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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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로고
표어 국민이 하나되는 새로운 세상
상징색 빨강
이념 보수주의[1][2][3]
스펙트럼 중도우파[4][5] ~ 우익[6]
당원(2012년) 2,474,036명
202,722명
(당비납부 비율 8.2%)
국가 재정지원
(2010년)
28,980,000,000원
당직자
대표 황우여
최고위원 이혜훈 심재철 정우택 유기준
(이상 선출직 득표 순)
한기호 유수택
(이상 지명직)
원내대표 이완구
역사
창당 1997년 11월 21일
병합한 정당 한국미래연합 (2002)
자유민주연합 (2006)
미래희망연대 (2012)
선진통일당 (2012)
선행조직 신한국당, 민주당
내부 조직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8, 한양빌딩
정책연구소 여의도연구원
의석
국회의원
156 / 300
광역자치의원
352 / 762
기초자치의원
1,358 / 2,888
광역자치단체장
9 / 17
기초자치단체장
89 / 228
중앙당사 모습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새누리당(-黨, New Frontier Party)[7]대한민국보수 정당이다. 2012년 2월 12일까지 한나라당(영어: Hannara Party 또는 Grand National Party[8])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2012년 1월 26일, 비상대책위원회는 한나라당의 이름을 개정하기로 하였으며, 새 당명 국민 공모 이후 비상대책위원회, 의원총회, 상임전국위원회, 전국위원회를 거쳐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으로 개명하였다.[9][10] '새누리'는 새로운의 '새'와 세상의 순우리말인 '누리'를 붙인 뜻으로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나라를 뜻한다. 새누리당의 상징빨강이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통합민주당 조순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이 때 두 정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출범하였다. 이후 잠깐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했으나(김영삼의 탈당으로 신한국당은 명목상 야당이 되었고, 그 상태에서 한나라당이 출범하였으므로 한나라당 역시 명목상으로는 야당이었다), 이회창이 대선에서 낙선함으로써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2002년 대선에서도 패해 야당 생활을 계속 했으며, 노무현 탄핵 소추를 계기로 2004년 총선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2006년 지방 선거에서 압승하였고, 이후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여당이 되었다. 2008년 총선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광우병 소고기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추락하였고, 이후 2010년 지방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2012년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도 승리하여 여당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새누리당은 여러 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신인 민주자유당에서부터 시작된 3개의 계파(민정계, 민주계, 공화계)가 존재했고, 그 외에도 소장파들이 여러 개 존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보수 계열과 진보 계열이 있었으나, 이 중 진보 계열은 2003년 탈당하였다(이들은 새천년민주당 탈당파들과 손을 잡아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한편 2006년 공화당 계열인 자유민주연합을 흡수함으로써(일부는 국민중심당을 창당) 분열이 좀 줄어들기도 했으나, 다시 탈당하여 자유선진당으로 이동하여 분열이 계속되었다. 이어 2008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친 박근혜 계열이 탈당하여 분열이 심화되었다(이들은 참주인연합으로 이동했다). 한편 당의 주요 축이던 친이계, 친박계 간의 갈등이 계속되기도 했으며, 2011년 이후 친이계가 몰락하면서 친박계가 당권을 쥐게 되었다. 이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선진통일당(자유선진당의 후신)을 흡수하면서 보수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다.

현재 당의 주요 축은 이명박 계열의 친이계와, 박근혜 계열의 친박계가 존재한다. 이 중에는 민주정의당 출신의 민정계, 통일민주당 출신의 민주계, 신민주공화당 출신의 공화계가 섞여 있으며, 그밖에 다양한 계파가 존재한다. 전신인 민주자유당부터 신한국당 시절에 영입된 소장파들도 다양하게 존재하며, 특히 그 중에는 좌익 성향의 민중당 계열도 존재한다. 민정계는 세부적으로 5공 때부터 활동한 세력과, 노태우에 의해 영입된 후신 계열이 존재하며, 민주계는 상도동계 인사들이 주류이나 훗날 3당 합당에 가담하지 않다가 다시 합류한 이들도 섞여있다. 공화계의 경우, 정통 민주공화당 출신과 순수 신민주공화당 출신, 자유민주연합 계열,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 계열 등이 존재한다.

