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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네덜란드 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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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판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그리스도 강하》, 1435년경,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초기 네덜란드 화파 또는 초기 네덜란드 회화는 15세기와 16세기의 북방 르네상스 기간 동안 부르고뉴령 네덜란드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일컫는 말로, 한때는 플랑드르 원시파라고 불리기도 했다.[1] 이 화파는 주로 브뤼허, 헨트, 메헬렌, 뢰번, 투르네, 브뤼셀 등 현재의 벨기에에 위치한 도시들에서 번성했다. 이 시기는 대략 1420년대 로베르 캉팽얀 판 에이크로부터 시작되어 적어도 헤라르트 다비트가 사망한 1523년까지 지속되었다.[2] 다만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를 1566년 혹은 1568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시작까지 확장하기도 하며, 막스 J. 프리들랜더의 권위 있는 연구는 대 피터르 브뤼헐까지를 이 시기로 잡고 있다. 초기 네덜란드 화파는 초기 및 전성기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겹치지만, 초기 단계(약 1500년경까지)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전과는 별개인 독자적인 예술적 진화로 간주된다. 1490년대부터 점점 더 많은 네덜란드 및 북유럽 화가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의 이상과 화풍이 북유럽 회화에 흡수되었다. 그 결과, 초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종종 북방 르네상스와 후기 또는 국제 고딕 양식 모두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주요 네덜란드 화가로는 로베르 캉팽, 얀 판 에이크,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디르크 바오츠, 페트뤼스 크리스투스, 한스 멤링, 휘호 판 데르 후스,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있다. 이들은 자연주의적 묘사와 환영주의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며, 대개 복잡한 도상학적 특징을 보인다. 주제는 주로 종교적 장면이나 소규모 초상화이며, 서사화나 신화적 주제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풍풍경은 풍부하게 묘사되었지만, 16세기 초 이전에는 배경 요소로만 사용되었다. 회화 작품은 일반적으로 나무 패널에 유화로 그려졌으며, 단일 작품이거나 이면화, 삼면화 또는 다면화 형태의 이동식 혹은 고정식 제단화가 많았다. 이 시기는 또한 조각, 태피스트리, 채식필사본, 스테인드글라스 및 조각된 레타블로도 주목받는다.

초기 세대의 예술가들은 유럽 내 부르고뉴의 영향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에 활동했으며, 당시 저지대 국가는 공예와 사치품으로 유명한 북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다. 공방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패널과 다양한 공예품들이 개인적인 의뢰나 시장 가판대를 통해 외국 왕족이나 상인들에게 판매되었다. 작품의 대부분은 16세기와 17세기의 성상 파괴 운동 물결 속에서 파괴되었고, 오늘날에는 수천 점만이 남아 있다.

초기 북유럽 미술은 전반적으로 17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높게 평가받지 못했으며,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은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제대로 기록되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작품의 귀속 문제를 해결하고 도상학을 연구하며 주요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개략적인 윤곽을 정립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가장 중요한 작품들 조차 일부는 귀속 문제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초기 네덜란드 화파에 대한 연구는 19세기와 20세기 미술사의 주요 활동 중 하나였으며, 20세기 가장 중요한 두 미술사학자인 막스 J. 프리들랜더(《얀 판 에이크에서 브뤼헐까지》 및 《초기 네덜란드 화파》)와 에르빈 파노프스키(《초기 네덜란드 화파》 - 1516년 사망한 히에로니무스 보스까지만 다룸)의 주요 연구 대상이었다.

용어와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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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네덜란드 미술"이라는 용어는 15세기와 16세기[2]부르고뉴 공작과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한 북유럽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에게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이 예술가들은 북방 르네상스의 초기 원동력이 되었고,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는 흐름의 중심이 되었다. 이 정치적, 미술사적 맥락에서 북유럽은 현대의 프랑스,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일부를 포함하는 영역에 걸친 부르고뉴 영토를 따른다.[3]

헨트 제단화》, 1432년 후베르트와 얀 판 에이크 완성. 이 다면화와 《토리노-밀라노 시도서》는 일반적으로 초기 네덜란드 시기의 첫 주요 작품으로 간주된다.

네덜란드 예술가들은 다양한 용어로 불려 왔다. "후기 고딕"은 중세 예술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초기 명칭이다.[4] 20세기 초, 영어권에서는 이 예술가들을 브뤼허-헨트 화파 또는 "구 네덜란드 화파"로 다양하게 불렀다. "플랑드르 원시파"는 프랑스어 "primitifs flamands"에서 차용된 전통적인 미술사 용어이며,[5] 1902년 브뤼허의 플랑드르 원시파 전시회 이후 대중화되었고[6][A] 오늘날에도 특히 네덜란드어와 독일어권에서 사용되고 있다.[4] 이 맥락에서 "원시"는 세련미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에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 화가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이 운동을 화려한 프랑스 궁정에 붙들린 예술가들보다 부르고뉴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던 질 뱅슈아기욤 뒤파이와 같은 혁신적인 음악가들과 연결하여,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라는 용어를 선호했다.[7] 발루아부르고뉴가가 네덜란드에 권력의 중심지를 세우면서, 그들은 더욱 국제적인 시각을 가져왔다.[8] 오토 페흐트에 따르면, 1406년과 1420년 사이에 "회화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예술이 동시적으로 변화를 시작했다. 형이상학적 세계가 아닌 보이는 세계를 묘사하는 "예술의 새로운 아름다움"이 출현했다는 것이다.[9]

19세기에 초기 네덜란드 예술가들은 국적에 따라 분류되었으며, 얀 판 에이크는 독일인으로, 판 데르베이던(본명 로제르 드 라 파튀르)은 프랑스인으로 식별되었다.[10] 학자들은 때때로 이 화파의 기원이 프랑스인지 독일인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11] 이러한 주장과 구분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라졌으며, 막스 야코프 프리들랜더, 파노프스키, 페흐트의 뒤를 이어 현대 영어권 학자들은 이 시기를 거의 보편적으로 "초기 네덜란드 화파"라고 부른다. 하지만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플랑드르라는 용어를 더 정확하게 여긴다.[10]

14세기에 고딕 미술국제 고딕 시대로 접어들면서 북유럽에 여러 화파가 발달했다. 초기 네덜란드 예술은 프랑스 궁정 예술에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채식필사본의 전통 및 관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대 미술사학자들은 이 시대가 14세기 필사본 삽화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뒤를 이어 멜히오르 브뢰데를람로베르 캉팽과 같은 패널 화가들이 등장했다. 특히 캉팽은 일반적으로 최초의 초기 네덜란드 거장으로 간주되는데,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이 그의 밑에서 도제로 일했다.[8] 삽화 예술은 용담공 필리프, 앙주 공작 루이 1세, 장 드 베리 공작과 같은 부르고뉴 및 발루아앙주가 공작들의 후원 덕분에 140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러한 후원은 저지대 국가에서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 그의 아들 용담공 샤를로 이어졌다.[12] 채식필사본에 대한 수요는 14세기말에 감소했는데, 아마도 패널 회화에 비해 제작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삽화는 고급 시장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었으며, 판화인그레이빙목판화 모두—는 특히 마르틴 숀가우어알브레히트 뒤러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새로운 대중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13]

히에로니무스 보스,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 1490–1510년경.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중앙 패널이 도덕적 경고인지 아니면 실낙원의 파노라마인지에 대해 미술사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판 에이크의 혁신 이후, 첫 세대 네덜란드 화가들은 14세기 채식필사본에는 보통 없었던 빛과 그림자를 강조했다.[14] 성경 장면은 더욱 자연주의적으로 묘사되어 그 내용을 관람자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개인 초상화는 더 생동감 있고 감동적이 되었다.[15] 요한 하위징아는 이 시대의 예술이 일상생활에 완전히 통합되어, 전례와 성사에 긴밀히 연결된 세계의 신앙생활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16] 1500년경 이후 여러 요인이 북유럽 양식의 확산에 불리하게 작용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미술의 부상이었다. 이탈리아 미술의 상업적 매력은 1510년경부터 네덜란드 미술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약 10년 후에는 네덜란드 미술을 추월했다.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반영하는 사건이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반영하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1506년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브뤼허의 성모》가 브뤼허로 운송된 것과,[13] 1517년 라파엘로의 《라파엘로 카툰》 태피스트리가 브뤼셀에 도착하여 도시 내에서 널리 알려진 것이다.[17]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이 곧 북유럽 전역으로 퍼졌지만, 이는 15세기 북유럽 화가들을 참고한 것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성모상도 한스 멤링이 개발한 유형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13]

네덜란드 회화는 가장 좁은 의미에서 헤라르트 다비트가 사망한 1523년에 끝난다. 16세기 중반과 후반의 많은 예술가들이 여전히 기존의 관습을 유지했으며, 이들도 초기 네덜란드 화파와 연관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 화가들의 화풍은 초기 세대 화가들의 화풍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5] 16세기 초, 예술가들은 3차원의 환영주의 묘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18] 16세기 초의 회화는 이전 세기의 예술적 혁신과 도상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일부 화가들은 이전 세기의 전통적이고 확립된 형식과 상징주의를 따르며 기존 작품을 계속해서 복제했다. 다른 화가들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인 서사 연작으로 눈을 돌렸고, 성경적 이미지를 신화적 주제와 결합했다.[19] 15세기 중반의 화풍과 주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1590년경 북방 매너리즘이 발달한 이후였다. 상당한 중복이 있었으며, 16세기 초중반의 혁신은 자연주의적인 세속적 초상화, 궁정 생활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삶 묘사, 배경 이상의 정교한 풍경화와 도시 풍경화의 발달 등 매너리즘 양식과 연결될 수 있다.[20]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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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생애의 거장, 후기 고딕 《수태고지》, 1463–1490년경.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초기 네덜란드 화파의 기원은 후기 고딕 시대의 세밀화이다.[21] 이는 1380년 이후 사실주의, 원근법, 색채 표현 기법의 새로운 수준을 보여준 필사본 삽화에서 처음 나타났으며,[22] 랭부르 형제와 네덜란드 화가 "한트 G"(Hand G)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토리노-밀라노 시도서의 가장 중요한 삽화들은 보통 한트 G의 작품으로 여겨진다.[23] 신원이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1420년경에 삽화를 그린 한트 G는 얀 판 에이크나 그의 형 후베르트 판 에이크 중 한 명으로 생각된다. 조르주 윌랭 드 로에 따르면, 한트 G의 《토리노-밀라노 시도서》에 대한 기여는 "어떤 책을 장식한 것 중 가장 경이로운 작품이며, 당시로서는 미술사에서 가장 놀라운 작품"이다.[24]

얀 판 에이크가 유화를 매체로 사용하면서 예술가들이 물감을 훨씬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미술사학자 조르조 바사리는 판 에이크가 유화를 발명했다고 주장했는데, 비록 과장된 주장이긴 하지만[8] 판 에이크가 이 기법을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준다. 판 에이크는 주로 유화가 매우 천천히 마른다는 점을 활용하여 새로운 수준의 기교를 발휘했다. 유화를 사용하면 더 많은 시간과 여유를 두고 서로 다른 색소 층을 혼합하고 섞을 수 있는 있었고,[25] 그의 기법은 로베르 캉팽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모두에 의해 빠르게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이 세 예술가는 초기 네덜란드 화파의 초기 세대 중 최고 수준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간주된다. 그들의 영향력은 동쪽의 보헤미아와 폴란드에서 남쪽의 오스트리아와 슈바벤에 이르기까지 북유럽 전역에 미쳤다.[26]

