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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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ja-y|明治天皇|めいじてんのう}}, [[1852년]] [[11월 3일]] ~ [[1912년]] [[7월 30일]])은 [[일본]]의 제122대 [[일본 천황|천황]](재위: [[1867년]] [[1월 30일]] ~ [[1912년]] [[7월 30일]])이다. [[휘]]는 '''무쓰히토'''({{ja-y2|睦仁|むつひと}})이며 유소년기의 궁호(宮號)는 사치노미야({{ja-y2|祐宮|さちのみや}})이다. 쇄국령을 실시하는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와 [[에조 공화국]]을 2년간([[1868년]]~[[1869년]])의 [[보신 전쟁]]에서의 승리,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 주장이 정부한테 거부당했다며 정부한테서 반란으로 겨냥하고 항거하는 [[사쓰마 번]]을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의 승리로 타파, [[1879년]] [[류큐국]]을 병합하고 일본의 천황에 대한 모든 황권을 단발령, 폐도령, 국회 개설로 강화시켜 [[일본 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조선]]에서 조선 [[급진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청나라]] 간섭에 의한 개화 실패, 청나라에서 [[위안 스카이]](원세개, 청국 실권자)의 동양 평화 주장 의견이라는 유인책에 의해 회유당하는 [[김옥균]]이 [[홍종우]]한테 총살맞아 암살당하였던 발전 문제 수모에 대한 계기로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한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秉合)하였다.


[[1889년]](메이지 22년)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일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일본 제국 헌법|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을 연호를 따 [[메이지 유신]]이라 부르며 일본의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1868년]]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일본의 연호는 천황이 새로 즉위할 때만 바뀔 수 있다는 원칙)를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메이지 대제'''(明治 大帝), '''메이지 성제'''(明治 聖帝), '''무쓰히토 대제'''(睦仁 大帝, Mutsuhito the Great) 등으로도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의 탄생일인 11월 3일을 [[문화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889년]](메이지 22년)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일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일본 제국 헌법|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을 연호를 따 [[메이지 유신]]이라 부르며 일본의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1868년]]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일본의 연호는 천황이 새로 즉위할 때만 바뀔 수 있다는 원칙)를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메이지 대제'''(明治 大帝), '''메이지 성제'''(明治 聖帝), '''무쓰히토 대제'''(睦仁 大帝, Mutsuhito the Great) 등으로도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의 탄생일인 11월 3일을 [[문화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2016년 9월 11일 (일) 22:47 판

메이지 천황
明治天皇
일본제122대 천황
재위 1867년 1월 30일 ~ 1912년 7월 30일
전임 고메이 천황
후임 다이쇼 천황
이름
무쓰히토(睦仁)
이칭 사쓰노미야(祐宮)
묘호 후시미모모야마능 (伏見桃山陵)
신상정보
출생일 1852년 11월 3일
출생지 일본 야마시로 국 교토, 교토 교엔
사망일 1912년 7월 30일
사망지 일본 제국 도쿄 부 도쿄 시, 메이지 궁전
부친 고메이 천황
모친 뇨고 구조 아사코(에이쇼 황태후)
배우자 이치조 마사코(쇼켄 황태후)
메이지
明治
1909년 망중한을 보내는 메이지 천황 무쓰히토
1909년 망중한을 보내는 메이지 천황 무쓰히토
별명 궁호 사치노미야(祐宮)
본명 무쓰히토(睦仁)
출생지 일본 교토
사망지 일본 제국 도쿄
복무 일본 제국 국군
복무기간 1882년 9월 ~ 1912년 7월 30일
최종계급 일본군 대원수
지휘 일본 제국 국군
주요 참전 보신전쟁, 세이난 전쟁, 동학 농민 운동, 청일전쟁, 러일전쟁
기타 이력 일본 제국 제122대 천황(1867년 ~ 1912년)