역사

한나라당 출범 이전

민주자유당 창당에서 민주계의 당권 장악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지만,[11] 당초 합당을 주도한 민정계(민주정의당 출신)가 당권을 쥐고 있었다. 중도 성향을 띠고 있었던 통일민주당은 합당 전 노태우 정부를 견제하던 야당이었고, 경쟁 상대인 평화민주당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평화민주당이 운동권 영입을 하면서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김영삼도 재야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여야는 물론 야당끼리의 대립도 심화시킬 수 있는 철저한 4당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을 견제하면서도 정부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과의 경쟁은 계속 되었고, 김영삼 자신의 차기 집권 가능성도 낮았다. 이리하여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목 하에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주도하였고, 드디어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합당 직후 의석수가 단독 개헌선인 200석을 넘는 초거대 여당이 되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이후 양심수 및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 및 학교 경찰 투입 등 독재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커졌지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여세를 몰아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첫 지방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갈수록 커졌고,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바람을 타면서 14대 총선에서는 과반에 1석 미달한 149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만다. 기존의 3당 합당은 여소야대를 타개하려는 고육지책이었으나, 결국 계파 갈등만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열릴 대선의 후보자를 두고 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을 지명하려 했으나, 김영삼을 축으로 한 민주계(통일민주당 출신)의 반발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김영삼은 투쟁을 선언하였고,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을 차기 대선 후보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경선에서 패한 이종찬은 탈당 후 새한국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출마했고, 한때 우호적이었던 민정계와 공화계(신민주공화당 출신)간의 갈등마저 심해지면서 공화계마저 민주계 지지를 선언한다. 차츰 당권이 민주계로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노태우는 총재로 선출되었지만, 민주계의 계속되는 반발과 '정치적 중립'을 명목으로 탈당한다. 이후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민주자유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지만, 당권은 이미 민주계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분당에서 한나라당의 출범까지

당권이 넘어간 후에도 민주자유당은 여전히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로 분류되었다. 민정계는 여전히 강경보수색을 띄고 있었는데 반해, 민주계와 공화계는 온건보수색을 띄고 있었다(공화계는 5공을 거치면서 탈색을 시도했다). 새로 당권을 쥔 민주계 외에 나머지 두 세력은 군부 세력이었지만, 그래도 공화계는 민주계를 지지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주도로 한 민주계는 1994년 말부터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우면서 일선 후퇴를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민주계와 공화계간의 갈등이 촉발되었고, 마침내 김종필이 이끄는 공화계가 1995년 2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3월 자유민주연합을 독자적으로 창당하면서 분당이 일어났다. 이후 민주자유당은 민정계와 민주계로만 분류되었다. 같은 해 열린 지방 선거에서 탈당파들이 만든 자민련이 바람을 타면서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노태우가 비자금에 연루되면서 구속되었고, 이어 과거사 청산이 시작되면서 전두환과 함께 '광주 학살의 원흉'으로 낙인 찍혔다. 이렇게 되면서 민정계마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김영삼은 이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민정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민주자유당'은 당권이 넘어가고도 '민정계가 만들었다'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결국 1995년 11월 이름을 가칭 신한국당으로 개명했고, 이후 전면 물갈이를 단행하면서 민주자유당의 해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박희태 등을 제외한 상당수의 민정계와, 자유민주연합에 가담하지 않고 남아있던 잔류 공화계가 당에서 추방당하면서 민주자유당은 민주계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이회창 전 총리나 김문수, 이재오 등과 같은 민중당 인사 등 자신의 반대파들까지 영입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은 5,6년 만에 해체되었다.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젊은 피 수혈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신한국당은 1996년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139석을 획득하여 원내1당으로 부상했으며, 특히 서울에서는 여당이 야당을 제치고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등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 심지어 약세가 두드러졌던 호남에서조차 1명이 당선되는 등 지역주의를 부분적으로 타파했다. 하지만 1988년, 1992년과 마찬가지로 여소야대 국회가 이어지자 정치공작을 펼쳐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을 영입시키는 수단으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12] [13]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도를 추락시켰고, 동년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 등 민주계조차 반민주적 성격을 보이면서 국민과 재야의 지지도는 한 층 더 추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14] 민주자유당 시절 민정계의 몰락도 모자라, 민주계도 차츰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거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의 반대파였던 이회창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계 입문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이회창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서 국민과 여당 내의 지지율도 상승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야당이 이회창의 아들 병역 기피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도덕성'에 큰 타격울 주었고, 경제 위기가 겹치고 신한국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이회창의 지지도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선에서 패한 민주계의 이인제가 독자 출마를 하면서, 이회창과 김영삼 간의 갈등이 촉발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민주계 강삼재가 이회창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김영삼이 몰래 이인제를 지원한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서 계파 갈등은 더 심해졌다. 이 상황 속에서도 김영삼은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를 하루만에 중단 결정을 내려[15] 대선에서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오히려 계파 갈등을 더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적용했다. 결국 김영삼과 이회창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은 가운데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새 총재로 선출되었고, 이후 김영삼을 추방시키려고 했다. 이회창은 차츰 자신의 YS이미지를 지우기 시작했고, 이어 11월 김영삼을 전격 추방시켰다. 결국 민주계마저 사실상 몰락하였고,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모든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11월 13일 통합민주당 조순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를 도출해내 21일 양당 합당을 통한 단일화를 이루었다.[16] 이로써 신한국당은 2년 만에 해체되었고,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 조순을 총재로 한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한나라당 출범에서 실용정부 시절까지

