 보살피며 사랑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해안군의 부인 신씨(愼氏)가 또 귀인의 외질(外姪)인 인연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말년에는 종실(宗室) 군(君)의 부인이 된 언니 한씨(韓氏)가 낳은 아들인 의천군(義泉君) 이인(李仁, 성종의 증손)을 자신의 후사(後事)로 의탁했다고 한다.

  19. 희빈홍씨묘지명
    빈은 모두 다섯 아들을 낳았으나 많이 요절하여, 그 중에 봉작을 받은 이는 두 사람이다.

    첫째는 금원군(錦原君) 영(岺)이고, 둘째는 봉성군(鳳城君) 완(岏)이다.

  20. 숙용안씨묘갈명
    숙용은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거(岠)는 영양군(永陽君)이고, 차남 이수(頤壽)는 어려서 죽었으며, 다음은 초(岹)인데 덕흥군(德興君)이다. 딸은 정신옹주(靜愼翁州)이다.

  21. 신립의 장녀이며, 인헌왕후의 외사촌
  22.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1624년 명 천계(天啓) 4년) 2월 16일 (경자)
    심기원·신경진·장만이 상의하여 흥안군 이제를 죽이다
    이제(李瑅, 흥안군)가 복주(伏誅)되었다.

    제는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후궁 소생으로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는데 사람됨이 용렬한데다가 패악스런 행실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괄(李适)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불궤를 음모한 것이 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므로 대간이 남방에 안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궁중에 유치시켰다.

    남행(南幸)할 때에 거가를 따르도록 하였으나 제는 도망쳐 적에게 들어가 이괄의 군사에게 음식을 먹이니 이괄이 위호(僞號)를 가하고 교지라 칭하여 관원을 제수하였다.

    이괄이 패하게 되자 이괄과 함께 달아났는데 이괄이 참살되어서는 여러 날 동안 도망하여 숨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잡혔는데, 심기원(沈器遠)·신경진(申景禛)이 장만(張晩)과 상의하여 곧 군중(軍中)에서 목매어 죽였다.

  23. 선조실록》 168권, 선조 36년(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11월 13일 (을축)
    신시에 왕자가 마마로 죽자 약방 관원들이 문안하다
  24. '균'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25. '헌'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내용주
  1. 양녕대군(1394년생)의 형들이므로 경안공주(1393년생) 보다 이전에 출생함
  2. 영풍군의 사망년도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1458년 영풍군의 아내를 그 가족에게 보내고 노비는 몰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