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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카시와바라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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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카시와바라 천황
고카시와바라 천황의 어진영
고카시와바라 천황의 어진영
십육변팔중표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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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
재위 1500년 11월 16일 ~ 1526년 5월 18일
전임 고쓰치미카도 천황
후임 고나라 천황
이름
카츠히토(勝仁)
묘호 후카쿠사노키타능(深草北陵)
신상정보
출생일 1464년 11월 19일
사망일 1526년 5월 18일
부친 고쓰치미카도 천황
모친 텐시 니와타(미나모토) 아사코(쵸우시)

고카시와바라 천황(일본어: 後柏原天皇, 1464년 11월 19일 ~ 1526년 5월 18일)은 제104대 일본 천황이다. 그는 1500년 11월 16일부터 1526년 5월 19일까지 다스렸다. 그의 개인 이름은 가쓰히토였다. 그의 치세는 아시카가 쇼군 시대의 황실 권위의 최저점을 기록하였다. 호칭의 유래는 50대 천황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별칭인 가시와바라노미카도(柏原帝)에서 따왔다.

그는 고쓰치미카도 천황의 장남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니와카(후지와라) 아사코였다. 그녀는 니와타 나가카타의 딸이었다.

생애

[편집]

분메이(文明) 12년(1480년) 12월 13일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았다.

메이오(明応) 9년(1500년) 10월 25일, 고쓰치미카도 천황(後土御門天皇)의 뒤를 이어 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오닌의 난(応仁の乱) 직후의 혼란으로 인해 조정의 재정은 거의 바닥나 있었고, 즉위식조차 21년 동안 치르지 못할 정도였다(고카시와바라 천황은 26년 동안 재위하였다).[1]

센소부교(践祚奉行)는 히로하시 모리미쓰(広橋守光), 간파쿠(関白)로는 이치조 후유요시(一条冬良)가 재임하였다.[2] 천황이 되고 이듬해 2월에 참위설(讖緯説)의 신유혁명(辛酉革命)을 피하기 위해 연호를 '메이오'에서 '분키(文亀)로 개원한다.[3] 분키 원년 12월에 즉위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부케덴소(武家伝奏) 가주지 마사아키(勧修寺政顕)를 통해 만도코로시쓰지(政所執事) 이세 사다미치(伊勢貞陸)에게 비용 염출 의뢰가 전해진 결과, 다지마 국(但馬国)에서 3천 정(疋), 단고 국(丹後国)에서 2천 정을 납입하였으나 이로는 충분한 액수가 되지 못했고, 즉위식은 연기되었다.[4]

분키 2년(1502년) 2월에는 와카사슈고(若狭守護) 다케다 모토노부(武田元信)가 와카사 경내의 금리령(禁裏領)의 연공을 바쳤다.[5]

분키 2년 6월,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가 산기(参議) 추조(中将) 승임을 위해 조정에 헌금하여 천황의 즉위식 비용에 보태는 것이 검토되었는데, 간레이(管領)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즉위식을 치렀다 한들 실질이 따르지 못하면 왕[주 1]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요, 즉위식을 치르지 않았더라도 내가 왕으로 인정하였다. 말세인 지금, 대규모 즉위식 같은 건 헛된 일이다"(即位大礼, 御儀無益也. さ様儀雖行之, 無正躰者ハ王とも不存事也, 此分ニテ雖御座候, 愚身ハ国王と存申者也, 然者一切大儀, 共末代不相応事也)라고 반대하였고, 군신들도 이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헌금은 성사되지 않는[6][7] 조정의 주요 헌금원인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나 슈고 다이묘들도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라, 자금은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또한 근년 일본 학계의 설에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다이다이리(大内裏)가 황폐화된 뒤에도 천황의 즉위 예식 회장으로써 유지 ・ 재건의 계속이 도모되어 왔던 다조칸 청사(太政官庁)가 오닌의 난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버리는 바람에, 여기서 다조칸 청사를 재건하여 이곳에서 즉위식을 실시할 것인가 아니면 다이다이리의 시신덴(紫宸殿)을 대리 시설로써 의식을 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일본 조정 안에서 의론이 있었고 이에 대한 결론이 좀처럼 나지 않았던 점도 고카시와바라 천황의 즉위식이 미뤄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는 역사학자 히사미즈 도시카즈(久水俊和)의 지적도 제기되어 있다.[8]

분키 4년(1504년)에는 참위설의 갑자혁명(甲子革命)을 피하기 위해 다시금 연호가 바뀌어 '에이쇼(永正) 원년'이 되었다.[9]

에이쇼 7년(1510년) 11월에 즉위식이 거행되기로 결정되었으나, 온묘도(陰陽道)의 대장군(大将軍), 유년(遊年)에 해당한다 하여 또 연기되었다.[10]

에이쇼 8년(1511년) 다시금 즉위식 개최를 위해 단전(段銭) 징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에이쇼 9년 2월의 대설(大雪)로 황태신궁(皇太神宮)의 신전(神殿)이 그만 무너져 버렸고, 일본 조정은 즉위 준비 비용에서 8만 정(약 8천만 엔)을 지출했기 때문에 다시금 연기되었다.[11]

에이쇼 13년에는 쇼군즈카(将軍塚)가 요동치는 괴이가 벌어지고, 다이리(内裏)의 담장이 무너졌으나 좀처럼 수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12]

최종적으로 천황의 즉위식 거행을 최우선으로 하여 다조칸 관청의 재건을 단념하고 시신덴에서 예식을 거행하기로 결정된 가운데[8] 비용 조달을 위해 조정의 다른 의식들을 중지하는 등 경비 절감이 이루어졌고, 다이에이(大永) 원년(1521년) 3월 22일에야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천황이 된 지 22년만에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혼간지(本願寺) 9세(世) 지쓰뇨(実如)의 헌금도 있어, 이 공적으로 혼간지가 조정의 몬제키(門跡)가 되었다고도 한다.[13]

