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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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

홍종우(洪鍾宇, 1850년[1] ~ 1913년)는 조선대한제국의 문신이며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지만 수구파 정객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893년 중국 상하이에서 급진 개화파의 거두인 김옥균을 저격하여 암살했다.

그 뒤 고종의 총애를 타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하였으며, 황국협회의 회원으로 개화파독립협회의 활동을 탄압하였으며, 이승만을 체포하여 재판하기도 했다. 철저히 수구파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동해 길영수 등과 함께 황국협회를 이끌고 민중운동을 습격하는 정치폭력을 일삼았다. 자는 성숙(聲肅), 호는 우정(羽亭),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가선대부 의정부참찬에 추증된 홍재원(洪在源)의 아들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홍종우 초상화

불우한 인생[편집]

홍종우는 홍재원(洪在源)[2] 의 외아들로 경기도 안산군에서 태어났으며, 전국을 떠돌다 고금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황현매천야록에 따르면 '홍종우는 어린시절에 고금도에서 불우하게 지내왔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때 그는 '고금도에서 쑥물을 버리는것도 아까워했을만큼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왔다.'라고 대한제국 비서원일기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또, 제주도에서 화전민과 함께 살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기[편집]

프랑스 유학[편집]

그러던 어느날, 1886년 모친상을 당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사히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거기서 프랑스어와 일본어등 익히면서 국제신문등 접하면서 해외에 대한 식견을 더욱더 넓혀가면서 알게된다. 그리고 2년여 간 일본에서 배삯을 모으게 된다.[3]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유학한 조선인이다.

일본에서 자금을 모은 그는 자기 스스로 비용부담하여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1890년)[3] 1890년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였다. 당시 40세의 중년 유학생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기간동안 열강 제국주의 세력들의 본질에 대해 알기 시작하였고, 기메박물관(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등에서 일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3] 또한 그 박물관에서 처음 설립된 한국 문화 전시실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4](→한불 관계)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단발을 하고 이와타 슈사쿠로 개명한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 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5]

도일과 김옥균 암살[편집]

김옥균 암살 당시 일본의 어느 신문사에 실린 기사와 삽화

바로 그런 성향으로 홍종우는 갑신정변으로 자신의 일족을 섬멸하려한 김옥균등 급진개화파에 대한 응징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민영소의 하수인인 이일직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는 일본 정한론의 구체적인 이행을 추구하는 겐요사 창설자 도야마 미쓰루의 후견과 영향 하에 있는 김옥균이 조선의 독립 근대화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고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한다.

효수되어 양화진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한 방법은 간단했다. 먼저 청의 외교부 협조을 받아, 당시 이홍장 휘하의 조선 주재 청국 공사 원세개(위안 스카이)가 '동양 평화를 함께 논의하고 싶다'며 김옥균을 청으로 초청한다는 서한을 김옥균에게만 띄우게 한다. 그러면서 홍종우를 동반자로 추천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의 호감을 미리 사두고 있었다. 그의 프랑스 요리 솜씨는 어찌나 기가 막혔던지 김옥균 본인은 물론 그의 일본 친구들 입맛까지 당길 정도였다.[6] 개화파 성향에 프랑스 유학(가서 기메 박물관의 조선 문물 분류 정리와 춘향전, 직성행년편람등을 번역 출간했으며 심청전을 "다시 꽃피는 마른나무"라는 이름으로 저작 출간 했음. 특히 이 "다시 꽃피는 마른나무"의 서문은 장장 30 페이지가 넘는 장문으로 한반도의 역사와 존체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구체적인 현상 정리로서 서구 열강들에 조선의 실체를 알리는 소중한 저작.)까지 갔다 왔다는 사기성이 가득한 이력등 (- 대체 무슨 사기성인지 이해 안감. 그의 모든 저작과 행적은 프랑스 사적으로 남음. 심지어 한국 위키보다 영문, 프랑스 위키에서 훨씬 자세하고 정확히 행적이 남음.) 으로 홍종우는 김옥균의 의심을 사지 않을만큼 여러모로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박영효와 윤치호 마저 고개를 흔들 정도 혼음과 과음으로 타락한 생활을 한 김옥균에게 무슨 권모술수가 필요 했을지)이었던 것이다. 그는 김옥균의 중국여행에 동행, 이듬해 상하이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東和洋行)에서 리볼버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 암살하였다.