야당으로의 몰락과 이회창의 활약

이로써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기존의 신한국당처럼 민주계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총재도 민주당계인 조순(통합민주당 출신)을 총재로 추대했지만 실절적인 당권은 이회창이 쥐고 있었다. 이후 이회창은 15대 대선에서 활약을 보여 이인제를 누르고 2위 자리를 차지했지만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에게 패하여 낙선, 정권 교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회창은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였고, 서슴없이 제1야당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었다. 한나라당은 이것을 이용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햇볕정책김종필 총리 임명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로 일관했다. 그러나 30여 년 만에 등장한 새로운 집권세력에 기대를 하고 있었던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급기야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창은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가 아닌, 한나라당의 총재로 부상한다(1998년 8월).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둘 다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 등 한나라당의 각종 스캔들을 들춰 한나라당을 압박하였으며, 약 40명에 달하는 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갔다. 게다가 김영삼과의 갈등도 심해 민주계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김대중김종필의 사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회창은 다시 기회를 잡는다. 전대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의 당내 입지를 좁혀 표하게 만들었으며(이들은 한나라당 탈당 후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지만, 2000년 총선에서 아무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사라진다), 김대중 정부의 여러 가지 부패, 비리 사건을 이용해 집요하게 여당을 공격했다. 이런 이회창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된다. 게다가, 공동여당의 의석수를 누르고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여,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민주계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하였다.[17]

대선 패배와 계속되는 야당 생활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부터 돌풍을 몰고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초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무명이었던 노무현의 등장 과정과 달리 이회창은 정계 입문 전부터 유명세를 떨친 것은 물론 1997년 대선 때부터 실질적인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사실상 2002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도움과 국회의원 시절의 독특한 정치행보,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는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정치가, 지난 30여 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민적인' 행보를 하던 이회창 후보는 서민적 이미지 만들기에는 실패한다. 사실, 노사모에 비견될만한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쌓아온 여러 가지 경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 김대중 정부 말기의 대형 측근 비리 사건은 이회창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계열과 이인제, 김윤환 계열의 이탈로 리더십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4월 한나라당 내 김용갑 등 당내 보수파가 그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천명하는 등 강경 보수 성향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만회하는 듯 했다.[18]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호남, 충청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도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고, 9월에는 정몽준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등 이회창이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작은 차이나마 꾸준히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대선 중 이회창과 대립하던 박근혜가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분당이 있었으나, 얼마 뒤 다시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회창도 비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2년에만 823억 정도를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차떼기[19]를 비롯하여,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점, 1997년 대선에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비리 혐의(법정에서는 무혐의로 판결) 등으로 이회창은 여당의 악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아들 이정연, 이수연의 병역 면제와 관련, 2001년초부터 대선 직후까지 모병담당자였던 김대업, 설훈 등으로부터 병역 면제 의혹이 제기되어 왔고, 병역면제 의혹으로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서해교전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입장인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때문에 전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로 인해 11월부터는 노무현이 여론조사 상에서 이회창을 2~3% 앞서는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선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지지를 철회하고, 각종 보수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20] 결국 이회창은 또다시 낙선하였고, 이후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회창도 이를 기점으로 모든 당권을 내놓았다.

분당과 총선 패배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그는 더 이상 당권을 쥐지 않게 되었다. 대선 직후 민정계인 박희태가 새 총재로 선출되었으나, 얼마 뒤 같은 민정계인 최병렬이 새 총재로 선출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국민들에 대한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노무현의 여러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노무현의 새천년민주당도 그를 압박하면서 민주당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7일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등 5명과 기타 진보/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동하면서, 분당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2004년에 접어들어, 민주당은 노무현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며 탄핵안을 제출했다. 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동조하였고, 실질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던 가운데 3월 12일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1987년 이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 일어났다. 여기서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크게 실망했고, 지지도는 더욱 더 추락했다. 게다가,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을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당 대표가 되었다.[21] 이로써 그녀는 한나라당 최초로 여성 대표가 되었다. 박근혜는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거여 견제론' 등으로 열린우리당을 견제했고, 영남에서 전폭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탄핵'으로 인해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결국 제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 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내기는 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152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에게 참패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원내 1당의 지위는 빼앗겼고,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여당을 향한 압박에서 정권 교체까지

