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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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江戸幕府

 

1603년1868년
 

Tokugawa shogunate of Japan on the globe (de-facto) (Japan centered).png
수도에도
정치
공용어일본어
정부 형태무가정권
정이대장군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요시노부
역사
 • 막부 성립
 • 쿠로후네 사건
 • 대정봉환
 • 보신 전쟁
1603년
1853년
1867년
1868년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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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日本史
에도 막부
일본어식 한자 표기: 江戸幕府
가나 표기: えどばくふ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에도바쿠후
영어: Tokugawa shogunate

에도 막부(일본어: 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일본사에서 세 번째이자 최후의 막부다.

개요[편집]

1603년 3월 24일(게이초 8년 음력 2월 12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쇼군(征夷大将軍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고 막부를 창설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어, 1867년 11월 9일 (게이오 3년 음력 10월 14일)에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면서 막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이 일본을 지배한 이 264년간의 시기를 에도 시대 또는 도쿠가와 시대라 한다. 에도 막부는 바쿠한(幕藩) 체제 밑에 사농공상의 신분을 고정하고,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을 하고, 후에는 유교적 교화도 이용하면서 전국 지배를 강화했다.[1] 조선에 대해서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통신사를 12회 초청하여 두 세기 동안 양국간의 밀접한 교류를 하였다. 에도 시대 말기, 막부 타도 운동이 융성하였던 격동의 시기는 막말(幕末 바쿠마쓰[*])이라 칭한다.

에도 막부의 역사[편집]

설립 이전[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에 실패하고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겠다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나타냈고, 이에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토벌군(서군)을 창설하게 된다. 서군은 명분상 모리 데루모토를 총대장으로 삼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군을 창설한다. 1600년 서군과 동군 총 10만의 병력이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펼치게 되는데(세키가하라 전투), 이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항복함으로써 서군은 대패하고 이시다 미쓰나리는 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1603년 3월 24일 일본의 패권을 완전히 잡은 도쿠가와는 에도 막부를 건립하게 된다.

도요토미가 멸망[편집]

에도 막부는 설립하였지만 도쿠가와에게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라는 걸림돌이 남아있었다. 이에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를 공격하였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목숨과 영지는 보장하지만 막부의 지시를 받드는 것을 요구하여 전쟁은 끝나는 듯 했으나 오사카 성에 잔류하던 히데요시의 가신들(낭인)은 승복할 수 없다며 무기와 낭인들을 계속 모아 다시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내의 낭인들을 내칠것을 히데요리에게 요구하였으나 낭인들을 통제하지 못한 히데요리는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실 오센은 오사카 성에서 도망을 시키고 요도도노와 함께 폭탄을 폭발시켜 자진하며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하게 된다.

정치[편집]

막번체제[편집]

다이묘[편집]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세가지로 분류된다.

  • 신판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까운 일족(고산케, 고산쿄를 모두 포함)
  • 후다이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마쓰다이라 종가(도쿠가와씨)를 섬겼던 마쓰다이라 분가를 포함한 가신단의 가문
  • 도자마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부터 도쿠가와씨를 섬긴 다이묘 가문과 동군에 소속된 도요토미계 다이묘 가문

조직도[편집]

약식
쇼군─(다이로)─로주-와카도시요리─┼─ 간조부교 / 마치부교 / 지사부교

다이묘 계열[편집]

경제[편집]