그러나 이때조차도 그 직전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 10대 쇼군 재임)가 간레이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国)와 대립하여 교토에서 쫓겨나는 등 즉위식 개최를 앞두고 여러 가지 혼란이 있었다.[14] 요시타네가 교토에서 쫓겨난 것에 격노한 천황은 즉위 예식을 강행했고[15] 경고(警固) 책임을 지고 있던 호소카와 다카쿠니에 의해 요시타네 축출과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 옹립에 동의하게 되었다.[16]

다이에이 6년(1526년) 4월 7일, 즉위식 거행 4년만에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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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으로 조정의 구교(公卿)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교토 조정의 재정은 궁핍하여, 천황의 권위도 땅에 떨어진 시대였다.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재정난으로 중지되고 단절된 조정의 의식 재흥에 힘을 쏟았던 한편으로 전란이나 돌림병으로 괴로워하는 백성들을 생각하였다고 전한다.

불교에 귀의하여 다이에이 5년(1525년) 두창(疱瘡)이 크게 유행할 때는 몸소 반야심경(般若心経)을 사경하여 엔랴쿠지(延暦寺)와 닌나지(仁和寺)에 봉납하기도 하였다.[17] 또한 시가(詩歌), 관현(管弦), 서도(書道)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곱 살 때부터 기요하라노 무네카타(清原宗賢)에게 유교 경전인 효경(孝経), 중용(中庸), 논어(論語) 등을 배웠고, (箏)을 요쓰지 스에하루(四辻季春), 축국(蹴鞠)을 아스카이 마사야스(飛鳥井雅康)에게 배웠다.[17] 아시카가 쇼군케와의 관계는 양호하였으며, 요시히사(義尚)나 요시즈미(義澄)와는 와카(和歌)를 주고받은 것이 확인되고, 요시타네(義稙)나 요시하루(義晴)와도 유화적인 태도에 임하였다.[18]

저서로 《사방배차제》(四方拝次第), 《고카시와바라인 어집》(後柏原院御集) 등을 남겼다.[19]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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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텐지 : 부라쿠몬인(豊樂門院) 가쥬지(후지와라) 후지코(토우시) (勸修寺(藤原) 藤子, 1464 ~ 1535)
    • 장녀 : 카쿠친 여왕(覺鎭女王, 1486 ~ 1550)
    • 장남 : ? - 조졸.
    • 차남 : 시루히토 친왕(知仁親王) - (고나라 천황)
    • 5남 : 키요히코 친왕(淸彦親王) 또는 손친 법친왕(尊鎭法親王, 1504 ~ 1550)
  • 텐지 : 니와타(미나모토) 미나코(겐시) (庭田(源) 源子)
    • 3남 : 카쿠토 법친왕(覺道法親王, 1500 ~ 1527)
    • 2녀 : 카쿠온 법친왕(覺音女王, 1506 ~ ?)
    • 6남 : 히로츠네 친왕(寬恒親王) 또는 겐인 법친왕(彦胤法親王, 1509 ~ 1536)
  • 나이시 : 타카쿠라(후지와라) 츠구코(게이시) (高倉繼子)
    • 4남 : 도키(道喜, 1503 ~ 1530)

각주

[편집]

내용주

[편집]
  1. 문맥상 천황을 가리킨다. 일본 국내에서는 천황을 가리켜 '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렇게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으며, 공식 문서나 역사서, 군키모노가타리에도 '천황'이라고 불러야 할 존재를 '왕', '국왕'이라고 부르거나 일본 고유의 명칭인 '미카도'(帝)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서로 섞어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은퇴한 상황(인)이 실권을 쥐고 정치를 행하는 인세이가 등장한 뒤에는 상황은 물론 현직 천황도 '인'(院)이라고 부르는 등,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도 '천황'이라는 칭호는 공식 석상에서조차 그렇게 자주 쓰이지 않는 사어(死語)였다.

출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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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ベン・アミー・シロニー著・大谷堅志郎 역 『母なる天皇―女性的君主制の過去・現在・未来』 講談社, 2003年01月, p137(第4章「非力で女性的な天皇像」, 9「ソフトで柔弱な君主たち」)
  2. 渡邊大門 2012, 128쪽.
  3. 渡邊大門 2012, 129-130쪽.
  4. 久水 & 石原 2020, 313–314쪽.
  5. 渡邊大門 2012, 136쪽.
  6. 『大乗院寺社雑事記』(尋尊大僧正記)文亀 2年 6月 16日条
  7. 今谷明 『戦国大名と天皇』(講談社学術文庫, 2001년)
  8. 1 2 久水俊和「内野の太政官庁」『中世天皇家の作法と律令制の残像』八木書店, 2020年 ISBN 978-4-8406-2239-4 pp.283-311。
  9. 渡邊大門 2012, 138쪽.
  10. 渡邊大門 2012, 140-141쪽.
  11. 渡邊大門 2012, 142-143쪽.
  12. 渡邊大門 2012, 171쪽.
  13. 渡邊大門 2012, 147쪽.
  14. 久水 & 石原 2020, 317쪽.
  15. 二水記』永正10年3月8日・20日条
  16. 水野智之『室町時代公武関係の研究』(吉川弘文館, 2005년) ISBN 978-4-642-02847-9 P246-249
  17. 1 2 久水 & 石原 2020, 311쪽.
  18. 久水 & 石原 2020, 311, 318–319쪽.
  19. 渡邊大門 2012, 179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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