사실상의 여당 정도로, 명목상 야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입당으로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이 정책을 '국론 분열'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강하게 압박했고, 그들은 결국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2005년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통과시켰다. 이에 박근혜 대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22] 이어 열린우리당의 대연정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6년 4월 7일 자유민주연합(2004년 이후 사실상 국민들에게 잊혀졌다)을 흡수했으며[23], 여세를 몰아 동년 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대대적인 압승을 거두었다(열린우리당은 호남에서조차 참패를 당했다). 이미 박근혜는 모든 당권을 장악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오랫동안 총재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잠시 가라앉았던 계파 갈등이 벌어졌다. 서울특별시 시장을 하면서 지지를 얻은 이명박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서 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여기서부터 이명박 계열은 '친이계'로, 박근혜 계열은 '친박계'로 표현하겠다). 이어 친이계가 당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고 친박계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계파 갈등이 심화된다. 이는 민주계와 공화계 간 갈등의 재현이었다. 박근혜는 대선을 1여년 앞두고 대표직을 사퇴했고, 이후 경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명박에게 패했다. 일단 박근혜는 승복했지만,[24] 계파 간의 갈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무명 생활을 하던 이회창이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강행하여 지지도가 추락했지만, 이미지가 실추된 열린우리당을 제치고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선의 결과가 이미 예상된 상태에서 이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게 된다. 이어 2008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여당이 되었다.

지지율 추락과 친이계의 몰락

이명박의 취임으로 한나라당은 1998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여당이 되었고, 취임 초반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국민들의 지지가 높게 적용하면서 2008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을 획득하여,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미국산 소고기 등에 관한 논란으로 시위가 터졌고, 이 시위를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은 7.4%까지 추락했고,[25] 한나라당의 지지율도 그에 못지 않게 추락했다. 2008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전 대표 박희태가 정몽준을 제치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지지율 추락의 결과로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했다. 이어 이듬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수도권과 영남 지역 등에서만 승리하였다. 지방 선거 참패로 인해 정몽준 대표가 사임했고, 이후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안상수가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 시기 친이계와 친박계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갈등이 심해진 끝에 급기야 분당설까지 나왔다.[26]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나,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게 되었다.

2011년 7월 4일 전당대회에서 홍준표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면서 재보궐선거에서 패했고, 12월 홍준표와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였고 비상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새누리당으로 개명과 정권 창출

새누리당으로 개명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한나라당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재편된 지도부는 2012년 2월 13일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으며, 상징색을 파랑색에서 빨강색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1997년 이후 15년간 존속해오던 한나라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총선 승리와 정권 연장

이명박 정부의 여파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등 2012년 총선거에서 패배가 예상되었으나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하여 승리하였다. 하지만 문대성 등 당선자 2명이 당에서 출당되었고 강창희 국회의장 선출로 출당되면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12년 11월 선진통일당과 합당함으로써 2000년대 중반 이후 분열되었던 제도권 보수 정당들이 새누리당으로 모두 합당되었다. 이리하여 일단은 보수 정당들의 분열이 사실상 종식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 말 탈당으로 이명박 대통령도 탈당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탈당하지 않음으로서 1987년 이후 대선을 앞두고 당적을 버리지 않은 첫 대통령이 되었다.

새누리당 시절부터 박근혜는 사실상 당권을 쥐게 되었고, 이어 2012년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새누리당은 정권을 연장하게 되었다.

약력

역대 지도부

당대표

대수 역대 대표 직함 임기
1 조순 총재 1997년 11월 21일 ~ 1998년 8월 5일
(임시) 이기택 총재권한대행 1998년 8월 5일 ~ 1998년 8월 31일
2 이회창 총재 1998년 8월 31일 ~ 2000년 5월 23일
(임시) 강창성 총재권한대행 2000년 5월 23일 ~ 2000년 5월 31일
3 이회창 총재 2000년 5월 31일 ~ 2002년 4월 2일
(임시) 박관용 총재권한대행 2002년 4월 2일 ~ 2002년 5월 14일
4 서청원 대표최고위원 2002년 5월 14일 ~ 2003년 1월 30일
(임시) 박희태 대표권한대행 2003년 1월 30일 ~ 2003년 5월 13일
5 박희태 대표 2003년 5월 13일 ~ 2003년 6월 26일
6 최병렬 대표 2003년 6월 26일 ~ 2004년 3월 23일
7 박근혜 대표 2004년 3월 23일 ~ 2004년 7월 5일
(임시) 김덕룡 대표권한대행 2004년 7월 5일 ~ 2004년 7월 19일
8 박근혜 대표최고위원 2004년 7월 19일 ~ 2006년 6월 16일
9 김영선 대표최고위원 2006년 6월 16일 ~ 2006년 7월 11일
10 강재섭 대표최고위원 2006년 7월 11일 ~ 2008년 7월 3일
11 박희태 대표최고위원 2008년 7월 3일 ~ 2009년 9월 7일
12 정몽준 대표최고위원 2009년 9월 7일 ~ 2010년 6월 3일
(임시)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 2010년 6월 4일 ~ 2010년 7월 14일
13 안상수 대표최고위원 2010년 7월 14일 ~ 2011년 5월 8일
(임시) 황우여 대표권한대행 2011년 5월 9일 ~ 2011년 7월 4일
14 홍준표 대표최고위원 2011년 7월 4일 ~ 2011년 12월 9일
(임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2011년 12월 19일 ~ 2012년 5월 15일
15 황우여 대표최고위원 2012년 5월 15일 ~ 현재

