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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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Beethoven.jpg
요제프 칼 슈타이어가 그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초상화 (1820), 장엄 미사를 작곡하고 있다.
기본 정보
본명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출생1770년 12월 17일(1770-12-17)
신성 로마 제국
사망1827년 3월 26일(1827-03-26) (56세)
오스트리아 제국
직업피아노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
장르서양 고전 음악
악기피아노, 오르간
활동 시기1778년 ~ 1827년
서명
Beethoven Signature.svg

루트비히 판 베토벤(독일어: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생애[편집]

유년 시절[편집]

본, 본가세 20번지의 베토벤 탄생지, 현재는 베토벤 하우스 박물관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마리아는 원래 모두 7남매를 낳았다. 장남인 루트비히 마리아는 태어나자 마자 곧 죽었고 둘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셋째 카를과 넷째 요한을 낳은 후에 낳은 자녀들도 거의 대부분이 일찍 죽게 되었다. 1787년 마리아가 죽은 후 살림을 맡아 준 가정부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부양은 베토벤의 몫이었다. 첫째 동생인 안톤 카를(Anton Karl Beethoven,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형의 비서 역할을 맡으며 출판을 도왔다. 하지만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베토벤 전기 작가인 세이어(Thayer)는 바가텔집 작품33과 가곡 작품52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카를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스 요한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부모님[편집]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 앞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행동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 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고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 4개월, 즉 8살이었다. 나이를 속여 더 멋지게 보이고 돈을 더 받아내려고 한것이다. 다시말해 아들 베토벤의 재능을 팔아 술을 사먹으며 흥청망청 썼다.

사람들과의 만남[편집]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편집]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이때부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의대생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는 그를 폰 브로이닝 집안(von Breuning, 나중에 베겔러는 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에 소개해 주었다. 베토벤은 종종 폰 브로이닝 집안에 갔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문학과 고전문학을 접하였으며, 몇몇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의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집안에 비교한다면 편안한 곳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평생 친구이자 재정지원자가 되는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 된다.

모차르트와의 만남[편집]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오토 얀(Otto Jahn)은 모차르트가 베토벤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베토벤이 17살이 되던 해인 1787년,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의 목적이 베토벤 자신은 모차르트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단정짓고 있지만, 꼭 그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때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만나고 싶다는 청을 듣고 거절할 마음도 있었지만, 베토벤의 고향인 본에서 유명한 작곡가라는 말에 베토벤을 만나게 된다. 모차르트의 요구에 의해 베토벤은 즉흥곡을 연주했는데,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그것을 암기하고 치는거라 여기고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자 베토벤은 평상시에 가장 자신있던 즉흥실력을 모차르트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모차르트에게 즉흥곡의 테마 주제를 요청한다. 흥이 일기만 하면 즉흥연주에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던 그였고, 베토벤의 뛰어난 연주는 모차르트를 감탄시키기에는 너무나 충분하였다. 그 즉흥곡을 듣고, 모차르트는 여러 친구들이 모여있는 옆방으로 뛰어가 이렇게 외쳤다. "저 사내를 잘 지켜보게, 나보다 유명하게 될 존재가 나타났다네."

1787년 베토벤의 첫 빈 여행에 관하여 확실하게 단정짓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모차르트를 만났는지, 만났다면 어느정도 대화를 나누었는지, 또는 모차르트에게서 레슨을 받았는지의 여부도 확인할만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토 얀이 주장한 것과 같이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만났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근거 또한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당시의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어서 사소한 방문객은 잘 만나주지도 않았던 터라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은 시골청년 베토벤에게 관심을 보였을리 없고, 모든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리라는 것이 근래의 통설이며 국제음악계에서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이것을 증명해줄만한 물질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궁정악단[편집]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 궁정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과의 만남[편집]