얀 판 에이크,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 1433년; 자화상일 가능성이 높음. 내셔널 갤러리, 런던

이 운동과 전통적으로 연관된 여러 예술가 중에는 현대적 의미에서 네덜란드인도, 플랑드르인도 아닌 예술가도 있었다. 판 데르베이던은 투르네에서 로제르 드 라 파튀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27][28] 독일인 한스 멤링과 에스토니아인 미하엘 시토 모두 네덜란드에서 완전히 네덜란드 화풍으로 작업했다. 시몽 마르미옹은 1435년에서 1471년 사이 부르고뉴 궁정이 간헐적으로 통치했던 아미앵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초기 네덜란드 화파로 간주되기도 한다.[5] 당시 부르고뉴 공국은 영향력이 정점에 달해 있었고, 네덜란드 화가들이 만든 혁신은 곧 대륙 전역에서 인정받았다.[29] 판 에이크가 사망할 무렵, 그의 그림은 유럽 전역의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각광받았다. 그의 작품 복제품이 널리 유통되어, 네덜란드 화풍이 중부 및 남부 유럽으로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30] 당시 중부 유럽 미술은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혁신이라는 이중 영향 아래 있었다. 종종 저지대 국가와 이탈리아 사이의 아이디어 교환은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와 같은 귀족들의 후원으로 이어졌고, 이들은 양쪽 전통 모두에서 필사본을 의뢰했다.[31]

1세대 화가들은 문해력이 있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대부분 중산층 출신이었다. 판 에이크와 판 데르베이던은 모두 부르고뉴 궁정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으며, 특히 판 에이크는 라틴어 독해 능력이 필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의 패널에서 발견되는 비문을 보면 그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2][B] 많은 예술가가 재정적으로 성공했으며 저지대 국가와 유럽 전역의 후원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33] 다비트와 바오츠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가 자신이 선택한 교회, 수도원, 수녀원에 대규모 작품을 기증할 능력이 있었다. 판 에이크는 부르고뉴 궁정의 시종이었으며 필리프 3세(선량왕)에게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33] 판 데르베이던은 주식과 부동산에 신중하게 투자했으며, 바오츠는 상업적 마인드가 있었고 상속녀 캐서린 "메텐겔데"("돈을 가진 자")와 결혼했다.[34][35] 브랑케 판 데르 스톡트는 토지에 투자했다.[32]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숙녀의 초상》, 1460년.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워싱턴. 판 데르베이던은 이상적인 초상화가 아닌 자연주의적 초상화를 추구했다.[36]

초기 네덜란드 거장들은 슈테판 로흐너성모 생애의 거장으로 알려진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은 15세기 중반 쾰른에서 활동하며 판 데르베이던과 바오츠의 수입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37] 새롭고 독특한 회화 문화가 생겨났으며, 울름, 뉘른베르크, , 뮌헨은 16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중심지가 되었다. 판화(목판화나 동판 인그레이빙 사용)와 프랑스 및 남부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여러가지 혁신적인 기법에 수요가 증가했다.[26] 일부 16세기 화가들은 한 세기의 기법과 화풍을 많이 차용했다. 얀 호사르트와 같은 진보적인 예술가들조차 판 에이크의 《교회 안의 성모》를 재작업하는 등 모작을 남겼다.[38] 헤라르트 다비트는 브뤼허안트베르펜의 화풍을 연결했으며, 두 도시 사이를 자주 여행했다. 1505년 그는 캉탱 마시가 지역 화가 길드의 수장이었던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했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39]

16세기에 이르러 판 에이크가 개발한 도상학적 혁신과 회화 기법은 북유럽 전역에서 표준이 되었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판 에이크의 정밀함을 모방했다.[40] 화가들은 새로운 수준의 존경과 지위를 누렸다. 후원자들은 더 이상 단순히 작품을 의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가들에게 구애하며 그들의 여행을 후원하고 새롭고 폭넓은 기법을 접하게 해 주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활동한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네덜란드 화가였다.[41] 그는 자연, 인간의 존재, 원근법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거의 포기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었으며, 그의 작품에는 이탈리아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그의 더 잘 알려진 작품들은 환각적인 경향이 있는 환상적인 요소가 특징으로, 판 에이크의 《십자가 처형과 최후의 심판 이면화》에 나오는 지옥의 환영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보스는 자신의 뮤즈를 따랐으며 도덕주의와 비관주의로 기울었다. 그의 그림, 특히 삼면화는 후기 네덜란드 시기의 가장 중요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 중 하나이다.[41][42]

대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 1565년. 빈 미술사 박물관, 빈. 브뤼헐의 여러 겨울 풍경화 중 가장 유명한 이 패널은 16세기 중반 회화가 세속적이고 일상생활을 지향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종교 개혁 이후, 세속적이고 풍경적인 이미지가 성경 장면을 앞지르면서 시각과 예술적 표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신성한 이미지는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고, 종교적 인물들은 소외되어 배경으로 밀려났다.[43] 보스의 화풍을 이은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한 명인 대 피터르 브뤼헐은 초기 네덜란드 예술가들과 그들의 후계자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은 15세기 관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원근법과 주제는 독보적으로 현대적이다.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그림의 전면에 광활한 풍경이 등장했고, 그의 풍속화는 종교적 회의주의와 민족주의의 암시까지 담고 있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43][44]

기법과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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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팽, 판 에이크, 판 데르베이던은 자연주의를 15세기 북유럽 회화의 지배적인 양식으로 확립했다. 이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으며,[45]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더욱 인간적이고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물들을 묘사하려고 했다. 초기 네덜란드 예술가의 첫 세대는 대상의 정확한 재현에 관심이 있었고(파노프스키에 따르면 그들은 "금처럼 보이는 금"을 그렸다),[46] 빛, 그림자, 반사와 같은 자연 현상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더 평면적인 원근법과 윤곽 위주의 회화에서 벗어나 3차원적 회화 공간을 추구했다. 관람자의 위치와 그들이 장면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가 처음으로 중요해졌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서 판 에이크는 마치 관람자가 두 인물이 있는 방에 막 들어온 것처럼 장면을 구성했다.[47] 회화 기법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 풍경, 실내, 물체를 훨씬 더 풍부하고 밝으며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48]

디르크 바오츠의 《그리스도의 매장》, 1440–1455년경(내셔널 갤러리, 런던)은 슬픔과 비통함을 엄숙하지만 감동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현존하는 몇 안 되는 15세기 아교 풀 회화 중 하나이다.[49]

오일을 결합제로 사용하는 것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시대에 이를 다루고 조작하는 혁신이 일어났다. 1430년대까지는 템페라가 지배적인 매체였는데, 템페라는 밝고 가벼운 색상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빠르게 마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질감이나 깊은 그림자를 구현하기 어려웠다. 오일은 부드럽고 반투명한 표면을 그릴 수 있고, 가는 선에서 굵고 넓은 붓질까지 다양한 두께로 적용할 수 있다. 오일은 천천히 마르므로 젖어 있는 동안 쉽게 다둘 수 있다. 이이러한 특성 덕분에 미묘한 디테일을 추가할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었고[50] 웨트 온 웨트 기법도 가능했다. 또한 물감이 마르면서 중간층의 일부를 닦아내거나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매끄러운 색상 전환이 가능하다. 오일은 그림자부터 밝은 광선까지 반사광의 정도를 구분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51] 투명한 유약(glaze)을 사용하여 빛의 효과를 미세하게 묘사할 수 있게 한다.[52] 빛 효과를 제어하는 이러한 새로운 자유로움은 표면 질감을 더욱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기여했다. 판 에이크와 판 데르베이던은 일반적으로 보석, 나무 바닥, 직물, 가정용품과 같은 표면에 빛이 비치는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했다.[25][53]

그림은 대부분 나무판에 그려졌지만, 때로는 더 저렴한 캔버스에 그려지기도 했다.[C] 사용된 나무는 주로 참나무였으며, 발트해 지역에서 수입된 경우가 많았고, 뒤틀림이 적은 방사형으로 자른 판자를 선호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수액을 제거하고 나무판을 잘 건조했다.[54] 나무 지지대는 연륜연대 측정을 가능하며, 발트해산 참나무를 사용한 경우, 예술가의 위치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55] 패널은 일반적으로 매우 높은 품질로 제작되었다. 로른 캠벨은 대부분의 패널이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잘 마감된 물건이다. 이음새를 찾는 것은 매우 어럽다"고 언급한다.[56] 많은 그림의 액자는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수정, 재도색 또는 금박이 입혀졌는데, 당시에는 경첩이 달린 네덜란드 작품을 분리하여 풍속화로 판매하는 것이 흔한 관행이었다. 현존하는 많은 패널화는 양면에 그려져 있거나 뒷면에 가문 문장, 문장, 보조적인 윤곽 스케치가 있는 경우가 많다. 단일 패널의 경우 뒷면의 표시는 종종 앞면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나중에 추가되었거나 캠벨이 추측하는 것처럼 "예술가의 재미를 위해" 칠해졌을 수 있다.[54] 패널의 양면을 모두 칠하는 것은 나무가 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에 실용적이었다.[57] 일반적으로 경첩이 달린 작품의 액자는 개별 패널 작업 전에 제작되었다.[56]

오일의 저렴한 대안으로 아교 결합제가 자주 사용되었다. 이 매체를 사용한 많은 작품이 제작되었지만, 아마포의 섬세함과 동물성 아교의 용해성 때문에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54] 잘 알려져 있고 비교적 잘 보존되었으나 상당한 손상을 입은 예로는 마시의 《성 바르바라와 성 카타리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1415–25년경)[58]와 바오츠의 《그리스도 매장》(1440–55년경)이 있다.[59] 물감은 일반적으로 붓이나 얇은 막대기로 칠해졌다. 화가들은 종종 손가락으로 그림자의 윤곽을 부드럽게 하거나, 때로는 유약을 닦아내거나 광택을 줄이기도 했다.[56]

길드와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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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후원자가 작품을 의뢰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거장의 공방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특정 도시의 경계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거장의 수는 제한적이었으며, 그들이 활동하고 의뢰를 받기 위해서는 장인 길드에 소속되고 규제를 받아야 했다. 길드는 생산, 수출, 원자재 공급을 감독하며 패널 화가, 직물 화가, 삽화가를 위한 별도의 규칙을 유지했다.[60] 예를 들어, 세밀화가에게 더 높은 시민권 요건을 적용받았으며 유화 사용을 금지했다. 전반적으로 패널 화가가 가장 높은 수준의 보호를 누렸으며, 직물 화가는 그 아래 등급이었다.[61]

길드 회원 자격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신규 회원 가입은 매우 어려웠다. 장인은 해당 지역에서 도제 생활을 해야 했는데, 시민권 증명이 필수였다. 시민권은 그 도시에 태어나거나 구입할 수 있었다.[61] 도제 생활은 4~5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장인으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는 "걸작"을 제작한 후 상당한 입회비를 납부하면 종료되었다. 이러한 가입비 체계는 지역 차원에서 보호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길드는 회원의 자질을 높이려 했지만, 자치 단체였기 때문에 부유한 지원자에게 유리한 경향이 있었다.[62] 길드와의 연관성은 때때로 그림에서 나타나는데, 가장 유명한 예는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의 《그리스도 강하》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은 뢰번 궁수 길드의 예배당을 위한 의뢰를 반영하여 석궁의 T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63]