메이지 천황(틀:Ja-y, 1852년 11월 3일 ~ 1912년 7월 30일)은 일본의 제122대 천황(재위: 1867년 1월 30일 ~ 1912년 7월 30일)이다. 무쓰히토(睦仁 (むつひと))이며 유소년기의 궁호(宮號)는 사치노미야(祐宮 (さちのみや))이다. 쇄국령을 실시하는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와 에조 공화국을 2년간(1868년~1869년)의 보신 전쟁에서의 승리, 사이고 다카모리정한론 주장이 정부한테 거부당했다며 정부한테서 반란으로 겨냥하고 항거하는 사쓰마 번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의 승리로 타파, 1879년 류큐국을 병합하고 일본의 천황에 대한 모든 황권을 단발령, 폐도령, 국회 개설로 강화시켜 일본 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조선에서 조선 급진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청나라 간섭에 의한 개화 실패, 청나라에서 위안 스카이(원세개, 청국 실권자)의 동양 평화 주장 의견이라는 유인책에 의해 회유당하는 김옥균홍종우한테 총살맞아 암살당하였던 발전 문제 수모에 대한 계기로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한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秉合)하였다.

1889년(메이지 22년)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일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을 연호를 따 메이지 유신이라 부르며 일본의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1868년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일본의 연호는 천황이 새로 즉위할 때만 바뀔 수 있다는 원칙)를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메이지 대제(明治 大帝), 메이지 성제(明治 聖帝), 무쓰히토 대제(睦仁 大帝, Mutsuhito the Great) 등으로도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의 탄생일인 11월 3일을 문화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867년부터 1912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67년부터 1868년까지 에도 바쿠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1년간 섭정을 하였고 1868년부터 1912년 사망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그는 슬하에 5남 10녀를 두었다.

약력

생애 초반

일본 황실 문양

고메이 천황의 서자(庶子)이자 제2황자로 출생하였으며 궁호는 사치노미야(祐宮)이고. 모친은 곤다이나곤(權大納言) 나카야마 다다야스(中山忠能)의 딸인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 후궁(後宮)이다. 1852년 11월 3일 교토에서 출생, 사치노미야라는 궁호를 받았다. 유년 시절 그는 체구도 왜소하였고 병약하였으나 그를 극진히 간호한 어의 덕에 잔병치레를 떼었다. 1860년에 황태자가 되면서 무쓰히토(睦仁)로 개명했으며, 1866년(게이오 2년) 12월 25일에 아버지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면서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1868년 2월 8일에 탈상하고, 같은 해 10월 6일 즉위 의식을 비롯한 여러 제사 의식을 수행한 뒤 10월 12일 교토 고쇼에서 아마테라스 대신 등에게 공개적으로 대제전을 드림과 동시에, 즉위 교서를 내외에 선언하였다. 즉위 초반 그를 추대한 일부 훈신들이 선황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곧 묻혀졌다. 막부의 전횡에 의분을 느낀 일부 개화무사와 개화사상가는 즉위 초반의 그에게 친정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고, 천황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판단한 그는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 세력을 제압하고 친정을 할 계획을 세운다.

즉위 초반 그의 왜소하고 병약한 체구를 조절해야 된다는 양의들의 권고에 따라 꾸준히 운동을 하고 육류를 섭식하여 체구와 체력을 단련해 나갔다.

막부 말기의 혼란

1872년(메이지 5년)궁정개혁 전의 사진
도쿠가와 막부의 지도자 도쿠가와 요시노부

안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19세기 후반의 에도 막부는 도시에서 진행된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쇄국령에 맞서기 위해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을 수용하는 가나가와 조약으로 개국을 펼치다가 이이 나오스케가 조정 칙허없이 실행하고 마는 안세이 5개국 조약으로의 문제에 의해 조정과 막부는 혼란에 접어들었다. 조정은 특히 존황양이를 내세운 조슈 번 등의 움직임을 기반 삼아 정치적 발언권을 키워나갔고, 막부는 점차 조정의 눈치를 보게 됐다. 이 때문에 막부 안에서는 여러 세력간의 대립이 일어났고 그 기반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고메이 천황 붕어 직후) 1867년(게이오 3년) 도사 번(고치 현) 출신이던 사카모토 료마나카오카 신타로의 중재에 의해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과 조슈 번(야마구치 현)이 도막(막부 토벌) 동맹을 맺기에 이르자 약체화된 막부의 고민은 커졌고, 결국 막부가 붕괴하기 전에 정치권력을 조정에 돌려주겠다(봉환)고 조정에 제의했다. 조정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약 300여 년에 걸친 에도 막부는 종언을 고했다. 이후 정권을 넘겨받은 조정에 저항하던 세력들은 1868년(게이오 4년)부터 1869년(메이지 2년)에 걸쳐 대규모 내란을 일으켰지만 사쓰마 번조슈 번, 도사 번을 주축으로 한 조정군에 의해 토벌됐고, 새 시대가 개막했다.

