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아리노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모리 아리노리의 초상
모리 아리노리
일본어식 한자 표기(신자체): 森 有礼
일본어식 한자 표기(구자체): 森 有禮
가나 표기: もり ありのり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모리 아리노리
로마자: Mori Arinori

모리 아리노리(일본어: 森 有礼, 1847년 8월 23일 ~ 1889년 2월 12일)는 사쓰마 번사, 일본정치인, 외교관이다. 초대 미국공사를 지냈다. 그는 초대 문부대신으로 일본 근대 교육 제도의 기반을 닦았다.

생애[편집]

사쓰마 국 가고시마 성가스가쇼지 정에서 사쓰마 번사 모리 기에몬 아리히로의 5남으로 태어났다.

1872년부터 1873년까지 미국의 초대 공사를 지냈는데, 그 기간동안 미국의 교육제도나 사회제도에 많은 관심을 갖았다. 일본에 돌아와서는 일본 최초의 근대적 저성인 협회인 메이로쿠사를 조직하였다. 메이지 계몽운동의 일원으로 교육의 자유, 종교로부터 독립된 교육, 여성평등, 국제공법을 주장하였고,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배울 것을 주장하였으며 '영어 국어화'론의 원조자로 알려져 있다. 1875년에 지금의 히토쓰바시 대학의 전신이자 일본 최초의 상업대학인 쇼호 고슈조를 설립하였다. 그 후에 청나라의 대사로 근무하였고, 외무부차관, 영국공사를 지냈다.

1876년 1월 24일 일본의 주화공사(駐華公使)였던 모리 아리노리는 당시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인 이홍장(李鴻章)을 만나서 조선 문제에 관한 회담을 하였다. 회담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관한 화제가 나왔는데 서로 상대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논쟁이 있었다. 모리 아리노리가 “서양의 학문은 아주 유용한데 중국의 학문은 7할이 구식이라 3할밖에 취할 바가 없다”고 하자 이홍장은 “귀국의 거사(메이지 유신)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나 이전의 의복을 버리고 서양식을 모방하는 일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일본 의복의 서구화를 언급했다. 이에 모리 아리노리는 “옛날 의복은 넓고 편해서 무사안일한 사람에게 적당하지 근면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 천년전 우리 조상이 중국의 의복이 가진 우수한 점을 보고 받아들였다면 현재는 서양의 장점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홍장은 “옛 의복을 버리고 서양식을 따르는 것은 독립정신을 포기하고 서구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공격하자 모리 아리노리는 “외압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일축했다.[1]

각주[편집]

  1. 王曉秋 (신승하 옮김), 《근대중국과 일본》, 고려대학교 출판부, 99~102면.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