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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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묘(일본어: 大名 (だいみょう) 대명[*])는 10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며 권력을 누렸던 영주를 말한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전국 시대를 거쳐 에도 막부 시대까지 다양한 계급의 변천사가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쇼군 바로 아래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다이묘들은 사무라이들을 고용하여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도록 하곤 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주로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막부로부터 부여받은 무사를 지칭하였다. 다이묘들의 통치는 1871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적인 현도부 제도가 완성되면서 소멸되었다.

슈고 다이묘[편집]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는 "다이묘" 라는 명칭을 가장 먼저 얻은 첫 번째 집단이었다. 그들은 무로마치 시대슈고 중 일부에서 출현했다. 슈고 다이묘들은 군사와 치안권 뿐만 아니라, 지방 내의 경제권을 관리했으며, 그들은 이 힘들을 무로마치 시대의 처음 몇 십여 년 동안 축적했다. 주요 슈고 다이묘는 야마나토자마 가문, 오우치, 아카마스 뿐만 아니라, 시바, 하타케야마, 호소카와 가문으로부터 나타났다. 이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다수의 지방들을 지배했다.

아시카가 막부는 슈고 다이묘들에게 교토에 거주하도록 요구했고, 그들이 자신들의 고향 지방을 대표하도록 하기 위해 슈고다이라 불리는 친족들 또는 상인들을 지명했다. 결국 이들 중 몇 몇은 차례로 교토에 살게 되었으며 대리인들을 지방에 임명하게 된다.

오닌의 난은 슈고 다이묘들이 서로 싸웠던 주요 봉기였다. 이것과 그 당시의 다른 전쟁들 동안, 쿠니 잇키나 지방 봉기들이 슈고 다이묘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던 지역의 강력한 무사들로부터 일어났다. 지방에 거주하는 슈고 다이묘의 대리인들은 그들의 입지를 강화할 기회를 장악했다. 15세기 말에, 그 성공한 슈고 다이묘들은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리인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 다이묘들은 권력으로부터 몰락했으며 새로운 계층, 슈고다이와 고쿠진의 계급에서부터 발생한 "센고쿠 다이묘" 에 의해 교체되었다.

센고쿠 다이묘[편집]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중 일부는 대다수 사타케, 이마가와, 다케다, 토키, 로카쿠, 오우치, 시마즈와 같은 슈고 다이묘들이었다. 새로이 다이묘가 된 가문으로는 아사쿠라, 아마고, 나가오, 미요시, 초소카베, 진보, 하타노, 오다, 마스나가가 있었다. 이들은 슈고다이 계급과 대리인으로부터 출현했다. 또한 모리, 타무라, 류조지와 같은 추가 다이묘들은 고쿠진에서 나타났다. 막부의 하급 관료들, 로닌(고호조, 사이토), 지방 관료들(기타바타케), 구게(토사 이치조)도 센고쿠 다이묘들이 탄생하는 데에 기여했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편집]

에도 시대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시기를 기준으로 하여 세 부류로 다이묘들을 구분하고 있다.

  1. 신판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남계 자손이 시조가 되는 번의 다이묘들
  2. 후다이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 가문에 봉사한 세력인 다이묘들
  3. 도자마 다이묘: 세키가하라 전투를 전후하여 에도 막부에 편입된 다이묘들

메이지 유신 이후[편집]

1869년, 메이지 유신 이듬해, 다이묘들은 구게와 함께 화족이라는 새로운 귀족 계급을 형성했다. 1871년, 번이 폐지됐고 이 설립되었다. 효과적으로 일본에서의 다이묘 시대를 끝낸 것이었다. 이 변화에 뒤이어, 많은 다이묘들이 현 지사에 임명되면서 영지의 통제에 놓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직무에서 해임되었고 집단으로 도쿄에 소환됐다. 그럼으로서 잠재적인 반란을 만들 권력의 독립적인 기반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이전 다이묘 가문들의 구성원들은 정부와 사회에 저명한 인사로 남았고, 몇 몇 경우엔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저명하게 남아 있다(예를 들면, 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구마모토 지역 다이묘의 자손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매우 드문 경우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