메이지 시대의 개막과 일본의 근대화

미국, 영국의 사절단과 함께(1868년)
1872년(메이지 5년)궁정개혁 후의 사진

메이지 천황은 1868년 9월부터 일세일원(一世一元)을 결정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이어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로 고치고 도쿄로 옮겨(이어)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소유였던 도쿄 성(구 에도 성(江戶城))을 궁성으로 정하고, 판적봉환을 허락했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다른 한편 1870년(메이지 3년)에는 신도를 국교로 정하고, 제정일치를 선포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신도의 국교화와 천황의 '신격화'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미국 등의 서구 사절단의 화려한 외모에 매료된 그는 신문물 개방의 뜻을 펼친다. 이때 막부(幕府) 세력이 독단적으로 개항을 추진하여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의 반발을 샀으나, 그는 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는 관주도(官主導)의 개발, 자본력 육성과 정치력, 군사력 강화에 치중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실시하여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역을 천황이 직할하도록 바꾸었고, 1872년 서구식으로 학제를 공포하였다. 1873년(메이지 6년)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신 정부에 널리 퍼진 정한론을 둘러싸고,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와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 사이에 대립이 벌어지자 메이지 천황은 칙서를 내려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중지해 대립이 퍼지는 걸 막았다. 이에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를 포함한 일부 인사가 사직하면서 유력 인사를 잃긴 했지만, 신 정부는 이후 국내 개혁에 힘을 기울여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다. 또한 1874년(메이지 7년)부터 이어진 자유민권운동에 맞닥뜨리자 1881년(메이지 14년)에 국회 개설의 칙유를 내려 의회 창설 시기를 명시하는 등 노력으로 운동이 격화하는 걸 막았다.

체제 정비

1890년 일본 제국 귀족원 의회에 참석한 메이지
1890년 일본 제국 귀족원 의회에 참석한 메이지

1882년(메이지 15년)에는 군대를 천황의 군대로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내리고, 발표하였으며 군비의 증강에 노력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이후에는 머지않은 의회 창설에 대비해 입헌군주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내각제도, 시정촌(市町村)제, 부현제, 군제 등의 제정과 함께 전국에 걸친 관료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막대한 황실 재산도 마련했다. 1885년에는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흠정헌법의 성격을 가진 대일본제국 헌법을 마련해 입헌군주국으로 한걸음을 더 내디뎠다. 황족의 예를 서술한 《황실전범》(皇室典範)을 서술, 편찬하였으며 1890년(메이지 23년) 교육칙어를 내려 천황제 국가를 지탱하는 신민의 배양을 도모했다. '제국헌법'에서 그는 왕의 국가통치의 정치적 대권과 일본 제국육군·해군 군 통수권을 명기하였고, 교육칙어에서는 천황이 국민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황제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그해 일본 제국 귀족원 의원을 개설하고, 귀족원 의원의 대표를 선출하게 했다. 최초의 의회인 귀족원의 초대 의장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귀족원 의회에 참석하여 수시로 의회 내용을 참관하였다.

전쟁승리와 황권 확립

병력을 사열하는 도중

메이지 천황은 대본영에서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일본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근대 전쟁)과 러일 전쟁에 대한 직접 전쟁을 살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영일 동맹을 체결하고, 군사적·경제적인 성장을 도모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1905년 대한제국을사 보호 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의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영국 왕자 아더와 사절단을 면담 (1909년)

그 뒤 그는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두는 것에 만족하려 하였으나 정한론이 강하게 대두됨에 따라 조선 병합 정책을 추진, 1910년(메이지 43년) 8월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국가로 팽창시키는 정책을 채용했다. 1911년(메이지 44년) 개항 이래의 목표였던 불평등조약 개정으로 명실공히 열강의 하나로 성장해 나갔다. 동학 농민 운동(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승리), 청일 전쟁러일 전쟁의 연이은 일본군의 승리는 천황에 대한 국민적 숭앙(崇仰)과 존경심을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공고히 하였다.

