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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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近世)는 서양중세근대 사이의 시기이다.

이를 다시 근세와 근대로 나누기도 하며, 근대는 대개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20세기 초엽(주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를 가리키며, 근세는 그 이전을 일컫는다.

유럽의 근세[편집]

프랑스와 영국의 왕권 강화[편집]

백년전쟁은 그것이 단순히 왕위 계승이나 플랑드르 쟁탈을 에워싼 100년 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 출신 영국 왕실이 프랑스 국내에 갖고 있는 봉토에 대한 지배권(知行權)을 둘러싸고 되풀이된 영국·프랑스 사이의 고질적인 분쟁의 계속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국이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국가의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때에 해당하며 영국·프랑스의 봉건적 제세력을 많이 동원함으로써,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국내 봉건 제후 내부의 투쟁이기도 하였으며, 제후의 몰락과 왕권의 신장, 국민 의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 루이 11세, 샤를 8세에 의한 전후 재건을 통해서 왕권이 정비되었다. 영국에서 전후 또다시 제후, 기사들을 휘말아버린 30년에 걸친 내전인 장미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등장하는 튜더 왕조헨리 7세에 의해 영국 절대주의가 등장하였다.

르네상스[편집]

영국, 프랑스에 왕권이 신장되고 있던 시대에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가 계속되었고 남부에서 나폴리 왕국, 중부에서 로마 교황령, 북부에서는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이익을 거둔 도시가 주변 농촌까지도 지배하에 두고 도시 국가로 번영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을 무대로 부유한 상인층을 기수로 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전개되었다. 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의 옛 영토로서 유적과 유물에 접하는 기회가 풍부하였다. 유럽 중세의 신에 대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이 대치되어 피안적(彼岸的)이 아니고 차안적(此岸的)·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의 약동에 찬 문화가 시민 계급에 의해 이 곳에서 창조되기에 이르렀다. 단테는 《신곡》을 써 르네상스의 선구가 되었고,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르네상스 예술은 조토 디 본도네에서 시작해 보티첼리를 거쳐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출현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즈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써서 분열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호소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북방 서구 여러 나라에 파급되고, 제각기 나라별로 독자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1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의 단순한 모방 따위는 아니다. 네덜란드나 남독일과 같이 도시를 기반으로 하면서 때로는 프랑스·에스파냐·영국처럼 왕권에 의한 국가 통일을 배경으로 르네상스는 싹터 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와 같이 벌써 15세기 초에 반 에이크 형제에 의한 사실적인 풍경화·초상화가 뒤의 플랑드르파의 기초를 만들고 있었으며, 반대로 형제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유화법은 베네치아의 화가를 통하여 이탈리아로 전해졌다. 영국에서는 위클리프의 성서 영역,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통해서 영국 국민 문학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더욱이 서구 여러 나라의 르네상스는 깊은 종교성 속에서 전개되었고, 특히 그 휴머니즘은 그리스어, 헤브라이어 원전(原典)에 의한 성서 연구를 통해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남북 유럽을 연결시키는 상업의 중심지이며 모직물 공업이 왕성한 네덜란드에서는 농민의 생활을 밝게 묘사한 브뤼헐이나 시민의 세계를 묘사한 루벤스, 렘브란트 등이 활동하였다. 16세기 최대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린 에라스무스는 신약성서를 그리스어 원전으로 연구하고 《치우신 예찬》에서 교회의 부패를 풍자했다. 독일에서 르네상스는 종교성으로 짙게 채색된다. 로이힐린, 멜란히톤의 인문주의적인 성서 연구, 뒤러의 회화가 그렇다. 프랑스에서는 궁정의 보호 아래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이야기》나 몽테뉴의 《수상록》 등 예리한 풍자 정신으로 일관된 작품이 만들어졌다. 국가 통일과 해외의 발전을 추진하고 있었던 에스파냐에서는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에서 몰락해 가는 기사계급을 풍자하며 인간을 추구한다. 절대주의 체제하의 영국에서는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썼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이 경험론 철학의 기초를 만들어 놓았으며, 셰익스피어가 많은 걸작을 남겼다.