선제후의 도움으로 1792년 베토벤은 으로 갔다. 아마 1790년대 말 당시 런던으로 가던 요제프 하이든성탄절 쯤에 본에서 머물 때 그에게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2곡의 장송칸타타(WoO.87,WoO.88) 악보를 보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어 1792년 7월에 런던에서 빈으로 귀환한 뒤부터 베토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짜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즉시 하이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이든은 그에게 만족했지만, 베토벤은 실제로 가르침을 받다보니 이전의 위대한 우상이었던 거장 하이든에게 여러가지로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하이든이 고치고 돌려준 베토벤의 악보를 본 요한 셍크(Johann Schenk, 1753-1836)가 미처 하이든이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주자 하이든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베토벤은 마침내 "하이든에게서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하이든의 느긋하고 여유있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가르치는 상대가 젊은 혈기에 급한 성격으로 알려진 베토벤이었으니 서로 맞지 않았음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후 베토벤은 당시 빈에서 뛰어난 이론가로 통하던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가르침을 받고, 모차르트의 연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성악곡 작곡을 배운다. 1793년 말, 결국 베토벤은 하이든 곁을 떠나지만 두 사람 간의 불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베토벤이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던 다단조 3중주곡을 출판하지 말라고 하이든이 충고한 것 때문에 베토벤은 심한 상처를 받았던 일도 있듯이,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개운치 않은 앙금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1794년, 하이든의 두번째 영국 여행이 베토벤에게는 선생님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1795년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곡을 완성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그해 8월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때 카를 리히노브스키 후작 저택의 연주회에서 직접 들려주었다. 이 3곡의 소나타가 작품2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하이든과 베토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토벤 쪽에서 말하자면 하이든은 과거의 업적을 놓고 볼 때 역시 위대한 대선배였다. 단지 그는 자신의 향학열을 만족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위와 연륜을 갖춘 하이든 쪽에서 볼 때도 신출내기 청년 음악가의 불평이나 불만 따위에 일일이 대응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정이 두 사람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막아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피아노 3중주 1~3번 작품1과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품2를 작곡한 것 외에도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오늘날 대부분 WoO작품번호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을 볼수록 작곡 양식이 성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어느 변주곡집에서 그의 교향곡 3번의 주제와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찾아낸 바 있다.

음악수업[편집]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성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관계는 1802년(또는 1809년까지일수도 있다.)까지 이어졌다. 1794년 하이든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연주활동[편집]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 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 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 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유명세를 타다[편집]

1803년의 베토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하였으며,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2] 임금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았다.[3]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4]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자유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5]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6] 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7]

음악적 성숙[편집]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사중주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사중주 1-6번 (Op. 18) (요제프 프란츠 로브코비츠 공의 부탁으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은 교향곡 1번, 2번과 함께 1800년 초연되었고, 1801년 출판되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는데, 쿠퍼는 이를 "성격의 강렬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 역동성, 음조 면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었다"[8] 고 평가하였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 2월 2일에 베토벤은 교향곡 1번을 초연하기 위하여 도시 극장을 임대하였으며 하이든,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의 칠중주,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이들 곡은 당시 출판되지 않은 상태였다) 등 다양한 곡목을 공연하였다. "일반음악신문"(Allgemeine musikalische Zeiting,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차이퉁)에서 "오랫동안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묘사했던 이 연주회는 어려움도 겪었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연주자들이 독주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목관 5중주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인다.) 무치오 클레멘티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자신의 초기 작품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그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교습[편집]

멜러(Josef Willibrord Mähler)가 그린 1804년의 베토벤.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인 백작부인 안나 브룬스비크(Anna Brunswik)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교습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맏딸 요제피네(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와 관계를 맺어, 그때부터 수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교습이 끝난 직후 요제피네는 요제프 다임(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 백작과 혼인하였으며, 베토벤은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도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9]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제자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페르디난트 리스 를 가르쳤는데, 그는 작곡가가 되어 나중에 그들의 만남을 다룬 책인 "베토벤은 기억한다"을 썼다. 젊은 카를 체르니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체르니 자신도 저명한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 있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10]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 을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각 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 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1]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2]

청력 상실[편집]

청각장애의 이유[편집]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13]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14]

서울방송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에서는 베토벤이 청각장애를 겪은 이유를 납중독일 것으로 헤아렸다. 백만불 미스터리의 보도내용에 따르면,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 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 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 때 이 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 결과 납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15] 이로써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중독임이 밝혀졌다.[16]

꾸준한 음악활동[편집]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17]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18]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임을 배려한 가수 카롤리네 웅거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고, 관객들의 환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9]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1815년의 베토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그가 사용한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청력상실은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20]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청력을 잃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21]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수첩에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고,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그의 비서 안톤 신틀러(Anton Schindler)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 버리거나 수정하였다.[22]

후원[편집]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

베토벤 이전까지의 음악가와 귀족간의 관계는 종속관계였다.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든도 에스테르하지 가문 소속의 음악가였지만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후계자가 워낙 음악에 관심이 없던 탓에 말년이 돼서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모차르트도 귀족과의 종속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아르코 백작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은 끝

에 결국 종속관계에서 벗어났지만, 그 때문에 후원을 받지 못하여 가난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모차르트의 말년 작품들이 더 성숙했던 이유는 귀족과의 종속관계에서 귀족의 요구대로 작곡했던 틀을 벗어나 좀더 자신의 감정이 반영된 영향이 큰 이유였다.

