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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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는 독일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이다.

함부르크 출생. 오스트리아 에서 음악가로서 주로 생활했고 낭만주의 음악을 선도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일생 높은 인기와 영향력이 있었으며, 19세기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더불어 "3B"로 칭하기도 했다.

여러 피아노 곡, 실내악, 교향악, 성악, 합창곡을 작곡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자신의 여러 작품을 초연했고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과 함께 당대 뛰어난 연주자였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여러 작품은 현대 음악회에서도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1]이다. 완고한 완벽주의자였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수많은 자신의 작품을 없애거나 출판하지 않기도 했다.[2]

요하네스 브람스는 전통주의자이자 혁신자였다. 악곡의 형식이나 작곡 기법면에서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로크 음악고전파음악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대위법의 대가였다. 이런 구조와 함께 요하네스 브람스는 화성음색을 대상으로 한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도로 당대 조성 음악의 개념을 변치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업적과 기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에서 에드워드 엘가에 이르기까지 후대 여러 음악가가 찬탄하는 대상이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은 결국 조성을 버리게 되는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위시해 한 세대의 음악가군의 시작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 중에서 보수 경향이 꽤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은 고전파다운 양식 위에 서서 중후하고 북독일다운 맛이 있으며 아름다운 서정성도 잃지 않는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작곡한 교향곡 4개는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걸작으로 그중에서 교향곡 1번베토벤의 제9에 이어지는 제10 교향곡이라고 할 만큼[3] 베토벤에게 영향받으면서 자신의 독자 세계를 쌓아올린 뛰어난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도 놀랄 만한 완성도에서 베토벤의 곡 다음에 놓일 만한 가치가 있다. 피아노 음악에서도 피아노 연주에 적합한, 화려한 기교를 배격하고 중후한 작품을 작곡하였다. 피아노 협주곡 두 개는, 피아노가 관현악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데에 특색이 있다. 독주곡에서는 <파가니니 변주곡>(1863), <헨델 변주곡> 등이 뛰어났고 연탄용 (連彈用)인 <헝가리 무곡>은 특히 유명하다. 실내악에도 특필할 만한 작품이 많은데 <클라리넷 5중주곡>이 많이 연주된다. <대학 축전 서곡>, <비극다운 서곡>도 많이 알려져 있다. 가곡에서도 요하네스 브람스는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중후하고 교묘한 화성은 가까이하기 약간 어렵지만, <알토 랩소디>를 위시해 완상 (惋慯)을 담은 명작이 많고 마지막엔 종교에 딸린 심각한 <독일 레퀴엠>(1866-1869)을 들 수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암담하고 우울한 심도가, 여기에서는 다듬어진 일본어: ()정화 (淨化)하고 모든 사람을 감명하게 하는 숭고에 이른다.

생애[편집]

유년기[편집]

요하네스 브람스의 아버지인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도시 음악가가 되고자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에서 함부르크로 왔다. 여러 악기에 능했지만, 호른이나 더블베이스를 주로 연주한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자신보다 17살 위인 재봉사 요한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니센과 혼인했다. 처음 6개월간 그 부부는 도시 부두와 가까운 갱에피어텔[4] 구역에 달았고 그 후 내부 알스터에 함부르크 북부 근교에 있는 담토르발[5]에 소재한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태어난 함부르크 생가. 1891년의 사진. 요하네스 브람스의 가족은 1층의 왼쪽 두 창문이 있는 방에서 살았다.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아들의 첫 음악 교습을 맡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7살 때 오토 프리드리히 빌리발트 코셀과 피아노를 배웠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10대 초기에 더러운 술집에서 피아노를 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회자되었지만, 최근 요하네스 브람스를 연구하는 쿠르트 호프만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요하네스 브람스 본인이 이렇게 이야기했기에 어떤 사람들은 호프만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6][7]

요하네스 브람스는 오토 코셀에게 피아노를 일본어: 수업 (受業)하고서 에두아르트 마르크센과 피아노를 배우게 되는데 그 사람은 슈베르트일본어: 교우 (膠友)인 칼 마리아 폰 보클렛과 모차르트의 제자인 이그나츠 폰 제이프리트와 에서 동문수학한 사람이다. 어린 요하네스 브람스는 함부르크에서 연주회를 몇 회 연적이 있으나 19세에 연주 여행하기 전까지는 피아니스트로서 그리 잘 알려지진 못했다. 나중에 자신의 작품을 자주 독주나 반주하거나 실내악 멤버로서 직접 연주하기도 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1859년에 피아노 협주곡 1번을, 1881년에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직접 초연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10대 초부터 합창단을 지휘하여 합창이나 오케스트라 지휘에 능숙해졌다.