공방은 일반적으로 거장의 가정집과 도제들의 숙소로 구성되었다.[64] 거장들은 보통 즉시 판매할 수 있도록 미리 그려진 패널이나 패턴 또는 윤곽 디자인의 재고를 쌓아두었다.[65] 미리 그려진 패널화의 경우 거장이 전체 그림 디자인을 책임졌으며, 일반적으로 얼굴, 손, 인물 의복의 자수 부분과 같은 핵심 부분도 거장이 그렸다. 더 평범한 요소는 조수들에게 맡겨졌는데, 많은 작품에서 스타일의 급격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판 에이크의 《십자가 처형과 최후의 심판 이면화》에 있는 비교적 약한 데시스 부분이 더 잘 알려진 예이다.[66] 종종 거장의 공방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의 복제품 생산과 새로 의뢰 받은 작품의 디자인으로 매우 분주했다.[67] 새로 의뢰를 받은 경우 거장은 일반적으로 조수들이 그릴 밑그림이나 전체 구성을 제작했다. 그 결과, 구성은 뛰어나지만 실행에서는 영감이 부족한 많은 현존 작품은 공방 구성원이나 추종자들의 것으로 귀속된다.[68]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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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판 에이크, 《수태고지》, 1434–1436년. 해체된 삼면화의 날개 부분.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워싱턴 D.C. 건축 양식은 로마네스크 건축고딕 건축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마리아는 천상의 지위를 상징하기 위해 과도하게 크게 묘사되었다.[69]

15세기에 부르고뉴 공작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저지대 국가의 상인 및 은행가 계급이 부상하게 되었다. 15세기 초 중반에는 국제 무역과 국내 부가 크게 증가하여 예술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지역의 예술가들은 발트해 연안, 북부 독일 및 폴란드 지역, 이베리아반도,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가문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70] 처음에 거장들은 액자, 패널, 안료를 살 수 있는 박람회에 참석하며 직접 구입했다.[64]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미술품 거래가 전문 직업으로 발전했으며, 이 활동은 상인 계층이 주도하는 순전히 상업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했다.[71]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필리프 3세에게 '에노 연대기'를 헌정하는 장 워클랭》, 헌정 세밀화, 1447–1448년. 벨기에 왕립도서관, 브뤼셀.

소규모 작품은 대개 의뢰가 아닌 사전 제작되었다. 거장들은 가장 인기 있는 형식과 이미지를 예상하여, 그 디자인을 공방 구성원들이 개발하였다. 기성 그림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박람회에서 판매되었으며,[72] 구매자가 주요 도시의 특정 지역에 모여 있는 공방을 방문할 수도 있었다. 거장들은 공방 앞 창문에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이는 도시 관리, 성직자, 길드 회원, 의사, 상인 등 중산층을 위해 제작된 수천 점의 패널화에 대한 전형적인 판매 방식이었다.[73]

중산층 가정에서는 더 저렴한 천 회화(아교, tüchlein)가 흔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가정용 종교 패널화에 대한 매우 관심이 높았다.[73] 상인 계급 구성원들은 대개 특정 주제가 포함된 작은 봉헌 패널을 의뢰했다. 특정한 패턴을 개별적인 패널을 추가하는 것부터 봉헌자 초상화를 포함하는 것까지 다양한 변경 요구 사항이 있었다. 문장을 추가하는 것이 유일한 변경 사항인 경우가 많았는데, 예를 들어 여러 버전으로 존재하는 판 데르베이던의 《성 루카가 그리는 성모》에서 이러한 추가 사항을 볼 수 있다.[74]

많은 부르고뉴 공작들은 사치로운 취향을 즐길 만한 여유가 있었다.[71] 선량공 필리프 3세는 일찍이 장 드 베리 공작을 포함한 자신의 종조부들이 프랑스에서 세운 예를 따라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 다수의 예술 작품을 의뢰했다.[75] 부르고뉴 궁정은 취향의 기준을 제시하는 곳으로 간주되었으며, 그들의 안맥은 매우 호화롭고 비싼 채식필사본, 금테 태피스트리, 보석으로 장식된 컵에 대한 수요를 촉발시켰다. 이러한 사치품에 대한 욕구는 궁정과 귀족을 거쳐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퍼져 나갔고, 백성들은 1440년대와 1450년대에 브뤼헤와 헨트의 지역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네덜란드 패널화는 예를 들어 귀금속으로 만든 물건들처럼 실용적인 가치는 없었지만, 귀중한 물건이자 유럽 미술의 최고봉으로 평가받았다. 필리프 3세가 쓴 1425년 문서에는 그가 뛰어난 솜씨를 가진" 화가를 고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1] 얀 판 에이크는 필리프에게 고용된 동안 《수태고지》를 그렸으며,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은 1440년대에 공작의 초상화가가 되었다.[75]

얀 판 에이크, 《롤랭 재상의 성모》, 1435년경

부르고뉴의 통치가 이어지면서 궁정 신하 및 관리 계급이 대규모로 창출했다. 일부는 막강한 권력을 얻었고 자신의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림을 의뢰했다.[76] 시민 지도자들 또한 바오츠의 《오토 3세의 심판》, 판 데르베이던의 《트라야누스와 헤르킨발트의 심판》, 다비트의 《캄비세스의 심판》과 같은 작품을 주요 예술가들에게 의뢰했다.[77] 시민 단체의 의뢰는 흔하지 않았고 수익성도 낮았지만, 화가의 명성을 높이고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브뤼헤의 신트-얀스호스피탈을 위한 《성 요한 제단화》를 그린 멤링이 그 예인데, 이 작품으로 그는 더 많은 시민 단체의 의뢰를 받게 되었다.[78]

부유한 외국 후원과 국제 무역의 발달은 기성 거장들이 조수들과 함께 공방을 구축할 기회를 제공했다.[64] 페트뤼스 크리스투스와 한스 멤링 같은 일류 화가들은 지역 귀족들 사이에서 후원자를 찾았지만, 브뤼허의 큰 외국인 인구들을 특별히 만족시켰다.[61] 화가들은 물품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수출했다. 부르고뉴 궁정의 화려함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하던 외국 왕족과 귀족들이 브뤼허에서 화가들을 고용해 갔다.[79][D]

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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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독서하는 막달라 마리아》, 1438년 이전. 내셔널 갤러리, 런던. 이 그림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외면하는 눈, 그녀의 속성인 연고, 그녀의 손에 든 책으로 대표되는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개념 등 도상학적 세부 사항이 유난히 풍부하다.[80]

초기 네덜란드 예술가의 첫 세대 그림들은 종종 상징주의와 성경적 참조가 특징이다.[81] 판 에이크가 선구자였으며, 그의 혁신은 판 데르베이던, 멤링, 크리스투스 등으로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이들은 모두 풍부하고 복잡한 도상학적 요소를 사용하여 당시의 신념과 영적 이상을 고조시켰다.[82] 도덕적으로 그 작품들에는 두려움 가득한 시각과 금욕주의에 대한 존중이 결합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 그림들은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강조한다. 당시 성모 숭배가 정정에 달했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관련된 도상학적 요소가 압도적으로 많다.[83]

크레이그 하비슨은 사실주의와 상징주의의 혼합을 아마도 "초기 플랑드르 미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일 것이라고 설명한다.[82] 1세대 네덜란드 화가들은 종교적 상징을 더 사실적으로 만드는 데 몰두했다.[82] 판 에이크는 다양한 도상학적 요소를 통합하여,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의 공존을 추구했다. 도상학은 눈에 띄지 않게 작품에 내장되었는데, 일반적으로 그 참조는 작았만 핵심적인 배경의 세부 사항들로 구성되었다.[81] 내장된 상징들은 장면 속에 녹아들게 의도되었으며 이는 "영적 계시의 경험을 창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이었다.[84] 특히 판 에이크의 종교화들은 "항상 관람자에게 가시적 현실의 변형된 모습을 제시한다".[85] 그에게 일상은 조화롭게 상징주의에 젖어 있어서 하비슨에 따르면 "묘사적 자료들이  ... 재배열되어 지상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초자연적 진리라고 여긴 것을 묘사하게 되었다."[85] 이러한 지상과 천상의 조화는 "기독교 교리의 본질적 진리"가 "현실과 상징, 세속과 성스러운 세계의 결합"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판 에이크의 믿음을 보여준다.[86] 그는 천상의 현실과 지상의 현실을 분리하기 위해 성모를 비현실적으로 크게 묘사했지만, 교회, 가정집, 또는 궁정 관리들과 함께 앉아 있는 모습과 같은 일상적인 배경에 배치했다.[86]

그럼에도 지상의 교회들은 천상의 상징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일부 가정집(예: 《루카의 성모》)에는 천상의 왕좌가 분명하게 묘사된다. 반면, 《롤랭 재상의 성모》와 같은 그림의 배경은 지상과 천상이 융합된 형태로 묘사되어 있어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87] 판 에이크의 도상학은 종종 너무 촘촘하고 복잡하게 층을 이루고 있어서 여러 번 감상을 해야 작품의 요소에 대한 가장 명백한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상징들은 종종 그림 속에 미묘하게 녹아들어 있어 자세히 반복적으로 관람한 후에야 분명해지며,[81] 존 워드에 따르면 "많은 도상학은 죄와 죽음에서 구원과 부활로의 약속된 통로"라는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88]

판 에이크가 동시대 사람들과 이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다른 예술가들은 도상학을 더 평범하게 사용했다. 캉팽은 영적 세계와 지상 세계 사이의 명확하게 분리했다. 판 에이크와 달리 그는 숨겨진 상징주의를 사용하지 않았다. 캉팽의 상징들은 현실에 대한 감각을 바꾸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 가정 장면은 종교적 도상학을 보여주는 장면보다 복잡하지 않지만, 관람자가 충분히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89] 판 데르베이던의 상징주의는 캉팽보다 훨씬 더 미묘했지만 판 에이크만큼 밀도가 높지는 않다. 하비슨에 따르면 판 데르베이던은 자신의 상징들을 너무 주의 깊게, 그리고 너무 절묘하게 통합하여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비로운 결합, 더 나아가 그의 작품 자체를 합리적으로 분석, 설명 또는 재구성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90] 건축 세부 사항, 벽감, 색상 및 공간에 대한 그의 처리는 너무 불가사의하여 "우리 앞에 보이는 특정 물체나 인물들이 갑자기, 충격적으로, 종교적 진리를 담은 상징이 되어버렸다".[90]

익명, 《캉브레의 성모》, 1340년경. 캉브레 대성당, 프랑스. 이 작은 1340년경 이탈로-비잔틴 복제품은 성 루카의 원작으로 믿어졌기에 널리 복제되었다.[91][92]
헤이르트헨 토트 신트 얀스, 《슬픔의 사람》, 1485–1495년경. 카타리네콘벤트 박물관, 위트레흐트. "슬픔의 사람" 전통의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인 이 복잡한 패널은 "신체적 고통을 흔들림 없이, 그러나 감정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묘사되었다.[93]