베토벤도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는데, 베토벤은 역대 음악가들 중에서 최초로 가장 많은 후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이 워낙 평이 좋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이름에 붙은 '판(van)'이라는 호칭이었다. Van이라는 호칭은 그 당시에는 네덜란드 출신 귀족에게만 붙는 표시였고, 그의 할아버지 루트비히가 17살 때 독일로 이주한 네덜란드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많은 게르만계의 독일,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베토벤에게만큼은 같은 동급으로 대우를 해주었다. 베토벤의 이름에 붙여진 Van 칭호 덕분에 그의 초창기 빈 데뷔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쉬운 편이었다.

베토벤은 귀족들로부터 동급 지원을 받았었을 뿐더러, 음악가로서의 가치를 높여주게 되어 나중에는 베토벤 스스로도 귀족들의 존경과 인사를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베토벤》(계몽사)에 따르면, 1812년 베토벤과 그가 존중하는 시인인 괴테가 테플리츠(Teplitz) 온천에서 처음으로 만나 같이 산책을 하던 중에 자신들의 앞으로 지나가는 왕후들의 행렬을 보고 괴테는 먼저 인사를 했지만, 베토벤은 그들이 먼저 인사를 하기를 기다렸으며 기어코 왕후들에게 먼저 인사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로 인하여 괴테와 베토벤은 친분을 깊게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나중에 베토벤이 베티나 브렌타노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아 전해지게 된다. 이렇게 괴테와 헤어진 뒤에 좋아하는 시인들로 호우머, 실러, 클롭슈토크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괴테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베토벤의 이런 사고방식은 후대 음악가 및 예술가들의 인식을 바꿔놓는데 크게 기여를 하여 베토벤 사후에 여러 음악가들이 귀족의 종속관계가 아닌 음악가, 즉 하나의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받을 길을 가는 발판을 마련해주게 되어 후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상당히 존경했던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베토벤의 후원으로 돌아와서, 그의 데뷔 초창기에는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면서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등 그의 초기 후원자들 몇몇은 작곡을 요청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함과 더불어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이었을 터인데, 그는 1803년 혹은 1804년에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1824년까지 만났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곡을 헌정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피아노 3중주 7번(1811년)과 대작 장엄 미사(Missa Solemnis, 1823)도 있다. 루돌프도 답례로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품 한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보관되어 있다.

왕실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악장(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Kinsky) 백작과 롭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롭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어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슈베르트와의 만남[편집]

베토벤은 훗날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불과 2km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거리에 살았지만 베토벤이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못해 쉽게 만나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소심한 성격 또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만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 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그 후 슈베르트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허약한 목소리를 듣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이 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슈베르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사망[편집]

임종 순간의 베토벤ː 1827년 3월 27일, 죠셉 단하우저에 의한 스케치

베토벤은 종종 30세 무렵부터 질병에 시달렸다. 설사, 복통, 산통, 열병, 또는 염증과 같은 다양한 증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편으로는 급성 질환이 원인으로 간주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이 주요 원인으로 명명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납 중독, 브루셀라증 및 잦은 음주 등이 의심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베토벤의 건강 문제가 한 가지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가 값비싼 사탕 수수 설탕 대신 납 설탕으로 달게 했던 값싼 화이트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고 언급했다. 베토벤의 뼈와 머리카락에는 거의 측정되지 않은 농도의 납이 포함되어 있었다.[23][24]

나이가 들면서 질병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다. 1821년 여름, 심한 황달이 간경변을 예고했다. 베토벤은 목욕과 란트 체류에 대한 불만에서 구제를 구했고, 1826년 9월 29일 그의 조카와 함께 그나익센도르프에 있는 그의 형제 요한의 집으로 옮겨 석달동안 머물렀다. 12월 초, 춥고 습한 날씨에 열린 차를 타고 빈으로 돌아오는 여행에서 베토벤은 폐렴에 걸렸다. 회복 직후 다리와 복부의 수분 저류 및 황달과 함께 심각한 간경변 증상이 나타나 베토벤은 더 이상 병상을 떠날 수 없었다. 카를은 12월 동안 베토벤의 침대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해 1월 초에 이흘라바에 입대하기 위해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토벤에게 편지를 썼다ː "사랑하는 아버지...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과 헤어지게 된 것 만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카를은 삼촌을 다시 보지 못했다. 카를이 떠난 직후 베토벤은 그의 조카를 유일한 상속자로 만드는 유언장을 썼다.[25]