요아힘과 리스트를 만나다[편집]

요하네스 브람스는 매우 어린 나이에 작곡을 시작했으나 나중에 자신의 초기 여러 작품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가령 마르크센의 친구이자 제자인 루이제 야파는 브람스가 11살에 연주했다거나 즉흥으로 피아노 소나타가 있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1853년 4월과 5월에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트 레메니의 반주를 맡아 연주 여행할 때까지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은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이 여행 중 하노버에서 요하네스 브람스는 요세프 요아힘과 만나고 바이마르 궁정에서 프란츠 리스트, 피터 코르넬리우스, 요아힘 라프를 만난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프란츠 리스트와 만났다는(그때 프란츠 리스트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스케르초 Op.4를 초견으로 연주했다) 몇몇 증언으로는, 레메니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프란츠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 작품을 그리 칭찬하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고 하고[8] 그 후 그 사람들은 헤어졌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당시 여행으로 지쳐 어쩔 수 없었노라고 나중에 변명하기도 했다.

1853년의 브람스

브람스와 슈만[편집]

요아힘은 로베르트 슈만에게 요하네스 브람스 소개장을 보냈다. 라인란트의 연주 여행을 끝내고 요하네스 브람스는 기차를 타고 뒤셀도르프로 가 그곳 로베르트 슈만 집안에서 환대받았다. 로베르트 슈만은 이 20세 청년의 재능에 놀라 1853년 10월 28일 음악신보[9]새로운 길[10]이라는 제목의 기고를 올려 대중에게 요하네스 브람스를 "이 시대의 사유 가능한 범위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간주되는 표현을 가져다 줄" 젊은이로서 소개하여 관심을 환기했다.."[11] 이 발표는 로베르트 슈만의 지인 모임 바깥에서 비난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작품과 기술을 완벽하게 만들려던 요하네스 브람스의 타고난 성품의 성격이 있는 자기비판을 강화하게 했으리라. 뒤셀도르프에 있는 동안 요하네스 리스트는 로베르트 슈만과 알베르트 디트리히와 함께 요아힘을 목적한 소나타를 작곡하게 되는데 이것이 F-A-E 소나타이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인 작곡자 겸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과 가까워졌는데 14살 연상인 클라라 슈만에 평생 플라토닉한 연정 일종을 품고 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몇몇 여자와 진한 정분이 있었고 1859년에는 괴팅겐의 아가테 폰 지볼트와 약혼까지 이른 적도 있었으나 이내 파혼하여 평생 혼인하지 않았다.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을 시도하고 1854년 2월 근처의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요하네스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과 로베르트 슈만의 중개자가 되었고 슈만 집안을 돌보았다.

데트몰트와 함부르크[편집]

1856년 로베르트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죽고서 시간을 쪼개 자신이 창단하여 지휘하던 여성 합창단이 있던 함부르크와 궁정 음악 교사이자 지휘자로 봉직하던 데트몰트 공국 두 곳에서 일하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1862년 을 처음 방문하여 겨울 내내 체재하다가 1863년 빈 음악 학원[12]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 요하네스 브람스는 사직하고 다른 지휘자 자리를 알아보게 되었지만, 빈에서 살면서 이곳이 점차 자신의 집이 되었다. 1872년에서 1875년 사이 빈 악우협회의 연주회 감독을 지냈고 그 뒤로는 공식 직위가 없었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187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명예박사학위를 거절했으나 1879년 브레슬라우 대학의 학위는 받았다. 대학축전 서곡은 그 감사의 표시로서 작곡한 작품이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1850년대와 1860년대 내내 꾸준히 작곡했으나 양분된 비평받았으며,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초기 몇몇 공연에서 혹평받았다. 리스트와 리하르트 바그너를 위시한 "신독일 악파"에서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을 구시대 유형으로 치부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그너의 음악 몇몇 작품에 감복했고 프란츠 리스트를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인정했으나 브람스파와 바그너파로 갈려 갈등했으며, 이 대립이 유럽 전역의 음악계로 퍼져 나갔다. 브람스파로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친우들인 클라라 슈만, 음악계 명사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빈의 외과의사 테오도르 빌로트가 있었다. 1860년 요하네스 브람스는 그 사람들 음악의 과도성을 대상으로 해 강령 형태로 요아힘과 함께 반박문을 올렸으나 이 반박문은 너무 일찍 발간하여 세 명의 지지 서명밖에 얻지 못해 실패한 후로 요하네스 브람스는 대중 논쟁에 다시는 끼지 않았다.[13]