원내대표

대수 역대 원내대표 임기
이상득
하순봉
이부영
정창화
이재오
이규택
홍사덕
김덕룡
강재섭
이재오
김형오
안상수 ~ 2010년 7월 14일
홍준표
안상수
김무성
황우여
이한구
최경환 ~ 2014년 5월 8일
이완구 2014년 5월 8일 ~

최고위원

새누리당은 집단지도체제의 정당으로서, 대표최고위원과 선출직 최고위원, 지명직 최고위원, 당연직 최고위원(원내대표, 정책위의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한다. 대표최고위원과 선출직 최고위원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과 당원, 일반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득표순으로 선출되며, 선출된 최고위원들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명직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대변인 등의 당직을 임명한다.

  • 박희태 대표는 2009년 10.28 재보선 출마를 위해 2009년 9월 사퇴하였고, 2008년 전당대회에서 2위를 득표한 정몽준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0년 6.2 지방선거가 당의 패배로 끝나자, 정몽준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6월 3일 총사퇴하였으며, 약 1개월 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한나라당이 운영되었다.
  •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제11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안상수, 최고위원으로 홍준표·나경원·정두언·서병수 의원이 선출되었으나, 2011년 4.27 재보궐 선거가 패배로 끝나면서,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2011년 5월 8일 총사퇴하였고, 약 2개월동안 원내대표 체제로 한나라당이 운영되었다.
  • 2011년 7월 4일 한나라당 제12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전직 지도부 중 1명인 홍준표 의원이 선출되었고, 최고위원으로 유승민·나경원·원희룡·남경필 의원이 선출되었다. 최고위원 당선자 4명 중 나경원·원희룡 의원 역시 전직 지도부였다. 그러나, 2011년 10.26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나경원 후보가 박원순 야권단일후보에게 패하자,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2011년 12월 9일 총사퇴하였고, 2011년 12월 19일부터 2012년 5월 15일 전당대회까지 약 5개월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되었다.

의원 총회

새누리당 의원 총회는 새누리당의 원내단체로 두 개의 산하 위원회를 두고 있다. 원내대책위원회는 원내대표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현재 이한구 의원이다. 정책위원회는 당 강령 및 전국규모 선거의 정책공약 등 주요정책을 수립한다. 현재 진영 의원이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

최고위원회의의 하부 기구로 사무처는 당무집행기구, 원내대책위원회 및 정책위원회의 지원의 업무를 수행한다. 사무총장이 관할하는 중앙사무처는 당의 조직관리, 재정, 행정지원, 인사를 총괄하며, 시,도당 사무처를 관장한다. 현재 홍문종 의원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에는 대표최고위원이 통솔하는 전략기획본부가 있어 주요정치현안 및 전략을 관장한다. 홍보기획본부는 당의 이념과 정강, 정책 및 당 활동 등의 홍보를 관장한다.

중앙당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4-31번지 한양빌딩에 있다.

기타

야당 시절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선거 낙선으로 야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최병렬 대표가 2003년 6·26 전당 대회에서 ‘포스트 이회창’의 첫 대표로 선출되어 전성기를 맞았으나 '차떼기'논란과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임하였다. 한나라당은 제17대 총선 참패 위기에 처하였으나 박근혜 신임 대표의 활약으로 121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27] 박근혜 대표는 16대 대선 이후 불거진 이회창 후보 진영의 800억원대 차떼기 오명을 씻기 위해 천막 당사를 세우고 당을 쇄신하는 ‘청소부’ 역할을 맡았다.[28]2005년 7월 28일 불법 대선 자금과 천안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였다.[29] 이후 참여정부의 4대 법안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보수 야당의 역할을 하였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제안한 대연정을 거부했다. 2003년 11월 30일 최병렬 대표는 '신행정수도 이전' 통과를 약속했고 당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는 2004년 6월 지자체 재보선 승리 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로 돌아섰고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이 나오자 열린우리당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합의하여 가결시켰다.[30]

친이, 친박계 갈등

당의 경선중 박근혜 측에서 BBK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 친이(親李, 친이명박) 진영과 친박(親朴, 친박근혜) 진영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박근혜 측은 결과에 승복해 갈등은 사라지는 듯하다가, 본격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어 집단탈당사태가 일어난건 공천파동에서였다. 이후 친박연대가 창당되면서 미디어법 등 몇 가지 정책들에서 친이계와 친박계의 미묘한 의견 차이는 있어왔으나, 2010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사수안을 번복하고 제안한 세종시 수정안 방침에 대해 친박연대를 비롯한 당의 주요 친박계 의원들이 반발하면서 그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박근혜는 원안 추진을 재차 강조하여 화합의 가능성이 낮아진 데 이어 심지어 분당 가능성까지 나왔다.[31] 이전에 홍준표는 박근혜의 세종시 원안 추진론 발언에 대해 '탈당'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이었고,[32] 정몽준이 당론을 변경해야 한다는 말에 박근혜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해 책임지실 문제"라며 정몽준 책임론을 들고 나왔으며,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직 관계자들까지 박근혜를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33][34]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야당들이 추진했던 정운찬 총리 해임안을 여당 내 친박계 의원들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친이계 의원들은 "총리 해임안에 찬성하는 것은 분당하자는 것" 이라며 계파간의 대립이 극화되었다.[35] 6월 29일 세종시와 관련해서 친박계 의원들을 비롯하여 야당의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수정안이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친이, 친박간의 갈등이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다는 관측들이 나왔다. 하지만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였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주요 선거 기록