베토벤의 장례 행렬: 1827년, F. X. 스토버의 수채화

1월 말에는 베토벤의 병 치료를 위해 말파티 박사가 참석했다. 그의 치료는 주로 알코올에 집중되었다. 베토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이 퍼지자 디아벨리, 슈판치히, 리히노프스키, 쉰들러, 훔멜과 그의 제자 페르디난드 힐러를 포함한 많은 오랜 친구들이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에서 온 백 파운드, 쇼츠에서 온 값비싼 와인을 포함하여 많은 조공과 선물도 보내졌다.[23][26]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은 때때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용감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3월 24일, 그는 쉰들러와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게, 친구들, 희극은 끝났네."라고 말했다. 그날 늦게, 쇼트에서 온 와인이 도착했을 때, 그는 속삭였다. "애석하군, 너무 늦었네."[27]

여러 의사들에 의한 몇 차례의 천공과 실패한 치료 시도 끝에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의사는 안드레아스 이그나츠 바브루흐였다. 베토벤의 임종시,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요한나 판 베토벤 만이 참석했다. 바르부흐에 따르면, 오후 5시 경에 번개와 천둥 소리가 들렸다ː "베토벤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고 몇 초 동안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심장박동도 뛰지 않았다."[28] 많은 방문객이 임종을 보러왔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일부는 휘텐브렌너와 힐러에 의해 보관되었다.[29][30] 부검 결과 베토벤은 과도한 알코올 섭취와 청각 및 기타 관련 신경의 상당한 확장으로 인해 심각한 간 손상을 입었다.[30][31][32]

3월 29일 배링 지역 공동 묘지의 매장은 인구의 큰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약 2만명이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장례식 연설은 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연설했다. 불과 1년 후 베토벤을 따라 무덤까지 가야했던 프란츠 슈베르트는 그릴파르처, 마이세더와 함께 36명의 성화 운반자 중 한 명으로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33][34]

베토벤의 시신은 두 번 발굴되었다. 1863년에 뼈를 측정하고 두개골을 촬영했다. 1888년에 그의 유골은 다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빈 중앙묘지의 명예 묘역으로 옮겨졌다.

예술관[편집]

동시대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예술가 E. T. A 호프만은 베토벤의 예술을 칭송하며, 자신들의 낭만주의 진영에 베토벤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베토벤은 당시 낭만주의의 형식적인 통일감을 무시한, 감상과 감정 표현으로 대표되는 예술과는 거리를 두었다. 베토벤이 주목한 것은 동시대의 문학에서는 괴테실러, 또 그 이전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들의 것이며, 본업인 음악에서는 바흐, 헨델모차르트 등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이 "전위"였는가의 여부는 많은 음악학자들 사이에서 견해가 갈린다. "베토벤은 전위가 아니다"라고 단언한 하라 히로시는 당시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변주곡 등의 구조 모델을 준수하고 발안한 새로운 장르라는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메트로놈의 활용", "모국어에 의한 속도 표시", "피아노의 구조 개선과 음역의 확장", "악곡의 대규모화", "대담한 관현악 편곡", "연주 불가능에의 도전", "소음의 도입"(전쟁 교향곡) 등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외양, 사생활, 성격[편집]

안톤 쉰들러의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베토벤의 신장은 168 cm로,[35][36] 당시의 일반 서양인 남성으로는 평균 이상이었으며, 신체는 근육질에 건장한 편이었다. 순수 백인으로서는 피부가 검은 편이었고, 천연두 반흔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초상화와 동상, 라이프 마스크와 근래에 밝혀진 다양한 여성 관계 등을 볼 때 용모가 미남이라고 지칭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정은 풍부하고, 생기 넘치는 눈빛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많은 숭배자가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옷을 차려 입는 등 외모에 신경을 썼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 체르니는 처음 베토벤을 만났을 때 로빈슨 크루소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머리 주변에서 부스스 곤두선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방 안은 난잡한 반면, 목욕과 빨래를 선호하는 등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결벽증처럼 손을 집요하게 씻는 버릇도 있었다. 또한 생애 최소 60회 이상 이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빵과 날달걀을 넣고 푹 삶은 수프와 생선, 고기, 마카로니 앤드 치즈를 좋아했다. 또 와인을 즐겼고, 브랜드는 값싼 토커이 포도주를 선호했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술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커피는 한 잔을 끓일 때마다 60알의 원두를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37]