그림과 기타 귀중한 물건들은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보조 수단으로 작용했다. 기도와 명상적 묵상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사후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 교회를 짓거나(또는 기존 교회를 확장하거나), 예술 작품이나 기타 봉헌물을 의뢰했다.[94] 방대한 양의 성모자상이 제작되었고, 원본 디자인은 널리 복제되고 수출되었다. 그림들 중 다수는 12세기와 13세기의 비잔틴 미술 원형을 기반으로 했으며, 그중 《캉브레의 성모》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95] 이런 방식으로 이전 세기의 전통들이 흡수되고 독보적으로 풍부하고 복잡한 도상학적 전통을 형성했다.[94]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13세기부터 점차 커져갔으며, 주로 원죄 없는 잉태성모 승천승천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성유물을 소유함으로써 지상을 신성한 것과 더 가깝게 만들 수 있다고 숭배했던 문화에서, 성모는 신체적 성유물을 남기지 않았기에 천국과 인류 사이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96] 15세기 초에 이르러, 성모는 신의 가장 접근하기 쉬운 중재자로 일반적으로 여겨졌으며 기독교 교리 내에서 중요성이 커졌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보여준 신심의 정도에 비례하여 연옥에서 고통받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믿었다.[97] 성모 숭배는 15세기 초에 정점에 달했는데, 이 시기에는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15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에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한 작품들이 슬픔의 사람의 도상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였다.[94]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봉헌자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러한 의뢰는 보통 삼면화의 일부로, 혹은 나중에는 더 저렴한 이면화로 제작되었다. 판 데르베이던은 기존의 북유럽식 반신 성모 초상화 전통을 대중화시켰다. 이것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인기 있었던 "기적을 행하는" 비잔틴 이콘을 반영했다. 이 형식은 북유럽 전역에서 매우 인기를 끌었으며, 그의 혁신은 성모 이면화의 출현에 중요한 기여 요인이다.[98]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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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예술가들이 주로 패널화로 유명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채식필사본, 조각, 태피스트리, 조각된 레타블, 스테인드글라스, 황동 제품, 조각된 무덤 등 형식이 매우 다양하다.[99] 미술사학자 수지 내시에 따르면 16세기 초 이 지역은 이동식 시각 문화를 거의 모든 면에서 선도했으며, "다른 누구도 경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전문 지식과 생산 기법을 갖추고 있었다".[99] 부르고뉴 궁정은 태피스트리와 금속공예를 선호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문서에 잘 기록되어 있는 반면, 패널화에 대한 수요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73] — 이동이 잦았던 궁정에 적합하지 않았던 이유로 보인다. 벽걸이와 책은 정치적 선전이자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으며, 초상화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마리안 에인스워스에 따르면, 의뢰된 작품들은 판 데르베이던의 용담공 샤를의 파일:초상화와 같이 계승 계보를 강조하거나, 판 에이크의 유실된 《이사벨 드 포르투갈의 초상》의 경우처럼 약혼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100]

종교화는 주로 왕실과 공작 궁정, 교회, 병원, 수녀원, 그리고 부유한 성직자 및 개인 후원자들이 의뢰하였다. 부유한 도시와 마을들은 공공 건물을 위해 작품을 의뢰했다.[73] 예술가들은 종종 다양한 매체에 작품을 제작했다. 판 에이크와 페트뤼스 크리스투스 모두 필사본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판 데르베이던은 태피스트리를 디자인했으나 거의 남아 있지 않다.[101][102]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면화 형식의 발전, 봉헌자 초상화 관습, 새로운 성모 초상화 관습 등 많은 혁신을 이루었으며, 1430년대 판 에이크의 《롤랭 재상의 성모》와 판 데르베이던의 《성모를 그리는 성 루카》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풍경화를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103]

채식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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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르 드 루시용의 거장, 1450년경, 부르고뉴식 결혼식(필리프 3세와 이사벨 드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빈

15세기 중반 이전, 채식필사본은 패널화보다 더 높은 수준의 예술로 간주되었으며,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품질은 소유자의 부, 지위, 취향을 잘 반영했다.[104] 필사본은 외교적 선물이나 왕조 결혼식 또는 기타 주요 궁정 행사를 기념하는 선물 또는 헌정물로 이상적이었다.[105] 12세기부터 전문 수도원 기반 공방(프랑스어 libraires)에서 시도서(법정 시도서에 기도할 기도문 모음), 시편집, 기도서, 역사서, 로맨스 소설 및 시집을 제작했다. 15세기 초에는 파리의 고딕 필사본이 북유럽 시장을 지배했다. 그 인기는 더 저렴하고 그림이 없는 시도서에 삽입할 수 있는 낱장 세밀화 덕분에 높아진 면이 있다. 이것들은 때때로 후원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많은 그림을 포함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시리즈 방식으로 제공되었는데, 이는 분명히 유행의 한 품목이자 사치의 한 형태였다. 낱장 세밀화는 삽화 외에도 다른 용도가 있었다. 이러한 삽화들은 개인적인 명상과 기도를 돕기 위해 벽에 부착될 수 있었다. 현재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크리스투스의 1450–1460년경 패널화 《젊은 남자의 초상》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의 머리로 장식된 베라 이콘에 설명과 함께 낱장 세밀화가 붙어 있다.[106] 15세기 중반부터 프랑스 예술가들은 헨트, 브뤼허, 위트레흐트의 거장들에게 밀려났다. 한때 최고 수준이었던 영국 생산은 크게 감소했고 알프스 북쪽으로 올라온 이탈리아 필사본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거장들은 쉽게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1463년에도 네덜란드 예술가들에게 제재를 가하도록 길드에 촉구하고 있었다.[107]

랭부르 형제의 화려한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는 아마도 네덜란드 삽화의 시작이자 정점을 나타내는 작품일 것이다. 나중에 성 루치아 전설의 거장은 환영주의와 사실주의의 혼합을 탐구했다.[23] 랭부르 형제의 경력은 판 에이크의 경력이 시작될 때 끝났다. 1416년까지 두 형제(30세에 도달한 사람은 없었다)와 후원자였던 장 드 베리 공작이 모두 사망했는데, 흑사병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23] 판 에이크는 한트 G로 알려진 익명의 예술가로서 《토리노-밀라노 시도서》중 높게 평가되는 세밀화 여러 점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108] 이 시기의 많은 삽화는 헤라르트 다비트의 작품과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지만, 그것들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추종자들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109]

바르텔레미 다이크의 《사랑에 빠진 마음의 책》에서 기사도적이고 로맨틱한 낱장 세밀화, 1458–1460년경

네덜란드 삽화가들의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다양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14세기 수도원 개혁 이후 수 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발전한 전통과 전문성 때문이었는데, 그 기반은 12세기부터 이미 상당수의 전례서를 제작했던 수도원, 대수도원, 교회의 수가 많이지고 위상이 높아진 데 있었다.[107] 강력한 정치적 측면도 있었다. 특히 장 드 베리 공작과 선량공 필리프 3세와 같이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이 많았으며, 선량공의 경우 사망 전 1,000권 이상의 채식필사본을 수집했다.[110] 토마스 크렌에 따르면, 선량공의 "도서관은 기독교 군주로서의 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자, 그의 정치와 권위, 학식과 경건함을 포함한 국가적 위상을 구현한 것이었다".[111] 그의 후원 덕분에 저지대의 필사본 산업은 성장하여 여러 세대 동안 유럽을 지배했다. 부르고뉴 도서 수집 전통은 필리프의 아들과 그의 아내 용담공 샤를과 요크 공녀 마거릿, 그의 손녀 마리 드 부르고뉴 여공작과 그녀의 남편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 그리고 플랑드르 필사본의 열렬한 수집가였던 그의 사위 에드워드 4세에게로 이어졌다. 필리프와 에드워드 4세가 남긴 도서관은 벨기에 왕립도서관대영도서관 왕실 필사본이 탄생한 핵이 되었다.[112]

네덜란드 삽화가들은 중요한 수출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 시장을 위해 특별히 많은 작품을 디자인했다. 용담공 샤를이 1477년 사망한 후 국내 후원이 감소함에 따라 수출 시장은 더욱 중요해졌다. 삽화가들은 에드워드 4세, 제임스 4세, 엘레오노르 드 비제우를 포함한 외국 엘리트들을 위해 더 호화롭고 화려하게 장식된 맞춤형 작품을 제작하였다.[113]

랭부르 형제, 《그리스도의 죽음》.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중 153r 폴리오

패널화와 삽화 사이에는 상당한 중복이 있었다. 판 에이크, 판 데르베이던, 크리스투스 등 많은 패널화 화가들이 필사본 세밀화를 디자인했다. 또한 세밀화가들은 패널화에서 모티프와 아이디어를 차용했다. 예를 들어 캉팽의 작품은 "라울 다이의 시도서"와 같은 방식으로 자주 사용되었다.[114] 여러 거장들이 하나의 의뢰를 공동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테두리 장식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은 젊은 화가나 전문가들이 맡곤 했는데, 여성들이 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107] 거장들은 거의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속이 어려우며, 일부 더 중요한 삽화가들의 신원은 확인이 불가능하다.[111][115]

네덜란드 예술가들은 주변 국가의 채식필사본과 자신의 작품을 차별화하기 위해 정교한 페이지 테두리를 디자인하고 크기와 공간을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등 점점 더 독창적인 방법을 찾았다. 그들은 필사본의 세 가지 필수 구성 요소인 테두리, 세밀화,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했다.[116] 한 예로 빈의 마리 드 부르고뉴 거장이 그린 《나소 시도서》(1467–80년경)의 경우, 큰 테두리에 착시 효과를 주는 꽃과 곤충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마치 세밀화의 금박 표면에 흩어진 것처럼 넓게 칠해져 효과를 얻었다. 이 기법은 혁신적인 페이지 레이아웃으로 알려진 플랑드르의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 거장"(아마도 헤라르트 호렌바우트) 등으로 계승되었다.[117] 그는 다양한 환영주의 요소를 사용하여 세밀화와 그 테두리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장면 서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종종 두 가지를 모두 사용했다.[23]

19세기 초, 윌리엄 영 오틀리와 같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15~16세기 네덜란드 필사본의 세밀화나 앨범용 부품을 잘라내어 수집하는 것이 유행이 되어 많은 필사본이 파괴되었다. 원본은 매우 높은 인기를 누렸는데, 이는 19 세기 후반 네덜란드 미술의 재발견에 도움이 되었다.[118]

태피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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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의 신비로운 포획》, 《유니콘 사냥》 중 일부, 1495–1505년. 클로이스터스, 뉴욕

15세기 중반, 태피스트리는 유럽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예술 제품 중 하나였다. 15세기 초부터 네덜란드와 북부 프랑스 전역, 특히 아라스, 브뤼허, 투르네 도시들에서 상업적 생산이 확산되었다. 이 장인들의 기술은 매우 뛰어나서 1517년 교황 레오 10세라파엘로의 《라파엘로 카툰》을 브뤼셀로 보내 태피스트리를 의뢰할 정도였다.[119] 그러한 직물 벽걸이들은 외교적 선물로서, 특히 대형 형식일 때 정치적으로 중요했다. 필리프 3세는 1435년 아라스 회의 참석자들에게 태피스트리를 여러 점을 선물했는데,[99] 회의장에는 "리에주 사람들의 전투와 전복" 장면을 보여주는 태피스트리로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덮여 있었다.[120] 용담공 샤를과 요크 공녀 마거릿의 결혼식장은 "청색과 백색의 양모 커튼으로 위가 덮였고, 옆면은 야손과 황금양털의 역사가 짜여진 화려한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었다". 당시 귀족의 방은 일반적으로 태피스트리로 천장부터 바닥까지 걸려 있었으며, 어떤 방들은 태피스트리 세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필립 2세(용감왕)의 방은 장미 이야기의 장면들이 담긴 흰색 태피스트리 세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21] 부르고뉴 시기의 약 2세기 동안, 거장 직공들은 "세상에서 본 적 없는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수 많은 태피스트리 시리즈"를 생산했다.[122]