에도시대에 태평 무드의 지속은 교통·상공업의 발전과 시정인(市井人)의 대두, 화폐 경제의 성립, 다수의 도시 출현 등 상품경제가 크게 발달하였는데[1] 이러한 경제 발전의 혜택은 기존의 사무라이 계층보다는 상인 계층, 즉 조닌들이 차지하였다. 경제의 실권을 쥔 도시민의 힘은 한편으론 무사의 권위를 실추시켰다.[1] 이에 따라 무사에 돈을 주고 무사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에도막부에서는 교역선에 슈인장을 부여하여 조닌들은 동남아에 진출하여 일본인들의 마을을 만들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대(1680~1709년)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1688~1703년)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2]:225 심각한 낭비와 더불어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겐로쿠 호황으로 쌓인 탄탄한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2]:226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은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새로 화폐를 주조하여 그 차익으로 재정을 충당하였지만 이로 인한 화폐 가치의 저하와 함께 급등한 물가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2]:227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노부(재위:1709~12년)는 겐로쿠 화폐 대신 양질의 새로운 화폐인 쇼토쿠 화폐를 주조하고 금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쇼토쿠 신령을 발표, 나가사키 등의 무역항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선박 수와 무역액을 크게 제한·삭감하는 등 겐로쿠 호황 직후에 일어난 경제적 동요를 막고자 노력했다.[2]:229

농촌에서도 토지매매 금지령이 유명무실해져 자작농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노부 대(1709~12년)에 겐로쿠 화폐를 대신할 화폐가 주조된 이후 몇대에 걸쳐 계속 화폐의 질과 주조량을 변화시켜가면서 재정을 보충하고자 했고 직할령의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2]:244

이러한 재정난 속에서 기이 도쿠가와 씨 출신으로 제8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무네(1716~45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로의 복귀를 표방하면서 절검, 상무를 강조하면서 상품경제와 조닌을 억제하는 개혁(교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고 집단적 청원이나 제한적 파괴행위, 즉 잇키가 빈발하였다.

당시 잇키는 오사카에서 발생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봉기 등과 같이 대부분의 경우는 도시민이 중심이 된 것이었고, 실제 이들의 주요 목표도 도시민에게 쌀을 파는 미곡상이었다. 중세 말에는 일시적인 봉공 계약 관행이 존재하였는데,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1560 년대 무렵에 제정한 분국법(分國法)「新加制式」의 제 13 조인 「一季奉公輩事」이다. 여러 주인 밑을 몇 달 까지를 기한으로전전하는 봉공인이 일반적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토에서도 2월, 8월에 교대하는 임금노동자가 많이 존재하였다.[3]

18세기 후반 들어 관정개혁을 실시하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18세기 후반 이후에 막부 정권은 점차 동요하게 된다. 먼저 막부정권과 각 지역 한[藩]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에 경제난을 모면하고자 조닌과 농민의 이익을 권력층이 차지하는 전매제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는 민중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대에는 다누마 오키쓰구다누마 씨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 회복을 꾀하였지만 결국 당대에 일어난 기근과 같은 자연 재해로 인하여 실패,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2]:252 그러자 고산케 계층 등은 이에 대한 책임을 다누마 씨에게 물어 실각시켰다.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에 따르면 1870년의 일본은 일인당 연간 1.76석(이중 실제 쌀은 1.14석)을 생산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경우도 기재되어 있다.

1910년의 농업생산량은 개항기 동안 도입된 일본의 다수확 품종 벼, 일본이라는 대규모  수출 시장의 등장과 미가 상승으로 인한 동기부여에 의해 그 이전 시기 
에 비해 상당량 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전 수치는 잘 알 수 없으므로 일단 이 수치를 통하여 비교해보기로 한다. 1910년의 조선 인구는 164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2682만석이므로 인구 1명당 생산량은 1.63석으로 이는 kg 단위로 환산하여 234kg이며 이 중 실제 쌀은 96kg이다.[4]

2018년 1월 발간된 매디슨 프로젝트[5]에 따르면 16세기 이후 일본의 1인당 경제력은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1800년의 일본의 1인당 경제력은 1009 달러라고 한다.[6]

세입[편집]

에도시대의 세율은 상당히 유동적이였는데, 광산이나 일부 수입을 제외한다면 전국적인 조운-상공 수취체제가 없었다. 당시에는 요호부민이랄 수 있는 마을의 원로와 막부의 대관이 그 해의 수확량과 막부의 요구 등을 바탕으로 절충해서 세율을 정하고, 세율이 정해지면 마을의 원로가 마을 주민들과의 협의를 통해 세액 부담을 분배하는 구조였다.