성격은 모순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정 반대인 측면이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사귐성 있게 친절하고 순진하면서도, 엄격하고 냉혹하며 무도할 정도의 행동을 하는 등 기분의 흔들림이 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는 빈에서 괴짜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어떤 작곡가보다 경애받고 있었고, 그것은 성대한 장례식과 다수의 참석자를 그린 서화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베토벤 괴짜설은 메테르니히 정권에 의한 유언비어라는 견해도 있다.

사상[편집]

학자들에 의하면, 베토벤은 가톨릭 교도였지만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종교적 작곡가로 분류되는 바흐, 브루크너 등과는 달리 제도적 그리스도교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호메로스플라톤 등의 고대 그리스 사상에 공감하여 괴테실러에게서도 나타나는 범신론적인 생각도 갖게 되었다. 그의 미완성으로 끝난 교향곡 10번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세계와 그리스 세계의 융합을 목표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괴테가 파우스트 2부에서 시도한 것인데, 베토벤의 생존 동안에는 1부만 발표되었고 2부는 베토벤 사후에 발표되었다. 이러한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종교관은 결국 교향곡 9번장엄미사 등의 후기 작품에서 궁극적 보편성과의 우주적 합일이라는 결론을 보았다.

그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등 인도 철학에도 심취했고, 철학자 칸트의 사상도 언급하며 칸트의 강의에 출석하는 것도 기획하고 있었다.[38] 정치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고, 자유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에서는 반체제 분자로 보여지기도 했다.

천문학에 관한 책들도 깊이 있게 읽고 있었던 그는, 본 대학에서 청강생 자격으로서의 수강이나 베게너 가문에서 교육을 받은 것 이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당한 교양인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후세의 음악가에 대한 영향 평가[편집]

루트비히 판 베토벤

베토벤의 음악계에 대한 기여는 매우 컸고, 그 이후의 음악가는 크든 작든 그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 이전의 음악가들은 궁중이나 유력 귀족을 섬겼으며, 작품들은 공식 및 사적 행사에 있어서의 기회 음악으로 작곡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베토벤은 그런 후원자와의 주종 관계 및 그 주종 관계에 따른 음악을 거부하고 대중을 향한 작품을 발표하는 음악가의 효시가 되었다. 음악가=예술가임을 공언한 그의 태도 표명, 또 한 편의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창작이었다는 것은 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자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특히 바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시와 음악의 융합"이라는 이념에 촉발되어, 낭만주의 음악의 급선봉으로서 그 이념을 더욱 밀고 나아가 악곡을 탄생시켰다. 또 그 표현을 위해 풍부한 관현악법으로 음향 효과를 증대시켰고, 베토벤을 이용한 고전적 화성법을 해체하고, 트리스탄 화음으로 대표되는 혁신적 화성으로 조성을 확대했다.

반면 브람스는 낭만주의 시대에 살면서 바그너파와 선을 긋고, 어디까지나 베토벤의 견고한 구성과 극적인 전개를 통한 고전주의 음악 형식의 구축이라는 측면을 이어받아 낭만주의 시대 속에서 음악 형식적으로는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유지했다. 그러나 선율이나 화성 등 음악 자체에 넘치는 서정성은 낭만주의 이외의 누구도 아니었다. 또한 이 고전주의 형식에서의 극적인 전개와 구성이라는 측면은 브람스 뿐 아니라 드보르자크차이콥스키, 그리고 20세기에는 쇤베르크, 벨러,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라헨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음악[편집]

세 개의 시기[편집]