직물의 실용성은 이동성에서 기인했다. 태피스트리는 종교적 또는 시민적 의식에 적합한, 쉽게 조립되는 내부 장식으로 사용되었다.[123] 그 가치는 당대 재고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록의 상단에 위치하며, 재료나 색상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 그중에서도 흰색과 금색은 최고 품질로 간주되었다. 샤를 5세는 57점의 태피스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16점이 흰색이었다. 장 드 베리 공작은 19점을 소유했고, 마리 드 부르고뉴, 발루아의 이사벨, 이자보 드 바비에르, 필리프 3세 모두 상당한 컬렉션을 보유했다.[124]

태피스트리 생산은 디자인에서 시작되었다.[125] 디자인, 즉 카툰은 일반적으로 종이나 양피지에 숙련된 화가들이 제작하였는데, 종종 멀리 떨어진 직공들에게 보내졌다. 카툰은 재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장인들은 종종 수십 년 된 원본 카툰을 바탕으로 작업했다. 종이와 양피지 모두 매우 부패하기 쉬우므로 원본 카툰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126] 디자인이 확정되면 그 생산은 많은 직공들에게 외탁되었다. 주요 플랑드르 도시들과 대부분의 마을, 많은 마을에서 태피스트리 제작용 직기가 가동되었다.[125]

익명의 플랑드르 직공, 《그리스도 수난 장면의 태피스트리》, 1470년–1490년경. 레이크스 박물관, 암스테르담

직기는 길드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주 노동력에 의존하는 상업 활동은 기업가(일반적으로 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기업가는 후원자를 찾고 의뢰를 받으며, 카툰 재고를 유지하고 양모, 실크, 때로는 금과 은과 같은 원자재(종종 수입해야 함)를 제공했다.[127] 기업가들은 후원자와 직접 접촉했으며 종종 카툰과 최종 단계 모두에서 디자인을 세심하게 검토했다. 이 검토는 종종 어려운 일이었고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1400년 이자보 드 바비에르는 디자인을 승인했음에도 콜라르 드 랑의 완성된 작품을 거부하여 드 랑과 아마도 그의 의뢰인에게 상당한 당혹감을 주었다.[126]

태피스트리는 주로 화가들에 의해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그 형식적으로는 패널화의 관습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는 특히 천국과 지옥의 파노라마를 제작한 16세기 후반 화가들이 해당된다. 하비슨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의 복잡하고 밀집되어 겹쳐진 세부 사항이 "정밀한 상징주의에서 ... 중세 태피스트리를 닮았다"고 설명한다.[128]

삼면화와 제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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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삼면화[E]다면화는 14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16세기 초에 수요가 정점에 달했다. 이 형식은 15세기에 가장 널리 생산된 북유럽 패널화 형식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담고 있는데, 두 가지 큰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소규모 이동식 개인 기도용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전례를 위한 대형 제단화이다.[129] 초기 북유럽 작품들은 대부분 조각과 회화를 결합한 복합 작품으로, 일반적으로 조각된 중앙 본체 위로 접을 수 있는 두 개의 채색된 날개로 구성되었다.[F][29]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브라크 삼면화》, 1452년경. 오크 패널에 유화.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삼면화는 떠다니는 "말" 비문과 패널을 하나로 연결되는 풍경으로 주목받는다.[130]

다면화는 더 숙련된 거장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다면화는 다양하게 변형이 가능하며,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는 내부 및 외부 패널의 조합이 훨씬 많다. 경첩이 달린 작품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구조는 실용적인 목적이 있었다. 평일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외부 패널만 보이다가, 종교 휴일에는 화려한 내부 패널이 보이도록 설정했다.[131] 1432년 완성된 《헨트 제단화》는 평일, 일요일, 교회 휴일에 따라 구성이 달라졌다.[G][131]

네덜란드 1세대 거장들은 13세기와 14세기 이탈리아 제단화의 관습을 많이 차용했다.[132] 1400년 이전 이탈리아 삼면화의 관습은 꽤 엄격했다. 중앙 패널에는 성가정 구성원들이 배치되었다. 특히 시에나나 피렌체 전통의 초기 작품들은 중앙 패널에 금박 배경을 배경으로 성모가 앉아 있는 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날개는 보통 다양한 천사, 봉헌자, 성인들이 그려지지만, 중앙 패널의 인물들과 직접적인 눈 맞춤은 결코 없으며 서사적 연결도 거의 없다.[133]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러한 관습 중 많은 것을 차용했지만, 거의 처음부터 그러한 관행을 변형했다. 판 데르베이던은 특히 혁신적이었는데, 1442–1445년의 《미라플로레스 제단화》와 1452년경의 《브라크 삼면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들에서 성가정 구성원들은 중앙 패널뿐만 아니라 날개에도 등장하며, 특히 《브라크 삼면화》는 세 내부 패널의 풍경이 연속적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134] 1490년대부터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적어도 16개의 삼면화를 그렸는데,[H]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기존 관습과 전혀 달랐다. 보스의 작품은 세속주의적으로 표현되었으며 풍경을 강조했다. 보스는 또한 내부 패널의 장면들을 하나로 통합했다.[129]

히에로니무스 보스, 《은자 성인 삼면화》, 1493년경. 두칼레 궁전, 베네치아

삼면화는 1380년대부터 독일 후원자들에 의해 의뢰되었고, 1400년경부터 대규모 수출이 시작되었다.[29] 이 매우 초기 작품들 중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135] 유럽 전역의 교회에 여전히 현존하는 많은 사례로부터 네덜란드 제단화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틸-홀거 보르헤르트는 이러한 제단화가 "15세기 전반기에 부르고뉴 네덜란드 공방만이 달성할 수 있었던 명성"을 부여했다고 설명한다.[136] 1390년대에 네덜란드 제단화는 대부분 브뤼셀과 브뤼허에서 제작되었다. 브뤼셀 제단화의 인기는 1530년경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안트베르펜 공방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패널의 여러 부분을 전문 공방 구성원들에게 할당하여 작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보르헤르트는 이를 초기 형태의 분업화라고 설명한다.[136]

네덜란드 다면화 회화는 16세기 중반 안트베르펜 매너리즘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인기가 떨어지고 구식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종교 개혁으로 인한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나면서[137] 저지대 국가의 많은 작품이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독일 교회와 수도원에서 발견된다.[29] 세속적인 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삼면화는 종종 분해되어 개별 작품으로 판매되었다. 특히 패널에 세속적인 초상화로 통할 수 있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을 경우 그런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패널을 인물만 남도록 자르거나 배경을 덧칠하여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유명한 컬렉션에 걸 수 있을 만큼 풍속화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137]

이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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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화는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초까지 북유럽에서 널리 인기를 끌었다. 그것들은 경첩으로 연결되거나 드물게는 고정된 액자로 연결된, 같은 크기의 패널 두 개로 구성되었으며;[138] 보통 같은 주제였다. 경첩이 달린 패널은 책처럼 열고 닫을 수 있어 내부와 외부를 모두 볼 수 있었으며, 날개를 닫으면 내부 이미지를 보호할 수 있었다.[139] 시도서의 관습에서 유래한 이면화는 일반적으로 더 저렴하고 더 이동하기 쉬운 제단화 역할을 했다.[140] 이면화는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나란히 걸린 두 그림을 의미하는 펜던트와 구별된다.[141] 이면화는 보통 거의 미니어처 규모였으며 일부는 금이나 상아로 만든 작은 조각품인 중세 "재무관 예술"을 모방했다. 판 데르베이던의 《옥좌에 앉은 성모자》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트레이서리는 당시의 상아 조각을 반영한다.[142] 이 형식은 발루아부르고뉴가 구성원들의 의뢰를 받은 판 에이크와 판 데르베이던이 처음 만들었으며,[139] 이후 휘호 판 데르 후스, 한스 멤링, 나중에 얀 반 스코렐에 의해 정교화되었다.[141]

디르크 바오츠, 《슬픔의 성모》/《에케 호모》, 1450년 이후, 액자와 경첩이 온전한 희귀한 현존 이면화

네덜란드 이면화는 좁은 범위의 종교적 장면만을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성모자상을 묘사한 이면화가 많은데,[143] 이는 당시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성모의 인기를 반영한다.[144] 내부 패널은 주로 봉헌자 초상화(종종 남편과 아내)[141]와 함께 성인들이나 성모자상으로 구성되었다.[139] 봉헌자는 거의 항상 전신이나 반신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 손을 맞잡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139] 성모자는 항상 오른쪽에 배치되는데, 이는 오른쪽을 신과 함께 하는 "존경받는 자리"로서 중시하는 기독교적 관념을 반영한다.[145]

이면화의 발달과 상업적 가치는 14세기의 종교적 태도가 변화한 것과 연결된다. 디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으로 예시되는 더 명상적이고 고독한 신앙심의 가치가 인기를 끌면서, 사적인 묵상과 기도가 권장되었는데, 소규모 이면화가 이 목적에 부합했다. 특히 저지대 국가와 북부 독일 전역의 신흥 중산층과 더 부유한 수도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144] 에인스워스는 크기와 관계없이 대형 제단화든 작은 이면화든 네덜란드 회화는 "소규모와 세심한 세부 사항의 문제"라고 말한다. 작은 크기는 관람자를 개인적 헌신을 위한 명상 상태와 아마도 "기적적인 환영의 경험"으로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다.[146]

20세기 후반의 기술적 조사에 따르면, 이면화의 두 패널 사이에 기법과 화풍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기술적 불일치는 조수들이 평범한 부분들을 완성하는 공방 시스템의 결과일 수 있다. 미술사학자 존 핸드에 따르면, 오른쪽의 신성한 패널은 보통 시장에서 판매되는 일반 디자인을 기반으로 했고, 왼쪽의 봉헌자 패널은 후원자를 찾은 후에 추가되었기 때문에 패널 간 화풍이 달라 진 것이라고 주장한다.[147]

온전한 이면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제단화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나중에 분리되어 개별 "풍속화"로 판매되었다.[137] 공방 시스템에서는 일부 패널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종교 작품을 새로 의뢰된 봉헌자 패널과 짝을 맞췄을 수 있다. 이러한 이면화는 나중에 분해되어 두 개의 판매 가능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종교 개혁 시기에는 종교 장면이 제거되는 경우가 많았다.[148]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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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호 판 데르 후스, 《남자의 초상》, 1480년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세속 초상화는 1430년 이전 유럽 예술에서 드물었다. 이 형식은 독립적인 장르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약혼 초상화나 왕실 의뢰와 같은 최상급 시장에서만 드물게 발견되었다.[149] 그러한 작업은 수익성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낮은 예술 형식으로 간주되었으며 16세기 이전의 현존하는 많은 예는 귀속자가 불분명하다.[100] 성인과 성경 인물을 보여주는 수많은 단일 봉헌 패널이 제작되고 있었지만, 알려진 역사적 인물에 대한 묘사는 1430년대 초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판 에이크가 선구자였다.[150] 그의 1432년 《레알 수베니르》는 현존하는 가장 초기 사례 중 하나이며, 사실주의와 피사체 외모의 작은 세부 사항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에서 새로운 화풍을 상징한다.[151] 그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도상학으로 가득 차 있으며,[152] 롤랭의 권력, 영향력, 경건함의 증거로 의뢰된 《롤랭 재상의 성모》 또한 그러하다.[153]