1871년의 전국 공조액은 1255만 석이었으며, 에도시대는 이보다 약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는 부가세나 마을의 경비를 포함하지 않은 액수이다. 정부가 파악한 공식적 수확량이 3220만 석이었으므로 공식적 공조율은 39%였다. 실제 수확고는 4681만 석이었다고 이야기되지만 이것 역시 30% 정도 과소평가된 것이므로 대략적인 수확고는 6000만 석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공조율은 약 21%가 된다. 1870년의 인구는 3440만 명으로 1인당 공조액은 0.365석이었다.[7]

도시화[편집]

일본 에도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는 도시의 급속한 발전이다. 여기에는 병사와 농민의 분리, 조카마치(城下町) 건설, 참근교대(參勤交代), 교통운송과 상업의 발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인구 1만 명 이상의 도시인구가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600년에 일본 4.4%, 중국 4.0%였지만, 1820년에는 일본 12.3%, 중국 3.8%였다. 또한 서유럽은 각각 7.8%, 12.3%였다.

일본의 도시인구는 18세기에 에도가 100만~110만 명, 오사카(大阪) 교토(京都)가 40여 만 명이었다. 동시기 조선의 도시인구는 한양이 1428년 10만여 명, 1669년 19만여 명, 19세기 말에 25만 명이었다. 1876년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인구 1만 명 이상인 도시의 인구는 약 40만 명으로 총인구의 2.5%, 5,000이상의 도시까지 합하면 3.4% 정도였다. 평양과 개성이 3~4만 명, 대구 전주 통영 해주 함흥이 1만 명 정도였다.

에도는 중앙정부인 막부의 소재지로 정치의 중심, 오사카는 경제의 중심, 교토는 문화와 수공업의 중심이었다. 그 외에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조카마치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나고야(名古屋)와 가나자와(金澤)의 인구는 10만 명 전후였다.

일본은 17세기부터, 오사카 교토 등의 중앙 대도시에 수수료를 받고 지방상인의 거래를 중개하는 니우케돈야(荷受問屋)가 성립했다. 이들은 중국의 아인, 조선의 객주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들은 자기 자금으로 상품을 매입하여 중앙도시와 지방산지 소비지를 연결했는데 위험부담이 있는 반면 이익도 많아, 17세기의 경제발전을 타고 자본을 축적했고 17세기 후반에 중앙 대도시로 진출해 매입돈야(자기 자금으로 자기 상품을 움직이는 도매상)가 되었다.

이어서 도시 내부에서 중매 소매 등의 유통체계가 성립했다. 지방에도 중앙 도매상과 거래하는 생산지 도매상 중매상 생산자에게서 상품을 매집하는 소중매의 계열이 생겼다. 중앙 도매상에 집결된 상품은 소비지 도매 중매 소매의 계통을 거쳐 소비자 손에 들어갔다. 중앙 도매상의 자금이 상품을 구입할 때 가불이나 상품을 판매할 때 후불(외상) 등의 유통신용을 지탱했고, 그 중앙 도매상에게 오사카의 금융업자(거대 환전상)가 융자했다.

법제도 정비 도량형 통일 유통기구 운송제도의 발달과 안정에 힘입어 거래비용이 낮아지고 경쟁이 촉진되어 자본 수익률이 상당히 낮아졌다. 오사카와 에도의 거대상업자본의 매출액 대비 수익률은 18세기 초 15% 정도, 18세기 말 7~8%, 19세기 전기 5% 정도였으며, 미쓰이 고노이케 같은 거대 환전상의 대부이자율(실제로 받은 이자)은 1721~1740년 미쓰이 4.9%, 고노이케 6.3%, 그 후 점차 낮아져 1781~1800년 미쓰이 1.7%, 고노이케 3.8% 1821~1840년 미쓰이 1.9% 고노이케 3.4%였다.

