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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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
Schopenhauer.jpg
출생 1788년 2월 22일(1788-02-22)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 단치히
사망 1860년 9월 21일 (72세)
독일 연방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대 19세기 철학
지역 서양 철학
연구 분야 인식론,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
서명 Arthur Schopenhauer Signature.svg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독일어: Arthur Schopenhauer, IPA[ˈaʁtʊʁ ˈʃɔpənˌhaʊ̯ɐ],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독일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서는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 대학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적인 연구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여록과 보유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에 관해 알게 되었다.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과 동양 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한 서양철학자이자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독특한 철학자이다. 19세기 말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5]

연보[편집]

  • 1788년 2월 22일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 1793년(5세) 단치히프로이센에 합병되자 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함부르크의 집.
  • 1797년(9세)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했다. 아버지의 의도로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2년 간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다.
  • 1799년(11세) 프랑스에서 돌아와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4년 간 공부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 1800년(12세) 아버지와 함께 하노버, 칼스바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했다.
  • 1803년(15세)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런던에 도착하여 신부 랭카스터의 집에서 머물며 영어를 익혔다.
  • 1804년(16세)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다. 쇼펜하우어는 여행 도중에 사색하며 많은 일기를 썼는데 진지한 고민이 많았다. 단치히에서 상인 실습을 시작했으나 무관심했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문학, 수학, 역사 등을 독학했다.
  • 1805년(17세)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자살한 걸로 추정됨.
  • 1806년(18세) 아버지 사망 후, 가족이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만 함부르크에 남아서 상인 실습을 지속했다.
  • 1807년(19세)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한 후에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라틴어그리스어를 열심히 학습함.
    폴란드 그단스크(옛 단치히) 쇼펜하우어의 생가.
  • 1809년(21세)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함.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를 두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수학, 언어학, 역사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여해서 공부함.
  • 1810년(22세)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Gottlob Ernst Schulze)의 강의를 들었다. 슐체에게 특히 플라톤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스승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침.
  • 1811년(23세) 어머니가 당시 독일 문학계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설득은커녕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감명받아 자상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생리학, 시학, 어류학, 식물학, 조류학 등 여러 강의를 들음.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당대의 유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일기에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가 주도하는 고대 그리스 고전문학, 고전철학 강의에 사로잡혀 열심히 들음.
  • 1812년(24세) 플라톤, 임마누엘 칸트 등 여러 사상가를 본격적으로 탐구함.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의 영국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지만 매우 실망하고 말았다.
  • 1813년(25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사이에 전쟁이 재발했다. 쇼펜하우어베를린을 떠나서 루돌슈타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이 논문을 예나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증정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고 괴테는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괴테는 가끔 쇼펜하우어를 자기 집에 초대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 1814년(26세)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했다.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이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나 편지교류는 가끔했다.
  • 1816년(28세)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되었다.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실험을 토대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괴테는 제자에게 비판받은 이 일을 베를린의 친구 슐츠에게 편지로 알렸고 약간 언짢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다.
  • 1818년(30세) 일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자신의 책이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던 쇼펜하우어는 1년 동안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자신의 책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동시대 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느리(오틸리에)와 친분이 있던 자기 여동생의 편지를 통해 괴테가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았다. 책 출판을 기념삼아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 1819년(31세)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했다.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다.
  • 1820년(32세)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 시범 강의에서 통과함. 당시 50살이었던 노련한 헤겔이 쇼펜하우어와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다. 강의 계획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만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끝남.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꾼, 대중들의 두뇌를 해치는 넌센스 삼류작가, 철저히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자기 책에서 독일 젊은이들과 자기 세대 사람들이 헤겔의 이론을 공부하느라 인생을 허비했다며 매우 한탄하고 있다. 더군다나 헤겔의 이론은 당대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라는 것을 대학교에서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여겼고 교수들의 파벌 자체를 증오했다.[6]