판 데르베이던은 북유럽 초상화의 관습을 개발했으며 이후 화가 세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판 에이크의 세밀한 묘사에 단순히 따르기보다 판 데르베이던은 더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창조했다. 그는 초상화가로서 매우 각광받았지만, 그의 초상화들에는 눈에 띄는 유사성이 있는데, 아마도 그가 계급과 경건함의 공통된 이상을 충족하는 동일한 밑그림을 사용하고 재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들은 특정 모델의 얼굴 특징과 표정을 보여주기 위해 수정되었다.[154]

페트뤼스 크리스투스, 《젊은 여인의 초상》, 1460년 이후, 회화관, 베를린. 모델을 3차원 공간에 배치한 최초의 초상화 중 하나. 많은 출처에서 그녀의 수수께끼 같고 복잡한 표정과 심통 사납고 절제된 시선을 언급한다.[155]

페트뤼스 크리스투스는 평면적이고 특징 없는 배경 대신 모델을 자연주의적 환경에 배치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조각적인 인물에 강조를 두어 매우 얕은 회화 공간을 활용한 판 데르베이던에 대한 부분적인 반동이었다.[156] 1462년의 《남자의 초상》에서 디르크 바오츠는 풍경을 내다보는 창문이 있는 방에 남자를 배치하여 더 나아갔으며,[157] 16세기 북유럽에서는 전신 초상화가 인기를 끌었다. 후자 형식은 이전 북유럽 미술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수 세기 전부터 주로 프레스코와 채식필사본에 전통이 있었다.[158] 전신 초상화는 사회의 최상층에 대한 묘사를 위해 예약되었으며 권력의 왕실 과시와 연관되었다.[159] 두 번째 세대 북유럽 화가 중 한스 멤링이 주도적인 초상화가가 되어 이탈리아 멀리서까지 의뢰를 받았다. 그는 나중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모나리자》를 풍경 전망 앞에 배치하는 데 영감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160] 판 에이크와 판 데르베이던은 비슷하게 프랑스 예술가 장 푸케와 독일인 한스 플라이덴부르프,[161] 마르틴 숀가우어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162]

네덜란드 예술가들은 콰트로첸토 동안 인기를 끌었던 측면도에서 덜 형식적이지만 더 매력적인 3/4 측면도로 나아갔다. 이 각도에서 모델의 몸이 관람자를 향해 회전하면서 얼굴의 한쪽 면 이상을 볼 수 있다. 이 포즈는 머리의 모양과 특징을 더 잘 볼 수 있게 하며 모델이 관람자를 향해 밖을 볼 수 있게 한다.[163] 모델의 시선이 관람자와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다.[164] 판 에이크의 1433년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은 관람자를 바라보는 예술가 자신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이다.[163] 비록 주제와 관람자 사이에 직접적인 눈 맞춤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표정은 보통 떨어져 있고 냉담하며 소통이 없는데, 아마도 주제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기 위함일 것이다. 예외가 있는데, 대개 신부 초상화나 약혼의 경우, 작품의 목적이 모델을 가능한 한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일 때이다. 이러한 경우 모델은 종종 의도된 상대에게 호소하도록 설계된 매력적이고 빛나는 표정으로 웃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165]

1508년경 알브레히트 뒤러는 초상화의 기능을 "사후에 한 사람의 외모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166][I] 초상화는 지위의 상징이었으며 개인의 성공이 기록되어 생애 너머까지 지속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초상화는 왕족, 고위 귀족 또는 고위 성직자를 보여주는 경향이 있었다.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의 새로운 부는 상류 중산층 구성원들이 이제 초상화 의뢰를 감당할 수 있게 되면서 더 다양한 고객층을 가져왔다.[167] 그 결과, 로마 제국 말기 이후 어느 때보다도 이 지역 사람들의 외모와 복장에 대해 더 많은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초상화는 일반적으로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으며, 전형적으로 최종 패널을 구체화하기 위해 일련의 준비 도안이 사용되었다. 이 도안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얀 판 에이크의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의 초상》을 위한 연구가 주목할 만한 예외이다.[159]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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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판 에이크의 《십자가 처형과 최후의 심판 이면화》 세부 사항. 예루살렘 전망을 앞둔 그리스도와 도둑, 1430년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이 이면화의 십자가 처형 패널은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의 전망을 배경으로 푸른 하늘 안에 액자화되어 있다.

풍경은 1460년대 중반 이전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부차적인 관심사였다. 지리적 배경은 드물었고 나타날 때도 보통 열린 창문이나 아케이드를 통해 보는 전망으로 구성되었다. 그것들은 실제 위치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J] 배경은 대체로 상상된 것이었으며 패널의 주제적 추진력에 맞게 설계되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봉헌자 초상화였기 때문에, 종종 풍경은 길들여지고 통제되었으며 이상화된 실내 공간을 위한 조화로운 환경을 제공하는 역할만을 했다. 이 점에서 북유럽 예술가들은 이미 지리적으로 식별 가능하고 면밀히 묘사된 풍경 속에 인물을 배치하고 있던 이탈리아 동료들보다 뒤처져 있었다.[168] 일부 북유럽 풍경들은 매우 상세하고 그 자체로 주목할 만했는데, 1430년경의 감상적인 판 에이크의 《십자가 처형과 최후의 심판 이면화》와 널리 복제된 1435–1440년의 판 데르베이던의 《성 루카가 그리는 성모》가 포함된다.[103]

판 에이크는 거의 확실하게 랭부르 형제가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를 위해 그린 《월간 노동》 풍경의 영향을 받았다. 그 영향력은 《토리노-밀라노 시도서》에 그려진 삽화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서는 작은 bas de page 장면에 풍부한 풍경을 보여준다.[169] 페흐트에 따르면, 이것들은 초기 네덜란드 풍경화의 예로 정의되어야 한다.[170] 채식필사본의 풍경 전통은 적어도 다음 세기 동안 계속될 것이다. 시몽 베닝은 1520년경 《그리마니 브레비아리》를 위해 그린 여러 잎에서 볼 수 있듯이 "풍경 장르에서 새로운 영역을 탐험했다".[171]

15세기 말부터 많은 화가들이 작품에서 풍경을 강조했는데, 이는 종교 도상학에서 세속 주제로 선호가 전환된 데 부분적으로 기인한 발전이다.[20] 2세대 네덜란드 화가들은 14세기 중반의 자연 재현 격언을 적용했다. 이는 이 지역 중산층의 부상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제 남쪽을 여행하며 평평한 고향과는 눈에 띄게 다른 시골을 보았다. 동시에 세기 후반에는 전문화가 등장하여 많은 거장들이 15세기 중반의 콘라트 비츠와 나중의 요아힘 파티니르와 같이 풍경을 상세히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172] 이 형식의 혁신 대부분은 부르고뉴 영토 중 네덜란드 지역, 특히 하를럼, 레이던, 스헤르토헨보스에 거주하는 예술가들로부터 나왔다. 이 지역의 중요한 예술가들은 그들 앞의 풍경을 노예처럼 복제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작업하는 패널의 강조와 의미를 강화하기 위해 미묘한 방식으로 풍경을 조정하고 수정했다.[168]

파티니르는 현재 세계 풍경화 장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했는데, 이는 보통 산과 저지대, 물, 건물 등으로 이루어진 상상된 파노라마 풍경 속의 성경적 또는 역사적 인물을 특징으로 한다. 이 유형의 그림은 높은 시점과 주변 환경에 압도된 인물들로 특징지어진다.[173] 이 형식은 헤라르트 다비트와 대 피터르 브뤼헐 등을 포함한 이들이 채택했으며 독일, 특히 다뉴브 화파 화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파티니르의 작품들은 비교적 작고 수평 형식을 사용한다. 이것이 예술에서 풍경화의 표준이 되어 오늘날 일반적인 문맥에서 "풍경" 형식이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1520년 이전 패널화의 압도적 다수가 수직 형식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상당한 참신함이었다.[174] 세계 풍경화는 15세기 중반부터 개발된 많은 요소를 유지하지만, 현대 영화적 용어로 하면 미디엄 샷이 아닌 롱 샷으로 구성된다. 인간의 존재는 단순한 스태프(인물) 역할을 하기보다 중심적인 위치를 유지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세계 풍경화 양식의 요소를 조정했으며, 그 영향력은 그의 단일 패널 그림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175]

이 유형의 가장 인기 있는 주제로는 이집트로의 피신과 성 히에로니무스, 대 안토니우스와 같은 은자들의 고난이 포함된다. 양식을 후기 대항해시대와 연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 무역과 지도학의 붐을 일으키는 중심지로서의 안트베르펜의 역할, 시골에 대한 부유한 도시 거주자의 시각과 함께,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들을 삶의 순례에 대한 종교적 은유로 탐구해 왔다.[176]

이탈리아 르네상스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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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호 판 데르 후스, 《포르티나리 제단화》 세부 사항, 1475년경.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북유럽 미술의 진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와 거의 동시에 발전했다. 그러나 지중해의 철학적, 예술적 전통은 북유럽 유산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라틴 문화의 많은 요소들은 북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폄하되었다.[177] 예를 들어 예술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역할은 이탈리아보다 저지대 국가에서 덜 두드러졌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의 많은 예술 작품의 주제, 구성, 형식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종교적 경향이 초기 북유럽 미술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144] 북유럽 화가들의 교리는 또한 최근 고딕 전통의 요소 위에 구축되었으며,[177] 이탈리아에 널리 퍼진 고전 전통은 덜했다.[178]

봉헌화(특히 제단화)가 초기 네덜란드 미술에서 지배적이었던 반면,[177] 초상화가 성인과 기타 종교적 인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지배적인 생각에서 예술가들이 자유로워지면서 북유럽과 남유럽 모두에서 세속 초상화가 점점 더 흔해졌다. 이탈리아에서 이 발전은 인본주의의 이상과 연결되었다.[179]

네덜란드 미술에 대한 이탈리아의 영향은 15세기 말 화가들 중 일부가 남쪽으로 여행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나타났다. 이것은 또한 나중의 많은 네덜란드 예술가들이 미술사학자 롤프 토만(Rolf Toman)의 말대로 "그림 같은 박공, 부풀어 오른 배 모양의 기둥, 재미있는 카르투슈, '비틀린' 인물, 놀랍도록 비현실적인 색채 - 실제로는 매너리즘의 시각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들과 연관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177] 부유한 북유럽 상인들은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의 그림을 살 여유가 있었다. 그 결과, 화가들은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작품에 서명을 더 자주 했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예술 활동 때문에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32]

한스 멤링, 《음악을 연주하는 두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자》, 1480년경.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북유럽 거장들은 이탈리아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프리들랜더에 따르면 그들은 15세기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파노프스키도 동의하는 견해이다.[180] 그러나 이탈리아 화가들은 1460년대에 이르러 구성에 더 집중하며 조화롭게 결합된 부분들의 조화, 즉 예를 들어 안드레아 만테냐의 《그리스도의 매장》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불리는 ... 우아한 조화와 은혜"를 강조하면서 네덜란드 영향력을 넘어서기 시작했다.[181] 16세기 초, 북유럽 거장들의 명성은 남쪽으로 작품이 거래될 정도로 확립되었으나, 남쪽으로 보내진 많은 그림이나 물체들은 덜 중요한 화가들의 것이었고 품질이 낮았다.[182] 북유럽에서 도입되어 이탈리아에서 채택된 혁신에는 인물을 가정 실내에 배치하는 것과 문이나 창문과 같은 개구부를 통해 다중 시점에서 실내를 보는 것이 포함된다.[K][183] 휘호 판 데르 후스의 《포르티나리 제단화》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으며, 피렌체 화가들에게 북유럽의 경향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조반니 벨리니 같은 예술가들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북유럽 화가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184]