역사가 윌리엄 드랩킨은 이르면 1818년에 한 작가가 베토벤 작품의 세 개의 시기 분할을 제안했으며 그러한 분할은 (종종 시기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다른 날짜나 저작물을 채택하지만) 결국 안톤 펠릭스 쉰들러, 프랑수와-요셉 페티스와 빌헬름 폰 렌즈를 시작으로 모든 베토벤 전기 작가가 채택한 관습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나중에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구조 내에서 하위 기간을 식별하려고 했다. 단점은 일반적으로 네 번째 기간, 즉 작업이 덜 고려되는 본에서의 초기 기간을 생략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다른 범주의 작업에 대해 수년에 걸친 베토벤의 작곡 스타일의 차별적 발전을 무시한다. 예를 들어, 피아노 소나타는 지속적인 발전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진행으로 베토벤의 생애 내내 쓰여졌다. 교향곡이 모두 선형적인 진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모든 유형의 작품, 아마도 세 개의 기간으로 그룹화 되는 "현악 사중주"(1801-1802년의 Op. 18, 1806-1814년의 Op. 59, 7495, 1824년부터의 오늘날 '후기'로 알려진 사중주)는 이 분류에 가장 깔끔하게 들어맞는다. 드랩킨은 "이제 우리는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니 ... 프로그램 노트, 녹음과 함께 쓰인 에세이, 모든 베토벤 연주회가 있는 한, 우리가 별개의 양식적 기간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결론을 내렸다.[39][39]

본 1782 - 1792[편집]

1785년까지 베토벤이 쓴 열 개의 초기 작품을 포함하여 약 40개의 작품은 베토벤이 본에서 살았던 해 부터 살아 남았다. 베토벤은 1785년에서 1790년 사이에 작곡을 거의 포기했다고 주장했는데, 아마도 그의 첫 번째 출판된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적 반응의 결과 일 것이다.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의 영향력 있는 "음악적 연감"("Musikalischer Almanack")의 1784년 리뷰는 베토벤의 노력을 랭크 초보자의 노력과 비교했다.[40]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면밀히 모델링 한 1785년의 "초기 피아노 사중주 세 개"("WoO 36")는 그 시대의 음악에 대한 그의 의존성을 보여준다. 베토벤 자신은 본 시기의 작품에 Opus 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다.

찰스 로젠은 본이 빈에 비하면 산만한 곳이라고 지적한다. 로젠은 당시의 베토벤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성숙한 작품을 잘 알지 못했을 것 같았고, 오히려 그의 초기 스타일이 훔멜이나 클레멘티의 스타일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41] 커먼은 본 단계에서의 베토벤은 소나타 스타일의 그의 작품보다 오히려 그의 성악곡으로 더 유명하다고 제안한다. 그는 1792년 빈으로 이주하여 그가 알려지게 된 장르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길을 열었다.[42]

첫번째 시기[편집]

전통적인 "첫 번째 시기"는 1792년 베토벤이 빈에 도착한 후 시작된다. 처음 몇 년 동안 그는 본에서 보다는 작곡을 덜 한 것 같고, 그의 피아노 삼중주, Op. 1은 1795년에야 출판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빈 스타일"(오늘 날 하이든과 모차르트로부터 나온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을 익혀 그 스타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1795년부터 1800년까지의 그의 작품은 표준보다 규모가 크다(예를 들어 3악장이 아닌 4악장으로 소나타를 쓴다); 전형적으로 그는 미뉴에트와 트리오 보다는 스케르초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종종 극적으로, 때로는 지나치게 극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역동적이며 템포와 반음계적 화성의 사용을 포함한다. 하이든이 Op. 1의 세 번째 삼중주가 청중들이 감상하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믿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43]

그는 또한 새로운 방향을 탐구하고 점차 작품의 범위와 야망을 넓혔다. 초기의 중요한 곡으로는 두 개의 교향곡 (1번에서 2번까지), 여섯 개의 현악 사중주 Opus 18 세트 (1번에서 6번까지), 첫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 2번까지), 그리고 첫 열네 개의 피아노 소나타 (1번에서 12번까지, 그리고 19번과 20번) 등이 있다.

중기[편집]

그의 중간의 (영웅적) 시기는 잠식하는 청각 장애를 인정하며 개인적인 위기가 닥친 직후에 시작되었다. 베토벤은 닥친 위기를 빈 고전주의 형식을 재발견함으로써 탈출하고 있다. 즉, 빈 고전파 두 선배보다 소재로서의 동기의 발전과 전개 · 변용을 철저히 중시하고, 형식적 · 구성적인 것을 추구했으며, 이후 코다의 확장 등 고전주의 형식의 확대에 성공했다. 중기에는 영웅주의와 투쟁을 표현하는 대규모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중기의 작품에는 6개의 교향곡 (3번에서 8번까지), 마지막 2개의 피아노 협주곡 (4번에서 5번까지 ), 삼중 협주곡바이올린 협주곡, 5개의 현악 사중주 (7번에서 11번까지), 여러 피아노 소나타 (16번에서 18번, 그리고 21번에서 27번까지),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 그리고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포함된다.