  • 1822년(34세)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환경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서 배우고 기록했다.
  • 1823년(35세)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옴. 여러 질병과 청각장애를 겪었는데 가장 울적한 시기를 보냈다. 뮌헨에서 겨울을 보냈다.
  • 1824년(36세) 가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덴에서 체류함. 쇼펜하우어는 "멀쩡히 잘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수준이 대등하다고 여기는 인간들과 가급적 사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일기에 쓰며 고독한 심정을 드러냈다. 겨울에 데이비드 흄의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등을 번역할 계획이었으나 도와줄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악평이 좀 나오기도 했으나 작가 장 파울은 "그 가치에 걸맞는 평가를 받지 못한 책"이라고 호평했다.
  • 1825년(37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우울한 나날 속에서 스페인어를 열심히 학습해나갔다. 번역가로서 스페인어책을 번역하기도 함. 언어능력만큼은 나날이 좋아졌는데 예전에 익힌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외에 스페인어에도 매우 익숙해졌다.
  • 1831년(43세)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 1833년(45세)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함. 유행이 지난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애완견을 데리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고 혼잣말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쇼펜하우어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쯤에 쇼펜하우어는 여동생과 어머니와 편지교류를 했고 작품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 1835년(47세)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세상을 떠난 괴테를 위해 기념비 건립 계획을 세웠다. 쇼펜하우어는 당국에 괴테 기념비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전쟁영웅을 위한 조각상이 전신상이라면 괴테는 인류에 머리로 공헌한 사람이므로 흉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완성된 괴테의 전신상 기념비는 매우 볼품없었고 훗날 미술사학자 프란츠는 이 기념비에 대해 '국가적 재앙'이라는 혹평을 내렸다.
  • 1836년(48세) 자연과학이 증명해낸 것과 자신의 학설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진했다.
  • 1837년(49세)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 A판(1판)을 B(2판)판보다 중시하여 칸트전집 출판에 개입했다. 칸트전집 출판에 관여한 로젠크란츠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1판 원고를 실어 출판했다.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기로 결정함.
  • 1838년(50세) 모친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72살의 나이로 사망함.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기로 결정함.
  • 1839년(51세)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함.
  • 1840년(52세)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학술원은 '이 시대의 대단한 철학자들'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함. 이후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판정'이라 취급했고 이 판정에 반론하는 글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헤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 1841년(53세)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함.
  • 1842년(54세) 여동생 아델레를 20년만에 만남.
  • 1844년(56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이 완성됨. 제1권의 재판과 함께 출판함.
  • 1845년(57세)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시작함.
  • 1846년(58세)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를 만나 제자로 지냈는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열혈 추종자다. 특히 법조인들이 열혈팬이 되었는데 이들은 <관념론의 잘못된 근거>에 "세계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번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판사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 1847년(59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 번역을 비판하며 가급적 해설서도 참고하지말고 그 나라 언어를 배워서 원서를 볼 것을 강조한다.
  • 1849년(61세)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남. 여동생 아델레가 사망함.
  • 1851년(63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수 년간 집필한 끝에 출간함.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고 많이 팔려나갔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 1853년(65세)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포드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소개하여 최초로 영국에 쇼펜하우어를 알림. 독일의 여성 언론인 린트나가 이를 다시 독일어로 번역하여 베를린의 포스신문에 발표하였다.
  • 1854년(66세)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겔의 '교수 파벌' 때문에 독일 철학계가 오염되었다고 엄청난 비판을 하며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려는 것은 인생낭비에 불과하니 자신의 사상과 칸트의 사상을 공부하라는 충고를 한다.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40여년 간 독일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기극을 사람들이 눈치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칸트 이후에 등장한 간사한 사기꾼들이 써낸 철학서적들과 한심한 논쟁들을 통해 하나의 진리라도 밝혀졌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하찮은 철학교수라 불렀던 셸링이 사망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겐의 반지'의 헌정본을 보냈다. 쇼펜하우어가 바그너를 알게 됨.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혹평을 받고 냉대받았으나 개의치않고 기뻐했다.
  • 1855년(67세)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를 제시함.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함.
  • 1857년(69세)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본대학교브레슬라우대학교에 개설됨.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이 영국, 프랑스에 번역됨. 쇼펜하우어는 이 시절의 심정을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8년에 이 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 1858년(70세)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가 열렸고 신문 기사에도 생일파티 소식이 실렸다. 유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뒤늦게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 1859년(71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출간됨.
  • 1860년(72세)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사망했다.[7]
1815년 청년기의 쇼펜하우어