농촌의 이자율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오사카 근교의 한 선진 농촌의 지주 쓰쓰이(筒井)가의 대부이자는 토지를 담보했을 때 1728~1758년에 18.6%, 1771~1778년에 14.2% 1789~1800년에 14.2% 1801~1824년에 12.4%, 1845~1859년에 10.7%였으며, 1세기 동안 8% 정도 낮아졌다.[8]

사회[편집]

에도 막부 정권 시기에는 그 이전의 사무라이 집권시대와 많은 차이를 보였다. 에도에 설치된 막부는 전국의 다이묘(봉건 영주)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정책을 하였고, 전국 각지의 군사적 요충지와 상업지역, 무역항구 등을 직할지로 삼아 전 열도를 중앙에서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도 막부 정권을 '중앙집권적 봉건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0년에 걸쳐 안정시킨 막부를 이어받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중신들에게 유교 사상을 철저히 연구할 것을 지시했고, 한편으로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은 《대일본사》(大日本史)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치(文治)를 지향하였으며[2]:224~225, 이를 바탕으로 5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대에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다.[2]:225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을 일으키려고 실시한 징병제도쿠가와 이에야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 다른 다이묘들을 무장해제 시키려고 폐지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이 병력을 함부로 양성하지 못하게 병역을 모병제로 바꾸었다.

마비키[편집]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영아 살해, 즉 마비키(間引) 풍습이 존재하였다. 관동지방과 동북지방에서는 농민의 가난이 원인이였고, 도시에서는 공,상 계급의 간통이 주 원인이였다. 에도 막부와 제번에서 이러한 행위를 비난해왔으나, 처벌 받는 경우는 드물었고 어른의 살인과 똑같이 취급되지도 않았다.

신분제도[편집]

일본은 다이카개신 이후 중국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사회 신분제도인 양천제(良賤制)를 도입한 바 있으나, 이는 10세기경에 자연소멸되고 대신 일본화된 신분제도가 자리잡아 에도시대에 이르게 되었다.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는 법적 신분제가 아니었다.

에도 시대 일본의 신분구조는 다음과 같다.

  • 지배층
    • 공가/신관/승려(인구의 1.5%) : 공가는 천황을 보필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진 조정귀족이며, 신관과 승려는 각각 일본의 사상적 기반인 신토와 불교계를 유지하는 집단이다.(다만 권력의 바깥고리에 있는 하급 신관 및 승려, 이를테면 이누지닌(犬神人)은 되려 천민취급을 받았다.)
    • 무사(7%) : 혈연으로 이어지는 세습신분층으로 에도시대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계층이다.이들 중하급 사무라이들은 리즈시절에도 상급 병졸 정도의 지위였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아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심지어 이들은 죠닌 계층에게조차도 결혼기피대상이 될 정도로 에도 시대 중기에는 그 처지가 안좋아진다.
  • 피지배층
    • 죠닌(6%) : 일본의 막부와 각 지방충들의 정치/경제거점인 죠카마치(城下村)에 집단거주하는 상공인계층이다. 에도시대 중기부터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해져서 후기에는 이들이 메이지유신의 숨은 주역이 된다.
    • 농민(84%) : 일본의 주력산업인 농업을 책임지는 서민층이었다. 하지만 법제적으로 혹은-사회규범적으로 서양의 농노와 같은 상태이다.
    • 피차별집단(1.5%) : 사실상의 불가촉천민 집단으로, 에타(穢多)와 히닌(非人)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타와 히닌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대체로 에타는 불교의 도에 거스르는 등의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직종(도축업자 등)에 종사하는 자들을 일컫는 용어이며, 히닌은 인륜에 거스르는 행위를 행한 자를 일컫는 말이다.

히닌은 대체로 걸식자, 노숙자였으나 중질의 범법자, 현관합체자 등도 이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사회적 압력에 의해 '부락'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마을에 집단거류하였기 때문에 부라쿠민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히닌의 경우 치안,미풍양속 유지를 위한 공적인 차원에서 수용구역을 설정하여 히닌 무리의 대장인 히닌가시라의 통제를 받게끔 하여 공권력의 지배 하에 놓았다. 피차별 신분은 1871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폐지된 이후에도 관습적으로 여전히 잔존하여 현대에도 약간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사회신분은 경직된 구조가 아니었고,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통해 사회이동이 가능했다.