교향곡 부문에서는,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의 도입 ("2번"), 기존 소나타 형식의 비약적 확대 ("3번"), 선율의 바탕이 되는 동기와 리듬의 철저한 조작 ("5번", "7번"), 표제 음악의 시도 ("6번"), 악장의 연결 시도 ("5번", "6번"), 5악장 형식 시도 (6번) 등 혁신적인 기법이 창조되어 지고, 그 작품들은 고전주의의 양식미와 낭만주의를 지극히 높은 차원에서 양립시키며, 음악의 이상적인 존재로서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교향곡 5번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어둠→밝음"(고뇌를 뚫고 환희에 이른다)이라는 도식은 극성 구성의 규범이 되어, 이후 낭만주의의 많은 작품이 이를 추종했다. 이러한 베토벤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연주 인원의 증가와 연결됐고, 그 인원수로 만들어진, 삶을 고무하는 듯한 강음이나 흐느끼는 듯한 약음은 많은 음악가를 자극했다.

"중기"는 때때로 "영웅적" 작곡 방식과 관련이 있지만 "영웅적"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베토벤 학문에서 점점 더 논란이 되고 있다.[44] 이 용어는 중기의 대체 이름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중기 전체를 설명하는 "영웅적"이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45] 교향곡 3번과 5번과 같은 일부 작품은 "영웅적"으로 설명하기 쉽지만 그의 교향곡 6번 ("전원")이나 그의 피아노 소나타 24번과 같은 다른 작품은 그렇지 않다.[46]

후기[편집]

베토벤의 후기는 1810-1819년에 시작되었다. 베토벤은 그의 청력 저하로 의기소침해 있는 상황과 맞물려, 동생 카스파의 사망, 그리고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위한 법적 투쟁과 카를에 대한 기대와 집착으로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서 두 번째 위기를 겪게 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바흐헨델의 작품을 포함하여 오래된 음악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으며(특히 호모포니의 전성기였던 당시의 바흐의 유산인 대위법, 즉, 폴리포니를 연구하였고, 그의 중기에 부분적으로 사용된 대위법을 대대적으로 도입시키고자 함), 이후의 완결판에서 첫 번째 시도로 출판되었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 중에는 푸가 자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서곡 헌당식 (1822)는 이러한 영향을 통합하려는 초기 작업이었다. "후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는 이 시기에 그는 거의 10년 만에 가장 먼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기 위해 건반으로 돌아왔다. 후기 작품에는 마지막 5개의 피아노 소나타 (28번에서 32번까지)와 디아 벨리 변주곡,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마지막 두 개의 소나타 (4번에서 5번까지), 후기 현악 사중주 (대푸가12번에서 16번까지), 그리고 매우 큰 세력을 위한 두 개의 작품: 장엄미사교향곡 9번 등이 포함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지적인 깊이, 형식적인 혁신, 강렬하고 매우 개인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현악 사중주 Op. 131에는 7개의 연결된 악장이 있으며 9번째 교향곡은 2악장에서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를 사용했고, 3악장에서는 일반 교향곡의 악장에서 완서악장으로의 교체를 이루었으며, 4악장에서는 독창 · 합창을 포함한 성악을 사용, 지금까지 없었던 획기적인 교향곡을 작곡했다.

각주[편집]