역대 대선 결과

연도 선거 후보자 득표 득표율 결과 당락
1997년 15대 이회창 9,935,718표
38.7%
2위 낙선
2002년 16대 이회창 11,443,297표
46.6%
2위 낙선
2007년 17대 이명박 11,492,389표
48.7%
1위
2012년 18대 박근혜 15,773,128표
51.6%
1위

역대 총선 결과

연도 선거 지역구 비례대표 정원
당선 당선비율 당선 득표율 당선 당선비율
2000년 16대 112/227
49.34%
21/46
39.0%
133/273
48.72%
2004년 17대 100/243
41.15%
21/56
35.8%
121/299
40.47%
2008년 18대 131/245
53.47%
22/54
37.48%
153/299
51.17%
2012년 19대 127/246
51.63%
25/54
42.80%
152/300
50.67%

역대 지방선거 결과

연도 선거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당선 당선비율 당선 당선비율 당선 당선비율 당선 당선비율
1998년 2회 6/16
37.5%
74/232
31.9%
224/616
36.36%
2002년 3회 11/16
68.75%
136/227
59.91%
467/682
68.48%
2006년 4회 12/16
75%
155/230
67.39%
557/733
75.99%
1621/2888
56.13%
2010년 5회 6/16
37.5%
82/228
35.96%
287/762
37.66%
1247/2888
43.18%

비판 및 논란

정체성

새누리당의 공약이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36] 당은 무상급식을 야당의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며 비난해 왔으나 2010년 6월 2일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두게되자 제한적 무상급식 확대 방침을 밝혀 포퓰리즘 논란이 일고 있다. 2010년부터 서울시를 중심으로 제기된 무상급식 논란에 대해서 당은 오세훈이 추진하는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공식 지원하기로 하였으나[37] 2011년 8월 0세 무상보육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민주당의 복지정책과 무상급식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무상정책은 추진하는 정책적 모순점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38][39]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3조원이 필요한 4세까지의 영유아 보육에 대한 무상보육은 세금폭탄이 아니고, 서울시에서 부담해야하는 700억원의 초중학교 무상급식 비용은 세금폭탄으로 돌아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40] 또한 민주당이 내놓은 반값 등록금 정책에 대해서 그동안 반대해왔던 당시 한나라당은 황우여가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후로 긍정적인 쪽으로 급격히 정책을 선회한것도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41] 2009년 7월 21일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당시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수정안 내용과 관련, “한나라당은 정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42]

비리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LG로부터 150여억 원가량의 뇌물을 현금으로 트럭째 받은 것을 비롯, 대통령 선거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43]. 그 때문에 당에 '차떼기정당'이라는 명칭이 씌워졌다. 2006년 지방선거에는 공천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공천 뇌물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44] 2004년 2월 4일 최병렬 당 대표는 "불법대선자금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당사와 천안 연수원 등 당의 재산을 팔아서 국민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라며 사과했다. 2004년 10월 26일에는 국무총리였던 이해찬이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발언을 해 국회 파행이 빚어지기도 하였다.[45]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당의 공천을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았고,[46],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지도부가 뇌물을 받고 비례대표를 공천해 해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47]

여론 조작

당원 공천

2010년 2월 울산매일신문과 추진했던 울산지역에 대한 여론조사 과정에서 뇌물을 수수하며 자당에 유리하도록 여론조사를 조작하다 적발되었으며 그중 당과 관계된 사람은 9명으로 이들은 모두 현역 단체장으로서 2010년 6월 지방선거에도 출마할 예정이었다.[48] 이전에 이명박은 지방선거에서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은 비리 사실이 폭로된 단체장들을 공천해서 더욱 강한 비판들이 제기되었고,[49] 민주당은 '울산 전 지역 공천을 포기하라'고 공세를 펼쳤다.[48]

인터넷 여론 조작

2007년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학생을 고용해 특정 후보에 유리한 댓글을 작성하도록 한 한나라당 당원[50]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51]