인기 있던 시절[편집]

1868년 브레멘에서 요하네스 브람스의 최대 합창곡 작품인 독일 레퀴엠의 초연이 있었는데 이로써 요하네스 브람스는 전 유럽에 명성을 얻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요하네스 브람스가 로베르트 슈만의 예언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덕분에 요하네스 브람스는 용기를 얻어 오랜 세월 씨름하던 칸타타 리날도, 첫 현악 4중주, 세 번째 피아노 4중주, 또 가장 유명한 교향곡 1번을 위시해 여러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요하네스 브람스 교향곡 1번은 1876년에 나왔지만, 1860년대 초부터 시작한 작품이었다.(요하네스 브람스 몇몇 친구가 이 시기에 제1악장의 내용을 보았다고 한다) 다음 교향곡 2,3,4번은 각각 1877년, 1883년, 1885년에 완성되었다. 1881년부터 요하네스 브람스는 당시 한스 폰 뷜로가 지휘자로 있던 마이닝엔 공작의 궁정 교향악단을 목적한 새 교향악 작품에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연주하거나 즐거워 하려고 자주 여행했다. 1878년부터 요하네스 브람스는 봄에 이탈리아를 자주 방문했고 보통 여름에 작곡할 전원 속의 장소를 찾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많이 산책했고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정신을 맑하기를 좋아했다.

1889년 발명자 발굴을 이용해 돈을 버는 토머스 에디슨이 보낸 테오 방게만(독일어: Theo Wangemann)이 빈에 있던 요하네스 브람스를 방문하여 실험 녹음을 권유했다. 여기서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의 피아노 곡 첫 헝가리무곡의 축약본을 연주했다. 이 녹음은 나중에 LP판으로 나왔다. 앞부분에 이 작품을 소개하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육성은 꽤 깨끗하지만, 피아노 연주 소리는 잡음이 심해 잘 들리지 않지만, 이것은 주요 음악가가 남긴 최초 녹음이 되었으나 분석자들과 학자들 사이에 이 녹음의 육성의 주인이 요하네스 브람스인지 테오 방게만인지 논란이 있다.[14]

1889년 요하네스 브람스는 함부르크의 명예 시민으로서 선정되었는데 1948년까지 명예 시민이 된 사람은 요하네스 브람스밖에 없었다.[15]

빈 첸트랄프리드호프(중앙 묘지)에 있는 브람스의 무덤.

명예박사학위[편집]

말년[편집]

1890년 57세에 작곡을 포기하기로 결심하나 생각을 고쳐 죽기 몇 년 전에 수많은 명작을 내놓은 요하네스 브람스는 마이닝엔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네티스트 리하르트 뮐펠트에 감탄하여 클라리넷 3중주 Op.114, 클라리넷 5중주 Op.115(1891년), 두 클라리넷 소나타 Op.120(1894년)를 작곡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피아노 곡 Opp.116~119와 네 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änge) Op.121(1896년), 11개의 코랄 전주곡 Op.122(1896년)도 썼다.

Op.121 곡을 완성할 때 요하네스 브람스는 암에 걸렸다.[16] 요하네스 브람스의 상태는 점차 나빠져 1897년 4월 3일 서거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빈의 첸트랄프리드호프에 안장됐다.