멤링은 자신의 《파가노티 삼면화|음악을 연주하는 두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자》에서 성공적으로 두 화풍을 결합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네덜란드 미술은 조잡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것이 오직 "수도사들과 수사들"에게만 호소력이 있다고 주장했다.[185] 이때부터 북유럽 미술은 이탈리아에서 거의 완전히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브뤼허가 탁월한 유럽 무역 도시로서의 명성과 위치를 잃었던 17세기(강물은 토사로 막혔고 항구는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유럽 미술을 지배했다.[186]

파괴와 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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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 파괴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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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 8월 20일 안트베르펜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의 파괴를 담은 판화, 성상 파괴 운동의 "대표적 사건", 프랑스 호겐베르크 제작[187]

종교적 이미지는 1520년대 종교 개혁이 시작되면서 우상 숭배로 간주되거나 잠재적인 우상 숭배로 면밀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일부 이미지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기준을 충족하는 초기 네덜란드 화파는 거의 없었다.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은 특히 교회 내의 공공 종교 이미지에 전적으로 반대했으며, 칼뱅주의는 곧 네덜란드 개신교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1520년부터 북유럽 전역에서 개혁주의 성상 파괴 운동이 발생했다.[188] 이것들은 튜더 왕조영국 공화국 하의 영국에서처럼 공식적이고 평화적일 수도 있고, 1566년 네덜란드의 성상 파괴 운동에서처럼 비공식적이고 종종 폭력적일 수도 있었다. 1566년 8월 19일, 이 폭동 파괴의 물결은 헨트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마르쿠스 판 바르뉴베이크가 이 사건들을 기록했다. 그는 헨트 제단화가 "폭도들로부터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조각조각으로 분해되어 패널별로 탑 안으로 올려졌다"고 기록했다.[189] 안트베르펜은 1566년 교회에서 매우 철저한 파괴를 겪었고,[190] 1576년 스페인군의 안트베르펜 약탈로 추가적인 손실이 있었으며, 칼뱅주의자들이 시의회를 통제했을 때 도시 및 길드 건물까지 포함하는 1581년의 공식 성상 파괴 운동의 추가 기간이 있었다.[191]

그림, 조각, 제단화,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를 포함하여 수천 개의 종교 물체와 유물이 파괴되었고,[192] 주요 예술가들의 작품 생존율은 낮다. 심지어 얀 판 에이크조차 자신에게 귀속되는 작품은 약 24점뿐이다. 나중 예술가들과 함께 숫자는 늘어나지만 여전히 이상 현상이 있다. 페트뤼스 크리스투스는 주요 예술가로 간주되지만 판 에이크보다 더 적은 수의 작품이 귀속된다. 일반적으로 남부 유럽으로 수출된 후기 15세기 작품들의 생존율이 훨씬 높다.[193]

당시 많은 예술 작품이 성직자들에 의해 교회를 위해 의뢰되었으며,[135] 기존 건축 및 디자인 체계를 보완할 물리적 형식과 도상학적 내용에 대한 사양이 있었다. 그러한 교회 내부가 어떠했을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판 에이크의 《교회 안의 성모》와 판 데르베이던의 《성 후베르트의 발굴》에서 볼 수 있다. 내시에 따르면 판 데르베이던의 패널은 종교 개혁 이전 교회들의 모습과, 이미지들이 다른 그림이나 물체들과 공명하도록 배치된 방식에 대한 통찰력 있는 모습이다. 내시는 계속해서 "어떤 하나도 선택된 주제를 반복, 확대 또는 다양화하며 다른 이미지들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성상 파괴자들이 교회와 대성당을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개별 작품의 배치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유실되었으며, 그와 함께 당시 이 예술 작품들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도 잃었다.[192] 많은 다른 작품들이 화재나 전쟁으로 유실되었다. 발루아부르고뉴가의 저지대 국가 분할은 저지대를 1945년까지 유럽 분쟁의 격전지로 만들었다. 판 데르베이던의 《트라야누스와 헤르킨발트의 정의》 다면화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손실일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규모와 야망 면에서 헨트 제단화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1695년 브뤼셀 폭격 당시 프랑스 포병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태피스트리 복제품으로만 알려져 있다.[19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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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들에게 네덜란드 거장들의 이름을 확립하고 특정 작품을 귀속시키는 데에는 상당한 도전이 있었다. 역사적 기록이 매우 빈약하여 일부 주요 예술가들의 전기는 여전히 개략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귀속은 진행 중이며 종종 논쟁의 여지가 많은 토론이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귀속들조차 일반적으로 20세기 초 이후 시작된 수십 년간의 과학적 및 역사적 연구의 결과일 뿐이다.[195] 박람회 가판대에서 판매할 패널을 대량 생산하던 브뤼허의 아드리아언 이센브란트암브로시우스 벤손과 같은 일부 화가들에게는 500점 이상의 그림이 귀속되기도 했다.[196]

연구의 길은 많은 역사적 요인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많은 기록 보관소가 폭격 작전으로 파괴되었고, 기록이 존재하는 많은 작품 자체가 유실되거나 파괴되었다.[195] 이 지역의 기록 유지는 일관성이 없었으며, 종종 상업적 수요의 압력으로 인해 주요 예술가들의 작품 수출이 적절히 기록되지 않았다.[115] 작품에 서명하고 날짜를 기입하는 관습은 1420년대까지 드물었으며,[197] 수집가들의 재고 목록은 작품을 정교하게 묘사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제작한 예술가나 공방을 기록하는 데에는 거의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198] 현존하는 문서들은 재고 목록, 유언장, 지불 계좌, 고용 계약, 길드 기록 및 규정에서 오는 경향이 있다.[199]

얀 판 에이크의 삶이 동시대 화가들에 비해 잘 기록되어 있고 그가 시대의 혁신가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미술사학자들이 이 시기를 연구하기 시작한 후 수많은 작품이 그에게 귀속되었다. 오늘날 얀은 약 26–28점의 현존 작품을 그린 것으로 인정받는다. 이 감소된 숫자는 부분적으로 판 데르베이던, 크리스투스, 멤링과 같은 다른 15세기 중반 화가들의 식별을 따른 것이며,[200] 19세기 후반 비평가들에게 높게 평가받았던 후베르트는 이제 작품이 확정적으로 귀속되지 않는 부차적인 인물로 밀려났다. 많은 초기 네덜란드 거장들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는 보통 "..." 형식의 "편의상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관습은 영어에 확립된 서술어가 부족하지만, 독일어 용어에서 파생된 "notname"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L] 하나의 notname 아래 작품 그룹을 수집하는 것은 종종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나의 notname이 할당된 작품 세트는 공유된 지리, 훈련, 시장 수요 영향에 대한 반응으로 예술적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예술가에 의해 제작되었을 수 있다.[115] 가명으로 알려졌던 일부 주요 예술가들은 이제 캠팽의 경우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식별되었으며, 캠팽은 보통은 아니지만 종종 플레말레의 거장과 연관된다.[201]

많은 미확인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북유럽 예술가들은 일류였지만 역사적 인물과 연결되지 않아 학문적 방치를 겪었다. 내시가 표현했듯이 "확정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은 덜 연구된 상태로 남아 있다".[115]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작품들을 역사적 인물들과 연결하는 데 신중함을 부족하게 했고, 그러한 연결이 종종 근거 없는 정황 증거에 의존한다고 믿는다. 잘 알려진 많은 예술가의 신원은 단 하나의 서명, 문서화, 또는 귀속된 작품에 근거하여 확립되었으며, 거기서 기술적 증거와 지리적 근접성에 근거한 추가 귀속이 따랐다. 아마도 피터르 판 코닝슬로였을 가능성이 있는 소위 막달라 마리아 전설의 거장이 더 주목할 만한 예 중 하나이다.[202] 다른 이들로는 휘호 판 데르 후스, 캉팽, 슈테판 로흐너, 시몽 마르미옹이 있다.[203]

16세기 이전 주요 예술가들에 대한 예술 이론적 저술과 기록된 의견의 생존 부족은 귀속에 더 많은 어려움을 안겨준다. 1512년 뒤러는 이 시대의 예술가로서 처음으로 자신의 예술 이론을 글로 적었으며, 1565년 루카스 데 헤레, 1604년 카렐 판 만데르가 그 뒤를 이었다. 내시는 이탈리아 밖에서 예술에 대한 이론적 저술이 없는 이유에 대해 더 그럴듯한 설명은 북유럽 예술가들이 자신의 미적 가치를 설명할 언어가 아직 없었거나 회화에서 성취한 것을 글로 설명할 필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동시대 네덜란드 미술에 대한 현존하는 15세기 감상은 전적으로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이들로는 1449년 앙코나의 치리아코, 1456년 바르톨로메오 파치오, 1482년 조반니 산티가 있다.[204]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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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북유럽 매너리즘의 지배력은 초기 네덜란드 미술의 관습을 전복하는 데 기반을 두었고, 이는 차례로 대중의 호의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왕실 예술 컬렉션에서 여전히 인기를 유지했다.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펠리페 2세는 모두 네덜란드 화가들을 찾았으며 판 데르베이던과 보스에 대한 선호를 공유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15~16세기 북유럽 작품 없이는 평판이 좋은 컬렉션이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조점은 전체적인 북유럽 르네상스였으며, 당시 가장 수집 가능한 북유럽 예술가인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에게 더 무게가 실렸다. 1550년 조르조 바사리와 (1604년경) 카렐 판 만데르는 이 시대의 예술 작품들을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심장부에 배치했다. 두 작가 모두 혁신가로서 판 에이크에 강조를 두며 이 지역 화가들에 대한 후기 의견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05]

네덜란드 화가들은 18세기에는 거의 잊혔다. 루브르 박물관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미술관으로 전환되었을 때, 판 에이크의 작품으로 귀속되었던 헤라르트 다비트의 《가나의 혼인 잔치》가 그곳에 전시된 유일한 네덜란드 미술 작품이었다. 프랑스가 저지대 국가를 정복한 후 더 많은 대형 패널들이 컬렉션에 추가되었다.[M] 이 작품들은 독일의 문학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슐레겔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1803년 방문 후 네덜란드 미술에 대한 분석을 썼고 이를 1805년에 출판한 루트비히 티크에게 보냈다.[206]