사상[편집]

쇼펜하우어는 시간공간 그리고 인과율에 의해서 파악되는 현상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근거율이라고 말한다. 즉 현상세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근거율의 형식들이다. 현상세계의 경험은 오로지 근거율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충분근거율의 내용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근거를 가진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세계는 주관과 관계하는 객관 전체이다. 표상(Vorstellung)의 세계는 주관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이다. 이 표상세계는 경험과 학문의 대상이지만, 근원적인 세계는 아니다. 근거율이 지배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는 필연성이 있지만, 이 필연성은 주관에 의해 제약된 필연성이다. 표상세계를 이루는 근거율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생성·인식·존재·행위의 근거율이 그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표상의지(Wille)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여기서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라 근거율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일 뿐이다. 참된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이다.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물자체의 세계는 곧 의지의 세계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의지라는 것은 신체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신체는 한편으로는 객관화된 것, 즉 표상된 것으로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 자체의 드러남으로서 존재한다. 여기에서 의지와 신체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 의지와 신체는 그것이 드러나는 형식을 통해서만 구분된다. 신체가 표상 즉 객관으로 파악되는 한에서 신체는 근거율에 의해 지배된다. 반면 우리를 신체와 결합된 하나의 개인으로 파악하면 의지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신체가 의지 자체의 드러남이라는 것을 각성할 때 세계의 본질이 파악될 수 있다. 이때 신체의 운동과 의지의 표현 사이에는 어떤 인과적인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는 글을 쓰는 손의 운동과 함께 한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달리 근거율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신체를 개개로 파악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일상어에서의 의지가 아니라 삶의 원리나 에너지로서 유기체와 무기체를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근본적으로 의지를 그 본질로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지는 각각의 사물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객관화의 과정은 의지와 표상의 세계의 관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선 의지가 객관화를 통해서 이념이 되고 이어서 개체화의 원리인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율에 의해서 근거율에 의존하는 표상이 생겨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의 본질도 이러한 의지에 의해서 설명된다고 본다. 인간의 의지는 삶의 의지이다. 이 삶의 의지는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것이다. 항상 만족과 안정을 추구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는 끊임없이 목적지를 찾아 방황한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의 삶은 고통스럽다.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갈증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삶은 권태롭거나 고통스럽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예술적인 관조도덕적인 행위금욕이 그것들이다. 예술적인 관조에서는 주관객관이 엄밀히 분리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인간의 정신은 고양된다. 하지만 이러한 고양은 일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도덕적인 행위에서는 쇼펜하우어는 동정심(Mitleid)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한다. 동정심은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인 이해심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동정심을 통해서 개인은 이기주의적인 입장을 버리게 된다. 이때 동정심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게도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술과 동정심으로는 고통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는 삶에의 의지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의지의 부정은 금욕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금욕은 세계가 표상일 뿐이고 자아도 표상이며 세계 속의 다양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금욕은 세계와 자아는 궁극적으로 (無)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8]

영향[편집]

화가 빌헬름 부쉬가 그린 쇼펜하우어와 푸들.

쇼펜하우어는 철학분야 보다도 그 외의 과학분야, 예술분야에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1852년에 영국존 옥센포드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리뷰> 4월호에 쇼펜하우어 사상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존 옥센포드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등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 쇼펜하우어가 알려졌고,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찰스 다윈같은 영미권 지식인들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했다. '아르투어'는 영어로는 '아서'(Arthur)가 되는데 이것은 사업가였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자 영국친화적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신의 저서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했고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권위적이고 틀에 박힌 것을 깨부수는 개성, 인격이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에머슨은 우파니샤드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1859년에 나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게 무관심했으므로 바그너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1854년에 친구이자 시인인 게오르그 헤르베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갔다. 헤르베크는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번 읽었고 감동받았다.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년 동안 4번이나 통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와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라는 자필 헌사를 보냈으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답장도 바그너에게 보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의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바그너와 함께 관람한 적도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 대해서 '바그너는 음악이 뭔지 잘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평생 동안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다.[9]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에 대해서 자신보다 먼저 쇼펜하우어가 잘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했다.[10]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헤겔의 거만한 문체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탐구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11]