음악[편집]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편집]

요하네스 브람스는 세레나데, 교향곡 네 곡, 피아노 협주곡 두 곡, 바이올린 협주곡 한 곡, 바이올린과 첼로 이중 협주곡 한 곡, 관현악 서곡(대학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 등 수많은 관현악 작품을 남겼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합창 대작 독일 레퀴엠은 전례상 일본어: 장송 미사 (葬送 missa)[17]의 내용이 아니라 요하네스 브람스가 기독교 루터 성서에서 고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일생에서 세 번에 걸쳐 작곡되었다. 2악장의 초기 판본은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한 지 얼마 안된 1854년에 작곡한 것으로, 나중에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쓰였다. 레퀴엠의 대부분은 1865년 어머니 사후에 작곡하였다. 5악장은 1868년 공식 초연 이후에 덧붙인 것으로, 작품은 1869년에 출판하였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변주곡 작품으로는 헨델 주제에 따른 변주곡과 푸가, 파가니니 변주곡[18]하이든 주제에 따른 변주곡[19]이 있다. 교향곡 4번의 마지막 악장은 형식상 파사칼리아이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실내악곡으로는 현악 4중주 세 곡, 현악 5중주 두 곡, 현악 6중주 두 곡, 클라리넷 5중주, 클라리넷 3중주, 호른 3중주, 피아노 5중주, 피아노 4중주 세 곡, 피아노 3중주 네 곡[20]이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피아노가 반주하는 독주 소나타도 많이 썼는데 바이올린 소나타 세 곡, 첼로 소나타 두 곡, 클라리넷 소나타 두 곡[21]이 있다. 또 피아노 독주곡으로는 초기의 피아노 소나타와 발라드에서 나중의 소품일본어: ()을 위시해 다양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가곡에서도 중요한 작곡가로서 200곡이 넘게 작곡했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죽기 직전에 쓴 오르간 합창 전주곡 Op.122는 오르간 주자의 중요한 연주곡목이기도 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음악에서 특정한 묘사나 이야기를 배제하는 절대 음악을 신봉했고 오페라교향시를 전혀 쓰지 않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크고 복잡한 음악 구성을 보이는 진지한 음악가라고 흔히 평받지만, 요하네스 브람스 생전에 유명해져 상업상 성공한 일부 작품 중에는 대중의 기호에 맞게 당대 번성하던 음악 시장에 적합한 곡도 있다. 20세기 미합중국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 B.H. 하긴은 요하네스 브람스을 대상으로 한 일반스러운 평가를 거부하고 자신의 여러 녹음 음악 안내서에서 요하네스 브람스는 그러한 작품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규모가 더 크고 진지한 음악에서는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쓴 이런 류의 가벼운 곡으로는 춤곡집[22] 등이 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자장가'는 친구 베르타 파버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려고 썼다.

양식[편집]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의 작품에 고전파의 형식과 질서를 담아내어 당대 여러 화려한 음악과 대조되어 요하네스 브람스를 바람직하게 평가한 사람들은 신독일 악파의 표제 음악과 대비하여 요하네스 브람스를 전통 형식과 "순수 음악"의 대가로서 간주했다.

베토벤을 숭상한 요하네스 브람스의 집에는 베토벤의 대리석 흉상이 요하네스 브람스가 작곡하던 곳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에서 일부 악절에서는 베토벤의 양식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의 4악장 주요 주제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피날레 주제와 닮았고 요하네스 브람스도 그런 유사성을 대상으로 해 아무리 일본어: 멍청이 (jeder Esel)라도 이 점을 알 수 있다고 스스로 지적하였다[23].

독일 레퀴엠은 어느 정도는 1865년 어머니의 사망에서 영감을 얻은 일변으로 1854년에 작곡을 시작하다가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을 시도한 후 포기한 어느 교향곡 초고에서 내용을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한때 "슈만의" 레퀴엠을 쓰기도 하였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포기한 이 교향곡 작품의 첫 악장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악장으로 쓰였다.

