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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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 번청이 설치되어 있었던 가고시마 성

사쓰마 번(일본어: 薩摩藩 사쓰마한[*])은 일본 에도 시대 사쓰마, 오스미 2휴가 국 모로가타 군(諸県郡), 사쓰난 제도 등을 지배했던 이다. 그 지배 영역은 지금의 가고시마 현 전역과 미야자키 현의 남서부에 속해 있었다.

개요[편집]

사쓰마 번은 통칭으로, 판적봉환 이후의 정식 명칭은 가고시마 번(鹿児島藩)이다. 번청은 가고시마 성으로 시마즈 가문이 번주로써 지배했다. 도자마 다이묘 중에서도 최고 고쿠다카가 90만 석(이것은 표면상의 고쿠다카로 실제 고쿠다카는 그 절반 정도였다)으로 가가 번에 다음가는 대형 번을 형성했다.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에 걸쳐서 오쿠보 도시미치사이고 다카모리 등 다수의 유력 정치인들을 배출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의 일본 국내의 정치를 지배한 한바쓰 정치(藩閥政治)에서는 ‘사쓰마바쓰’(薩摩閥)라는 통칭으로 일본 제국 육군을 장악해 온 조슈 번과 함께 사쓰마 번은 일본 제국 해군을 장악해 오면서 유력한 일본우익 정치세력의 빅2를 형성했다.

현재의 일본 현대 정치에서는 조슈 파벌의 대표로 아베 신조가 있다면,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사쓰마 파벌을 대표해 오고 있다.

역사[편집]

중세[편집]

시마즈 씨(島津氏)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초기에 사쓰마(薩摩) ・ 오스미(大隅) ・ 휴가(日向) 3개 구니(国)의 슈고(守護)로 임명된 이래 그 지방을 본거지로 하는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이자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써 성장하였고, 덴쇼(天正) 15년(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九州征伐) 때에 도요토미에 복속되어 사쓰마 ・ 오스미 ・ 휴가의 일부에 걸치는 영지 지배를 인정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유수(留守)를 맡았던 청소년들의 풍기문란이 문제가 되어 이를 염려한 유수거역(留守居役) 가로(家老)들이 고안한 청소년교육시스템이 향중 교육에서 사용되었다. 이 교육체제는 훗날 막부 말기의 하급 무사들의 대두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근세[편집]

게이초(慶長) 5년(1600년) 사쓰마 시마즈 씨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에 가담하였고, 도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의 한 명으로 꼽히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중개로 본래 다스리던 영지의 지배를 인정받았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셋째 아들 이에히사(家久)가 막부로부터 가문의 당주로 인정받았다. 이 시점을 기해 정식으로 에도 막부의 번으로써 사쓰마 번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일본 학계의 통설이다.

게이초 14년(1609년) 사쓰마는 류큐(琉球)를 쳐서 복속시키고(류큐 침공) 류큐의 고쿠다카(石高) 12만 석을 더 얻었으며, 류큐로부터 아마미 군도(奄美群島)를 빼앗아 오시마(大島) · 기카이(喜界) · 도쿠노시마(徳之島) · 오키노에라부(沖永良部) 등 네 개의 대관(代官)을 배치하고 직접지배하고, 나하(那覇)에 류큐재번봉행(琉球在番奉行)를 보내 류큐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쓰마 번의 류큐 지배는 연공(年貢)보다는 류큐 왕국을 창구로 하는 대중국 교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으며, 아마미산 사탕은 번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 밖에 고쿠타카도 더 늘어나 기존의 56만 석에서 72만 석(77만 석까지도 늘어났다)이 되었다.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과 마찬가지로 옛 지배자가 갈리는 일 없이 그대로 유지된 사쓰마 번에는 에도 막부 수립 이전의 기존 지배 체제가 잔존했고, 외성제(外城制)[1]나 가도와리(門割)[2] 등의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향사(郷士) 신분이 전체 인구의 약 40%를 점유했고[3] 번이 위치하고 있는 가고시마의 토양은 대부분 수질이 나빠서 경작이 곤란한 시라스 대지(シラス台地)였기에 토지는 척박하고 겉으로는 고쿠타카 77만 석이라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35만 석 정도의 수익을 내는 정도에 그쳤다. 게다가 남서쪽 섬들에서는 이따금씩 태풍이나 화산 폭발 등의 재해가 자주 발생했기에 초기 사쓰마 번의 재정은 궁핍했다.