  1. 베토벤 평전과 작품, 현음사, 음악평론가 이순열 저, 1984년 7월 30일 1쇄 발행, 1992년 12월 10일 3쇄 발행, 38쪽
  2. Cooper (2008), pp. 62–65
  3. Cooper (2008), p. 68
  4. Cooper (2008), p. 69
  5. Beethoven, Ludwig (1796년 11월 19일). “Letter to Andreas Streicher in Vienna, Preßburg” (독일어). Beethoven-Haus Bonn Digital Archives. 2009년 6월 2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6. Cooper (2008), p. 72
  7. Cooper (2008), pp. 75–76
  8. strength of character, depth of emotion, level of originality, and ingenuity of motivic and tonal manipulation
  9. Cooper (2008), p. 80
  10. Cooper (2008), pp. 98–103
  11. Cooper (2008), pp. 112–127
  12. Cooper (2008), pp. 112–115
  13. Grove Online, section 5
  14. 그의 이름은 페르디난드 힐러로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이다.
  15. 그 원인으로 납에 노출되기 쉬운 당대의 생활환경이 지적된다.
  16. 납중독으로 청력상실이 생기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경우이다.
  17. Cooper (2008), p. 108
  18. Cooper (2008), p. 120
  19. White, Felix (1927년 1 4월). “Some Tributes to Beethoven in English Verse”. 《The Musical Times》. Vol. 68. 
  20. Ealy, George Thomas (1994년 Spring월). “Of Ear Trumpets and a Resonance Plate: Early Hearing Aids and Beethoven's Hearing Perception”. 《19th-Century Music》. Vol. 17: pp. 262–273. 
  21. Solomon (2001)
  22. Clive, p. 239
  23. Kerman, Tyson & Burnham 2001, §10.
  24. Thayer 1967b, 1017–1024쪽.
  25. Solomon 1998, 377쪽.
  26. Solomon 1998, 378–379쪽.
  27. Solomon 1998, 380–381쪽.
  28. Thayer 1967b, 1050-1051쪽.
  29. Solomon 1998, 381–382쪽.
  30. Conway 2012, 44쪽.
  31. SaccentiSmildeSaris 2011.
  32. SaccentiSmildeSaris 2012.
  33. Cooper 2008, 318, 349쪽.
  34. Thayer 1967b, 1053–1056쪽.
  35. Bankl, Hans 및 H. Jesserer.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질병: 그의 삶의 병리와 고통의 병리 (W. Maudrich, 1987)
  36. “16. 베토벤의 신장은 얼마입니까?” (영어). 2020년 10월 22일에 확인함. 
  37. Amanda Scherker (2014년 6월 5일 16시 30분 JST). "9명의 위인이 커피 중독 였다니 놀랍다" The Huffington Post. 2017년 8월 20일에 확인함.
  38. 키노시타 & 호리 1996, 85 페이지
  39. Cooper 1996, 198–200쪽.
  40. Solomon 1972, 169쪽.
  41. Rosen 1972, 379–380쪽.
  42. Kerman, Tyson & Burnham 2001, 12.
  43. Kerman, Tyson & Burnham 2001, § 13.
  44. Solomon 1990, 124쪽.
  45. Steinberg, Michael P. (2006). 《Listening to reason: culture, subjectivity, and nineteenth-century music》. Princeton University Press. 59–60쪽. ISBN 978-0-691-12616-6. 2011년 8월 4일에 확인함. 
  46. Burnham, Scott G.; Steinberg, Michael P. (2000). 《Beethoven and his world》. Princeton University Press. 39–40쪽. ISBN 978-0-691-07073-5. 2011년 8월 4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편집]

  • Clive, Peter., Beethoven and His World: A Biograph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1, ISBN 0-19-816672-9
  • Cooper,Barry., Beethoven Oxford University Press, US, 2008 ISBN 978-0-19-531331-4
  • Cross, Milton., The Milton Cross New Encyclopedia of the Great Composers and Their Music, Doubleday, Garden City, NJ, 1953
  • Landon, H C Robbins., Beethoven: a documentary study, Macmillan, 1970
  • Lockwood, Lewis., Beethoven: The Music And The Life, W. W. Norton, 2005, ISBN 978-0-393-32638-3
  • Solomon, Maynard., Beethoven , 2nd edition, Schirmer Books, New York, 2001, ISBN 0-8256-7268-6
  • Stanley, Glenn.(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Beethoven, 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0, ISBN 0-521-58074-9
  • Thayer, A. W., The Life of Ludwig Van Beethoven Vol,Beethoven Association, 1921
  • Kerman, Joseph; Tyson, Alan; Burnham, Scott G. "Ludvig van Beethoven", Grove Music Online, ed. L. Macy (accessed 29 November 2006), grovemusic.com.

외부 링크[편집]

  1. “루트비히 판 베토벤”. 《네이버캐스트》. 
  2. Beethoven-Haus Bonn 의 web-site: [Bonn 소재 베토벤 생가 의 홈피 https://web.archive.org/web/20101225122042/http://www.beethoven-haus-bonn.de/sixcms/detail.php?id=&template=portal_de&_sprache=deutsch]
  3. Raptus Association (베토벤 관련): [Beethoven der grosse Meister https://web.archive.org/web/20120906074710/http://www.raptusassociation.org/indexg.html]
  4. NNDB 인명사전: [Profile, Books & Parallels 중에서 베토벤의 bibliography 부분 http://www.nndb.com/people/871/000024799/bibli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