고전파 음악 작곡가인 모차르트하이든도 좋아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이들 작품의 친필 악보나 첫 판을 수집하였고 편집하기도 하였으며 조반니 가브리엘리, 요한 아돌프 하세, 하인리히 쉬츠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위시해 고전파 이전 작곡가의 음악도 연구하였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친구로 탁월한 음악학자들도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크리산더와 함께 요하네스 브람스는 프랑수아 쿠프랭의 작품 판본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엄격한 대위법 기술에서 영감을 얻고자 옛 음악을 검토하였는데 요하네스 바름사의 작품 가운데 일부 주제는 바로크 음악에서 본뜬 것도 있다. 예컨대 브람스 첼로 소나타 1번의 푸가로 된 피날레는 바흐 작품 푸가의 기법을 참조하였고 브람스 교향곡 4번 4악장의 파사칼리아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칸타타 150번에 영향받은 것이다.

젊은 요하네스 브람스를 격려해 준 로베르트 슈만을 위시해 초기 낭만파 음악가들도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로베르트 슈만클라라 슈만과 자주 만나기도 하였다. 1862년에서 1863년 에 체제할 적에 요하네스 브람스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음악에 특히 관김했다.[24] 프란츠 슈베르트의 영향은 이 시기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인 피아노 4중주 Op.25와 Op.26 그리고 슈베르트 현악 5중주대 2중주가 암시된 피아노 5중주에서 드러난다.[25][24] 어떤 사람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에서 쇼팽멘델스존의 영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람들이 요하네스 브람스에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예컨대 요하네스 브람스의 스케르초 Op.4는 쇼팽 스케르초 B-flat단조,[26] 그리고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는 멘델스존 피아노 3중주 C단조를 암시한다[27]는 식이다.)

성격[편집]

베토벤처럼 자연을 좋아하여 빈 교외 숲에서 자주 산책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둬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성인 요하네스 브람스는 종종 무뚝뚝하거나 냉소했고 때론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제자 구스타프 예너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불평쟁이 평판을 듣는 데는 이유가 있으며 요하네스 브람스를 매력 있게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28]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에 있는 술집 "붉은 고슴도치"에 날마다 드나드는 것처럼 빈의 언론이 보도한 예상할 만한 습관이 있어서 언론에서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등짐을 지고 걷는 모습을 요하네스 브람스가 붉은 고슴도치 술집으로 걸어가는 캐리커처로 묘사하기도 했으나 요하네스 브람스의 친구로 남은 사람들은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충실했고 요하네스 브람스도 이들에게 성실히 대했고 관대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매우 다른 유형의 작곡가였지만, 그 사람와 평생지기였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1897년 사세를 앞두고 빈에 소재한 빈 극장에서 초연하는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이성의 여신에 가려고 하기도 했다. 아마 요하네스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왈츠를 쓰는 데 무언가 돕겠다고 쓴 글이리라. 요하네스 브람스가 슈트라우스와 안면을 트게 되었을 때 슈트라우스의 아내 일본어: 아델레 (Adele)가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팬이라면서 사인을 부탁하자 요하네스 브람스는 "푸른 도나우" 왈츠의 음표 몇 개를 쓰고는, "슬프게도 (이건) 브람스의 작품이 아니다!"라고 썼다.

1860년대부터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은 널리 팔려, 요하네스 브람스는 재정상 대성공하지만, 방 셋짜리 아파트에 하녀 한 명을 둔, 검소한 생활을 좋아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친척에게 많은 돈을 썼고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젊은 음악가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극도에 도달한 완벽주의자인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의 레메니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가 연주한 바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위시해 초기의 여러 작품을 없애 버렸고 1873년 첫 공식 현악4중주곡이 나오기 전에 20곡의 현악4중주곡을 없앴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수 년간 곡을 고친 끝에 요하네스 브람스는 당초 D단조 교향곡으로 쓸 곡을 자신의 첫 피아노 협주곡으로 바꾸기도 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세밀성을 현로하는 다른 예로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인데 이 곡은 약 1861년부터 1876년까지 거의 15년이 걸려서 쓴 곡이다. 이 곡을 몇번 연주한 후 요하네스 브람스는 악보가 출판되기 전에 원래의 느린 악장을 없애고 새로 악장을 썼다.[29] 요하네스 브람스가 완벽주의자가 된 한 가지 이유로는 초기에 로베르트 슈만이 요하네스 브람스를 베토벤에 버금갈 음악가로서 평가한 것 때문이기도 한데 이 예언으로 요하네스 브람스는 베토벤을 따라 잡고자 매진하게 되었다. 로베르트 슈만의 예언에 요하네스 브람스는 거의 자신감을 얻지 못했고 아마 이 때문에 첫 교향곡 완성을 늦춘 듯하나 클라라 슈만은 그 전부터 교향곡 1번이 요하네스 브람스의 진짜 성격을 반영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클라라 슈만은 초고에서 본 어둡고 맹렬한 1악장에 매료되었기에 활기찬 마지막 악장이 "너무 화려하다"고 느꼈으나 클라라 슈만은 교향곡 2번을 인정하여 자신의 생각을 거두었는데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자주 들을 수 있고 요하네스 브람스의 밝은 작품이지만, 당대 다른 사람들은 1악장이 특히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교향곡 2번을 19세기의 우수 감정과 연관지어 연구했던 라인홀트 브링크만가 출판한, 요하네스 브람스가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빈첸츠 라히너에 보낸 편지에서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의 성격에 우울한 면이 있고 1악장에서 그런 성격이 반영되었다고 쓴 바 있다.