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다.(김옥균의 1894년 상황은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진행한 극우 행동단체 '현양사'의 후원 아래 주지육림으로 놀아나던 시대였음. 그 현양사는 후에 을미사변의 주역이고 한일합병의 핵심 세력임. 1882년 설립 당시부터 김옥균과 관계가 있었으며 갑신정변의 베후 세력임. 홍종우는 김옥균보다 손위 사람으로 정치적 영향력과 판단력에 한계가 있는 김옥균을 조금이라도 선도할 의지였음) 홍종우는 그만큼 암살 의도를 철저히 숨기고 위장 접근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김옥균을 상하이로 꼬여냈고 거사를 '깨끗이' 처리했던 것이다. 왜 김옥균을 제거했는지 청국 측 경찰서에 변론하기를,[6] 첫 번째 이유로 공무라고 밝혔다. 김옥균 암살은 첫째로, 공무다. 어명을 받든 것이다.[6] 두 번째 이유로는 김옥균이 동양 평화에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선의 관원이고, 김옥균은 나라의 역적이다. 김옥균의 생존은 동양 삼국의 평화를 깨뜨릴 우려가 있다.[6]

정치 활동[편집]

석방과 귀국[편집]

곧 이어 청나라관원 경찰에 체포, 구금되는 형식적인 모양새를 취한 후, 미리 홍종우의 신상 처리를 청과 조율하고 있던 조선의 '석방 교섭'으로 풀려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왔을때 그는 수구파 대신들로부터 환희와 환대를 받았지만, 홍종우 자신은 '소생의 본뜻은 여러분들 개인의 적을 토멸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국가의 공적이기 때문입니다.'라며 수구파들의 환대와 환희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양새도 취한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6] 1894년 홍종우의 '거사'에 당시 조정이 은밀히 개입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그 후, '특채'차원이라고 해석이 가능한 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신임을 얻어 요직에 올랐다.

근황주의 정치 활동[편집]

1898년 독립협회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며 중추원 관제 개편과 상원 설립을 주장하자 의회설립을 막을 의도로 시간을 끌기 위해 시간이 많이 필요한 하원 설립을 요구하였다. 그는 이기동(李基東), 길영수(吉泳洙) 등과 함께 황국협회를 조직,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급기야 고종의 사주를 받아 2천여 명에 달하는 보부상을 동원해 몽둥이로 무장시켜 평화적인 집회를 하는 만민공동회에 폭력테러를 가하였고 결국 사건이 커져 탄핵을 받았으나 고종의 비호로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만큼 홍종우는 반대파를 토론으로 설득하기 보다는 폭력으로 상대의 존재조차 없애려는 전형적인 정치폭력배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또한 역모죄로 체포한 개화파 인사들을 재판하는데 그 중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홍종우는 감리사로 이승만사건의 재판을 맡는다. 처음에 그는 이승만에게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형을 감하여 종신형에 태형 100대를 선고하였다.

홍종우는 철저히 황제를 떠받드는 근왕파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며 황제권을 절대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고 공화제는 물론이고 입헌군주제 설립 계획을 폭력을 써가면서까지 차단 분쇄하였으며 만민공동회독립협회의 활동을 감시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주요 법규들을 모아 '법규류편 속일'을 편찬, 발간하였다. 이는 주요 법규에 대한 안내와 법규 해설집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한때 프랑스 유학을 한 사실 때문에 개화파로 분류하는 견해가 존재하지만 실상 김옥균을 암살하고 황국협회를 이끌어 민중운동을 탄압하는 철저한 수구파인사였다. 그는 수차례 '외국군대 철수'와 '방곡령 실시', '상공업 육성책', '외국공사의 내정간섭 반대' 등을 주장하였고, 대한제국 황제 고종한테 이러한 주장의 내용인 상소를 11 차례 올리곤 했지만 어디까지나 고종의 전제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최후[편집]

그러나, 1900년대 되면서 대한제국내에서는 일본제국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자, 홍종우는 점차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일본제국의 시각에서는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한 자'라고 낙인찍혔기 때문에 결코 홍종우를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03년(광무 8년)에 친일 관리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득세를 하면서 홍종우는 주요 관직에서 밀려나 제주도 목사로 좌천되었고, 이 마저도 얼마 못 가 결국 제주도 목사 관직마저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그가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장본인이라는 것이 조선 사회에 알려지면서 그는 살인자라는 비난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의 거사를 정의와 애국심에 의한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김옥균은 우리나라의 재상으로 대역부도한 사건에 연루되어 몇 백 명을 죽였다. 그런데 그는 일본으로 도피해 이름까지 바꿨다. 나는 김옥균을 죽여 왕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린 것이다.