카를 융 자서전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는 문학계일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그리고 독일 작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영미권 작가인 토마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작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는 톨스토이의 친구이자 당시에 러시아어로 쇼펜하우어를 번역한 사람이다. 톨스토이가 친구인 페트 센신에게 보낸 편지는 페트 센신의 저술《추억의 기록》에 들어있는데 이것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쇼펜하우어가 세계의 모든 인간들 중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 생각한다네. 쇼펜하우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세상에 바보들이 많기 때문일 거야'[12]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에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조지 버나드 쇼, 루이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칼 마르크스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전반부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13]


독일 철학자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친구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 전집 출판에 힘을 썼고, 쇼펜하우어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인도철학과 우파니샤드에 대한 연구자로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도이젠은 직접 인도로 여행을 갔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도이젠은 플라톤, 칸트, 인도철학, 쇼펜하우어에 대한 저서를 남겼고 학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14]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 속하는 19세기 전반에 쇼펜하우어는 무시 당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는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20세기 전반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난해하다고 무시되기도 했고, 일부 철학 교사들조차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세기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에게 명백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15][16]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 쇼펜하우어찰스 다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17] 칼 포퍼는 에르빈 슈뢰딩거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책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어가 지은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는 웬만한 철학서적은 대부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책을 읽다가 칸트순수이성비판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저서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칸트의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은 자신이 태어나서 최초로 진지하게 읽고 공부한 두꺼운 철학서적이라고 말했다.[18]

에피소드[편집]

쇼펜하우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로베르트 호른슈타인이라는 음악가가 1855년에 쇼펜하우어 자택을 방문했다. 이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회상》이라는 책을 남겼다. 호른슈타인은 이 책에서 스승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호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다른 예술가나 예술분야의 권위자들을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 때였다. 여류 소설가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동네 주민들에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청년시절부터 입어 온 유행이 지난 외투를 입고 다녔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모습과 쇼펜하우어의 애완견인 푸들 '아트만'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항상 이런 식의 차림으로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며 산책을 했다. 칸트의 성실한 산책 이야기가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듯이 애완견과 같이 산책하는 쇼펜하우어의 모습이 마치 인격이 좋은 주인과 충직한 애완견처럼 보여서 유명해졌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왠만하면 평안한 기분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산책을 꼬박꼬박 했다. 쇼펜하우어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닐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걷던 동네 주민들은 가끔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매일 점심밥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피안》에서 쇼펜하우어와 플루트에 대해서 언급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 사실은 쇼펜하우어가 청년 시절부터 악보를 술술 읽고 모차르트 음악 연구에 몰두한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음악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음악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그너는 베토벤 기념 논문인 '베토벤'에서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문학이나 조형예술 등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명쾌하게 음악이 다른 예술분야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이렇게 썼다'