주석[편집]

  1. repertory;음악가나 극단이 무대에서 공연 가능하게끔 준비한 곡목이나 연극 제목 목록.
  2. Alex Needham (2012), Brahms piano piece to get its premiere 159 years after its creation The Guardian
  3. Schonberg, Harold C. 《The Lives of the Great Composers》 Revised판. W. W. Norton & Company, New York, London. 298쪽. 
  4. Gängeviertel.
  5. Dammtorwall.
  6. Kurt Hoffman, Johannes Brahms und Hamburg (Reinbek, 1986) (in German: includes detailed refutation of the traditional story of Brahms playing piano in brothels, using the writings of those who knew the young Brahms, as well as evidence of the Hamburg's close regulation of those places, preventing the employment of children)
  7. Swafford, Jan. “Did the Young Brahms Play Piano in Waterfront Bars?”. 《19th-century Music》. Vol. 24 (No. 3). pp. 268–275쪽. doi:10.1525/ncm.2001.24.3.268. 200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8. 요하네스 브람스는 이 작품을 연주할 때 졸고 있었던 듯하다.
  9. Neue Zeitschrift für Musik.
  10. Neue Bahnen
  11. “Robert Schumann's Artikel Neue Bahnen”. 2007년 10월 30일에 확인함. 
  12. Singakademie
  13. Swafford, Johannes Brahms, pp 206-211
  14. J. Brahms plays excerpt of Hungarian Dance No. 1 (2:10) - 유튜브
  15. Stadt Hamburg Ehrenbürger Retrieved on June 17, 2008
  16. 출처에 따라 간암 혹은 췌장암이라고 한다.
  17. Missa pro defunctis.
  18. 둘 다 피아노 독주.
  19. 피아노 연탄곡과 관현악용 두 판본.
  20. 4번은 Op. 번호가 없다.
  21. 이 두곡은 본인이 비올라 소나타로 편곡하였다.
  22. 헝가리 춤곡 왈츠 Op.39 피아노 연탄곡, 성악 4중창과 피아노의 '일본어: 사랑의 노래 왈츠 (Liebeslieder Waltzes), 몇몇 성악 작품('일본어: 자장가 (Wiegenlied) Op.49 4번이 유명하다. 1868년 출판.
  23. Symphony No. 1 in C minor, Op. 68. The Kennedy Center, 2006
  24. James Webster, "Schubert's sonata form and Brahms' first maturity (II)", 19th-century Music 3(1) (1979), pp. 52-71.
  25. Donald Francis Tovey, "Franz Schubert" (1927), rpt. in Essays and Lectures on Music (London, 1949), p. 123. Cf. his similar remarks in "Tonality in Schubert" (1928), rpt. ibid., p. 151.
  26. Charles Rosen, "Influence: plagiarism and inspiration", 19th-century Music 4(2) (1980), pp. 87-100.
  27. H. V. Spanner, "What is originality?", The Musical Times 93(1313) (1952), pp. 310-311.
  28. Brahms as Man, Teacher, and Artist
  29. 원래 느린 악장을 추측하여 복원한 판본을 로버트 파스칼이 출판한 바 있다.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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