종교 개혁[편집]

독일에서는 13,14세기 이래 영방국가 체제가 더욱 진전되고 성속(聖俗)의 제후나 도시는 자립했으며 국내의 분열은 점점 심해져 갔다. 쇠퇴해 가고 있던 교황권은 국가적 통일의 약한 부분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 레오 10세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가 독일을 목표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의한다. 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한 루터95개 조항의 논제 발표(1517)와 함께 종교개혁(Reformation)이 시작되었다. 봉건사회의 해체가 늦어진 독일에서도 농민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15세기 이래 농민 폭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였으며, 루터의 개혁에서 그들의 사회적 해방을 기대하였다. 1524년과 1525년 뮌처의 민중적인 설교를 신봉한 서남 독일의 농민들은 격렬한 농민전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루터에게 격려되어 태세를 정비한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더욱이 이들은 종교개혁을 정치 대립에 이용했다. 1529년의 슈바이엘 국회에서 황제에게 항의한 루터파의 제후들은 이듬해 동맹을 맺어 황제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고 슈말칼덴 전쟁을 벌였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나 도시에게 루터파 신앙을 인정함으로써 영방 지배 체제를 종교면에서 확인한 것에 불과하였으며, 독일은 결국 영방국가 체제의 강화, 따라서 국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리상의 발견[편집]

12,13세기에 봉건사회의 완성과 더불어 유럽 세계는 밖으로 향해서 팽창·확대를 시작했다. 동남방으로 향해서 십자군이, 서남방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국토 회복이, 동방에는 동독일 식민이 있었다. 이 유럽의 팽창·확대의 전개로서, 15세기 말의 지리상의 발견을 볼 수 있다. 동방에 대한 동경에 곁들여 십자군 이래 이슬람 상인을 매개체로 한 동방 무역의 유리함에 눈뜬 유럽 여러 나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발전으로 무역이 방해를 받았으므로 인도에 이르는 항로의 개발을 기도하였다. 14,15세기에 동방 무역으로 번영한 북이탈리아 도시가 아니라 이슬람과의 국토 회복 전쟁을 통해서 강력한 왕권하에 통일국가를 형성해 가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그 선두에 섰다. 헨리 항해왕 밑에서 착실하게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을 해 나가던 포르투갈에서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하였으며(1488), 그 후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마침내 인도에 도달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1492년 콜럼버스가 단번에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신대륙 식민[편집]

신대륙의 식민 활동은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유럽의 여러 민족이 건너가, 원주민 인디언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유럽 문명과 사회를 이식(移植)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 에스파냐는 16세기 말까지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했다. 에스파냐가 식민지를 경영한 목적은 금·은의 채굴이었으며, 국왕의 직할 지배 아래 영위(營爲)되었다. 네덜란드는 서인도제도, 기아나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시 맨해턴섬과 허드슨 강변에 뉴네덜란드 식민지를 건설했다. 1621년에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무역 활동을 했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캐나다에 진출하여 루이 14세 시대에 미시시피강 일대에 광대한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식민 활동은 모피 무역과 가톨릭의 포교(布敎)를 주로 한 것으로, 인구도 적은데다, 국왕의 직접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1497년 존 카보트의 북아메리카 동안(東岸), 체사피크만(灣) 부근의 탐험으로 시작되었는데, 실제의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였다. 1606년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회사(런던 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에 특허장을 주어 식민과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했다. 버지니아 식민지가 1707년에 제임스 하구(河口)에 건설되어 태평양으로 나가는 방향이 탐색되었다. 제임스 1세의 국교 강제를 피하여, 청교도들이 종교나 정치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에 이주하여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건설이나 가톨릭 교도의 메릴랜드나 찰스 2세의 특허장에 의한 영주 식민지(領主植民地)인 캐롤라이나 식민지 등 1732년까지 13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이들 영국 식민지는 견실한 농업 식민이 주이며, 인구도 많고 건전한 발달을 했다.

한국의 근세[편집]

한국의 경우 조선의 건국인 1392년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 1863년까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이 전
고전후 시대

다 음
 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