  • 귀농/죠닌화 (무사계층에서 피지배층으로 이동) : 말 그대로 무사가 무사계급을 포기하고 생산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회신분 이동이다.
  • 요닌에 의한 등용 (피지배층에서 무사계층으로 이동) : 요닌(用人)은 에도시대 사무를 관장하던 일종의 공무원을 의미한다. 이 요닌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등용되는 방법으로 신분이동이 가능했다.
  • 고케닌 카부 매입 (피지배층에서 무사계층으로 이동) : 상술했듯 에도시대에는 사무라이의 몰락현상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할 정도로 심각했다. 이러한 몰락 사무라이의 카부(족보)를 매입하는 방법으로 신분이동이 가능했다. 동시기 몰락한 양반가문의 족보를 매입해서 양반으로 상승한 조선의 상민부자들을 떠올리면 된다.
  • 입양과 결혼 (피지배층에서 무사계층으로 이동) : 무사계급과 결혼하거나 혹은 서민의 자제를 무사가에서 입양하는 방법으로 신분이동이 가능했다. 에도시대에는 중하급 사무라이와 서민 간의 결혼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고, 이러한 방법으로 신분이동이 이루어졌다.

문화[편집]

에도오사카를 중심으로 겐로쿠 문화(元祿文化), 화정기(化政期)의 문화가 번성하였다.[1]

행정구역[편집]

대국(大国)

야마토국·가와치국·이세국·무사시국·가즈사국·시모사국·히타치국·오미국·고즈케국·무쓰국·에치젠국·하리마국·히고국

상국(上国)

야마시로국·셋쓰국·오와리국·미카와국·도토미국·스루가국·가이국·사가미국·미노국·시나노국·시모쓰케국·데와국·가가국·엣추국·에치고국·단바국·다지마국·이나바국·호키국·이즈모국·미마사카국·비젠국·빗추국·빈고국·아키국·스오국·기이국·아와국·사누키국·이요국·부젠국·분고국·지쿠젠국·지쿠고국·히젠국

중국(中国)

아와국·와카사국·노토국·사도국·단고국·이와미국·나가토국·도사국·휴가국·오스미국·사쓰마국

하국(下国)

이즈미국·이가국·시마국·이즈국·히다국·오키국·아와지국·이키국·쓰시마국

쇼군[편집]

쇼군 계보도[편집]