여기에 에도 막부의 유력 번에 대한 약화 정책 아래 대규모 막부가 시행하는 잦은 토목공사에 사쓰마 번이 동원되어 재정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호레키(宝暦) 3년(1753년)에 발호된 기소(木曽) 지역 3개 하천에 대한 개수 공사(호레키 치수 사업宝暦治水)에서는 공사에 투입된 막대한 자금(40만 냥)을 공사 현장과는 멀리 떨어진 사쓰마 번에서 전액 부담해야 했고(목수 등의 전문 직공을 고용하는 것도 일절 금지되었다), 번의 재정은 그야말로 파탄 직전에 처했다. 40만 냥에 이르는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오사카의 거상에게 빚을 지기도 했고, 파견된 번사들은 과로 또는 전염병으로 병사하거나 막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할복하는 번사도 있었다. 사쓰마 번의 가로(家老) 히라타 유키에(平田靱負)는 이러한 다수 희생자 발생(최종적으로 벙사자 33명에 자살한 자는 52명) 및 번의 재정 피폐의 책임을 지고 공사가 끝난 뒤 자결하였다.

8대 번주 시게히데(重豪)는 그때까지의 폐쇄적인 번정(藩政) 개혁에 나서 안에이(安永) 2년(1773년) 번교조사관(藩校造士館)과 연무관(演武館) 설립에 착수하고, 의학원(医学院)이나 명시관(明時館) 등도 세웠으며 농업 장려를 위해 농업 관련 서적인 《성형도설》(成形図説, 전100권) 등의 각종 서적 편찬 사업에 나섰다. 또 막부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서 셋째 딸인 시게히메(茂姫)를 11대 쇼군 이에나리(家斉)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는데,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 가운데 쇼군의 정실을 배출한 것은 사쓰마 번이 유일했다. 이러한 갖가지 호사스러운 사업으로 인해 사쓰마 번의 정치적 영향력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번의 재정도 그만큼 빈궁해져 갔다.

그 뒤 분세이(文政) 10년(1827년) 주쇼 히로사토(調所広郷)를 중심으로 하는 번정 개혁이 단행되어, 번의 채무 정리나 사탕 전매제 강화, 류큐 교역 확대 등의 조처로 사쓰마 번의 재정은 호전되었다. 가에이(嘉永) 4년(1851년)에 11대 번주가 된 나리아키라(斉彬)의 치세 아래 서양식 군비나 번이 운영하는 공장의 설립을 추진하고(집성관사업集成館事業) 수양딸 아쓰히메(篤姫)를 13대 쇼군 이에사다(家定)의 정계실(正継室)로 보내는 등 사쓰마 번은 막부 말기의 실력자로 대두하였다.

나리아키라가 죽은 뒤 번주 다다요시(忠義)의 친아버지로 선대 번주 나리아키라의 이복 동생이었던 히사미쓰(久光)가 번의 실권을 쥐었고 「국부」(國父) ・ 「부성공」(副城公)이라 불리던 그는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외치며 웅번(雄藩)들과의 연합 구상 실현을 향해 활동했지만, 영국과 벌인 사쓰에이 전쟁(薩英戦争)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의 도막파(倒幕派) 하급 무사에게 번의 주도권이 넘어갔다.

막부 말기 사쓰마 번은 공무합체론이나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했고 그 뒤 조슈 번(長州藩)과 동맹을 맺어(삿초동맹)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원동력으로써 활약, 메이지 이후 오랜 시기에 걸쳐 일본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사쓰마 파벌(薩摩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류큐 제도를 제외한 사쓰마 번의 영지는 직할지였던 아마미 군도와 함께 1871년(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가고시마 현(鹿児島県)이 되었다.

시마즈 집안은 1884년(메이지 17년)에 화족령(華族令)에 의해 공작(公爵)이 되었다.

역대 번주[편집]

  1.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재위 1602년 ~ 1638년 (다다쓰네에서 개명)
  2. 시마즈 미쓰히사(島津光久) 재위 1638년 ~ 1687년
  3. 시마즈 쓰나타카(島津綱貴) 재위 1687년 ~ 1704년
  4. 시마즈 요시타카(島津吉貴) 재위 1704년 ~ 1721년
  5. 시마즈 쓰구토요(島津継豊) 재위 1721년 ~ 1746년
  6. 시마즈 무네노부(島津宗信) 재위 1746년 ~ 1749년
  7. 시마즈 시게토시(島津重年) 재위 1749년 ~ 1755년
  8.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 재위 1755년 ~ 1787년
  9. 시마즈 나리노부(島津斉宣) 재위 1787년 ~ 1809년
  10.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 재위 1809년 ~ 1851년
  11.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재위 1851년 ~ 1858년
  12. 시마즈 모치히사(島津茂久) 재위 1858년 ~ 1871년

지번[편집]

각주[편집]

  1. 무사를 가고시마 성(鹿児島城) 아래에 모여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지 안에 흩어져 있는 외성(外城)이라 불리는 거점에 거주하도록 하는 것. 외성은 덴메이(天明) 4년(1784년)에 호칭을 사토(郷)로 바꾸었다.
  2. 농민 몇 호씩을 가도(門)로 묶어서 가도마다 토지를 공동 소유하도록 하는 것.
  3. 임신호적(壬申戸籍)에 나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직후의 화사졸족(華士卒族)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6%였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