당시 한나라당 측에서 댓글 알바를 고용해 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조작하려 한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아고라의 일부 IP를 조사해 보니 한나라당이 위촉한 국민소통위원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52][53] 이들은 아고라에서 욕설댓글을 집단적으로 작성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고 이 의원은 지적했다.[54] 한나라당과 국민소통위는 "돈을 받고 고용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바라고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55][56]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촛불집회에 대한 태도

재협상한 FTA를 서둘러 통과시킨 새누리당은, 2008년 촛불집회 당시 한나라당은 국민의 민심을 수용한다며 반성한다던 모습에서 2010년에는 촛불 시위를 대국민 사기극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대한 일부 언론들과 누리꾼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기도 하였다.[57] 미디어오늘은 "한나라당이 역풍을 자초하였다"고 보도하였다.[58] 노영민 민주당 대변인은 "당시 대통령이 사과하고 정부가 재협정의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정부 또한 촛불시위의 정당성을 인정해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비판했다.[59]

성추행

2007년 1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중앙일간지의 원색적인 연재소설 주인공인 '조철봉'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도 논란이 된 바 있으며,[60] 최연희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명박의 '마사지걸' 발언, 박계동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61]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성희롱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건들은 개인 의원들의 실수이지만, 한나라당에서 이러한 사건이 자꾸 터지면서 '성나라당', '성희롱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언급되며 비판이 제기되었다.[62][63]

날치기

새누리당은 2008년 총선 이후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하였으며 이명박의 당선으로 집권여당이 되었다. 원내 과반수의 찬성이 있으면 법안은 통과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새누리당은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등과 관련되어 야당이 반대하였던 법안 등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는 정상적인 검토,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64] 새해 예산안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3년 연속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거나, 야당과의 합의 없이 단독으로 통과되었고 미디어법과 재협상한 한미FTA,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새누리당에 의해 날치기되었다. 이에 대해 야당과 일부 언론들은 새누리당이 날치기로 처리했다고 비판했다.[65][66] 2011년 예산안은 박희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호원들의 호위 속에 처리되었다.[67] 날치기는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하는 계기라는 지적도 제기된다.[68]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새누리당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처리된것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12월 28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들은 집회를 갖고 날치기 7적을 규정하며 사퇴를 요구했다.[70]

돈봉투 사건

2012년 총선이 다가오자 이명박 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를 느낀 당시 한나라당이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전당대회 개최할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비상대책위원들을 선출하는 방식을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투표로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줄 것인지 문제였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였던 친이계는 전당대회 개최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서 당시 고승덕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서울경제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던 중 칼럼에서 돈봉투와 줄세우기가 난무하는 전당대회를 개최하지 말고 박근혜 의원에게 당권을 주자는 취지에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가 건네진 사실을 칼럼에서 언급하면서 이런 폐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71] 그런데 당시 새로 생긴 종편 채널들이 시청률 경쟁을 하면서 한 종편에서 고승덕 의원을 출연시켜 대담을 하는 중에 위 칼럼을 근거로 돈봉투 사건을 흥미위주로 다시 꺼내면서 이를 뉴스로 확대 재생산하여 국가적으로 큰 논란이 생겼다. 위기가 커진 새누리당에서는 전당대회 개최 없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게 되었고, 고승덕 의원이 언론에 누가 돈봉투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자 새로 구성된 당 지도부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검찰에 위 사건에 대한 수사의뢰를 하게 되어, 고승덕 의원은 검찰에서 박희태 후보가 돈봉투를 살포한 사실을 진술하게 되었다. 돈봉투는 고승덕 의원 외에도 다른 의원들에게 광범위하게 살포되었으며, 박희태 국회의장 전 비서 고명진씨가 당시 캠프 상황실장인 김효재 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돈봉투를 진술하였다는 논란이 거듭되었다. 논란이 거듭되자 부인하던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수석비서관은 국회의장과 대통령수석비서관에서 결국 사퇴하였고,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수사는 축소되어 고승덕 의원 외에 돈봉투가 건네졌다는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박희태 위원만 벌금을 선고받고 마무리되었다. 이후 고승덕 의원이 친박계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고승덕은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72] 이후 박희태는 이명박에 의하여 특별사면되었다.[73]

이 사건은 고승덕 의원이 당시 관행처럼 행해지던 전당대회 돈봉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도개선 차원에서 썼던 칼럼에서 시작했다가 특정인에 대한 흥미 위주 형사사건으로 변질되어 300만원짜리 돈봉투 하나가 건네진 사건으로 축소되어 종결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19대 국회에서는 여야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하여 법 개정을 하여 전당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차량 등 실비용을 당원협의회나 지역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일부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처럼 정당이 아닌 전당대회 후보자가 개인적으로 돈봉투를 건네는 행위는 여전히 형사처벌이 가능한 불법행위로 남게 되었다.