대수 초상화 쇼군 원호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제1대 Tokugawa Ieyasu2.JPG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안코쿠인
(安國院)
게이초 8년 2월 12일
(1603년 3월 24일)
게이초 10년 4월 16일
(1605년 6월 2일)
오카자키 출신. 마쓰다이라 가문의 8대 종주.
1607년부터 슨푸에서 오고쇼로 실권 행사.
제2대 Hidetada2.jpg 도쿠가와 히데타다
(德川秀忠)
다이토쿠인
(台德院)
게이초 10년 4월 16일
(1605년 6월 2일)
겐나 9년 7월 27일
(1623년 8월 2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제3대 Iemitu.jpg 도쿠가와 이에미쓰
(德川家光)
다이유인
(大猷院)
겐나 9년 7월 27일
(1623년 8월 22일)
게이안 4년 4월 20일
(1651년 6월 7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
막부 초기의 창업 작용 거의 마무리.
제4대 Tokugawa Ietsuna.jpg 도쿠가와 이에쓰나
(德川家綱)
겐유인
(嚴有院)
게이안 4년 8월 18일
(1651년 10월 2일)
엔포 8년 5월 8일
(1680년 6월 4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
명실공히 최초의 수성(守城) 쇼군.
제5대 Tsunyaoshi.jpg 도쿠가와 쓰나요시
(德川綱吉)
조겐인
(常憲院)
엔포 8년 8월 23일
(1680년 9월 15일)
호에이 6년 1월 10일
(1709년 2월 19일)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동생이자 양자.
제6대 Tokugawa Ienobu.jpg 도쿠가와 이에노부
(德川家宣)
분쇼인
(文昭院)
호에이 6년 5월 1일
(1709년 6월 8일)
쇼토쿠 2년 10월 14일
(1712년 11월 12일)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조카이자 양자.
제7대 Tokugawa ietsugu.jpg 도쿠가와 이에쓰구
(德川家繼)
유쇼인
(有章院)
쇼토쿠 3년 4월 2일
(1713년 4월 26일)
교호 원년 4월 30일
(1716년 6월 19일)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아들.
제8대 Tokugawa Yoshimune.jpg 도쿠가와 요시무네
(德川吉宗)
유토쿠인
(有德院)
교호 원년 8월 13일
(1716년 9월 28일)
엔쿄 2년 9월 25일
(1745년 10월 20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
기슈 번 출신. 최초의 방계 쇼군.
제9대 Tokugawa Ieshige.jpg 도쿠가와 이에시게
(德川家重)
쥰신인
(惇信院)
엔쿄 2년 11월 2일
(1745년 11월 24일)
호레키 10년 5월 13일
(1760년 6월 25일)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아들.
제10대 Tokugawa Ieharu.jpg 도쿠가와 이에하루
(德川家治)
슌메이인
(浚明院)
호레키 10년 5월 13일
(1760년 6월 25일)
덴메이 6년 9월 8일
(1786년 10월 29일)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아들.
제11대 Tokugawa Ienari.jpg 도쿠가와 이에나리
(德川家齊)
분쿄인
(文恭院)
덴메이 7년 4월 15일
(1787년 5월 31일)
덴포 8년 4월 2일
(1837년 5월 6일)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증손.
1799년부터 쿠릴 열도 4도와 사할린 남부지역을 장악한 적이 있었음
제12대 Tokugawa Ieyoshi.JPG 도쿠가와 이에요시
(德川家慶)
신토쿠인
(愼德院)
덴포 8년 4월 2일
(1837년 5월 6일)
가에이 6년 6월 22일
(1853년 7월 27일)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
제13대 Tokugawa Iesada.jpg 도쿠가와 이에사다
(德川家定)
온쿄인
(溫恭院)
가에이 6년 11월 23일
(1853년 12월 23일)
안세이 5년 7월 6일
(1858년 8월 14일)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아들.
제14대 Toku14-2.jpg 도쿠가와 이에모치
(德川家茂)
쇼토쿠인
(昭德院)
안세이 5년 10월 25일
(1858년 11월 30일)
게이오 2년 7월 20일
(1866년 8월 29일)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사촌이자 양자.
제15대 Tokugawa yoshinobu.jpg 도쿠가와 요시노부
(德川慶喜)
- 게이오 2년 12월 5일
(1867년 1월 10일)
게이오 3년 12월 9일
(1868년 1월 3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1세손.
미토 번 출신.

가계도[편집]