헤라르트 다비트, 《가나의 혼인 잔치》, 1500년경.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작품은 1802년 판 에이크의 작품으로 귀속되어 처음 공개 전시되었다. 19세기 미술사학자들은 귀속의 어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1821년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하이델베르크의 술피츠 부아세레멜히오르 부아세레 형제의 컬렉션에서 초기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그림을 본 후 얀 판 에이크와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N] 쇼펜하우어는 공식 법적 문서를 제외하고는 거장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아카이브 연구를 수행했다. 그녀는 1822년 《Johann van Eyck und seine Nachfolger》를 출판했고, 같은 해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바겐이 초기 네덜란드 화파에 관한 첫 현대 학술서인 《Ueber Hubert van Eyck und Johann van Eyck》을 출판했다.[207] 바겐의 저술은 슐레겔과 쇼펜하우어의 초기 분석을 참고했다. 바겐은 나중에 베를린 회화관의 관장이 되어 헨트 패널 대부분, 여러 점의 판 데르베이던 삼면화, 바오츠 제단화를 포함한 네덜란드 미술 컬렉션을 축적했다. 개별 예술가의 구별되는 특징을 바탕으로 수집 과정에서 작품을 면밀히 분석하고 조사하면서 그는 초기 학술적 분류 시스템을 구축했다.[206]

1830년 벨기에 혁명으로 벨기에가 오늘날의 네덜란드에서 분리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국가가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려 하면서 19세기 멤링의 명성은 판 에이크와 동등하게 되었다. 멤링은 기술적으로 이전 거장의 적수로 여겨졌으며, 더 깊은 감정적 공명을 소유한 것으로 보였다.[208] 1848년 외팅엔-발러슈타인 가문의 루트비히 공작 컬렉션이 시장에 나왔을 때, 그의 사촌 앨버트 공은 켄징턴궁에서의 관람을 주선했다. 바겐이 쾰른 화파, 얀 판 에이크, 판 데르베이던의 작품 목록을 작성했음에도 다른 구매자가 없었기에 앨버트가 직접 구매했다.[209][210]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위신을 높이려던 시기에,[211] 찰스 록 이스트레이크는 1860년 에드몽 보쿠쟁의 "작지만 엄선된" 초기 네덜란드 그림 컬렉션에서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의 《독서하는 막달라 마리아》 패널을 구입했다.[212]

네덜란드 미술은 19세기 말 박물관 관람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20세기 초, 판 에이크와 멤링이 가장 높게 평가받았고 판 데르베이던과 크리스투스는 각주에 불과했다. 나중에 멤링에게 귀속되었던 많은 작품이 판 데르베이던이나 그의 공방의 것으로 밝혀졌다. 1902년 브뤼허는 35,000명의 관람객과 함께 최초의 네덜란드 미술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초기 네덜란드 미술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이었다.[213] 전시를 위해 그림을 확보하는 어려움이라는 주된 이유로 판 에이크와 판 데르베이던의 패널은 소수만 전시되었고 멤링의 작품은 거의 40점이나 전시되었다. 그럼에도 판 에이크와 판 데르베이던은 어느 정도 네덜란드 예술가의 일류로 간주되었다.[214]

브뤼허 전시회는 이 시기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고 20세기에 번성할 학문을 시작했다. 요한 하위징아는 자신의 책 《중세의 가을》(1919년 출판)에서 네덜란드 미술을 부르고뉴 시대에 국한하여—국가적 경계 밖으로—배치한 첫 번째 역사가로, 15세기 초 이 화파의 개화가 전적으로 부르고뉴 궁정이 설정한 취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제안했다.[215] 또 다른 전시회 관람객 조르주 윌랭 드 로는 소유자들의 귀속과 설명을 사용했던 공식 카탈로그의 수많은 실수를 강조하는 독립적인 비판적 카탈로그를 출판했다. 그와 브뤼허 전시회를 방문하여 리뷰를 쓴 막스 프리들랜더는 이 분야의 주요 학자가 되었다.[216]

학문과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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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말 알타우제 소금 광산에서 회수 중인 헨트 제단화. 1950년대 이 패널들에 대한 선구적인 보존 작업은 방법론과 기술적 적용의 발전을 이끌었다.[68]

초기 네덜란드 미술의 가장 중요한 초기 연구는 1920년대 독일 미술사학자 막스 야코프 프리들랜더의 선구적인 《Meisterwerke der Niederländischen Malerei des 15. und 16. Jahrhunderts》에서 이루어졌다. 프리들랜더는 화가들의 전기적 세부 사항에 집중하고 귀속을 확립하며 주요 작품들을 조사했다. 가장 중요한 예술가들의 빈약한 역사적 기록을 감안할 때 이 작업은 매우 어려웠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분석은 프리들랜더의 작업에 도전했다. 미국에서 집필한 파노프스키는 독일 미술사학자들의 작업을 처음으로 영어권 세계가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네덜란드 미술을 연구 분야로서 효과적으로 합법화했으며 그 지위를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비슷한 수준으로 높였다.[217]

성 바보 대성당에서 기술적 분석 중인 헨트 제단화

파노프스키는 형식주의를 포기한 첫 미술사학자 중 한 명이었다.[218] 그는 프리들랜더의 귀속 시도를 바탕으로 구축했지만 사회사와 종교적 도상학에 더 집중했다.[93] 파노프스키는 네덜란드 그림들이 보통 묘사되는 용어를 개발했고, 특히 주요 제단화들의 풍부한 종교적 상징을 식별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파노프스키는 상당한 중복을 알아채며 네덜란드 화가들과 삽화가들의 작품을 연결한 첫 학자였다. 그는 필사본 연구가 패널 연구에 필수적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삽화를 패널화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즉 15~16세기 북유럽 예술가들의 진정으로 중요한 작품에 대한 서곡으로 보게 되었다.[219]

오토 페흐트와 프리드리히 빈클러는 파노프스키의 작업을 계속하고 발전시켰다. 그들은 도상학의 원천을 식별하고 귀속을 인정하거나 적어도 익명의 거장들을 편의상의 이름으로 구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19] 현존하는 기록의 빈약함은 귀속을 특히 어렵게 만들었고, 공방 시스템에 의해 문제가 복잡해졌다. 1950년대 후반, 프리들랜더, 파노프스키, 마이어 샤피로의 연구 이후에야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귀속들이 확립되었다.[202][O]

낮은 조명 아래 있고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분리된 판 데르베이던의 《본 제단화[220]

로른 캠벨과 같은 미술사학자들의 더 최근 연구는 화가들이 사용한 기법과 재료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기 위해 X-선과 적외선 사진에 의존한다.[221] 1950년대 중반 헨트 제단화의 보존은 기술적 연구에서 방법론과 학문을 선도했다. 물감 층과 하층에 대한 조사는 나중에 다른 네덜란드 작품들에 적용되어 더 정확한 귀속을 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어 판 에이크의 작품은 크리스투스의 작품과 다른 밑그림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발견들은 일류 거장들과 다음 세대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며, 멤링의 밑그림은 판 데르베이던의 영향을 분명히 보여준다.[68]

1970년대 이후의 학문은 도상학에 대한 순수한 연구에서 멀어져 당시의 사회사와 예술 작품 및 예술가의 관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221] 크레이그 하비슨에 따르면, "사회사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파노프스키는 이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에 대해 결코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222] 하비슨은 이 작품들을 봉헌물을 의뢰할 수단과 경향이 있었던 중산층 시민들에게 이용 가능한 "기도서 사고방식"을 가진 봉헌의 대상으로 본다. 가장 최근의 학문은 종교적 도상학에 대한 집중에서 멀어지고 있다. 대신 관람자가 어떻게 작품을 경험하도록 의도되었는지, 예를 들어 종교적 환영의 느낌을 이끌어내기 위한 봉헌자 초상화 등을 조사한다. 제임스 매로우는 화가들이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에 의해 종종 암시되는 구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고 생각한다.[223]

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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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플랑드르 미술과 네덜란드 미술은 17세기 초에야 비로소 구분되었다. Spronk (1997), 7 참조
  2. 판 에이크는 서명에 그리스 문자 요소를 사용했으며, 헨트의 많은 화가들이 공방 구성원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3.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약 3분의 1 정도가 캔버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캔버스는 훨씬 내구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존 작품은 나무 패널 작품이다. Ridderbos (2005), 297 참조
  4.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1473년경 후스 판 헨트를 고용했고, 300점의 그림을 소유했던 이사벨 1세 (카스티야)미하엘 시토후안 데 플란데스("플랑드르의 존")를 고용했다. Ainsworth (1998a), 25–26 참조
  5. 삼면화라는 단어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작품들은 "문이 있는 그림"으로 알려져 있었다. Jacobs (2011), 8 참조
  6. 14세기 제단화에서 "주제의 본질"이 가장 중요했다. 일반적으로 주제가 신성할수록 처리가 더 장식적이고 화려했다. Huizinga (2009), 22 참조
  7. 이 작품은 12개의 외부 패널과 14개의 내부 칠해진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능한 다양한 패널 조합은 다른 의도된 의미를 생성했다. Toman (2011), 319 참조
  8. 그중 3개는 기록되어 있으나 유실되었고, 8개는 완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5개는 조각으로 존재한다. Jacobs (2000), 1010 참조
  9. 보석상이었던 뒤러의 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견습생으로 시간을 보냈고 아들에 따르면 "위대한 예술가들"을 만났다. 뒤러 자신은 1520년에서 1521년 사이 그곳을 여행하며 브뤼허, 헨트, 브뤼셀 등을 방문했다. Borchert (2011), 83 참조
  10. 콘라트 비츠의 1444년 《베드로의 기적적인 물고기 잡이》는 실제 지형적 특징의 관찰을 바탕으로 한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초기 현존하는 충실한 풍경 묘사로 평가받는다. Borchert (2011), 58 참조
  11. 파노프스키가 "삼중 아케이드를 통해 본 실내"로 묘사했다. Panofsky (1969), 142 참조
  12. 보통 가명은 작품 그룹 간에 공통 요소가 확인된 후 적용된다. 미술사학자들은 개인이나 공방에 작품을 귀속시키기 전에 주제, 화풍, 도상학, 성경적 출처 및 물리적 위치의 유사성을 고려한 다음 일반 이름을 할당한다.
  13. 헨트 제단화의 중앙 패널, 판 에이크의 《카논 판 데르 팔레의 성모자》, 멤링의 모렐 삼면화
  14. 부아세레 컬렉션은 요한 게오르크 폰 딜리스의 조언에 따라 1827년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의 핵심 일부로 형성하기 위해 인수되었다. Ridderbos (2005), 86 참조
  15. 1960년대와 1970년대 로테 브란트 필립엘리자베스 다넨스는 파노프스키의 작업을 기반으로 구축했고, 특히 15세기 초~중반의 도상학적 원천 식별 및 작품 귀속과 관련하여 파노프스키가 고심했던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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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날 영어권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용어이나,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권에서는 여전히 사용된다.
  2. 1 2 Spronk (1996), 7
  3. Pächt (1999), 30
  4. 1 2 Janson, H. W. (2006), 493–501
  5. 1 2 3 Campbell (1998), 7
  6. Deam (1998), 12–13
  7. Panofsky (1969), 165
  8. 1 2 3 Pächt (1999), 11
  9. Pächt (1999), 12
  10. 1 2 Deam (1998), 15
  11. Ridderbos et al. (2005), 271
  12. Kren (20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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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olff, Martha; Hand, John Oliver. Early Netherlandish painting. Washington: National Gallery of Art, 1987. ISBN 0-521-34016-0
  • Wood, Christopher, Albrecht Altdorfer and the Origins of Landscape, London: Reaktion Books, 1993. ISBN 0-948462-46-9
  • Wuenschel, Joerg: Trust through Law – A Contribution to the History of the Regulation of the Art Trade and to the Protection of the Integrity of the Cultural Heritage, Baden-Baden, 2023. ISBN 978-3-7560-1127-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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