엘리자베스 네이가 만든 흉상. 1859년 제작.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쇼펜하우어 흉상.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이라는 말과 쇼펜하우어의 '고뇌'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년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일기 속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감격적인 글들이 남아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순간》이라는 책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 맹목적인 낙천주의, 근대과학의 오만함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키에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공통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기 2년 전에, 그러니까 1853년 정도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50년대 중반의 일이다. 독일 브레슬라우대학교의 켈바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자연과학의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쇼펜하우어에 대한 비평과 책들이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쇼펜하우어 책의 일부가 편역되어 떠돌았고 프랑스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적 보다는 통속적이고 명쾌한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는 '여록과 보유'라는 책이 더 인기를 끌었다. 쇼펜하우어의 자택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도 이 시기에 쇼펜하우어를 방문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존경과 칭찬의 편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사람도 꽤 있었다. 1858년에는 쇼펜하우어의 70살 생일 잔치가 열렸고 이 때에 쇼펜하우어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절친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괴테의 며느리였던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책 출판에 대한 축하 편지를 썼다.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여동생과도 친했고 쇼펜하우어가 젊었을 때부터 괴테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를 응원해준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 편지를 받고 오틸리에 괴테에게 감격에 찬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법률고문관으로 재직한 프리드리히 드루그트는 쇼펜하우어의 논문과 저서들에 감격하여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수제자가 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는 쇼펜하우어 사후에 유고를 정리하여 《토론의 법칙》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쇼펜하우어 전집을 출판했다. 사법관이었던 아담 도스라는 사람은 어린 나이인데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쇼펜하우어 화강암 무덤

쇼펜하우어와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변호사 빌헬름 그비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격하여, 먼저 찾아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쇼펜하우어와 친해진 사람이었다.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의 유언을 집행했고 쇼펜하우어 집안의 유산을 유언에 따라 잘 처리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평한 화강암을 이용해 묘비를 만들어 줄 것을 생전에 희망했고 묘비에다가 자신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적지마라고 말했다. 이후에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전기를 최초로 쓰기도 했다. 이 시기에 여류 조각가 엘리자베스 네이가 찾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대리석으로 만들 흉상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 흉상을 보고 쇼펜하우어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 흉상의 진품은 현재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시의 네이미술관에 있다.[19]

주요 저서[편집]

  •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 철학 박사 논문.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가 의도하는 것은 칸트의 이성비판이 이룬 결과가 헤겔같은 철학교수들에 의해 왜곡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리고 당대의 유행하던 철학사조를 강력히 비판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오류를 범한 점을 지적하며 칸트의 오류를 보완하는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철학적 의도를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II. - 쇼펜하우어의 철학 주저.
  • 《윤리학의 두 가지의 근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der Ethik) -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이 두 논문을 묶어 출판된 것임.
  •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 - 한국에서 '인생론' 등의 이름을 달고 일부가 번역되어 출판되는 책이다. '소품과 부록' 이라고 불리기도 함. 외국에서도 "삶의 지혜" 라는 식의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하며 소책자나 편역본으로 주로 출판되고 있다. 온갖 유머와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고 인생에 대한 격언이 명쾌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어권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최고급 산문이자 탁월한 문학적 글쓰기로 평가받는다.
  •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 (Über das Sehen und die Farben)
  •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Ueber den Willen in der Natur) 당대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빠짐없이 기술했고 그 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으로 평가받는다.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칸트의 인간학이나 프리드리히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20]
  • 토론의 법칙》(Der handschriftliche Nachlass 라는 유고 중 일부이며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편집하여 출판했다. 한국어 제목은 출판사 임의로 지었음) -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비난하며 인격이 저열한 사이비철학자 등의 간사한 주장 방식을 간파하는 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했다. "실제 토론에서 상대의 터무니없는 주장 방식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 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국내에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토론의 법칙' 등의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유고집은 분량이 꽤 상당하며 아르투르 휩셔가 편집하여 총 5권으로 출판한 바가 있다.[21]

한국어 번역서[편집]

  •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나남출판, 2010. - 김미영의 역서는 모두 완역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5. - 2015년에 부록이 추가되어 개정판으로 나왔다.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아카넷, 2012.
  •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김미영 옮김. 책세상, 2004.
  •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최성욱 옮김. 원앤원북스. 2016.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09. - 일부만 번역된 편역본이다.