도쿠가와 종가 당주
오다이노가타 ┬ 초대 이에야스노부야스
             │               ├ 가메히메다다아키라[9]
             │               ├ 히데야스[10]
             │               ├ 제2대 히데타다 ┬ 제3대 이에미쓰 ┬ 제4대 이에쓰나
             │               │                │                ├ 제5대 쓰나요시[11]도쿠마쓰
             │               │                │                └ 쓰나시게[12] ┬ 제6대 이에노부 ─ 제7대 이에쓰구
             │               │                │                              └ 기요타케[13]
             │               │                ├ 다다나가[14]
             │               │                └ 마사유키[15]
             │               ├ 다다요시[16]
             │               ├ 노부요시[17]
             │               ├ 다다테루[18]
             │               ├ 마쓰치요[19]
             │               ├ 센치요[20]
             │               ├ 요시나오[21]미쓰토모쓰나노부
             │               │                         ├ 요시유키[22]
             │               │                         ├ 요시마사[23]
             │               │                         └ 도모아키[24]
             │               ├ 요리노부[25]미쓰사다쓰나노리
             │               │             │          ├ 요리모토[26]
             │               │             │          └ 제8대 요시무네 ┬ 제9대 이에시게 ┬ 제10대 이에하루이에모토
             │               │             │                            │                └ 시게요시[27]
             │               │             │                            ├ 무네타케[28]
             │               │             │                            └ 무네타다[29]하루사다 ┬ 제11대 이에나리 ┬ 제12대 이에요시 ─ 제13대 이에사다
             │               │             │                                                       │                 └ 나리유키 ─ 제14대 이에모치
             │               │             │                                                       └ 나리마사요시요리 ─ 제16대 이에사토 ─ 제17대 이에마사
             │               │             ├ 요리즈미[30]
             │               │             └ 마쓰히메[31]노부마사
             │               └ 요리후사[32]요리시게[33]쓰나에다
             │                              │             ├ 요리토시요리토요무네타카무네모토하루모리하루토시나리아키 ┬ 제15대 요시노부
             │                              │             │                                                          │                      └ 아키타케다케사다[34]
             │                              │             │                                                          └ 요시나리요시타쓰가타모리쓰네오이치로 ─ 제18대 쓰네나리이에히로
             │                              │             └ 요리요시요리히로[35]
             │                              ├ 미쓰쿠니요리쓰네
             │                              ├ 요리모토[36]
             │                              ├ 요리타카[37]
             │                              └ 요리오[38]야스모토[39]야스토시[40]사다카쓰[41]사다유키[42]
             │             ├ 사다쓰나[43]
             │             ├ 사다후사[44]
             │             └ 사다마사[45]
             └ 마쓰히메[46]다다미쓰미쓰시게

각주[편집]

  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일본의 역사
  2. 박석순 외 (2005년), 《일본사》
  3. 일본의 근세화와 토지・상업・군사-동경대학교 마키하라 시게유키
  4. 조선의 생산량은 박섭의 연구가 출 처이다.
  5. [[http://www.ggdc.net/maddison/maddison-project/home.htm
  6. 1820년의 남한과 북한은 465달러와 245달러이다.
  7. (동북아시아 경제의 근세와 근대, 1600~1900)
  8.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는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2007, 일조각)
  9.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10.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11. 다테바야시 도쿠가와가의 시조
  12. 고후 도쿠가와가의 시조
  13. 오치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14. 스루가 도쿠가와가의 시조
  15. 아이즈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16. 도조 마쓰다이라가의 당주
  17. 다케다씨의 당주
  18.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당주
  19. 나가사와 마쓰다이라가의 당주
  20. 히라이와씨의 당주
  21.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시조
  22. 요스야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23. 오쿠보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24. 가와다쿠보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25. 기슈 도쿠가와가의 시조
  26. 뉴 마쓰다이라가의 시조이자 제4대 기슈 번
  27. 시미즈 도쿠가와가의 시조
  28.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시조
  29.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시조
  30. 사이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31.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마쓰다이라 노부히라의 정실
  32. 미토 도쿠가와가의 시조
  33. 다카마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34. 마쓰도 도쿠가와가의 시조
  35. 마쓰다이라 다이젠가의 시조
  36. 모리야마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37. 후추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38. 시시도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39.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 적류 시조
  40. 다코 번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41. 사다카쓰계(이요 마쓰야마 번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종가의 시조
  42. 사다카쓰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종가의 당주
  43. 사다쓰나계(구와나 번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44. 사다후사계(이마바리 번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의 시조
  45. 가리야 번주, 후에 사다마사의 후손들은 하타모토로 전락
  46. 도다 마쓰다이라가의 시조(도다 종가의 당주) 마쓰다이라 야스나가의 정실

같이 보기[편집]

일본의 역사
이전 시대 도쿠가와 막부
1603년 ~ 1868년
다음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73년 ~ 1603년
일본 제국
1868년 ~ 194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