사망

메이지 천황은 1912년(메이지 45년) 7월 30일에 지병이던 당뇨병의 악화로 향년 59세로 붕어(사망)하였다. 공식적으로는 7월 30일 오전 0시 43분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약 2시간 전인 7월 29일 오후 10시 40분 경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후임 천황의 즉위식을 전임 천황이 세상을 떠난 날에 올리는 관습을 고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해(다이쇼 원년) 9월 13일, 도쿄 아오야마의 제국육군연병장(현재의 메이지 신궁 외원)에서 대상례를 올렸다. 대상 이후 메이지 천황의 관은 영구 열차로 옮겨져, 도카이도 본선을 경유하여 교토 남쪽의 후시미모모야마노미사사기로 옮겨져 9월 14일에 능에 묻혔다. 전통적인 일본 시가(詩歌) 양식으로 쓴 10만 여 수의 시조를 남겼다.

성격과 영향

메이지 시대 말기의 메이지 천황
  • 메이지 천황은 근대 격변기의 천황으로,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의 조슈 정벌을 막아내기 위한 천황제의 확립과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줬다. 젊은 나이에 즉위한 뒤 대정봉환왕정복고, 보신 전쟁, 메이지 유신, 세이난 전쟁,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격동의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정부의 최고 권력자로 있으면서 국민의 외경을 받았다.
  • 승마와카를 즐겼다.
  • 청년 시절에는 한학자 모토다 나가자네사사키 다카유키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서양 문물에 회의적인 뜻을 표했다. 특히 교육에서는 유학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모토다의 가장 큰 지지자였으며, 교육 행정을 서양 교육론자가 지도하는 데 대해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884년(메이지 17년)에 모리 아리노리문부성의 고문에 임명되는 것을 알고는 병을 핑계로 정부 고관과 면회를 일체 거절하고, 2개월 가까이 공무를 방치하면서까지 승인을 미루기도 했다. 이러한 사태를 우려한 이토 히로부미 초대 내각총리대신궁내대신을 겸임하면서 천황의 의향을 내각에 전달하는 등 천황의 내각 불신을 해소하려고 했고, 이토가 목표로 한 입헌군주국 건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1886년 메이지 천황도 황후 이하의 부인이 궁중에서 양장 차림을 하는 것을 허가하는 등 서양 문물에 대한 반감이 약간이나마 감소하게 됐다.
  • 메이지 천황은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사진 찍기는 싫어했다.
  • 메이지 천황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자체로 여겨졌고, 메이지 천황의 죽음은 메이지 일본의 종언으로 인식됐다. 이런 영향으로 대상례를 전후해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 부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자결(천황의 명령이라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많이 있었다.

평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한 메이지 천황은 일본 내에서 완벽하고 위대한 군주상으로 추대받고 있으며, 강력한 황권을 통해 일본 제국을 달성을 하고 강대국의 열강에 편입시켜 다른 나라를 강제로 식민지를 삼는 등 기초·기반을 다져 놓은 천황으로 평가된다.

가족 관계

메이지 천황 일가

아버지는 고메이 천황(孝明 天皇)이며, 어머니는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 후궁(後宮)이다. 이 둘 사이에서 출생한 메이지 천황은 슬하에 5남 10녀를 두었다. 1867년 이치조 하루코(一条勝子)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은 후궁(後宮)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愛子)와 사이에서 요시히토(嘉仁) 황자를 낳았고, 후궁 사치코와 사이에서 마사코와 후사코를, 후궁 요코와의 사이에서 노부코, 도시코 등 이렇게 네 딸을 얻었으며, 그 밖에도 열 명의 자녀들을 더 두었다. 그의 4명의 손자들은 모두 그의 서자(庶子)이자 넷째아들인 다이쇼 천황 요시히토(大正 天皇 嘉仁)가 낳은 아들들인데 장손자는 히로히토(裕仁)이고 작은손자는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秩父宮 雍仁)이며 셋째손자는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 宣仁)이고 막내손자로는 그가 사망한 후인 1915년에 출생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三笠宮 崇仁)가 있다.

같이 보기

참고 문헌

  • 오카 요시타케(岡義武), 현대 일본 정치사, 미즈노 쇼보.
전임
고메이 천황
제122대 일본의 천황
1868년 1월 3일 ~ 1912년 7월 30일
후임
다이쇼 천황
전임
고메이 천황
(메이지 유신)
제1대 대일본 제국의 천황
1868년 1월 3일 ~ 1912년 7월 30일
후임
다이쇼 천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