기타 서적[편집]

한국에 쇼펜하우어의 바이오그라피가 아직 소개된 바는 없으나 해외 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Cartwright, David. Schopenhauer: A Biogra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ISBN 978-0-521-82598-6
  • Frederick Copleston, Arthur Schopenhauer, philosopher of pessimism (Burns, Oates & Washbourne, 1946)
  • O.F.Damm, Arthur Schopenhauer – eine Biographie, (Reclam, 1912)
  • Kuno Fischer, Arthur Schopenhauer (Heidelberg: Winter, 1893); revised as Schopenhauers Leben, Werke und Lehre (Heidelberg: Winter, 1898).
  • Eduard Grisebach, Schopenhauer – Geschichte seines Lebens (Berlin: Hofmann, 1876).
  • D.W. Hamlyn, Schopenhauer,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0, 1985)
  • Heinrich Hasse, Schopenhauer. (Reinhardt, 1926)
  • Arthur Hübscher, Arthur Schopenhauer – Ein Lebensbild (Leipzig: Brockhaus, 1938).
  • Thomas Mann, Schopenhauer (Bermann-Fischer, 1938)
  • Matthews, Jack, Schopenhauer's Will: Das Testament, Nine Point Publishing, 2015. ISBN 978-0985827885. A recent creative biography by philosophical novelist Jack Matthews.
  • Rüdiger Safranski, Schopenhauer und die wilden Jahre der Philosophie – Eine Biographie, hard cover Carl Hanser Verlag, München 1987, ISBN 978-3-446-14490-3, pocket edition Fischer: ISBN 978-3-596-14299-6.
  • Rüdiger Safranski, Schopenhauer and the Wild Years of Philosophy, trans. Ewald Osers (London: Weidenfeld and Nicolson, 1989)
  • Walther Schneider, Schopenhauer – Eine Biographie (Vienna: Bermann-Fischer, 1937).
  • William Wallace, Life of Arthur Schopenhauer (London: Scott, 1890; repr., St. Clair Shores, Mich.: Scholarly Press, 1970)
  • Helen Zimmern, Arthur Schopenhauer: His Life and His Philosophy (London: Longmans, Green & Co, 1876)

각주[편집]

  1. 쇼펜하우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2. Mein Glaubensbekenntnis (1932년 8월): "I do not believe in free will. Schopenhauer's words: 'Man can do what he wants, but he cannot will what he wants,[Der Mensch kann wohl tun, was er will, aber er kann nicht wollen, was er will]' accompany me in all situations throughout my life and reconcile me with the actions of others, even if they are rather painful to me. This awareness of the lack of free will keeps me from taking myself and my fellow men too seriously as acting and deciding individuals, and from losing my temper." Schopenhauer's clearer, actual words were: "You can do what you will, but in any given moment of your life you can will only one definite thing and absolutely nothing other than that one thing." [Du kannst tun was du willst: aber du kannst in jedem gegebenen Augenblick deines Lebens nur ein Bestimmtes wollen und schlechterdings nichts anderes als dieses eine.] On the Freedom of the Will, Ch. II.
  3. “John Gray: Forget everything you know — Profiles, People” (영어). The Independent. 2002년 9월 3일. 2010년 4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3월 12일에 확인함. 
  4. Cate, Curtis. Friedrich Nietzsche. Chapter 7.
  5.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박은미 역, 2016, 쇼펜하우어 파트
  6. 토론의 법칙, 최성욱 역 참조. 해설:쇼펜하우어는 "대중을 현혹하는 협잡꾼 헤겔과 그 일당"이라는 식으로 매번 비난했다.
  7.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역, 2015, 연보 참조
  8.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역, 2015.
  9. 브라이언 매기, 트리스탄 코드, 김병화 역, 2005, '8장 바그너, 쇼펜하우어를 발견하다' 부분 참조.
  10.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
  11. 카를 구스타프 융, 기억 꿈 사상(자서전), 조성기 역, 김영사, 133쪽~134쪽
  1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역, 생애 해설 참조.
  13.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 영향에 대한 설명 참조.
  14. 랄프 비너,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 최흥주 역, 해설 부분 참조.
  15.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284쪽, 브라이언 매기의 말
  16. The Philosophy of Schopenhaur,Oxford, 1983
  17. 칼 포퍼, 끝없는 탐구, 박중서 역, 20쪽.
  18. 칼 포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147쪽.
  19.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07, 권기철 역, 생애 해설 에피소드 참조.
  20.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2012, 김미영 역.
  21.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최성욱 역.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