불법 선거운동

2012년 12월에 이뤄진 18대 대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불법 선거운동 사무실을 차려 정직원들을 고용하여 인터넷으로 선거운동을 한 의혹을 받아 KBS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수사를 받았다. 선관위는 사무실을 수색한 후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하였다. 정세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이보다 더한 박근혜 후보측의 불법 선거운동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라며 비판하였다.[74]

같이 보기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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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Shin, Gi-Wook (2010), 《One Alliance, Two Lenses: U.S.-Korea Relations in a New Er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8쪽 
  3. Peterson, Mark; Margulies, Phillip (2010), 《A brief history of Korea》, Facts On File, 242쪽 
  4. Webster, Edward; Lambert, Rob; Beziudenhout, Andries (2011), 《Grounding Globalization: Labour in the Age of Insecurity》, Blackwell Publishing 
  5. Manyin, Mark E. (2003), 《South Korean Politics and Rising "Anti-Americanism": Implications for U.S. Policy Toward North Korea》 (PDF),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6. http://thediplomat.com/2012/04/pendulum-swings-in-south-korea/
  7. 새누리당, 영문 표기 'Saenuri Party' 'New Frontier Party'(뉴스1). 새누리당을 영어로 직역하면 New World Party가 돼야 할 것이나, 영어명은 New Frontier Party로 정해졌다. 이 기사에 따르면 중국어 표기는 新国家党(정체: 新國家黨, 외래어 표기법: 신궈자당, 기사 본문의 발음 표기: 신궈지아당, 한국어 한자음: 신국가당), 일본어 표기는 セヌリ党(외래어 표기법: 세누리토)이다. 그러나 중화권 언론에서는 새누리당을 직역한 新世界党(정체: 新世界黨, 외래어 표기법: 신스제당, 한국어 한자음: 신세계당)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8. 새누리당, 영문 표기 'Saenuri Party' 'New Frontier Party'(뉴스1).
  9. 선관위 공고일은 2012년 2월 14일이다.
  10. 새누리, 당명ㆍ정강정책 확정..`박근혜당' 완성
  11. MBC뉴스데스크 (1990년 1월 22일). “민정, 민주, 공화당 합당 통한 신당 창당 공시[김성수]”. 2013년 4월 15일에 확인함. 
  12. 리멤버 1996년 공천혁명. 동아일보. 2011년 6월 17일.
  13. 김형준. 벼랑 끝에 선 한나라당. 여성신문. 2011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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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김자경 (2012년 12월 11일). “15대 대통령 선거(Ⅱ) - 역대 대통령선거 캠페인 평가”. 2013년 7월 28일에 확인함. 
  17. 하지만, 이는 이회창의 참신한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1994년 김영삼김문수, 이재오 등을 영입한 것과 유사하다.
  18. 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2/04/003000000200204111844007.html
  19. donga.com[뉴스]-昌측 823억-盧측 120억 불법모금… ‘차떼기’ 떠들썩
  20. 대선 선거일 직전의 지지철회로 민주노동당 내 민족해방 계열의 표가 노무현에게 갔다.
  21. 대한민국에서 여성 정당 대표 중 박순천에 이어 두 번째다.
  22. MB·박근혜 ‘세종시’ 문제 왜 타협 못할까
  23. “동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한나라-자민련, 이제 함께 희망의 대한민국을 만들자! ”. 한나라당. 2009년 5월 4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24. “이명박,박근혜에 2452표차 승리…경선결과 집계”. 조선닷컴. 2009년 7월 7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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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mid=tv&oid=055&aid=0000050358 한나라당, 천안 연수원 국가 헌납
  30. 운명의 이력서: Save Internet 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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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MB '마사지걸' 발언부터 강용석 "너만 쳐다보더라"..."역시 성나라당" 민중의 소리 2010년 7월 20일
  63. 한나라당을 괜히 ‘성희롱 정당’이라 하겠는가 경향신문 2010년 7월 20일
  64. 국회 예산안 심사, 3년째 부실 졸속 처리 mbc 2010년 12월 8일
  65. 미디어법 날치기 1년, 재입법이 근본처방이다 경향신문 2010년 7월 21일
  66. 민주 "'4대강예산' 날치기처리, 원천무효" 머니투데이 2009년 12월 8일
  67. 박희태 국회의장, 국회 질서유지권 발동 경향신문 2010년 12월 8일
  68. 예산안 여당 단독처리…날치기 통과에 '몸싸움' sbs 2010년 12월 9일
  69. 사과, 사과, 사퇴…' 고개숙인 한나라당 노컷뉴스 2010년 12월 13일
  70. 서민예산 몽땅 도둑질...날치기 7적 물러나라 오마이뉴스 2010년 12월 29일
  71. “고승덕, ‘전당대회 돈봉투’ 폭로 파문(종합)”
  72. “고승덕을 어찌할꼬”
  73. http://www.joseilbo.com/news/htmls/2013/01/20130129169833.html
  74. 선관위, 새누리당 관계자 불법선거운동 고발 kbs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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