일본일본화와 일본 사회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김옥균을 위인으로 추켜세우고, 그를 암살한 홍종우를 테러리스트로 매장했다.[7] 그 이후 홍종우의 말년에 관한 기록은 알려진바가 없다. 일설에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어렵게 살아갔다고 하지만 자세한 행적이나 기록이 없다. 홍종우는 일본제국대한제국 병합 이후인 1913년에 죽었다. 이도 확인된 바는 없으며 1905년 이후의 행적은 제한적으로 일본 관헌의 기록에 남아 있느나 그도 믿을 바는 안된다. 오히려 1906년 이용익의 유럽행에 동행하여 1906년에 예정됐던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용익의 여권이 프랑스 영사관에서 발행한 프랑스 여권이었고 1907년 이용익의 사망 이후에 홍종우의 행적이 제한적이나마 파악된다. 1909년 블라디보스톡으로의 이주를 계획했으나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저작[편집]

저서[편집]

  • 《직성행년편람》
  • 《법규류편 속일》

역서[편집]

  • 《춘향전》프랑스어 번역본
  • 《심청전》프랑스어 번역본, (Le Bois sec refleuri), 1895 Gallica

평가와 비판[편집]

비판[편집]

기타[편집]

그의 김옥균 암살 사건이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 했다"는 시각도 있다. 김옥균 암살 계획을 미리 감지한 쪽은 일본 정부였으며, 그의 암살을 애써 저지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한때 김옥균을 근대화의 선구자 운운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한 일본이었지만, 김옥균이 정변에 실패하고 자객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찬밥 대하듯 했다. 즉 귀찮은 존재였던 셈이다. 조선의 근대화에 일본을 이용하는 데만 뜻이 있었던 김옥균이 조선의 일본식민지화 야욕에도 태클을 걸 것임이 분명했다.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손으로만 암살당하자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일제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암살 당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애도하고, 의연금을 모으고, 시체 수습 문제를 협의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였다.[6]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들의 조선 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언론 플레이이었을 뿐이다.

한편 조선은 김옥균 암살이 국가의 경사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6]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홍종우는 단번에 실력파 황실 관료로 부상한다. 그로서는 프랑스에서 외롭게 공부하며 조선을 근대 국가로 발돋움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에 옮길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6] 상하이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김옥균을 '친일'로 간주했던 청이 그의 암살을 도운 결과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김옥균은 일본인이나 다름없고, 일본 여관에서 사건이 일어난 만큼 사건 관할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 해가며, 암살을 '방치'한 청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사실상 김옥균 암살의 공모자나 다름 없던 청은 홍종우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조선 정부의 요구 대로 홍종우와 김옥균 시신을 조선에 넘겼다.[6]

조선과 청은 일본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만국공법과 같은 허울 좋은 세계 공존론을 맹신하며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투를 막아 주리라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시켜 주리라고 안이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 나아가 대륙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에게 김옥균 암살 사건은 자신들의 조선내 존재의 명분을 강화시켜 준것이라고 일본은 주장하지만 핑계일뿐이다. 결정적 원인은 그 해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에 의해 서로 간에 맺혀 있는 청일 양국으로만의 톈진 조약을 발효 직후에 즉시 파기하였던 청과 일본은 한반도 조선 땅에서만 정면으로 부딪친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6]

참고 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고종시대사

각주[편집]

  1.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푸른역사
  2. 조선조 방목 참조.
  3. 홍종우의 진실 여주시민신문 2010년 09월 06일
  4. Official website of the French embassy in South Korea
  5.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암살자 홍종우와 김옥균, 과연 누가 옳았는가 쿠키뉴스 2005년 11월 25일자
  6.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 사건 오마이뉴스 2005년 11월 24일자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omai22"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7. 이후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등이 김옥균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언급을 여러번 함으로써 김옥균도 언급 금기 대상이 된다.
  8. 조재곤 (2005년 11월).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푸른역사. 327쪽. ISBN 89-91510-11-6.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